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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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앨레는 5세기 후반에 브리튼 섬에 상륙하여 서섹스 왕국을 건설한 앵글로색슨족의 전쟁 지도자로,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험버강 남쪽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한 앵글로색슨 왕 중 한 명으로 묘사되며, 브레트왈다(브리튼 통치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앨레에 대한 초기 기록은 731년 비드가 저술한 《영국 교회 연대기》와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나타나며, 앨레의 통치 시기는 앵글로색슨족의 팽창과 브리튼족의 저항이 공존하던 시기로 추정된다. 그는 앵글로색슨족의 초기 정착과 관련하여 지명 연구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앨레의 죽음과 매장, 그리고 그의 아들들에 대한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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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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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앨레 |
원어 이름 | , |
![]() | |
작위 | 브리타니아의 패자 (추정) |
통치 정보 | |
작위 (2) | [[파일:Sussex_shield.svg|가운데|30px]]남색슨인의 왕 |
재위 (2) | 기원후 477년경 – 기원후 514년경 |
전임자 (2) | (신설) |
후임자 (2) | 치사 (추정) |
가족 정보 | |
자녀 | 치사, 취멘(Cymen), 울렌칭(Wlencing) |
기타 정보 | |
출신 가문 | 불명 |
종교 | 게르만 종교 |
2. 역사적 배경
5세기 초, 로마 제국은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브리튼 섬은 350년 이상 지속된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이 시기는 영국 역사에서 기록이 매우 부족한 시기 중 하나로, 앨레의 삶과 존재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의견도 분분하다.[5][6]
로마 제국의 쇠퇴와 브리타니아, 앵글로색슨족의 침입과 정착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을 참고하라.
2. 1. 로마 제국의 쇠퇴와 브리타니아
5세기 초까지, 브리튼은 350년 이상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령 브리튼의 적들 중에는 스코틀랜드 중부와 북부의 픽트족과 아일랜드에서 온 약탈자들인 스코티족( 게일족)이 있었다. 또한 오늘날 독일 북부와 유틀란트 반도 남부에 살던 색슨족도 골칫거리였다.[7] 3세기 후반까지 잉글랜드 남부와 동부 해안에 대한 색슨족의 습격은 로마인들이 색슨 해안 요새를 건설하고, 이후 이 침략에 대한 방어를 지휘하는 색슨 해안 백작의 역할을 확립할 정도로 심각했다. 브리튼에 대한 로마의 통치는 5세기 초에 마침내 끝났는데, 로마령 브리튼의 종말을 알리는 날짜는 보통 410년으로, 이때 황제 호노리우스는 브리튼인들에게 스스로를 방어하라고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브리튼은 로마 제국에 대한 찬탈자들의 주장을 지원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군대를 빼앗겼고, 410년 이후 로마 군대는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7][8]2. 2. 앵글로색슨족의 침입과 정착
5세기 초까지 브리튼은 350년 이상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호노리우스 황제가 브리튼인들에게 스스로 방어하라고 촉구하는 서한을 보낸 410년은 로마령 브리튼의 종말로 여겨진다. 브리튼은 로마 제국에 대한 찬탈자들의 주장을 지원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군대를 빼앗겼고, 410년 이후 로마 군대는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7][8]이후 브리튼족 지도자 보르티게른은 북쪽에서 공격해오는 픽트족과 싸우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대륙 출신 용병을 초청했다고 한다. 헹기스트와 호르사로 기록된 지도자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오랜 기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앵글족, 색슨족, 유트족, 프리지아족 침략자들은 잉글랜드의 일부를 장악했지만, 위치가 알려지지 않은 몬스 바도니쿠스 전투에서 패배했다.[9][10]
브리튼인들은 잠시 숨을 돌렸고, 5세기 말부터 6세기 중반까지 약 40~50년 동안 평화가 지속되었다.[11][12] 길다스 시대 직후, 앵글로색슨족의 진격이 재개되었고, 6세기 후반까지 잉글랜드 남부 거의 전체가 대륙 침략자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13]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기록된 시대가 어느 정도 정확하다면, 앨레의 치세는 앵글로색슨족이 잉글랜드에서 세력을 확대해 나가는 시기에 해당한다. 앨레에 의한 정복 전쟁은 배던 산 전투 이전이며, 앨레와 다음 브레토왈다 시대까지의 공백은 배던 산 전투에서 앵글로색슨족의 세력 확대가 일시적으로 후퇴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앨레는 브리튼 섬에서 세력을 확대하던 앵글로색슨인의 군사 지도자였으며, 후대의 역사가들이 브레토왈다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64] 그의 군사 지배 지역은 햄프셔에서 템스강 계곡까지 뻗어 있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험버 남쪽 잉글랜드 전역까지 미치지는 않았음은 확실하다.[65]
3. 초기 사료
앨레에 대한 초기 기록은 비드가 731년에 저술한 《영국 교회 연대기》와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나타난다.
비드는 앨레를 험버강 남쪽 모든 지역에 대한 "임페리움"(지배권 혹은 상제권)을 행사한 앵글로색슨 왕 중 첫 번째로 언급하며, 그가 기독교인이 아니었다고 기록했다.[47][48]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알프레드 대왕 시대인 890년경 웨섹스에서 수집된 연대기 모음집으로, 477년부터 491년까지 앨레와 관련된 세 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 477년: 앨레와 그의 세 아들 시멘, 울렌싱, 키사가 세 척의 배를 타고 브리튼 땅에 와서 키멘의 해안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많은 웨일스인들을 죽이고 일부는 안드레데스 레아그(''Andredes leag'')라고 불리는 숲으로 도망치게 했다.
- 485년: 앨레는 머크레드의 시내 근처에서 웨일스인과 싸웠다.
- 491년: 앨레와 키사는 안드레데스 체스터(''Andredes cester'')를 포위하고 그곳에 살던 모든 사람을 죽였다. 심지어 브리튼 사람도 한 명도 남지 않았다.
이 기록들은 앨레 시대보다 약 400년 후에 작성되었기 때문에, 연대기 기록자들이 이전 기록이나 구전 자료를 참고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출처는 알 수 없다.[15] '브리튼'과 '웨일스'라는 용어는 서로 바꿔서 사용되었는데, '웨일스'는 '외국인'을 의미하는 색슨어이며, 당시의 모든 로마-브리튼 원주민에게 적용되었다.[16]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827년에 앨레를 8명의 "브레트왈다"(브리튼 통치자) 중 첫 번째로 다시 언급한다. "브레트왈다"의 실제 의미와 앨레의 권력 범위는 불분명하며,[58][59] 앨레와 웨섹스의 케울린 사이의 시간 간격은 앵글로색슨 지배의 중단 가능성을 시사한다.[60]
비드 이전의 자료에는 사우스색슨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앨레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서식스의 노드헬름 왕의 헌장(692년경)은 "사우스색슨의 왕"을 언급하며, 이는 앵글로색슨 역사의 중요한 문서 자료 중 하나이다.[27]
비잔틴 제국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잉글랜드 인구 이동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잉글랜드, 브리튼, 프리시안 등 브리튼 사람들이 프랑크 왕국으로 이주했다고 언급했다.[30] 이는 앵글로색슨인을 피해 아모리카로 이주하는 브리튼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이들은 정착지에 브르타뉴라는 이름을 붙였다.

3. 1. 베다의 《앵글랜드 교회사》
베다는 731년에 완성된 《영국 교회 연대기》에서 앨레를 "험버강 남쪽의 모든 주"에 대해 "임페리움"(imperium)을 행사한 앵글로색슨 왕으로 언급한다. 이 "임페리움"은 "지배권" 또는 "상제권"으로 번역될 수 있다.[47] 베다는 앨레가 기독교인이 아니었음을 명시하는데, 이는 앨레 이후의 왕을 "천국에 들어간 첫 번째 왕"이라고 언급한 것에서 알 수 있다.[48]3. 2. 《앵글로색슨 연대기》
비드가 731년에 쓴 《잉글랜드 백성 교회 역사》는 앨레를 험버강 남쪽의 모든 지역에 "임페리움(imperium)"을 행사한 앵글로색슨 왕 중 한 명으로 언급한다. "임페리움"은 보통 "종주권"으로 번역된다. 비드는 "임페리움"을 가진 일곱 명의 왕 목록을 제시하며, 앨레가 그 중 첫 번째이다.[14] 비드는 앨레가 기독교인이 아니었다고 언급한다.[3]알프레드 대왕 통치 기간인 890년경 웨섹스 왕국에서 수집된 연대기 모음집인 《앵글로색슨 연대기》에는 477년부터 491년까지 앨레에 대한 세 가지 항목이 있다.
- 477년: 앨레와 그의 세 아들 시멘, 울렌싱, 키사가 세 척의 배를 타고 브리튼 땅에 와서 키멘의 해안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많은 웨일스인들을 죽이고 일부는 안드레데스 레아그(''Andredes leag'')라고 불리는 숲으로 도망치게 했다.
- 485년: 앨레는 머크레드의 시내 근처에서 웨일스인과 싸웠다.
- 491년: 앨레와 키사는 안드레데스 체스터(''Andredes cester'')를 포위하고 그곳에 살던 모든 사람을 죽였다. 심지어 브리튼 사람도 한 명도 남지 않았다.
''연대기''는 이 사건들로부터 약 400년 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연대기 기록자들은 이전의 연대기뿐만 아니라 사가와 같은 구전 자료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러한 내용의 출처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15] '브리튼'과 '웨일스'라는 용어는 서로 바꿔서 사용되었는데, '웨일스'는 '외국인'을 의미하는 색슨 단어이며, 당시의 모든 로마-브리튼 원주민에게 적용되었다.[16]
''연대기''에 나오는 지명 세 곳은 다음과 같이 비정된다.
일부 학자들은 안드레데스 체스터가 헨리 오브 헌팅던이 묘사한 내용과 고고학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들어 다른 곳에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22] 윌리엄 캠던은 그의 저서 ''브리타니아''에서 안드레데스 체스터가 뉴웬덴일 수 있다고 제안한다.[23]
''연대기''는 앨레를 827년에 다시 한번 언급하는데, 여기서 그는 여덟 명의 "브레트왈다스" 또는 "브리튼 통치자" 중 첫 번째로 열거된다. 이 목록은 비드의 원래 일곱 명에 웨섹스의 에그버트를 더한 것이다.[24] "브레트왈다"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했는지, 앨레의 남부 잉글랜드에서의 실제 권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불분명하다.[25][26] 앨레와 비드의 목록에 있는 두 번째 왕인 웨섹스의 케울린 사이에는 긴 간격이 있는데, 이는 앵글로색슨의 지배가 어떤 방식으로든 중단되었던 시기를 나타낼 수 있다.[21]
4. 앨레의 통치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기록된 시대가 어느 정도 정확했다면, 앨레의 치세는 앵글로색슨족이 잉글랜드에서 세력을 확대해 나가는 시기에 해당한다. 앨레의 정복 전쟁은 배던 산 전투 이전의 것으로, 앨레와 다음 브레트왈다 시대까지의 공백은 배던 산 전투에서 앵글로색슨족의 세력 확대가 일시적으로 후퇴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가능하다. 앵글로색슨족의 세력 확대가 이 시대에 후퇴했다는 가설은, 역사가 프로코피오스가 6세기에 잉글랜드에서 프랑크 왕국으로 민족 이동이 있었다고 기록한 내용에서도 뒷받침된다.[61] 프로코피오스는 당시 브르타뉴 지방이 식민지화되었고, 이주민 중 일부는 콘월에서 왔으며, Dumnonée 및 Cornouaille라는 지역을 획득했다고 기록했다.[62] 이는 당시 어떤 요인이 앵글로색슨족의 잉글랜드 영토 확장을 방해하고 있었다는 간접적인 증거이다.[63]
앨레는 브리튼 섬에서 세력을 확대하던 앵글로색슨인의 군사 지도자였으며, 후대 역사가들이 그를 브레트왈다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64] 그의 군사 지배 지역은 햄프셔에서 템스강 계곡까지 뻗어 있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베다가 주장하는 것처럼 험버 남쪽 잉글랜드 전역까지 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65]
역사학자 가이 헐설은 앨레가 브레트왈다로서 6세기 후반의 웨섹스의 체울린 이전에 놓여 있다는 점을 근거로 앨레의 시대가 6세기 중반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연대기가 앨레를 5세기의 인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서섹스의 건국 신화를 켄트, 웨섹스의 건국 중간 시기에 놓으려는 편찬자의 의도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66]
4. 1. 사우스색슨 왕국의 건국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제시된 날짜가 반세기 이내로 정확하다면, 앨레의 통치는 앵글로색슨족의 팽창 중간 시기에 해당하며, 브리튼족의 최종 정복 이전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앨레의 전투가 몬스 바도니쿠스 이전이라는 가정과도 일치하는데, '브레트왈다' 계승에 50년 이상, 어쩌면 더 긴 공백이 있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즉, 브리튼족이 얻은 평화가 실제로 6세기 후반까지 유지되었다면, 앵글로색슨족 지도자가 그 기간 동안 잉글랜드에 대한 지배력을 갖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21] 앵글로색슨족의 진격에 일시적인 중단이 있었다는 생각은 프로코피우스가 6세기에 브리튼에서 프랑크 왕국으로 이주한 사건을 기록한 내용에서도 뒷받침된다. 프로코피우스의 기록은 아르모리카(현재 프랑스의 브르타뉴)에 대한 동시대의 식민지화와 일치한다. 이주민들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덤노니아(현대 콘월)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획득한 지역은 덤노네와 코르누아유로 알려졌다.[35] 당시 어떤 일이 앵글로색슨족이 유럽 대륙에서 브리튼으로 이동하는 일반적인 흐름을 방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36]앨레의 전투 날짜는 또한 당시 프랑크 왕국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알려진 내용과 합리적으로 일치한다. 클로비스 1세는 480년대에 프랑크족을 단일 왕국으로 통일했으며, 프랑크족이 잉글리시 해협 남쪽 해안을 따라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면서 색슨족 모험가들이 유럽 대륙 대신 잉글랜드로 향하게 되었을 수 있다.[36]
따라서, 5세기 후반에 유럽 대륙에서 건너와 현재 서섹스의 상당 부분을 정복한 앨레라는 이름의 역사적 왕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당시 브리튼에서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앵글로색슨족 집단의 연맹에서 지도자 역할을 했던 저명한 전쟁 지도자였을 수 있다. 이것이 베다가 그를 남부 브리튼에 대한 지배권을 가진 인물로 묘사한 명성의 기원일 수 있다.[37] 《연대기》에 기록된 전투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서섹스를 정복하는 과정과 일치하며, 14년 동안 지속될 정도로 브리튼족의 저항이 거셌음을 보여준다.[21] 그의 군사적 통제 지역은 햄프셔까지, 그리고 북쪽으로 상부 템스 계곡까지 확장되었을 수 있지만, 베다가 주장하는 것처럼 험버강 이남 잉글랜드 전역으로 확장되지는 않았다.[38]
역사학자 가이 헐설은 앨레가 베다의 원래 목록에서 6세기 후반의 세 명의 동시대 인물(웨섹스의 케울린, 켄트의 애설버트, 동앵글리아의 래드왈드)에 바로 앞서 등장한다는 점을 들어, 앨레가 6세기 중반에 활동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연대기》는 서섹스 왕국의 기원을 묘사하는 신화를 제공하기 위해 그의 시기를 한 세기 앞당겼으며, 이 신화는 서섹스를 켄트와 웨섹스 왕국의 기원 사이에 시간적, 지리적으로 위치시킨다.[39]
4. 2. 브레트왈다로서의 앨레
비드는 자신의 저서 ''잉글랜드 백성 교회 역사''에서 앨레를 험버강 남쪽의 모든 지역에 "''임페리움''"(일반적으로 "종주권"으로 번역됨)을 행사한 앵글로색슨 왕 중 한 명으로 언급하며, "''임페리움''"을 가진 일곱 왕 중 첫 번째로 앨레를 꼽았다.[14]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827년에 앨레를 여덟 명의 "브레트왈다스" (브리튼 통치자) 중 첫 번째로 열거하는데, 이 목록은 비드의 원래 일곱 명에 웨섹스의 에그버트를 더한 것이다.[24]"''브레트왈다''"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했는지, 그리고 앨레가 잉글랜드 남부에서 실제로 어느 정도의 권력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학문적 논쟁이 있다.[25][26] 앨레와 비드의 목록에 있는 두 번째 왕인 웨섹스의 케울린 사이에는 긴 간격이 있는데, 이는 앵글로색슨의 지배가 어떤 방식으로든 중단되었던 시기를 나타낼 수 있다.[21]
만약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제시된 날짜가 반세기 이내로 정확하다면, 앨레의 통치는 앵글로색슨족의 팽창 중간 시기에 해당하며, 브리튼족의 최종 정복 이전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앨레의 전투가 배던 산 전투 이전이라는 가정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브레트왈다'의 계승에 50년 이상, 어쩌면 더 긴 공백이 있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즉, 브리튼족이 얻은 평화가 실제로 6세기 후반까지 유지되었다면, 앵글로색슨족 지도자가 그 기간 동안 잉글랜드에 대한 지배력을 갖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21]
앨레는 당시 브리튼에서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앵글로색슨족 집단의 연맹에서 지도자 역할을 했던 저명한 전쟁 지도자였을 수 있다. 이것이 베다가 그를 남부 브리튼에 대한 지배권을 가진 인물로 묘사한 명성의 기원일 수 있다.[37] 그의 군사적 통제 지역은 햄프셔까지, 그리고 북쪽으로 상부 템스강 계곡까지 확장되었을 수 있지만, 베다가 주장하는 것처럼 험버강 이남 잉글랜드 전역으로 확장되지는 않았다.[38]
역사학자 Guy Halsall영어은 앨레가 베다의 원래 목록에서 6세기 후반의 세 명의 동시대 인물(웨섹스의 케울린, 켄트의 애설버트, 동앵글리아의 래드왈드)에 바로 앞서 등장한다는 점을 들어, 앨레가 6세기 중반에 활동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연대기''는 서섹스 왕국의 기원을 묘사하는 신화를 제공하기 위해 그의 시기를 한 세기 앞당겼으며, 이 신화는 서섹스를 켄트와 웨섹스 왕국의 기원 사이에 시간적, 지리적으로 위치시킨다.[39]
4. 3. 앵글로색슨족의 팽창과 쇠퇴
앨레의 통치는 앵글로색슨족의 팽창 중간 시기에 해당하며, 브리튼족의 최종 정복 이전으로 볼 수 있다. 앨레의 전투가 몬스 바도니쿠스 이전이라는 가정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브레트왈다'의 계승에 50년 이상, 어쩌면 더 긴 공백이 있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즉, 브리튼족이 얻은 평화가 실제로 6세기 후반까지 유지되었다면, 앵글로색슨족 지도자가 그 기간 동안 잉글랜드에 대한 지배력을 갖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21]앵글로색슨족의 진격에 일시적인 중단이 있었다는 생각은 프로코피우스가 6세기에 브리튼에서 프랑크 왕국으로 이주한 사건을 기록한 내용에서도 뒷받침된다.[21] 프로코피우스의 기록은 아르모리카(현재 프랑스의 브르타뉴)에 대한 동시대의 식민지화와 일치한다. 이주민들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덤노니아(현대 콘월)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획득한 지역은 덤노네와 코르누아유로 알려졌다.[35] 당시 어떤 일이 앵글로색슨족이 유럽 대륙에서 브리튼으로 이동하는 일반적인 흐름을 방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36]
앨레의 전투 날짜는 당시 프랑크 왕국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알려진 내용과 합리적으로 일치한다. 클로비스 1세는 480년대에 프랑크족을 단일 왕국으로 통일했으며, 프랑크족이 잉글리시 해협 남쪽 해안을 따라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면서 색슨족의 모험가들이 유럽 대륙 대신 잉글랜드로 향하게 되었을 수 있다.[36]
따라서, 5세기 후반에 유럽 대륙에서 건너와 현재 서섹스의 상당 부분을 정복한 앨레라는 이름의 역사적 왕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당시 브리튼에서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앵글로색슨족 집단의 연맹에서 지도자 역할을 했던 저명한 전쟁 지도자였을 수 있다. 이것이 베다가 그를 남부 브리튼에 대한 지배권을 가진 인물로 묘사한 명성의 기원일 수 있다.[37]
역사학자 가이 헐설은 앨레가 베다의 원래 목록에서 6세기 후반의 세 명의 동시대 인물(웨섹스의 케울린, 켄트의 애설버트, 동앵글리아의 래드왈드)에 바로 앞서 등장한다는 점을 들어, 앨레가 6세기 중반에 활동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서섹스 왕국의 기원을 묘사하는 신화를 제공하기 위해 그의 시기를 한 세기 앞당겼으며, 이 신화는 서섹스를 켄트와 웨섹스 왕국의 기원 사이에 시간적, 지리적으로 위치시킨다.[39]
5. 앨레의 죽음과 매장
앨레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연대기》에 남아있지 않다. 《연대기》는 675년 남작센 왕인 애텔왈흐가 세례를 받을 때까지 앨레나 그의 아들, 혹은 남작센스(서섹스)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36] 앨레와 그의 아들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67]
5. 1. 바돈 산 전투와의 관련성
앨레는 색슨족의 전쟁 지도자로서, 브리튼족이 색슨족의 확장을 저지한 바돈 산 전투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40] 5세기 앵글로색슨족 군사 지도자였던 앨레가 이 전투에서 최후를 맞이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68]만약 앨레가 자신의 왕국 내에서 사망했다면, 남작센족의 일반적인 매장 방식에 따라 무기와 장식품과 함께 하이다운 언덕에 묻혔을 가능성이 높다.[40] 하이다운 언덕은 서섹스 왕들의 전통적인 매장지이기 때문이다.[40][68]
5. 2. 하이다운 언덕 매장설
앨레가 자신의 왕국 내에서 사망했다면, 남작센족(서섹스족)의 일반적인 매장 방식에 따라 무기와 장식품과 함께 하이다운 언덕에 묻혔을 가능성이 높다.[40] 하이다운 언덕은 서섹스 왕들의 전통적인 매장지이다.[40]6. 앨레와 관련된 지명 연구
서식스 지역의 지명 분석은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기록된 서식스 식민지화 초기의 시기를 뒷받침한다. "-ing"로 끝나는 지명 외에도, 앨레의 아들들의 이름이 올드 잉글리시 지명에 보존된 것은 특이한 점이다.[32] 다른 기원 전설에 따르면, 창시자들의 이름은 올드 잉글리시가 아닌 브리튼 또는 라틴 기원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9세기 이전에 실제로 창립 이야기가 알려졌을 가능성이 높지만, 연대기 작가들은 새로운 정권에 공통된 기원을 제공하기 위해 그 이야기를 조작했다.[6][31][33][34]
6. 1. "-ing"으로 끝나는 지명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기록된 서식스 식민지화 초기 시기는 서식스 지역의 지명 분석 결과와 일치한다. 가장 강력한 증거는 워싱과 앵머링처럼 "-ing"으로 끝나는 지명에서 나타난다. 이들은 "-ingas"로 끝나는 이전 형태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헤이스팅스는 "Hæstingas"에서 유래하며, "Hæsta라는 사람의 추종자 또는 부하"를 의미할 수 있지만, 다른 학자들은 로마화된 지역이 "-ienses"에서 파생된 갈로-로마 기원의 이름을 가졌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31] 셀시 빌 서쪽에서 페벤시 동쪽까지, 영국에서 이러한 형태의 지명이 가장 밀집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서식스에는 이러한 형태의 지명이 총 45개 정도 있지만, 개인 이름은 이 장소와 관련이 없거나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21]6. 2. 앨레 아들들의 이름이 붙은 지명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앨레의 세 아들 키멘, 울렌싱, 키사는 각각 치체스터, 랜싱, 키멘쇼어에 자신들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32] 그러나 다른 기원 전설에서는 이들의 이름이 올드 잉글리시가 아닌 브리튼 또는 라틴어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창립 이야기는 9세기 이전에 실제로 알려졌을 가능성이 있지만, 연대기 작가들이 새로운 정권에 공통된 기원을 부여하기 위해 조작했을 수도 있다. 이 이야기는 브리튼인이 패배하고 작은 배를 타고 온 앵글로색슨족 침략자들에게 대체되었다고 주장하며, 19세기까지 널리 믿어졌으나 현재는 기원 신화로 간주된다.[6][31][33][34]7. 앨레에 대한 현대적 평가와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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