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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누 혁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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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이누 혁명론은 1970년대 일본 신좌파 운동의 일환으로 등장한 정치 사상으로, 아이누 민족을 혁명의 주체로 보았다. 1970년대 초 전공투 운동의 교착 상태에서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를 혁명의 주체로 보는 궁민혁명론이 대두되었고, 아이누 민족을 원시 공산제 사회에 사는 혁명 주체로 간주했다. 1970년대 삿포로 올림픽을 계기로 홋카이도에서 과격파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샤쿠샤인 동상 사건, 홋카이도청 폭탄 테러 등 아이누 혁명론과 관련된 테러 사건이 발생했으나, 대부분 일본 신좌파에 의해 자행되었다. 아이누 민족 운동가 유키 쇼지는 오타 류의 아이누 혁명론이 아이누의 현실과 맞지 않다고 비판했으며, 오타 류가 생태학자 및 음모론자로 전향하면서 아이누 혁명론은 쇠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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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누 혁명론
아이누 혁명론
아이누 혁명론
아이누 혁명론 : 유카라 세계로의 "퇴각" (1973년)
개요
유형일본 좌익 사상
주제아이누 민족 해방, 반일본 제국주의
관련 인물오타 류

2. 역사적 배경

1970년대 초, 전공투 운동이 교착 상태를 보이면서, 일부 신좌파 활동가들 사이에서 궁민혁명론이 대두되었다. 이는 "소외된 궁민이야말로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사상으로, 일본의 아이누 민족도 "궁민"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보았다. 이들은 아이누 민족이 원시 공산제 사회에서 살았기 때문에 "공산 혁명의 주체"가 되기에 적합하다고 여겼다. 오타 류가 아이누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히메다 타다요시가 감독한 기록 영화 '아이누의 결혼식'(1971년)이었다.

아이누 시인 토츠카 미나코는 1981년 인터뷰에서 이 시대에 아이누의 이름을 사용한 폭파 사건 등에 대한 감상을 묻자, "그때까지 침묵했던 아이누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동기가 되었지만, 방법이 유치했고, 아이누의 이름을 사칭한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6]

2. 1. 1970년대 신좌파 운동의 등장

1970년대 초, 전공투 운동이 한계를 보이면서, 일부 신좌파 활동가들은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를 혁명의 주체로 보는 사상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일본 내 아이누 민족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고 보았다. 아이누 민족이 원시 공산제 사회에서 살았기 때문에 "공산주의 혁명의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여겼다.[1]

1972년 삿포로 올림픽을 계기로 홋카이도에서 과격파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샤쿠샤인 동상 사건, 후세츠노 군조와 북방문화연구소 폭탄 테러, 시라오이 시장 습격 사건, 홋카이도 신사 방화 사건, 홋카이도 경찰 본부 폭탄 테러, 홋카이도 정부 폭탄 테러, 히가시 혼간지 폭탄 테러 등 아이누 혁명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폭력 사건들이 홋카이도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 중 상당수는 일본 신좌파 세력이 저지른 것이었다.[2]

홋카이도 구토지 보호법 철폐 운동과 같이 아이누 민족 스스로의 민족 운동도 1970년대에 활발해졌지만, 아이누 혁명론은 이러한 운동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오타 류는 이러한 운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일본 좌익 진영 내에서는 "아이누를 혁명 운동의 대상으로만 취급하여 그들을 괴롭힌다"는 비판과 함께 오타 류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왔다.[1]

아이누 정치 활동가 유키 쇼지와 야마모토 카즈아키는 1972년 아이누 해방 동맹을 결성하여, 아이누에 대한 일본의 정책과 대중의 인식에 문제를 제기했다. 유키 쇼지는 오타 류와 알게 되어 삿포로 의과대학에서 열린 학회에 동행하기도 했지만, 이후 오타 류의 아이누 혁명론이 아이누의 신념 및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3]

2. 2. 아이누 민족 운동의 활성화

1970년대에 들어 홋카이도 구토인 보호법 철폐 운동과 같이 아이누 민족 스스로의 민족 운동이 활발해졌다.[1] 1972년 유키 쇼지와 야마모토 카즈아키 등은 아이누 해방 동맹을 결성하여 아이누에 대한 일본 정책과 사람들의 인식에 대해 과격한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3] 같은 해 개최된 삿포로 올림픽은 홋카이도에서 활동가들의 활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었다.[3]

유키 쇼지는 1972년경 오타 류와 알게 되었고, 삿포로 의과대학에서 열린 일본 인류학 및 민족 학회에서 오타 류가 공개 질의서를 낭독할 때 동행하기도 했다.[3] 그러나 유키 쇼지는 이후 오타 류의 아이누 혁명론이 아이누 민족의 신념 및 상황과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3] 1974년 폭동 선동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후, 오타 류와 유키 쇼지는 서로를 비판하며 멀어졌고, 오타 류는 모욕을 당하고 고립되었다.[3]

아이누 혁명론은 아이누 민족 운동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었지만,[1] 1970년대 중반 샤쿠샤인 동상 사건, 후세츠노 군조와 북방문화연구소 폭탄 테러, 홋카이도 신사 방화 사건 등 아이누 혁명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여러 폭력 사건들이 홋카이도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발생했다.[2]

2. 3. 오타 류와 유키 쇼지의 관계

1972년경, 유키 쇼지는 오타 류와 알게 되었다. 같은 해 삿포로 의과대학에서 열린 일본인류학회·민족학회 연합대회에서 오타가 공개 질문장을 낭독할 때 유키가 동행했다.[3] 또한, 시즈나이정에 있는 샤쿠샤인 상 받침대에 새겨진 마치무라 킨고 전 홋카이도 지사의 명문을 깎아낼 때도 오타는 유키와 동행했다.[3]

그러나 이후 유키는 오타의 아이누 해방론이 아이누의 주장 및 상황과 괴리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1974년 오타가 폭동 선동 혐의로 체포된 후(기소 유예) 오타와 유키는 서로를 비판하며, 오타는 모욕을 당하고 고립되었다.[3]

2. 4. 아이누 혁명론의 쇠퇴

1970년대 중반, 샤쿠샤인 동상 사건, 후세츠노 군조와 북방문화연구소 폭탄 테러 등 아이누 혁명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일련의 폭력 사건이 발생했다.[2]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 중 상당수는 일본 신좌파에 의해 자행되었다.[2]

아이누 민족 자체의 민족 운동은 1970년대에 활발해졌지만, 아이누 혁명론은 이러한 운동과 관련이 없었다. 오타 류는 이러한 운동을 전유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일본 좌익 진영 내에서는 "아이누를 혁명 운동의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며 오타 류를 비판했다.[1]

아이누 정치 활동가 유키 쇼지는 오타 류의 아이누 혁명론이 아이누의 신념과 상황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1974년 폭동 선동 혐의로 체포된 후 (공소 기각), 오타와 유키는 서로 비판하며, 오타는 고립되었다.[3]

결국 오타 류의 쇠퇴, 생태학자로의 전향, 음모론 구독은 아이누 혁명론의 인기가 급격히 감소하는 결과를 낳았다.[4]

3. 주요 내용

아이누 혁명론은 1970년대 일본 신좌익 운동권에서 대두된 이론으로, 아이누 민족을 혁명의 주체로 상정했다는 특징을 지닌다. 전공투 운동의 침체 속에서 등장한 '궁민혁명론'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이는 소외된 빈민층이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아이누 민족을 원시 공산제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집단으로 보아 혁명 주체로서의 적합성을 부여했다.

오타 류는 히메다 타다요시의 기록 영화 '아이누의 결혼식'(1971년)을 보고 아이누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72년 삿포로 올림픽을 전후로 홋카이도에서 아이누 혁명론의 영향을 받은 과격파들의 활동이 활발해졌고, 1970년대 중반까지 홋카이도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러한 테러는 대부분 신좌익 활동가들이 일으킨 것으로, 아이누 민족의 직접적인 민족 운동과는 거리가 있었다.

홋카이도 구 토인 보호법 철폐 운동 등 아이누 민족 스스로의 민족 운동도 1970년대에 활발해졌다. 당시 아이누 단체였던 홋카이도 우타리 협회(현 홋카이도 아이누 협회)는 일본 국민과의 생활 격차 해소를 우선 목표로 삼았다. 유우키 쇼지 등은 아이누 해방 동맹을 결성하여 급진적인 방식으로 아이누 정책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유우키 쇼지는 오타 류와 교류했으나, 이후 그의 이론이 아이누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비판하며 결별했다.

오타 류가 생태주의, 음모론 등으로 전향하면서 아이누 혁명론은 급격히 쇠퇴하였다.

3. 1. 아이누 민족과 룸펜 프롤레타리아트

1970년대 초, 전공투 운동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일부 신좌익 활동가들 사이에서 궁민혁명론이 대두되었다. 이들은 소외된 궁민이야말로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일본의 아이누 민족도 이러한 '궁민'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이들은 아이누 민족이 원시 공산제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공산 혁명의 주체가 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계급 투쟁 및 유물사관 참고) 오타 류가 아이누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히메다 타다요시가 감독한 기록 영화 '아이누의 결혼식'(1971년)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이누 민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로 여겨졌고, 혁명을 이끌 주체로 간주되었다.

3. 2. 원시 공산주의 사회와 아이누

1970년대 초, 전공투 운동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일부 신좌익 활동가들은 소외된 궁민이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궁민혁명론'을 주장했다. 이들은 아이누 민족을 "원시 공산제에 사는 민족이며, 공산 혁명의 주체"가 되기에 적합하다고 보았다. (계급 투쟁 및 유물사관 참조).[6]

3. 3. 일본 사회 비판과 혁명론

1970년대 초, 전공투 운동이 막다른 길에 이르자, 일부 신좌익 활동가들 사이에서 "소외된 궁민이야말로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궁민혁명론이 떠올랐다. 이들은 일본 내 아이누 민족을 "궁민"으로 보고, 원시 공산제 사회에 살고 있어 공산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계급 투쟁 및 유물사관 참조) 오타 류가 아이누에 주목한 계기는 히메다 타다요시 감독의 기록 영화 '아이누의 결혼식'(1971년)이었다.

1972년 삿포로 올림픽을 계기로 "아이누 혁명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과격파의 홋카이도 내 활동(폭력 혁명 및 적색 테러 참조)이 활발해졌다.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홋카이도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테러 사건이 다수 발생했다. 그러나 이러한 테러는 대부분 신좌익 스스로 저지른 것으로, "아이누족에 의한 민족 운동"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홋카이도 구 토인 보호법 철폐 운동 등 아이누 스스로의 민족 운동이 활발해진 것도 1970년대였다. 그러나 홋카이도 우타리 협회(현 홋카이도 아이누 협회)는 "일반 국민과의 생활 격차 해소"를 기본 입장으로 삼았다. 한편, 유우키 쇼지, 야마모토 카즈아키 등은 1972년 아이누 해방 동맹을 결성, 과격한 방식으로 아이누 정책과 인식에 문제를 제기했다.

유우키 쇼지는 1972년경 오타 류와 알게 되었고, 같은 해 삿포로 의과대학에서 열린 일본인류학회·민족학회 연합대회에서 공개 질의서를 낭독하거나, 시즈나이정샤쿠샤인 상 받침대에 새겨진 마치무라 킨고 전 홋카이도 지사의 명문을 깎아낼 때 오타 류도 동행했다. 그러나 이후 유우키 쇼지는 오타 류의 아이누 해방론이 아이누의 주장 및 상황과 동떨어져 있다고 비판했고, 1974년 체포 (기소 유예 처분)된 이후에는 서로 비판하고 모욕하며 관계를 끊었다.

이후 오타 류는 "생태주의자", "음모론자"로 전향했고, 아이누 혁명론은 급격히 쇠퇴했다.

아이누 시인 토츠카 미나코는 1981년 인터뷰에서 이 시기 아이누의 이름을 사용한 폭파 사건 등에 대한 감상을 묻자 "그때까지 침묵했던 아이누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하지만, 방법이 유치했고, 아이누의 이름을 사칭한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6]

4. 비판과 논란

아이누 혁명론은 본래 아이누족에게서 나온 민족자결 이론이 아니었다. 1970년대 초, 전공투 운동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일부 신좌익 활동가들은 "소외된 궁민이야말로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궁민혁명론을 내세웠고, 아이누 민족을 '공산 혁명의 주체'로 여겼다. 오타 류가 아이누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히메다 타다요시 감독의 기록 영화 '아이누의 결혼식'(1971년)이었다.[6]

1972년 삿포로 올림픽 당시에는 아이누 혁명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과격파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1970년대 중반 이후 홋카이도를 중심으로 전국에서 발생한 테러 사건은 대부분 신좌익 스스로 감행한 것으로, "아이누족에 의한 민족 운동"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6]

1970년대에는 홋카이도 구 토인 보호법 철폐 운동 등 아이누 스스로에 의한 민족 운동도 활발해졌다. 홋카이도 우타리 협회(현 홋카이도 아이누 협회)는 "일반 국민과의 생활 격차 해소"를 기본 입장으로 삼았다. 협회 밖에서는 유우키 쇼지 등이 아이누 해방 동맹을 결성하여 과격한 방식으로 아이누 정책과 사람들의 인식에 이의를 제기했다.

유우키 쇼지는 오타 류와 교류하며 샤쿠샤인 상 받침대에 새겨진 마치무라 킨고 전 홋카이도 지사의 명문을 깎아내는 일에 동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우키는 오타의 아이누 해방론이 아이누의 주장 및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비판했고, 결국 둘은 서로 비판하며 절연했다. 이후 오타는 "생태주의자", "음모론자"로 전향하면서 아이누 혁명론은 급속히 쇠퇴했다.

아이누 시인 토츠카 미나코는 1981년 인터뷰에서 이 시기 아이누의 이름을 사용한 폭파 사건 등에 대해 "그때까지 침묵했던 아이누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동기가 되었지만…. 방법이 유치했고, 아이누의 이름을 사칭한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6]

4. 1. 아이누 민족의 현실과의 괴리

아이누 혁명론은 원래 아이누족 사이에서 나온 민족자결 이론이 아니었다. 1970년대 초, 전공투 운동이 막다른 길에 이르자, 일부 신좌익 활동가들은 소외된 사람들이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궁민혁명론'을 내세웠다. 이들은 아이누 민족을 '원시 공산제' 사회에 사는, 공산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궁민'으로 보았다.

삿포로 올림픽이 열린 1972년, 아이누 혁명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과격파가 홋카이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홋카이도를 중심으로 전국에서 테러 사건이 많이 발생했지만, 대부분 신좌익이 저지른 것으로, 아이누족의 민족 운동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6]

홋카이도 구 토인 보호법 철폐 운동처럼 아이누 스스로의 민족 운동이 활발해진 것도 1970년대부터였다. 그러나 홋카이도 우타리 협회(현 홋카이도 아이누 협회)는 "일반 국민과의 생활 격차 해소"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한편, 유우키 쇼지, 야마모토 카즈아키 등은 1972년에 아이누 해방 동맹을 결성하여, 과격한 방식으로 아이누 정책과 사람들의 인식에 문제를 제기했다.

유우키 쇼지는 오타 류와 교류하며 샤쿠샤인 상의 받침대에 새겨진 마치무라 킨고 전 홋카이도 지사의 명문을 깎아내는 일에 함께 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우키는 오타의 아이누 해방론이 아이누의 주장 및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비판했고, 1974년 체포된 이후에는 서로 비판하며 관계를 끊었다.

아이누 시인 토츠카 미나코는 1981년 인터뷰에서 당시 아이누의 이름을 이용한 폭파 사건 등에 대해 "침묵했던 아이누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방법이 유치했고, 아이누의 이름을 사칭한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6]

4. 2. 폭력 투쟁 정당화

아이누 혁명론은 원래 아이누족 사이에서 나온 민족자결 이론이 아니었다. 1970년대 초, 전공투 운동이 막다른 길에 이르렀다고 느낀 신좌익 활동가들 사이에서 소외된 궁민이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궁민혁명론이 떠올랐다. 이들은 일본의 아이누 민족을 "원시 공산제"에 사는 민족이며, "공산 혁명"의 주체가 되기에 적합하다고 보았다.

삿포로 올림픽이 열린 1972년, 아이누 혁명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과격파의 홋카이도에서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홋카이도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테러 사건이 많이 발생했지만, 이러한 테러 사건의 대부분은 신좌익 스스로가 감행한 것으로, "아이누족에 의한 민족 운동"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6]

홋카이도 구 토인 보호법 철폐 운동과 같이 아이누 스스로에 의한 민족 운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도 1970년대였다. 그러나 홋카이도 우타리 협회(현 홋카이도 아이누 협회)의 기본적인 입장은 "일반 국민과의 생활 격차 해소"였다. 협회 밖에서는 유우키 쇼지 등이 아이누 해방 동맹을 결성하여 과격한 방식으로 아이누 정책과 사람들의 인식에 이의를 제기했다.

유우키 쇼지는 오타 류와 알게 된 후, 샤쿠샤인 상 받침대에 새겨진 마치무라 킨고 전 홋카이도 지사의 명문을 깎아내는 일 등에 오타 류와 동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우키 쇼지는 오타 류의 아이누 해방론이 아이누의 주장과 상황과 동떨어져 있다고 비판했고, 결국 둘은 서로 비판하고 모욕하며 절연했다.

아이누 시인 토츠카 미나코는 1981년 인터뷰에서 이 시대의 아이누의 이름을 사용한 폭파 사건 등에 대한 감상을 묻자 "그때까지 침묵했던 아이누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동기가 되었지만…. 하지만, 방법이 유치했고, 아이누의 이름을 사칭한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6]

4. 3. 일본 좌익 진영 내부의 비판

1970년대 초, 전공투 운동이 벽에 부딪히면서, 일본 신좌익 활동가들 사이에서 궁민혁명론이 떠올랐다. 이는 "소외된 궁민이야말로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사상으로, 일본의 아이누 민족도 이 범주에 포함되었다. 오타 류는 아이누 민족을 원시 공산제 사회에 살고 있으며, 공산 혁명을 이끌 주체로 보았다.[6]

그러나 오타 류의 아이누 해방론은 아이누 사람들의 주장 및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유우키 쇼지는 오타 류와 교류하며 샤쿠샤인 상 받침대에 새겨진 마치무라 킨고 전 홋카이도 지사의 글을 함께 지우기도 했지만, 이후 오타 류의 이론을 비판하며 관계를 끊었다.[6]

아이누 시인 토츠카 미나코는 1981년 인터뷰에서 당시 아이누의 이름을 이용한 폭파 사건 등에 대해 "그때까지 침묵했던 아이누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방법이 유치했고, 아이누의 이름을 함부로 쓴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6]

5. 관련 사건

1970년대 중반, 샤쿠샤인 동상 사건, 후세츠노 군조와 북방문화연구소 폭탄 테러, 시라오이정 정장 습격사건, 홋카이도 신궁 방화사건, 홋카이도 경찰본부 폭파사건, 홋카이도청 폭파사건, 히가시혼간지 폭파사건 등 아이누 혁명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일련의 폭력 사건이 전국 각지(주로 홋카이도)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 중 상당수는 더 넓은 범위의 일본 신좌파에 의해 자행되었다.[2]

1970년대 "아이누 혁명론" 관련 주요 사건
발생일사건명
1972년 9월 20일샤쿠샤인 동상 사건
1972년 10월 23일후세츠 군상·북방문화연구시설 폭파사건
1974년 3월 9일시라오이정 정장 습격사건
1974년 11월 10일홋카이도 신궁 방화사건
1975년 7월 19일홋카이도 경찰본부 폭파사건
1976년 3월 2일홋카이도청 폭파사건
1977년 11월 2일히가시혼간지 폭파사건


5. 1. 샤쿠샤인 동상 사건 (1972년 9월 20일)

1972년 9월 20일에 샤쿠샤인상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1970년대 "아이누 혁명론"에 영향을 받았거나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1]

5. 2. 후세츠 군상·북방문화연구시설 폭파사건 (1972년 10월 23일)

1972년 10월 23일, 후세츠 군상·북방문화연구시설 폭파사건이 일어났다.[1] 이는 1970년대 "아이누 혁명론"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건 중 하나이다.[1]

5. 3. 시라오이정 정장 습격사건 (1974년 3월 9일)

1974년 3월 9일에 발생한 시라오이정 정장 습격사건은 1970년대 "아이누 혁명론"의 영향을 받았거나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건 중 하나이다.[1]

발생일사건명
1972년 9월 20일샤쿠샤인상 사건[1]
1972년 10월 23일후세츠 군상·북방문화연구시설 폭파사건[1]
1974년 3월 9일시라오이정 정장 습격사건[1]
1974년 11월 10일홋카이도 신궁 방화사건[1]
1975년 7월 19일홋카이도 경찰본부 폭파사건[1]
1976년 3월 2일홋카이도청 폭파사건[1]
1977년 11월 2일히가시혼간지 폭파사건[1]


5. 4. 홋카이도 신궁 방화사건 (1974년 11월 10일)

1970년대 아이누 민족 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아이누 혁명론"과 관련된 사건 중 하나로, 1974년 11월 10일에 홋카이도 신궁 방화사건이 일어났다.[1]

1970년대 "아이누 혁명론" 관련 주요 사건
발생일사건명
1972년 9월 20일샤쿠샤인상 사건[1]
1972년 10월 23일후세츠 군상·북방문화연구시설 폭파사건[1]
1974년 3월 9일시라오이정 정장 습격사건[1]
1974년 11월 10일홋카이도 신궁 방화사건[1]
1975년 7월 19일홋카이도 경찰본부 폭파사건[1]
1976년 3월 2일홋카이도청 폭파사건[1]
1977년 11월 2일히가시혼간지 폭파사건[1]


5. 5. 홋카이도 경찰본부 폭파사건 (1975년 7월 19일)

1975년 7월 19일에 발생한 홋카이도 경찰본부 폭파사건은 1970년대 "아이누 혁명론"의 영향을 받았거나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건이다.[1]

1970년대 "아이누 혁명론" 관련 주요 사건
발생일사건명
1972년 9월 20일샤쿠샤인 동상 사건[1]
1972년 10월 23일풍설의 군상・북방 문화 연구 시설 폭파 사건[1]
1974년 3월 9일시라오이 정장 습격 사건[1]
1974년 11월 10일홋카이도 신궁 방화 사건[1]
1975년 7월 19일홋카이도 경찰 본부 폭파 사건[1]
1976년 3월 2일홋카이도 청 폭파 사건[1]
1977년 11월 2일동본원사 폭파 사건[1]


5. 6. 홋카이도청 폭파사건 (1976년 3월 2일)

1970년대에 "아이누 혁명론"과 관련이 있거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사건 중 하나이다.[1]

발생일사건명
1976년 3월 2일홋카이도청 폭파사건

[1]

5. 7. 히가시혼간지 폭파사건 (1977년 11월 2일)

1970년대에 "아이누 혁명론"의 영향을 받았거나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건들 가운데 하나이다.[1] 1977년 11월 2일에 발생했다.[1] 동본원사 폭파 사건이라고도 한다.[1]

참조

[1] 서적 Ainu Revolution: "Retreat" to the Yucala World Ainu Republic Information Department (Shinsensha) 1973
[2] 서적 40-year History of Extremist Case Studies Separate volume security forum 2002
[3] 논문 A Study of the History of Ainu Thought in the Modern Age: With a Focus on the Writings of Masao Sasaki http://hermes-ir.lib[...] Hitotsubashi University Graduate School 2009
[4] 서적 Encyclopedia of the Post-war Revolutionary Movement Shinsensha 1985
[5] 서적 アイヌ革命論 : ユーカラ世界への「退却」 아이누共和国情報部(新泉社) 1973
[6] 간행물 いま、戸塚美波子「1973年ある日ある時に」を読む 岩波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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