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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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영은 춘추 시대 제나라의 재상으로, 영공, 장공, 경공 3대를 섬기며 약 40년간 정치에 참여했다. 그는 작은 키와 못생긴 외모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변론과 외교 수완으로 제나라의 이익을 옹호했으며, '양두구육'과 같은 고사성어를 남겼다. 안영은 진나라에 대한 예견, 초나라와의 외교 일화, '두 복숭아로 세 장수를 죽이다' 등의 일화로 유명하며, 사후 '안평중'으로 불리며 존경받았다. 그의 언행을 담은 『안자춘추』는 전국 시대에 편찬되었으며, 사마천은 『사기』에서 그를 관중과 함께 묶어 칭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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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영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이름 | 안영 |
| 본명 | 안평중 |
| 출생 | 기원전 578년 |
| 출생지 | 고대 이위 (현대 산둥성 가오미시) |
| 사망 | 기원전 500년 |
| 사망지 | 산둥성 쯔보시 |
| 직업 | 제나라 재상 |
| 활동 시기 | 춘추 시대 |
| 주요 분야 | 철학자, 정치가, 외교관 |
| 주요 저서 | 《안자춘추》 |
| 이름 (한자 표기) | |
| 중국어 간체 | 晏婴 |
| 중국어 번체 | 晏嬰, 晏平仲 |
| 병음 | Yàn Yīng |
| 웨이드-자일스 표기법 | Yen Ying |
| 별칭 | 안자 |
| 안자 (간체) | 晏子 |
| 안자 (번체) | 晏子 |
| 안자 (병음) | Yàn zǐ |
| 안자 (웨이드-자일스) | Yen-tzu |
| 평중 (한자) | 平仲 |
| 평중 (병음) | Píng Zhòng |
| 평중 (웨이드-자일스) | P'ing Chung |
| 기타 | |
| 성씨 | 안 (성씨) |
2. 생애
안영은 제 영공 26년(기원전 556년)에 부친 안약이 세상을 떠나자, 그 뒤를 이어 제나라의 상대부 직위를 물려받았다. 이후 영공, 장공, 경공 3대를 섬기며 약 40여 년간 정치에 참여했다.[2] 그는 현재의 가오미, 산둥성, 중국에서 태어났으며, 제나라 재상이었던 안약의 아들이었다. 키가 작고 외모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재치와 뛰어난 언변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능력으로 다른 나라에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제나라의 이익을 대변했다.
기원전 500년경,[2] 안영은 병으로 죽음을 앞두고 집 기둥에 편지를 봉해 아내에게 아들이 장성하면 읽게 하라고 당부했다. 편지에는 "베와 비단을 다 쓰지 마라, 옷이 부족할 것이다. 가축을 다 쓰지 마라, 일손이 부족할 것이다. 어진 사람들을 다 쓰지 마라, 정부를 운영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나라의 재원을 다 쓰지 마라, 나라가 백성을 부양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사기』「관언열전」에 따르면, 안영은 키가 135cm 정도였으나,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큰 용기를 지녔다. 항상 사직(國家)을 먼저 생각하며 윗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간언을 하여 백성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또한 검소한 생활을 하여, 고기가 식탁에 오르는 일이 드물었고, 여우 모피로 만든 옷 한 벌을 30년 동안 입었다고 한다.[8] 이러한 검소한 생활은 “삼십년일호구(三十年一狐裘)”, “돈견두를엄부(豚肩豆を掩わず)”[9]라는 고사성어로 남아있다.
2. 1. 영공 시대: 양두구육 고사
영공 때, 도성의 여성 사이에 남장 풍습이 유행하여, 영공은 이를 중지시키라는 금령을 몇 번이나 내렸다. 애초에 이러한 유행은 영공의 비빈에게서 시작된 것이었으나, 영공은 금령을 자신의 비빈에게는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남장 풍습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자신의 금령이 지켜지지 않는 것을 괴이쩍게 여긴 영공은 근시였던 안영에게 이유를 묻자, 안영은 ‘군께서 하고 계신 것은 소의 머리를 간판에 걸고 말 고기를 파는 것과 같습니다. 궁정 안에서부터 금한다면 유행은 곧 사그라들 것입니다.’라고 간언하였다. 영공이 이 말을 옳게 여기고 그대로 시행하자, 도성 내에서 남장 풍습은 곧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13]. 여기서 ‘우두마육(牛頭馬肉)’이라는 말이 생겼고, 후에 변화하여 ‘양두구육(羊頭狗肉)’이라는 성어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2. 2. 장공 시대: 최저의 난과 불후의 명성
기원전 551년, 진나라의 경(卿, 대신급의 최고위 귀족)인 난영(欒盈)이 사개(士匄)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하여 제나라로 망명해왔다. 제 장공(莊公)은 난영을 기쁘게 맞아들이고 그에게 힘을 빌려주어 진나라의 내분을 이용해 이익을 보고자 하였다. 이에 안영은 크게 반대하였으나, 장공은 아랑곳않고 난영의 복수극을 도와 진나라를 공격하였다. 이후에도 안영은 여러 차례 장공에게 간언을 올리나 장공이 이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을 불쾌하게 여기자, 안영은 사직하고 시골로 내려가 밭을 갈면서 세월을 보냈다.[14]기원전 548년 5월, 장공은 자신의 사부이자 자신의 즉위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재상 최저(崔杼)의 미모의 처와 밀통하고 있었다. 이를 안 최저는 격노하여 자신의 집에 장공을 초대하여 주연을 베풀고 시해하였다. 이를 들은 안영은 급히 도성으로 달려왔다. 만약 장공을 애도하는 모습을 보이면 최저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요, 그렇다고 최저의 편을 들면 불충한 신하라는 악명을 뒤집어쓰게 될 판이었다. 이에 대해 안영은 ‘나 혼자만의 군주가 아니니 따라죽지 않을 것이오. 내게 죄가 없으니 도망가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군주가 죽었으니 그냥은 돌아가지 않을 것이오.’고 말하고, 최저의 집에 들어가 형식대로 정중히 곡례를 마치고 돌아갔다. 최저의 가신이 안영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인망이 높은 안영을 죽인다면 민심을 잃을까 두려워한 최저가 이를 말렸다.[14]
그 후, 최저는 경봉(慶封)과 함께 장공의 이복동생 공자 저구(杵臼, 제 경공(景公))를 군주로 옹립하고, 반대파를 억누르기 위하여 모든 신하를 제나라의 시조 태공(太公)을 모신 사당에 모아놓고 ‘최씨와 경씨의 편을 들지 않는 자는 천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맹세할 것을 요구하고, 맹세하지 않는 자는 그 자리에서 죽였다. 그러나 안영은 자신의 차례가 되자 ‘군주와 공실을 편들지 않고, 최씨와 경씨의 편을 드는 자는 천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맹세하였다. 최저는 이에 격분하여 안영을 죽이려 하였으나 좌우에서 가신이 ‘군주를 죽인 데다 명망 높은 안영마저 죽이면 민심이 등을 돌릴까 두렵습니다’라고 간하며 만류하자 안영을 죽이지 않고 돌려보냈다. 안영은 ‘큰 불인을 저질러놓고 작은 인을 베푸는 것이 옳은 일이겠는가’라고 말하고 유유히 돌아갔다.[15]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서 안영이 취한 자세는 그에게 불후의 명성을 안겨주었다.
최저와 경봉은 함께 정권을 장악했으나, 최저의 집안은 기원전 546년에 후계자 분쟁이 일어나 이에 개입한 경봉에 의해 몰락하였고, 그 이듬해 기원전 545년 진무우(陳無宇)와 포씨(鮑氏)·고씨(高氏)·난씨(欒氏) 등의 연합세력이 경봉을 공격하여 경씨 가문 역시 멸망하였다. 이 때 양 진영이 모두 경공의 신병을 확보하고 공궁을 손에 넣으려고 하였으나, 안영은 이를 사적인 싸움으로 여기고 양 측 어디에도 가담하지 않고 경공과 공궁을 지켜냈다.
2. 3. 경공 시대: 명재상으로 활약과 외교적 업적
기원전 540년 안영은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 진 평공을 알현하고, 진나라의 현신 숙향을 만났다. 이때 안영은 "전씨(진무우·전걸 부자)는 백성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인망이 두터우니, 언젠가 제나라는 전씨의 손에 들어갈지도 모르겠소"라고 예견했다.[16] 이 말은 약 150년 뒤에 실제로 일어났다. (전씨의 제나라)안영이 초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의 일화는 그의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잘 보여준다. 초 영왕은 키가 작은 안영을 업신여겨 창피를 주고자, 사람이 통과하는 문을 닫고 그 옆에 개 정도나 통과할 만한 작은 문을 만들었다. 안영은 "개 나라에 사신으로 간 자는 개 문으로 들어갑니다. 신은 지금 초나라에 왔으니, 이러한 문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맞섰다. 결국 영왕은 대문을 열었다.[17]
영왕은 안영을 알현하는 자리에 제나라 출신 도둑을 불러와 "제나라 사람은 이리도 훔치는 일을 좋아하는가?"라며 다시 한번 모욕하려 했다. 그러나 안영은 "귤은 회수 이남에서는 귤(橘)이지만, 회수 이북에서는 탱자(枳)가 됩니다. 이는 토지와 풍토의 차이입니다. 제나라에서는 도둑질을 하지 않았던 자가 초나라에 와서는 도둑질을 하였으니, 초나라의 풍토는 사람들에게 도둑질을 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라고 재치있게 응수했다. 안영의 답변에 영왕은 "성인과 더불어서는 장난치는 게 아니라더니, 그 말대로군. 역으로 과인이 창피를 당했구나."라고 안영을 인정했다.[18] 이 일화는 남귤북지(南橘北枳), 귤화위지(橘化爲枳)라는 고사성어를 탄생시켰다.
이처럼 안영은 포악한 행실로 악명이 높았던 초 영왕마저 감탄시킬 정도의 뛰어난 외교관이었으며, 귀국 후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2. 4. 죽음
嬰|잉중국어은 처에게 가법을 바꾸지 말도록 유언[19]하고 기원전 500년 사망하였다. 嬰|잉중국어이 중태에 빠졌을 때, 경공은 치수가에 나들이를 나가 있었다. 파발이 도착하여 嬰|잉중국어의 위독을 알리자, 경공은 마차에 올라서 급히 임치로 향했다. 경공은 마차의 속도가 느리다며 마부에게서 고삐를 뺏어 들고 스스로 말을 몰았다. 그러나 그것도 느리다고 느끼고 심지어는 마차에서 내려서 스스로 달려가다가 마차에 다시 타기를 세 번이나 반복하며 마침내 임치에 도착하였다.[20] 경공은 바로 嬰|잉중국어의 집에 들어가서는 嬰|잉중국어의 시신을 껴안고 통곡했다. 근신이 ‘(군께서 이렇듯 슬피 통곡하시는 것은) 예가 아닙니다.’라고 간하였으나, 경공은 ‘지금 예를 따질 겨를이 아니다. 내가 옛날 선생(嬰|잉중국어)과 공부(公阜)에 놀러 갔을 때, 하루에 세 번이나 내 과실을 책망해 주었다. 이제 누가 내 과실을 바로 잡아 주겠는가. 선생이 돌아가신 것은 곧 내가 망하는 것이다. 지금 어찌 예를 따지겠는가’라고 말하고 슬픔이 다 할때까지 곡하였다.[21]3. 평가
관중과 더불어 춘추 시대 전체를 대표하는 명재상으로 꼽힌다. 사마천은 《사기》 열전에서 관중과 안영을 함께 묶어 〈백이열전〉 바로 다음에 배치하였다.[8]
공자는 《논어》에서 "안평중은 사람들과의 교제에 뛰어났으니, 아무리 상대방과 오래 사귀어도 그를 공경하였다"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공자는 안영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했는데, 이는 공자가 제나라에서 벼슬하려다 안영에게 막힌 일화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맹자 또한 안영을 인정하지 않고, "패도로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내가 지향하는 바가 아니다"라고 말했다.[12]
사마천은 《사기》에서 안영이 제 장공의 시신 앞에서 예를 다하고 돌아간 것을 두고 '의를 보고 행하지 않음은 용기가 없는 것'이라는 말에 해당한다고 평가했다. 또한, 군주의 안색에 굴하지 않고 간언을 올리는 모습은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하고 물러나서는 허물을 고칠 것을 생각한다'는 자세라고 칭찬하며, 안영이 살아있다면 그의 마부가 되고 싶을 정도로 존경한다고 밝혔다.
안영은 키가 작았지만[8] 큰 용기를 지녔고, 항상 사직(國家)을 먼저 생각하며 윗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간언했다. 백성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군주 또한 그를 꺼렸다.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여 식탁에 고기가 오르는 일이 드물었고, 여우 모피 옷 한 벌을 30년 동안 입었다.[9]
안영의 일화 중에는 복숭아 두 개로 세 명의 용사를 죽게 만든 '이도살삼사(二桃殺三士)'가 유명하다. 안영은 교만해진 공손접, 전개강, 고야자를 제거하기 위해 복숭아 두 개를 주고 공이 큰 사람부터 먹으라고 했다. 공손접과 전개강이 먼저 복숭아를 가져가자 고야자가 자신의 공을 무시하냐며 따졌고, 이에 두 사람은 탐욕을 부끄러워하며 자결했다. 고야자 또한 두 사람이 죽었는데 혼자 살아남을 수 없다며 자결함으로써 안영의 계략은 성공했다. 이 일화는 제갈량이 즐겨 읊었다는 '양보음'이라는 시에 담겨 있다.
4. 일화
기원전 540년, 안영은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 진 평공을 알현하고, 진나라의 현신 숙향을 만나 여러가지 대화를 나누었다[16]. 이때 안영은 ‘전씨(진무우·전걸 부자)는 백성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인망이 두터우니, 언젠가 제나라는 전씨의 손에 들어갈지도 모르겠소’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약 150년 뒤에 실현되었다(전씨의 제나라).
초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초 영왕은 키가 작은 안영을 업신여겨 창피를 주고자 했다. 사람이 통과하는 문을 닫아걸고 그 옆에 개 정도나 통과할 만한 작은 문을 만들어놓고 안영에게 이를 지나가게 한 것이다. 이에 안영은 ‘개 나라에 사신으로 간 자는 개 문으로 들어갑니다. 신은 지금 초나라에 신으로 왔으니, 이러한 문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외쳤다. 이를 들은 영왕은 어쩔 수 없이 대문을 열어 주었다[17]. 그러나 영왕은 안영을 알현하는 자리에 제나라 출신의 도둑을 불러 와 ‘제나라 사람은 이리도 훔치는 일을 좋아하는가?’라 말하여 창피를 주었다. 안영은 ‘귤은 회수 이남에서는 귤이지만, 회수 이북에서는 탱자가 됩니다. 이는 토지와 풍토의 차이입니다. 제나라에서는 도둑질을 하지 않았던 자가 초나라에 와서는 도둑질을 하였으니, 초나라의 풍토는 사람들에게 도둑질을 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라고 되받아쳤다. 이 말에 영왕도 할말이 없어 크게 웃으며 ‘성인과 더불어서는 장난치는 게 아니라더니, 그 말대로군. 역으로 과인이 창피를 당했구나.’라고 안영을 인정했다고 한다[18]. 포악한 행실로 천하에 악명을 떨치던 영왕마저도 감탄시킨 이 일화로 안영은 귀국 후에 더욱 명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또한, 이 고사에서 남귤북지(南橘北枳), 귤화위지(橘化爲枳)라는 사자성어가 나왔다.
『사기』「관언열전」에 따르면, 안영은 키가 “6척(周나라의 1척은 22.5cm. 135cm)에 못 미쳤다.” 그러나 작은 체구에 큰 용기를 지니고, 항상 사직(國家)을 먼저 생각하며 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간언을 하였으며, 백성들에게 절대적인 인기를 누렸고, 군주 또한 그를 꺼렸다. 또한 검소함을 마음에 새겨, 고기가 식탁에 오르는 일이 드물었다. 또한 여우의 모피로 지은 단 한 벌의 옷을 30년 동안 입었다고 한다.[8] 그 생활은 검소함을 보여주는 고사성어 “삼십년일호구(三十年一狐裘)” “돈견두를엄부(豚肩豆を掩わず)”[9]로 후세에 남았다.
처음 섬긴 령공 시대, 도시 여성들 사이에서 남장이 유행했고, 령공은 이를 막고자 금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유행은 령공의 왕비로부터 시작되었고, 령공은 여전히 왕비에게 남장을 허락했기에 유행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러자 안영은 “폐하께서 하시는 일은 소의 머리를 간판으로 걸고 말고기를 파는 것과 같습니다. 궁궐에서 금지하면 곧 유행은 끝날 것입니다.”라고 간언했고, 그대로 하니 유행은 사그라들었다. 이 일이 “소머리 말고기”라는 말을 만들어냈고, 후에 변하여 고사성어 “양두구육”이 되었다.
진과의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 아직 싸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령공이 도망치려 하자, 안영은 필사적으로 이를 막으며 “폐하께서도 용기가 없으십니까? 아직 싸울 수 있는데 어찌 도망치시려 합니까?”라고 간했다. 그때 안영이 령공의 소매를 찢어버렸고, 령공은 그 무례함에 분노하여 칼을 뽑았지만, 안영은 “저를 베는 용기를 가지고 적과 싸우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령공은 이 말을 듣지 않고 “네놈을 베는 용기가 없어서 도망치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국도인 임치로 도망쳤다.
다음 장공 시대인 기원전 551년, 진나라의 경(대신급 귀족) 란영(란회자)가 사개(범선자)와의 권력 다툼에서 패하여 제나라로 망명해왔다. 장공은 그를 환영하며 복수를 돕고자 했고, 안영은 반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장공은 안영의 여러 간언을 귀찮게 여기기 시작했고, 그것을 감지한 안영은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들어가 밭을 갈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장공은 재상 최저의 아내와 간통하고 있었다. 분노한 최저는 기원전 548년 5월, 자택으로 장공을 유인하여 사병을 이용해 그를 죽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안영은 급히 달려갔다. 만약 장공을 애도하는 모습을 보이면 최저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고, 최저에게 아첨하면 불충의 신으로 악명을 얻을 것이었지만, 안영은 "군주가 사직을 위해 죽었다면 나도 죽겠습니다. 군주가 사직을 위해 망명한다면 나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군주의 사사로운 일이라면 신하 중에서도 직신이 아닌 이상 따를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형식적인 곡례만 치르고 돌아갔다. 최저의 부하들은 안영을 잡아 죽이려 했지만, 최저는 백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안영을 죽이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막았다.
이후 최저는 경봉과 함께 경공을 옹립하고, 반대파를 압박하기 위해 모두를 모아놓고 “최저와 경봉에게 붙지 않는 자는 죽일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안영은 이에 따르지 않고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고, 사직에 이로운 자에게 따르겠다.”라고 응수했다. 이러한 일련의 안영의 태도가 그의 이름을 불멸의 것으로 만들었다.
최저와 경봉은 정권을 장악했지만, 최저는 기원전 546년 경봉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경봉 또한 다음 해 기원전 545년, 진무우와 보씨(보숙의 자손), 고씨, 란씨에게 공격받아 멸망했다. 이때 양 진영 모두 경공을 얻어 정당성을 주장하려 했지만, 안영은 그들의 싸움을 사투로 여기며 경공을 끝까지 지켜냈다.
그 후, 경공의 신임을 얻어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며, 전씨(田氏) 일문의 사마양저(司馬穰苴)를 천거하였다.
안영은 세 명의 용사를 두 개의 복숭아로 죽인 일화로도 유명하다. 교만해져서 남의 말을 듣지 않게 된 공손접, 전개강, 고야자 세 명의 용장을 제거하고 싶었던 안영은 두 개의 복숭아를 준비하여 "공이 큰 자부터 먹어라"라고 말했다. 공손접과 전개강이 먼저 복숭아를 가져가자, 고야자는 "내게 공이 없다고 하는가?"라고 나무랐다. 공손접과 전개강은 자신의 탐욕을 부끄러워하며 자결했고, 고야자 또한 두 사람이 죽었는데 자신만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자결함으로써 안영의 계략은 성공했다. 그들의 성격을 잘 알고, 고의로 그들을 죄로 다스리지 않고 형벌을 받게 하지 않고(즉,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자결하게 한 이 일화는 "량부음"이라는 시에 읊어졌고, 그 시를 제갈량이 자주 읊조렸다고 한다.
5. 저서
전국 시대(기원전 475년~기원전 221년)에 편찬된 『안자춘추』에는 제나라의 세 명의 공에게 안영이 한 충고와 그의 삶과 시대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6] 사마천의 『사기』에는 그와 관중에 관한 장이 있다.
참조
[1]
서적
Foundations of Confucian Thought
2002
[2]
서적
Foundations of Confucian Thought
2002
[3]
고전
Chunqiu Zuo Zhuan
null # 년도 정보 없음
[4]
고전
Yanzi Chunqiu
null # 년도 정보 없음
[5]
고전
Yanzi Chunqiu
null # 년도 정보 없음
[6]
웹사이트
Chinaknowledge.de
http://www.numerals.[...]
2011-05-07
[7]
고전
史記
null # 년도 정보 없음
[8]
고전
礼記
null # 년도 정보 없음
[9]
고전
null # 제목 정보 부족
null # 년도 정보 없음
[10]
고전
null # 여러 고전을 나열
null # 년도 정보 없음
[11]
고전
晏子春秋
null # 년도 정보 없음
[12]
고전
孟子
null # 년도 정보 없음
[13]
고전
안자춘추
null # 년도 정보 없음
[14]
고전
안자춘추
null # 년도 정보 없음
[15]
고전
안자춘추
null # 년도 정보 없음
[16]
고전
안자춘추
null # 년도 정보 없음
[17]
고전
안자춘추
null # 년도 정보 없음
[18]
고전
안자춘추
null # 년도 정보 없음
[19]
고전
안자춘추
null # 년도 정보 없음
[20]
고전
안자춘추
null # 년도 정보 없음
[21]
고전
안자춘추
null # 년도 정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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