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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신기오로 두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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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이신기오로 두두는 후금의 장수로, 초기에는 타이지에 제수되었으며, 칼카 바야트부의 엉거더르가 후금에 귀부할 때 다이샨을 따라 이를 맞이하여 버일러에 봉해졌다. 1626년 조선 정벌에 참여했으며, 이후 명나라와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하며 공을 세웠다. 1636년 안평 버일러에 봉해졌고, 병자호란 당시에는 후방을 지원했다. 1638년에는 명나라를 공격하는 도르곤의 부장으로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1641년에는 징계를 받기도 했다. 1642년에 사망했으며, 옹정 연간에 그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 그는 7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두었다.

2. 생애

두두는 초기 후금의 주요 군사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천명 9년(1624) 칼카부 엉거더르의 귀순을 맞이하고, 천총 원년(1626) 조선 정벌에 참여했다. 그러나 조선 정벌 당시 버일러 아민과의 갈등으로 인해 조선에 주둔하려던 계획은 무산되었다.[1]

천총 3년(1628)부터 명나라와의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명의 원병을 격파하고, 아바타이와 함께 통주를 공략하는 등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1] 천총 7년(1632)에는 공유덕, 경중명 등 명나라 장수들의 투항을 받아들였고, 홍타이지에게 전략을 제시하기도 했다.

숭덕 원년(1636), 안평버일러에 봉해진 두두는 해주를 공격하고, 같은 해 겨울 병자호란에 참전하여 피도, 운종도 등 여러 섬을 공략했다.[1] 특히 1637년 임진강 도하 작전과 예친왕 도르곤과 함께 한 강화도 함락은 주목할 만한 군사적 성과였다.[1]

1638년부터는 도르곤 휘하에서 명나라를 공격하며 산서, 제남 등 여러 지역을 함락시키고 많은 전리품을 획득했다.[1] 숭덕 5년(1640)부터는 지르갈랑을 대신하여 요동 지역에서 활동하며 홍승주가 이끄는 명군을 격파했다.[1]

숭덕 6년(1641), 광녕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도르곤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인해 벌금 2000냥의 처벌을 받았다.[1]

숭덕 7년(1642) 6월, 두두는 병으로 사망하였다. 홍타이지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장례를 지원했고, 훗날 옹정제는 그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1]

2. 1. 초기 생애와 할하부 귀순

두두는 타이지(台吉)에 봉해졌다. 천명 9년(1624), 칼카 바야트부(巴岳特部) 타이지 엉거더르(恩格德爾, Enggeder)가 후금으로 내부하길 요청하자, 두두는 버일러 다이샨(代善)을 따라 엉거더르의 귀부를 맞이하였고, 이로써 버일러에 봉해졌다.[1]

2. 2. 조선 정벌과 아민과의 갈등

천총(天聰) 원년(1626년), 두두는 버일러 아민(阿敏)과 요토(岳託) 등을 따라 조선 정벌에 나섰다. 인조(仁祖)가 화친을 요청하자 버일러들은 이를 허락하였으나, 아민은 조선의 수도 한양(漢陽)을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요토는 이에 반대하였다. 아민은 다시 두두와 함께 조선에 주둔하고자 하였으나, 두두 역시 불가하다고 보았다. 결국 후금군은 조선과 결맹한 후에 귀환하였다.[1]

2. 3. 명과의 전투

천명 9년(1624), 칼카(喀爾喀) 바야트부(巴岳特部) 타이지 엉거더르(恩格德爾, Enggeder)가 후금(後金)으로 내부하길 요청하자, 두두는 버일러 다이샨(代善, Daišan)을 따라 엉거더르의 귀부를 맞이하였고, 이로써 버일러에 봉해졌다. 천총(天聰) 원년(1626), 버일러 아민(阿敏, Amin)과 요토(岳託, Yoto) 등을 따라 조선(朝鮮) 정벌에 나섰고, 인조(仁祖)가 화친을 요청하자 버일러들은 화친을 허락하였다.[1] 그러나 아민은 조선의 수도 한양(漢陽)을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요토는 이를 반대하였고, 아민은 다시 두두와 함께 조선에 주둔하고자 하였으나 두두 역시 불가하다고 보았다.[1] 결국 후금군은 조선과 결맹한 후에 귀환하였다.[1]

천총 3년(1628) 11월, 두두는 명의 원병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1] 다시 버일러 아바타이(阿巴泰, Abatai) 등과 통주(通州)를 공략하였고 명의 해군을 불살랐으며 장가만(張家灣)에 이르렀다.[1] 12월,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돌아갔으며 계주(薊州)에 이르렀고, 명군 5천 명은 산해관(山海關)에서 나와 구원하였다.[1] 다이샨(代善)과 직접 적진에 뛰어들어 발을 다치고 준화(遵化)에 주둔하였다.[1] 천총 4년(1629) 정월, 명군이 반격하자 두두는 명군을 대파하고 부장(副將)을 벤 후 낙타와 말 수천 마리를 노획하였다.[1]

2. 4. 투항자 관리와 전략 논의

천총 7년(1632), 명나라 장수 공유덕경중명이 후금에 투항하자, 두두는 버일러 지르갈랑아지거와 함께 진강(鎭江)으로 가서 이들을 맞이하였다. 홍타이지는 조서를 내려 명, 조선, 차하르 중 어디를 먼저 공격해야 할지 물었고, 두두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조선은 손아귀에 있기에 느슨하게 해도 좋고, 차하르는 가까이에 있으면 정벌하면 되지만, 만약 차하르가 좀 멀리 있다면 대동(大同) 변방을 취하고 말에게 먹이를 든든히 먹여 기회를 엿보아 깊이 진입하면 됩니다."

2. 5. 해주 출정과 안평 버일러 책봉

천총 8년(1633년), 두두는 해주로 출정하였다. 숭덕 원년(1636년), 안평버일러(安平貝勒)에 봉해졌다. 해주 하구 수장 이러션(伊勒慎)은 명나라 장수가 큰 배 100여 척을 만들어 요하를 막았다고 보고하였고, 두두에게 군대를 이끌고 가도록 명하니, 이에 명군을 무찌르고 돌아왔다.[1]

2. 6. 조선 재정벌과 강화도 함락

愛新覺羅·杜度|아이신기오로 두두중국어는 1636년 겨울, 홍타이지가 조선 정벌에 나섰을 때 치중을 호위하면서 뒤따랐고, 피도, 운종도, 대화도, 철산을 공략하였다.[1] 1637년 2월, 다시 임진강을 공격하였다.[1] 전날 얼음이 녹았으나 다음날 저녁에 큰 비와 눈이 내려 얼음이 다시 얼었고, 청군은 마침내 강을 건넜다.[1] 홍타이지는 이를 듣고 '하늘의 뜻이다(天意也)'라고 말하였다.[1] 두두는 예친왕 도르곤을 따라 강화도를 공격하여 수군을 패퇴시키고 마침내 함락시켰다.[1]

2. 7. 명과의 대규모 전투와 전공

1638년, 도르곤은 좌익(左翼)을 이끌고 요토는 우익(右翼)을 이끌고 명나라를 공격할 때, 두두는 요토의 부장이었다. 청군이 밀운 동쪽 장자령을 넘자 명군이 응전하였고, 청군은 명군에 맞서 싸워 승리하였다. 이후 청군은 장자령보(牆子嶺堡)를 공격하였고 군대를 나눠 흑욕(黑峪), 고북구, 황애구(黃崖口), 마란욕(馬蘭峪)을 공략하였다. 요토가 전사하자 두두가 군사를 총괄하였다. 도르곤군대를 통주하 서쪽에서 합류하여 명나라 수도 북경을 넘어 탁주(涿州)에 이르렀고, 서쪽으로 가서 산서(山西), 남쪽으로 제남(濟南)까지 이르러 성 20곳을 함락시켰는데 그 중 2곳은 항복을 받아내어 취하였다. 16번의 전투에서 모두 이겼고 총독 이하 관원 100여 명을 죽였으며, 20만 명 이상의 포로를 얻었다.[1] 철군 시에 청산구를 나와 태평채로부터 포위를 뚫고 갔다.[1] 1639년 4월, 청군이 귀환하면서 두두는 낙타 1필, 말 1필, 은 5000KRW을 하사받았고 예부 일을 맡도록 명을 받았다.[1] 이후 두두는 금주(錦州)와 영원(寧遠)을 공략하였다.[1]

2. 8. 금주, 의주 전투와 홍승주 격파

숭덕 5년(1640년), 두두는 지르갈랑을 대신하여 요동의 의주(義州)에서 둔전(屯田)하였다. 금주의 벼를 베다가 명군과 마주치자 이들을 무찔렀고, 금주 태구(台九)와 소릉하(小凌河) 서쪽 태이(台二)를 점령하였다.[1] 명나라 총독(總督) 홍승주(洪承疇)가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행산(杏山) 성 밖에 주둔하자, 호오거와 함께 그를 격파하고 해자(垓字)까지 추격하였다. 다시 명나라 군량 수송병 300명을 섬멸하였다.[1]

두두는 금주로 가서 명군을 유인하여 출진시켰고, 다시 명군을 격파하였다. 대릉하(大凌河) 어귀의 선단을 노획하고, 의주를 침범한 적군을 추격하여 참수하였다.[1] 그해 겨울, 두두는 다시 금주를 포위하였다.[1]

2. 9. 광녕 전투와 징계

숭덕 6년(1641), 두두는 광녕을 점령하고 송산과 금주의 명나라 구원군을 격파하였다. 이때 함께 출정한 도르곤이 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주둔하다가 몰래 군대를 파견하여 귀국한 일로 조정에서는 두두의 작위 삭탈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두두에게 벌금 2000냥을 내리는 처벌을 내렸다.[1] 두두는 다시 금주를 포위하였고 송산에서 명군에게 승리하였다. 같은 해 가을, 두두는 다시 홍타이지를 따라 명나라 정벌에 나서 금주를 공격하였다.[1]

2. 10. 죽음과 장례

愛新覺羅·杜度|아이신기오로 두두중국어는 숭덕(崇德) 7년(1642) 6월에 사망하였다. 두두가 병으로 사직했을 때, 여러 왕(王)과 버일러들이 독공전(篤恭殿)에 모여 출정 공과를 논의하던 중 홍타이지는 두두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조회를 파하였다.[1] 홍타이지는 운구가 돌아오자 대신을 파견하여 맞이하고 장례를 치렀다.[1] 옹정 2년(1724), 청조는 두두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1]

3. 자녀

두두는 아들 일곱을 두었으며, 이들 중 두르후(杜爾祜), 무르후(穆爾祜), 터르후(特爾祜), 두누원(杜努文), 사비(薩弼) 다섯 명이 작위를 받았다.[1]

넷째 딸은 숭덕 4년(1639) 12월, 아유시(阿玉錫, Ayusi)에게 시집갔다. 아유시는 몽골 보르지기트씨(博爾濟吉特氏) 출신이지만 소속된 하위 부락은 알려져 있지 않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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