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쿱 알만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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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쿱 알만수르는 1184년부터 1199년까지 무와히드 왕조의 칼리프였다. 그는 아버지 아부 야쿱 유수프 1세가 암살되면서 왕위에 올랐으며, 즉위 후 반란을 진압하고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이베리아 반도 원정을 통해 알라르코스 전투에서 승리하여 "알만수르 빌라" 칭호를 얻었지만, 10년 휴전 협정으로 이베리아 반도를 완전히 제압할 기회를 놓쳤다. 그는 경제 발전에 힘쓰고 건축 사업을 추진했으며, 종교적으로는 자히리즘을 선호하여 이븐 루시드를 추방하기도 했다. 1199년 마라케시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무함마드 알나시르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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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쿱 알만수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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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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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아미르 알무미닌 |
이름 | 아부 유수프 야쿠브 이븐 유수프 이븐 압드 알무민 알만수르 |
다른 이름 | 야쿠브 알만수르 |
별칭 | 물라이 야쿠브 |
통치 | |
국가 | 무와히드 왕조 |
통치 기간 | 1184년 - 1199년 |
선임자 | 아부 야쿠브 유수프 |
후임자 | 무함마드 안나시르 |
개인 정보 | |
출생 | 1160년 |
사망일 | 1199년 1월 23일 |
사망 장소 | 마라케시 |
매장지 | 틴말 |
배우자 | 아메트 알라 빈트 아부 이삭 |
배우자 2 | 사피야 빈트 아부 압달라 벤 메르드니치 |
자녀 | 무함마드 안나시르 |
자녀 2 | 이드리스 알마문 |
종교 | 이슬람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아부 야쿠브 유수프 |
2. 생애
아부 야쿱 유수프의 아들 야쿱 알만수르는 1184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직후, 발레아레스 제도의 마요르카 섬에서 온 무라비트 왕조의 후예 가니야족의 반란에 직면했다. 1184년부터 1185년까지 가니야족의 압달라 이븐 가니야가 알제리의 베자이아, 알제 등을 점령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알만수르는 직접 원정하여 1188년에 이를 평정하였다. 이후 이프리키야에서 트리폴리(현 리비아 서부)까지 지배 영역을 넓혀 무와히드 왕조의 최대 판도를 실현했다.[3]
2. 1. 이베리아 반도 원정
아부 야쿱 유수프가 포르투갈에서 암살되면서 왕위에 오른 알만수르는 아버지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이베리아 반도로 원정을 떠났다.[3] 1190년 7월 13일, 토마르 공방전에서 포르투갈 템플 기사단의 중심지를 포위했지만 함락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1191년 남쪽으로 이동하여 파데르네 성과 알가르브 인근 지역을 재점령했다. 이 지역은 1182년부터 산초 1세가 이끄는 포르투갈 군대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그는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고 3천 명의 기독교인 포로를 데리고 마그레브로 돌아갔다.[3]알만수르가 아프리카로 돌아간 사이,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세력은 공세를 재개하여 실베스, 베라, 베자를 포함한 여러 무어인 도시들을 점령했다. 이에 알만수르는 다시 이베리아 반도로 돌아와 기독교 세력을 격파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50명씩 묶여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갔다.
1195년 7월 18일, 알라르코스 전투에서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 군대를 대파했다. 알만수르의 군대는 15만 명을 죽이고 막대한 돈, 귀중품 등을 빼앗았다고 전해진다. 이 승리에는 카스티야 군보다 우세한 병력과 알폰소 8세 가신의 배신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승리 이후 그는 "알만수르 빌라"("신에 의해 승리한 자")라는 칭호를 얻었다.[3]
알폰소 8세는 레온 왕 알폰소 9세와 나바라 왕 산초 7세와 동맹을 맺고 카스티야를 공격하여 기독교 국가들을 분열시켰고, 1196년 플라센시아를 빼앗고 톨레도를 약탈했다. 1197년 마드리드까지 진군하여 카스티야를 위협했다.
로마 교황 첼레스티노 3세의 중재로 기독교 국가들은 휴전하고, 교황에게서 파문된 알폰소 9세는 카스티야와 화해했다. 알만수르는 알폰소 8세와 10년 휴전 협정을 체결했지만, 이로 인해 이베리아 반도를 완전히 제압할 기회를 놓쳤다.
2. 2. 내치

알 만수르는 경제 발전에 힘써 관개 정비를 통한 농업 진흥, 광산 개발, 교역 확대를 통해 무와히드 왕조의 번영을 이끌었다.[9] 세비야 대모스크, 히랄다 탑 (후에 세비야 대성당의 일부로 전용), 라바트의 하산 탑 등 무와히드 왕조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들을 건설했다. 마라케시에 광대한 왕궁 및 궁궐 단지(카스바)를 건설했으며, 이는 이후 수세기 동안 도시의 정부 소재지가 되었다. 이 왕실 구역에는 카스바 모스크(또는 엘 만수리야 모스크)가 포함되었으며, 기념비적인 문인 바브 아그나우를 통해 접근할 수 있었다. 라바트에 더 큰 요새화된 수도 건설을 시작하고 세계에서 가장 큰 모스크를 건설하려 했으나, 그의 사후 중단되었다. 하산 탑을 비롯한 모스크의 기초 부분만 완성되었다.

바브 에르-루아를 비롯한 라바트의 역사적인 문 일부는 이 시기에 건설되었으며,[4][5][6] 알 만수르의 유명한 작품 중 하나는 모로코 최초의 병원인 마라케시 비마리스탄이었다. 알 만수르는 이곳을 호화로운 장식과 조각품으로 장식했으며, 정원과 수로가 딸려 있었고, 알모아드 왕조 정부가 개인적으로 자금을 지원했다. 이븐 루시드가 한동안 이곳에서 일했다고 한다.[7][8]
알 만수르는 철학자 이븐 루시드를 보호하고 총애했으나, 1197년 철학을 이단으로 금지하고 그를 추방했다. 이는 무와히드 왕조의 타우히드주의 이념을 강화하고, 이에 반하는 무슬림들을 억압하기 위한 조치였다. 비무슬림에 대한 탄압이 심하여, 많은 이들이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기독교 지역으로 피난했다.
3. 죽음
1198년 3월, 아들 무함마드 알나시르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모로코로 귀국했다.[12] 이듬해 1199년 마라케시에서 사망했다.[12] 만년에는 병으로 쇠약해져 명상에 잠기는 생활을 보냈다고 한다.[6] 그의 유해는 마라케시의 궁전에 임시로 매장되었다가, 이후 틴말에 있는 이전 알모하드 칼리프들과 이븐 투마르트의 묘소에 안장되었다.[6]
4.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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