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슬란 야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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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슬란 야브구는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초반까지 활약한 셀주크 투르크의 지도자이다. 그는 카라한조와 사만조 사이의 분쟁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군사적 역량을 발휘했고, 카라한조와 여러 차례 대립했다. 1025년 가즈나 왕조의 마흐무드에 의해 포로로 잡혀 유폐되었으며, 1032년 또는 1033년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 쿠탈므쉬와 손자 술레이만은 각각 셀주크 제국과 룸 셀주크 술탄국 건국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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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슬란 야브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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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작위 | 야브구 |
재위 | 1009년 ~ 1032년? 1033년 |
전임자 | 셀주크 |
후임자 | 무사 야브구 |
종교 | 이슬람교 |
가문 | |
왕조 | 셀주크 가문 |
아버지 | 셀주크 |
자녀 | 쿠탈므쉬 |
생애 | |
사망일 | 1032년? 1033년 |
2. 이름
아르슬란의 또 다른 이름은 İsrâil|이스라일tur이다. 그의 동생들은 각각 미하일과 무사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이는 초기 셀주크 집단이 유대교를 믿었던 하자르 제국이나 중앙아시아의 네스토리우스교 신자들과 교류한 결과로 추정된다.[5]
아르슬란 야브구는 992년 카라한조와 사만조 사이의 전쟁에서 아버지를 대신해 군대를 이끌고 사만조를 지원하며 처음으로 역사에 이름을 알렸다. 이 공로로 그의 부족은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사이에서 유목할 권리를 얻었다.[4][5] 그는 999년 카라한조가 부하라를 정복한 이후에도 사만조와 협력하여 카라한조에 맞서 싸웠다.[4][5]
3. 생애
1009년 아버지 셀주크가 사망하자 아르슬란은 셀주크 가문의 지도자 자리를 이어받고 야브구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4][6] 이후 그는 카라한조의 내부 분열에 개입하여 알리 테긴을 지원했고, 알리 테긴은 아르슬란의 도움으로 1020년 또는 1021년에 부하라의 통치자가 되었다.[4][7]
그러나 아르슬란의 세력 확장은 가즈나조의 술탄 마흐무드의 경계를 샀다. 1025년 마흐무드는 트란스옥시아나를 침공하여 아르슬란과 알리 테긴 연합군을 격파했고, 아르슬란과 그의 아들 쿠탈므쉬는 포로로 잡혀 유폐되었다.[4][7]
1030년 마흐무드가 사망한 후, 아르슬란의 조카인 투으룰과 차으르 형제는 새로운 술탄 마수드에게 아르슬란의 석방을 요청했다. 마수드는 이를 받아들였으나, 풀려난 아르슬란이 마수드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다시 그를 유폐시켰다. 이 과정에서 아들 쿠탈므쉬는 탈출에 성공했다. 아르슬란 야브구는 결국 1032년 또는 1033년 유폐된 상태에서 사망했다.[4][7]
아르슬란 야브구 사후 셀주크 가문의 명목상 지도자는 동생 무사가 되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투으룰과 차으르 형제에게 넘어갔다.[6] 아들 쿠탈므쉬는 훗날 셀주크 가문의 지도자 자리를 놓고 알프 아르슬란과 다투다 전사했으며, 쿠탈므쉬의 아들 쉴레이만은 소아시아로 건너가 룸 셀주크 왕국을 건국하게 된다.[8][9][10]
3. 1. 초기 생애와 부상
아르슬란은 키닉 부족 출신으로, 이 부족은 오구즈 튀르크의 한 갈래였다. 키닉 부족은 시르다리야강(세이훈강) 북쪽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카라한조 영토와 가까운 젠드 시 주변에 정착했다.[1] 일부 역사가들은 키닉 부족이 과거 하자르의 봉신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1] 아르슬란의 아버지는 부족의 지도자였던 셀주크였다.[1]
아르슬란은 992년 카라한조와 사만조 사이의 전쟁에서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카라한조의 통치자 하룬 부그라 칸이 사만조를 공격하자, 아무다리야강 남쪽에 위치한 페르시아계 국가였던 사만조의 통치자 누흐 2세는 셀주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1][4][5] 셀주크는 아들 아르슬란을 지휘관으로 삼아 구원군을 보냈고, 아르슬란은 카라한 군대를 격파하는 데 기여하며 전투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4][5][1] 이 공로로 사만조는 아르슬란과 그의 추종자들이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사이 지역에서 유목하는 것을 허락했다.[4][5]
999년 카라한조의 일리그 칸 나스르가 부하라를 정복하자, 아르슬란은 다시 사만조와 협력하여 1003년부터 1004년까지 카라한조의 군대와 싸웠다.[4][5]
1009년 아버지 셀주크가 젠드에서 사망하자, 아르슬란이 부족의 지도자 자리를 이어받았다.[4][6][1] 이후 그는 '야브구'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4] 그의 형제로는 셀주크 제국을 세운 술탄 투으룰과 차으르의 아버지인 미카일이 있었다.[1]
1012년 카라한조의 군주 일리그 칸 나스르가 사망한 후, 아르슬란 야브구는 그의 일족인 알리 테긴과 손을 잡고 다른 카라한조 군주인 일리그 칸 무함마드 이븐 알리와 대립했다. 아르슬란의 지원 덕분에 알리 테긴은 1020년 또는 1021년에 부하라의 통치자가 될 수 있었다.[4][7]
그러나 이러한 세력 확장은 주변 강대국을 자극했다. 또 다른 카라한조 군주 유수프 카디르 칸은 1025년 가즈나조의 술탄 마흐무드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그를 트란스옥시아나로 불러들였다. 마흐무드는 기습적으로 아르슬란 야브구와 알리 테긴의 군대를 공격하여 격파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아르슬란 야브구와 그의 아들 쿠탈므쉬, 그리고 소수의 측근들은 포로가 되어 유폐되었다.[4][7]
3. 2. 카라한 왕조와의 갈등
아르슬란 야브구는 카라한조와 사만조 사이의 전쟁에서 처음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992년, 카라한조의 통치자 하룬 부그라 칸이 사만조를 공격하자, 사만조의 통치자 누흐 2세는 셀주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셀주크는 아들 아르슬란을 지휘관으로 삼아 구원군을 보냈고, 아르슬란의 도움으로 사만조는 카라한 군대를 격파할 수 있었다. 이 공로로 사만조는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사이 지역에서 아르슬란과 그의 추종자들이 유목하는 것을 허락했다.[4][5]
999년 카라한조의 일리그 칸 나스르가 부하라를 정복하면서 상황은 다시 변했다. 아르슬란은 1003년부터 1004년까지 다시 사만조와 협력하여 카라한조 군대와 싸웠다.[4][5] 카라한 왕조는 아르슬란의 군대에 여러 차례 패배를 겪었다.[1]
1009년, 아버지 셀주크가 젠드에서 사망하자 아르슬란이 가주의 자리를 이어받았고[4][6], 이후 야브구의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4]
1012년 카라한조의 군주 일리그 칸 나스르가 사망한 후, 카라한조 내부의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아르슬란 야브구는 일리그 칸 나스르의 일족인 알리 테긴과 협력하여 또 다른 카라한조 군주인 일리그 칸 무함마드 이븐 알리와 싸움을 벌였다. 아르슬란의 지원을 받은 알리 테긴은 1020년 또는 1021년에 부하라의 통치자가 되었다.[4][7] 아르슬란은 이처럼 카라한 왕조 내전에 개입하여 알리 티긴을 지지했다.[1]
그러나 이러한 개입은 새로운 위협을 불러왔다. 1025년, 알리 테긴과 대립하던 또 다른 카라한조 군주 유수프 카디르 칸은 당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지역에 제국을 건설했던 투르크계 왕조인 가즈나조의 술탄 마흐무드와 동맹을 맺고 아르슬란 세력에 대항했다.[1] 마흐무드는 트란스옥시아나로 신속하게 군대를 이동시켜 아르슬란 야브구와 알리 테긴의 군대를 습격하여 격파했다. 이 과정에서 아르슬란 야브구와 그의 아들 쿠탈므쉬는 마흐무드에게 포로로 잡혔다.[4][7][2]
아르슬란 야브구의 체포 경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장 폴 루에 따르면 전투 중에 체포되었다고 한다.[3] 반면, 이슬람 백과사전에 따르면 마흐무드가 음모를 꾸며 아르슬란을 체포했다고 전한다. 마흐무드는 아르슬란을 평화 회담에 초대한 뒤, 회담 후 열린 만찬 자리에서 아르슬란과 그의 아들 쿠탈므쉬를 체포하고 그들을 수행하던 병사들은 살해했다는 것이다.[1] 체포된 아르슬란과 쿠탈므쉬는 인도에 위치한 칼린자르 요새로 보내져 유폐되었다.[1]
1030년 마흐무드가 사망한 뒤, 아르슬란 야브구의 조카인 투으룰과 차으르 형제는 마흐무드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술탄 마수드에게 아르슬란 야브구를 풀어줄 것을 청원했다. 마수드는 이를 받아들여 아르슬란 야브구를 발흐 지방에서 석방했다. 그러나 풀려난 아르슬란 야브구는 투으룰, 차으르 형제 및 동생 무사와 비밀리에 교류하며 마수드에게 맞설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었다. 결국 마수드는 다시 아르슬란 야브구를 유폐시켰고, 이 과정에서 아들 쿠탈므쉬는 탈출하여 부하라로 돌아갔다. 아르슬란 야브구는 1032년 또는 1033년에 결국 유폐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했다.[4][7]
3. 3. 가즈나 왕조의 개입과 몰락
1012년 카라한조의 군주 일리그 칸 나스르가 죽자, 아르슬란 야브구는 일리그 칸 나스르의 일족인 알리 테긴과 협력하여 또 다른 카라한조의 군주 일리그 칸 무함마드 이븐 알리와 싸움을 벌였다. 알리 테긴은 아르슬란의 지지를 얻어 부하라의 통치자가 되었다. (1020년/1021년)[4][7]
이에 위협을 느낀 또 다른 카라한조의 군주 유수프 카디르 칸은 1025년, 가즈나조의 마흐무드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동맹을 맺었다. 마흐무드는 군대를 이끌고 트란스옥시아나로 와서 아르슬란 야브구와 알리 테긴의 군대를 기습 공격하여 격파했다.[4][7][1] 아르슬란 야브구와 그의 아들 쿠탈므쉬, 그리고 소수의 측근들은 포로가 되었다.[4][7]
아르슬란 야브구가 포로가 된 경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장 폴 루에 따르면, 그는 전투 중에 사로잡혔다고 한다.[3] 그러나 이슬람 백과사전 등 다른 기록에 따르면, 마흐무드는 계략을 써서 아르슬란을 체포했다고 전해진다. 마흐무드는 아르슬란을 평화 회담에 초대한 뒤, 회담 후 열린 만찬 자리에서 아르슬란과 그의 아들 쿠탈므쉬를 체포하고 그들을 수행하던 병사들은 살해했다는 것이다.[1] 마흐무드는 아르슬란과 쿠탈므쉬를 인도의 칼린자르 요새로 보내 유폐시켰다.[1]
1030년 마흐무드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마수드가 술탄이 되자, 아르슬란 야브구의 조카인 투으룰과 차으르 형제는 마수드에게 아르슬란 야브구를 풀어줄 것을 청원했다. 마수드는 이를 받아들여 아르슬란 야브구를 발흐 지방에서 풀어주었다. 그러나 풀려난 아르슬란 야브구는 투으룰과 차으르 형제, 그리고 동생 무사와 비밀리에 연락하며 마수드에게 대항할 계획을 세웠으나, 이 음모는 발각되었다. 분노한 마수드는 아르슬란 야브구를 다시 유폐시켰다. 이 과정에서 아르슬란 야브구의 아들 쿠탈므쉬는 탈출하여 부하라로 돌아가는 데 성공했다. 아르슬란 야브구는 결국 1032년 또는 1033년에 유폐된 상태에서 사망했다.[4][7]
아르슬란 야브구가 죽은 뒤 셀주크 가문의 명목상 가주 지위는 동생 무사 야브구에게 넘어갔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투으룰과 차으르 형제가 장악하게 되었다.[6] 한편, 탈출했던 쿠탈므쉬는 훗날 투으룰 사후 셀주크 가문의 지도자 자리를 놓고 알프 아르슬란과 다투다 전사했다. 쿠탈므쉬의 아들 쉴레이만은 이후 소아시아로 도망쳐 룸 셀주크 왕국을 세우게 된다.[8][9][10]
3. 4. 유배와 죽음
1025년, 또 다른 카라한조의 군주 유수프 카디르 칸은 가즈나조의 마흐무드를 트란스옥시아나로 불러들였다.[4][7] 마흐무드는 기습적으로 아르슬란 야브구와 알리 테긴의 군대를 공격하여 격파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아르슬란 야브구와 그의 아들 쿠탈므쉬, 그리고 소수의 측근들은 포로가 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4][7]
1030년 마흐무드가 사망한 후, 아르슬란의 조카인 투으룰과 차으르 형제는 마흐무드의 후계자인 술탄 마수드에게 아르슬란 야브구를 석방해달라고 요청했다.[4][7] 마수드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아르슬란 야브구를 발흐 지방에서 풀어주었다.[4][7] 그러나 석방된 아르슬란 야브구는 투으룰, 차으르 형제 및 동생 무사와 비밀리에 연락하며 마수드에 대항할 음모를 꾸몄다. 이 계획이 발각되면서 마수드는 아르슬란 야브구를 다시 감옥에 가두었다. 이 혼란 속에서 아르슬란의 아들 쿠탈므쉬는 감옥을 탈출하여 부하라로 도망쳤다.[4][7] 아르슬란 야브구는 결국 남은 생을 감옥에서 보내다가 1032년 또는 1033년에 사망했다.[4][7][1]
4. 유산
아르슬란의 조카들인 투그릴과 차그리는 셀주크 제국을 건국했다. 쿠탈미쉬 또한 전투에 참여했으며, 훗날 왕위를 놓고 경쟁했으나 실패했다. 아르슬란의 손자인 술레이만은 룸 셀주크 술탄국을 건국했다.
참조
[1]
웹사이트
Islam Encyclopedia Vol 3 p.403-404
http://www.islamansi[...]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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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worldc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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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적
Türklerin Tarihi
Kabalcı Yayınevi
2007
[4]
웹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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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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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논문
Selju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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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7]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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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8]
웹인용
Süleyman Şah I
https://islamansiklo[...]
Türkiye Diyanet Vakfı
2019-01-20
[9]
논문
Sulaymān b. Ḳutulmi̊s̲h̲
Brill Publishers
1997
[10]
논문
Social, cultural and intellectual life, 1071–1453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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