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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하라 다이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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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노하라 다이노신은 지쿠고 국 출신의 무사로, 검술과 유술을 연마했으며, 구루메 번에서 무술을 배우고 료이신토류 유술을 익혔다. 에도 막부 말기에는 존왕양이 사상에 영향을 받아 신센구미에 가맹하여 감찰 및 유술 사범으로 활동했다. 이후 이토 가시타로를 따라 고료에지를 결성했으나, 아부라노코지 사건으로 신센구미에게 습격당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하타 린신'으로 개명하고, 보신 전쟁에서 활약했으며, 탄정대 소순찰과 오쿠라성 조폐사 감찰역을 역임했다. 만년에는 기독교에 귀의했으며, 실업가로 활동하다가 191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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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하라 다이노신

2. 생애

시노하라 다이노신은 지쿠고 국우키하 군 다카미 마을(현재의 우키하시우키하마치 다카미)의 호농이자 석공업자였던 시노하라 겐스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어릴 적부터 무예를 좋아하여, 구루메번의 모리 헤이에몬과 소우텐류 창술 사범에게 창술검술을 배웠다.[1] 고카 2년(1845년), 료이신토류 유술 사범인 시모사카 고로베에게 유술을 배웠다.[1]

가에이 5년(1852년), 번사 오구라 가즈노신을 섬긴 후, 가로 아리마 우콘의 주간이 되었다.[1] 안세이 4년(1858년), 아리마의 에도 번저 근무에 따라 상경하여, 호쿠신잇토류를 배웠다.[1] 사쿠라다몬 밖의 변의 영향을 받아, 다음 달에 번저를 탈출하여 존왕양이의 뜻을 품고 미토에 머물렀다.[1] 분큐 원년(1861년), 에도의 요신류 유술 사범 도츠카 히코스케의 밑에 잠복한 후, 하타모토(강무소 유술 사범)인 구보다 시게카츠의 밑에 머물며 대양이론의 영향을 받았다.[1] 이듬해 분큐 2년(1862년), 오사카교토에서 존양지사와 교류한 후, 여러 나라를 순회했다.[1]

분큐 3년(1863년), 가나가와 봉행소의 정번역 머리 취급이었던 구보다 시게카츠를 따라, 동 봉행소에 고용되어, 요코하마의 외국인 거류지 경비를 담당했다.[1] 이 무렵, 핫토리 다케오와 가노 와시오, 사노 시메노스케 등과 교유를 맺었다.[1] 같은 해 10월, 영국인 3명이 세관에 난입했기 때문에, 묶어 해안에 방치하는 등의 폭행 사건을 일으켜 에도로 잠복했다.[1] 이 무렵, 이토 가시타로와 교유를 맺었다.[1]

겐지 원년(1864년) 10월, 이토와 미키사부로 등 총 7명으로 신선조 가맹을 전제로 상경.[1] 시노하라는 신센구미에서 감찰 직책 겸 유술 사범을 맡았다.[1] 1864년에 금문의 변을 비롯하여 1865년 7월의 나라 사건 등을 통해 명성을 얻었다.[1] 곤도 이사미와 이토에게 중용되어, 게이오 2년(1866년)의 조슈 정벌 후의 신문사 중 한 명으로 히로시마로 내려갔다.[1]

게이오 3년(1867년) 3월, 이토 가시타로가 신센구미에서 탈퇴하여 고료에지를 결성할 때 같이 탈퇴하였다.[1] 얼마후 아부라노코지 사건이 발생하여, 아부라노코지에서 이토가 신센구미에게 암살당하자 그의 시신을 회수하기 위하여 가노 미치노스케, 핫토리 다케오, 스즈키 미키사부로, 도도 헤이스케, 모나이 아리노스케, 도미야마 야헤에 등과 함께 그곳으로 갔으나 매복하고있던 신센구미측에게 습격당했다.[1] 이때 핫토리와 도도는 전사하였고 시노하라를 비롯한 가노, 스즈키, 도미야마 등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사쓰마 번으로 도주하여 관군동정에 참가하였다.[1] 이후 사쓰마번 저택에 숨겨져, 12월 18일, 시노하라 등 고료 에이지의 생존자는 후시미 가도에서 곤도를 습격했다.[1] 메이지 원년(1868년)의 보신 전쟁에서는 사쓰마군의 일원으로서 싸웠다.[1] 보신 전쟁에서는 적보대에 가담하여 투옥된 후, 석방되어, 군조를 제수받아 아이즈 전쟁호쿠에쓰 전쟁에서 전공을 세웠다.[1]

유신 후에는 '''하타 린신'''으로 개명.[1] 전공으로 영세 사족 신분, 은상금 250냥, 종신 8인 부조를 받았다.[1] 메이지 2년(1869년)에 탄정대 소순찰, 메이지 5년(1872년)에 오쿠라성 조폐사의 감찰역.[1] 후에 실업가로 전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1] 만년에는 기독교에 입신했다.[1] 메이지 44년(1911년)에 도쿄시아오야마에서 84세로 사망.[1] 아오야마 영원에 묘가 있다.[1]

2. 1. 어린 시절과 무술 수련

2. 2. 신센구미 가입과 활동

1864년 늦가을, 이토 가시타로, 그의 친동생인 스즈키 미키사부로, 가노 미치노스케, 나카니시 노보루, 사노 시메노스케, 핫토리 다케오, 우쓰미 지로 등 여덟 명의 무사들과 함께 교토로 상경하여 신센구미에 입대하였다.[1] 입대 당시 이토 가시타로는 히지카타 도시조와 동급인 참모 겸 문학 사범을 맡았고, 시노하라 다이노신은 감찰 겸 유술 사범을 맡았다.[1] 스즈키 미키사부로와 가노 미치노스케는 오장의 직위를 맡았고, 나머지 세 명은 평대원으로 들어갔다.[1]

겐지 원년(1864년) 10월, 이토와 미키사부로 등 총 7명은 신선조 가맹을 전제로 상경했고, 시노하라는 오사카의 다니 도장에 머물렀다가, 게이오 원년(1865년)에 합류하여 여러 사무관 겸 감찰·유술 사범을 맡았다. 곤도 이사미와 이토에게 중용되어, 게이오 2년(1866년) 조슈 정벌 후의 신문사 중 한 명으로 히로시마로 내려갔다.

그 후 다이노신은 1864년 금문의 변[1], 1865년 7월 나라 사건 등에서 활약하며 명성을 얻었다.[1]

2. 3. 고료에지(御陵衛士) 참여와 신센구미 탈퇴

1864년 늦가을, 이토 가시타로를 따라 교토로 상경하여 신센구미에 입대하였다. 시노하라 다이노신은 감찰 직책 겸 유술 사범을 맡았다.[1] 금문의 변(1864년), 나라 사건(1865년 7월) 등에서 활약했다. 1867년 3월, 이토 가시타로가 신센구미를 탈퇴하여 고료에지를 결성하자, 이에 동참하여 신센구미를 탈퇴했다.[1]

아부라노코지 사건 당시 신센구미의 습격을 받았으나, 사쓰마 번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건졌다.[1] 이후 관군동정에 참가하였다.

2. 4.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시노하라 다이노신은 1867년 12월 18일 후시미 가도에서 곤도 이사미[1]를 습격하는 사건에 가담하였다. 1868년 보신 전쟁에서는 사쓰마번군의 일원으로서 아이즈 전쟁호쿠에쓰 전쟁에서 전공을 세웠다.[1]

유신 이후에는 '하타 린신'으로 개명하고, 탄정대 소순찰, 오쿠라성 조폐사의 감찰역을 역임했다.[1] 은퇴 후에는 실업가로 전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1] 만년에는 기독교에 귀의했으며, 1911년 도쿄시아오야마에서 84세로 사망하여 아오야마 영원에 묘가 있다.[1]

3. 평가 및 기타


  • 시바 료타로의 소설 『신선조 혈풍록』에서는 평소 물로 귀를 씻는 버릇 때문에 중이염으로 사망했다고 묘사하지만, 이는 창작이다. 장남 부인의 증언에 따르면, 애초에 귀를 씻는 버릇이 없었으며, 귀를 앓은 적도 생애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 『진림친 일기』는 일기가 아니라, 본인이 메이지 말년에 집필한 회고록이다.
  • 시노하라가 남긴 수첩에서, 어릉위사가 영어를 배우고 있었다는 설이 있다. 시노하라는 아들의 영어 교육에 열성적이었으며, 후년에 건축가가 된 장남 야스치는 제국 호텔 건축에 참여했을 때, 설계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게 귀여움을 받았다. 야스치는 고보사와 칸과의 친교가 깊었으며, 고보사와의 신선조 관련 저작에도 증언자로서 등장한다. 다만, 고보사와가 쓴 시노하라 관련 에피소드에는 귀에 관한 일 외에도 창작이 많다.
  • 아버지 겐스케는 데릴사위로, 옛 성은 진(秦)이다. 또한, 일설에는 마루바시 츄야의 혈통이라고도 한다.
  • 유신 후 시노하라는, 이토 일파의 신선조 가맹 목적이 신선조를 존왕으로 개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곤도는 "도쿠가와가 있어서 오늘날이 있다"라고 말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기록해 놓았다.
  • 어릉위사 배명은 시노하라의 진력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 시노하라의 가나가와 현청 근무는, 쿠보타가 가나가와 현청 취체역에 취임한 것에 따른 것이다.
  • 상경 후, 이토 등과는 달리 신선조에 즉시 가맹하지 않고, 오사카의 타니 만타로 도장에 머무르는 등 교토와 오사카를 견학한 후, 1865년에 가맹했다. 타니와는 유신 후에도 교류가 계속되었다.

3. 1. 평가

3. 2. 기타

시바 료타로의 소설 《신선조 혈풍록》에서는 시노하라가 중이염으로 사망했다고 묘사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시노하라의 장남 부인의 증언에 따르면, 시노하라는 평소 귀를 씻는 버릇이 없었고, 생애 단 한 번도 귀를 앓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시노하라가 남긴 수첩에는 어릉위사가 영어를 배우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유신 이후, 시노하라는 이토 일파의 신센구미 가맹 목적이 신센구미를 존왕으로 개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증언했다. 곤도는 "도쿠가와가 있어서 오늘날이 있다"라고 말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겐스케는 데릴사위였으며, 옛 성은 진(秦)이다. 일설에는 마루바시 츄야의 혈통이라고도 한다. 어릉위사 배명은 시노하라의 진력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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