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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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할린섬은 러시아에 속한 섬으로, 좁은 타타르 해협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 본토와 마주하며, 소야 해협을 통해 홋카이도와 인접해 있다. 만주어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며, 3분의 2가 산악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 산업은 광업이며, 석유, 천연가스, 석탄, 어업 등 다양한 자원이 풍부하다. 19세기 말부터 일본과 러시아 간의 영유권 분쟁이 있었으며,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이 남부 사할린을 차지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에 편입되었다. 현재 러시아의 사할린주에 속하며,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한국인 등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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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할린섬 | |
|---|---|
| 지도 정보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사할린 |
| 로마자 표기 | Sahalin |
| 러시아어 표기 | Сахали́н |
| 만주어 표기 | ᠰᠠᡥᠠᠯᡳᠶᠠᠨ |
| 일본어 표기 | 樺太 (가라후토) |
| 문화어 표기 | 화태 |
| 위치 | 러시아 극동, 북태평양 |
| 좌표 | 북위 51도 143도 |
| 면적 | 72,492 km² |
| 최고점 | 로파틴산 |
| 최고점 높이 | 1,609 m |
| 소속 국가 | 러시아 |
| 행정 구역 | 사할린주 |
| 최대 도시 | 유즈노사할린스크 |
| 최대 도시 인구 | 174,203 명 (2019년) |
| 인구 | 489,638 명 (2019년) |
| 인구 밀도 | 6 명/km² |
| 주요 민족 | 러시아인 니브흐족 오로크족 러시아의 아이누족 러시아의 일본인 사할린 한인 |
| 시간대 | UTC+11:00 (MAGT) |
| 지리 | |
| 길이 | 약 948 km |
| 너비 | 약 24 km ~ 160 km 최협부 약 6.5 km 최광부 약 160 km |
| 역사 | |
| 일본 통치 시대 | 50도선 이남은 일본 영토 (가라후토청) |
| 관련 정보 | |
| 관련 작품 | 사할린 섬 (책) 사할린 섬 (영화) |
2. 명칭
만주어로 아무르강을 ‘사할리얀 우라’()라고 하는데, 강 하구 밖에 있는 사할린섬을 ‘사할린강 하구에 있는 험준한 돌덩어리’란 뜻의 ‘사할리얀 우라 앙가 하다’()라 불렀다. 러시아어를 비롯하여 서양에서 부르는 "사할린"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만주족은 사할린을 이 명칭으로 부르기보다 주로 '쿠예(Kuye)'라고 불렀다.
사할린은 가라후토/からふと일본어 (가라후토/樺太일본어), , , , 등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다.
청나라는 사할린을 ‘Kuyedao’(아이누인의 섬)라고 불렀고, "Kuye"라는 단어는 "니브흐족과 나나이족 이웃들이 사할린 아이누인에게 준 이름인 'kuyi'와 아마도 관련이 있다."
일본어의 “唐人(からひと)”(가라히토)이 변하여 “카라후토”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1646년에 완성된 마쓰마에번의 역사서 『신라지기록』에 “당도지섬(唐渡之嶋)”으로 나오며, 1700년의 『마쓰마에지마고쇼(松前島郷帳)』에는 “카라토시마(からと嶋)”이라고 되어 있다. 1785년(덴메이 5년)의 『삼국통람도설』에서도 “카라후토시마(カラフト嶋)”는 대륙의 반도로 그려져 있으며, 별도로 “북해 중의 하나의 큰 나라”로서 “사가린(サガリイン)”을 그리고 있다. 마미야 린조 등의 조사에 의해 樺太가 섬임이 확인되었고, 그 후, 메이지 정부가 홋카이도 개척사를 설치함에 따라 “樺太”라는 한자 표기가 정해졌다.
“사할린”(옛날에는 “'''사가렌'''”이라고 표기)이라는 명칭은, 청나라 판도 측량 시, 흑룡강(만주어 명칭: ) 하구의 건너편에 섬이 있다는 것을 듣고, 거기를 만주어로 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다.
중국어에서는 청나라 시대의 명칭인 “'''쿠예다오(庫頁島)'''”(쿠게토우, 쿠이에다오, 유래는 고이(苦夷))라고 불린다.
2. 1. 다양한 명칭
만주어로 아무르강을 ‘사할리얀 우라’()라고 하는데, 강 하구 밖에 있는 사할린섬을 ‘사할린강 하구에 있는 험준한 돌덩어리’란 뜻의 ‘사할리얀 우라 앙가 하다’()라 불렀다. 러시아어를 비롯하여 서양에서 부르는 "사할린"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만주족은 사할린을 이 명칭으로 부르기보다 주로 '쿠예(Kuye)'라고 불렀다.사할린은 가라후토/からふと일본어 (가라후토/樺太일본어), , , , 등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다.
청나라는 사할린을 ‘Kuyedao’(아이누인의 섬)라고 불렀고, "Kuye"라는 단어는 "니브흐족과 나나이족 이웃들이 사할린 아이누인에게 준 이름인 'kuyi'와 아마도 관련이 있다."
일본어의 “唐人(からひと)”(가라히토)이 변하여 “카라후토”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1646년에 완성된 마쓰마에번의 역사서 『신라지기록』에 “당도지섬(唐渡之嶋)”으로 나오며, 1700년의 『마쓰마에지마고쇼(松前島郷帳)』에는 “카라토시마(からと嶋)”이라고 되어 있다. 1785년(덴메이 5년)의 『삼국통람도설』에서도 “카라후토시마(カラフト嶋)”는 대륙의 반도로 그려져 있으며, 별도로 “북해 중의 하나의 큰 나라”로서 “사가린(サガリイン)”을 그리고 있다. 마미야 린조 등의 조사에 의해 樺太가 섬임이 확인되었고, 그 후, 메이지 정부가 홋카이도 개척사를 설치함에 따라 “樺太”라는 한자 표기가 정해졌다.
“사할린”(옛날에는 “'''사가렌'''”이라고 표기)이라는 명칭은, 청나라 판도 측량 시, 흑룡강(만주어 명칭: ) 하구의 건너편에 섬이 있다는 것을 듣고, 거기를 만주어로 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다.
중국어에서는 청나라 시대의 명칭인 “'''쿠예다오(庫頁島)'''”(쿠게토우, 쿠이에다오, 유래는 고이(苦夷))라고 불린다.
2. 2. 가라후토 (樺太)
아이누 민족이 이 섬을 kamuy kar put ya mosir/'''카무이 카르 푸트 야 모시리'''ain라고 부른 것에서 '가라후토'라는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이는 아이누어로 "'''신이 강의 하구(河口)에 만든 섬'''"이라는 의미로, 헤이룽강(흑룡강)의 하구(河口)에서 보아 그 앞에 위치하기 때문에 이렇게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에도 시대에는 홋카이도를 에조치(蝦夷地)라고 부른 것에 대응해서 '''북에조'''(北蝦夷)라 부르기도 했다. 메이지 정부가 홋카이도 개척사(北海道開拓使)를 설치한 이후, 북에조라는 명칭은 가라후토(樺太)로 바뀌었고, 일본어권에서 가라후토라는 명칭이 정착되었다.[77]
「카라후토(樺太)」라는 명칭의 어원은 여러 설이 있으며,[69] 현재로서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70] 카라후토 아이누어에서는 '''얀케모시리'''라고 불렸고,[71] 홋카이도 아이누어에서는 '''카라프토'''라고 불린다.[72] “唐人(からひと)”이 변하여 “카라후토”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73]
1646년에 완성된 마쓰마에 번의 역사서 『신라지기록』에 "당도지섬(唐渡之嶋)"으로 나오며, 정보일본도에도 "카라토노시마(からとの嶋)"가 그려져 있다. 1669년의 사료에는 "카라후토(からふと)"(봉언상각(奉言上覚) 『쓰가루일통지』), "카라후토노시마(からふとの島)"(『에조봉기주진서(蝦夷蜂起注進書)』)라는 표기가 확인된다.[74] 1700년의 『마쓰마에지마고쇼(松前島郷帳)』에는 "카라토시마(からと嶋)"이라고 되어 있다. 1704년에 에조지로 건너간 쇼코쿠넨(正光空念)의 사료에는 "카라후토", "카라후토시마(からふと嶋)"라는 표기가 많지만, "카라후토시마(唐ふとう嶋)", "카라후토후시마(からふとふしま)", "카라토노시마(からとのしま)"와 같은 표기도 보인다.[75]
1783년의 『가모니시카쓰토카국풍설고』에서는 "카라후토의 북쪽에 사카린이라는 큰 섬이 있다"라고 하며, 같은 책의 부도에서는 "카라후토"를 대륙과 이어진 반도로 그리고, 별도로 "사카린"을 섬으로 그리고 있다.[76] 1785년의 『삼국통람도설』에서도 "카라후토시마(カラフト嶋)"는 대륙의 반도로 그려져 있으며, 별도로 "북해 중의 하나의 큰 나라"로서 "사가린(サガリイン)"을 그리고 있다. 1808년부터 1809년에 걸쳐 실시된 마미야 린조 등의 조사에 의해 樺太가 섬임이 확인되었다.[77]
"사할린"(옛날에는 "'''사가렌'''"이라고 표기[78])이라는 명칭은 청의 황제가 3인의 예수회수도사에게 명령한 청나라 판도 측량 시, 흑룡강(만주어 명칭: sahaliyan ula/ᠰᠠᡥᠠᠯᡳᠶᠠᠨ
ᡠᠯᠠmnc) 하구의 건너편에 섬이 있다는 것을 듣고, 거기를 만주어로 sahaliyan ula angga hada/ᠰᠠᡥᠠᠯᡳᠶᠠᠨ
ᡠᠯᠠ
ᠠᠩᡤᠠ
ᡥᠠᡩᠠmnc, "흑룡강 건너편의 섬"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다. 포츠머스 조약 조인 이후 일본에서는 단순히 "樺太"라고 하면 남사할린을 가리켰기 때문에, 북사할린을 가리켜 사가렌(薩哈嗹)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사가렌 주 파견군」등이 그 예이다.
중국어에서는 청나라 시대의 명칭인 "'''쿠예다오(庫頁島)'''"(쿠게토우, 쿠이에다오, 유래는 고이(苦夷))라고 불린다. 또한, 러시아어 음역인 "'''사할린다오(薩哈林島)'''"도 사용된다.
2. 3. 미나미카라후토 (南樺太)
미나미카라후토(南樺太) 또는 남가라후토는 일본 제국의 행정구역으로, 가라후토 청(樺太庁)이 설치되어 태평양 전쟁 중인 1942년 외지에서 내지로 편입되었다.[77] 1945년 당시 인구는 약 40만 명이었으며, 중심 도시는 도요하라시(豊原市)였다.[77] 주요 산업은 어업, 농업, 임업, 제지, 펄프 등의 공업, 석탄, 석유 채굴업 등이었다.[77]「카라후토(樺太)」라는 명칭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69] 현재로서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70] 카라후토 아이누어에서는 “육지의 땅”을 의미하는 '''얀케모시리'''라고 불렸고,[71] 홋카이도 아이누어에서는 '''카라프토'''(Karapto)라고 불린다.[72] 일본어의 “唐人(からひと)”이 변하여 “카라후토”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73] 1646년 완성된 마쓰마에 번의 역사서 『신라지기록』에는 “당도지섬(唐渡之嶋)”으로 나오며, 정보일본도에도 “카라토노시마(からとの嶋)”가 그려져 있다.[74] 1700년의 『마쓰마에지마고쇼(松前島郷帳)』에는 “카라토시마(からと嶋)”이라고 되어 있다.[74]
1809년 이후에는 동서의 에조지에 대해 '''북에조지(北蝦夷地)'''라고도 불렸다.[77] 메이지 정부가 홋카이도 개척사를 설치하면서 “樺太”라는 한자 표기가 정해졌다.[77] “사할린”이라는 명칭은 청나라에서 흑룡강(만주어: 사할리얀 우라/ᠰᠠᡥᠠᠯᡳᠶᠠᠨ
ᡠᠯᠠmnc) 하구 건너편 섬을 칭하던 것에서 유래한다.[78] 포츠머스 조약 조인 이후 일본에서는 북사할린을 가리켜 사가렌(薩哈嗹)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78]
북위 50도선 이남 지역은 아이누의 거주지였으며, 니브흐와 윌타는 50도선에 가까운 동해안 홀내천 유역 주변에만 분포하였다. 1995년부터 왓카나이항과 콜사코프를 잇는 정기 항로가 개설되어 배로 이동이 가능하다.[79]
2. 4. 기타카라후토 (北樺太)
기타카라후토(北樺太) 또는 북가라후토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 이후 러시아령으로, 러시아 제국 연해주, 소련 하바롭스크 지방을 거쳐 사할린주에 속했으며, 러시아 연방이 들어선 현재에도 계속 사할린 주에 속해 있다.[77] 주요 도시로는 오하, 알렉산드롭스크사할린스키 등이 있다.[77]「카라후토(樺太)」라는 명칭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69] 현재로서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70] 카라후토 아이누어에서는 “육지의 땅”을 의미하는 '''얀케모시리'''라고 불렸고,[71] 홋카이도 아이누어에서는 '''카라프토'''(Karapto)라고 불린다.[72] 일본어의 “唐人(からひと)”이 변하여 “카라후토”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73]
옛날에는 “카라토”라고도 썼다. 1646년에 완성된 마쓰마에 번의 역사서 『신라지기록』에 “당도지섬(唐渡之嶋)”으로 나오며, 정보일본도에도 “카라토노시마(からとの嶋)”가 그려져 있다. 1669년의 사료에는 “카라후토(からふと)”(『쓰가루일통지』), “카라후토노시마(からふとの島)”(『에조봉기주진서(蝦夷蜂起注進書)』)라는 표기가 확인된다.[74] 1700년의 『마쓰마에지마고쇼(松前島郷帳)』에는 “카라토시마(からと嶋)”이라고 되어 있다. 1704년에 에조지로 건너간 쇼코쿠넨(正光空念)의 사료에는 “카라후토”, “카라후토시마(からふと嶋)”라는 표기가 많지만, “카라후토시마(唐ふとう嶋)”, “카라후토후시마(からふとふしま)”, “카라토노시마(からとのしま)”와 같은 표기도 보인다.[75]
1783년의 『가모니시카쓰토카국풍설고』에서는 “카라후토의 북쪽에 사카린이라는 큰 섬이 있다”라고 하며, 같은 책의 부도에서는 “카라후토”를 대륙과 이어진 반도로 그리고, 별도로 “사카린”을 섬으로 그리고 있다.[76] 1785년의 『삼국통람도설』에서도 “카라후토시마(カラフト嶋)”는 대륙의 반도로 그려져 있으며, 별도로 “북해 중의 하나의 큰 나라”로서 “사가린(サガリイン)”을 그리고 있다. 1808년부터 1809년에 걸쳐 실시된 마미야 린조 등의 조사에 의해 樺太가 섬임이 확인되었고,[77] 메이지 정부가 홋카이도 개척사를 설치함에 따라 “樺太”라는 한자 표기가 정해졌다.[77]
“사할린”(옛날에는 “'''사가렌'''”이라고 표기[78])이라는 명칭은, 청의 황제가 3명의 예수회수도사에게 명령한 청나라 판도 측량 시, 흑룡강(만주어: sahaliyan ula/ᠰᠠᡥᠠᠯᡳᠶᠠᠨ
ᡠᠯᠠmnc) 하구의 건너편에 섬이 있다는 것을 듣고, 거기를 만주어로 sahaliyan ula angga hada/ᠰᠠᡥᠠᠯᡳᠶᠠ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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ᡥᠠᡩᠠmnc, “흑룡강 건너편의 섬”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다. 포츠머스 조약 조인 이후 일본에서는 단순히 “樺太”라고 하면 남사할린을 가리켰기 때문에, 북사할린을 가리켜 사가렌(薩哈嗹)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사가렌 주 파견군」등이 그 예이다.
중국어에서는 청나라 시대의 명칭인 “'''쿠예다오(庫頁島)'''”(쿠게토우, 쿠이에다오, 유래는 고이(苦夷))라고 불린다. 또한, 러시아어 음역인 “'''사할린다오(薩哈林島)'''”도 사용된다.
북위 50도선 이북을 가리키는 북사할린은 니브흐족의 거주지이며, 동쪽 해안의 로모우 강 유역에는 윌타족도 분포한다. 樺太·千島교환조약 이후 러시아 영토이며(조약 이전에는 영유권이 미확정되어 일러 혼합 거주지였음), 러시아 제국 시대에는 연해주에 속했다. 소비에트 연방 성립 초기에는 니항 사건을 받아 1920년 7월부터 1925년 5월 15일까지 약 5년간 일본 사할린 주둔군의 보장 점령 하에 있었다. 1925년(다이쇼 14년) 일소 국교 수립으로 일본군이 철수하자 하바롭스크 지방에 편입되었고, 그 후 사할린주에 속했으며, 러시아 연방이 된 현재에도 계속해서 사할린주에 속해 있다. 오하 유전, 사할린 프로젝트(사할린 1, 사할린 2)가 대표적인 석유 산업이다.
3. 역사
영토 개발(1875년~1945년):
1875년: 사할린·쿠릴 열도 교환 조약
1905년: 포츠머스 조약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막말 이후로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 사할린 섬의 소유권이 여러 차례 변동했다.
- 1855년 - 일러 화친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사할린 섬의 국경은 "경계를 정하는 것은 종전과 같다"라고만 명시되어 결정되지 않았다. 그때까지 사할린 섬에는 러시아인이 없었지만, 이후부터 러시아인들이 사할린 북부에 이주하기 시작했다.
- 1867년 - 사할린 섬 혼거 조약이 체결되어 사할린 섬 전체가 일러 양국의 혼거지가 되었다. 이후 일본의 통치가 미치는 사할린 남부에도 러시아인의 이주가 격화되었다.
- 1875년 - 사할린·쿠릴 열도 교환 조약에 의해 사할린 섬 전체가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 1904년 2월 8일 - 러일 전쟁이 발발했다.
- 1905년 6월 -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강화 권고를 일러 양국이 수락하는 동시에, 일본은 동 대통령의 의견을 받아들여 사할린 작전을 결정했다.
- *7월 7일 - 사할린 섬에 침공하여 30일까지 사할린 섬 전체를 점령했다.
- *9월 5일 - 포츠머스 조약이 조인되어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섬이 일본 영토로 복귀했다.
- 1907년 - 일본은 사할린 섬에 가라후토 청을 설치했다.
- 1942년 - "내지 행정"으로 편입했다.
- 1945년
- *8월 9일 - 소비에트 연방이 일방적으로 일소 중립 조약을 파기하고,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남사할린에 침공(사할린 전투).
- *8월 14일 - 일본이 공식적으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항복했다.
- *8월 15일 - 국지전을 제외하고 휴전했다.
- *9월 2일 - 일본이 항복 문서에 조인하고, 더글러스 맥아더는 일반 명령 제1호를 발령하여 사할린 섬을 소련 점령지로 할 것을 명령했다.
- 1946년
- *1월 29일 - GHQ의 지령 SCAPIN-677이 일본 정부에 통달되어 일본의 행정권이 정지되었다.
- *2월 2일 - 소련은 남사할린·쿠릴 열도를 남사할린 주로 하고, 일방적으로 이를 러시아 공화국 하바롭스크 지방에 편입한다고 선언했다.
- 1952년 - 샌프란시스코 강화(평화) 조약이 발효되었다. 동 조약에서는 사할린 섬의 포기를 명기했지만, 인도 대상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또한 소비에트 연방(소련 붕괴 후의 계승 국가는 러시아 연방)도 동 조약에 대한 서명·비준을 거부하고 있다. 이후, 일러 양국 사이에서는 아직까지 평화 조약이 체결되지 않고 있어, 이 때문에 국제법상 일러 국경이 미정 상태로 남아 있다. 그 후 남사할린의 귀속에 대해 일본과 러시아의 견해가 상이하다.
소비에트 연방 붕괴 후, 그를 계승한 러시아 연방이 지금도 남사할린 전체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다.
1983년 9월 1일, 대한민국 민간 여객기인 대한항공 007편이 사할린 상공을 지나다 소련에 의해 사할린 섬 서쪽, 작은 모네론 섬 근처에서 격추되었다. 소련은 이를 정찰기라고 주장했지만, 현장 지휘관들은 민간 항공기임을 알고 있었다. 미국 하원 의원 래리 맥도널드를 포함한 승객과 승무원 269명 전원이 사망했다.[39]

1995년 5월 27일, 규모 7.0의 네프테고르스크 지진이 러시아의 이전 정착지였던 네프테고르스크를 강타하여 최대 메르칼리 진도 IX(격렬)을 기록했다. 총 피해액은 6,410만 달러에서 3억 달러에 달했으며, 사망자는 1,989명, 부상자는 750명에 이르렀다.[40] 이 정착지는 재건되지 않았다.[41]
3. 1. 초기 역사

사할린에서는 신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했다. 시베리아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흑요석 도구들이 두이와 쿠스나이에서 다량 발견되었으며, 유럽의 예와 유사한 연마된 석촉, 올로네츠의 것과 같은 장식이 있는 원시 토기, 그리고 어망에 사용된 돌 추 등도 발견되었다. 나중에 청동기 시대에 익숙한 사람들은 아니다 만에 흙벽과 부엌 쓰레기 더미의 흔적을 남겼다.

사할린의 원주민으로는 남쪽의 아이누, 중앙 지역의 오록 족, 북쪽의 니브흐 족이 있다.[14]
중국과 조선의 고서(산해경, 해동제국기)에는 모두 “일본의 북쪽(혹은 영역)은 흑룡강 어귀에 이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빙하기에는 사할린섬이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다. 신석기 시대부터 사할린섬에는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3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에호츠크 해안 일대에 에호츠크 문화가 존재했으며, 현재의 홋카이도, 사할린섬, 쿠릴 열도 남부에 분포하고 있었다. 이 문명은 코랴크인과 니브흐족과 관련이 있으며, 홋카이도의 후속 조몬 문화나 찰문 문화와는 다르다. 이 시기에는 아이누인이 사할린섬 남부에, 오로크인이 중부에, 니브흐인이 북부에 거주하고 있었다. 중국의 고대 문헌에 따르면, 호젠족과 오로촌족을 대표하는 퉁구스계 민족이 이 섬에 살고 있으며, 주로 수렵과 어로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전해진다.[85]
당나라 시대에는, 당 현종의 개원 13년(서기 725년), 당나라는 하바롭스크(伯力)에 흑수부를 설치하고, 흑수군을 배치하여 흑수말갈 지역에 효과적인 행정 지배를 실시했다. 『구당서·북적전』에는 “흑수 북서에 또한 사모부가 있고, 더 북쪽으로 10일 가면 군리부가 있으며, 동북쪽으로 10일 가면 굴설부가 있고, 또한 굴설이라고도 하며, 조금 남동쪽으로 10일 가면 목예개부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말갈의 세력이 강력했기 때문에, 굴설은 직접 당나라에 조공하지 않고 말갈에 속해 있었다. 또한, 류귀국은 당나라에 조공했고, 그 왕자 가야여지도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방문하여 당나라의 책봉을 받았고, 가야여지에게는 당나라로부터 기도위의 관직이 수여되었다. 사료에 따르면, 류귀국의 사신은 “삼역이래 조공”했고, 먼저 굴설부가 류귀국의 말을 굴설부의 말로 번역하고, 다음으로 흑수말갈이 자기들의 말로 번역하고, 마지막으로 중국어로 번역했다고 한다.
또한, 아스카 시대의 제이천황 때 행해진 에미시 정벌·숙신 토벌 때, 아베히라후가 교전한 배회변도는 사할린섬이라는 설[86]도 있다. 사할린섬은 남북으로 길기 때문에, 아이누인의 거주지인 남사할린과 니브흐족의 거주지인 북사할린으로 나누어 기록한다.

15세기 초, 명나라는 북벌하여 흑룡강 하류 지역으로 진출했기 때문에, 여진족의 각 부족이 명나라에 복속하기 시작했다. 1410년, 섬 동쪽에 위치한 눌렬하 유역의 오로크인의 족장이 먼저 명나라에 조공하여, 그 곳에 눌렬하위를 설치했다. 1411년에 명나라는 외만주의 특린에 누르간도지휘사사를 설치했는데, 외만주 여진 여러 부족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1412년, 북부 근해에 사는 니브흐인의 족장도 조공하여, 그 곳에 낭하아위를 설치했다. 1428년에 중부의 파라내하 유역의 오로크인의 족장도 조공하여, 그 곳에 파라하위를 설치했다. 이 세 개의 위는 모두 누르간도지휘사사에 속해 있었다. 명나라는 흑룡강 하류 지역과 사할린섬 등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환관 역실하를 파견했다. 그가 누르간 지역을 순시하며 영녕사를 건립하면서, 이 지역의 사무를 기록한 영녕사비도 세워졌다. 역실하는 1413년에 사할린섬을 다시 시찰했다. 1430년, 명 선종은 도지휘 강왕, 왕조주, 동답칙하 등을 누르간도지휘사사에 파견하여 군민을 위무했다.[87] 누르간도지휘사사는 선덕 9년(1434년)에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그 후, 세 개의 위는 명나라에 조공하지 않았다.
- 660년(기묘 천황 6년) 3월 - 아베 히라후가 『일본서기』에 기록된 숙신(미시와세)을 토벌하다. 히라후는 숙신의 침략을 받은 도시마(渡嶋)의 에미시(蝦夷)의 요청을 받아 이시카리강(石狩川)가에서 숙신과 싸워 폐비변도(幣賄弁島)까지 추격하여 싸웠다. 노토마미룡(能登馬身龍)이 전사하였으나 숙신을 물리쳤다.
- 헤이안 시대 이후, 사할린산 독수리 깃털과 해수 피혁이 아베 씨와 오슈 후지와라 씨 등 오슈의 호족을 거쳐 전국으로 유통되기 시작했다.[92] 이 무렵, 아이누와 문화·유전적으로 직접적인 연관이 강한 擦文文化인이 남사할린에 전개되었다고도 한다.
- 1217년(겐포 5년) - 이 해, 호조 요시토키가 무쓰슈(陸奥守)가 된다. 연대는 불명확하지만, 이후 요시토키 섭정 재직 시기의 어느 시점에 오슈와 에조지의 에조를 다스리기 위해 중세에 안도 수군을 거느린 안도 다이가 쓰가루에 배치된다(에조 사다 쇼쿠·에조 다이칸). 에조 다이칸은 가마쿠라 막부의 정무 중 하나인 “동이 성패(東夷成敗)”를 담당했으며[93][94], 주쓰이소를 거점으로 북방 무역과 유형수 관리를 통해 에조를 통치했던 것으로 보인다(『스와 다이묘진 에토키』『회선식목』『십삼왕래』)[95][96][97][98][99]. 에조 사회의 쟁란 시, 안도 씨는 쓰가루 해협을 건너 출병했다.[100] 10세기 전후 이후에 擦文文化가 진출하여 아이누 문화로 전환되었다고 보는 견해 외에, 이 무렵(13세기 전반), 아이누가 사할린에 진출했다는 설도 있다.[101] 사할린 각지에서는, 일본인 사회로부터 유입된 철솥의 영향을 받은 내이 토기 등도 출토되어, 아이누 문화가 확립되어 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1295년(에이닌 3년) - 닛렌 종의 승려 닛지가 사할린으로 건너가 혼토 군의 코진 촌 시라누시와 혼토 정 아코에 상륙하여 포교 활동을 했다고 전해진다.[102] 이후 사할린 서해안을 더 북상했다.
- 1336년-1392년(남북조 시대)의 구족이 사할린에서 출토되었다.
- 무로마치 시대 이후, 안도 수군은 간토 고멘센(関東御免船)으로서 일본해 북부를 중심으로 상당히 넓은 범위에서 활동했다. 에조 사회에 일본산 제품을 공급하고, 에조산 제품을 대량으로 매입하여 일본인 사회에 출하했다.
- 1394년~1428년(오에이 연간) - 북해의 이적 동란. 무로마치 막부는 안도 씨를 막부 직속으로 승격시켜 에조의 쟁란을 진압했다. 이 무렵, 쓰가루 주쓰이소·안도 씨가 “히노모토 쇼군”을 자칭하기 시작한다.
- 1428년(오에이 35년/쇼쵸 원년)까지, 북위50도선에 가까운 사할린 동해안의 홀로나이 강 유역의 원주민(윌타) 족장이 명과 외교 관계(羈縻政策도 참조)를 맺고, 하라가(ポロホー) 위의 지휘관의 칭호를 받고 조공했다. 영향을 미친 범위는 불명확하지만, 인근의 신몬 군 지역이나 시카 군 지역에 타라이카인(다라카 아이누)의 조상이 거주하고 있었다.
- 1435년(에이쿄 7년) - 대륙에서는 누얼간 도사가 폐지되고, 하라가 위(홀로나이 강 유역)의 원주민은 명으로의 조공 무역에서 해방된다. 하지만, 무역 자체는 15세기 후반까지 행해졌다.
- 1485년(분메이 17년) - 사할린 아이누의 오토나가, 에조 관령·안도 씨의 다이칸 다케다 노부히로(마쓰마에 가의 조상)에게 위마무[103]하여 동작대와 석연을 바치고 그의 신하가 된다(『복산비부』).
고대 이전에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숙신(みしわせ)이라 불리는 오호츠크 문화인 등이 존재했으며, 가마쿠라 시대 이후에는 니브흐족(니브히라고도 함. 아이누족은 서해안을 “스메렌쿠르”, 동해안을 “니쿠분”이라고 불렀다), 아이누족이 “오록코”라고 불렀던 동부(로모우 강 유역)의 윌타족 등의 북방 소수 민족도 있었다.
3. 1. 1. 원나라와 명나라의 영향
몽골이 몽골 제국의 금나라를 정복한 후(1234년) 니브흐족과 우데게족의 습격을 받았다. 이에 대응하여 몽골은 1263년 아무르 강과 암군 강이 합류하는 지점인 누르간(현재 티르)에 행정 기관을 설치하고 두 민족의 복속을 강요했다.[1]니브흐족의 관점에서 볼 때, 몽골에 항복한 것은 본질적으로 그들의 땅을 침략한 아이누족에 대항하는 군사 동맹을 맺은 것이었다.[2] 『원사』에 따르면, 사할린의 "구웨이"(, 아이누족을 부르는 니브흐족의 이름)로 알려진 사람들이 매년 질리미(니브흐족)를 침략하여 싸웠다. 1264년 11월 30일, 몽골군은 아이누족을 공격했다.[3] 아이누족은 몽골의 침입에 저항했지만, 1308년에는 진압당했다. 그들은 우리허, 난가르, 볼로허의 몽골 원나라 주둔지에 조공을 바쳤다.[4]
1264년(문영 원년) 책봉체제 하에 있던 길리미(ギレミ, 吉烈滅)가 “골왜(クイ)와 역리우(イリウ)가 매년 침입해 온다”고 호소했기 때문에, 몽골 제국(1271년부터 원)이 3000명의 군사를 사할린에 파병하여 남쪽에 거주하는 주민인 “골왜”를 공격하였다.
1284년(홍안 7년) - 1286년(홍안 9년) 원은 늑고대(ニクタイ)를 정동초토사에 임명하고 대규모 골왜 정벌을 20년 만에 실시하였다. 1285년(홍안 8년)에는 군사 1만 명, 1286년에는 군사 1만 명과 배 1000척을 파견하였다(『원사』).
1297년(영인 5년) 7월 왕불렴고(ユプレンク)가 이끄는 골왜(사할린 아이누)가 간막해협 건너편 대륙의 흑룡강을 거슬러 올라가 발리하라는 곳에서 원과 교전하였다(『원문류』).
1308년(덕치 3년/연경 원년) 길리미를 중재자로 하여 골왜가 모피 헌상을 조건으로 제시하고 원나라에 화의·귀순을 요청하여 사실상의 화목이 성립되었고, 교역을 하게 되었다. 이후 40년 이상에 걸친 골왜와 원나라의 전투는 종식되었다.
1368년(남조:정평 23년, 북조:응안 원년) 원이 중국 대륙의 지배권을 상실하고 북으로 이동하였고, 대륙·만주 지방을 둘러싸고 신흥의 명과 싸우는 혼란이 계속되어 간막해협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사할린에 대한 간섭은 사라졌다.
15세기 초, 명나라는 북벌하여 흑룡강 하류 지역으로 진출했기 때문에, 여진족의 각 부족이 명나라에 복속하기 시작했다.
1411년(응영 18년) 명은 진출한 대륙의 흑룡강(아무르 강) 하류 지역, 외만주의 티르에 기미 정책을 담당하는 누르간 도사를 설치하였다. 주변 여러 민족과 외교 관계를 맺을 때, 사할린 북부 3곳의 원주민 수장에게도 명목상으로 기미 위소 지휘관의 칭호를 부여하였다.[5] 이것을 매개로 남사할린 이남에 사는 타라이카인(아이누 민족)과도 교역하였다.
- 1410년(응영 17년) 북사할린 동해안 로모우 강 유역의 원주민(윌타) 수장이 명에 조공하여, 兀列河(우리에호) 위의 지휘관 칭호를 받았다.
- 1412년(응영 19년) 북사할린 서해안 량글의 원주민(니브흐) 수장이 명에 조공하여, 嚢哈児(난할) 위의 지휘관 칭호를 받았다.
- 1428년(응영 35년/정장 원년)까지, 사할린 동해안 중부 홀나이 강 유역의 원주민(윌타) 수장이 명에 조공하여, 波羅河(폴로호) 위의 지휘관 칭호를 받았다.
1435년(영향 7년) 누르간 도사가 폐지되고, 사할린 북부 3위의 원주민은 명에 대한 조공 교역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로모우 강 유역과 홀나이 강 유역은 15세기 후반까지 대륙과 교역을 하였다.
중국의 명나라(1368~1644)는 사할린을 "복속 민족 시스템"(''ximin tizhi'') 하에 두었다. 1409년부터 1411년까지 명나라는 시베리아 본토의 티르 유적 근처에 누르간 지역 군사 위원회라는 전초 기지를 설치했고, 이 기지는 1430년대 중반까지 운영되었다. 명나라 환관 제독 정화(정화)가 1413년 아무르 강 하류 원정 중 사할린에 도달하여 지역 족장에게 명나라 칭호를 수여했다는 증거가 있다.[6]
명나라는 사할린의 족장들을 지휘사(), 지휘첨사(), "복속 담당 관리"()와 같은 행정직에 임명했다. 1431년, 이러한 지휘첨사 중 한 명인 알리게가 우리허 주둔지에 담비 가죽을 조공으로 바쳤다. 1437년에는 찰루하, 산치하, 투올링하, 알링게 등 다른 네 명의 지휘첨사도 조공을 바쳤다. 『명실록』에 따르면, 이러한 직책은 족장의 직책과 마찬가지로 세습되었고, 부계를 통해 계승되었다. 조공을 바칠 때 족장들은 아들들을 데려왔고, 아들들은 나중에 그들의 칭호를 계승했다. 명나라는 조공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에게 비단 옷을 하사했다.[7]
명나라가 사할린과 아무르 강 지역에서 조공을 받을 때, 사할린의 니브흐족 여성들은 한족 명나라 관리와 결혼했다.[8][9]
3. 1. 2. 청나라의 통치
ᡶᡳᠶᠠᡴᠠ}}]])라고 불렀다. 만주족은 이곳을 "사갈리얀 울라 안가 하다"(흑룡강 어귀의 섬)라고 칭했다. 청나라는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통해 러시아 제국과의 경계를 스타노보이 산맥으로 확정하면서 사할린에 대한 영향력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청나라는 아무르 강 하구에 군대를 파견하여 아이누족을 포함한 주민들에게 조공을 요구했고, 지도를 만들기 위해 섬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청나라는 사할린 남쪽 끝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 병사와 관리를 파견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고, 주민들에게 모피 조공을 부과했다.[18]청나라는 원나라와 명나라처럼 모피 조공 제도를 통해 지역을 통치했다. 조공을 바치는 주민들은 ''할라''(, 부계 씨족)와 ''가산''(, 마을)에 따라 등록되었고, 각 단위의 우두머리가 지역 안보와 연간 모피 수집 및 납품을 담당했다. 1750년까지 56개의 ''할라''와 2,398가구가 모피 조공자로 등록되었으며, 모피 조공을 바친 이들은 주로 니시키 실크 견직물로 보상받았다. 청 왕조는 매년 각 씨족과 마을 우두머리에게 관리의 옷인 ''망파오'', ''두안파오''를 공급했다. 특히 많은 모피 조공을 바친 사람들은 만주 팔기군 관리의 양녀와 결혼하여 관리와 가족 관계를 맺을 권리를 얻었다. 또한 조공자들은 조공 장소에서 관리, 상인들과 무역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청나라는 이 지역에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고 상업과 경제 발전의 기반을 마련했다.[18]
청나라는 무단강 중류의 닝구타에 아무르 강 하류와 사할린의 모피를 처리하는 사무소를 설치했다. 조공은 지역 사무소로 가져와야 했지만, 아무르 강 하류와 사할린은 너무 멀었기 때문에 청나라는 매년 이 지역에 관리들을 직접 파견하여 조공을 징수하고 상을 수여했다. 1730년대까지 청나라는 원주민 사회의 고위 인물들을 "씨족장"(할라-이-다) 또는 "마을장"(가산-다 또는 모쿤-다)으로 임명했다. 1732년 사할린에는 6개의 ''할라'', 18개의 ''가스반'', 148가구가 조공자로 등록되었다. 만주 관리들은 사절단 기간 동안 쌀, 소금, 기타 필수품과 선물을 제공했다. 조공 사절단은 여름철에 이루어졌다. 건륭제 치세에는 마미야 린조에 따르면 키지 호수 상류의 델렌에 무역소가 있었고, 마미야가 머무는 동안 500~600명의 사람들이 시장에 있었다.[18]
청나라가 사할린에서 관할권을 행사하고 조공을 받을 때, 현지 사할린 족장들은 딸들을 만주 관리들의 아내로 삼았다.[17][18]

1616년, 魏源(위원)의 『聖武記(성무기)』에는 “태조(太祖)가 병사 400명을 보내 해안에 흩어져 사는 여러 부족을 정벌하고, 요새에 거주하는 자들을 잡기 위해 작은 배 200척을 보냈다. 쿠예(庫頁, 사할린)가 내부에 복속되어 매년 해달가죽을 공물로 바치고, 성장(姓長), 향장(鄉長)의 자제를 임명하여 통치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청나라 건국 후, 사할린섬(庫頁島, 쿠예다오)은 처음에 닝구타(寧古塔) 부도통(副都統)의 관할 아래 놓였고, 1715년 이후에는 삼성(三姓) 부도통의 통치를 받았다.[88] 섬 주민들은 매년 흑룡강(黑龍江) 하류의 푸루 향(普祿郷)까지 가서 청나라에 해달가죽 등을 바쳐야 했다.[88]
1689년 청나라와 러시아 제국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스타노보이 산맥 이남을 중국 영토로 규정하였으나, 당시 러시아인들은 사할린섬의 존재를 몰랐다. 1709년 강희제는 세 명의 예수회 수도사를 전국 지도 측량을 위해 파견하였고, 그들은 하나의 큰 섬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듬해, 만주족으로 구성된 두 번째 측량대가 간파 해협(間宮海峡)을 건너 사할린섬에 도착했다. 만주어 지도에서는 사할린섬이 공식적으로 “”(sahaliyan ula angga hada, 흑룡강 어귀)로 명명되었다. 옹정제 10년(1732년), 청나라는 삼성 부도통 아문(衙門)을 설립하고, “해섬에 거주하는 쿠예 페이야카(庫頁費雅喀) 사람들이 해달가죽을 공물로 바칠 경우, 삼성 부도통 아문의 병사를 파견하여 약속된 장소에서 해달가죽을 거두어들인다. 약속된 장소에 오지 않으면, 병사에게 섬으로 가서 불러들이고, 해달가죽을 거두어들인다.”고 규정하였고,[89] 같은 해 “해섬에 거주하는 특문허투사(特門赫圖舍) 등 쿠예 페이야카 사람 146호를 달래서 해달가죽을 바치도록 명령하였다.”[90] 또한, 청나라는 “살한추이(薩爾罕錐)”라고 불리는 기인(旗人)의 딸들이 현지 부족과 결혼함으로써 관계를 강화하였다. 결혼 조건은 엄격하여 황제의 직접적인 승인이 필요했다. 남자는 선물을 준비해야 했는데, 보통 해달가죽 304장과 다양한 색깔의 여우털이 필요했다. 청나라도 풍부한 지참금을 준비했는데, 주로 의류였지만, “소 두 마리, 쟁기, 쟁기날, 쟁기받침 각 한 쌍”과 같은 농기구도 포함되어 있었다.[91]
3. 2. 일본의 진출과 식민지화
1635년, 홋카이도 마쓰마에번의 2대 번주 마쓰마에 기니히로는 사토 가모에몬과 카키자키 쿠로도를 사할린 탐험에 파견했다.[19] 1679년 사할린 남쪽 끝 오토마리(현재의 코르사코프)에 일본인 정착촌이 세워졌다.[20] 마쓰마에 번의 지도 제작자들은 이 섬의 지도를 그려 '키타에조'라고 불렀다.1780년대,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사할린 남부 아이누에 대한 영향력이 크게 증가했다. 19세기 초, 일본의 경제권은 동해안 중간 지점인 타라이카까지 확장되었다. 1807년, 도쿠가와 막부는 사할린을 장악했다. 일본은 1807년 사할린에 대한 주권을 선포했고, 1809년 마미야 린조는 사할린이 섬이라고 주장했다.[21]

1799년 일본 에도 막부가 사할린섬 남쪽 끝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1821년 일본 마쓰마에 번이 일부를 영유했다. 1853년 러시아 제국이 영유를 선언했고, 1867년 러일 양국의 "협동 관할지"가 되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으로 사할린섬 전체가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111]
1905년 러일 전쟁의 승리로 일본 제국이 북위 50도선 이남의 사할린섬 남부를 넘겨받아 "가라후토 민정서"를 설치했고, 1907년 "가라후토 청"으로 개편했다. 1918년부터 1925년까지 러시아 적백내전을 틈타 일본군이 사할린섬 북부까지 점령했다. 1942년 내무성이 가라후토 청을 편입하여, 사할린섬 남부가 가이치에서 나이지로 편입되었다.
1945년 8월, 제2차 세계 대전 말 소련이 일본 제국에 선전포고하고 사할린섬 남부까지 차지했고, 1946년 소련이 사할린섬 남부에 대한 영유권을 선언했다. 1949년 국가 행정 조직법의 시행에 따라 가라후토 청이 폐지되고, 소련의 사할린주로 계승되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이 사할린섬 남부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여 섬 전체가 소련의 영토가 되었고, 현재는 러시아의 영토이다.
3. 3. 유럽의 탐험
17세기 네덜란드 선장 마르틴 게리츠 드 브리스는 1643년 사할린섬 동쪽 해안의 페시언스 곶과 아니바 곶을 지도에 표시했지만, 섬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22] 17세기 지도는 이 지점들을 본토의 일부로 표시했다.[23]1709년 청 황제는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청국 지도 측량을 명했다. 선교단은 아무르 강 하류의 나나이족 원주민들로부터 인근 해안 섬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나, 직접 방문하지는 못했다. 이들이 제공한 정보는 드 브리스가 발견한 땅과 동일한 곳인지 식별하기에 불충분했다.[23] 그 결과, 17세기 지도에는 사할린의 북쪽 절반(페시언스 곶 포함)만 나타나고, 아니바 곶과 크릴론 곶(블랙 곶)은 본토의 일부로 표시되는 등 다소 이상한 모양으로 나타났다.
18세기 동안 사할린의 지도 표현은 다양했다. 1773년 아틀라스의 지도는 단빌이 1709년 예수회 선교사들이 수집한 정보를 이용하여 제작한 것으로, 사할린의 존재를 주장하지만 섬의 북쪽 절반과 북동쪽 해안만을 표시하고 있다.

장-프랑수아 드 라페루즈는 1787년 탐험을 통해 사할린 남서쪽 해안 대부분을 조사했다. 섬 주민들은 섬을 "초카"라고 불렀다고 기록했다.[24]

1808년 에도 막부는 모가미 토쿠나이, 마쓰다 덴쥬로, 간노 린조를 파견했다. 마쓰다 덴쥬로는 간노 해협에 면한 라카 곶(북위 52도)에 "대일본국 국경"의 국경 표를 세웠다.[132][133] 1809년 간노 린조는 사할린이 섬임을 확인했다.[134][135][136]

1848년 러시아의 무라비요프는 겐나디 네벨리스코이에게 사할린 연안 조사를 의뢰했고, 네벨리스코이는 간노 해협을 최초로 선박으로 통과했다.
3. 4. 러일 간 경쟁과 분할 통치
1799년 일본 에도 막부가 사할린섬 남쪽 끝에 영향력을 행사했고,[25] 1821년에는 마쓰마에번이 일부를 영유했다. 1845년 일본은 사할린 전체와 쿠릴 열도에 대한 영유권을 선포했으나,[25] 1853년 러시아 제국이 영유를 선언하면서[110] 양국 간 경쟁이 심화되었다.1854년 일러 화친 조약에 따라, 일러 국경을 사할린 섬상에서 정하지 않고 지금까지의 관례에 따르기로 하였다(국경은 미확정 상태로 보류되었다).[111] 1867년 러일 양국은 "협동 관할지"로 합의했으나,[116]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통해 사할린섬 전체가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27]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은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북위 50도선 이남의 사할린 남부를 넘겨받았다.[139] 일본은 이 지역에 "가라후토 민정서"를 설치했고, 1907년 "가라후토 청"으로 개편했다.[117] 1918년부터 1925년까지 일본군은 러시아의 적백내전을 틈타 사할린섬 북부까지 점령하기도 했다.[137][138]
1942년 일본 내무성(중앙정부 행정 기관)은 가라후토 청을 편입하여 사할린섬 남부를 가이치(식민지)에서 나이지(일본 본토)로 편입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말 1945년 8월 소련이 일본 제국에 선전포고하고 사할린섬 남부까지 차지했으며,[139] 1946년 소련은 사할린섬 남부에 대한 영유권을 선언했다.[139] 1949년 가라후토 청은 폐지되고 소련의 사할린주로 계승되었다.[139]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은 사할린섬 남부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했고,[139] 이로써 섬 전체가 소련의 영토가 되었으며, 현재는 러시아의 영토이다.



3. 5. 제2차 세계 대전과 소련 점령
1855년 일러 화친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사할린 섬의 국경은 명확하게 결정되지 않았다. 이후 러시아인들이 사할린 북부에 이주하기 시작했다.[139] 1867년 사할린 섬 혼거 조약으로 사할린 섬 전체가 일러 양국의 혼거지가 되었고, 이후 일본의 통치가 미치는 사할린 남부에도 러시아인의 이주가 증가했다.[139] 1875년 사할린·쿠릴 열도 교환 조약에 의해 사할린 섬 전체가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139]1904년 2월 8일 러일 전쟁이 발발했다. 1905년 6월,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강화 권고를 양국이 수락하고, 일본은 사할린 작전을 결정, 7월 7일 사할린 섬에 침공하여 30일까지 섬 전체를 점령했다.[139]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이 조인되어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섬이 일본 영토로 복귀했다.[139] 1907년 일본은 사할린 섬에 가라후토 청을 설치했고, 1942년 "내지 행정"으로 편입했다.
1945년 8월 9일, 소비에트 연방이 소일 중립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대일 선전포고를 하며 남사할린을 침공했다(사할린 전투).[139] 이는 얄타 협정에 따른 것이었다.[140] 소련의 공격은 일본의 항복 며칠 전인 1945년 8월 11일에 시작되었다.[33] 제16군의 일부인 소련 제56라이플 군단은 제79라이플 사단, 제2라이플 여단, 제5라이플 여단, 제214기갑 여단[33]으로 구성되어 일본 제88보병사단을 공격했다. 소련군은 일본군보다 3배나 많았지만, 강력한 일본군의 저항으로 인해 느리게 전진했다. 8월 16일, 소비에츠카야 가반에서 온 제113라이플 여단과 제365독립 해병대 라이플 대대가 가라후토 서쪽 해안 마을인 도로에 상륙하면서 소련군은 일본군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이 상륙 이후 일본군의 저항은 약해졌다. 실제 전투는 8월 21일까지 계속되었고, 8월 22일부터 23일까지 대부분의 남은 일본군 부대는 휴전에 동의했다. 소련군은 1945년 8월 25일 도요하라의 수도를 점령함으로써 가라후토 정복을 완료했다.
8월 14일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했으나,[139] 8월 22일 지토리 마을에서 소일 휴전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소련은 민간인에 대해서도 공격을 계속했다.[140] 9월 2일 일본이 항복 문서에 조인하고, 더글러스 맥아더는 일반 명령 제1호를 발령하여 사할린 섬을 소련 점령지로 할 것을 명령했다.[139] 1946년 1월 29일, 연합국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의 지령 SCAPIN-677이 일본 정부에 통달되어 일본의 행정권이 정지되었다.[139] 2월 2일, 소련은 남사할린·쿠릴 열도를 남사할린 주로 하고, 일방적으로 이를 러시아 공화국 하바롭스크 지방에 편입한다고 선언했다.[139] 1947년 1월 2일 소련은 카라후토 전섬과 북방영토 및 쿠릴열도를 포함한 사할린주를 설치했다. 1949년 6월 1일 국가행정조직법 시행으로 일본의 국내법적으로 樺太庁(카라후토청)이 폐지되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이 사할린섬 남부에 대한 영유권 포기.[37] 이로써 섬 전체가 소련의 영토가 되었고, 현재는 러시아의 영토이다. 그러나 소련은 조약에 대한 조인·비준을 거부했고, 동 조약의 당사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약 내용이 소련(후계인 러시아 연방)에 적용되지 않으며, 남사할린의 영유권 귀속지는 국제법상 미정으로 남아 있다.[140]
1944년 사할린 남부에 거주하던 약 40만 명의 주민들 – 대부분 일본인과 한국인 – 중 약 10만 명은 전쟁 말기에 일본으로 피난했다. 나머지 30만 명은 남았고, 일부는 수년 더 남았다.[34] 사할린의 일본인과 한국인 대부분은 1946년부터 1950년 사이에 점차 본국으로 송환되었지만, 수만 명의 사할린 한국인(그리고 일부 일본인 배우자)은 소련에 남았다.[35][36] 1965년 9월 15일 소련 선박 바이칼호로 8세대 35명이 요코하마항으로 귀국했는데, 이는 1959년 이래 6년 만의 귀환자였다.[128]
영토 개발(1875년~1945년):
1875년: 사할린·쿠릴 열도 교환 조약
1905년: 포츠머스 조약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3. 6. 연표
- 1799년: 일본 에도 막부가 사할린섬 남쪽 끝에 영향력 행사.
- 1821년: 일본 마쓰마에번이 일부를 영유.
- 1853년: 러시아 제국이 영유 선언.
- 1867년: 러일 양국의 "협동 관할지"가 됨.
- 1875년: 러일 양국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조인하여 사할린섬 전체가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됨.
- 1905년: 러일 전쟁의 승리로 일본 제국이 북위 50도선 이남의 사할린섬 남부를 넘겨받아 이 지역에 "가라후토 민정서" 설치.
- 1907년: "가라후토 민정서"를 "가라후토 청"으로 개편.
- 1918년-1925년: 러시아의 적백내전을 틈타 일본군이 사할린섬 북부까지 점령.
- 1942년: 내무성(중앙정부 행정 기관)이 가라후토 청을 편입하여 사할린섬 남부가 가이치(식민지)에서 나이지(内地)(일본 본토)로 편입.
- 1945년 8월: 제2차 세계 대전 말, 소련이 일본 제국에 선전포고하고 사할린섬 남부까지 차지.
- 1946년: 소련이 사할린섬 남부에 대한 영유권 선언.
- 1949년: 국가 행정 조직법의 시행에 따라 가라후토 청이 폐지되고, 소련의 사할린주로 계승.
-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이 사할린섬 남부에 대한 영유권 포기. 이로써 섬 전체가 소련의 영토가 되었고, 현재는 러시아의 영토.
4. 지리
사할린은 좁고 얕은 타타르 해협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 본토와 분리되어 있으며, 일본 홋카이도와는 소야 해협 (라페루즈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다.[2] 사할린은 러시아에서 가장 큰 섬으로, 길이 약 948km, 너비는 25-170km이며, 면적은 72,492km2이다.[2]
사할린의 약 3분의 2는 산악 지형이다. 섬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두 개의 평행한 산맥이 뻗어 있는데, 서사할린 산맥의 최고봉은 이차라 산(1,481m)이고, 동사할린 산맥의 최고봉은 로파틴 산(1,609m)으로 섬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43] 팀-포로나이스카야 계곡이 두 산맥을 분리한다.[43] 수수나이스키 산맥과 토니노-아니브스키 산맥은 섬의 남쪽을 가로지르며, 습지인 북사할린 평야는 섬의 북쪽 대부분을 차지한다.[43]
주요 강으로는 북동쪽으로 흘러 오호츠크 해로 유입되는 팀 강(길이 330km)과[44] 남동쪽으로 흘러 참을성의 만으로 유입되는 포로나이 강이 있다.
사할린 최북단은 슈미트 반도에 있는 엘리자베스 곶이며,[43] 최남단은 크릴론 곶이다. 사할린에는 모네론 섬과 우시 섬이라는 두 개의 작은 섬이 있다.
4. 1. 주요 지형
사할린은 좁고 얕은 타타르 해협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 본토와 분리되어 있으며, 일본 홋카이도와는 소야 해협 (라페루즈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다.[2] 사할린은 러시아에서 가장 큰 섬으로, 길이 약 948km, 너비는 25-170km이며, 면적은 72,492km2이다.[2]사할린의 약 3분의 2는 산악 지형이다. 섬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두 개의 평행한 산맥이 뻗어 있는데, 서사할린 산맥의 최고봉은 이차라 산(1,481m)이고, 동사할린 산맥의 최고봉은 로파틴 산(1,609m)으로 섬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43] 팀-포로나이스카야 계곡이 두 산맥을 분리한다.[43] 수수나이스키 산맥과 토니노-아니브스키 산맥은 섬의 남쪽을 가로지르며, 습지인 북사할린 평야는 섬의 북쪽 대부분을 차지한다.[43]
주요 강으로는 북동쪽으로 흘러 오호츠크 해로 유입되는 팀 강(길이 330km)과[44] 남동쪽으로 흘러 참을성의 만으로 유입되는 포로나이 강이 있다.
사할린 최북단은 슈미트 반도에 있는 엘리자베스 곶이며,[43] 최남단은 크릴론 곶이다. 사할린에는 모네론 섬과 우시 섬이라는 두 개의 작은 섬이 있다.
5. 기후
사할린은 대륙성 기후로 춥고, 여름이 짧고, 겨울이 6개월에 달하며, 겨울의 평균 기온은 -19 °C에서 -24 °C 사이이며, 북쪽 지역보다 -40 °C까지 낮을 수 있다.[51] 몇몇 항구는 장기간 얼음으로 뒤덮여 있다. 북부는 8개월이나 얼어 있었다. 연간 강수량은 500-1200mm이다.
오호츠크해의 영향으로 사할린은 남부의 온대 습윤 기후(쾨펜 ''Dfb'')에서 중부와 북부의 아한대 기후(''Dfc'')까지 다양한 차가운 습윤 기후를 보인다. 해양성 기후의 영향으로 여름은 하얼빈이나 이르쿠츠크와 같은 동일 위도의 내륙 도시보다 훨씬 서늘하지만, 겨울은 동일 위도의 동아시아 내륙 도시보다 눈이 훨씬 많이 내리고 섭씨 몇 도 더 따뜻하다. 여름에는 안개가 끼고 햇볕이 적다.[51]
강수량은 여름철 강한 육상풍과 가을철 섬에 영향을 미치는 북태평양 폭풍의 빈번한 발생으로 인해 많다. 북서해안의 약 500mm에서 남부 산악지대의 1200mm 이상까지 다양하다. 여름철 강수량이 많은 동아시아 내륙과는 달리, 육상풍으로 인해 사할린은 가을에 최고치를 기록하는 연중 강수량을 보인다.[43]
냉온대 기후에 속한다. 북단 오하(奥羽)에서는 식물의 생장 기간이 97일로 매우 짧다.
6. 생태
섬 전체는 대부분 침엽수림으로 덮여 있다. 예조 전나무 (''Picea jezoensis''), 사할린 전나무 (''Abies sachalinensis''), 그리고 다후리아 낙엽송 (''Larix gmelinii'')이 주요 수종이며, 산지 상부에는 시베리아 왜소소나무 (''Pinus pumila'')와 쿠릴 대나무 (''Sasa kurilensis'')가 자란다. 자작나무류인 시베리아 은자작 (Betula platyphylla)과 에르만 자작나무 (''B. ermanii''), 양버들, 느릅나무 (''Ulmus laciniata''), 앵두나무 (''Prunus padus''), 일본 주목 (''Taxus cuspidata''), 그리고 여러 종류의 버드나무가 침엽수와 섞여 자라며, 남쪽으로 갈수록 단풍나무, 산사나무, 그리고 참나무, 일본의 ''Kalopanax septemlobus'', 개피나무 (''Phellodendron amurense''), 회양목 (''Euonymus macropterus'') 그리고 덩굴식물 (''Vitis thunbergii'')이 나타난다. 덤불 속에는 구름베리, 크랜베리, 크로베리, 빌베리와 같은 여러 종류의 장과를 맺는 식물들과 붉은 열매를 맺는 엘더베리 (''Sambucus racemosa''), 야생 산딸기와 쉬땅나무속이 풍부하다.
불곰, 수달, 여우, 유라시아살쾡이, 표범고양이 그리고 검은담비가 상당히 많이 서식하며 (북쪽에서는 순록도 많다), 보기 드물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종으로는 희귀한 사할린 사향노루 (시베리아 사향노루의 아종)가 있다. 더 작은 포유류로는 토끼, 다람쥐, 그리고 여러 종류의 설치류 (쥐와 생쥐 포함)가 거의 모든 곳에 서식한다. 조류는 주로 일반적인 동시베리아 종으로 구성되지만, 고유종 또는 거의 고유종인 번식 종이 몇몇 있으며, 특히 멸종위기에 처한 검은갯발도요 (''Tringa guttifer'')와 사할린휘파람새 (''Phylloscopus borealoides'')가 주목할 만하다. 강에는 특히 연어류 (''Oncorhynchus'')를 포함한 많은 어류가 서식한다.
고래목 동물들이 해안을 자주 찾는데, 그중에는 멸종위기에 처한 서태평양 회색고래[52]가 있으며, 사할린 연안의 바다는 이들의 유일한 알려진 먹이 섭취 지역이므로 개체군의 장기적인 생존에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진 다른 고래목 동물로는 북태평양오른쪽고래, 북극고래, 그리고 흰돌고래가 있으며, 후자 두 종은 일반적으로 북쪽의 얼음 바다와 더 차가운 조건을 선호한다. 이들은 모두 매우 사회적인 범고래의 잠재적인 먹이가 된다. 한때 흔했던 일본바다사자와 일본 해달은 일본 해안에서 사할린, 한국, 캄차카 그리고 황해까지 서식했지만,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과도한 사냥으로 개체 수가 감소했다. 오늘날 물개와 거대한 스텔러해양사자를 사할린 섬 주변에서 볼 수 있다.
냉온대 기후에 속한다. 북단 오하(奥羽)에서는 식물의 생장 기간이 97일로 매우 짧다. 전체 면적의 75%가 삼림이며, 예전에는 북쪽은 잎갈나무(エゾマツ), 남쪽은 눈잣나무(トドマツ)를 중심으로 한 원시림이 펼쳐져 있었다. 남사할린(南樺太)을 일본이 영유했을 당시에는 펄프 원료로 대규모 벌채를 실시했을 뿐만 아니라, 병충해(カラフトマツカレハ) 발생과 산불로 인해 산림 자원이 감소했다. 소련이 실효 지배한 후에도 펄프 공장은 가동되었고, 벌채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산림 감소는 계속되었다고 여겨진다.[84]
6. 1. 식물
섬 전체는 대부분 침엽수림으로 덮여 있다. 예조 전나무(Picea jezoensis), 사할린 전나무(Abies sachalinensis), 다후리아 낙엽송(Larix gmelinii)이 주요 수종이며, 산지 상부에는 시베리아 왜소소나무(Pinus pumila)와 쿠릴 대나무 (''Sasa kurilensis'')가 자란다. 자작나무류인 시베리아 은자작 (Betula platyphylla)과 에르만 자작나무 (''B. ermanii''), 양버들, 느릅나무 (''Ulmus laciniata''), 앵두나무 (''Prunus padus''), 일본 주목 (''Taxus cuspidata''), 그리고 여러 종류의 버드나무가 침엽수와 섞여 자라며, 남쪽으로 갈수록 단풍나무, 산사나무, 그리고 참나무, 일본의 ''Kalopanax septemlobus'', 개피나무 (''Phellodendron amurense''), 회양목 (''Euonymus macropterus'') 그리고 덩굴식물 (''Vitis thunbergii'')이 나타난다.[84] 덤불 속에는 구름베리, 크랜베리, 크로베리, 빌베리와 같은 여러 종류의 장과를 맺는 식물들과 붉은 열매를 맺는 엘더베리 (''Sambucus racemosa''), 야생 산딸기와 쉬땅나무속이 풍부하다. 지름 약 1cm 정도의 코케모모(코케모모) 열매를 프렙이라고 부르는데, 잼 등으로 만들어 먹기도 한다. 프렙은 아이누어로 "붉은 것"을 의미한다.냉온대 기후에 속하며 북단 오하에서는 식물의 생장 기간이 97일로 매우 짧다. 전체 면적의 75%가 삼림이며, 예전에는 북쪽은 잎갈나무, 남쪽은 눈잣나무를 중심으로 한 원시림이 펼쳐져 있었다. 남사할린을 일본이 영유했을 당시에는 펄프 원료로 대규모 벌채를 실시했을 뿐만 아니라, 병충해 발생과 산불로 인해 산림 자원이 감소했다. 소련이 실효 지배한 후에도 펄프 공장은 가동되었고, 벌채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산림 감소는 계속되었다고 여겨진다.[84] 사할린섬 토우내촌에는 많은 호수가 있으며, 마리모가 많이 서식하고 있는데, 홋카이도산과는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사할린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6. 2. 동물
섬 전체는 대부분 침엽수림으로 덮여 있으며, 예조 전나무(Picea jezoensis), 사할린 전나무(Abies sachalinensis), 다후리아 낙엽송(Larix gmelinii)이 주요 수종이다.[84] 산지 상부에는 시베리아 왜소소나무(Pinus pumila)와 쿠릴 대나무 (Sasa kurilensis)가 자란다. 자작나무류인 시베리아 은자작 (Betula platyphylla)과 에르만 자작나무 (B. ermanii), 양버들, 느릅나무(Ulmus laciniata), 앵두나무(Prunus padus), 일본 주목(Taxus cuspidata), 그리고 여러 종류의 버드나무가 침엽수와 섞여 자란다. 남쪽으로 갈수록 단풍나무, 산사나무, 참나무, 일본의 ''Kalopanax septemlobus'', 개피나무(Phellodendron amurense), 회양목(Euonymus macropterus) 그리고 덩굴식물 (Vitis thunbergii)이 나타난다.[84] 덤불 속에는 구름베리, 크랜베리, 크로베리, 빌베리와 같은 여러 종류의 장과를 맺는 식물들과 붉은 열매를 맺는 엘더베리 (Sambucus racemosa), 야생 산딸기와 쉬땅나무속이 풍부하다.불곰, 수달, 여우, 유라시아살쾡이, 표범고양이 그리고 검은담비가 많이 서식하며, 북쪽에는 순록도 많다. 희귀종인 사할린 사향노루(시베리아 사향노루의 아종)도 서식한다. 토끼, 다람쥐, 쥐, 생쥐를 포함한 여러 종류의 설치류가 거의 모든 곳에 서식한다. 조류는 주로 동시베리아 종으로 구성되지만, 고유종인 검은갯발도요(Tringa guttifer)와 사할린휘파람새(Phylloscopus borealoides)가 주목할 만하다. 강에는 연어류(Oncorhynchus)를 포함한 많은 어류가 서식한다.[84]
고래목 동물들이 해안을 자주 찾는데, 멸종위기에 처한 서태평양 회색고래[52]가 대표적이며, 사할린 연안은 이들의 유일한 먹이 섭취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서식하는 다른 고래목 동물로는 북태평양오른쪽고래, 북극고래, 흰돌고래가 있으며, 이들은 모두 범고래의 잠재적인 먹이가 된다. 한때 흔했던 일본바다사자와 일본 해달은 과도한 사냥으로 개체 수가 감소했다. 오늘날 물개와 스텔러해양사자를 사할린 섬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사할린견은 일본 고유종이며, 주인에게 매우 충실하다. 남극 이야기에 등장하는 타로와 지로가 그러하다.
사할린연어(カラフトマス)는 연어 통조림의 원료로 이용되고 있다.
7. 주민
사할린섬의 주민들은 대부분 러시아인(78%)이고, 우크라이나인이 7.4%이다. 그 밖에 최대 소수 민족은 사할린 한인(6.5%)이다. 사할린섬에 사는 한인의 수는 약 4만 3000명이며, 이들 중 대한민국으로의 귀환을 바라는 사람은 7,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원주민(0.4%)은 남부의 아이누, 북부의 니브히족(길랴크) · 윌타족(오로크)이 있으며,[148] 그 밖에 소수의 일본인, 벨라루스인, 몰도바인, 모르도바인, 바시키르인, 추바시인, 아르메니아인, 오로치인, 타타르족도 거주한다.
1897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사할린에는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니브흐족, 폴란드인, 타타르인, 아이누족, 오록족, 독일인, 일본인 등 다양한 민족이 거주했다.[45] 비토착민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거나 유형수 또는 유배자였고,[45] 니브흐족, 아이누족, 일본인 대부분은 어업이나 사냥, 오록족은 주로 사슴(순록) 사육으로 생계를 유지했다.[46] 아이누족, 일본인, 한국인은 거의 전적으로 섬의 남부에 거주했다.[47] 1925년 이후 많은 폴란드인들이 북부의 소비에트 러시아 박해를 피해 당시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남부로 피신했다.[48]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인 1945년 소련이 사할린 남부를 침공하자, 피난하지 않은 사할린의 일본인 주민 40만 명(일본화된 토착 아이누족 포함)이 강제 추방되었다.[49]
2010년 사할린 섬의 인구는 497,973명이었으며, 그중 83%는 러시아인이었고, 약 3만 명(5.5%)의 한국인이 그 뒤를 이었다. 소수 민족으로는 아이누족, 우크라이나인, 타타르인, 야쿠트인, 에벤크족이 있었다.[50] 현재 원주민은 약 2,000명의 니브흐족과 750명의 오록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북부의 니브흐족은 어업과 사냥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사할린주 행정 중심지인 유즈노사할린스크는 약 17만 명의 인구를 가진 도시이며, 대규모 한국인 소수 민족인 사할린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강제로 석탄 광산에서 일하기 위해 이주해 왔다.[50] 인구 대부분은 섬의 남쪽 절반에 거주하며, 주로 유즈노사할린스크와 두 개의 항구 도시인 홀름스크와 코르사코프(각각 약 4만 명의 인구)를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다.[50] 2008년에는 출생아 6,416명, 사망자 7,572명이 있었다.[50]
;북사할린
니브흐족 외에 동부(폴로나이 강과 로모우 강 유역)에는 윌타족도 거주하였다.
;남사할린
사할린 아이누족 외에 북동부(폴로나이 강 유역, 시카군과 산코군 등)에는 윌타족, 니브흐족과 같은 북방 소수 민족이 있었다. 1905년부터 1945년까지의 일본 통치하의 남사할린에서는 사할린청은 아이누(사할린 아이누는 당초 사할린 토착민으로 여겨졌으나 1932년 1월 호적법상 내지인이 되었다)를 제외한 사할린 원주민(윌타, 니브흐 등)을 오타스의 숲에 집중 거주시켜 호적법상 사할린 토착민으로 취급하여 내지인과 구별하였으나, 일본 국적을 부여하였다. 사할린 원주민은 남사할린에 거주하며 일본 국적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소련에 의한 사할린 점령 후에는 남은 자들을 제외하고는 홋카이도 이남으로 추방되었다. 일본에서는 종전 후인 1945년에 아이누를 제외한 사할린 원주민의 참정권이 정지되었으나,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발효 시에 취적이라는 형태로 참정권을 회복하였다. 현재 사할린 주민 중에는 아이누를 자칭하는 사람이 소수 존재하지만, 통계가 없어 자세한 내용은 불명확하다.
사할린 등에 거주하다 패전의 혼란으로 귀국하지 못한 일본인도 있었다. 2018년 현재 가족을 포함해 275명이 영주 귀국을 했고, 86명이 사할린에, 23명이 구 소련권에 거주하고 있다.[147]
7. 1. 사할린 한인
1897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사할린에는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니브흐족, 폴란드인, 타타르인, 아이누족, 오록족, 독일인, 일본인 등 다양한 민족이 거주했다.[45] 비토착민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거나 유형수 또는 유배자였고,[45] 니브흐족, 아이누족, 일본인 대부분은 어업이나 사냥, 오록족은 주로 사슴(순록) 사육으로 생계를 유지했다.[46] 아이누족, 일본인, 한국인은 거의 전적으로 섬의 남부에 거주했다.[47] 1925년 이후 많은 폴란드인들이 북부의 소비에트 러시아 박해를 피해 당시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남부로 피신했다.[48]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인 1945년 소련이 사할린 남부를 침공하자, 피난하지 않은 사할린의 일본인 주민 40만 명(일본화된 토착 아이누족 포함)이 강제 추방되었다.[49]
2010년 사할린 섬의 인구는 497,973명이었으며, 그중 83%는 러시아인이었고, 약 3만 명(5.5%)의 한국인이 그 뒤를 이었다.[50] 소수 민족으로는 아이누족, 우크라이나인, 타타르인, 야쿠트인, 에벤크족이 있었다.[50] 현재 원주민은 약 2,000명의 니브흐족과 750명의 오록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북부의 니브흐족은 어업과 사냥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50]
사할린주 행정 중심지인 유즈노사할린스크는 약 17만 명의 인구를 가진 도시이며, 대규모 한국인 소수 민족인 사할린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일본에 의해 강제로 석탄 광산에서 일하기 위해 이주해 왔다.[50] 인구 대부분은 섬의 남쪽 절반에 거주하며, 주로 유즈노사할린스크와 두 개의 항구 도시인 홀름스크와 코르사코프(각각 약 4만 명의 인구)를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다.[50] 2008년에는 출생아 6,416명, 사망자 7,572명이 있었다.[50]
사할린 등에 거주하다 패전의 혼란으로 귀국하지 못한 일본인도 있었다. 2018년 현재 가족을 포함해 275명이 영주 귀국을 했고, 86명이 사할린에, 23명이 구 소련권에 거주하고 있다.[147]
8. 산업
사할린의 주요 산업은 광업이며, 그 밖에 석유, 석탄, 천연가스, 펄프, 제지업, 어업과 어류가공, 임업·제당업, 목축 등이다.[43] 주요 항구로는 코르사코프, 홀름스크, 알렉산드로프스크사할린스키, 사할린스크, 우글레고르스크 등이 있다. 사할린은 전형적인 1차 산업 지역으로,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 석탄 채굴, 임업, 그리고 수산업에 의존하고 있다.[43] 호밀, 밀, 귀리, 보리, 그리고 채소가 소량 재배되지만, 생육기간은 평균 100일 미만이다.[43]
소련 붕괴와 그 이후의 경제 자유화 이후, 사할린은 대부분의 대형 석유 다국적 기업의 광범위한 석유 탐사 및 채굴로 인해 석유 붐을 경험했다.[43] 석유와 천연가스 매장량은 약 14십억 배럴(2.2 km3)의 석유와 2,700 km3(96조 입방피트)의 가스로 추산되며, 엑손모빌(ExxonMobil)과 셸(Shell plc)과 같은 국제 석유 회사가 참여하는 생산 분배 계약에 따라 개발되고 있다.[43]
1996년, 두 개의 대규모 컨소시엄인 사할린-1과 사할린-2는 섬의 북동쪽 해안에서 석유와 가스를 탐사하기 위한 계약을 체결했다.[43] 엑손 네프테가스(Exxon Neftegas)가 관리하는 사할린 I 프로젝트는 사할린 I 컨소시엄, 러시아 연방 및 사할린 정부 간의 생산 분배 계약(PSA)을 완료했다.[43] 러시아는 사할린 섬에서 러시아 본토의 데-카스트리 터미널까지 타타르 해협을 가로지르는 220km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는 과정에 있다.[43] 데-카스트리에서 자원은 탱커에 실려 일본, 한국, 중국과 같은 동아시아 시장으로 운송된다.[43]
두 번째 컨소시엄인 사할린 에너지 투자 회사(Sakhalin Energy)는 사할린-2 프로젝트를 관리하고 있다. 러시아 연방과 첫 번째 생산 분배 계약(PSA)을 완료했다. 사할린 에너지는 섬의 북동쪽에서 남쪽 끝의 아니다 만(Aniva Bay)의 프리고로드노예(Prigorodnoe)까지 800km의 파이프라인 두 개를 건설할 것이다. 이 컨소시엄은 또한 프리고로드노예에 러시아 최초의 액화천연가스(LNG) 플랜트를 건설할 것이다. 석유와 가스는 동아시아 시장으로 향한다.
사할린 II는 아니다 만에 준설 물질을 투기한 것에 대해 사할린 환경 감시(Sakhalin Environment Watch)와 같은 환경 단체의 비판을 받았다.[62] 이 단체들은 또한 해상 파이프라인이 섬에서 고래의 이동을 방해할 것을 우려했다. 이 컨소시엄은 고래 이동 경로를 피하기 위해 파이프라인의 경로를 변경했다.[62] 예상 비용이 두 배로 증가한 후 러시아 정부는 환경 문제를 이유로 프로젝트 중단을 위협했다.[62] 러시아 정부가 환경 문제를 프로젝트 수익의 더 큰 부분을 확보하고/하거나 국영 가즈프롬의 참여를 강요하기 위한 구실로 사용하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63][64][65][66] 러시아 재무부로 유입되는 이익의 비율을 줄이고 있다.
2000년 석유 및 가스 산업은 사할린 산업 생산량의 57.5%를 차지했다. 2006년에는 섬 산업 생산량의 80%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할린의 경제는 석유 및 가스 산업 덕분에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기준, 가즈프롬은 셸, 미쓰이, 미쓰비시의 지분 50%를 인수하여 사할린 II의 지분 50% 플러스 1주를 확보했다.
2021년 6월, 러시아는 2025년까지 사할린 섬을 탄소 중립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발표했다.[67]
1905년 러일 전쟁이후, 일본은 사할린 남부에서 중부에 이르는 지층을 세밀하게 조사하여 무연탄등을 본토로도 반출하였다.[80][81] 탑로정(塔路町) 주변에서는 양질의 무연탄이 많이 채굴되었다.[80][81] 그 부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인구가 증가하였고, 탑로 소학교(塔路小学校)는 3,000명의 학생과 60명의 교사를 거느리며 "일본 최대의 소학교"라고 불렸다.[80][81]
사할린의 류타카는 비교적 온난하고 농업에도 적합하지만, 아틴만에서 북방대합 등을 채취하고, 채취 후에는 추위를 피하기 위해 모닥불을 피우기도 했다.
1905년 국토 회복 후, 일본은 연구를 통해 젓가래(蝦夷松)와 너도밤나무(椴松)가 펄프(パルプ) 원료가 된다는 것을 밝혀냈고,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특수 경기(特需景気)의 호황을 맞아 급성장하였다. 오지제지(王子製紙)(초대), 후지제지(富士製紙), 카라후토공업(樺太工業)의 3사 과점 체제였으나, 1933년 오지제지가 경쟁 2사를 흡수 합병하여 오지제품은 혼슈로도 반출되었다. 또한 같은 시기에 목재업체들의 합병도 진행되어 카라후토 목재 통제 조합이 설립되었다.
산림 벌채는 개발과 불가분하게 진행되었지만, 섬 안에서 모두 소비할 수 없었기에 목재의 섬 밖으로의 반출이 활발해졌다. 반출량은 1929년에 최고치를 기록하여 약 1,300만 석에 달했다. 그러나 그 후 점차 감소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인 1941년에는 약 10만 석으로 떨어졌다.[82] 전쟁 중에는 목재를 운반하는 선박이 부족하여 선적이 불가능한 채 종전을 맞이하였다.
9. 교통
해상 수송은 사할린 경제의 중요한 부분이다. 사할린(및 쿠릴 열도)에 도착하는 거의 모든 화물은 화물선이나 철도 차량을 실은 페리, 바니노-홀름스크 연락선을 통해 육지의 바니노 항구에서 홀름스크로 운송된다. 코르사코프와 홀름스크 항구는 가장 큰 항구이며 모든 종류의 상품을 취급하는 반면, 석탄과 목재는 다른 항구를 통해 운송되는 경우가 많다. 1999년 코르사코프 항구와 일본 왓카나이 항구를 오가는 페리 서비스가 개시되어 2015년 가을 서비스가 중단될 때까지 운영되었다. 2016년 여름 시즌에는 싱가포르 출신의 고속 쾌속선 페리인 펭귄 33호(Penguin 33)가 이 노선을 운항할 예정이다. 이 페리는 펭귄 인터내셔널 리미티드(Penguin International Limited) 소유이며, 사할린 해운회사(Sakhalin Shipping Company)에서 운영한다. 사할린의 주요 해운회사는 사할린 해운회사이며, 사할린 서해안 홀름스크에 본사를 두고 있다. 과거 와시노나에 부두역(稚内桟橋駅)에서 오오도마리항역(大泊港駅)까지 와시노나에-오오도마리 연락선(稚泊連絡船)으로 약 8시간 소요되었다.
사할린 섬 내륙 운송량의 약 30%는 철도가 담당하며, 대부분은 러시아 철도의 17개 지역 본부 중 하나인 사할린 철도()가 운영한다. 사할린 철도는 북쪽의 노글리키에서 남쪽의 코르사코프까지 이어진다. 사할린 철도는 바니노-홀름스크 철도 연락선을 통해 바니노와 홀름스크 사이를 운행하며 러시아 본토와 연결된다.[55][56]
철도의 선로 궤간을 일본식 1067mm에서 러시아식 1520mm로 개량하는 작업은 2004년에 시작되어 2019년에 완료되었다.[57] 원래 일본의 D51 증기 기관차는 1979년까지 소련 철도에서 사용되었다.
러시아철도가 운영하는 주요 노선 외에도, 2006년 12월까지 현지 석유 회사(사할린모르네프테가스)는 노글리키에서 북쪽의 오하 (Узкоколейная железная дорога Оха – Ноглики)까지 228km에 달하는 협궤 750mm 노선을 운영했다. 운영 후반기에는 노후화가 심화되었고, 2006년 12월 운행이 중단된 후 2007년~2008년에 철거되었다.[58]
사할린은 모스크바, 하바롭스크,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러시아의 여러 도시와 정기 항공편으로 연결되어 있다. 유즈노사할린스크 공항에서는 일본 하코다테와 대한민국 서울 및 부산으로 가는 정기 국제선이 운항된다. 그 외에도 일본 도쿄, 니가타, 삿포로와 중국 상하이, 다롄, 하얼빈으로 가는 전세기도 운항된다. 과거에는 알래스카항공이 앵커리지, 페트로파블롭스크, 마가단 노선을 운항하기도 했다.
9. 1. 해상
해상 수송은 사할린 경제의 중요한 부분이다. 사할린(및 쿠릴 열도)에 도착하는 거의 모든 화물은 화물선이나 철도 차량을 실은 페리, 바니노-홀름스크 연락선을 통해 육지의 바니노 항구에서 홀름스크로 운송된다. 코르사코프와 홀름스크 항구는 가장 큰 항구이며 모든 종류의 상품을 취급하는 반면, 석탄과 목재는 다른 항구를 통해 운송되는 경우가 많다. 1999년 코르사코프 항구와 일본 왓카나이 항구를 오가는 페리 서비스가 개시되어 2015년 가을 서비스가 중단될 때까지 운영되었다. 2016년 여름 시즌에는 싱가포르 출신의 고속 쾌속선 페리인 펭귄 33호(Penguin 33)가 이 노선을 운항할 예정이다. 이 페리는 펭귄 인터내셔널 리미티드(Penguin International Limited) 소유이며, 사할린 해운회사(Sakhalin Shipping Company)에서 운영한다. 사할린의 주요 해운회사는 사할린 해운회사이며, 사할린 서해안 홀름스크에 본사를 두고 있다. 과거 와시노나에 부두역(稚内桟橋駅)에서 오오도마리항역(大泊港駅)까지 와시노나에-오오도마리 연락선(稚泊連絡船)으로 약 8시간 소요되었다.9. 2. 철도
사할린 섬 내륙 운송량의 약 30%는 철도가 담당하며, 대부분은 러시아 철도의 17개 지역 본부 중 하나인 사할린 철도()가 운영한다. 사할린 철도는 북쪽의 노글리키에서 남쪽의 코르사코프까지 이어진다. 사할린 철도는 바니노-홀름스크 철도 연락선을 통해 바니노와 홀름스크 사이를 운행하며 러시아 본토와 연결된다.[55][56]철도의 선로 궤간을 일본식 1067mm에서 러시아식 1520mm로 개량하는 작업은 2004년에 시작되어 2019년에 완료되었다.[57] 원래 일본의 D51 증기 기관차는 1979년까지 소련 철도에서 사용되었다.
러시아철도가 운영하는 주요 노선 외에도, 2006년 12월까지 현지 석유 회사(사할린모르네프테가스)는 노글리키에서 북쪽의 오하 (Узкоколейная железная дорога Оха – Ноглики)까지 228km에 달하는 협궤 750mm 노선을 운영했다. 운영 후반기에는 노후화가 심화되었고, 2006년 12월 운행이 중단된 후 2007년~2008년에 철거되었다.[58]
9. 3. 항공
사할린은 모스크바, 하바롭스크,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러시아의 여러 도시와 정기 항공편으로 연결되어 있다. 유즈노사할린스크 공항에서는 일본 하코다테와 대한민국 서울 및 부산으로 가는 정기 국제선이 운항된다. 그 외에도 일본 도쿄, 니가타, 삿포로와 중국 상하이, 다롄, 하얼빈으로 가는 전세기도 운항된다. 과거에는 알래스카항공이 앵커리지, 페트로파블롭스크, 마가단 노선을 운항하기도 했다.9. 4. 도로
10. 국제 관계
사할린에 거주하다가 패전의 혼란으로 인해 귀국하지 못한 일본인들이 있다. 2018년 기준으로 가족을 포함하여 275명이 영주 귀국을 했고, 86명은 사할린에, 23명은 구 소련권에 거주하고 있다.[147]
== 일본과의 관계 ==
일본에서는 사할린 (북위 50도선 이남)이 국제법상 귀속이 미확정이라고 주장하며, 북방 영토 문제와 함께 거론되는 경우가 많다.[140]
1945년 8월 9일, 소비에트 연방이 소일 중립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대일 참전을 개시했다. 이는 같은 해 2월 미영 수뇌부가 소련에 대해 나치 독일 항복 3개월 후 대일 참전을 조건으로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넘겨주는 밀약을 맺은 얄타 협정에 따른 것이었다. 8월 11일부터 남사할린에 대한 침공을 시작했고, 8월 14일 포츠담 선언 수락 후에도 8월 22일 지토리 마을에서 소일 휴전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소련은 민간인에 대해서도 공격을 계속했다.
1951년 9월 8일, 일본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을 체결하여 북위 30도선 이남의 남서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 남사할린 등의 권리, 권원 및 청구권 포기를 명기했지만, 이전 대상은 명시되지 않았다. 소련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대한 조인·비준을 거부했고, 동 조약의 당사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약 내용이 소련(후계인 러시아 연방)에 적용되지 않으며, 남사할린의 영유권 귀속지는 국제법상 미정으로 남아 있다.[140]
현재 일본은 적극적인 영토 반환 요구는 하지 않지만, 최종적인 귀속은 일러 간의 평화조약 체결 등, 미래의 국제적 해결 수단에 맡겨진다고 주장하고 있다.[141] 일본 정부는 얄타 회담에 대해 일본은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구속되지 않으며, 얄타의 비밀 협정은 주권 침해이자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한다.
냉전 하 1952년 3월 20일, 샌프란시스코 강화(평화) 조약의 당사국인 미국 상원은 같은 해 4월 28일 발효하는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에서는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남사할린의 영토, 권리, 이익의 인도를 결정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결의를 했다.
한편, 일본 정부는 러시아의 사실상 지배에 대해 러시아 이외의 어떤 국가 정부도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있으며, 이의를 제기할 입장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141] 이 점이 소위 북방영토 문제(북방영토)와 다른 점이다.
== 러시아와의 관계 ==
소련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서명하지 않았지만, 국제조약에서 영유권 포기가 명기되어 있으며, 얄타 회담을 근거로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의 소련에 의한 점령과 러시아의 영유는 전쟁의 결과이며, 이미 소련 국내법에 의해 편입되어 있다는 것이 러시아 측의 입장이다.[142][143]
10. 1. 한국과의 관계
사할린에 거주하다가 패전의 혼란으로 인해 귀국하지 못한 일본인들이 있다. 2018년 기준으로 가족을 포함하여 275명이 영주 귀국을 했고, 86명은 사할린에, 23명은 구 소련권에 거주하고 있다.[147]10. 2. 일본과의 관계
일본에서는 사할린 (북위 50도선 이남)이 국제법상 귀속이 미확정이라고 주장하며, 북방 영토 문제와 함께 거론되는 경우가 많다.[140]1945년 8월 9일, 소비에트 연방이 소일 중립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대일 참전을 개시했다. 이는 같은 해 2월 미영 수뇌부가 소련에 대해 나치 독일 항복 3개월 후 대일 참전을 조건으로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넘겨주는 밀약을 맺은 얄타 협정에 따른 것이었다. 8월 11일부터 남사할린에 대한 침공을 시작했고, 8월 14일 포츠담 선언 수락 후에도 8월 22일 지토리 마을에서 소일 휴전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소련은 민간인에 대해서도 공격을 계속했다.
1951년 9월 8일, 일본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을 체결하여 북위 30도선 이남의 남서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 남사할린 등의 권리, 권원 및 청구권 포기를 명기했지만, 이전 대상은 명시되지 않았다. 소련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대한 조인·비준을 거부했고, 동 조약의 당사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약 내용이 소련(후계인 러시아 연방)에 적용되지 않으며, 남사할린의 영유권 귀속지는 국제법상 미정으로 남아 있다.[140]
현재 일본은 적극적인 영토 반환 요구는 하지 않지만, 최종적인 귀속은 일러 간의 평화조약 체결 등, 미래의 국제적 해결 수단에 맡겨진다고 주장하고 있다.[141] 일본 정부는 얄타 회담에 대해 일본은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구속되지 않으며, 얄타의 비밀 협정은 주권 침해이자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한다.
냉전 하 1952년 3월 20일, 샌프란시스코 강화(평화) 조약의 당사국인 미국 상원은 같은 해 4월 28일 발효하는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에서는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남사할린의 영토, 권리, 이익의 인도를 결정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결의를 했다.
한편, 일본 정부는 러시아의 사실상 지배에 대해 러시아 이외의 어떤 국가 정부도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있으며, 이의를 제기할 입장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141] 이 점이 소위 북방영토 문제(북방영토)와 다른 점이다.
10. 3. 러시아와의 관계
소련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서명하지 않았지만, 국제조약에서 영유권 포기가 명기되어 있으며, 얄타 회담을 근거로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의 소련에 의한 점령과 러시아의 영유는 전쟁의 결과이며, 이미 소련 국내법에 의해 편입되어 있다는 것이 러시아 측의 입장이다.[142][143]11. 주요 도시
알렉산드롭스크사할린스키, 아니바, 고르노자보츠크, 돌린스크, 코르사코프, 크라스노고르스크, 쿠릴스크, 마카로프, 네벨스크, 오하, 포로나이스크, 세베로쿠릴스크, 토마리, 우글레고르스크, 홀름스크, 체호프, 샤흐툐르스크, 유즈노사할린스크 등의 도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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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が考える本当の領土?「国恥地図」実物を入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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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経済新報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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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が考える本当の領土?「国恥地図」実物を入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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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経済新報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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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が考える本当の領土?「国恥地図」実物を入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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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経済新報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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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中国残留邦人の状況 (平成30年8月31日現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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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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