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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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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돌석은 본명이 신태호이며, 대한제국 시기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18세에 의병을 일으켜 경상북도 동해안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유격전을 펼쳤다. 1907년 13도 창의군 결성 시 교남창의대장에 선임되었으나, 1908년 부하의 손에 암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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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신돌석
현지어 표기申乭石
본명신태호
순경
이명신돌석
신돌석
신태을
신태홍
신대호
별명태백산 호랑이
출생일1878년 11월 26일 (음력 11월 3일)
사망일1908년 12월 12일 (31세)
출생지조선 경상도 영해군 축산면 도곡리 (現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사망지대한제국 경상북도 영덕군 북면 눌곡리 (現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눌곡리)
종교유교(성리학)
배우자한재여
부모신석주(부), 분성 김씨 부인(모)
자녀신만이(아들), 신병욱(양자)
친척신우경(아우)
박수찬(자형)
한용수(손윗처남)
김자성(친가친척 형제)
김도윤(친가친척 형제)
김도룡(친가친척 형제)
김상렬(외가친척 형제)
김상호(외가친척 형제)
김상태(외가친척 형제)
군사 정보
복무대한제국 조선 항일 의병
복무 기간1895년 음력 8월 ~ 1908년 음력 1월
최종 계급13도 창의군 교남창의대장
지휘13도 창의군 의병장
주요 참전 전투/전쟁을미사변 항거 봉기
을사늑약 항거 봉기
서훈
서훈 내역[[파일:건국훈장2대통령장.png|x10px]]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웹사이트
웹사이트신돌석(독립유공자 공훈록)

2. 이름

본명은 '''신태호'''(申泰浩)이며, '''신태을'''(申泰乙), '''신태홍'''(申泰洪), '''신대호'''(申大浩)라고도 불린다. 자는 순경(舜卿)이다.

3. 생애

신돌석은 1878년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의 평범한 평민 농가에서 태어났으며, 평산 신씨이다.[2] 1895년 을미사변단발령을 계기로 1896년 18세의 나이로 의병에 참여하였다. 1907년 13도 창의군 결성에 참여하였고, 1908년 31세의 나이로 부하의 배신에 의해 암살되었다.[5]

1904년 울진 평해 월송정에서 시를 읊었다. 1907년 아들 신만이가 사망하였고, 1927년 양자 신병욱이 출생하였다(입양 시기는 불명). 1952년 부인 한재여 여사가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상이 추서되었고, 둘째 동생 신태범이 같은 해 사망하였다. 1999년 신돌석 장군 유적지가 건립되었고, 2000년부터 신돌석 장군 추모제향이 거행되고 있다.

3. 1. 초기 생애 (1878년 ~ 1895년)

1878년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서 평범한 평민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석주의 아들이자 평산 신씨의 일원이었다.[2] 1888년 둘째 동생 신태범이 태어났다. 1895년 을미사변단발령으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8세의 신돌석은 이에 참여하였다.

3. 2. 의병 투신과 초기 의병 활동 (1896년 ~ 1904년)

1895년 을미사변단발령으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신돌석은 18세의 나이로 이에 참여하였다.[1] 1896년 7월 13일~7월 14일에는 영덕대교 오십천 전투에 참전하여 김하락 연합부대에 합류해 오십천에서 일본군과 싸워 승리하였다.[1]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내려진 단발령은 반일 감정을 더욱 촉발시켰고, 전국 각지에서 일본에 대항하는 의병이 일어났다.[1] 당시 19세였던 신돌석은 100명의 군사를 모아 반일 운동에 참여하였다.[1]

이후 신돌석은 경상북도 동해안 지방을 차례로 점령하는 큰 전과를 올렸고, 경북 출신으로 경기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김하락 부대에 안동의 유시연과 함께 합세하였다. 그러나 김하락의 의병 연합 부대가 영덕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하여 김하락이 중상을 입고 투신 자살하면서 그의 의병대도 해산되었다.[1]

1904년에는 울진 평해 월송정에서 시를 읊었다.[1]

3. 3. 본격적인 의병 활동과 전성기 (1905년 ~ 1907년)

1905년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 이후 신돌석은 동생 신우경과 함께 재차 의병을 일으켰다.[1] 1906년 제2차 영릉의진을 일으켰는데, 당시 28세였다.[1] 울진군에서 일본 선박을 여러 척 격침시키고,[1] 1906년 영해읍성을 격파하였으며, 같은 해 울진 장흥관을 격침시켰다.[1] 강원도 동해안 일대, 경상북도 내륙 지방, 원주 등 강원 내륙 지방까지 세력을 확대했다.[1] 이때부터 그는 '태백산 호랑이'로 불릴 만큼 신출귀몰한 전공으로 이름을 날렸고 여러 구전 전설들도 만들어졌다.[1]

1907년 고종 퇴위 및 군대 해산 이후,[1] 영덕읍성, 영해읍성, 영덕 관공서를 차례로 격파하였다.[1] 이강년의 의병대와 순흥을 공격하는 연합 작전을 시도하는 등 계속 전과를 올리면서 경북 일대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부상하였다.[1] 이인영의 연합 의병 13도 창의군이 결성되었을 때 영남 지방을 담당하는 교남창의대장에 선임되는 등 양반 출신의 유학자 의병대장들도 그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할 정도의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1]

3. 4. 유격전과 최후 (1908년)

1907년 13도 창의군 결성에 참여하였으나,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른 장군들로부터 연합에서 배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돌석은 게릴라 전술을 সফলভাবে 활용하여 일본군에 대한 성공적인 작전을 이끌었다. 하지만 일본 제국군은 독립 투사들의 은신처에서 발견되는 모든 한국인을 신분에 관계없이 몰살하기 시작했고, 신돌석의 군대는 특히 큰 타격을 받았다.[1]

1908년부터는 유시연의 부대와 연계하면서 주로 유격전 위주로 항쟁을 펼쳤다. 그해 겨울 영덕의 눌곡(訥谷)에서 부하의 배신으로 암살되었다.[5]

신돌석을 살해한 사람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은 김상렬(金相列) 삼형제에 의한 살해이다.[5] 신돌석의 부하였으며 외사촌 또는 이종사촌이었던 김상렬이 형제인 김상태(金相泰), 김상호(金相浩)와 함께 신돌석에게 걸려 있던 거액의 현상금을 노리고 독이 든 술을 먹인 뒤 도끼로 살해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신돌석의 시체를 일본군에 바쳐 상금을 타려는 속셈으로[6] 독주를 만들어 신돌석에게 대접했고, 그는 이 독주를 마시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6] 김상렬 형제는 도끼로 신돌석을 살해했다.

다른 설로는 김도윤, 김도룡(또는 김도용) 형제라는 설[7], 범인은 김자성이고 그가 신돌석의 고종 사촌이었다는 설[8] 등이 있다. 국가보훈처의 포상자 공적조서에 따르면, 신돌석의 고종형제 김자성(金自聖)이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삼형제가 도끼로 쳐 죽였다고 하며, 신돌석의 유해를 일본 헌병대에 넘겼으나 생포하지 않고 살해 후 넘겼다는 이유로 현상금을 받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9]

4. 가족 관계

관계이름
아버지신석주(申錫柱)
어머니분성 김씨
누나신씨
매형박수찬
손윗처남한용수
부인한재여(韓在汝|한재여중국어, 1878년~1952년)
아들신만이(申萬|신만이중국어, ?~1908년)
양자(조카)신병욱(申秉旭|신병욱중국어, 1927년~)
동생신우경(申友慶|신우경중국어, 본명 신태범(申泰範), 이명 신도환(申道環), 1888년~1962년)


5.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1] 1995년 경상북도 영덕군에 있는 그의 생가인 초가집이 복원되었다.[10][11]

6. 평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상투를 금지하는 칙령이 내려지면서 반일 감정이 커졌고, 이에 따라 의병들이 일어났다. 1905년 을사조약의 불평등하고 강압적인 성격 때문에 신돌석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1907년, 한국은 일본과 또 다른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고, 이때 이전에 불규칙적으로 활동하던 의병들은 마침내 일본군에 대항하여 연합을 결성했다.[1]

그러나 신돌석은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른 장군들에게 연합에서 배제되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신분 제도를 강하게 고수했기 때문에 평민이 군대를 이끄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신돌석은 게릴라 전술을 성공적으로 사용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의 군대를 환영했고, 일본군에 대한 성공적인 작전을 시작했다.[1]

하지만 일본 제국군은 독립 투사들의 은신처에서 발견되는 모든 한국인을 신분에 관계없이 몰살하기 시작했고, 신돌석의 군대는 특히 큰 타격을 받았다. 이후 신돌석은 일본을 서서히 몰아내는 데 기여했으나, 1908년 그에게 걸린 막대한 현상금에 눈이 먼 사촌에 의해 살해당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 독립에 기여한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건국훈장을 수여했다.[1]

참조

[1] 웹사이트 신돌석 http://100.naver.com[...] Naver encyclopedia
[2] 웹사이트 신돌석 (申乭石) https://encykorea.ak[...] Academy of Korean Studies 2024-09-25
[3] 웹사이트 潜水艦に復活した「太白山の虎」申乭石将軍 https://www.donga.co[...] 東亜日報 2017-08-15
[4] 웹사이트 韓国海軍の最新鋭潜水艦「申ドル石」が進水 19年に作戦配備 https://jp.yna.co.kr[...] 聯合ニュース 2017-09-07
[5] 웹사이트 독립유공자 공훈록 - 신돌석 http://narasarang.mp[...]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민족정기선양센터
[6] 서적 역사인물 이야기 역사비평사 1989
[7] 서적 신돌석 - 백년 만의 귀향 푸른역사 2004
[8] 웹사이트 전쟁기념관 신돌석 흉상 설명 http://www.korea-mus[...] 대한민국 문화관광부 e뮤지엄
[9] 웹사이트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포상자 공적조서 http://e-gonghun.mpv[...]
[10] 웹사이트 신돌석장군 생가 / 유적지 (경북 영덕군) http://www.visitkore[...] 한국관광공사
[11] 뉴스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장군의 흔적을 찾아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7-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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