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타셰산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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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타셰산 왕조는 기원전 188년 아르메니아의 첫 번째 왕인 아르타셰스 1세가 셀레우코스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며 시작되었다. 아르타셰스는 오론티드 왕조의 후손임을 주장했지만, 학자들은 그가 이전 오론티드 왕조와 관련된 지역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르타셰스 왕조는 아르메니아 고원의 영토를 확장하고 통합하는 데 힘썼으며, 특히 티그라네스 2세 시대에는 아르메니아 제국이 동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부상했다. 아르타셰스 왕조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 양식의 동전을 주조하고, 그리스 지식인들을 초청하는 등 헬레니즘 문화를 수용했다. 그러나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의 완충 국가로 전락하면서 쇠퇴하여, 결국 로마의 보호령이 되었고 아르사케스 왕조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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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타셰산 왕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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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국가 | 아르메니아 시리아 킬리키아 알바니아 이베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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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계 | 오론트 왕조 |
창시자 | 아르타셰스 1세 |
마지막 통치자 | 에라토 |
설립 연도 | 기원전 190년 |
해체 연도 | 서기 12년 |
현재 수장 | 절멸 |
작위 |
2. 왕조의 기원
아르타셰스 왕조는 오론티드 왕조를 무너뜨리고 등장했다. 기원전 190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이 패배한 후, 아르타셰스 가문의 아르메니아 귀족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독립을 선언했고, 아르타셰스 1세가 기원전 188년에 왕위에 올랐다.
학자들은 아르타셰스 1세와 자리아드레스가 이전 오론티드 왕조와 관련된 지역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들의 이란-아르메니아식 이름이 이를 뒷받침한다.[1][2] 니나 가르소이안은 아르타셰스 왕조가 기원전 5세기부터 아르메니아를 지배한 이란계 오론티드 왕조의 분파라고 주장했다.[3][4]
2. 1. 스트라보의 기록과 아르타셰스 1세의 등장
스트라보에 따르면, 아르타셰스와 자리아드레스는 각각 대 아르메니아와 소페네 지역을 다스리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사트라프였다. 기원전 190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셀레우코스가 패배한 후, 아르타셰스 가문의 아르메니아 귀족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오론티드 왕조를 전복하고 독립을 선언했으며, 아르타셰스는 기원전 188년 아르메니아 아르타셰스 왕조의 첫 번째 왕이 되었다.학자들은 아르타셰스와 자리아드레스가 외국 장군이 아니라 이전 오론티드 왕조와 관련된 지역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는데, 이는 그들의 이란-아르메니아(그리스어가 아닌) 이름이 이를 시사하기 때문이다.[1][2] 역사학자 니나 가르소이안에 따르면, 아르타셰스 왕조는 적어도 기원전 5세기부터 아르메니아를 지배한 것으로 알려진 이란 기원의 이전 오론티드 왕조의 분파였다.[3][4]
2. 2. 오론티드 왕조와의 관계
스트라보에 따르면, 아르타셰스 1세와 자리아드레스는 각각 대 아르메니아와 소페네 지역을 다스리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두 사트라프였다. 기원전 190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셀레우코스가 패배한 후, 아르타셰스 가문의 아르메니아 귀족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오론티드 왕조를 전복하고 독립을 선언했으며, 아르타셰스는 기원전 188년 아르메니아 아르타셰산 왕조의 첫 번째 왕이 되었다.학자들은 아르타셰스와 자리아드레스가 외국 장군이 아니라 이전 오론티드 왕조와 관련된 지역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는데, 이는 그들의 이란-아르메니아(그리스어가 아닌) 이름이 이를 시사하기 때문이다.[1][2] 역사학자 니나 가르소이안에 따르면, 아르타셰스 왕조는 적어도 기원전 5세기부터 아르메니아를 지배한 것으로 알려진 이란 기원의 이전 오론티드 왕조의 분파였다.[3][4]
3. 아르타셰스 1세의 영토 확장과 통합
아르타셰스 1세는 아르메니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왕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그는 오론티드 왕조의 정당한 후손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그 왕조와 관련이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통치 초기에 아르메니아 고원의 일부, 즉 아르메니아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인접 국가의 지배하에 남아 있었다. 아르타셰스는 이러한 영토를 자신의 지배하에 재통합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리스의 지리학자이자 역사가인 스트라본은 아르타셰스의 서쪽, 동쪽, 북쪽, 남쪽으로의 정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Ἀρμενία|아르메니아grc는 이전에는 작은 나라였지만, 안티오코스 3세의 장군이었던 아르타셰스와 자리 아드리스가 영토를 확장했다. 그들은 안티오코스 3세가 패배한 후 왕이 되었다(아르타셰스는 소페네, 아키세네, 오도만티스 등의 왕이었고, 자리 아드리스는 아르타샤트 주변 지역의 왕이었다). 그들은 주변 국가들의 일부를 빼앗아 공동으로 왕국을 넓혔다. 즉, Μηδία|메디아grc에서 카스피아네와 파우니티스, 바소로페다를, 파리야드레스 산맥 옆 지역과 코르세네, 그리고 쿠라강 건너편에 있는 고가레네를 Ἰβηρία|이베리아grc인들에게서 빼앗았다. 또한, 카레니티스와 젝세네는 소(小) 아르메니아와 접해 있거나 그 일부인데, 찰리비안과 모시노에키에서 빼앗았고, 안티타우루스 주변의 아킬리세네와 지역을 카타오니아인에게서, 타로니티스를 시리아인에게서 빼앗았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아르타셰스 시대의 석조 경계 표석 12개 이상이 현대 아르메니아 영토에서 발견되었으며, 아람 문자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비문의 존재는 모세스 오브 코렌에 의해 이미 증명되었다. 비문에서 아르타셰스는 오론티드 왕조의 후손임을 주장하며 자신을 "오론티드 자리 아드리스의 아들, 아르타셰스 왕"이라고 칭하고 있다.
3. 1. 수도 아르타샤타 건설
스트라본과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아르타셰스 1세는 고대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의 도움을 받아 아르메니아의 수도 아르타샤타를 건설했다. 한니발은 로마인들을 피해 아르타셰스 1세의 궁정에서 보호받고 있었다. 이전 오론티드 왕조의 수도인 예르반다샤트의 주민들은 아르타샤타로 이주했다.3. 2. 경계 표석과 아람어 비문
아르타셰스는 아르메니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왕들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스스로 오론티드 왕조의 정당한 후계자라고 주장하였으나, 실제로 그 왕조와 어떤 관계였는지는 불분명하다. 아르타셰스 1세의 통치 초기, 아르메니아 고원 일부 지역, 즉 아르메니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은 주변 국가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아르타셰스는 이 영토들을 다시 통합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리스의 지리학자이자 역사가인 스트라본은 아르타셰스가 서쪽, 동쪽, 북쪽, 남쪽으로 영토를 넓힌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스트라본의 《지리지》 11권 14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Ἀρμενία|아르메니아grc는 이전에는 작은 나라였지만, 안티오코스 3세의 장군이었던 아르타셰스와 자리 아드리스가 영토를 확장했다. 그들은 안티오코스 3세가 패배한 후 왕이 되었다(아르타셰스는 소페네, 아키세네, 오도만티스 등의 왕이었고, 자리 아드리스는 아르타샤트 주변 지역의 왕이었다). 그들은 주변 국가들의 일부를 빼앗아 공동으로 왕국을 넓혔다. 즉, Μηδία|메디아grc에서 카스피아네와 파우니티스, 바소로페다를, 파리야드레스 산맥 옆 지역과 코르세네, 그리고 쿠라강 건너편에 있는 고가레네를 Ἰβηρία|이베리아grc인들에게서 빼앗았다. 또한, 카레니티스와 젝세네는 소(小) 아르메니아와 접해 있거나 그 일부인데, 찰리비안과 모시노에키에서 빼앗았고, 안티타우루스 주변의 아킬리세네와 지역을 카타오니아인에게서, 타로니티스를 시리아인에게서 빼앗았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스트라본과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아르타셰스는 고대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의 도움을 받아 아르메니아의 수도 아르타샤트를 건설했다. 한니발은 로마인들을 피해 아르타셰스 왕의 궁정에서 보호를 받고 있었다. 이전 오론티드 왕조의 수도였던 예르반다샤트 주민들은 아르타샤트로 이주했다.
아르타셰스 통치 시기에 만들어진 석조 경계 표석 12개 이상이 현대 아르메니아 영토에서 발견되었으며, 아람 문자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석재의 존재는 모세스 오브 코렌에 의해 이미 증명되었다. 비문에서 아르타셰스는 오론티드 왕조의 후손임을 주장하며 자신을 "오론티드 자리 아드리스의 아들, 아르타셰스 왕"이라고 칭하고 있다.
4. 헬레니즘의 영향
아르메니아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에 의해 표면적으로만 영향을 받았지만, 기원전 3세기에 오론테스 왕조 시대에 헬레니즘 세계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은 아르타셰스 왕조, 특히 티그라네스 대왕 때 절정에 달했다. 이 시기에 아르메니아 통치자들은 많은 그리스 요소를 받아들였다.[1] 아르메니아에서 그리스어 지식은 현존하는 양피지 및 암석 비문에서도 나타난다. 티그라네스 2세의 후계자인 아르타바스데스 2세는 심지어 그리스 비극을 직접 작곡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메니아 문화는 종교적인 문제에서 특히 강한 이란적 요소를 여전히 유지했다.[2]
4. 1. 그리스 양식의 동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은 아르메니아에 표면적인 영향만 주었지만, 기원전 3세기에 오론테스 왕조 시대부터 헬레니즘 세계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이 과정은 아르타셰스 왕조, 특히 티그라네스 대왕 때 절정에 달했다. 이 시기에 아르메니아 통치자들은 많은 그리스 요소를 받아들였는데, 이는 오론테스 왕조 때 처음 등장한 아르메니아의 동전에서 나타난다. 이 동전들은 그리스 양식을 따랐으며 그리스어로 된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일부 동전은 아르메니아 왕들을 "친헬레네스"("그리스 문화를 사랑하는 자")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티그라네스 2세와 아르타바스데스 2세 모두 그리스어 비문이 새겨진 동전을 주조했다.4. 2. 그리스 지식인들의 초청
티그라네스 대왕의 아내 클레오파트라는 수사학자 암피크라테스와 역사가 셉시스의 메트로도로스와 같은 그리스인들을 아르메니아 궁정으로 초청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로마 장군 루쿨루스가 아르메니아의 수도 티그라노케르타를 점령했을 때 티그라네스를 위해 연극을 공연하러 온 그리스 배우단을 발견했다고 한다.[1]5. 예술과 건축
아르타셰스는 세반호 주변에 토지 소유권을 표시하기 위해 아케메네스 왕조 양식을 연상시키는 경계석(석주)을 세웠다. 이 경계석에는 왕의 권위를 주장하는 아람어 비문이 새겨져 있으며, 아케메네스 왕관과 그의 "신 페르시아" 왕권을 나타낸다.
이러한 석주는 아르타셰스의 이름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계통임을 강조한다. "QTRbr"과 같은 일부 단어는 중세 페르시아어 "*tāgabar*"(왕관을 쓴 자, 왕)을 반영할 수 있으며, 이는 고대 아르메니아어에서 '왕'(t’agavor)으로 나타나 아르메니아 왕실 문화의 페르시아 기원을 보여준다.
6. 화폐
아르타셰스 왕조의 주화에는 모두 그리스어 문자가 새겨져 있다.[1] 아르타셰스 1세의 구리 주화 뒷면에는 산꼭대기에 앉아 왼쪽을 바라보는 독수리가 묘사되어 있다. 후대 주화에도 독수리만 새겨져 있는데, 이는 신성함이나 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2] 티그라네스 1세의 구리 주화 뒷면에는 왼쪽에 왕좌에 앉아 왼손으로 홀을 잡고 있는 남자가 묘사되어 있다.[3] 티그라네스 2세와 티그라네스 4세는 모두 헤라클레스의 모습을 새긴 구리 주화를 주조했다.[4]
티그라네스 2세 이전 왕들의 주화에는 "바실레오스 메갈루"(위대한 왕)라는 칭호가 새겨져 있었다.[5] 그러나 티그라네스 2세는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의 속국 왕으로 복위된 후 아르타샤트, 니시비스, 티그라노케르타에서 주조된 주화에 "바실레우스 바실레온"(왕 중의 왕)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7. 종교
역사가 제임스 R. 러셀은 "아르타셰스 왕조의 군주들이 스스로를 친헬레네라고 선언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들의 종교적 신념이 이전의 확고한 조로아스터교에서 멈추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다.[1] 데이비드 마셜 랭은 헬레니즘 종교와 고전적 신들의 판테온이 아르타셰스 왕조 후기 상류층 사이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인기를 얻었다고 덧붙인다.[2]
8. 티그라네스 대왕과 아르메니아 제국
티그라네스 대왕 (기원전 95–55년) 치세 동안 아르메니아 왕국은 최전성기를 맞이하여 잠시 동안 로마 공화국 동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아르타크시아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미 티그라네스가 제국을 건설할 토대를 마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악 지형인 아르메니아의 영토는 중앙 권력으로부터 상당한 자율성을 가진 나하라르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티그라네스는 왕국 내 안보를 창출하기 위해 그들을 통일했다. 아르메니아의 국경은 카스피해에서 지중해까지 뻗어 있었다. 당시 아르메니아인들은 너무 팽창하여 로마인과 파르티아인들이 연합하여 그들을 물리쳐야 했다.
파르티아로부터 광대한 영토가 빼앗겼고, 파르티아는 티그라네스와 우호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이베리아, 알바니아, 아트로파테네 역시 영토를 잃었고, 남은 왕국은 속국이 되었다. 셀레우코스 제국 내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83년에 티그라네스에게 셀레우코스 왕관을 제안했고, 그 후 아르메니아 제국은 현대 아크레, 이스라엘까지 남쪽으로 확장되어 하스몬 왕조와의 갈등을 초래했다.
8. 1. 제국의 확장
티그라네스 대왕(기원전 95–55년) 치세 동안 아르메니아 왕국은 최전성기를 맞이하여 잠시 동안 로마 공화국 동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아르타크시아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미 티그라네스가 제국을 건설할 토대를 마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악 지형인 아르메니아의 영토는 중앙 권력으로부터 상당한 자율성을 가진 나하라르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티그라네스는 왕국 내 안보를 창출하기 위해 그들을 통일했다. 아르메니아의 국경은 카스피해에서 지중해까지 뻗어 있었다. 당시 아르메니아인들은 너무 팽창하여 로마인과 파르티아인들이 연합하여 그들을 물리쳐야 했다. 티그라네스는 영토 내에서 더 중심적인 수도를 찾아 티그라노케르타라고 이름 지었다.
파르티아로부터 광대한 영토가 빼앗겼고, 파르티아는 티그라네스와 우호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이베리아, 알바니아, 아트로파테네 역시 영토를 잃었고, 남은 왕국은 속국이 되었다. 셀레우코스 제국 내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83년에 티그라네스에게 셀레우코스 왕관을 제안했고, 그 후 아르메니아 제국은 현대 아크레, 이스라엘까지 남쪽으로 확장되어 하스몬 왕조와의 갈등을 초래했다.
8. 2. 수도 티그라노케르타
티그라네스 대왕은 영토 내에서 더 중심적인 수도를 찾아 티그라노케르타라고 이름 지었다.9. 왕조의 쇠퇴
아르탁시아스 2세가 살해된 후, 아르타셰산 왕국은 로마 지지 세력과 파르티아 지지 세력 간의 내전으로 붕괴되었다. 결국 아우구스투스 황제 치하에서 로마의 보호령이 되면서 아르타셰산 왕조는 혼란 속에 쇠퇴했고, 아르사케스 왕조가 그들의 확실한 계승자로 등장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3]
9. 1. 로마와의 전쟁
로마의 소아시아 개입은 티그라네스 제국의 종말을 가져왔다. 티그라네스는 로마의 강력한 적 폰토스 왕국의 왕 미트리다테스 6세와 동맹을 맺었고, 기원전 69년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동안 루쿨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아르메니아 제국을 침공하여 티그라노케르타와 아르타샤타 밖에서 티그라네스를 격파했다.[3] 기원전 66년, 루쿨루스의 후임자인 폼페이우스는 마침내 티그라네스를 항복하게 만들었다. 폼페이우스는 아르메니아를 이전 국경으로 축소했지만, 티그라네스가 로마의 동맹국으로 왕위를 유지하도록 허용했다. 이때부터 아르메니아는 로마와 파르티아라는 두 경쟁 제국 사이의 완충 국가가 되었다.티그라네스의 후계자 아르타바스데스 2세는 로마와의 동맹을 유지하며, 파르티아에 대한 원정에서 로마 장군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에게 유용한 조언을 해주었지만, 이 조언은 무시되었고 크라수스는 카르해 전투에서 비참한 패배를 겪게 되었다.[3]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로마의 동부 속주를 통치하게 되자, 그는 여동생을 파르티아 왕위 계승자와 결혼시킨 아르타바스데스의 충성심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35년, 안토니우스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아르타바스데스를 이집트로 끌고 가서 포로로 만들었고, 그곳에서 나중에 처형되었다.[3]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신의 여섯 살 된 아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혔다. 아르타바스데스의 아들 아르탁시아스 2세는 파르티아의 도움을 받아 왕위를 되찾고 아르메니아에 주둔한 로마 수비대를 학살했지만, 10년 동안 통치한 후 살해당했다.[3] 왕국은 로마 지지 세력과 파르티아 지지 세력 간의 내전으로 붕괴되었고, 마침내 황제 아우구스투스 치하에서 로마의 보호령이 되었다. 아르탁시아드 왕조는 혼란 속에서 쇠퇴했으며, 아르사케스 왕조가 그들의 확실한 계승자로 등장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3]
9. 2.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의 완충 국가
로마의 소아시아 개입은 티그라네스 제국의 종말을 가져왔다. 티그라네스는 로마의 강력한 적 폰토스 왕국의 왕 미트리다테스 6세와 동맹을 맺었고, 기원전 69년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동안 루쿨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아르메니아 제국을 침공하여 티그라노케르타와 아르타샤타 밖에서 티그라네스를 격파했다.[3] 기원전 66년, 루쿨루스의 후임자인 폼페이우스는 마침내 티그라네스를 항복하게 만들었다. 폼페이우스는 아르메니아를 이전 국경으로 축소했지만, 티그라네스가 로마의 동맹국으로 왕위를 유지하도록 허용했다. 이때부터 아르메니아는 로마와 파르티아라는 두 경쟁 제국 사이의 완충 국가가 되었다.티그라네스의 후계자 아르타바스데스 2세는 로마와의 동맹을 유지하며, 파르티아에 대한 원정에서 로마 장군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에게 유용한 조언을 해주었지만, 이 조언은 무시되었고 크라수스는 카르해 전투에서 비참한 패배를 겪게 되었다.[3]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로마의 동부 속주를 통치하게 되자, 그는 여동생을 파르티아 왕위 계승자와 결혼시킨 아르타바스데스의 충성심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35년, 안토니우스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아르타바스데스를 이집트로 끌고 가서 포로로 만들었고, 그곳에서 나중에 처형되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신의 여섯 살 된 아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혔다. 아르타바스데스의 아들 아르탁시아스 2세는 파르티아의 도움을 받아 왕위를 되찾고 아르메니아에 주둔한 로마 수비대를 학살했지만, 10년 동안 통치한 후 살해당했다.[3] 왕국은 로마 지지 세력과 파르티아 지지 세력 간의 내전으로 붕괴되었고, 마침내 황제 아우구스투스 치하에서 로마의 보호령이 되었다. 아르탁시아드 왕조는 혼란 속에서 쇠퇴했으며, 아르사케스 왕조가 그들의 확실한 계승자로 등장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3]
10. 아르타셰스 왕조의 아르메니아 왕
- 아르타시스 1세 (기원전 190–159년)
- 티그라네스 1세 (기원전 159–123년)
- 아르타바스데스 1세 (기원전 123–95년)
- 티그라네스 대왕 (티그라네스 2세, 기원전 95–55년)
- 아르타바스데스 2세 (기원전 55–34년)
- 아르타시스 2세 (기원전 33–20년)
- 티그라네스 3세 (기원전 20–10년)
- 티그라네스 4세 (에라토와 공동 통치, 기원전 10–2년)
- 아리오바르자네스 2세 (기원전 2년–서기 4년)
- 아르타바스데스 3세 (서기 4–6년)
- 티그라네스 5세 (에라토와 공동 통치, 서기 6–12년)[4]
11. 아르타셰스 왕조 계보
Արտաշեսյանների արքայատոհմի|아르타셰스 왕조 계보hy는 시릴 투마노프가 제안하였다.[5]
이름 | 비고 |
---|---|
Զարեհ|자리아드레스hy | |
아르타셰스 1세 | 아르메니아 왕 (기원전 188년 ~ 기원전 159년) |
티그라네스 1세 | 아르메니아 왕 (기원전 149년 ~ 기원전 123년) 또는 (기원전 123년 ~ 기원전 95년) |
아르타바스데스 1세 | 아르메니아 왕 (기원전 159년 ~ 기원전 149년) 또는 (기원전 123년) |
미리안 1세 | 이베리아 왕 (기원전 159년 ~ 기원전 109년) |
티그라네스 2세 | 아르메니아 왕 (기원전 95년 ~ 기원전 55년) |
Գուրաս|구라스hy | 총독 미그도니아 |
아르타바스데스 2세 (아르메니아) | 아르메니아 왕 (기원전 123년 ~ 기원전 95년) |
아르타셰스 1세 | 이베리아 왕 (기원전 90년 ~ 기원전 78년) |
անհայտ|미상hy | |
파르나욤 1세 | 이베리아 왕 (기원전 109년 ~ 기원전 90년) |
아르토체스 1세 | 이베리아 왕 (기원전 78년 ~ 기원전 63년) |
Արիազատե-Աուտոմե|아리아자테-오토메hy | 파르티아 왕 미트리다테스 2세의 아내 |
Զարեհ|자리아드레스hy | |
Տիգրան Կրտսեր|어린 티그라네스hy | 소페네 왕 (기원전 65년) |
아르타바스데스 2세 (아르메니아) | 아르메니아 왕 (기원전 55년 ~ 기원전 34년) |
անհայտ|미상hy | 미트리다테스 1세의 아내, 미디아 왕 |
անհայտ|미상hy | 파코루스 1세의 아내, 파르티아 왕 |
아르타셰스 2세 | 아르메니아 왕 (기원전 33년 ~ 기원전 20년) |
티그라네스 3세 | 아르메니아 왕 (기원전 20년 ~ 기원전 6년) |
아르타바스데스 3세 | 아르메니아 왕 (기원전 6년) |
անհայտ|미상hy |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결혼할 것으로 요청됨 |
անհայտ|미상hy | 갈라티아 왕 데이오타루스의 아내 |
미리안 2세 | 이베리아 왕 (기원전 30년 ~ 기원전 20년) |
անհայտ|미상hy | |
파르나바즈 2세 | 이베리아 왕 (기원전 63년 ~ 기원전 30년) |
티그라네스 4세 | 아르메니아 왕 (기원전 6년 ~ 서기 1년) |
에라토 | 아르메니아 여왕 (기원전 6년 ~ 서기 1년) 및 (서기 12년) |
անհայտ|미상hy | 콜키스의 카르탐의 아내 |
아르샤크 2세 | 이베리아 왕 (기원전 20년 ~ 서기 1년) |
참조
[1]
서적
Grousset
[2]
서적
Hovannisian
[3]
서적
Hovannisian
[4]
서적
Hovanissian
[5]
서적
Les dynasties de la Caucasie chrétienne de l'Antiquité jusqu'au xixe siècle: Tables généalogiques et chronologiques
Rome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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