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신기오로 요토
1. 개요
아이신기오로 요토는 후금의 인물로, 초기에는 군사적 공을 세워 버일러에 봉해졌다. 1627년 조선을 침략하여 인조에게 항복을 요구했으며, 명나라 정벌에도 참여하여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다. 숭덕 연간에 성친왕에 봉해졌으나, 정치적 문제로 두 차례 강등되기도 했다. 이후 명나라를 정벌하다가 산동 제남에서 사망했으며, 사후 극근군왕으로 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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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양홍기인 -
면흔
가경제의 아들인 면흔은 1등 숭선친왕에 봉해졌으나 황위 계승에는 실패했고, 관료 생활 중 홍수 피해 구호 활동 등의 업적을 남겼으나 자금성 인쇄소 관리 부실로 징계를 받았으며, 사망 후 숭선휘친왕으로 추봉되어 그의 아들이 작위를 계승했고, 대중문화 작품에도 등장한다. -
만주 양홍기인 -
영장 (청나라)
건륭제의 셋째 아들 영장은 폐병으로 승마에 능숙하지 못했고 효현순황후 장례 감독 중 부적절한 행동으로 황위 계승에서 제외된 후 순군왕에 추증되었으나, 아들이 없어 영성의 아들 면의가 후사를 이었다. -
1639년 사망 -
엘리자베스 케리
엘리자베스 케리는 영국의 작가로, 여성 최초로 출판된 영어 희곡 《유대의 아름다운 여왕 마리아의 비극》을 저술했으며,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시와 희곡 작품 활동을 했다. -
1639년 사망 -
톰마소 캄파넬라
톰마소 캄파넬라는 이탈리아의 철학자, 신학자, 시인이자 정치 사상가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반기를 들고 경험주의에 심취하여 이단적인 견해로 투옥되었으나, 옥중에서 『태양 도시』를 비롯한 다수의 저술을 남기고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변호했으며, 그의 작품은 유토피아 및 근대 사회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청나라의 장군 -
장쉰
장쉰은 청나라 말기 및 중화민국 초기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청나라 복벽을 시도했으나 실패 후 은퇴하여 사업가로 활동했다. -
청나라의 장군 -
오삼계
오삼계는 명나라 말 청나라 초의 무장으로, 명나라 멸망 후 청과 손잡고 이자성을 격파, 평서왕에 봉해졌으나 삼번의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인물로, 배신과 야망의 상징이자 진원원과의 러브스토리로도 알려져 있다.
2. 생애
요토는 초기에 타이지(台吉) 직위를 받았다. 천명(天命) 6년(1621), 봉준보(奉集堡) 전투에서 더걸러이(德格類)와 함께 명군을 격파했다. 심양(瀋陽) 점령 이후 백탑포(白塔鋪) 전투에서 명군 3천여 명을 섬멸했다. 천명(天命) 8년(1623)에는 칼카(喀爾喀) 자루트(扎魯特) 원정에서 아바타이(阿巴泰)와 함께 앙안(昂安)과 그 아들을 참수했다. 천명 11년(1626), 다이샨(代善)을 따라 자루트 원정에 참여, 부장 올제이투(鄂爾齋圖)를 참수하여 버일러(貝勒)에 봉해졌다.
천총(天聰) 원년(1627), 아민(阿敏)과 지르갈랑(濟爾哈朗) 등과 함께 조선을 침공하여 의주(義州), 정주(定州), 한산(漢山) 등의 성을 함락했다. 가산강(嘉山江)을 건너 안주(安州)를 점령하고 평양(平壤)에 이르렀으며, 수장은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다시 중화(中和)까지 진격하여 조선 국왕 인조(仁祖)에게 투항을 요구하였다.
아민이 한성으로 직접 공격하려 하자 요토와 지르갈랑은 평산(平山) 주둔을 결정하였고, 다시 사자를 파견하여 인조(仁祖)에게 투항을 요구하였다. 인조는 조공을 제공하면서 요토는 조선과의 결맹을 꾀하였고 아민에게 이를 알렸다. 아민은 조선과 결맹한 적이 없다는 이유로 군사를 풀어 약탈을 감행하였다. 요토는 아민에게 불복할 것을 권하였고 다시 인조의 아우에게 결맹하도록 하고서 회군하였다.
요토는 홍타이지(皇太極)를 따라 명나라 원정에 참여하여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천총(天聰) 원년(1627)에는 아민(阿敏)과 지르갈랑(濟爾哈朗) 등과 함께 조선을 공격하여 인조(仁祖)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천총 2년(1628)에는 금주(錦州), 행산(杏山), 고교(高橋) 세 성을 함락하고 봉수대[堠] 21개를 파괴했다. 천총 3년(1629)에는 금주와 영원(寧遠)을 침공하여 곡식을 불태웠으며, 홍타이지의 명나라 원정 시 우익(右翼) 군대를 이끌고 대안구(大安口)를 공격, 마란영(馬蘭營) 구원병을 격파했다. 북경(北京)에서는 다이샨(代善)과 함께 원군을 격파하고, 사할리얀(薩哈璘)과 함께 영평(永平)과 향하(香河)를 점령했다.
천총 5년(1631), 육부(六部) 설치 후 병부(兵部) 사무를 맡았다. 대릉하(大凌河) 전투에서는 아지거(阿濟格)와 함께 2만 명을 이끌고 의주(義州)에서 진격, 황제의 군대와 합류하여 조대수(祖大壽)의 항복을 유도했다. 천총 6년(1632)에는 홍타이지에게 명나라 백성을 위무하고 군사력을 증강할 것을 제안했다.
천총 7년(1633)에는 더걸러이 등과 여순구(旅順口)를 공격하고 병사를 주둔시켰다. 천총 8년(1634) 심양 열병식에서는 만주와 몽고 11기(旗) 군대를 지휘하여 홍타이지의 칭찬을 받았다. 천총 9년(1635)에는 산서(山西) 침공 중 병으로 귀화성에 남았으며, 투메트부(土默特部)의 귀순을 받고 명나라 사자를 잡아 처형했다.
요토는 천명(天命) 6년(1621) 병사를 이끌고 봉준보(奉集堡)에서 명군을 격파했으며, 누르하치가 심양(瀋陽)을 점령한 후에는 명군 총병(總兵) 이병성(李秉誠)을 백탑포(白塔鋪)까지 추격하여 3천여 명을 섬멸했다. 칼카(喀爾喀) 자루트(扎魯特) 버일러(貝勒) 앙안(昂安)이 후금 사자를 죽이자, 천명(天命) 8년(1623) 요토는 아바타이(阿巴泰)와 함께 원정하여 앙안과 그 아들을 처형했다. 천명 11년(1626)에는 다이샨(代善)을 따라 자루트 원정에 참여하여 부장 올제이투(鄂爾齋圖)를 죽이고 버일러에 봉해졌다.
천총(天聰) 원년(1627), 요토는 아민(阿敏), 지르갈랑(濟爾哈朗) 등과 함께 조선을 공격하여 의주(義州), 정주(定州), 한산(漢山)의 성을 함락하고, 평양(平壤)에서 조선 국왕 인조(仁祖)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아민이 한성을 공격하려 하자, 요토는 지르갈랑과 함께 평산(平山)에 주둔하며 인조(仁祖)에게 조공을 요구했고, 조선과의 결맹을 꾀했다. 이후 명 원정에서 공을 세웠고, 천총 2년(1628)에는 금주(錦州), 행산(杏山), 고교(高橋) 세 성을 함락하고 봉수대 21개를 파괴했다. 천총 3년(1629) 명의 금주와 영원(寧遠)을 공격하고, 홍타이지의 명 원정에 참여하여 우익 군대를 지휘하며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다. 천총 4년에는 심양 수비를 맡았다.
천총 5년(1631), 육부(六部)가 설립되자 병부(兵部) 사무를 맡았고, 대릉하(大凌河) 공격에 참여하여 조대수(祖大壽)의 항복을 받아냈다. 천총 6년(1632) 정월, 홍타이지에게 명의 백성을 위무하고 군대를 증강할 것을 제안했다. 이후 지르갈랑 등과 차하르부(察哈爾部)를 공략하고, 천총 7년(1633) 여순구(旅順口)를 공격했다. 천총 8년(1634) 심양 열병식에서 만주와 몽고 11기(旗) 군대를 지휘하여 홍타이지의 칭찬을 받았다. 천총 9년(1635), 명의 산서(山西)를 침공했으나 병으로 귀화성(歸化城)에 남았다.
숭덕(崇德) 원년(1636) 4월, 성친왕(成親王)에 봉해졌으나, 8월에 망굴타이(莽古爾泰)와 쇼토(碩託)를 비호하고 지르갈랑과 호오거(豪格)를 이간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될 위기에 처했으나, 홍타이지가 사면하여 버일러(貝勒)로 강등되고 병부 직함이 박탈되었다. 얼마 후 다시 병부 업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숭덕 2년(1638) 8월, 활쏘기를 거부한 사건으로 교만하다는 비판을 받고 버이서(貝子)로 강등되었으며, 벌은(罰銀) 5천 냥을 부과받았다.
2.1. 초기 활동과 군사적 공적
아이신기오로 요토는 초기에 타이지(台吉) 직위를 받았다. 천명(天命) 6년(1621), 봉준보(奉集堡) 전투에서 더걸러이(德格類)와 함께 명군을 격파했다. 심양(瀋陽) 점령 이후 백탑포(白塔鋪) 전투에서 명군 3천여 명을 섬멸했다. 천명(天命) 8년(1623)에는 칼카(喀爾喀) 자루트(扎魯特) 원정에서 아바타이(阿巴泰)와 함께 앙안(昂安)과 그 아들을 참수했다. 천명 11년(1626), 다이샨(代善)을 따라 자루트 원정에 참여, 부장 올제이투(鄂爾齋圖)를 참수하여 버일러(貝勒)에 봉해졌다.
2.2. 조선 침공과 아민과의 갈등
천총(天聰) 원년(1627), 아민(阿敏)과 지르갈랑(濟爾哈朗) 등과 함께 조선을 침공하여 의주(義州), 정주(定州), 한산(漢山) 등의 성을 함락했다. 가산강(嘉山江)을 건너 안주(安州)를 점령하고 평양(平壤)에 이르렀으며, 수장은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다시 중화(中和)까지 진격하여 조선 국왕 인조(仁祖)에게 투항을 요구하였다.
아민이 한성으로 직접 공격하려 하자 요토와 지르갈랑은 평산(平山) 주둔을 결정하였고, 다시 사자를 파견하여 인조(仁祖)에게 투항을 요구하였다. 인조는 조공을 제공하면서 요토는 조선과의 결맹을 꾀하였고 아민에게 이를 알렸다. 아민은 조선과 결맹한 적이 없다는 이유로 군사를 풀어 약탈을 감행하였다. 요토는 아민에게 불복할 것을 권하였고 다시 인조의 아우에게 결맹하도록 하고서 회군하였다.
2.3. 명나라 정벌과 홍타이지와의 관계
아이신기오로 요토는 홍타이지(皇太極)를 따라 명나라 원정에 참여하여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천총(天聰) 원년(1627)에는 아민(阿敏)과 지르갈랑(濟爾哈朗) 등과 함께 조선을 공격하여 인조(仁祖)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천총 2년(1628)에는 금주(錦州), 행산(杏山), 고교(高橋) 세 성을 함락하고 봉수대[堠] 21개를 파괴했다. 천총 3년(1629)에는 금주와 영원(寧遠)을 침공하여 곡식을 불태웠으며, 홍타이지의 명나라 원정 시 우익(右翼) 군대를 이끌고 대안구(大安口)를 공격, 마란영(馬蘭營) 구원병을 격파했다. 북경(北京)에서는 다이샨(代善)과 함께 원군을 격파하고, 사할리얀(薩哈璘)과 함께 영평(永平)과 향하(香河)를 점령했다.
천총 5년(1631), 육부(六部) 설치 후 병부(兵部) 사무를 맡았다. 대릉하(大凌河) 전투에서는 아지거(阿濟格)와 함께 2만 명을 이끌고 의주(義州)에서 진격, 황제의 군대와 합류하여 조대수(祖大壽)의 항복을 유도했다. 천총 6년(1632)에는 홍타이지에게 명나라 백성을 위무하고 군사력을 증강할 것을 제안했다.
천총 7년(1633)에는 더걸러이 등과 여순구(旅順口)를 공격하고 병사를 주둔시켰다. 천총 8년(1634) 심양 열병식에서는 만주와 몽고 11기(旗) 군대를 지휘하여 홍타이지의 칭찬을 받았다. 천총 9년(1635)에는 산서(山西) 침공 중 병으로 귀화성에 남았으며, 투메트부(土默特部)의 귀순을 받고 명나라 사자를 잡아 처형했다.
2.4. 두 차례의 강등과 정치적 부침
아이신기오로 요토는 천명 6년(1621) 병사를 이끌고 봉준보(奉集堡)에서 명군을 격파했으며, 누르하치가 심양(瀋陽)을 점령한 후에는 명군 총병(總兵) 이병성(李秉誠)을 백탑포(白塔鋪)까지 추격하여 3천여 명을 섬멸했다. 칼카(喀爾喀) 자루트(扎魯特) 버일러(貝勒) 앙안(昂安)이 후금 사자를 죽이자, 천명(天命) 8년(1623) 요토는 아바타이(阿巴泰)와 함께 원정하여 앙안과 그 아들을 처형했다. 천명 11년(1626)에는 다이샨(代善)을 따라 자루트 원정에 참여하여 부장 올제이투(鄂爾齋圖)를 죽이고 버일러에 봉해졌다.
천총(天聰) 원년(1627), 요토는 아민(阿敏), 지르갈랑(濟爾哈朗) 등과 함께 조선을 공격하여 의주(義州), 정주(定州), 한산(漢山)의 성을 함락하고, 평양(平壤)에서 조선 국왕 인조(仁祖)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아민이 한성을 공격하려 하자, 요토는 지르갈랑과 함께 평산(平山)에 주둔하며 인조에게 조공을 요구했고, 조선과의 결맹을 꾀했다. 이후 명 원정에서 공을 세웠고, 천총 2년(1628)에는 금주(錦州), 행산(杏山), 고교(高橋) 세 성을 함락하고 봉수대 21개를 파괴했다. 천총 3년(1629) 명의 금주와 영원(寧遠)을 공격하고, 홍타이지의 명 원정에 참여하여 우익 군대를 지휘하며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다. 천총 4년에는 심양 수비를 맡았다.
천총 5년(1631), 육부(六部)가 설립되자 병부(兵部) 사무를 맡았고, 대릉하(大凌河) 공격에 참여하여 조대수(祖大壽)의 항복을 받아냈다. 천총 6년(1632) 정월, 홍타이지에게 명의 백성을 위무하고 군대를 증강할 것을 제안했다. 이후 지르갈랑 등과 차하르부(察哈爾部)를 공략하고, 천총 7년(1633) 여순구(旅順口)를 공격했다. 천총 8년(1634) 심양 열병식에서 만주와 몽고 11기(旗) 군대를 지휘하여 홍타이지의 칭찬을 받았다. 천총 9년(1635), 명의 산서(山西)를 침공했으나 병으로 귀화성(歸化城)에 남았다.
숭덕(崇德) 원년(1636) 4월, 성친왕(成親王)에 봉해졌으나, 8월에 망굴타이(莽古爾泰)와 쇼토(碩託)를 비호하고 지르갈랑과 호오거(豪格)를 이간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될 위기에 처했으나, 홍타이지가 사면하여 버일러(貝勒)로 강등되고 병부 직함이 박탈되었다. 얼마 후 다시 병부 업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숭덕 2년(1638) 8월, 활쏘기를 거부한 사건으로 교만하다는 비판을 받고 버이서(貝子)로 강등되었으며, 벌은(罰銀) 5천 냥을 부과받았다.
3. 사망
숭덕 3년(1638년), 요토는 다시 버일러로 복권되었고, 홍타이지를 따라 칼카 원정에 참여했다. 보쇼두이에 이르렀을 때 자삭투 한의 출정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같은 해 8월, 명나라를 정벌할 때 양무대장군(揚武大將軍)에 임명되었고, 버일러 두두를 부수(副帥)로 삼아 우익군(右翼軍)을 지휘하게 했다. 좌익군은 예친왕(睿親王) 도르곤이 거느렸다.
장자령(牆子嶺) 전투에서 명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산동(山東) 제남(濟南)에 도착했을 때 요토는 사망하였다. 숭덕 4년(1639년), 도르곤이 승전 보고를 올렸을 때 요토의 이름이 없어 홍타이지가 놀라 물었고, 그제야 사망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곡기를 끊었다. 요토의 운구가 돌아오자 홍타이지는 사령(沙嶺)에서 운구를 맞이하였고, 회궁 후 3일간 조현(朝見)을 중지하였다.
홍타이지는 요토를 극근군왕으로 추봉하고, 낙타 5필, 말 2필, 은 1만 냥을 하사했다. 강희 27년(1688년)에는 비석을 세워 그의 공적을 기렸고, 건륭 43년(1778년)에는 태묘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