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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르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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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르곤은 청나라의 개국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후금의 칸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나라가 중국을 통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순치제의 섭정왕으로서 정권을 장악했다. 산해관 전투에서 승리하여 청나라의 북경 입성을 이끌었으며, 한족에게 변발을 강요하는 등 강압적인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사후 권력 투쟁과 함께 숙청되었으나, 건륭제에 의해 복권되어 충친왕으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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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르곤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섭정 시기의 도르곤 초상화
섭정 예친왕 도르곤
칭호화석예친왕
휘호성종 (成宗) (1651년 추탈)
시호무덕수도광업정공안민입정성경의황제 (懋德修道廣業定功安民立政誠敬義皇帝) (1651년 추탈)
예충친왕 (睿忠親王) (1778년 추증)
한국어 음역도르곤
생애
출생일1612년 11월 17일
출생지여던 (현재의 랴오닝성푸순시신빈 만족 자치현)
사망일1650년 12월 31일
사망지카라호툰 (현재의 허베이성청더시)
아버지누르하치
어머니효열무황후
배우자박이제길특씨
박이제길특 바테마 (1650년 사망)
동가씨
박이제길특씨
박이제길특씨
박이제길특씨
의순공주
자녀동고 (딸)
관직
즉위1643년
퇴위1650년
직위예친왕
청나라 섭정
선대 섭정지르갈랑 (1643년 ~ 1644년)
공동 섭정지르갈랑 (1644년 ~ 1647년)
보좌 섭정도도 (1647년 ~ 1649년)
후대 예친왕춘잉

2. 생애

태조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아바하이이다. 아버지 사후 이복형 홍타이지 휘하에서 몽골 차하르부 정벌 등에 공을 세우며 실력자로 부상했다.[1]

1643년 홍타이지가 사망하자 조카 호오거와의 경쟁 끝에 어린 순치제를 옹립하고 지르갈랑과 함께 섭정왕이 되어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공동 섭정 지르갈랑과 경쟁자 호오거를 제거하며 권력을 독점했고,[75][76] 자신의 칭호를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2]까지 높이며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2. 1. 어린 시절

1612년 11월 17일 건주여진의 추장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 도르곤(ᡩᠣᡵᡤᠣᠨ|도르곤mnc)은 만주어오소리를 뜻한다.[84] 어머니는 누르하치의 세 번째 정실부인이자 대복진(大福晉)인 울라나라씨(아바하이)였다. 그녀는 누르하치의 큰 총애를 받았으며, 도르곤과 그의 친형 아지거, 친동생 도도 역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94][1] 이복형제 중에는 훗날 칸이 되는 홍타이지가 있었다.[1]

도르곤이 5살이던 1616년 1월, 누르하치는 스스로 한이라 칭했고, 1618년에는 나라 이름을 금(金)으로 정하여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을 건국했다.[85]

1626년 누르하치는 영원성 공격 중 명나라 장수 원숭환이 쏜 홍이포에 맞아 중상을 입고 얼마 뒤 사망했다.[86] 누르하치의 아들들과 조카들은 그의 8남이자 도르곤보다 스무 살 많은 이복형 홍타이지를 차기 칸으로 추대했다. 홍타이지를 비롯한 패륵(貝勒)들은 도르곤의 어머니 울라나라씨에게 누르하치를 따라 순장할 것을 강요했고, 결국 그녀는 순장되었다.[87] 이로써 도르곤과 그의 형제들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잃었다.

홍타이지는 도르곤, 아지거, 도도를 모두 패륵에 봉하여 회유하고 조정에 출사시켰다.[87] 홍타이지 재위 기간 동안 도르곤은 여러 군사 원정에 참여했다. 특히 1628년1635년에는 몽골의 차하르부를 정벌하는 데 공을 세워 부족 내 실력자로 부상했으며,[1] 조선 정복에도 참여했다.[1]

2. 2. 차하르 몽골, 명나라와의 전투

1628년(천총 2년), 홍타이지가 군사를 이끌고 몽골의 차하르를 공격할 때 17세의 도르곤도 참전하였다. 도르곤은 선봉에 서서 차하르 군대를 크게 물리치고 1,200여 명의 차하르인을 생포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후 1635년(천총 9년) 2월에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몽골을 공략하여 몽골의 마지막 칸인 에제이 칸의 항복을 받아내고 원나라의 옥새를 획득하였다.[88][89] 이를 계기로 홍타이지는 도르곤을 크게 칭찬하였고, 이듬해인 1636년(천총 10년) 국호를 후금에서 (淸)으로 바꾸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도르곤은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화석친왕(和碩親王)에 책봉되어 예친왕(睿親王)으로 불리게 되었다.

1638년(숭덕 3년) 8월, 홍타이지는 도르곤을 봉명대장군(奉命大將軍)으로 임명하고 군대를 주어 명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홍타이지의 장자이자 도르곤보다 세 살 많은 조카 버일러 호오거도 도르곤을 따라 참전했다. 도르곤은 하북성과 산서성의 여러 도시를 공략하였고, 이듬해인 1639년(숭덕 4년) 3월에 수도 묵던으로 돌아왔다. 이 원정에서 도르곤은 명나라의 성 36곳을 함락시키고 6곳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12만여 명의 포로를 생포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1641년(숭덕 6년)에는 홍타이지의 명을 받아 정친왕 지르갈랑과 함께 10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산해관을 공략하였다. 황제 홍타이지도 직접 후방에서 응원군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명나라 군대는 당시 북방의 군사 및 행정을 총괄하던 계료총독(薊遼總督) 홍승주(洪承疇)가 송산성(松山城)에서 지휘하였으나, 성이 함락된 후 생포되어 투항하였다. 금주성(錦州城)을 지키던 조대수(祖大壽) 역시 생포되었다.[88] 이 전투의 결과로 명나라는 산해관 북쪽의 영토를 모두 잃었고, 청나라는 요동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도르곤은 이후 청나라 군대가 베이징을 점령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1]

2. 3. 숙질간의 황위 쟁탈

심양 고궁 대정전(大政殿)의 옥좌. 예전에는 독공전(篤恭殿)으로 불리었으며 순치제는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1643년 9월 21일, 홍타이지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52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92] 황위 계승자를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 조정은 큰 혼란에 빠졌다. 홍타이지 사후 5일 뒤, 황족 중 최고 서열이었던 누르하치의 차남이자 도르곤의 이복형인 예친왕(禮親王) 다이샨은 성경 황궁의 숭정전(崇政殿)에서 의정왕대신회의를 소집하여 차기 황제에 대해 논의했다.[92]

이 회의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는 도르곤과 홍타이지의 장남이자 도르곤의 조카인 숙친왕(肅親王) 호오거였다. 도르곤 측은 그의 친형 무영군왕 아지거와 동복 동생 예친왕(豫親王) 도도를 중심으로, 도르곤의 서열과 전공이 호오거보다 높으며 본래 누르하치가 도르곤을 후계자로 생각했으나 홍타이지 등 4대 버일러[93]가 이를 가로챘다고 주장했다.[94] 반면 호오거 측은 홍타이지가 아들로서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선례에 따라 부자 계승 원칙을 내세웠다.

당시 팔기군 내 지지 세력은 다음과 같이 나뉘었다.

  • 도르곤 측: 도르곤이 직접 관장하는 정백기(正白旗)와 동생 도도가 관장하는 양백기(鑲白旗).
  • 호오거 측: 호오거가 직접 관장하는 정람기(正藍旗)와 홍타이지의 직속 부대였던 정황기(正黃旗), 양황기(鑲黃旗).[94]
  • 중립/견제: 회의 의장인 다이샨의 정홍기(正紅旗)와 정친왕 지르갈랑의 양람기(鑲藍旗).


팽팽한 대립 중, 다이샨의 아들 시오토와 손자 아다리가 몰래 도르곤을 황제로 추대하려다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의정왕대신회의에서 의심을 받게 되자, 도르곤은 자신과 무관함을 주장하며 두 사람을 즉시 처형하고 황위에 욕심이 없음을 내비쳤다.[95] 이후 도르곤은 호오거가 주장한 부자 계승 원칙을 따르되, 홍타이지의 아홉 번째 아들인 푸린(순치제)을 황제로 옹립하고, 자신과 중립파인 지르갈랑이 좌우 섭정왕으로서 국정을 돌보는 절충안을 제시했다.[94] 호오거와 다이샨이 이에 동의하면서, 홍타이지 사망 17일 후인 10월 8일, 6세의 푸린이 성경 독공전(篤恭殿)에서 즉위하니 이가 바로 순치제이다.

순치제 즉위 후 도르곤은 섭정왕으로서 실권을 장악했다. 공동 섭정으로 임명된 지르갈랑은 점차 도르곤에 의해 권력에서 밀려났다. 순치 4년(1647년), 도르곤은 지르갈랑에게서 섭정왕의 지위를 빼앗고[75] 이듬해인 순치 5년(1648년)에는 그를 군왕으로 강등시켰다. 대신 자신의 친족인 도도, 아지거 등을 요직에 앉혀 권력 기반을 공고히 했다.[75]

도르곤과 호오거의 대립은 순치제 즉위 후에도 계속되었다. 순치 원년(1644년) 4월, 도르곤은 호오거가 자신을 비방했다며 모반 혐의로 상주했다. 어린 순치제가 울며 형의 목숨을 구해 벌금형으로 감형되었으나,[74] 호오거는 이후에도 도르곤의 견제를 받았다. 비록 장헌충(張獻忠) 토벌 등 전장에서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도르곤은 이를 불쾌하게 여겨 다시 모반 혐의를 씌웠다. 순치제는 강하게 반대했으나 결국 호오거는 누명을 쓰고 투옥되어 순치 5년(1648년) 옥중에서 사망했다.[76]

호오거와 지르갈랑을 제거한 도르곤의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그의 위세는 날로 높아졌다. 그는 자신의 칭호를 여러 차례 격상시켰다.

도르곤의 칭호 변화
시기칭호
순치제 즉위 직후섭정왕(攝政王)
?숙부섭정왕(叔父攝政王)
1645년 (순치 2년)황숙부섭정왕(皇叔父攝政王)
1648년/1649년 (순치 5/6년)[2]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



또한, 호오거 사후 그의 측실 중 한 명이었던 보르지기트 씨를 자신의 측비로 삼았다. 이 시기 도르곤이 순치제의 생모인 효장문황태후와 사적인 관계를 맺고 심지어 비밀리에 결혼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이는 여전히 역사적 논쟁거리로 남아있다.[2]

2. 4. 명나라의 멸망과 청군의 입관

청군이 중원으로 들어오는 결정적인 관문이었던 산해관.


순치제 즉위 후 예친왕 도르곤과 정친왕 지르갈랑이 공동 섭정왕이 되면서 청나라 조정은 큰 변화를 맞이했다. 두 섭정왕은 종친 왕공들이 부족 업무를 관장하는 것을 금지시켜, 여러 버일러(패륵)들이 합의하여 국정을 운영하던 방식에서 섭정왕 중심의 통치 체제로 전환했다. 이는 의정왕대신회의의 권한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96] 형식적으로는 도르곤이 군사권을, 지르갈랑이 국정 운영을 책임졌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이미 순치제 즉위 직후부터 도르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지르갈랑 역시 이러한 상황을 인지하고 조정의 의결권마저 도르곤에게 넘겨주면서, 도르곤은 어린 황제를 보좌하는 섭정왕을 넘어 사실상의 최고 통치자로서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97][3]

도르곤은 자신의 권력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경쟁자들을 제거해 나갔다. 1644년 2월, 지르갈랑이 모든 공무를 도르곤에게 넘겼고,[3] 같은 해 4월(순치 원년), 숙친왕 호오거의 부하 하락회(何洛會)가 호오거가 도르곤을 죽이고 섭정왕이 되려 한다고 밀고했다. 이전부터 황위 계승 문제로 호오거와 갈등을 겪던 도르곤은 이를 빌미로 즉시 호오거를 체포하여 왕작을 박탈하고 투옥했으며, 관련자들을 처형했다.[98][4] 도르곤은 이 사건을 통해 호오거가 이끌던 정황기(正黃旗)와 양황기(鑲黃旗)의 주요 직책에 자신의 측근들을 임명함으로써, 청나라 최정예 부대인 상삼기(上三旗)[99]의 지휘권까지 장악했다.[5] 이후 호오거는 잠시 복권되어 1646년 사천 평정에 공을 세우기도 했으나, 결국 다시 투옥되어 1648년 옥중에서 사망했다.[100] 도르곤은 호오거 사후 그의 아내를 자신의 첩으로 삼는 등, 반대 세력을 철저히 제거하며 절대 권력을 향한 길을 열었다.[6]

1644년 산해관 전투. 도르곤은 이 전투에서 청나라 군대를 직접 지휘했다.


같은 시기, 명나라는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에 의해 급격히 쇠락하고 있었다. 1644년 초, 이자성군은 수도 베이징을 위협했고, 4월 24일에는 마침내 베이징 성벽을 돌파했다.[7] 다음 날인 4월 25일,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자금성 뒤편의 매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7][101] 이로써 주원장이 건국한 지 277년 만에 명나라는 멸망했다.

명나라 멸망 소식이 전해지자, 청나라 조정에서는 중원 진출의 호기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명나라 출신 투항 장수인 홍승주와 범문정 등은 이자성이 먼저 북경을 점령하도록 내버려 둔 뒤, '명 황제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이자성을 공격하자고 제안했다.[8] 도르곤은 이 전략을 받아들였으나, 중원으로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관문인 산해관은 명나라 총병 오삼계가 지키고 있었다.[9] 도르곤은 여러 차례 오삼계를 회유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북경을 점령한 이자성군이 오삼계의 아버지와 애첩을 인질로 잡자, 격분한 오삼계는 결국 청나라에 투항하여 산해관의 문을 열었다.[102][10][11]

천단의 원구단. 순치제는 1644년 10월 30일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청나라가 천명을 받았음을 선포했다.


산해관을 무혈입성한 도르곤은 총사령관으로서 청군을 이끌고 오삼계군과 연합하여 산해관 인근의 일편석(一片石)에서 이자성군과 격돌했다.[102] 1644년 5월 27일 벌어진 산해관 전투에서 청-오삼계 연합군은 이자성군을 대파했다.[12] 패배한 이자성은 북경으로 도망쳐 자금성에 불을 지르고 약탈한 뒤 서쪽으로 달아났다.[13] 6월 5일, 도르곤은 마침내 북경에 입성하여 황궁인 자금성을 장악했다.[14] 북경 주민들은 처음에는 오삼계와 명나라 황태자가 올 것으로 기대했으나, 머리를 민 만주족 복장의 도르곤이 섭정왕으로서 나타나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15] 도르곤은 이자성이 불태운 자금성에서 거의 유일하게 남은 무영전(武英殿)에 자리를 잡고[16], 숭정제의 장례를 후하게 치러 명십삼릉에 안장하는 등 민심을 수습하는 조치를 취했다.[103] 또한 군대에 약탈 금지령을 내려 비교적 순조롭게 북경을 장악했다.[17] 그러나 동시에 명나라 황족과 지지자들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려, '명나라의 복수'라는 명분과는 상반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18]

북경 입성 직후인 6월 7일, 도르곤은 수도 주변 관리들에게 항복하면 관직을 유지시켜 주겠다고 포고하는 한편, 모든 남성에게 만주족의 풍습인 변발을 강요하고 머리카락을 땋으라는 명령을 내렸다.[19] 이는 한족에게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북경 주변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자 3주 만에 이 명령을 철회해야 했다.[20]

도르곤은 북경 천도를 서둘러 진행했다. 1644년 10월 19일, 도르곤은 북경 성문에서 황제 순치제와 황족들을 맞이했다.[21] 열하루 뒤인 10월 30일, 순치제는 천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청나라가 새로운 천명을 받았고 북경이 청나라의 수도가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103][22] 11월 8일 거행된 순치제의 공식 즉위식에서 어린 황제는 도르곤의 공적을 주나라의 명재상 주공에 비견했다.[1][24] 이 자리에서 도르곤의 공식 칭호는 '섭정왕'에서 황족보다 높은 지위를 나타내는 '숙부섭정왕(叔父攝政王)'으로 격상되었다.[25] 공동 섭정이었던 지르갈랑은 '보정숙왕(輔政叔王)'으로 지위가 낮아졌다.[26] 이후 1645년 6월, 도르곤은 모든 공식 문서에 자신을 '황숙부섭정왕(皇叔父攝政王)'으로 칭하도록 명령하여 황제에 버금가는 권위를 과시했다.[26]

2. 5. 권력 강화와 대륙 통치

보도사(普度寺). 자금성 근처에 있으며 도르곤이 거주하던 예친왕부(睿親王府)를 개수하여 지은 절이다.


1644년(순치 원년) 11월 8일, 순치제자금성 태화전에서 다시 한번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 자리에서 순치제는 도르곤의 공적이 고대 중국의 주공 단과 같다며 높이 평가하고, 그의 칭호를 섭정왕에서 숙부섭정왕(叔父攝政王)으로 격상시켰다.[104] 또 다른 섭정왕이었던 지르갈랑은 보정숙왕(補政叔王)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이전의 섭정왕보다 낮은 지위였다. 이듬해인 1645년(순치 2년) 도르곤은 자신에게 올리는 모든 장계에 황숙부섭정왕(皇叔父攝政王)이라 칭하도록 하여 스스로의 권한을 강화하는 동시에 옥좌에 한 단계 더 다가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105] 말년인 1649년(순치 6년)에는 스스로를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 줄여서 황부왕이라 칭하기에 이르렀다. 도르곤이 '숙부'나 '황부' 같은 호칭에 집착한 이유는, 다른 황족들처럼 친왕이나 군왕으로 불리는 것보다 황제의 숙부나 아버지로 공인받아 불리는 것이 더 격조가 높다고 여겼기 때문이다.[106]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도르곤은 잠재적 경쟁자들을 제거해 나갔다. 1647년(순치 4년), 그는 지르갈랑을 권좌에서 몰아내고 그의 작위를 정친왕에서 정군왕(鄭郡王)으로 강등시켰으며, 공석이 된 보정숙왕 자리에는 자신의 동생인 도도를 앉혔다.[75] 또한, 어린 시절 순장되었던 자신의 생모 대복진 울라나라씨를 효열무황후로 추존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높였다.[107] 도르곤과 호격의 대립은 순치제 즉위 후에도 계속되었다. 1644년 도르곤은 호격이 자신을 비방했다며 "호격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상주했지만, 어린 순치제가 눈물로 호소하여 벌금형에 그쳤다.[74] 그러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한 도르곤은 1648년 결국 호격을 누명을 씌워 체포하여 옥사시키고,[76] 그의 측실 중 한 명(보르지기트씨)을 자신의 측비로 삼았다.



1644년 6월 베이징에 입성한 도르곤은 즉시 질서 회복을 명령하고 황족과 관리들의 착취 및 부패 행위를 처벌했다. 또한 모든 명나라 관리들을 재고용하고 과거제 부활을 선포하며 인재를 등용하려 했다. 그러나 동시에 만주족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강압적인 정책들도 시행했다. 북경 입성 이틀 후, 관리들에게 앞머리를 깎고 변발을 하면 관직에 나아갈 수 있게 한다는 칙령을 내렸으나,[108] 한족의 거센 반발과 민란으로 3주 만에 철회해야 했다. 또한 북경 주변의 토지를 몰수하여 팔기군에게 나누어주고 북경 방위를 맡겼는데(권지, 圈地), 이 과정에서 기존 한족 지주들의 땅을 빼앗아 만주족 지주 아래 소작농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109][110]

비록 청이 명의 수도를 점령했지만, 남쪽에는 여전히 명나라에 충성하는 신하들과 종친들이 건재하였다. 숭정제가 자살한 후 그의 사촌인 복왕 주유송이 난징에서 즉위하자, 도르곤은 동생 도도를 총사령관으로 파견하여 남명 토벌에 나섰다. 1645년 4월 서안을 출발한 청군은 5월 초 양주에 집결했고, 격렬한 저항 끝에 5월 20일 양주를 함락시켰다.[44] 도도는 양주 백성들을 대량 학살하는 양주 대학살을 명령하여 한족들에게 공포를 심어주었고,[45] 이로 인해 다른 강남 도시들은 겁에 질려 항복했다.[46] 6월 16일, 난징은 싸움 없이 함락되었고 명 황제는 사로잡혔다.[47] 7월 초에는 청의 남쪽 경계선이 첸탕강까지 확장되었다.[48]

1645년 7월 21일, 강남이 표면적으로 평정되자 도르곤은 모든 한족 남성에게 만주족처럼 앞머리를 밀고 뒷머리를 땋도록 강요하는 매우 부적절한 단발령(斷髮令)을 다시 발표했다.[49] 이를 거부할 경우 사형에 처한다는 강경한 조치였다.[50] 한족들은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라는 효경의 구절을 인용하며,[112] 부모에게 물려받은 몸을 훼손할 수 없다며 유교적 가치관과 민족적 자존심을 근거로 격렬하게 저항했다.[113][52] 단발령은 모든 계층의 한족을 청나라 지배에 대한 저항으로 단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53] 청 조정은 명나라 출신 항복 장수 이성동, 유량좌 등을 앞세워 저항하는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자딩과 쑹장에서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고,[54] 강음에서는 83일간의 항전 끝에 도시 전체가 학살당해 7만 4천에서 10만 명에 달하는 희생자가 발생했다.[55] 이러한 참혹한 진압으로 양쯔강 하류 지역의 무장 저항은 점차 사그라들었지만, 일부 지식인들은 산속에 은거하며 청나라 통치를 끝까지 부정했다.[56]

난징 함락 후에도 남명 정권은 복건성의 주유검과 절강성의 주이해를 중심으로 이어졌으나, 내부 분열로 효과적인 저항을 하지 못했다.[57][58] 1646년 청군은 보로를 파견하여 절강과 복건의 남명 정권을 공격했고, 10월에는 융무제를 체포하여 처형했다.[60] 융무제의 양자 정성공은 함대를 이끌고 타이완으로 피신했다.[60] 1646년 말, 광동성에서 소무제와 옹리제가 각각 황제를 칭하며 남명 정권을 세웠으나,[61] 서로 다투다가 1647년 1월 청군에게 광저우를 점령당하고 소무제는 살해되었다.[62] 1648년 명나라 장수 이성동 등이 청에 반기를 들어 옹리제가 남부 지역 대부분을 일시적으로 회복하기도 했으나,[63] 청군의 재반격으로 1649년1650년에 걸쳐 중부 및 남부 지역 대부분이 다시 청에게 점령되었다.[64] 1650년 11월 상가희가 이끄는 청군은 광저우를 함락시키고 또다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여 7만 명(혹은 8천 명[66][67])을 살해했다.[65] 한편, 서부 지역에서는 1646년 호격이 사천성에서 장헌충 세력을 토벌하여 1647년 2월 장헌충을 사살했고,[68][69] 감숙성에서는 1646년부터 1650년까지 이어진 무슬림 반란을 맹교방이 진압했다.[70][71]

요한 니우호프가 그린 상가희의 초상화. 그는 1650년 남명 세력으로부터 광저우를 탈환했으며, 남중국 정복에 기여한 한족 장군 중 한 명이다.


도르곤의 통치 기간 동안 시행된 정책 중 특히 비판받는 여섯 가지를 육대폐정(六大弊政)이라고 부른다.[72] 이는 청나라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중국 사회에 큰 혼란과 유혈 사태를 초래했다.

정책내용결과
변발(剃发) 및 복장 변경(易服)한족 남성에게 만주식 변발과 복장을 강요하고 거부 시 사형에 처함.유교적 신념과 민족적 자존심에 반하여 격렬한 저항을 유발했고, 남중국 도시에서 대량 학살 발생.
토지 몰수(圈地) 및 가옥 징발(占房)팔기군에게 경제적 기반 제공 명목으로 주인 없는 황무지를 점유하게 했으나, 실제로는 거주민의 농지와 가옥을 군사력으로 강제 몰수함.기존 거주민들의 토지 상실 및 생활 기반 파괴, 만주족 지주와 한족 소작농 관계 형성.
강제 노역(投充) 및 도망 노비 단속(逃人)몰수한 광대한 농지를 경작할 인력 확보를 위해 팔기군이 평민을 잡아 노예로 삼는 것을 허용하고, 도망 노비를 숨긴 자는 즉결 처형, 반복 도망자는 교수형 등 엄격히 단속함.심각한 인권 유린 및 사회 불안 심화, 노비 도망 문제 야기.



도르곤은 과거 송산성과 금주성 전투에서 입은 부상의 후유증과 과도한 업무로 인해 말년에는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자주 각혈과 중풍 증세를 보였다.[116] 1648년(순치 4년)에는 그의 위세를 두려워한 신하들이 건강을 핑계로 순치제에게 도르곤에 대한 신하의 예를 생략할 것을 청하여 허락받기도 했다.[115]

1650년(순치 7년) 12월 8일, 도르곤은 여러 왕족들을 이끌고 카라호툰(열하)으로 사냥을 떠났다가 갑자기 병세가 위독해져 12월 31일 그곳에서 39세의 나이로 급사했다.[117] 그의 죽음을 두고 사냥 중 낙마 사고라는 기록(탕약망전)과 약물 오용이라는 기록(북유록)이 있으나,[118] 오랜 기마 경력과 당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때 정적에 의한 암살 가능성도 제기된다. 순치제는 도르곤의 장례를 황제의 격에 맞춰 국상으로 치르도록 명하고, 사후에는 성종(成宗)이라는 묘호와 무덕수원광업정공안민입정성경의황제(懋德修遠廣業定功安民立政誠敬義皇帝)라는 시호를 추증하여 의황제(義皇帝)로 추숭했다.[119]

그러나 도르곤 사후 한 달 반 만에 상황은 급변했다. 도르곤의 측근들이 그의 형 아지거를 새로운 섭정왕으로 추대하려다 발각되자, 도르곤에게 밀려났던 지르갈랑이 반격에 나섰다. 아지거는 자결했고 관련자들은 처형되었다. 1651년(순치 8년) 2월 1일, 지르갈랑은 친왕 작위를 회복하고 순치제에게 대권을 반환했으며, 14세의 순치제는 친정을 시작했다.[119] 곧이어 지르갈랑은 도르곤이 섭정 기간 동안 권력을 남용하고 황제만 입는 황포를 수시로 입었으며, 호격을 모함해 죽이고 그의 첩을 빼앗았다는 등의 죄목을 열거하며 탄핵했다.[120] 이에 격분한 순치제는 도르곤의 묘호와 시호를 모두 박탈하고 황실 대동보에서 그의 이름을 삭제했으며, 태묘에 봉안된 그의 신주를 내쳤다. 또한 그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꺼내 시체를 황야에 버리고 몽둥이로 수십 차례 때렸으며, 그 유해의 머리를 잘라 각지에 돌려 효수하는 등 극형을 내렸다.[121]

2. 6. 사망과 그 이후

1650년 12월 31일, 도르곤은 하라호툰(현 허베이성 청더시)에서 사냥 중 부상을 입고 황실 의원들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사망했다.[122] 생전 황제가 아니었음에도 사후 이례적으로 '의황제(義皇帝)'라는 칭호와 '성종(成宗)'이라는 묘호를 추증받았다. 이는 황제의 직계 조상이나 가까운 황족에게만 주어지던 것으로, 중국 봉건 시대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었다. 순치제는 그의 장례식에서 관 앞에 세 번 절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도르곤의 죽음에는 정적들에 의한 암살 의혹이 제기된다. 25년간 수많은 전투에서 살아남은 기마 경험이 풍부한 그가 단순 낙마 사고로 사망했다는 공식 기록은 여러 면에서 의심스럽다는 주장이 있다. 특히 말을 타다 다리가 부러져 사망했다는 기록은 건조한 겨울 날씨 등을 고려할 때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으며, 사후 그의 시신이 순치제의 명령으로 발굴되어 매질당하고 불태워진 것은 암살의 증거를 인멸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그의 죽음이 순치제가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시작하기에 적절한 시점(약 13세)에 일어났다는 점도 이러한 의혹을 뒷받침한다.

1651년, 과거 도르곤의 정적이었던 예르갈랑 등은 순치제에게 도르곤의 죄목을 열거한 상소를 올렸다. 주요 죄목은 다음과 같다.

  • 공동 섭정인 예르갈랑을 배제하고 권력을 독점하며 친족(도도 등)을 요직에 앉힘.[78]
  • 스스로를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이라 칭하며 순치제로부터 왕위를 찬탈하려 획책함.[79]
  • 황제와 동등한 의장, 음악, 시위를 사용함.
  • 섭정왕부(攝政王府)를 황궁과 유사하게 건축함.
  • 국가 재산을 사유화함.
  • 황제의 시종을 자신의 부하로 삼음.
  • 호격에게 죽음을 강요하고, 그의 측실을 자신의 비로 삼음. (단, 이는 당시 만주족의 레비라트혼 풍습과 관련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정적들의 모함이라는 주장도 있다.[81] 당시 만주족 사회에서는 레비라트혼이 드물지 않았으나, 홍타이지 시기 금지령이 내려졌고 청나라 시대에 들어 한족 문화의 영향으로 점차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지게 되었다.[80])
  • 황부섭정왕지(皇父攝政王旨)를 남용하고 관료를 임의로 임명, 파면함.
  •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황색 옷을 소유하고 착용함.


이러한 죄목들을 근거로 순치제1651년 2월, 도르곤의 모든 작위를 박탈하고 종실 자격을 제명했으며, 재산을 몰수하고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참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77] 그의 생모인 효렬무황후 역시 종묘에서 위패가 옮겨지는 등 같은 처분을 받았다. 이는 도르곤 및 그의 후손이 향후 황위 계승에 위협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정치적 조치로 해석된다. 도르곤의 친형제인 아지거 역시 숙청 과정에서 사망했으며, 다른 형제 도도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도르곤 사후의 가혹한 처벌 배경에는 효장문황후와의 재혼설(숙모와의 레비라트혼)이 있다는 야사가 존재한다. 한족 문화에 익숙했던 순치제가 이를 용납하지 못해 사후 보복을 가했다는 설이지만, 이는 만주족 지배에 반감을 가진 한족들이 퍼뜨린 유언비어라는 반론도 있다.[81]

세월이 흘러 1778년(건륭제 43년), 건륭제는 도르곤이 비록 소인들의 간계에 휘둘려 전횡을 부린 면이 있으나 청나라 개국에 세운 큰 공을 인정하여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건륭제는 도르곤을 개국 공신 다이샨, 도도 등과 함께 태묘에 배향하고, 예친왕(睿親王) 작위를 회복시켰으며 '충(忠)'이라는 시호를 내려 예충친왕(睿忠親王)으로 추증했다.[122] '충'이라는 시호는 1651년에 제기된 죄목들이 조작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도르곤은 생전에 아들이 없어 동복동생인 도도의 셋째 아들 도르보를 양자로 삼았다. 건륭제는 도르곤을 복권시키면서 도르보의 5세손인 순영(淳潁)에게 예친왕 작위를 계승하게 하여 후사를 잇도록 했다.[122] 동시에 건륭제는 청나라 공식 역사에 "도르곤의 후사가 끊어졌다(后嗣废绝)"는 기록을 남기도록 지시했는데, 이는 도르곤에게 아들이 없었다는 의미와 함께, 과거 숙청으로 인해 후손을 찾을 수 없게 된 상황을 반영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건륭제는 도르곤 복권과 함께 과거 숙청과 관련된 기록들을 파기하도록 명령했다.

3. 추증

순치 7년(1650년), 도르곤은 사냥 중에 사망하였다. 순치제와 신하들은 동직문(東直門) 밖까지 상복을 입고 그의 관을 맞이했으며, 사후 묘덕수도광업정공안민립정성경의황제(懋德修道廣業定功安民立政誠敬義皇帝)라는 시호성종(成宗)이라는 묘호가 추증되었다.[77] 황제가 아니었음에도 '종(宗)' 자가 들어간 묘호를 받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대우였다.[77]

그러나 도르곤이 죽자 그동안 그의 권세에 억눌려 있던 반대 세력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순치제는 도르곤에게 대역(大逆) 등의 죄가 있다고 선언하고, 순치 8년(1651년) 2월 22일 그의 죄상을 담은 문서를 전국에 공포했다. 도르곤의 죄목으로 거론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공동 섭정이었던 질가란을 정치에서 배제하고 권력을 독점했으며, 자신과 가까운 동생 도도(多鐸)를 보정숙왕(輔政叔王)으로 삼았다.[78]
  • 스스로 황제의 아버지이자 섭정왕이라는 의미의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이라 칭했다.[79]
  • 자신의 의장(儀仗), 음악, 시위(侍衛) 등을 황제와 같은 수준으로 사용했다.
  • 섭정왕부(攝政王府)를 황제의 궁궐과 유사하게 건축했다.
  • 섭정왕부의 재산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국가 재산을 황제에게 바치지 않고 사유화했다.
  • 황제의 시종들을 함부로 자신의 부하로 삼았다.
  • 호격에게 죽음을 강요하고 그의 측실을 자신의 측실로 삼았다.
  • 황부섭정왕지(皇父攝政王旨)라는 명칭을 남용하여 권력을 행사했다.
  • 자신의 뜻에 따라 관료들을 임명하거나 파면했다.
  • 황제의 복장을 착용했다.


결국 순치 8년(1651년) 도르곤은 모든 작위가 박탈되고 종실(宗室) 명단에서 제외되었으며, 재산은 몰수되었다. 심지어 그의 무덤은 파헤쳐지고 시신은 꺼내져 참수되는 부관참시 형을 당했다.[77]

건륭 43년(1778년)에 이르러서야 도르곤의 왕호와 명예가 회복되었고, 충(忠)이라는 시호가 새로 추증되었다.

도르곤 사후의 이러한 가혹한 처벌에 대해서는 야사(野史)에서 효장문황후와 도르곤이 재혼했다는 설과 연관 짓기도 한다. 어린 시절부터 한족 문화의 영향을 받은 순치제가 만주족의 전통적인 형사취수제(레비라트혼) 풍습에 따른 삼촌과 어머니의 관계를 용납할 수 없어 사후에 분노를 표출했다는 것이다. 후금 시대까지 만주족 사이에서는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는 풍습이 있었으나, 홍타이지 시대에 이를 금지하는 명령이 내려졌고,[80] 청나라 시대에는 한족 문화의 영향으로 점차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지게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도르곤과 효장문황후의 혼인 사실은 정사(正史)에 기록되지 않았으며, 당시 만주족의 지배에 반감을 가진 한족들이 퍼뜨린 유언비어라는 반론도 존재한다.[81]

4. 평가

도르곤은 특히 섭정왕 시절의 행적을 두고 많은 비판을 받는다. 예수회 선교사 마르티노 마티니는 그의 저서 《타타르 전기》에서 당시 사람들이 도르곤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그 앞에서 말을 꺼내지 못했으며, 그가 외출했다 돌아올 때면 모든 관리가 정렬하여 맞이했다고 기록하며 그의 권세를 부정적으로 묘사했다.[123] 조선왕조실록의 〈효종실록〉에는 지르갈랑(정친왕)이 순치제에게 도르곤이 숙부로서 맹세를 어기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으며, 스스로 황제의 아버지인 '황부섭정왕'을 자처하는 등 도를 넘는 전횡을 저질렀다고 비판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또한, 호오거(숙친왕)를 모함하여 죽이고 그의 부인을 차지하는 패륜을 저질렀으며, 자신에게 우호적인 인물에게는 높은 관직을 주고 반대파는 배척하며 붕당을 만들었다고 지적했다.[124]

중국의 역사학자 옌총니엔은 도르곤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되는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개국에 큰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권력욕이 강해 '황부섭정왕'이라는 극존칭까지 사용하며 죽을 때까지 조카인 순치제를 사실상 허수아비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121] 미국의 역사학자 프레드릭 모트 역시 도르곤이 뛰어난 정치가이자 용맹한 장군이었음에도 섭정왕이 된 후 오만해졌고, 그 오만함이 황족과 대신들의 불안감을 키워 결국 사후 그의 모든 명예가 박탈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분석했다.[126]

반면, 중국의 역사학자 샤오이산(蕭一山)은 도르곤의 섭정이 청나라의 중국 통일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125]

순치 7년(1650년) 도르곤이 사냥 중 사망하자, 순치제와 신하들은 상복을 입고 동직문 밖까지 나아가 그의 관을 맞이했다. 그는 황제에게만 사용되는 묘덕수도광업정공안민립정성경의황제(懋德修道廣業定功安民立政誠敬義皇帝)라는 시호와 성종(成宗)이라는 묘호를 받아 황제로 추존되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77]

그러나 도르곤 사후, 그에게 억눌려 있던 반대 세력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순치 8년(1651년) 2월, 순치제는 도르곤의 죄상을 밝히는 조서를 전국에 공포했다. 주요 죄목은 다음과 같다.[77][78][79]


  • 공동 섭정인 지르갈랑을 배제하고 권력을 독점하며 측근인 도도를 보정숙왕으로 삼음.
  • 스스로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이라 칭함.
  • 황제와 동일한 의장, 음악, 시위(侍衛)를 사용함.
  • 섭정왕부(攝政王府)를 황궁과 같이 화려하게 지음.
  • 국가 재산을 사적으로 유용함.
  • 황제의 시종을 마음대로 자신의 부하로 삼음.
  • 호오거를 죽음으로 몰고 그의 처를 자신의 측실로 삼음.
  • '황부섭정왕지(皇父攝政王旨)'라는 명칭을 남용함.
  • 관료 임명을 사사로이 행함.
  • 황제의 복장을 착용함.


결국 도르곤은 모든 작위와 종실 자격을 박탈당하고 재산은 몰수되었으며, 무덤이 파헤쳐져 시신이 참수되는 형벌을 받았다.[77]

시간이 흘러 건륭제 43년(1778년)에 이르러 도르곤은 왕호와 명예를 회복하고 충(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도르곤 사후의 가혹한 처벌 배경에 대해서는, 야사에서 효장문황후가 도르곤과 재혼했다는 설이 있으며, 한족 문화에 익숙했던 순치제가 어머니와 숙부의 관계를 용납하지 못해 이러한 조치를 취했다는 추측이 있다. 후금 시기 만주족 사회에서는 형사취수제(레비라트혼)가 존재했으나, 홍타이지 시대에 금지령이 내려졌고[80] 청나라가 중국을 통치하면서 한족의 영향을 받아 수치스러운 풍습으로 여겨지게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효장문황후와 도르곤의 혼인설은 정사에 기록되지 않았으며, 만주족의 지배에 반감을 가진 한족들이 퍼뜨린 유언비어라는 반론도 존재한다.[81]

5. 가족 관계

도르곤은 정비인 원비를 비롯하여 10명의 부인과 첩을 두었으나, 아들이 없어 조카인 도르보(多爾博)를 양자로 들였다.[127]

구분성씨 및 이름출신 / 가문비고
정궁원비
(첫 번째 정실)
보르지기트씨 (博爾濟吉特氏)콜친 보르지긴씨이름 바터마(巴特瑪). 1611년 출생, 1650년 1월 사망. 시호 경효충공의황후(敬孝忠恭義皇后). 순치제의 생모 효장문황후의 사촌언니.
계복진
(두 번째 정실)
퉁기야씨 (佟佳氏)상서 몽아도(蒙阿圖)의 딸
계복진
(세 번째 정실)
보르지기트씨 (博爾濟吉特氏)찰로특부 태길 근두이(紮魯特部 台吉 根杜爾)의 딸이름 찰이망(紮爾莽).
계복진
(네 번째 정실)
보르지기트씨 (博爾濟吉特氏)커얼친 태길 납포희서(拉布希西)의 딸
계복진
(다섯 번째 정실)
보르지기트씨 (博爾濟吉特氏)커얼친 태길 색낙포(索諾布)의 딸숙친왕 호오거의 정복진이었음.
대복진
(여섯 번째 정실)
이씨 (李氏)조선 종실 금림군 이개윤(錦林君 李愷胤)의 딸1635년 출생, 1662년 사망. 이름 애숙(愛淑). 의순공주(義順公主).
측복진궁기트씨 (公齊特氏)차하르 태길 포연도(布延圖)의 딸
측복진보르지기트씨 (博爾濟吉特氏)태길 두사갈이탁농(杜思噶爾卓農)의 딸
측복진기이모트씨 (濟爾莫特氏)방도무(幇圖武)의 딸
측복진이씨 (李氏)조선 출신, 이세서(李世緖)의 딸딸 동고(東莪, 1638년생)를 낳음.
기타오이고예 (吳爾庫霓)커얼친친왕 오극선(吳克善)의 노비도르곤 사후 순장됨.



'''자녀'''


  • '''친딸''' : 동고(東莪, 1638년 ~ ?) - 측복진 이씨(李氏) 소생.
  • '''양자''' : 도르보(多爾博, 1643년 ~ 1673년) - 이복 동생인 예친왕(豫親王) 도도(多鐸)의 다섯째 아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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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서적 帝国を創った言語政策: ダイチン・グルン初期の言語生活と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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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서적 The Manchu Way: The Eight Banners and Ethnic Identity in Late Imperial China http://books.goo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85] 서적 이야기 중국사 3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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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서적 청사고
[88] 서적 多尔衮之谜 中国社会科学出版社 2008-12
[89] 서적 The Great Enterprise: The Manchu Reconstruction of Imperial Order in Seventeenth-century Chin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90] 웹인용 인조 34권, 15년(1637 정축 / 명 숭정(崇禎) 10년) 1월 22일(임술) 8번째 기사 -강도가 함락되는 전후 사정 http://sillok.histor[...] 2013-12-27
[91] 웹인용 인조 34권, 15년(1637 정축 / 명 숭정(崇禎) 10년) 1월 30일(경오) 2번째 기사 -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다. 서울 창경궁으로 나아가다 http://sillok.histor[...] 2013-12-27
[92] 저널 순치시기 중앙권력의 성격 - 팔기왕공의 권력투쟁을 중심으로 2013-12-27
[93] 문서 누르하치가 후금 건국 직후 임명한 네 명의 팔기군 기주(旗主)에 대한 설명
[94] 웹인용 顺治帝福临(1) - 正说清朝十二帝 http://book.sina.com[...] 中华书局 2013-12-16
[95] 서적 청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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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서적 The Great Enterprise: The Manchu Reconstruction of Imperial Order in Seventeenth-Century China http://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98] 서적 청사고
[99] 문서 팔기군 중 정황기, 양황기, 그리고 정백기를 일컫는 설명
[100] 서적
[101] 서적 Imperial China, 900–1800 http://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10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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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웹인용 효종 5권, 1년(1650 경인 / 청 순치(順治) 7년) 10월 4일(갑신) 1번째 기사 - 서교에서 청의 사신을 맞이하고 인정전에서 접견하고 칙서를 받다 http://sillok.histor[...] 2013-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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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서적 Peking: Temples and City Life, 1400–1900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10] 서적
[111] 서적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 9, Part 1: The Ch'ing Dynasty to 1800 http://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12] 문서 몸과 머리, 피부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으니 이를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모든 효의 시작이다.
[113] 서적
[114] 서적
[115] 서적 清朝順治初世的派閥抗爭
[116] 서적 《多爾袞攝政日記》
[117] 서적 《세조장황제실록》 순치 7년 12월 초9일
[118] 서적
[119] 서적 《청사고》
[120] 웹인용 효종 6권, 2년(1651 신묘 / 청 순치(順治) 8년) 2월 18일(을축) 3번째 기사 - 이시방과 정유성이 섭정왕의 왕위 찬탈 음모와 의순 공주의 거취를 알리다 http://sillok.histor[...] 2013-12-27
[121] 웹인용 顺治帝福临(3) - 正说清朝十二帝 http://book.sina.com[...] 中华书局 2013-12-20
[122] 서적 《청사고》
[123] 서적 〈韃靼漂流記〉,〈清史研究集〉第一輯
[124] 웹인용 효종 6권, 2년(1651 신묘 / 청 순치(順治) 8년) 3월 17일(갑오) 3번째기사 - 청사를 인정전에서 접견하고 섭정왕의 모반 내용이 있는 칙서를 받다 http://sillok.histor[...] 2013-12-25
[125] 서적 淸代通史 1 中華書局
[126] 서적
[127] 서적 《청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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