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다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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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시다 내각은 1948년 3월 10일부터 10월 15일까지 220일 동안 존속했다. 가타야마 내각 붕괴 이후 아시다 히토시가 총리로 취임했으나, 자유당의 반대와 여론의 지지 부족으로 불안정한 기반 위에 있었다. 내각은 니시오 헌금 문제, 쇼와 전공 사건 등 정치 스캔들에 연루되었고, 결국 1948년 10월 7일 총사직했다. 이 사건들은 GHQ 내 민정국과 참모 제2부 간의 권력 투쟁과 미국의 대일 정책 변화와도 관련이 있었다. 아시다 내각 붕괴 이후 제2차 요시다 내각이 출범하며 보수 세력이 일본 정치의 주도권을 다시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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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 내각 | |
---|---|
내각 정보 | |
내각 이름 | 아시다 내각 |
일본어 이름 | 芦田内閣 (아시다 나이카쿠) |
대수 | 47대 |
총리 이름 | 아시다 히토시 |
총리 전직 | 외무대신, 중의원 의원, 민주당 총재 |
성립 연도 | 1948년 |
성립 월일 | 3월 10일 |
종료 연도 | 1948년 |
종료 월일 | 10월 15일 |
여당 | 민주당, 일본사회당, 국민협동당, (녹풍회){:group="주석"} |
선거 | 없음 |
해산 | 없음 |
명단 | 내각 명단 (일본 총리대신 관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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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구성 | |
정치 체제 | 연합군 점령 하의 다수 (연립) |
국가 원수 | 히로히토 |
국가 원수 직함 | 천황 |
정부 수반 | 아시다 히토시 |
정부 수반 직함 | 내각총리대신 |
부총리 | 니시오 스에히로 (1948년 7월 6일까지) |
전임 내각 | 가타야마 내각 |
후임 내각 | 제2차 요시다 내각 |
의회 | |
의회 회기 | 제2회-3회 국회 |
정당 | |
여당 | 일본사회당, 민주당, 국민협동당 |
야당 | 자유당, 일본공산당, 일본농민당 |
2. 재직 기간
1948년 3월 10일부터 1948년 10월 15일까지 총 220일 동안 재직하였다.[1]
가타야마 내각의 총사직 이후, 아시다 히토시를 총리로 하는 내각이 발족했다. 이 내각은 민주당, 일본사회당, 국민협동당을 여당으로 구성되었다.[1] 그러나 제1야당이었던 자유당은 이를 '정권 돌려막기'라고 비판하며 자유당으로의 정권 이양을 강력하게 주장했다.[1]
3. 성립 배경
더글러스 맥아더의 지시에 따라, 아시다 내각은 '정령 201호'를 통해 공무원의 파업권을 제한했다.[1] 그러나 쇼와 전공 사건으로 인해 내각은 총사직했고, 아시다 히토시 역시 체포되었다가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1]
아시다 내각의 붕괴에는 연합군 최고사령부(GHQ) 내 권력 다툼이 배경으로 작용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이 심화되면서 미국은 일본을 반공 보루로 활용하고자 했고, 이는 GHQ 내에서 보수 정권 부활을 용인하는 참모 제2부의 세력 강화로 이어졌다.[3] 반면, 일본의 민주화와 소국화를 추진하던 민정국은 사회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어 보수 세력의 부상을 경계했다.[3]
쇼와 전공 사건 수사는 민정국의 핵심 인물인 찰스 케이디스에게까지 미쳤고, 이는 민정국의 몰락과 제2차 요시다 내각의 탄생으로 이어졌다.[3] 이후 1993년 호소카와 내각이 탄생하기 전까지 좌파 정당은 정권을 잡지 못했다.[3]
3. 1. 가타야마 내각의 붕괴
가타야마 내각은 일본사회당, 민주당, 국민협동당, 녹풍회의 4당 연립 내각이었으나, 당내 갈등과 연립 정당 간의 대립으로 붕괴되었다.[3] 특히 일본사회당 내 우파와 좌파의 대립이 심각했다.[3]
3. 2. 아시다 히토시의 총리 취임
가타야마 내각의 총사직 이후, 부총리였던 아시다 히토시가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되었다. 이는 당시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연합군 최고사령부(GHQ) 민정국의 지지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제2당이었던 자유당은 '헌정의 정도'를 내세워 아시다의 총리 취임을 '정권 돌려막기'라고 비판하며 자유당으로의 정권 이양을 강하게 요구했다.[1] 여론 역시 자유당의 주장에 동조하는 분위기였으며, 참의원 총리 지명 선거에서는 요시다 시게루가 아시다 히토시보다 많은 표를 얻는 등 아시다 내각은 출범 초기부터 불안정한 기반 위에 있었다.[1]
4. 내각 구성
아시다 내각은 1948년 3월 10일부터 1948년 10월 15일까지 존속했으며, 아시다 히토시 총리가 이끄는 민주당, 일본사회당, 국민협동당의 연립 내각이었다.
직책 | 이름 | 소속 정당 | 비고 |
---|---|---|---|
내각총리대신 | 아시다 히토시 | 민주당 | |
외무대신 | 아시다 히토시 (겸임) | 민주당 | |
대장대신 | 기타무라 도쿠타로 | 민주당 | |
법무총재 | 스즈키 요시오 | 일본사회당 | |
문부대신 | 모리토 다쓰오 | 일본사회당 | |
후생대신 | 다케다 기이치 | 민주당 | |
농림대신 | 나가에 가즈오 | 일본사회당 | |
상공대신 | 미즈타니 조자부로 | 일본사회당 | |
운수대신 | 오카다 세이이치 | 국민협동당 | |
체신대신 | 도미요시 에이지 | 일본사회당 | |
노동대신 | 가토 간주 | 일본사회당 | |
건설대신 | 히토쓰마쓰 사다요시 | 민주당 | 1948년 7월 10일 건설성 설치 |
건설원 총재 | 히토쓰마쓰 사다요시 | 민주당 | ~ 1948년 7월 10일 |
행정조사부 총재 | 후나다 교지 | 국민협동당 | ~ 1948년 7월 1일 |
행정관리청 장관 | 후나다 교지 | 국민협동당 | 1948년 7월 1일 ~ |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 | 구루스 다케오 | 민주당 | ~ 1948년 10월 2일 |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 (임시대리) | 아시다 히토시 | 민주당 | 1948년 10월 2일 ~ |
중앙경제조사청 장관 | 구루스 다케오 (겸임) | 민주당 | 1948년 8월 1일 ~ 1948년 10월 2일 |
중앙경제조사청 장관 (임시겸임) | 아시다 히토시 | 민주당 | 1948년 10월 2일 ~ |
지방재정위원회 위원장 | 노미조 마사루 | 일본사회당 | |
배상청 장관 | 후나다 교지 (겸임) | 국민협동당 | |
국무대신 겸 내각관방장관 | 도마베치 기조 | 민주당 |
4. 1. 국무대신
담당 | 이름 | 정당 |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
---|---|---|---|---|---|
내각총리대신 | 아시다 히토시 | 민주당 | 1948년 3월 10일 | 1948년 10월 15일 | |
국무대신 | 니시오 스에히로 | 사회당 | 1948년 3월 10일 | 1948년 7월 6일 | |
법무대신 | 스즈키 요시오 | 사회당 | 1948년 3월 10일 | 1948년 10월 15일 | |
외무대신 | 아시다 히토시 | 민주당 | 1948년 3월 10일 | 1948년 10월 15일 | |
재무대신 | 기타무라 도쿠타로 | 민주당 | 1948년 3월 10일 | 1948년 10월 15일 | |
문부대신 | 모리토 다쓰오 | 사회당 | 1948년 3월 10일 | 1948년 10월 15일 | |
후생대신 | 다케다 기이치 | 민주당 | 1948년 3월 10일 | 1948년 10월 15일 | |
농림대신 | 나가에 가즈오 | 사회당 | 1948년 3월 10일 | 1948년 10월 15일 | |
상공대신 | 미즈타니 조자부로 | 사회당 | 1948년 3월 10일 | 1948년 10월 15일 | |
운수대신 | 오카다 세이이치 | 국민협동당 | 1948년 3월 10일 | 1948년 10월 15일 | |
체신대신 | 도미요시 에이지 | 사회당 | 1948년 3월 10일 | 1948년 10월 15일 | |
노동대신 | 가토 간주 | 사회당 | 1948년 3월 10일 | 1948년 10월 15일 | |
국무대신 | 구루스 다케오 | 민주당 | 1948년 3월 10일 | 1948년 10월 2일 | |
아시다 히토시 (겸임) | 민주당 | 1948년 10월 2일 | 1948년 10월 15일 | ||
국무대신 | 후나다 교지 | 국민협동당 | 1948년 3월 10일 | 1948년 10월 15일 | |
국무대신 | 히토쓰마쓰 사다요시 | 민주당 | 1948년 3월 10일 | 1948년 7월 10일 | |
건설대신 | 히토쓰마쓰 사다요시 | 민주당 | 1948년 7월 10일 | 1948년 10월 15일 | |
국무대신 | 노미조 마사루 | 사회당 | 1948년 3월 10일 | 1948년 10월 15일 | |
국무대신 | 도마베치 기조 | 민주당 | 1948년 3월 10일 | 1948년 10월 15일 | |
내각관방 부장관 | 아리타 기이치 | 민주당 | 1948년 3월 15일 | 1948년 10월 15일 | |
후쿠시마 신타로 | 무소속 | 1948년 3월 15일 | 1948년 10월 15일 | ||
colspan="6" | | |||||
출처:[1] |
4. 2. 내각관방차장
아리타 기이치(민주당)와 후쿠시마 신타로(무소속) 두 사람이 1948년 3월 15일부터 1948년 10월 15일까지 내각관방차장을 역임하였다.[1]4. 3. 정무차관
1948년 4월 15일에 임명된 각 부처별 정무차관은 다음과 같다.(일부 차관은 4월 17일 임명)[1]직명 | 성명 | 출신 등 | 비고 |
---|---|---|---|
법무 정무차관 | 마쓰나가 요시오 | 중의원/일본사회당 | |
외무 정무차관 | 이토 다카하루 | 중의원/민주당 | |
대장성 정무차관 | 아라키 마스오 | 중의원/민주당 | |
모리시타 마사카즈 | 참의원/일본사회당 | ||
문부 정무차관 | 호소노 미치오 | 중의원/일본사회당 | |
이와키 데쓰오 | 참의원/민주당 | ||
후생 정무차관 | 기타나라 지로 | 중의원/민주당 | |
아카마쓰 쓰네코 | 참의원/일본사회당 | ||
농림 정무차관 | 오시마 요시하루 | 중의원/일본사회당 | |
히라노 젠지로 | 참의원/민주당 | ||
상공 정무차관 | 마사키 기요시 | 중의원/일본사회당 | |
고마이 도헤이 | 참의원/국민협동당 | ||
운수 정무차관 | 기노시타 사카에 | 중의원/국민협동당 | |
우에타케 하루히코 | 참의원/민주당 | ||
체신 정무차관 | 고쓰보 시게오 | 중의원/민주당 | |
시모조 교헤이 | 참의원/일본사회당 | ||
노동 정무차관 | 오야 쇼조 | 중의원/일본사회당 | |
미즈하시 도사쿠 | 참의원/일본사회당 | 1948년 7월 3일 면직 | |
경제안정 정무차관 | 니시무라 에이이치 | 중의원/일본사회당 | 1948년 4월 17일 임명 |
후지이 헤이고 | 참의원/녹풍회 | 1948년 4월 17일 임명 1948년 6월 15일 면직 | |
건설 정무차관 | 아마노 히사시 | 중의원/민주당 | |
지방재정 정무차관 | 사이고 기치노스케 | 참의원/녹풍회 | 1948년 4월 17일 임명 |
5. 주요 정책 및 사건
가타야마 내각의 총사직으로 민주당, 일본사회당, 국민협동당이 연립 여당으로 참여하여 발족했다. 1948년 10월 7일 내각이 총사직하고, 제2차 요시다 내각이 조각될 때까지 직무를 집행했다.
더글러스 맥아더의 서한에 따라 '정령 201호'를 발표하여 공무원의 파업권을 제한했다. 부흥 금융 금고 융자를 둘러싼 쇼와 전공 사건으로 내각이 총사직했고, 아시다 히토시 총리도 체포되었으나 이후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1]
5. 1. 니시오 헌금 문제
부총리 겸 일본사회당 서기장이었던 니시오 스에히로가 건설업자로부터 헌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5] 이 문제로 니시오는 증인 소환까지 불려 나갔고, 결국 부총리직을 사임했다.[5]5. 2. 쇼와 전공 사건
쇼와 전공 사건은 대형 화학 회사인 쇼와 전공이 부흥금융금고로부터 융자를 받기 위해 GHQ, 자유당을 포함한 정치인, 관료들에게 뇌물을 제공한 사건이다.[1] 이 사건으로 구리스 다케오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과 니시오 스에히로 전 부총리가 체포되었고, 아시다 히토시 총리도 연루 의혹으로 체포되었다 (이후 재판에서 무죄 판결).[1]약 2,000명에게 조사가 이루어진 대규모 수사였으며, 이 사건은 아시다 내각의 붕괴를 초래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1] 니시오가 체포된 다음 날인 1948년 10월 7일, 아시다 내각은 총사직을 선택했다.[1]
이 사건은 GHQ 내 민정국과 참모 제2부(G2) 간의 권력 투쟁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 미소 냉전이 격화되면서 일본을 반공 보루로 활용하려는 미국 본국의 의향에 따라, 보수적인 참모 제2부의 영향력이 커졌고, 자유주의적인 민정국은 위기에 몰렸다.[1] 쇼와 전공 사건 수사는 민정국의 중심 인물이었던 찰스 케이디스에게까지 미쳤고, 결국 민정국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1]
6. 내각의 붕괴와 그 이후
쇼와 전공 사건으로 1948년 10월 7일 아시다 내각은 총사직을 결정하고 약 8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이 사건으로 구리스 다케오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 니시오 스에히로 전 부총리 등이 체포되었고, 아시다 히토시 총리도 체포되었다가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GHQ 내에서는 민정국과 참모 제2부 간의 갈등이 있었다.[3] 민정국은 민주화와 비군사화를 추진했고, 참모 제2부는 냉전 심화에 따라 일본을 반공 기지로 활용하려 했다. 쇼와 전공 사건 수사가 민정국의 찰스 케이디스에게까지 미치면서 민정국의 영향력은 약화되었고, 이는 미국의 대일 정책 변화를 가속화했다.[3]
아시다 내각 붕괴 후, 민정국은 야마자키 수반 공작 사건을 통해 중도 정권 유지를 꾀했으나 실패했고,[3] 요시다 시게루를 수반으로 하는 제2차 요시다 내각이 탄생하게 되었다.[3]
6. 1. 총사직
쇼와 전공 사건으로 아시다 내각은 1948년 10월 7일 총사직을 결정하고, 약 8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쇼와 전공 사장이 부흥금융금고에서 융자를 받기 위해 정·관·재계에 정치 헌금을 제공한 이 사건으로, 약 2,000명이 조사를 받았고, 구리스 다케오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과 니시오 스에히로 전 부총리가 체포되었다. 아시다 히토시 총리도 체포되면서(재판에서는 무죄) 내각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6. 2. GHQ의 권력 투쟁과 미국의 대일 정책 변화
쇼와 전공 사건의 배경에는 GHQ 내에서 민주화, 비군사화를 추진하던 민정국과 냉전 심화에 따라 일본을 반공 기지로 활용하려는 참모 제2부 간의 갈등이 있었다.[3] 사건 수사가 민정국의 핵심 인물인 찰스 케이디스에게까지 미치면서 민정국의 영향력은 약화되었고, 이는 미국의 대일 정책 변화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3]당초 GHQ의 일본 점령 정책은 민정국의 주도로 민주화, 비군사화 정책이 추진되었다.[3] 그러나 미소 대립에 의한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일본을 반공 보루로 활용하려 했고, 이에 따라 사회주의적 경향을 가진 민정국과 보수적 경향의 참모 제2부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3]
쇼와 전공 사건 수사가 찰스 케이디스에게까지 미치자, 케이디스는 미국으로 귀국해야 했다.[3] 아시다 내각의 붕괴와 함께 민정국은 궁지에 몰렸고, 야마자키 수반 공작 사건을 통해 중도 정권 유지를 꾀했으나 실패했다.[3] 결국 요시다 시게루를 수반으로 하는 제2차 요시다 내각이 탄생하게 되었다.[3]
6. 3. 야마자키 수반 공작 사건
가타야마 내각의 붕괴 이후, GHQ 민정국은 요시다 시게루의 재집권을 막기 위해 민주자유당 간사장 야마자키 다케시를 총리로 추대하고 사회당, 민주당을 포함한 연립 내각을 구상하는 '야마자키 수반 공작'을 시도했다. 그러나 요시다 시게루는 맥아더로부터 야마자키 수반을 부정하는 언질을 얻어내었고, 야마자키는 의원직 사임으로 몰리면서 이 공작은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제2차 요시다 내각이 탄생하게 되었다.6. 4. 제2차 요시다 내각 출범
가타야마 내각의 뒤를 이은 아시다 내각이 니시오 헌금 문제와 쇼와 전공 사건 등 연이은 정치 스캔들로 1948년 10월 7일 총사직하면서, 요시다 시게루를 총리로 하는 제2차 요시다 내각이 출범하였다. 이로써 일본 정치에서 보수 세력이 다시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이후 1993년 호소카와 내각이 등장하기 전까지 좌파 정당은 정권을 잡지 못했다.참조
[1]
웹사이트
Ashida Cabinet
http://www.kantei.go[...]
[2]
문서
[3]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48-03-10
[4]
뉴스
『きょう芦田内閣成立』
讀賣新聞
1948-03-10
[5]
간행물
第2回国会衆議院会議録第19号
https://kokkai.ndl.g[...]
『官報』号外
1948-02-22
[6]
문서
[7]
간행물
第2回国会参議院会議録第13号
https://kokkai.ndl.g[...]
『官報』号外
1948-02-22
[8]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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