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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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열은 당나라 시기의 관리로, 측천무후, 당 중종, 당 예종, 당 현종 시대를 거치며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그는 과거 시험에서 1등을 차지하고, 삼교주영 편찬에 참여했으며, 측천무후에게 간언하다 유배되기도 했다. 이후 재상에 세 번 임명되었고, 삭방절도사를 지냈다. 장열은 문집을 남겼으며, 시호는 문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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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양 장씨 - 장화 (서진)
장화는 서진 시대의 문학가이자 정치가로, 오나라 정벌에 기여하여 광무후에 봉해졌으나 팔왕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당했으며 사후 복권되었다. - 667년 출생 - 구다라노코니키시 난텐
구다라노코니키시 난텐은 백제 위덕왕의 아들로, 일본 나라 시대의 관료이며, 지토 천황으로부터 물품을 받고 직대사, 비젠 수, 하리마 안찰사를 역임했으며, 종3위에 올라 공경이 되었다. - 당나라의 삭방군절도사 - 곽자의
곽자의는 당나라 중기의 장군으로, 안사의 난을 평정하고 토번과 위구르의 침략을 막아 당 왕조 부흥에 크게 기여했으며, 분양왕에 봉해지고 그의 삶은 부귀영화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 당나라의 삭방군절도사 - 혼감
혼감은 당나라 군인으로, 11세에 삭방군에 들어가 군공을 세우고 안사의 난과 주차의 난에서 활약하여 좌효위장군, 개부의동삼사, 태상경 등을 거쳐 염주성 수축 공로로 검교사도 겸 중서령이 되었으며, 799년에 사망했다.
장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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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성 | 장 (張) |
이름 | 열 (說) |
자 | 도열 (道열) |
시호 | 문정 (文貞) |
출생 | 667년 |
사망 | 730년 |
출생지 | 낙양 |
직업 | 역사가, 장군, 시인, 정치가 |
경력 | |
재임 기간 | 713년 - 720년 |
수상 | 중서령 (中書令) |
재상 | 당나라의 재상 |
가문 | |
아버지 | 장공근 (張公謹) |
할아버지 | 장흥성 (張興成) |
친척 | 장가정 |
기타 정보 | |
관련 장소 | 낙양 |
시대 | 당나라 |
2. 계보
장열의 아버지 장즐(張騭)은 서진(西晋) 사공 장화의 12대 손이다. 어머니는 풍씨(馮氏)로 훗날 장락현태군(長樂縣太君)에 봉해진다.[3]
2. 1. 선조
장열의 선조는 후한의 사공(司空) 장호, 서진(西晋)의 사공 장화로 알려져 있으며, 장화의 12대 손 장즐(張騭)이 장열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풍씨(馮氏)로 훗날 장락현태군(長樂縣太君)에 봉해진다. 장열의 원래 본적은 범양(范陽)으로 집안 대대로 하동(河東)에서 살다가 훗날 뤄양으로 옮겨왔다고 한다.장열은 663년 고종 치세에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당나라 동쪽 수도 뤄양 출신으로, 전한 시대의 명재상 장량의 후손이었으며, 조위, 진나라, 북위, 북주를 섬긴 관리들을 배출했다.[3]
장열은 젊은 시절 과거에 급제하여 동시 합격자들 중 수석을 차지했다. 그는 황태자의 학문을 보좌하는 관직에 임명되었다.[4]
2. 2. 본적
장열의 본적은 범양(范陽)으로, 집안 대대로 하동(河東)에서 살다가 훗날 뤄양으로 옮겨왔다.[3] 그의 집안은 당나라 동쪽 수도 뤄양 출신으로, 전한 시대의 명재상 장량의 후손이었으며, 조위, 진나라, 북위, 북주를 섬긴 관리들을 배출했다.[3]3. 생애
689년 장열은 현량하고 방정한 인물을 뽑는 시험에서 대책(對策)으로 1등을 하여 동궁교서(東宮校書)에 임명되었고, 봉각사인(鳳閣舍人)을 지내며 《삼교주영》(三教珠英)을 편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천자의 뜻을 거스른 일이 있어 흠주에 유배되었다가 중종 때 다시 조정으로 불려와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郎), 공부시랑(工部侍郎), 병부시랑(兵部侍郎)을 역임하고 홍문관박사(弘文館學士)가 더해졌다. 예종이 즉위하자 중서시랑(中書侍郎)이 되었다.
현종 개원(開元) 초에 중서령이 되었다가 5년 만에 악주자사로 내쳐졌는데, 719년에 유주도독(幽州都督)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태원에 주둔한 천병군절도대사(天兵軍節度大使)가 되었다. 721년 7월에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가 돌궐의 어느 부족을 유인해 살해한 사건으로 변경이 불안해지자, 병주장사(並州長史)로 있던 장열이 20기(騎)를 거느리고 가서 돌궐 부족들을 위무하였고, 돌아와 수령의 아장(牙帳)에 머물렀다. 722년에 삭방절도사로 임명되었다.
726년에 우문융, 이임보 등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탄핵을 받았으나 곧 사면되었다. 730년에 사망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었다.
장열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장의(張懿) | |
형 | 장광(張光) |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
본인 | 장열(張說) | |
아들 | 장균(張均) | 입법부 중간 직급 관료 |
아들 | 장기(張垍) | 현종의 딸 영청공주와 결혼 |
아들 | 장탁(張埱) |
3. 1. 측천무후 시대 (688년 ~ 705년)
689년에 현량(賢良)하고 방정한 인물을 뽑는데 장열이 대책(對策)으로 1등을 차지하여 동궁교서(東宮校書)에 임명되었고, 거듭 봉각사인(鳳閣舍人)을 지내며 《삼교주영》(三教珠英)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천자의 뜻을 거스른 일이 있어 흠주(欽州)에 유배되었다.[1]측천무후 (재위 690–705) 통치 기간 동안, 장열은 점차 승진하여 정부의 입법부(鳳閣, 펑거)의 하급 관리인 ''유 부쥐에''(右補闕)가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근무하면서 이교가 이끄는, 유교, 불교, 도교에 관한 다양한 시를 엮은 책인 ''삼교주영''(三教珠英)을 만드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이 책에는 측천무후의 애인인 장역지와 장창종도 참여하여 궁궐에 들어갈 수 있는 정당한 이유를 얻었다.[2] 700년, 측천무후가 낙양을 떠나 삼양궁(三陽宮)에서 여름과 가을을 보낼 때, 장열은 그녀에게 낙양으로 돌아오라는 간절한 청원을 올렸지만, 그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2] 그녀의 ''장안'' 시대(701-705) 초기에, ''삼교주영''이 완성되었고, 참여자들은 보상을 받았는데, 장열은 황실 사관인 ''유 시''(右史)가 되었고, 황실 시종으로도 임명되었으며, 황제 시험 응시자들의 점수를 매기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입법부의 중간 관리인 ''펑거 셔런''(鳳閣舍人)으로 승진했다.[2]
703년 9월,[4] 장이지·장창종 형제가 측천무후에게 위위안충이 모반을 꾀한다고 무고했다. 장열은 관직을 미끼로 거짓 증언을 요구받았지만, 고발은 허위였고 위위안충은 무죄라고 주장하여 흠주로 유배되었다.[4] 張說|장열중국어은 측천무후 앞에서 위위안충을 옹호하고 장창종이 위증을 교사했다고 비난했다. 측천무후는 장열에게 화가 났지만, 그 결과 위위안충과 고견을 사면하고 대신 장열을 영남 지역, 즉 진주(欽州, 대략 현대 친저우, 광둥)로 유배했다. 장열은 측천무후 통치 기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2]
3. 2. 당 중종 시대 (705년 ~ 710년)
중종이 복위한 705년 장열은 유배에서 풀려나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郎)에 임명되었다. 이후 공부시랑(工部侍郎)으로 승진하였다. 중종의 경룡(景龍) 연간(707년 ~ 710년)에 그의 어머니가 사망하자, 그는 공직을 떠나 3년 동안 상을 치렀는데, 유교 원칙에 따라야 했지만 관리들은 종종 이를 단축했다. 일반적인 단축 기간 동안 상을 치른 후, 중종은 그를 황문시랑(黃門侍郎), 즉 문하성(門下省)의 부수장으로 다시 임명하려 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3년 동안 상을 치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황제는 이를 허락했고, 이는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2] 3년상이 끝나자, 그는 다시 공부시랑으로 임명되었고, 그 후 병부시랑(兵部侍郎)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또한 홍문관(弘文館)의 학사로 임명되었다.[2]710년에는 중서시랑(中書侍郎) 겸 옹주장사(雍州長史)가 되었으며, 이중복의 반란을 다스렸다.[4]
중종 재위 기간 중, 장열은 무측천 시대부터 시작된, 겨울에 비(非) 한족(漢族)들이 탑에 올라 찬물을 뒤집어쓰는 것을 지켜보는 황제의 습관이 불경스럽다며 중단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중종은 이에 동의하여 그러한 의식을 지켜보는 것을 중단했다.[2]
3. 3. 당 예종 시대 (710년 ~ 712년)
710년, 중종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예종이 다시 왕위에 올랐다. 장열은 입법부의 부수장인 중서시랑(中書侍郎)이 되었고, 수도 옹주(雍州, 대략 현대의 시안, 산시 성)의 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다.[1] 그해 말, 중종의 아들 이중복이 낙양에서 예종에게 대항하려 했지만, 곧 패배하고 자살했다.[1] 예종은 이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된 수백 명을 심판하기 위해 장열을 낙양으로 보냈다.[1] 장열은 이중복의 주요 공모자인 장령균(張靈均)과 정은을 심문하여 피고인 대부분이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을 재빨리 파악하고 그들을 석방했다.[1] 장안으로 돌아온 예종은 장열에게 감사를 표했다.[1]당시 이융기는 태자였고, 장열과 저무량(褚無量)은 그의 학업을 돕는 관료로 복무하면서 그와 가까워졌다.[1]
711년, 장열은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직함을 받아 사실상 재상이 되었다.[1] 당시 조정에서는 태평공주와 이융기 파벌 사이에 많은 다툼이 있었다.[1] 궁궐 침입에 대한 무당의 예언이 있자, 장열은 이 소문이 이융기를 해치려는 누군가에 의해 퍼뜨려졌을 것이며, 소문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종이 이융기에게 권한을 이양하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동료 재상 요숭도 이에 동의했다.[1] 예종은 이융기에게 권한을 이양했다.[1] 그러나 그해 말, 정부 개편의 일환으로 장열은 다른 재상들과 함께 재상직에서 해임되었다.[1] 장열은 행정부(상서성, 尚書省)의 비서실장 중 한 명인 상서좌승(尚書左丞)이 되었고, 장안에서 떨어진 낙양에 관청을 받았다.[1]
3. 4. 당 현종 시대 (712년 ~ 730년)
712년, 예종이 아들 이융기(현종)에게 황위를 물려주면서 현종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현종 즉위 초, 장열은 중서령이 되었다가 5년 만에 악주자사로 좌천되었다.[12] 719년에는 유주도독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태원에 주둔한 천병군절도대사가 되었다.713년 당시, 태평공주는 퇴위한 황제(태상황)를 통해 국정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장열은 낙양에서 현종에게 칼을 보내[6] 결단력 있는 행동을 촉구했고, 이는 태평공주 세력을 제거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종은 장열을 불러 입법부의 수장인 중서령(中書令)으로 임명했다.
713년 새해 즈음, 현종은 장열을 상주(相州, 현대 한단, 허베이) 태수로 좌천시키고, 하북도(河北道, 대략 현대 허베이, 베이징, 톈진)의 감찰관으로 임명했다.
719년 장열은 유주도독(幽州都督)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태원에 주둔한 천병군절도대사(天兵軍節度大使)가 되었다.
721년 7월, 삭방절도사가 돌궐의 어느 부족을 유인해 살해한 사건으로 변경이 불안해지자, 장열은 20기(騎)를 거느리고 가서 돌궐 부족들을 위무하고 돌아와 수령의 아장(牙帳)에 머물렀다. 같은 해, 장열은 장안으로 소환되어 병부상서(兵部尚書)와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으로 실질적인 재상이 되었고, 황실 역사 편집을 계속 담당했다.
722년, 장열은 삭방 기지의 절도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당나라 북부 국경 방위군을 20만 명 감축하고, 징병 제도를 모집 기반 시스템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하여 당나라의 병력 공급을 회복시켰다.[8]
723년 말, 장열은 다시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그는 문학 연구소인 여정서원(麗正書院, 후일 집현원으로 개칭)을 설립하여 문학 연구를 장려했다.
726년, 장열은 우문융, 이임보 등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탄핵을 받았으나 곧 사면되었다.
729년, 장열은 행정부의 다른 수장인 좌승상(左丞相)으로 임명되었다.
730년, 장열은 병에 걸렸다.
4. 평가
장열은 전후로 재상을 세 번 맡았고, 문학과 관련된 임무를 30년 동안 맡았다. 역사에서는 그를 "기절(氣節)이 두텁고 성품은 진중하고 태연자약하였으며 글이 정묘하고 장려해 비지(碑志)를 널리 지었다"고 평가한다.[1] 《구당서》에는 장열이 올렸던 상소 세 편이 수록되어 있다.[1]
한편 장열은 성품이 급한 면이 있어서 같은 시기 재상이었던 요숭, 최식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1] 선천 2년(713년) 최식이 현종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당시 사람들은 모두 장열이 최식을 모함해 죽인 것이라고 하였다.[1] 또한 현종이 요숭을 재상으로 임명하려는 것을 알고 장열은 어사대부 조언소에게 요숭을 탄핵하게 하였으나, 현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 요숭이 재상으로 임명된 뒤에 장열은 상주자사로써 하북도안찰사로 나가 있게 되었는데, 얼마 안 가서 악주자사로 내쳐졌고, 식실봉 3백 호도 잃게 되었다.[1]
5. 저작
- 장설 문집
- 「당 옥천 대통 선사 비명 병서」[11]
참조
[1]
서적
Chinese lexicography: a history from 1046 BC to AD 1911
https://books.google[...]
[2]
문서
Zhang Yue's epitaph (《故开府仪同三司行尚书左丞相燕国公赠太师张公墓志铭》) by [[Zhang Jiuling]]
[3]
서적
New Book of Tang
[4]
문서
[5]
문서
[6]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7]
문서
[8]
서적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722
[9]
간행물
Zhang Juling and the Lychee
2012
[10]
서적
New Book of Tang
https://zh.wikisourc[...]
[11]
서적
禅の歴史
法蔵館
2001
[12]
서적
명황잡록
[13]
서적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한겨레출판
2007
[14]
서적
구당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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