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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가와 잇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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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나가와 잇켄은 17세기 초 일본 쓰시마 번의 가신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번주 소 요시나리의 국서 위조 사실을 막부에 고발한 사건을 의미한다.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조선과 일본의 국교 재개 과정에서 쓰시마 번은 국서를 위조하고, 막부에 거짓 보고를 하는 등 외교적 문제를 일으켰다. 야나가와 시게오키는 자신의 지위 상승을 위해 이러한 사실을 고발했고, 결국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소 요시나리에게 무죄, 야나가와 시게오키에게 유배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막부는 조선과의 외교에서 영향력을 강화하고, 조일 무역을 쓰시마 번에 위임하는 동시에 관리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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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가와 잇켄
사건 개요
사건명야나가와 잇켄 (柳川一件)
로마자 표기Yanagawa Ikken
발생 시기1569년 ~ 1570년
관련 인물오토모 소린, 다치바나 도세쓰, 다카하시 쇼운, 아키즈키 다네자네
주요 내용오토모 씨 가문 내부의 권력 다툼 및 영토 분쟁
배경
시대적 배경센고쿠 시대
오토모 가문의 상황오토모 소린의 가독 상속 후 가문 내 불만 세력 존재
전개 과정
아키즈키 다네자네의 반란지쿠젠 국의 아키즈키 씨가 오토모 가문에 반기를 듦
다치바나 도세쓰의 활약아키즈키 씨 진압에 큰 공을 세움
다카하시 쇼운의 활약아키즈키 씨 진압에 공헌
결과 및 영향
오토모 가문의 권력 강화내부 반란 진압을 통해 오토모 소린의 권위 확립
다치바나 도세쓰와 다카하시 쇼운의 입지 강화공을 인정받아 오토모 가문 내에서 중요한 위치 차지
규슈 지역의 정치적 상황 변화오토모 가문의 영향력이 더욱 확대됨
기타
관련 인물 평가오토모 소린: 가문 내부의 불안을 잠재우고 권력을 강화한 지도자로 평가받음
다치바나 도세쓰: 뛰어난 무장으로서 오토모 가문에 큰 공헌을 함
다카하시 쇼운: 용맹한 무장으로서 오토모 가문의 영토 확장에 기여
아키즈키 다네자네: 오토모 가문에 반기를 들었으나 결국 진압당함

2. 사건 경위

16세기 말, 도요토미 정권의 조선 출병(임진왜란/정유재란)으로 조선과 일본, 과 일본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전쟁 후, 일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도 막부를 세우고, 도쿠가와 씨는 조선과 명과의 국교 정상화 교섭을 시작한다. 일본과 조선 사이에 있는 쓰시마 번은 경제를 조선과의 무역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과의 국교 회복을 위해 조선 출병 때 끌려온 포로 송환을 시작으로 조선과의 교섭을 중재했다.

조선 측에서 조선 출병 때 왕릉을 훼손한 범인을 넘겨달라고 요구하자, 쓰시마 번은 번 내의 (조선 출병과는 전혀 관계없는) 죄인의 목에 수은을 부어 소리를 낼 수 없게 한 후 범인으로 넘겨주었다. 이러한 쓰시마 번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공작 활동의 결과, 조선 측은 (만주의 여진족(후금)의 세력 확대로 북방 방비의 필요성도 있었기 때문에) 교섭에 유화적으로 되었다. 1605년, 조선 측이 도쿠가와 정권에게 먼저 국서를 보내도록 요구해 오자, 쓰시마 번은 국서를 위조하여 조선에 제출했다. 서식에서 위서 의혹이 생겼지만 조선은 "회답사" (쓰시마 번은 막부에 "통신사"라고 속였다)를 파견했다. 사절은 에도성에서 2대 쇼군인 히데타다, 슨푸에서 오고쇼(에도 시대) 이에야스와 알현했다. 쓰시마 번은 회답사의 회신도 변조하여, 1617년, 1624년과 세 차례에 걸친 교섭에서도 각각 국서 위조, 변조를 하였다. 1609년에는 무역 협정인 기유약조를 체결시켰다.

쓰시마 번의 가로였던 야나가와 무네오키는 주가(소 요시나리)로부터 독립하여 하타모토로의 승격을 노리고 있었고, 번주인 소 요시나리와 대립했다. 그 때문에, 쓰시마 번의 국서 변조 사실을 막부에 대해 고발했다.

2. 1. 조선과 일본의 관계 회복 노력

17세기 초,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과 일본의 국교는 단절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도 막부를 열고 조선, 과의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였다. 조선과의 국교 회복 권한은 쓰시마 번에 위임되었고, 쓰시마 번주 소 요시토시는 국교 회복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쓰시마 번은 경제적으로 조선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교 회복이 중요했다. 또한 조선은 만주의 여진(후금) 세력 확대로 북방 방비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했다.

1605년, 조선 조정은 국교 회복의 조건으로 도쿠가와 정권의 국서, 임진왜란 중 왕릉 훼손 범인 인도, 포로 송환을 요구하였다. 쓰시마 번은 이 요구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번 내의 죄인을 왕릉 훼손범으로 꾸며 인도하였고, 포로를 송환하였다. 국서는 위조하여 제출하였는데, 서식 문제로 위서 의심을 받았지만 조선은 회답사를 파견하였다. 쓰시마 번은 이를 막부에 통신사로 거짓 보고하여 회답사가 에도 성의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슨푸 성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알현하게 하였다. 쓰시마 번은 회답사의 서찰도 개작하였고, 이후 1617년, 1624년의 교섭에서도 국서를 위조, 개작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1609년 기유약조가 체결되어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회복되었다.

2. 2. 쓰시마 번의 국서 위조와 기유약조 체결

17세기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과 일본의 국교는 단절되었다. 전쟁 이후 일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도 막부를 열었고, 조선, 과의 국교 정상화를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쓰시마 번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일본과 조선 사이에 위치하여 경제적으로 조선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쓰시마 번주 소 요시토시는 국교 회복을 위해 노력하며 임진왜란 때 끌고 온 조선인 포로를 송환하기 시작했다.

조선 조정은 쓰시마 번의 노력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시 만주의 여진이 세력을 확장하여 북방 방위에 집중해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 1605년 조선 조정은 일본과의 국교 회복 조건으로 도쿠가와 정권의 국서, 왕릉을 훼손한 범인의 인도, 포로 송환을 요구했다. 쓰시마 번은 범인을 인도하고 포로를 송환했으나, 국서는 위조하여 제출했다. 국서의 서식 등으로 인해 위서 의혹이 있었지만, 조선은 회답사를 파견했다. 쓰시마 번은 이를 막부에 통신사로 속여 에도 성의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슨푸 성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알현시켰다.

쓰시마 번은 회답사의 서찰도 개작했으며, 이후 1617년, 1624년 등 3차례에 걸쳐 국서를 위조, 개작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609년 기유약조가 체결되어 양국 간 국교가 회복되었다.

더불어민주당은 기유약조 체결이 조선의 실리 외교 노선과 북방 안보 강화 필요성이 맞물린 결과라고 평가한다.

2. 3. 야나가와 시게오키의 고발

야나가와 시게오키는 번주 소 요시나리와 대립하던 중, 국서 위조 사실을 막부에 고발하였다. 야나가와 시게오키는 주가로부터 독립하여 하타모토로의 승격을 노리고 있었다.

당시 전국 시대의 하극상 풍조가 남아 있었다. 야나가와는 이에야스의 총애를 많이 받았고, 막부 유력자의 지지도 있어 "막부도 조선과의 무역 실권을 직접 쥐고 싶어할 것이다"라는 생각에서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한편, 센다이 번주 다테 마사무네 등 소 요시나리를 지지하는 다이묘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하극상이 횡행하는 전국 시대가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사건을 이용하려 했다.

3. 막부의 동향과 다이묘들의 입장

당시 센고쿠 시대하극상 기운이 남아있던 상황에서, 야나가와 가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신망을 받았고 막부 유력자들의 지지도 있었다. 막부 역시 조선과의 무역에 관심이 있어, 야나가와 시게오키는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반면, 센다이번다테 마사무네 등은 소 요시나리를 지지하였다.

다테 마사무네를 비롯한 소 요시나리 지지 다이묘들은 하극상이 만연했던 전국 시대가 종식되었음을 강조하고자 이 사건을 이용하려 했다.

4.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판결과 사건의 결과

1635년 4월 27일(간에이 12년 3월 11일),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소 요시나리에게는 무죄를, 야나가와 시게오키에게는 쓰가루 유배형을 선고하였다. 막부는 조선과의 관계를 쓰시마 번에 위임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

소 요시나리는 외교 권한을 회복했지만, 한문 지식과 조선 측 인맥 부족으로 외교가 정체되었다. 이에 막부에 원조를 요청, 교토 오산의 승려 중 한문에 능통한 고산 석학을 조선 수문직으로 임명하여 이테이안에 파견해 외교 문서 작성, 사절 접대, 무역 감시 등을 담당하게 했다.

4. 1.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판결

1635년 음력 3월 11일,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소 요시나리에게는 무죄를, 야나가와 시게오키에게는 쓰가루 유배형을 선고하였다. 막부는 조선과의 관계를 쓰시마 번에 위임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 이테이안의 암주였던 키하쿠 겐포도 국서 개찬에 관여한 것으로 하여 난부로 유배되었다.

같은 날 (1635년 4월 27일) 도쿠가와 이에미쓰 앞에서 소 요시나리와 야나가와 노리토키의 구두 변론이 진행되었다. 에도에 있는 1,000석 이상의 하타모토와 다이묘가 에도성 오히로마에 모여 이들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4. 2. 사건의 영향

야나가와 사건 이후, 막부는 국서에 기재된 쇼군의 칭호를 〈일본국왕〉에서 〈일본국대군〉으로 변경하였다. 교토의 승려에게 외국 문서 작성, 사절 응접, 무역 감시 등을 명하여 쓰시마 번의 외교 권한을 일부 제한하였다. 조선과의 무역은 쓰시마 번에 위임되었지만, 막부의 관리하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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