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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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적보대는 1868년 사이고 다카모리와 이와쿠라 도모미의 지원을 받아 결성된 부대로, "붉은 마음으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가라 소조가 대장을 맡았으며, 세 개의 부대로 구성되어 보신 전쟁에서 활동했다. 신정부의 세금 감면 약속을 선전하며 민중의 지지를 얻었으나, 신정부의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가짜 관군으로 낙인찍혔다. 이후 부대 해체 과정에서 사가라 소조는 처형되었고, 일부 대원은 신정부에 복종하거나 약탈 행위로 처형되었다. 적보대는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며, 만화, 영화 등 대중문화에서도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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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보대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세키호타이 (赤報隊) | 
| 로마자 표기 | Sekihōtai | 
| 한자 표기 | 赤報隊 | 
| 별칭 | 붉은 징조 부대 | 
| 활동 기간 | 1868년 2월 1일 | 
| 해산일 | 1868년 2월 27일 | 
| 국가 | 일본 | 
| 소속 | 메이지 일본 정부 | 
| 지휘 구조 | |
| 지휘관 1 | 아야노코지 토시자네 | 
| 지휘관 2 | 시게노이 미키히사 | 
| 제1부대장 | 사가라 소조 | 
| 제2부대장 | 스즈키 미키사부로 | 
| 제3부대장 | 유카와 렌사부로 | 
| 기타 정보 | |
| 관련 사건 | 세키호타이 사건 | 
2. 역사적 배경
2. 1. 보신 전쟁과 메이지 유신
2. 2. 세키호타이 결성 이전의 상황
3. 세키호타이 결성 및 활동
1868년 2월 1일, 사이고 다카모리와 이와쿠라 도모미의 지원을 받아 오미국 마쓰오산(松尾山)의 곤고린지(金剛林寺)에서 세키호타이(적보대)가 결성되었다. 부대 이름은 “붉은 마음으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에서 지어졌다. 대장은 사가라 소조였으며, 아야노코지 도시자네, 시게노이 고주 등을 맹주로 추대했다.
적보대는 세 개의 부대로 구성되었다.
- 제1대는 사가라 소조가 대장으로, 사쓰마번 저택의 낭사대 총재로서 시모쓰케와 사가미, 에도 시내에서 구막부군에 대한 도발적인 행위로 공작 활동 등을 벌였고, 이것이 보신 전쟁의 첫 전투인 도바·후시미 전투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에도 시대부터 이어진 사라쿠 동지들이 중심이었다.
 - 제2대는 신센구미 제9부대의 전 대장이었던 스즈키 미키사부로가 대장으로, 그의 형인 이토 가시타로의 추종자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신센구미를 탈영한 자들이었다. 옛 신선조 (고료에이시) 대원들이 중심이었다.
 - 제3대는 미나쿠치 씨족의 유카와 렌사부로가 대장으로, 주로 미나쿠치번 무사와 에주 출신자들이 중심이었다.
 
적보대는 신정부의 허가를 얻어, 도산도군의 선봉으로서 각지에서 “세금 반감”을 선전하면서, 세상 고치기 봉기 등에서 구막부에 반발하는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신정부는 “관군의 인장”을 내지 않고, 문서로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신정부는 재정적으로 세금 반감의 실현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은밀히 취소하고, 세금 반감은 소라쿠 등이 함부로 떠벌린 것이라고 하면서, '''가짜 관군'''의 낙인을 찍었다.
제1대는 시나노국으로 진군하여 2월 6일에는 나카센도와 고슈 가도의 분기점인 시모스와 숙소를 거점으로 삼아, 우스이 고개를 점령하여 호쿠리쿠 웅번과 에도의 연락을 차단할 계획이었지만, 도산도군은 시나노 각 번에 적보대 체포 명령을 내리고, 2월 17일에는 오이와케 숙소에서 고모로 번 등의 공격을 받아 참패했다. 3월 3일, 시모스와 숙소 외곽에서 소라쿠와 시부야 소지 등 8명이 처형되었다.
가이국(甲斐国) 상구로쿠마무라(上黒駒村)(야마나시현(山梨県) 후에후키시(笛吹市) 미사카정(御坂町))의 폭력배(博徒)・구로코마 가쓰조(黒駒勝蔵)도 세키호타이에 가담했다. 그는 「코미야마 쇼조」(小宮山勝蔵)라는 변명을 사용하여 적보대에 가입했다. 사가라 소조의 처형과 미즈노 야타로의 체포로 세키호타이가 해산되자, 구로코마 가쓰조는 상경하여 교토에서 시조 다카우타의 징병 7번대(제1유격대)에 입대하여 보신 전쟁에 참가했지만, 1871년 11월 26일에 신정부로부터 제1유격대 탈퇴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세키호타이는 도카이도 선봉총독부(東海道先鋒総督府)의 지휘 아래 구와나번(桑名藩)으로 진군할 명령을 받았으나, 사가라 소조는 독단으로 도산도(東山道)로 진격하여 “어새(御一新)”와 “구막부령의 당년분, 전년 미납분의 연공 반감(年貢半減)”을 선포했다. 연공 반감의 선포는 조정의 승인을 얻었지만, 나중에 철회되었다. 세키호타이 제1대는 도산도 진무총독부(東山道鎮撫総督府)로의 소속 변경을 희망했고, 2월 상순에는 사쓰마번 병사의 부속이 되도록 지시받았다. 그러나 사가라 소조는 지시에 따르지 않고 독자 행동을 계속하여, 우스이 고개를 목표로 진군했다. 신정부는 사가라 소조 일당 세키호타이의 반복적인 독자 행동과 독단적인 행위를 우려하여 귀환을 명령했지만, 사가라 소조 일당은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사가라 소조 일당 세키호타이는 관군의 이름을 이용하여 도로변에서 함부로 금곡을 징수하고, 약탈 행위를 하는 가짜 관군(偽官軍)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도산도군(東山道軍)은 세키호타이 체포 명령을 신슈(信州) 제번에 통달했고, 고모로번(小諸藩) 등 인근 제번이 연합하여 세키호타이를 공격했다. 이때 사가라 소조는 지금까지 무시해왔던 도산도 총독부의 소환에 마침내 응하여 부대를 비워두었다. 출두한 사가라 소조는 도산도군 소속을 정식으로 인정받았지만, 고모로번(小諸藩)으로부터 세키호타이의 임의적인 자금 조달과 폭행 행위를 신고받음으로써, 마침내 처형되었다.
참고로, 스즈키 미키사부로가 이끄는 제2대는 신정부에 복종하여 교토로 돌아가, 후일의 징병 제7대에 편입되었고, 제3대는 각 지역에서 약탈 행위가 많았고, 쿠와나 근처에서 많은 대원이 처형되었다.
3. 1. 결성 과정
1868년 2월 1일, 사이고 다카모리와 이와쿠라 도모미의 지원을 받아 오미국 마쓰오지(松尾寺)의 곤고린지(金剛林寺)에서 세키호타이(적보대)가 창설되었다. 궁정 관리인 아야노코지 도시자네와 시게노이 기니히사가 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세키호타이는 세 개의 부대로 구성되었다. 사가라 소조가 제1부대의 대장이었다. 세키호타이의 제2부대 대장은 신센구미 제9부대의 전 대장이었던 스즈키 미키사부로였으며, 그의 형인 이토 가시타로의 추종자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신센구미를 탈영한 자들이었다. 제3부대의 대장은 미나쿠치 씨족의 유카와 렌사부로였으며, 주로 미나쿠치 씨족 무사들로 구성되었다.
사가라 소조는 사쓰마번 저택의 낭사대 총재로서, 시모쓰케와 사가미, 에도 시내에서 구막부군에 대한 도발적인 행위로 공작 활동 등을 벌였고, 이것이 보신 전쟁의 첫 전투인 도바·후시미 전투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세키호타이는 시골을 돌아다니며 곧 있을 정권 교체에 대한 소식을 전파했다. 메이지 정부는 감세와 같은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했기에, 세키호타이는 속죄양으로 이용되었고, 정부는 그들을 "가짜 군대"라고 불렀다.
3. 2. 조직 구성
세키호타이는 1868년 2월 1일, 사이고 다카모리와 이와쿠라 도모미의 지원을 받아 오미국 마쓰오지의 곤고린지에서 창설되었다. 궁정 관리인 아야노코지 도시자네와 시게노이 키니히사가 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세키호타이는 세 개의 부대로 구성되었다. 제1부대 대장은 사가라 소조였다. 제2부대 대장은 신센구미 제9부대의 전 대장이었던 스즈키 미키사부로였으며, 그의 형인 이토 가시타로의 추종자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신센구미를 탈영한 자들이었다. 제3부대 대장은 미나쿠치 씨족의 유카와 렌사부로였으며, 주로 미나쿠치 씨족 무사들로 구성되었다.
세키호타이는 시골을 돌아다니며 곧 있을 정권 교체에 대한 소식을 전파했다. 메이지 정부는 감세와 같은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했기에, 세키호타이는 속죄양으로 이용되었고, 정부는 그들을 "가짜 군대"라고 불렀다.
제1기는 에도 시대부터 이어진 사라쿠 동지들이 중심이었다. 제2기는 옛 신선조 (고료에이시) 대원들이 중심이었다. 제3기는 미나구치번 무사와 에주 출신자들이 중심이었다.
3. 3. 주요 활동
세키호타이는 1868년 2월 1일,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와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의 지원을 받아 오미국 마쓰오지(松尾寺)의 곤고린지(金剛林寺)에서 창설되었다. 궁정 관리인 아야노코지 도시자네(綾小路俊実)와 시게노이 키니히사(重井金左)가 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세키호타이는 시골을 돌아다니며 곧 있을 정권 교체에 대한 소식을 전파하고, '세금 반값' 공약을 내걸어 민심을 얻으려 했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는 감세와 같은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했기에, 세키호타이는 속죄양이 되었고, 정부는 그들을 "가짜 군대"라고 불렀다.세키호타이는 세 개의 부대로 구성되었다. 사가라 소조(相楽惣三)가 제1부대의 대장이었다. 제2부대 대장은 신센구미(新選組) 제9부대의 전 대장이었던 스즈키 미키사부로(鈴木三木三郎)였으며, 그의 형인 이토 카시타로(伊東甲子太郎)의 추종자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신센구미를 탈영한 자들이었다. 제3부대의 대장은 미나쿠치 씨족(美濃口氏)의 유카와 렌사부로(湯川連三郎)였으며, 주로 미나쿠치 씨족 무사들로 구성되었다.
가이국(甲斐国) 상구로쿠마무라(上黒駒村)(야마나시현(山梨県) 후에후키시(笛吹市) 미사카정(御坂町))의 폭력배(博徒)・구로코마 가쓰조(黒駒勝蔵)도 세키호타이에 가담했다.[3] 그는 「코미야마 쇼조」(小宮山勝蔵)라는 변명을 사용하여 적보대에 가입했다. 사가라 소조(相楽惣三)의 처형과 미즈노 야타로(水野弥太郎)의 체포로 세키호타이가 해산되자, 구로코마 가쓰조는 상경하여 교토에서 시조 다카우타(四条隆謌)의 징병 7번대(제1유격대)에 입대하여 보신 전쟁(戊辰戦争)에 참가했지만, 메이지 4년 10월 14일(구력)(1871년 11월 26일)에 신정부로부터 제1유격대 탈퇴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3]
세키호타이는 도카이도 선봉총독부(東海道先鋒総督府)의 지휘 아래 구와나번(桑名藩)으로 진군할 명령을 받았으나, 사가라 소조(相楽惣三)는 독단으로 도산도(東山道)로 진격하여 “어새(御一新)”와 “구막부령의 당년분, 전년 미납분의 연공 반감(年貢半減)”을 선포했다. 연공 반감의 선포는 조정의 승인을 얻었지만, 나중에 철회되었다. 세키호타이 제1대는 도산도 진무총독부(東山道鎮撫総督府)로의 소속 변경을 희망했고, 2월 상순에는 사쓰마번 병사의 부속이 되도록 지시받았다. 그러나 사가라 소조(相楽惣三)는 지시에 따르지 않고 독자 행동을 계속하여, 우스이 고개(碓氷峠)를 목표로 진군했다. 신정부는 사가라 소조(相楽惣三) 일당 세키호타이의 반복적인 독자 행동과 독단적인 행위를 우려하여 귀환을 명령했지만, 사가라 소조(相楽惣三) 일당은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사가라 소조(相楽惣三) 일당 세키호타이는 관군의 이름을 이용하여 도로변에서 함부로 금곡을 징수하고, 약탈 행위를 하는 가짜 관군(偽官軍)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도산도군(東山道軍)은 세키호타이 체포 명령을 신슈(信州) 제번에 통달했고, 고모로번(小諸藩) 등 인근 제번이 연합하여 세키호타이를 공격했다. 이때 사가라 소조(相楽惣三)는 지금까지 무시해왔던 도산도 총독부의 소환에 마침내 응하여 부대를 비워두었다. 출두한 사가라 소조(相楽惣三)는 도산도군 소속을 정식으로 인정받았지만, 고모로번(小諸藩)으로부터 세키호타이의 임의적인 자금 조달과 폭행 행위를 신고받음으로써, 마침내 처형되었다.
4. 세키호타이 해체 및 그 이후
신정부는 재정 문제로 연공 감면 조치를 철회하고, 세키호타이(赤報隊)를 '가짜 관군'으로 규정하여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신정부가 재정적으로 세금 반감 정책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신정부는 세키호타이가 내세운 세금 반감 공약이 자신들의 승인 없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가라 소조가 이끄는 1번대는 도산도(東山道)를 따라 진군하며 신정부에 대한 저항을 이어갔으나, 1868년 3월 24일 나가노현 시모스와 외곽에서 체포되어 3월 26일 참수형을 선고받았다. 시모스와 숙소를 거점으로 우스이 고개를 점령하려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3월 3일에는 사가라 소조와 시부야 소우지 등 8명이 처형되었다.
반면, 스즈키 미키사부로가 이끄는 2번대는 신정부에 복종하여 교토로 돌아갔고, 이후 징병 제7대에 편입되었다. 3번대는 약탈 행위로 인해 많은 대원이 처형되었다는 점에서 1번대와 다른 결과를 맞이했다.
메이지 시대 이후, 적보대 대원들과 그 후손들은 명예 회복을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1928년(쇼와 3년), 사가라 소조에게는 정오위, 시부야 소우지에게는 종오위의 위계가 추증되어, 일부 대원들의 명예가 회복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나가노현 시모스와에서는 적보대를 기리는 사가라회가 결성되었다. 매년 4월 3일에는 처형장 터에 세워진 魁塚(사가라즈카)에서 유족을 초청하여 사가라제를 지내며 위령하고 있다. 
2008년 4월에는 기후현 후와군 타루이정 이와데의 세이가 기념관 주차장에 주민들이 적보대 숭상비를 건립했다.
한편, 같은 "가짜 관군"으로 불렸던 다카마쓰대의 오자와 잇센은 현재까지 숭배받거나 명예가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4. 1. 해체 과정
신정부는 재정 문제로 인해 연공 감면 조치를 철회하고, 세키호타이(赤報隊)를 '가짜 관군'으로 규정하여 해체하기로 결정했다.[1] 이는 신정부가 재정적으로 세금 반감 정책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신정부는 세키호타이가 내세운 세금 반감 공약이 자신들의 승인 없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사가라 소조가 이끄는 1번대는 도산도(東山道)를 따라 진군하며 신정부에 대한 저항을 이어갔으나, 1868년 3월 24일 나가노현 시모스와 외곽에서 체포되어 3월 26일 참수형을 선고받았다.[1] 시모스와 숙소를 거점으로 우스이 고개를 점령하려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3월 3일에는 사가라 소조와 시부야 소우지 등 8명이 처형되었다.
반면, 스즈키 미키사부로가 이끄는 2번대는 신정부에 복종하여 교토로 돌아갔고, 이후 징병 제7대에 편입되었다.[1] 3번대는 약탈 행위로 인해 많은 대원이 처형되었다는 점에서 1번대와 다른 결과를 맞이했다.[1]
4. 2. 명예 회복 운동
메이지 시대 이후, 적보대 대원들과 그 후손들은 명예 회복을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1] 1928년(쇼와 3년), 사가라 소조에게는 정오위, 시부야 소우지에게는 종오위의 위계가 추증되어, 일부 대원들의 명예가 회복되었다.[1]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나가노현 시모스와에서는 적보대를 기리는 사가라회가 결성되었다.[1] 매년 4월 3일에는 처형장 터에 세워진 魁塚(사가라즈카)에서 유족을 초청하여 사가라제를 지내며 위령하고 있다.[1]
2008년 4월에는 기후현 후와군 타루이정 이와데의 세이가 기념관 주차장에 주민들이 적보대 숭상비를 건립했다.[1]
한편, 같은 "가짜 관군"으로 불렸던 다카마쓰대의 오자와 잇센은 현재까지 숭배받거나 명예가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1]
4. 3. 현대적 의의
1980년대 '세키호타이'(일본어: 赤報隊, 적보대)를 자칭한 극우 단체는 1987년 1월 24일 효고현 니시노미야에 있는 아사히 신문 한신 지국을 습격하여 기자 고지리 도모히로를 살해했다.[2] 이 단체의 정식 명칭은 일본 민족 독립 의용군 별도 세키호타이(일본어: 日本民族独立義勇軍別働赤報隊, Nippon Minzoku Dokuritsu Giyugun Betsudo Sekihōtai)로, "일본 민족 독립을 위한 인민 의용군의 혈전 분대"로 번역된다. 이들은 제2차 세계 대전 관련 교과서 변경을 이유로 나카소네 야스히로, 다케시타 노보루 두 총리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했다.[2]이 사건은 '''도쿄 지방 사건 116호'''로 명명되었으며, 2003년 3월에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
2009년 2월, 세키호타이라고 주장하는 집단이 일본방송협회(NHK) 뉴스 앵커에게 위협적인 메시지를 보냈다.[2]
세키호타이의 행동은 일본 정치 극단주의자들의 폭력 증가의 증거로 제시되어 왔다. 전후 테러 조직 중 일부는 막말의 적보대를 본떠 적보대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5. 세키호타이에 대한 상반된 평가
5. 1. 긍정적 평가
5. 2. 부정적 평가
적보대(赤報隊)는 “관군의 捨て駒(버림받은 말)로 취급받아 온 비극의 주인공”으로 여겨져 왔지만, 정의로운 군대였다고만은 할 수 없는 면이 있었다.[4]1867년 10월, 막부 타도 밀칙에 따라 서국과 동국에서 동시 거병할 계획이 세워졌으나, 대정봉환(大政奉還) 실현으로 밀칙은 취소되었다. 사쓰마 번(薩摩藩)은 에도 사쓰마 번저(江戸薩摩藩邸)에 간토에서의 혼란 행위 중지를 지시했고, 대정봉환 다음 날에도 진정하도록 거듭 강조했다. 그럼에도 사가라(相楽) 일당은 지시를 무시하고 출류산 사건(出流山事件)과 오기노야마 중진야(荻野山中陣屋) 습격을 일으켰고, 모두 진압되었다. 사가라 일당의 군자금은 거상(豪商)을 습격하여 얻은 것이었다. 사가라 일당의 거병은 구막부파를 자극하여, 쇼나이 번(庄内藩)과 구막부군에 의한 에도 사쓰마번저 방화 사건(江戸薩摩藩邸の焼討事件)으로 발전했다.[4]
에도를 탈출한 사가라 일당은 오미 국(近江国) 금강륜사(金剛輪寺)에서 적보대를 결성하고, 적보대는 도카이도(東海道) 선봉총독부(東海道先鋒総督府) 지휘 아래 구와나(桑名)로 진군할 명령을 받았으나, 사가라는 독단으로 도산도(東山道)로 진격하여 “어새(御一新)”와 “구막부령의 당년분, 전년 미납분의 연공 반감(年貢半減)”을 선포했다. 연공 반감 선포는 조정의 승인을 얻었지만, 나중에 철회되었다.[4]
적보대 제1대는 도산도 진무총독부(東山道鎮撫総督府)로의 소속 변경을 희망했고, 2월 상순에는 사쓰마 번 병사의 부속이 되도록 지시받았다. 그러나 사가라는 지시에 따르지 않고 독자 행동을 계속하여, 우스이 고개(碓氷峠)를 목표로 진군했다. 신정부는 사가라 일당 적보대의 반복적인 독자 행동과 독단적인 행위를 우려하여 귀환을 명령했지만, 사가라 일당은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사가라 일당 적보대는 관군의 이름을 이용하여 도로변에서 함부로 금곡을 징수하고, 약탈 행위를 하는 가짜 관군(偽官軍)으로 여겨지게 되었다.[4]
도산도군(東山道軍)은 적보대 체포 명령을 신슈(信州) 제번에 통달했고, 이전부터 적보대의 행동에 반감을 품고 있던 고모로 번(小諸藩) 등 인근 제번이 연합하여 적보대를 공격했다. 이때 사가라는 지금까지 무시해왔던 도산도 총독부의 소환에 마침내 응하여 부대를 비워두었다.[4]
출두한 사가라는 도산도군 소속을 정식으로 인정받았지만, 고모로 번으로부터 적보대의 임의적인 자금 조달과 폭행 행위를 신고받음으로써, 마침내 처형되었다(사가라 소우조(相楽総三)・적보대 사료집(赤報隊史料集)).[4]
6. 대중문화 속 세키호타이
만화 및 애니메이션 시리즈 ''바람의 검심''에서 사가라 사노스케는 세키호타이 1번대의 유일한 생존자로 등장한다. 허구의 인물이지만, 사가라 소조의 양자로 묘사된다.
1969년 영화 ''레드 라이온''에서 주인공인 말더듬이에 어리숙한 보병 곤조는 세키호타이 1번대 대원으로 등장한다.
하세가와 신(長谷川伸) 『사라쿠 소우조우와 소노 도우시』(『에도 바쿠마츠 시』개제) 신소설사 1943년, 후에 중공문고
노구치 타츠지(野口達二) 『좋은 이야기일수록 위험하다 사라진 적보대』(いい話ほどあぶない 消えた赤報隊) 사・에・라 서방 1978년 ISBN 9784378020266
호쿠호 켄조(北方謙三) 『풀포기 시들어가다』(草莽枯れ行く) 슈에이샤 문고 2002년 ISBN 9784087474428
토고 타카시(東郷隆) 『설중의 죽음』(단편집 『나 늑대가 되다』(我餓狼と化す) 지쓰교우노니혼샤 문고 수록)
『적모』(赤毛) 오카모토 기하치(岡本喜八) 감독, 1969년
6. 1. 바람의 검심
만화 및 애니메이션 시리즈 ''바람의 검심''에서 사가라 사노스케는 세키호타이 1번대의 유일한 생존자로 등장한다. 허구의 인물이지만, 사가라 소조의 양자로 묘사된다.6. 2. 영화 '레드 라이온'
1969년 영화 ''레드 라이온''에서 주인공인 말더듬이에 어리숙한 보병 곤조는 세키호타이 1번대 대원으로 등장한다.참조
[1] 
웹사이트
 
Sagara Festival and the Sekihōtai Army of the Meiji Restoration : Research : Chuo Online : YOMIURI ONLINE
 
http://www.yomiuri.c[...] 
2018-06-05
 
[2] 
웹사이트
 
EDITORIAL: Harassment against NHK
 
http://www.asahi.com[...] 
Asahi Shimbun
 
2009-02-26
 
[3] 
서적
 
黒駒勝蔵隊清水次郎長
 
[4] 
서적
 
ビジュアル幕末維新 「日本の夜明け」を目指した激動の時代を追う!!
 
Gakk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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