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블래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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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트 블래키(Art Blakey)는 1919년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난 미국의 재즈 드러머이자 밴드 리더이다. 10대 후반부터 재즈 밴드에서 활동하며 피아니스트에서 드럼 연주자로 전향했으며, 디지 길레스피의 조언을 받아 실력을 향상시켰다. 1954년 호러스 실버와 함께 재즈 메신저스를 결성하여 하드 밥 운동에 기여했으며, 1950년대 말에는 웨인 쇼터, 리 모건, 바비 티몬스 등과 함께 앨범 "모닌"을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61년 첫 내한 이후 친일 성향을 보였으며, 1990년 폐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재즈 메신저스를 이끌며 여러 세대의 재즈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는 그래미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재즈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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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블래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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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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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아서 블레이키 |
별칭 | 압둘라 이븐 부하이나 |
출생 | 1919년 10월 11일 |
출생지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 |
사망 | 1990년 10월 16일 |
사망지 | 미국 뉴욕주 맨해튼 |
직업 | 음악가, 밴드 리더 |
악기 | 드럼, 퍼커션 |
활동 기간 | 1942년–1990년 |
레이블 | 블루 노트 |
웹사이트 | artblakey.com |
음악 스타일 | |
장르 | 재즈 하드 밥 비밥 스트레이트-어헤드 재즈 |
참여 그룹 | |
과거 멤버 | 재즈 메신저스 |
디스코그래피 | |
솔로 | 솔로 |
재즈 메신저스 | 재즈 메신저스 |
2. 생애
1919년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난 아트 블래키는 10대 후반부터 재즈 밴드에서 활동하며 뉴욕으로 진출했다. 처음에는 피아니스트였지만, 드럼으로 전향했다. 초기에는 드럼 실력이 미숙했지만, 친구인 디지 길레스피의 조언으로 실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1944년 빌리 엑스타인 악단에 합류, 1940년대 후반부터 마일스 데이비스, 셀로니우스 몽크, 찰리 파커 등과 연주했다. 1954년부터 1955년까지 호러스 실버와 초대 재즈 메신저스를 결성, 클리퍼드 브라운, 루 도널드슨 등을 거느리고 버드랜드에서 인기를 얻었다.
1956년 실버 탈퇴 후, 1958년 재키 맥린의 대역 베니 골슨과 그룹을 재건, 리 모건, 바비 티몬스, 지미 메리트를 영입했다. "모닌"(티몬스 작곡), "블루스 마칭"(골슨 작곡) 등을 블루노트에서 발매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1958년 12월 28일 프랑스 파리 생제르맹 라이브 앨범과 1959년 누벨바그 영화 『위험한 관계』, 『죽임을 당한다』 OST 참여로 일본에서 펑키 붐을 일으켰다. 마일스 데이비스도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OST에 참여했다.
1959년 골슨 탈퇴 후 웨인 쇼터가 합류, "튜니지아의 밤"을 드럼 솔로 중심으로 편곡하여 1960년 8월 14일 앨범에 수록, 블래키의 대표곡이 되었다.
이후 재즈 메신저스 리더로 활동하며 친일파로 일본에서 여러 번 공연했다. 재즈 메신저스는 2관 또는 3관의 프론트 + 3 리듬 콤보 밴드였다.
블래키는 강약 조절과 심벌 레가토 음색이 특징이며, 아프로-쿠반 리듬을 드럼 세트로 표현한 선구자이다.
만년에는 시력과 청력 쇠퇴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1990년 폐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활동했다. 4번 결혼하여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아트 블래키는 리 모건, 바비 티몬스, 웨인 쇼터, 프레디 허바드, 키스 자렛, 커티스 풀러, 척 맨지오네, 시더 월턴, 레지 워크맨, 윈턴 마설리스, 브랜포드 마설리스, 테렌스 블랜차드, 멀그루 밀러, 제임스 윌리엄스, 로니 프라시코, 케니 개릿 등 많은 신인을 발굴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아트 블래키는 1919년 10월 11일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미혼모였으며, 블래키가 태어난 직후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2] 어머니의 이름은 마리 로디커 또는 로더리커로 알려져 있지만, 1937년 블래키의 결혼 증명서에는 잭슨으로 기록되어 있다. 친아버지 버트람 토마스 블래키는 앨라배마주 오자크 출신으로, 1900년에서 1910년 사이에 가족과 함께 피츠버그로 이주했다.[2] 블래키의 삼촌 루비 블래키는 테네시주 내슈빌의 피스크 대학교를 졸업하고 피츠버그에서 가수, 합창단 지휘자, 교사로 활동했다.[2]블래키는 의붓어머니가 된 가족 친구와 함께 형제들과 함께 자랐다. 레슬리 고스의 전기에 따르면, 의붓어머니는 애니 파란과 그의 남편 헨리 파란 시니어였다. 블래키가 파란 가족과 얼마나 오랫동안 함께했는지는 가족, 친구, 블래키 자신의 이야기에 따라 다르지만, 성장하면서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것은 분명하다.
블래키는 학교에서 피아노 레슨을 받았지만, 독학으로도 피아노를 배웠다. 10대 후반부터 재즈 밴드에서 활동하며 뉴욕으로 진출했다. 처음에는 피아니스트였지만, 어느 시점부터 피아노를 포기하고 드럼으로 전향했다. 초기에는 드럼 실력이 미숙했지만, 친구인 트럼펫 연주자 디지 길레스피의 조언을 받아 실력이 크게 향상되었다고 한다.
2. 2. 음악 경력
아트 블래키는 1940년대 후반부터 마일스 데이비스, 셀로니어스 몽크, 찰리 파커 등과 함께 연주하며 비밥(bebop) 운동에 참여했다. 1954년부터 1955년까지 호러스 실버와 함께 초대 재즈 메신저스를 결성, 클리퍼드 브라운과 루 도널드슨 등을 거느리고 재즈 클럽 버드랜드에 출연하여 인기를 얻었다.1956년 실버가 탈퇴한 후, 1958년 재키 맥린의 대역으로 베니 골슨을 만나 그룹 재건을 요청했다. 리 모건, 바비 티몬스, 지미 메리트를 영입하고, "모닌"(티몬스 작곡), "블루스 마칭"(골슨 작곡) 등의 새로운 곡을 추가하여 1958년 10월 블루노트에서 앨범 "모닌"을 발매, 큰 인기를 얻었다.
1958년 12월 28일 프랑스 파리의 생제르맹에서 녹음된 라이브 앨범과 1959년 누벨바그 영화 『위험한 관계』, 『죽임을 당한다』에 참여하면서 일본에서도 펑키 붐을 일으켰다.
1959년 골슨이 떠난 후, 웨인 쇼터가 합류하여 "튜니지아의 밤"을 드럼 솔로 중심으로 편곡, 1960년 8월 14일 앨범 "튜니지아의 밤"에 수록하여 블래키의 대표곡이 되었다.
이후 재즈 메신저스의 리더로서 활동하며, 친일파로 알려져 일본에서 여러 번 공연했다. 재즈 메신저스는 2관 또는 3관의 프론트 + 3 리듬의 콤보 형식 밴드였다.
블래키는 강약 조절과 심벌 레가토의 아름다운 음색이 특징이며, 아프로-쿠반 리듬을 드럼 세트로 표현한 선구자이다.
만년에는 시력과 청력 쇠퇴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1990년 폐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활동했다. 4번의 결혼으로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아트 블래키는 리 모건, 바비 티몬스, 웨인 쇼터, 프레디 허바드, 키스 자렛, 커티스 풀러, 척 맨지오네, 시더 월턴, 레지 워크맨, 윈턴 마설리스, 브랜포드 마설리스, 테렌스 블랜차드, 멀그루 밀러, 제임스 윌리엄스, 로니 프라시코, 케니 개릿 등 많은 신인을 발굴했다.
2. 2. 1. 초기 경력
블래키는 7학년 때부터 풀타임으로 음악을 연주하며 돈을 벌기 시작했고, 피아노 연주와 밴드 리더가 되는 법을 배우며 어른의 책임을 맡았다. 1930년대 초,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피아노에서 드럼으로 악기를 바꿨다. 자주 인용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블래키는 클럽 주인의 총구 앞에서 강제로 드럼을 연주하게 되었고, 에롤 가너가 피아노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블래키 자신이 이 이야기 외에 다른 설명도 했기 때문에, 이 이야기의 진실성은 의문시된다. 블래키가 드럼을 연주하며 취한 스타일은 "칙 웨브, 시드 캣릿, 레이 보덕의 공격적인 스윙 스타일"이었다.1939년부터 1944년까지 블래키는 피츠버그 출신의 메리 루 윌리엄스와 함께 연주했고, 플레처 헨더슨 오케스트라와 투어를 했다. 대부분의 자료에 따르면, 그는 1942년에 윌리엄스와 함께 뉴욕으로 갔고, 1년 후 헨더슨 밴드에 합류했다. (일부 자료에서는 1939년에 헨더슨 밴드에 합류했다고도 한다.) 헨더슨 밴드에서 연주하던 중, 블래키는 백인 조지아 경찰관에게 이유 없이 공격당해 머리에 강철판을 삽입해야 했다.[3][4] 이 부상으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짧은 기간 동안 보스턴의 틱 톡 클럽에서 자신의 밴드를 이끌기도 했다.
1944년부터 1947년까지 블래키는 빌리 엑스타인의 빅 밴드에서 활동했다. 이 밴드에서 그는 마일스 데이비스, 덱스터 고든, 팻츠 나바로, 디지 길레스피, 찰리 파커, 사라 본 등과 같은 비밥 운동의 주요 인물들과 교류했다.
엑스타인 밴드가 해체된 후, 블래키는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1979년 인터뷰에서 "드럼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할 일이 없어서 아프리카에 갔다. 종교와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라고 회상했다.[5][6]
1947년부터 1949년까지 블래키는 녹음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이슬람교를 공부하고 개종하여 압둘라 이븐 부하이나라는 이름을 얻었고, "Bu"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1950년대에 실천적인 무슬림이 되는 것을 멈추고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아트 블래키"라는 이름으로 계속 공연했다.[7]
1950년대 초, 블래키는 버드 파웰, 셀로니어스 몽크 등과 같은 음악가들을 지원했다. 그는 몽크의 가장 훌륭한 드러머 중 한 명으로 여겨졌으며,[8] 몽크의 첫 리더로서의 녹음(1947년 블루 노트 레코드)과 마지막 녹음(1971년 런던)을 포함한 많은 세션에서 함께 연주했다.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블래키는 버디 드프랑코와 함께 투어했으며, 이 밴드에는 케니 드류도 포함되어 있었다.
2. 2. 2. 비밥 시대
아트 블래키는 1940년대 후반부터 마일스 데이비스, 셀로니어스 몽크, 찰리 파커 등과 함께 연주하며 비밥(bebop) 운동에 참여했다. 1944년부터 1947년까지는 빌리 엑스타인(Billy Eckstine)의 빅 밴드에서 활동하며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덱스터 고든(Dexter Gordon), 팻츠 나바로(Fats Navarro),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찰리 파커(Charlie Parker), 사라 본(Sarah Vaughan) 등 비밥 연주자들과 교류했다.1919년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 출신인 블래키는 10대 후반부터 재즈 밴드에서 활동하며 뉴욕으로 진출했다. 일설에 따르면, 처음에는 피아니스트였지만, 어느 시점부터 피아노를 포기하고 드럼으로 전향했다. 처음에는 드럼 실력이 미숙했지만, 친구인 트럼펫 연주자 디지 길레스피의 조언을 받아 실력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한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 블래키는 녹음 활동을 했다. 이 기간 동안 이슬람교를 공부하고 개종하여 압둘라 이븐 부하이나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Bu"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1950년대에 실천적인 무슬림이 되는 것을 멈추고 "아트 블래키"라는 이름으로 계속 공연했다.[7]
1950년대 초, 블래키는 마일스 데이비스,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버드 파웰(Bud Powell), 셀로니어스 몽크(Thelonious Monk) 등 여러 음악가들의 연주를 지원했다. 특히 몽크의 첫 번째 리더로서의 녹음 세션(1947년 블루 노트 레코드(Blue Note Records))과 마지막 세션(1971년 런던)을 포함하여 많은 세션에서 몽크와 협연했으며, 몽크의 가장 잘 맞는 드러머로 여겨지기도 했다.[8]
2. 2. 3. 재즈 메신저스

1947년 12월 17일, 블래키는 "아트 블래키 앤 더 메신저스"라는 그룹을 이끌고 리더로서 블루 노트 레코드(Blue Note Records)에서 첫 녹음 세션을 가졌다. 이 옥텟에는 케니 도햄(Kenny Dorham), 사히브 시합(Sahib Shihab), 무사 칼림(Musa Kaleem), 월터 비숍 주니어(Walter Bishop, Jr.)가 참여했다.
거의 같은 시기(1947년 또는 1949년), 그는 세븐틴 메신저스라는 빅 밴드를 이끌었으나 재정적으로 불안정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해체되었다. 이후 메신저스라는 이름은 블래키와 피아니스트 호레이스 실버(Horace Silver)가 공동으로 이끌던 그룹에 붙여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초기 녹음에는 이 이름이 사용되지 않았다.
"재즈 메신저스"라는 이름은 1954년 실버가 명목상 이끌고 블래키, 모블리, 도햄, 더그 왓킨스(Doug Watkins)가 참여한 녹음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같은 5중주단은 이듬해 The Jazz Messengers at the Cafe Bohemia를 녹음했는데, 여전히 공동체 형태로 활동했다. 도널드 버드(Donald Byrd)가 도햄을 대신했고, 그룹은 1956년 컬럼비아 레코드(Columbia Records)에서 ''The Jazz Messengers''라는 앨범을 녹음했다. 블래키는 실버가 밴드의 첫 해 이후 떠나면서 그룹 이름을 이어받았고 (모블리와 왓킨스를 데리고 새로운 5중주단을 결성), 밴드 이름은 블래키의 이름을 포함하도록 발전하여 결국 "아트 블래키 앤 더 재즈 메신저스"로 정착했다. 블래키는 생애 마지막까지 이 그룹을 이끌었다.
1950년대의 전형적인 하드 밥 그룹으로, 뚜렷한 블루스 뿌리를 가진 비밥의 강력하고 공격적인 확장을 연주했다. 1950년대 말, 색소폰 연주자 자니 그리핀(Johnny Griffin)과 베니 골슨(Benny Golson)이 잠시 그룹의 멤버로 활동했다. 음악 감독으로서 골슨은 "아이 리멤버 클리포드(I Remember Clifford)", "얼롱 케임 베티", "블루스 마치(Blues March)"와 같은 여러 재즈 스탠다드를 작곡했으며, 이후 그룹의 여러 버전에서 자주 부활되었다. "위스퍼 낫(Whisper Not)"과 "Are You Real"은 블래키를 위한 골슨의 또 다른 작곡이었다.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이 그룹은 테너 색소폰에 웨인 쇼터(Wayne Shorter), 트럼펫에 리 모건(Lee Morgan), 피아니스트 바비 티몬스(Bobby Timmons), 베이스에 제이미 메리트(Jymie Merritt)가 참여했다. 이 그룹은 블루 노트 레코드(Blue Note Records)에서 ''The Big Beat''와 ''A Night in Tunisia''를 포함한 여러 앨범을 녹음했다. 1961년부터 1964년까지, 밴드는 트롬본 연주자 커티스 풀러(Curtis Fuller)를 추가하고, 모건, 티몬스, 메리트를 각각 프레디 허바드(Freddie Hubbard), 세다 월턴(Cedar Walton), 레지 워크먼(Reggie Workman)으로 교체한 6인조였다. 이 그룹은 젊은 재즈 인재들의 시험장이 되었고, ''부하이네스 딜라이트(Buhaina's Delight), Caravan''과 ''Free For All''과 같은 앨범을 녹음했다. 베테랑들이 가끔 그룹에 다시 등장했지만, 대체로 메신저스의 각 버전은 새로운 젊은 연주자들로 구성되었다. 메신저스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재즈계에서 통과의례였고 즉각적인 신뢰를 부여했다.
많은 메신저스 출신들이 리 모건(Lee Morgan), 베니 골슨(Benny Golson), 웨인 쇼터(Wayne Shorter), 프레디 허바드(Freddie Hubbard), 바비 티몬스(Bobby Timmons), 커티스 풀러(Curtis Fuller), 척 맨지오니(Chuck Mangione), 키스 자렛(Keith Jarrett), 조앤 브래킨(Joanne Brackeen), 우디 쇼(Woody Shaw), 윈턴 마살리스(Wynton Marsalis), 브랜포드 마살리스(Branford Marsalis), 테렌스 블랜차드(Terence Blanchard), 도널드 해리슨(Donald Harrison), 멀그루 밀러(Mulgrew Miller)와 같이 자신만의 재즈 스타가 되었다. 아트 블래키 앤 더 재즈 메신저스 출신 전체 목록은 실제 밴드와 녹음하지 않은 일부 멤버를 포함하여 ''더 재즈 메신저스(The Jazz Messengers)''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19년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 출신으로, 10대 후반부터 재즈 밴드에서 활동하며 뉴욕으로 진출했다. 일설에 따르면, 처음에는 피아니스트였지만, 어느 시점부터 피아노를 포기하고 드럼으로 전향했다. 처음에는 드럼 실력이 미숙했지만, 친구인 트럼펫 연주자 디지 길레스피의 조언을 받아 실력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한다.
1944년부터 빌리 엑스타인의 악단에 들어가 1940년대 후반부터 마일스 데이비스, 셀로니우스 몽크, 찰리 파커 등과 함께 연주한 후, 1954년부터 1955년에 걸쳐 호러스 실버와 초대 재즈 메신저스를 결성했다. 클리퍼드 브라운과 루 도널드슨 등을 거느리고 재즈 클럽 버드랜드에 출연하여 인기를 얻었다.
1956년 실버가 탈퇴한 후, 재즈 메신저스는 불우한 시대를 맞이했다. 이를 타개할 계기를 마련한 것은 1958년 2월, 당시 재즈 메신저스에 있던 재키 맥린이 마약으로 체포되어 카바레 카드를 압수당하고, 그 대역을 맡았던 베니 골슨을 만난 것이다. 여기서 블래키는 골슨의 꼼꼼한 성격을 마음에 들어 그룹 재건을 요청했다. 멤버도 트럼펫에 리 모건, 피아노에 바비 티몬스, 베이스에 지미 메리트로 자신과 골슨 외에는 모두 교체하고, 이제는 대표곡이 된 "모닌"(티몬스 작곡), "블루스 마칭"(골슨 작곡) 등의 새로운 오리지널 곡이 생겨 새로운 레퍼토리에 추가되었고, 1958년 10월, 새 멤버로 첫 공연을 뉴욕 타운 홀에서 열어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같은 달 30일, 블루노트에 전술한 곡들을 포함한 앨범 "모닌"(레코드 번호:BLP/BST-4003)을 녹음했고, 이 앨범은 다음 달 발매되어 크게 히트했다.
그러나 이 앨범 녹음 직후 밴드가 유럽 공연을 갔을 때, 같은 해 (1958년) 12월 28일 프랑스 파리의 생제르맹에서 녹음된 라이브 앨범 『생제르맹의 재즈 메신저스 ''Art Blakey & Les Jazz Messengers Au Club St Germain''』(프랑스 RCA 원반)이 당시 일본 빅터 음악부에서 발매되었고, 또 1959년 공개된 누벨바그 영화 작품 『위험한 관계 ''Les Liaisons dangereuses''』(감독: 로제 바딤), 『죽임을 당한다 ''Des Femmes Disparaissent''』(감독: 에두아르 몰리나로)에 음악 참여를 계기로, 일본에서도 이 곡들이 알려져 크게 히트하여, 전례 없는 펑키 붐이 일어났다. 덧붙여서, 마일스 데이비스도 전년 공개된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Ascenseur pour l'échafaud''』(감독: 루이 말)에서 음악을 담당하고 있다.
"모닌"의 대히트 후, 골슨은 다음 해 (1959년) 재즈 메신저스를 떠났고, 그 후 테너 색소폰은 행크 모블리 등이 담당했지만, 같은 해 (1959년) 가을, 웨인 쇼터가 들어왔고, 그 당시, 쇼터는 동 밴드의 간판 곡 중 하나인 "튜니지아의 밤"을, 드럼 솔로를 중심으로 하는 편곡으로 새롭게 리메이크하여, 1960년 8월 14일, 블루노트에 앨범 "튜니지아의 밤"(BLP-4049,BST-84049)의 1곡으로 녹음했다. 이것이, 이 곡의 블레이키의 긴 드럼 솔로의 상징적인 곡으로 사랑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재즈 메신저스의 리더로서, 다양한 앨범과 콘서트 등에서 활약한다. 친일파로 방일 횟수도 많다. 재즈 메신저스는 기본적으로 2관 또는 3관의 프론트 + 3 리듬의 콤보 형식의 밴드이다.
드러머로서 가장 큰 특징은 강약이 있는 백킹(브러시로 다가가는 듯한 플레이부터 격렬하게 몰아치는 "나이아가라 롤"까지의 진폭)에 있으며, 특히 심벌 레가토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음색은 특기할 만하다. 또한, 아프로-쿠반 리듬을 드럼 세트로 표현한 선구자로서도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만년의 녹음에서는 시력과 청력의 쇠퇴로 인해, 전성기 같은 플레이가 만족스럽게 할 수 없게 되었다. 1990년 폐암으로 뉴욕 맨해튼에서 사망했다. 평생 4번 결혼했고,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아트 블래키는 많은 신인을 발굴했고, 많은 저명한 뮤지션이 메신저스에서 배출되었다. 50년대 후반부터 리 모건, 바비 티몬스, 웨인 쇼터 등이, 60년대에는 프레디 허바드, 키스 자렛, 커티스 풀러, 척 맨지오네, 시더 월턴, 레지 워크맨 등이 메신저스에 재적한 것을 계기로 스타가 되었다. 80년대에 유행한 신전통파라고 불리는 젊은 플레이어들을 중심으로 한 모던 재즈 무브먼트에서 활약한 플레이어의 대부분이 메신저스 출신이다. 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윈턴 마설리스, 브랜포드 마설리스, 테렌스 블랜차드, 멀그루 밀러, 제임스 윌리엄스, 로니 프라시코, 케니 개릿 등이 메신저스 출신이다. 장녀 에블린 블래키(2007년 사망)도 메신저스에서의 활동을 거쳐 프로 가수로 성공했다.
2. 2. 4. 후기 경력
1944년부터 1947년까지 블래키는 빌리 엑스타인(Billy Eckstine)의 빅 밴드와 함께 일했다. 이 밴드를 통해 블래키는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덱스터 고든(Dexter Gordon), 팻츠 나바로(Fats Navarro),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찰리 파커(Charlie Parker), 사라 본(Sarah Vaughan) 등 비밥(bebop) 운동의 주요 인물들과 교류했다.엑스타인 밴드가 해체된 후, 블래키는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아프리카를 여행하며 이슬람교를 공부하고 압둘라 이븐 부하이나라는 이름으로 개종했다. "Bu"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1950년대에 종교 활동을 중단하고 "아트 블래키"라는 이름으로 계속 공연했다.[7]
1950년대 초, 블래키는 데이비스, 파커, 길레스피, 버드 파웰(Bud Powell), 셀로니어스 몽크(Thelonious Monk) 등의 연주를 지원했다. 특히 몽크의 가장 훌륭한 드러머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8] 1947년 블루 노트 레코드(Blue Note Records)에서 몽크의 첫 리더 녹음 세션과 1971년 런던에서의 마지막 세션을 포함해 여러 세션에서 함께 연주했다. 1951년부터 1953년까지는 버디 드프랑코(Buddy DeFranco)와 투어를 함께 했으며, 이 밴드에는 케니 드류(Kenny Drew)도 참여했다.

블래키는 멤버가 자주 바뀌는 재즈 메신저스와 함께 수십 장의 앨범을 녹음하며 젊은 음악가들을 격려했다. 1954년 ''A Night at Birdland'' 앨범 라이브 세션에서 그는 "나는 젊은이들과 함께할 것입니다. 이들이 너무 늙으면 더 젊은 사람들을 영입할 겁니다. 그러면 정신이 활발하게 유지되죠."라고 말했다. 1970년대 퓨전 시대에 재즈 메신저스의 인기는 다소 줄었지만, 터렌스 블랜차드, 케니 개릿 등 새로운 재즈 연주자들과 함께 계속 공연했다.[9]
1980년대 말까지 블래키는 그룹과 함께 공연 및 투어를 계속했다. 1983년에는 건강 악화로 랄프 피터슨 주니어가 두 번째 드러머로 합류했다. 론 윈은 블래키가 "강력하고 맹렬하게 연주하여 청력을 많이 잃었고, 말년에는 본능에 의존해 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언급했다.[10] 블래키는 보청기가 타이밍을 망친다며 착용을 거부하고 진동을 감지하여 연주했다. 그러나 블래키의 마지막 라인업에서 연주한 자본 잭슨은 청력 손실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하며, "한쪽 귀는 잘 안 들렸지만 다른 쪽 귀로는 잘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밴드 멤버 제프리 키저는 "그는 선택적으로 귀가 먹었습니다. 돈에 대해 물어보면 귀가 먹었지만, 조용히 1대1로 이야기하면 잘 들을 수 있었습니다."라고 덧붙였다.[11]
블래키의 마지막 공연은 1990년 7월이었다.
2. 3. 음악 스타일
블래키는 초기에 칙 웨브, 시드 캣렛, 레이 보듀크 등 동시대 드러머들의 공격적인 스윙 스타일을 받아들였으며, 케니 클라크, 맥스 로치와 함께 현대 비밥 드럼 연주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맥스 로치는 "그(아트 블래키)의 연주는 듣자마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라고 평가하며, "네 개의 팔다리로 독립적인 연주를 가장 잘 유지하는 드러머"라고 칭찬했다. 블래키는 전통적인 그립을 지속적으로 사용했지만, 후기에는 매치드 그립도 사용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12]켄 번스의 ''재즈''에 따르면, 블래키는 "모던 재즈의 중요한 인물이며, 드럼 연주의 중요한 스타일리스트"였다. 1947년 셀로니우스 몽크와의 역사적인 세션에서 그는 삼연음이나 교차 리듬으로 자주 등장하는 크고 강한 스네어 드럼과 베이스 드럼의 강세가 특징인 어두운 심벌 소리를 만들어냈다.
블래키는 자신의 음악과 아프리카 드럼 연주를 비교하는 것을 꺼렸지만, 1948-9년 아프리카 방문 이후 드럼 옆을 두드리고 팔꿈치로 톰톰의 피치를 바꾸는 등 몇 가지 아프리카적 기법을 채택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두 번째와 네 번째 박자마다 하이햇을 힘차게 닫는 스타일은 1950-51년부터 나타났다.[14]
그는 드러머로서 강약 조절에 능숙했는데, 브러시로 부드럽게 다가가는 듯한 플레이부터 격렬하게 몰아치는 "나이아가라 롤"까지 다양한 연주를 선보였다. 특히 심벌 레가토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음색은 그의 특기였다. 또한, 아프로-쿠반 리듬을 드럼 세트로 표현한 선구자로도 기억되어야 한다.
2. 4. 친일 성향
아트 블래키는 친일 성향으로 알려져 있다.[32] 1961년 첫 일본 방문 당시, 일본 팬들의 환대에 큰 감동을 받았다. 당시 미국에서는 유색 인종 차별이 만연했기에, 블래키는 일본 팬들의 따뜻한 환영에 놀라움과 감격을 느꼈다.[32]한 팬이 기념 사진을 요청하자 블래키는 "나는 흑인인데? 함께 사진을 찍어도 괜찮은 건가요?"라고 물었고, 팬은 "그런 건 알고 있습니다. 꼭 함께!"라고 답했다. 이에 블래키는 감동하여 촬영에 응했다. 그는 귀국을 앞두고 "일본만큼 내 마음에 강한 인상을 남겨준 나라는 없다. 일본만이 우리를 인간으로 환영해 준 것이다."라고 말했다.[32]
도쿄 공연이 라디오로 중계된다는 소식에 재즈 메신저스 멤버들은 크게 기뻐하며 분발했다. 이후 블래키는 사망 직전까지 일본을 방문하며 여러 차례 연주했다. 그는 "Ugetsu(우게츠)"나 "On The Ginza(온 더 긴자)" 등 일본을 주제로 한 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또한, 70년대 이후 스즈키 요시오, 스즈키 이사오 등 일본인 멤버들이 메신저스에 참여했고, 일본인 드러머 조지 가와구치, 시라키 히데오와 드럼 배틀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일본인 아내를 맞이하고 아들에게 "Taro(타로)"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일본 술을 즐겨 마셨고, 일본산 드럼을 애용했다.
2. 5. 개인사 및 사망
아트 블래키는 네 번 결혼했으며, 그 외에도 여러 장기적인 관계를 맺었다. 십 대 시절 첫 번째 부인 클라리스 스튜어트와 결혼했고, 이후 다이애나 베이츠(1956년), 아츠코 나카무라(1968년), 앤 아놀드(1983년)와 결혼했다.[17] 이러한 관계를 통해 웬들린, 에블린, 재키, 카디자, 사키나, 아키라, 아트 주니어, 타카시, 겐지, 가말 등 10명의 자녀를 두었다.[18]1948년 서아프리카를 여행하며 이슬람교를 접하고, 이후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그는 아흐마디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으며, 한때는 터번을 쓰고 쿠란을 읽는 재즈 밴드인 17 메신저스를 이끌기도 했다. 블래키가 무슬림 이름을 사용한 것은 호텔에 체크인하거나 '백인 전용 장소'에 들어가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17]
블래키는 드러머 키스 홀리스의 회상에 따르면 "대처하기 위해 마약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19]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블래키와 그의 밴드는 여행과 공연 중에 마약(특히 헤로인)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7][22] 그러나, 블래키는 경력 초기에 시드 캣렛에게 공연 중 음주에 대해 벌을 받은 후 술을 끊었고,[17] 윈턴 마살리스의 영향으로 공연 중 마약 사용을 줄였다고 한다.[17] 블래키는 애연가였으며, 앨범 ''부하이 나의 기쁨'' 표지에 담배 연기 속에 등장하기도 한다.[23]
1990년 10월 16일, 맨해튼에서 71세 생일을 5일 앞두고 폐암으로 세인트 빈센트 병원과 의료 센터에서 사망했다. 1990년 10월 22일 아비시니안 침례 교회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과거 재즈 메신저스 멤버들이 추모 공연을 했으며, 재키 맥린, 레이 브라이언트, 디지 길레스피, 맥스 로치 등이 경의를 표했다.[24]
3. 유산
블래키와 그의 밴드들의 유산은 그들이 만들어낸 음악뿐만 아니라 여러 세대의 재즈 음악가들에게 제공한 기회이기도 하다.[15]
재즈 메신저스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의 하드 밥 운동과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네오밥 재즈 운동의 주요 인물들을 양성하고 영향을 미쳤으며, 두 운동 모두 재즈 메신저스가 스타일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블래키가 사망한 직후 드러머 신디 블랙먼은 "1970년대에 재즈가 사라질 위험에 처했을 때도 여전히 현장이 있었다. 아트가 그것을 계속 유지했다."라고 말했다.[15] 블래키는 재즈 명예의 전당(1982년), 그래미 명예의 전당(2001년)에 헌액되었고, 2005년에는 그래미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
일본의 비디오 게임 음악 작곡가 미츠다 야스노리는 ''크로노'' 및 ''제노'' 비디오 게임 사운드트랙을 작곡했으며, 그의 아버지의 잦은 연주로 인해 아트 블래키를 자신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준 재즈 음악가로 언급했다.[16]
4. 수상 경력
연도 | 수상 내역 |
---|---|
1981 | 다운비트 재즈 명예의 전당 독자 선정상[25] |
1982 | 재즈 명예의 전당 헌액[26] |
1984 | 그래미상 최우수 재즈 기악 연주, 그룹 부문, 앨범 New York Scene[27] |
1998 | 그래미 명예의 전당 헌액, 싱글 "Moanin'"[27] |
2001 | 그래미 명예의 전당 헌액, 앨범 'Moanin''[27] |
2005 | 그래미 평생 공로상 (사후 수상)[28] |
5. 음반 목록
- 블래키의 솔로 또는 준 솔로 앨범은 '''굵게''' 표시합니다.
- 앨범 날짜는 발매 연도가 아닌 녹음 연도를 기준으로 합니다.
순서 | 앨범명 | 연도 |
---|---|---|
1 | 뉴 사운즈 | 1952 |
2 | A Night at Birdland Vol. 1 | 1954 |
3 | A Night at Birdland Vol. 2 | 1954 |
4 | A Night at Birdland Vol. 3 | 1954 |
5 | 블래키 | 1954 |
6 | 카페 보헤미아에서, Vol. 1 | 1955 |
7 | 카페 보헤미아에서, Vol. 2 | 1955 |
8 | 더 재즈 메신저스 | 1956 |
9 | 오리지널리 | 1956 |
10 | 하드 밥 | 1956 |
11 | 리추얼 | 1957 |
12 | 드럼 스위트 | 1957 |
13 | 오지 인 리듬 | 1957 |
14 | 미드나잇 세션 | 1957 |
15 | 레너와 로웨의 셀렉션 | 1957 |
16 | 큐-밥 | 1957 |
17 | 델로니어스 몽크와 함께 | 1957 |
18 | 하드 드라이브 | 1957 |
19 | 빅 밴드 | 1957 |
20 | 모닌 | 1958 |
21 | 드럼스 어라운드 더 코너 | 1958 |
22 | 홀리데이 포 스킨스 | 1958 |
23 | 1958 – 파리 올림피아 | 1958 |
24 | 데 팜므 디스파라이트 | 1958 |
25 | 생 제르망 클럽 | 1958 |
26 | 재즈 코너 오브 더 월드에서 | 1959 |
27 | 위험한 관계 | 1959 |
28 | 아프리카인 | 1959 |
29 | 테아트르 데 샹젤리제 | 1959 |
30 | 파리 잼 세션 | 1959 |
31 | 더 빅 비트 | 1960 |
32 | 투니지아의 밤 | 1961 |
33 | 아트 블래키 앤 더 재즈 메신저스 | 1961 |
- ''"Moanin'"'' (모닌)
- ''"A Night in Tunisia"'' (튜니지아의 밤)
- ''"A Night at Birdland Vol.1"'' (버드랜드의 밤 Vol.1)
- ''"A Night at Birdland Vol.2"'' (버드랜드의 밤 Vol.2)
- ''"The Freedom Rider"'' (더 프리덤 라이더)
- ''"The Big Beat"'' (더 빅 비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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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Blakey Topic of New Book by Atlantic City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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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A DAY WITH ART BLAKEY 1961
スイングジャーナル社
1982-0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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