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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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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국충은 당나라 현종 시대의 인물로, 양귀비의 사촌 오빠이다. 그는 권력을 잡기 위해 이임보를 몰아내고 재상이 되었으나, 안록산과의 갈등으로 안사의 난을 촉발하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마외역에서 군인들에게 살해당했으며, 그의 몰락과 함께 양귀비 또한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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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충
기본 정보
양국충
양국충
조(釗)
관직문부상서(文部尙書)
검교어사대부(檢校御史大夫)
집정(執政)
출생과 사망
출생719년
사망756년
사인살해
매장지미상
가문
성씨양(楊)
아버지양사욱(楊思勖)
주요 경력
시기당 현종 시기
주요 역할권신, 재상
기타
관련 인물양귀비
안록산

2. 생애

양소는 원래 군인이었으나 성격이 난폭했다. 그는 술과 도박을 즐겨 가문 사람들에게 멸시받았다. 30세 때 촉 지방 군에 들어가 군공으로 신도현위가 되었다.[4][5] 750년 사촌 누이동생 양옥환이 귀비가 되자, 현종은 그에게 '국충'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감찰어사(監察御史), 시어사(侍御史) 등의 관직을 주었다. 양국충은 이임보와 손잡고 구세력을 몰아내는 데 협조했으며, 현종은 이임보를 견제하기 위해 양국충을 신임했다.

752년 이임보가 죽자 양국충은 우상(右相)이 되어 40여 개 관직을 독점했다. 조정을 전횡하고 사당을 결성해 사리사욕을 채웠으며, 뇌물을 받고 사적인 친분으로 관리를 임명했다.

755년 안사의 난이 발발했다. 안녹산은 '양국충 토벌'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756년 6월 동관을 점령했다. 7월 13일 양국충은 현종에게 쓰촨성 지난으로 피난을 권유, 승인을 얻었으나 장안 백성들에게 알리지 않고 도망갔다. 7월 15일 산시성 싱핑 마외역(馬嵬驛)에 이르자 굶주린 군인들이 양국충에게 불만을 터뜨렸고, 군사들을 이끌던 진현례 장군은 양국충이 환란을 유발했다고 생각해 모반 계획을 이보국에게 알렸다. 결국 양국충은 이들에게 잡혀 사형당했다.

군인들의 소요가 가라앉지 않자, 현종은 양귀비에게 자결을 명했다. 조정 대신들은 현종에게 태자 이형에게 황위를 넘기라고 주청했고, 현종은 영무에서 태자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현종은 서촉 청두로 들어갔고, 이형은 당 숙종으로 즉위, 연호를 천보에서 지덕으로 바꿨다.

양국충과 그의 친척들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고, 그는 괵국부인과 저택을 연결해 친밀함을 과시했다. 양귀비의 자매들(괵국부인, 한국부인, 진국부인)과 양현, 양기는 현종과 양귀비를 따라 화청궁(온천)을 방문할 때마다 양국충의 저택에 모였으며, 다섯 가구는 각각 다른 색깔로 구별되어 화려함을 과시했다. 양국충은 검남 절도사로서 경호원과 깃발을 앞세우고 행렬을 이끌었다.

구당서는 동관에서의 양국충의 상황 오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2. 1. 출세 이전

양소는 원래 군인이었는데, 성격이 난폭하였다. 그는 술을 매우 즐겨 마시고 도박을 좋아했으며, 가문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다. 30세 때 촉 지방 군에 들어가 군공을 세워 신도현위에 임명되었다.[4][5]

750년 사촌 누이동생 양옥환이 귀비가 되자 현종은 양귀비의 오빠인 그에게 '국충'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감찰어사(監察御史), 시어사(侍御史)의 관직을 하사했다. 양국충은 초기에는 이림보(李林甫)와 손을 잡고 구세력을 몰아내는 데 협조하였으며, 현종은 승상 이림보를 견제하기 위해 양국충을 신임하게 되었다.

양조(楊釗)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가문은 포주영락현 출신으로, 한나라의 명신 양진(楊震)과 후연, 북위, 수나라의 관리들을 조상으로 둔다. 양조의 증조부 양왕(楊汪)은 수나라 시대의 중요한 관리였다. 그의 할아버지 양우량(楊友諒)은 당나라에서 현(縣)의 치현을 지냈고, 그의 아버지 양순(楊珣)은 무관으로 복무했다.[2] 그의 어머니 장씨는 무측천의 애인인 장역지와 장창종의 누이였다.[3]

익주의 비서감인 장관(張寬)은 그를 싫어하여 처음에는 승진을 거부하고 그를 채찍질하기도 했지만, 결국 신도현의 현령으로 임명되었다. 3년의 임기가 끝나고 귀향할 충분한 자금을 모으지 못해 이 지역의 부호인 선우중통(鮮于仲通)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또한 아버지의 사촌 양현염(楊玄琰)의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결국 양현염의 딸 중 한 명(훗날 괵국부인)과 불륜 관계를 맺었다. 양현염이 아들 없이 죽자, 양조는 양현염의 딸들이 허난부(河南府, 즉 뤄양)로 가서 삼촌 양현교(楊玄璬)와 함께 지낼 때까지 잠시 집안을 관리했다.

양귀비가 귀비로 책봉된 745년 무렵, 검남절도사 장구겸경이 장안에 있는 양귀비 일족과 결탁하려 했다. 선우중통의 소개로 그를 만나 용모가 뛰어나고 변설이 능숙하여 마음에 들어 많은 재화를 받았고, 장안으로 가는 사자가 되었다. 일족을 만나 재화를 뿌리고 과부가 된 괵국부인의 집에 들어갔다.

2. 2. 권력 장악 과정

양소는 본래 군인이었으나, 성격이 난폭하였다. 750년 사촌 누이동생 양옥환이 귀비가 되자, 현종은 그에게 '국충'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감찰어사(監察御史), 시어사(侍御史) 등의 관직을 주었다. 양국충은 초기에는 재상 이임보와 손을 잡고 구세력을 몰아내는 데 협조하였으며, 현종은 이임보를 견제하기 위해 양국충을 신임하였다.

752년 이임보가 죽자 양국충은 그를 대신해 우상(右相)이 되어 40여 개의 관직을 독점했다. 조정을 전횡하고 사당(私黨)을 결성하여 사리사욕을 채웠으며, 공공연히 뇌물을 받았다. 관리를 임명할 때도 사적인 친분 관계에 따라 임명했다.

양국충은 도박을 잘하는 것으로 현종에게 발탁되어 금오병조참군에 임명되었다.[1] 경리·계산 등을 틀린 적이 없어 현종은 그를 "호도지랑(好度支郎, 훌륭한 출납 관리)"이라 칭하며 감찰어사에 임명했다.[1] 이후 이임보·어사중승 왕홍과 결탁하여 함께 양심긍을 모살하고, 이임보의 수족으로서 구래 귀족과 태자 이형과 관계있는 자들을 배척했다.[1] 괵국부인을 이용하여 현종의 기분을 잘 파악하고, 적절하게 조율하여 유능하다고 판단되어, 도지원외랑에 임명되었고, 15개 이상의 사직(당대 재정 등을 담당하는 직책)을 겸했다.[1]

748년에는 급사중·어사중승에 임명되었으며, 현종으로부터 "국충(国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1] 749년에는 재정이 풍족해져 관창에 곡물과 비단이 넘쳐날 정도라고 상주하여 현종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1] 남은 곡물을 화폐로 바꾸고, 장안으로 보내는 세금을 포나 비단으로 할 것을 제안했다.[1] 750년에는 이임보의 측근이었던 길온이 붙어, 이임보의 전권을 견제했다.[1]

751년, 그가 추천하여 검남절도사가 된 선우중통이 남조에 대패하여 8만 명 중 6만 명의 병사를 잃었다.[2] 양국충은 패배를 숨기고, 더욱 토벌군을 일으켰다.[2] 선우중통에게 상소를 올리게 하고, 양국충 자신이 검남절도사를 겸했다.[2] 남조 역시 토번에 신종하며 대항했다.[2] 752년, 정적이 된 왕홍을 진희열과 함께 모반죄로 자결하게 만들었다.[2] 어사대부로 승진하고, 진희열, 고선지와 함께, 이임보에 대한 탄핵을 시작했다.[2] 이임보는 양국충을 남조 토벌을 위해 가게 하려 했지만, 병사하여 양국충은 중서령·문부상서가 되었다.[2]

당나라 정권을 장악하고, 40개가 넘는 사직을 겸임했으며, 자신에게 따르지 않는 관료는 지방으로 내보내고, 연공서열로 출세하게 하여 민심을 얻었으며, 인사를 모두 스스로 결정했다.[2] 753년에는, 사망한 이임보를 모반죄로 무고하고, 이임보의 친족이나 당을 이룬 자들은 유배되었다.[2] 이후, 자신의 권력 집중을 위해 노력하여, 천하의 특히 뛰어난 재능을 모았다.[2]

2. 3. 안사의 난과 몰락

755년 안사의 난이 발발했다.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킨 명분은 '양국충 토벌'이었다. 756년 6월에는 동관을 점령했고, 7월 13일 양국충은 당 현종에게 쓰촨성 지난으로 피난을 권유하여 승인을 얻었으며, 장안의 민중들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도망을 가는 비겁한 행동을 하였다. 7월 15일 현재의 산시성 싱핑인 마외역(馬嵬驛)에 이르자 굶주린 성난 군인들이 양국충을 향해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군사들을 이끌던 진현례 장군 또한 양국충이 이 환란을 유발했다고 생각하여 모반의 계획을 이보국(李輔國)에게 알렸다. 결국 양국충은 이들에게 잡혀 사형당하는 최후를 맞이하였고 만고의 역적으로 회자되었다.

군인들의 소요가 가라앉지 않자, 당 현종은 양귀비에게 자결을 명하게 되었다. 황제를 보필하던 조정 대신들은 현종에게 당장 태자 이형에게 황제의 보위를 넘기라는 주청을 올렸고, 현종은 영무에서 태자 이형에게 제위를 물려주어야 하였다. 현종 자신은 서촉의 청두로 들어갔고, 이형은 당 숙종으로 즉위하여 연호를 천보에서 지덕으로 바꿨다.

이때 양국충과 그의 친척들은 극도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는 괵국부인과 저택을 연결하여 그들의 친밀함을 공공연히 과시했다. 양귀비의 자매들(괵국부인, 한부인, 진부인)과 양현, 양기는 현종과 양귀비를 따라 화청궁(온천으로 유명)을 방문할 때마다 그들의 행렬은 양국충의 저택에 모였으며, 다섯 가구는 각각 다른 색깔로 구별되어 화려한 색상 과시를 연출했다. 양국충은 검남 절도사로서 자신의 경호원과 깃발을 앞세우고 행렬을 이끌었다.

754년 봄, 양국충은 현종에게 안녹산이 반역을 꾀하고 있으며, 장안으로 소환하면 틀림없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현종이 안녹산을 소환하자, 안녹산은 즉시 장안에 도착하여 양국충을 허위 혐의로 고발했다.

755년 봄, 안녹산이 32명의 비한(非漢) 장군으로 한(漢) 장군을 대체하게 해달라는 청원을 하자, 현종은 양국충과 위견소의 엄중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즉시 동의했다. 이는 임박한 반란의 징조였다.

755년 겨울, 안녹산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황실 관리들은 안녹산이 당시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 불안해했다. 양국충은 안녹산을 쉽게 진압할 수 있다고 믿었으나, 안녹산의 군대는 황하 북쪽 지역을 쉽게 누비며 756년 새해 무렵 뤄양을 점령했다.

양국충은 검남으로의 대피를 계획했고, 현종은 이에 동의했다. 7월 14일, 황실 행렬은 장안 시민에게 알리지 않고 장안을 떠났으며, 현종은 황족, 양국충, 위견소, 관리 위방진(魏方進), 장군 진현례(陳玄禮), 그리고 황제와 가까운 환관과 시녀의 수행을 받았다.

7월 15일, 현종의 행렬은 마외역(현대 시안, 산시)에 도착했다. 황실 경비병들은 식량을 공급받지 못해 양국충에게 분노했다. 진현례는 양국충이 이 재앙을 일으켰다고 믿고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으며, 이복국을 통해 이헌에게 계획을 보고했지만, 이헌은 주저하며 승인을 내리지 않았다. 한편, 현종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온 티베트 제국의 사신들이 양국충과 만나 식량을 공급받지 못했다고 불만을 토로하자, 황실 경비병들은 양국충이 티베트 사신들과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선언하고, 그와 그의 아들 양선(楊暄), 한부인과 진부인, 그리고 위방진을 죽였다. 위견소는 심한 부상을 입었으나 목숨을 건졌다. 병사들은 현종의 정자를 포위했고, 현종이 나와 그들을 위로하고 흩어지라고 명령한 후에도 흩어지지 않았다. 진현례는 현종에게 양귀비를 죽이라고 촉구했는데, 현종은 처음에는 거절했다. 위견소의 아들 위악(韋諤)과 고력사의 말을 듣고 현종은 양귀비를 불교 사당으로 데려가 강제 자살을 허락했다. 현종이 시신을 진현례와 황실 경비병 장군들에게 보여준 후, 경비병들은 흩어져 이동을 준비했다. 양국충의 아내 배유, 아들 양희(楊晞), 괵국부인, 그리고 괵국부인의 아들 배휘(裴徽)는 도망치려 했지만 도주 중에 살해되었다.

구당서는 동관에서의 양국충의 상황 오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마외역에 도착했을 때, 장병들의 피로와 기아는 극에 달해 전진을 거부했다. 양국충 주살을 결의한 용무대장군 진현례는, 이보국을 통해 태자 이형에게 결단을 촉구했지만, 허락을 받지 못했다. 진현례는 "천하가 붕괴되고 천자의 지위가 흔들리는데, 양국충이 백성들을 착취하여 조정과 백성들에게 원한을 사 이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닌가? 이를 주살하여 천하에 사죄하지 않으면, 사해의 원한과 분노를 막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마침, 양국충이 토번의 사신과 대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이 "양국충이 오랑캐와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라고 외치며 덮쳐, 서문 안으로 도망친 양국충은 그대로 살해당하고, 목은 창에 꿰였다.

어사대부 위방진은 "어째서 재상을 죽였는가"라며 병사들을 꾸짖다가 살해당했고, 양국충의 아들 양훤·한국부인(괵국부인, 양귀비의 언니)도 살해당했다. 병사들은 현종에게 양귀비의 처형도 요구했고, 고력사의 설득으로, 현종은 울며 겨자 먹기로 양귀비를 목매어 죽였다고 한다. 양국충의 나머지 아들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2. 4.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부인미상
부인배유(裴柔)기생 출신[4][5]
사촌 동생한국부인 양옥패
사촌 동생이자 정인괵국부인 양옥쟁양현염의 딸[4]
사촌 동생진국부인 양옥차
사촌 동생양귀비
아들양선(楊暄)마외역에서 살해됨
아들양희(楊晞)도주 중 살해됨[4][5]


3. 평가

양국충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그는 말솜씨는 좋았지만, 경솔하고 위엄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재상이 된 후에는 "나는 본래 가문도 낮고 명성을 쌓을 수도 없을 테니, 지금을 즐기는 것이 최고다"라고 말하며 사치를 일삼았고, 받은 비단이 三千萬匹|삼천만 필중국어에 달했다고 한다.

그의 사치스러운 생활은 여러 일화에서 드러난다. 아들 양훤의 과거 시험 부정 사건, 괵국부인과의 관계, 겨울철 '육진'이라 불리는 시녀들을 이용한 방풍, 궁궐에 버금가는 사향각 건축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양국충 일족은 봄나들이 때 화려한 누차(전망차)를 만들어 가무를 즐기며 행진하는 등 극도의 사치를 부렸다고 한다.

구당서는 양국충의 동관에서의 상황 오판을 비판하며, 그의 강요로 거슈한이 진군하면서 며칠 만에 황제가 도망치고 황실 정부가 붕괴되는 등 제국 전체에 큰 해악을 끼쳤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재앙은 모두 양국충에 의해 야기되었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양국충의 행적과 관련된 구체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 과거 시험 부정: 아들 양훤이 명경 시험에서 합격할 성적이 아니었음에도, 시험관 달해순을 꾸짖어 상위로 합격시켰다.
  • 괵국부인과의 관계: 괵국부인과는 출세한 후에도 사이가 좋았으며, 말을 타고 나란히 조정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 육진(肉陣): 겨울날 바람을 막기 위해 살찐 시녀들을 앞에 걷게 했다.
  • 사향각(麝香閣): 그의 자택에 지은 사향각은 궁궐의 침향정에도 웅장함에서 뒤지지 않았다.

4. 대중문화 속 양국충


  • 2000년 작품인 《양귀비전설》에서 증수황(Savio Tsang)이 연기했다.
  • 2017년 작품인 《대당영요》에서 두원(Du Yuan)이 연기했다.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0756-07-15
[2] 서적 New Book of Tang
[3] 서적 Tianbao Tales
[4] 서적 Old Book of Tang http://www.sidneyluo[...]
[5] 서적 New Book of Tang http://www.sidneyluo[...]
[6]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7] 서적 Zizhi Tongjian 0756-07-10
[8] 서적 Old Book of Tang 075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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