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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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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창술은 창을 사용하는 무술로, 일본 신화에서 기원하여 일본 봉건 시대에 널리 사용되었다. 초기에는 아시아 대륙에서 유입된 창이 일본에 맞게 재설계되었으며, 다양한 종류의 창과 기술이 개발되었다. 창술은 병법의 한 과목으로 시작하여,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이르러 전문 유파가 등장했고, 에도 시대에 무사의 가문을 나타내는 도구로 발전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쇠퇴했지만, 현대에는 종합 무술의 일부로, 또는 총검술에 도입되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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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술
무술 정보
이름창술 (Sōjutsu)
주요 기술자돌 (찌르기)
종류무기술 ()
경도비-경쟁
국가일본
창시자마네무 지에푸
올림픽아니오
역사 및 계보
유래역사적 무술
파생 종목총검술
창도
시대가마쿠라 시대
유파
유파다수 (하단 참조)
기타
별칭야리쥬츠 (鑓術)

2. 역사

창은 초기 일본 신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 열도 자체가 창의 끝에서 떨어진 소금물인 아메노누호코(천상의 보석 창)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전해진다. 무기로서의 최초의 창은 아시아 대륙에서 유입되었다. 이러한 초기 형태의 창은 이후 일본인들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졌으며, 기술이 발전하면서 재설계되었다.[1]

은 일본 봉건 시대 전체에 걸쳐 인기 있는 무기였으며,[2] 다른 당시의 전장 무기보다 생산 비용이 저렴하고 훈련이 덜 필요했으며, 일본에서 총기가 채택됨에 따라 아시가루 부대의 밀집 대형에 적합했다. 창술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는 13세기 몽골의 침략 직후였는데, 몽골군 역시 많은 수의 창병을 활용했다.[1]

일본인들은 궁극적으로 창의 머리 부분을 여러 가지 변형으로 수정하여, 창을 보병과 기병 모두에서 사용하고, 찌르기 공격 외에도 베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1] 일본에서는 헤이안 시대 중기 이후 주류였던 나기나타를 잇는 형태로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남북조 시대에 걸쳐 창이 등장하여, 잡병(아시가루)용으로 발달했지만, 오닌의 난 이후, 점차 무장도 사용하게 되면서 무예로서의 창술이 발달해 갔다.

또한 무장이 사용하는 과정에서 창 자체도 사용자의 취향에 따라 개량이 거듭되어, 일반적인 '''소창''' 한 종류에서, 칼날부인 창날이 긴 '''대신창''', 창날의 뿌리가 갈라진 '''낫창''' (갈라진 모양에 따라, '''편낫창'''이나 「'''십자창'''」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은 양낫창 등으로 분류됨), 자루 윗부분에 쇠로 된 옆손잡이가 있는 '''열쇠창''', 자루에 가동성의 을 장착하여, "손으로 움직이는" 듯한 움직임으로 찌르기 쉽게 만든 '''관창''', 활의 하즈(はず, 활의 양쪽 끝)에 덮개식 창날을 장착한 '''미창''', 자루가 짧은 '''손찌르기창''' 등, 다양한 종류가 생겨났다.

창술 초창기에는 병법의 한 과목으로 창을 사용했다. 대표적인 유파로는 신당류가 있으며, 이이노 모리치카에 의해 널리 퍼졌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들어서면서 창은 칼보다 더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고, 창술 전문 유파도 등장했다. 맨 창술로는 무변류 · 고헤이류 · 이키류 · 혼마류 · 오시마류 · 다케우치류, 낫창의 호조인류, 열쇠창의 우치우미류 · 사부리류, 관창을 창시한 이토류 등이 있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자 창은 무사의 가문을 나타내는 도구가 되었고, 창술은 비약적으로 발달하여 새로운 유파가 잇달아 등장했다. 겐나 연간부터 간분 연간에 걸쳐 주요 유파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겐로쿠 시대 이후, 창술은 고격을 중시하여 폐쇄적이고 수세적인 상황이 되었고, 유파의 형식을 존속시키는 것에 주안점이 놓이면서 독자적인 기술이나 새로운 유파의 발전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 시기에 검술과 마찬가지로 연습용 방구가 제작되었지만, 실전적인 연습에 사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다른 유파와의 시합도 없었다.

이러한 풍조가 변화하는 것은 가세이 시대 이후이다. 실용적인 속성과 습득이 중시되었고, 아이멘시합이라고 불리는 쌍방이 방구를 착용하는 형식이 보급되어 다른 유파와의 시합도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풍조는 지금까지의 유파가 유지해 온 전통적 특색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메이지 유신으로 에도 막부가 붕괴되면서, 다른 무예와 마찬가지로 창술도 타격을 받았지만, 그 영향은 특히 심각했다. 무사의 명예의 증표였던 창은, 무사의 소멸과 함께 그 지위를 잃었고, 더욱이 장대한 무기는 체육 실기로 부적합하여 무용지물로 여겨져 일반에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또한, 창술은 그 전투력의 높이로 인해 주로 상급 무사의 취미로 여겨졌고, 상대적으로 습전자의 수가 적었다는 이유도 있다. 대일본무덕회에도 다수가 참가했지만, 지도자의 고령화로 인해 창술 중심의 유파는, 메이지부터 쇼와에 걸쳐 다수가 실전, 단절되었다. 현대에 남은 것은 관류(오와리 관류), 사부리류, 풍전류, 보장원류 다카다파 등뿐이었다.

하지만, 창술 중심은 아니지만, 창술을 포함한 종합 무술의 유파는 가토리 신토류나 마니와 넨류 등이 남아 있다.

또한 창술은 총검술에 도입되었다. 메이지 20년(1887년), 일본 육군은, 보장원류와 사부리류 등의 일본 전통적인 창술을 바탕으로 한 일본식 총검술을 제정하고, 그동안 행해지던 프랑스 육군식 총검술을 폐지했다. 구 일본군의 총검술은, 태평양 전쟁 후에 경기 무도의 총검도가 되었고, 현재도 육상자위대항공자위대에서, 자위대 총검 격투와 함께 훈련되고 있다.

2. 1. 아시아

창은 초기 일본 신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 열도 자체가 창의 끝에서 떨어진 소금물인 아메노누호코(천상의 보석 창)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전해진다. 무기로서의 최초의 창은 아시아 대륙에서 유입되었다. 이러한 초기 형태의 창은 이후 일본인들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졌으며, 기술이 발전하면서 재설계되었다.[1]

은 일본 봉건 시대 전체에 걸쳐 인기 있는 무기였으며,[2] 다른 당시의 전장 무기보다 생산 비용이 저렴하고 훈련이 덜 필요했으며, 일본에서 총기가 채택됨에 따라 아시가루 부대의 밀집 대형에 적합했다. 창술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는 13세기 몽골의 침략 직후였는데, 몽골군 역시 많은 수의 창병을 활용했다.[1]

일본인들은 궁극적으로 창의 머리 부분을 여러 가지 변형으로 수정하여, 창을 보병과 기병 모두에서 사용하고, 찌르기 공격 외에도 베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1]

2. 1. 1. 중국

(요약 정보 없음)

2. 1. 2. 일본

창은 초기 일본 신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 열도 자체가 창의 끝에서 떨어진 소금물인 아메노누호코(천상의 보석 창)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전해진다. 무기로서의 최초의 창은 아시아 대륙에서 유입되었다. 이러한 초기 형태의 창은 이후 일본인들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졌으며, 기술이 발전하면서 재설계되었다.[1]

은 일본 봉건 시대 전체에 걸쳐 인기 있는 무기였으며,[2] 다른 당시의 전장 무기보다 생산 비용이 저렴하고 훈련이 덜 필요했으며, 일본에서 총기가 채택됨에 따라 아시가루 부대의 밀집 대형에 적합했다. 창술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는 13세기 몽골의 침략 직후였는데, 몽골군 역시 많은 수의 창병을 활용했다.[1]

일본인들은 궁극적으로 창의 머리 부분을 여러 가지 변형으로 수정하여, 창을 보병과 기병 모두에서 사용하고, 찌르기 공격 외에도 베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1]

일본에서는 헤이안 시대 중기 이후 주류였던 나기나타를 잇는 형태로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남북조 시대에 걸쳐 창이 등장하여, 잡병(아시가루)용으로 발달했지만, 오닌의 난 이후, 점차 무장도 사용하게 되면서 무예로서의 창술이 발달해 갔다.

또한 무장이 사용하는 과정에서 창 자체도 사용자의 취향에 따라 개량이 거듭되어, 일반적인 '''소창''' 한 종류에서, 칼날부인 창날이 긴 '''대신창''', 창날의 뿌리가 갈라진 '''낫창''' (갈라진 모양에 따라, '''편낫창'''이나 「'''십자창'''」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은 양낫창 등으로 분류됨), 자루 윗부분에 쇠로 된 옆손잡이가 있는 '''열쇠창''', 자루에 가동성의 을 장착하여, "손으로 움직이는" 듯한 움직임으로 찌르기 쉽게 만든 '''관창''', 활의 하즈(はず, 활의 양쪽 끝)에 덮개식 창날을 장착한 '''미창''', 자루가 짧은 '''손찌르기창''' 등, 다양한 종류가 생겨났다.

창술 초창기에는 병법의 한 과목으로 창을 사용했다. 대표적인 유파로는 신당류가 있으며, 이이노 모리치카에 의해 널리 퍼졌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들어서면서 창은 칼보다 더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고, 창술 전문 유파도 등장했다. 맨 창술로는 무변류 · 고헤이류 · 이키류 · 혼마류 · 오시마류 · 다케우치류, 낫창의 호조인류, 열쇠창의 우치우미류 · 사부리류, 관창을 창시한 이토류 등이 있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자 창은 무사의 가문을 나타내는 도구가 되었고, 창술은 비약적으로 발달하여 새로운 유파가 잇달아 등장했다. 겐나 연간부터 간분 연간에 걸쳐 주요 유파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겐로쿠 시대 이후, 창술은 고격을 중시하여 폐쇄적이고 수세적인 상황이 되었고, 유파의 형식을 존속시키는 것에 주안점이 놓이면서 독자적인 기술이나 새로운 유파의 발전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 시기에 검술과 마찬가지로 연습용 방구가 제작되었지만, 실전적인 연습에 사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다른 유파와의 시합도 없었다.

이러한 풍조가 변화하는 것은 가세이 시대 이후이다. 실용적인 속성과 습득이 중시되었고, 아이멘시합이라고 불리는 쌍방이 방구를 착용하는 형식이 보급되어 다른 유파와의 시합도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풍조는 지금까지의 유파가 유지해 온 전통적 특색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메이지 유신으로 에도 막부가 붕괴되면서, 다른 무예와 마찬가지로 창술도 타격을 받았지만, 그 영향은 특히 심각했다. 무사의 명예의 증표였던 창은, 무사의 소멸과 함께 그 지위를 잃었고, 더욱이 장대한 무기는 체육 실기로 부적합하여 무용지물로 여겨져 일반에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또한, 창술은 그 전투력의 높이로 인해 주로 상급 무사의 취미로 여겨졌고, 상대적으로 습전자의 수가 적었다는 이유도 있다. 대일본무덕회에도 다수가 참가했지만, 지도자의 고령화로 인해 창술 중심의 유파는, 메이지부터 쇼와에 걸쳐 다수가 실전, 단절되었다. 현대에 남은 것은 관류(오와리 관류), 사부리류, 풍전류, 보장원류 다카다파 등뿐이었다.

하지만, 창술 중심은 아니지만, 창술을 포함한 종합 무술의 유파는 가토리 신토류나 마니와 넨류 등이 남아 있다.

또한 창술은 총검술에 도입되었다. 메이지 20년(1887년), 일본 육군은, 보장원류와 사부리류 등의 일본 전통적인 창술을 바탕으로 한 일본식 총검술을 제정하고, 그동안 행해지던 프랑스 육군식 총검술을 폐지했다. 구 일본군의 총검술은, 태평양 전쟁 후에 경기 무도의 총검도가 되었고, 현재도 육상자위대항공자위대에서, 자위대 총검 격투와 함께 훈련되고 있다.

2. 1. 3.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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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 현대의 창술

창술은 일반적으로 종합적인 전통(''고류'') 학교의 커리큘럼에서 단일 구성 요소일 뿐이다.[1] 덴신 쇼덴 카토리 신토류는 창술을 공식 커리큘럼에 포함한 최초의 학교라고 주장하며, 또 다른 매우 잘 알려진 창술 학교는 호조인류이다.[1] 오늘날 창술을 가르치는 학교는 극소수이지만, 한때 450개에 달했다.[1]

메이지 유신으로 에도 막부가 붕괴되면서 창술은 타격을 받았다.[1] 무사의 명예의 증표였던 창은 무사의 소멸과 함께 그 지위를 잃었고, 장대한 무기는 체육 실기로 부적합하여 무용지물로 여겨져 일반에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1] 창술은 전투력의 높이로 인해 상급 무사의 취미로 여겨졌고, 습전자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다.[1] 대일본무덕회에도 다수가 참가했지만, 지도자의 고령화로 인해 창술 중심의 유파는, 메이지부터 쇼와에 걸쳐 다수가 실전, 단절되었다.[1] 현대에 남은 것은 관류(오와리 관류), 사부리류, 풍전류, 보장원류 다카다파 등뿐이었다.[1]

창술 중심은 아니지만, 창술을 포함한 종합 무술의 유파는 가토리 신토류나 마니와 넨류 등이 남아 있다.[1]

창술은 총검술에 도입되었다.[1] 1887년(메이지 20년), 일본 육군은, 보장원류와 사부리류 등의 일본 전통적인 창술을 바탕으로 한 일본식 총검술을 제정하고, 프랑스 육군식 총검술을 폐지했다.[1] 구 일본군의 총검술은, 태평양 전쟁 후에 경기 무도의 총검도가 되었고, 현재도 육상자위대항공자위대에서, 자위대 총검 격투와 함께 훈련되고 있다.[1]

삼국지에서는 조운이 '애각창'이라는 9척에 달하는 창의 명수로 전해지고 있다.[1]

3. 유파


  • 오시마류
  • 타네다류(십자창이나 열쇠창을 사용하는 기술도 일부 있다.)
  • 타케우치류
  • 후덴류
  • 가토리 신토류(이이노류)
  • 가시마 신토류
  • 신카게 히키타류(십자창이나 열쇠창을 사용하는 기술도 일부 있다.)
  • 잇칸류
  • 텐류
  • 신텐류
  • 혼마류(혼마 신토류)
  • 잇탄류
  • 고츠보류
  • 케이조류
  • 이신류
  • 내장조류
  • 후나츠류
  • 타카기류
  • 무헨류
  • 지토쿠인류
  • 쇼치류


;유파의 주 무술 외에 소창이 있는 것

  • 마니와 넨류
  • 아나자와류
  • 나카조류
  • 토다류
  • 토다파 무코류
  • 릿신류
  • 가시마 신류


;낫창(십자창)을 사용하는 유파

  • 호조인류(인에이 전수)
  • 호조인류 나카무라파
  • 호조인류 타카다파
  • 호조인류 마츠자키파
  • 카쿠류
  • 아네가와류
  • 호조인류(호조인류 하세가와파)
  • 인슌 전수
  • 호조인류 이소노파(호조인류 슈메파)
  • 호조인류 시모이시파
  • 호조인류 타비카와파


;열쇠창을 사용하는 유파

  • 토다류
  • 우츠미류
  • 사부리류
  • 엔치류
  • 키노시타류
  • 사분류
  • 카시와라류
  • 혼신쿄치류
  • 텐신 쇼류
  • 개선류
  • 오오치류


;관창을 사용하는 유파

  • 이토류(켄코류)
  • 후쿠자와류
  • 리소류
  • 토야마류
  • 코비류
  • 칸류(오와리 칸류)
  • 타스이류
  • 텐엔류
  • 엔겐류
  • 교가쿠류
  • 닛카이 잇시류
  • 잇시류
  • 묘켄 지토쿠류
  • 지토쿠키류
  • 쿠겐류


;유파의 주 무술 외에 관창이 있는 것

  • 토다류

3. 1. 소창(직창)을 사용하는 유파


  • 오시마류
  • 타네다류(십자창이나 열쇠창을 사용하는 기술도 일부 있다.)
  • 타케우치류
  • 후덴류
  • 가토리 신토류(이이노류)
  • 가시마 신토류
  • 신카게 히키타류(십자창이나 열쇠창을 사용하는 기술도 일부 있다.)
  • 잇칸류
  • 텐류
  • 신텐류
  • 혼마류(혼마 신토류)
  • 잇탄류
  • 고츠보류
  • 케이조류
  • 이신류
  • 내장조류
  • 후나츠류
  • 타카기류
  • 무헨류
  • 지토쿠인류
  • 쇼치류

3. 2. 낫창(십자창)을 사용하는 유파

호조인류(인에이 전수)은 낫창(십자창)을 사용하는 대표적인 유파이다. 호조인류 나카무라파, 호조인류 타카다파, 호조인류 마츠자키파, 카쿠류, 아네가와류, 호조인류(호조인류 하세가와파) 등이 있다. 인슌 전수의 호조인류 이소노파(호조인류 슈메파), 호조인류 시모이시파, 호조인류 타비카와파 도 낫창을 사용한다.

3. 3. 열쇠창을 사용하는 유파

토다류는 열쇠창을 사용하는 대표적인 유파이다. 우츠미류, 사부리류도 열쇠창을 사용한다. 사부리류에서 파생된 엔치류, 키노시타류, 사분류 역시 열쇠창을 사용한다. 카시와라류와 그 분파인 혼신쿄치류, 텐신 쇼류, 개선류도 열쇠창을 사용하는 유파이다. 오오치류 또한 열쇠창을 사용한다.

3. 4. 관창을 사용하는 유파


  • 이토류(켄코류)
  • * 후쿠자와류
  • * 리소류
  • ** 토야마류
  • * 코비류
  • ** 칸류(오와리 칸류)
  • ** 타스이류

텐엔류
* 엔겐류

  • ** 교가쿠류
  • * 닛카이 잇시류
  • ** 잇시류
  • 묘켄 지토쿠류
  • 지토쿠키류
  • 쿠겐류

4. 창으로 유명한 인물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으로 불린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타기리 가쓰모토, 와키자카 야스하루, 카스야 다케노리, 가토 요시아키, 히라노 나가야스가 유명하다. 그 외에도 마에다 도시이에, 마에다 도시마스, 카메이 코레노리, 혼다 타다카츠, 모리 나가요시, 모리 토모노부, 모리 요시나리, 카니 요시나가 등이 창술로 이름을 알렸다. 호조인 타이에이, 오시마 요시츠나, 미요시 신조, 카미이즈미 노부츠나, 타카하시 데이슈, 타니 산쥬로, 하라다 사노스케, 마츠다 히데히코, 이시다 가즈토, 카기타 츄헤이, 와타나베 모리츠나 등도 창의 명수로 알려져 있다.

참조

[1] 서적 Classical Bujutsu: Martial Arts and Ways of Japan Weatherhill
[2] 논문 Zaimokuza Reconsidered: The Forensic Evidence, and Classical Japanese Swordsmanship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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