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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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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무호는 1903년 대한제국이 영국에서 건조된 석탄 운반선을 구매하여 군함으로 개조한 것이다. 고종은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고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양무호 도입을 추진했으나, 낡은 선체와 과도한 운영비, 러일 전쟁 발발 등으로 인해 국방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 양무호는 대한제국 해군의 첫 근대식 군함이었지만, 러일 전쟁 중 일본 해군에 징발되어 위장 순양함으로 사용되다 1905년 퇴역했다. 이후 일본 상선으로 사용되다 1916년 침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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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무호 - [배(Ship)]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대한제국 군함, 양무'
함선 국가대한제국
함선 이름KIS 양무
건조 완료1881년
건조 비용1,100,000 원
건조 회사레이튼 딕슨 & 컴퍼니
진수1881년
취역1900년 4월 15일
퇴역1907년
최후러일 전쟁 중 일본 제국 해군에 의해 신병 실습용으로 사용됨.
함선 특징 (완성 당시)
함선 종류등대 지원선
배수량3,432 장톤 (정상 적재)
길이105 m
12.5 m
흘수4.2 m
7.3 m (만재)
동력1,750 shp (1,300 kW)
추진증기
속력13.5 노트
승선 인원72명
무장80mm 해군 포 4문
47mm 해군 포 4문
기타 정보
한글 이름양무호
한자 이름揚武號
웹사이트Ko Yang Moo-1888
웹사이트Kachidate Maru
관련 함선KIS 광제
선박 정보
명칭승립환(양무)
선박 종류화물선
선적[[File:Flag of the United Kingdom.svg|25px|border]] 영국

[[File:Flag of Korea (1899).svg|25px|border]] 대한제국
소유주Charente S. S. Co.
미쓰이물산 합명회사
대한제국
합자회사 하라다상행
야하마 상점 선박부
운항자[[File:Flag of the United Kingdom.svg|25px|border]] Charente S. S. Co.
[[File:Flag of Japan.svg|25px|border]] 미쓰이물산 합명회사
[[File:Flag of Korea (1899).svg|25px|border]] 대한제국

[[File:Flag of Japan.svg|25px|border]] 합자회사 하라다상행
야하마 상점 선박부
건조 회사레이튼 딕슨 (en:Raylton Dixon)
모항리버풀/머지사이드 주
나가사키 항/나가사키 현
오사카 항/오사카 부
니시노미야 항/효고 현
신호 부호HKLT
IMO 번호1521 (※선박 번호)
개명팔라스 → 승립환 → 양무 → 승립환
진수1888년 2월 13일
준공1888년 5월
최후1916년 9월 27일 해난 침몰
총톤수3,436톤
순톤수2,130톤
재화 중량3,850톤
등록 길이104.9m
수선간 길이102.41m
형폭12.5m
등록 깊이8.3m
주기관삼련성 왕복 기관 1기
추진기1축
출력263 NHP / 1,750 마력(실마력)
최대 속력13.5 노트
항해 속력10.5 노트
군함 정보
명칭양무
종류군함(대한제국군) / 가상 순양함 (일본 해군)
이미지[[파일:대한제국 광무호.jpg|300px]]
취역1903년 4월 1일 (대한제국군)
1904년 2월 27일 (일본 해군)
제3함대/사세보 진수부 소관
제적1909년 11월 (대한제국군)
1905년 6월 28일 (일본 해군)
장갑없음
병장12cm 포 4문 / 47mm 속사포 4문
비고러일 전쟁 시 요목
함선 정보
이름양무 揚武 / KIS Yangmu
함종코르벳
제작자레이튼 딕슨 & 컴퍼니
운영자대한제국 해군, 이후 일본제국 해군
진수1881년
취역1881년
배치1903년 4월 15일
퇴역1907년
최후일본 제국 해군에 의해 러일 전쟁 기간 해군 신병의 연습함으로 사용
가격1,100,000원
자매함없음
배수량3,432 장톤 / (3,487t) (보통 적재)
전장105m
선폭12.5m
흘수4.2m / 7.3 m (만재)
설치 동력1,750 shp (1,300 kW)
추진증기 기관
속력13.5 노트 (25 km/h; 15.5 mph)
정원72
무장4문 80mm 함포 / 2정 5mm 기관총

2. 배경

1866년 병인양요 이후 조선은 서양 군함에 맞서 근대식 군함 도입 필요성을 절감했다. 1881년 고종은 군비 강화책으로 공채를 모집하며 군함 구입을 준비했다. 1903년 조선 정부는 영국 딕슨사에서 건조되어 1894년 일본 미쓰이 물산이 25만 엔에 구입해 9년간 석탄 운반선으로 사용한 팰러스(Pallas)호를 구조 수리비 포함 총 55만 엔(110만)에 구입했다.

미쓰이 물산 회의록에는 "배가 커서 유지비가 많이 들어 석탄선으로 쓰기에는 채산성이 맞지 않아 대한제국 정부에 판매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10만은 당시 군 예산의 약 30%, 정부 총예산의 10%가 넘어 고종이 무리하게 구매를 강행했다고 볼 수 있다. 1903년 4월 15일 인천에 입항한 이 배는 대포(80mm) 4문과 기관총(5mm) 2정을 장착, 전투용으로 개조되었다.

1903년 9월 8일 신순성이 초대 함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양무호는 낡아서 운영비만 많이 들고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및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양무호는 국방에 실질적 도움이 되지 못했다.

2. 1. 조선의 근대 해군 건설 노력과 좌절

1866년 병인양요를 겪으면서 조선은 서양 군함의 위력에 맞서 근대식 군함 도입의 필요성을 절감했다.[27] 1881년 고종은 군비 강화책의 일환으로 근대식 군함 구입을 위해 공채 모집을 시작했다.[27]

1893년에는 근대 해군 창설을 위해 해군사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11] 그러나 1895년 청일전쟁 중 일본의 압력으로 해군 건설 노력은 중단되었다.[11]

2. 2. 양무호 도입 추진

1866년 병인양요를 시작으로 서양의 근대식 군함 앞에 조선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근대식 군함을 마련해야만 한다는 것이 당시 고종의 생각이었다. 양무호는 대한제국의 부국강병과 자주국방 정책의 상징이었다.

근대식 군함의 구입에 대한 준비는 1881년 군비강화책의 일환으로 공채를 모집하면서부터였다. 1903년 대한제국은 영국에서 건조되어 일본 미쓰이 물산이 사용하던 석탄 운반선 팰러스(Pallas)호를 구매했다. 원래 이 선박은 영국의 딕슨사에서 건조하여, 1894년에 일본 미쓰이 물산이 25만 엔에 구입해 9년간 사용한 배였다. 조선 정부는 구조 수리비를 포함하여 총 55만 엔(110만)에 구입하였다.[27]

미쓰이 물산은 현재 미쓰이 문고에 소장되어 있는 중역 회의록에 위와 같이 밝히고 있으며, "배가 워낙 커서 유지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석탄선으로 쓰기에는 채산성이 맞지 않아 대한제국 정부에 판매한다."는 내용으로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110만은 당시 군예산(약 400만)의 약 30%였고, 1903년 당시 대한제국 정부의 총 예산이 1000만이 약간 넘었던 것에 비하면 구매가가 정부 예산의 10%가 넘어 고종이 무리수를 두어 구매를 강행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해 4월 15일 인천에 입항한 이 석탄 운반선에 대포(80mm) 4문과 기관총(5mm) 2정을 장착하는 등 전투용으로 개조하여 군함으로 사용하였다.

1903년 9월 8일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신순성을 초대 함장으로 임명하여 이 양무호를 운행하게 하였다.[27]

3. 건조 및 제원

1888년 2월 13일, 영국 미들즈브러의 레일턴 딕슨(en) 조선소에서 건조되어 진수되었다.[4][3] 건조 당시 선명은 팰러스(Pallas)였다. 1894년 미쓰이 물산은 팰러스호를 250000JPY에 구매하여 "가치다테마루(勝立丸)"로 개명했다.[7] 1903년 4월 15일 대한제국이 이 배를 550000JPY에 구매하여 군함으로 개조하였고, 고종에 의해 "'''양무'''"로 개명되었다.[10][9] 탑재 병장은 함교와 함미루 양현에 12cm 단장포 각 1문(총 4문), 함교와 함미루 양현에 47mm 단장속사포 각 1문(총 4문)이었다.[6]

3. 1. 건조 과정

1888년 2월 13일, 영국 미들즈브러의 레일턴 딕슨(en) 조선소에서 건조되어 진수되었다.[4][3] 건조 당시 선명은 팰러스(Pallas)였다.

3. 2. 일본 상선 시절 (가치다테마루)

1894년, 일본 미쓰이 물산이 팰러스호를 250000JPY에 구매하여 "가치다테마루(勝立丸)"로 개명했다.[7] 이 배의 이름은 미이케 가치다테 광산에서 유래했다.[8] 미쓰이 물산은 가치다테마루를 기타큐슈항(모지항), 구치노쓰항, 홍콩, 싱가포르, 남양 제도 등지의 화물 항로에 투입했다.[9] 미쓰이선박의 『창업팔십년사』에 따르면 "가치다테마루"는 미쓰이 광산이 용선하여 주로 구치노쓰-홍콩 간 석탄 운송에 사용되었고, 1897년 9월에는 일본 육군 운수통신부의 관용선이 되었다.[8]

3. 3. 대한제국 군함 (양무호)

1881년 군비 강화책의 일환으로 근대식 군함 구입 준비를 시작했다. 1903년 일본 미쓰이 물산이 25만 엔에 구입해 9년간 사용한 석탄 운반선 팰러스(Pallas)호를 조선 정부가 구조 수리비를 포함, 총 55만 엔(대한제국 돈 110만 원)에 구입하였다.[27] 이는 군 예산의 약 30%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같은 해 4월 15일 인천에 입항한 이 석탄 운반선에 대포(80mm) 4문과 기관총(5mm) 2정을 장착하는 등 전투용으로 개조하여 군함으로 사용하였다.

1903년 4월 1일, 군함으로 개조 공사를 거쳐 대한제국에 매각되었고, 고종에 의해 "'''양무'''"로 개명되었다.[10][9] 1903년 9월 8일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신순성을 초대 함장으로 임명하였다.[27]

탑재 병장은 함교와 함미루 양현에 12cm 단장포 각 1문(총 4문), 함교와 함미루 양현에 47mm 단장속사포 각 1문(총 4문)이었다.[6] 매매 대금은 처음 55만 원이었으나,[14] 협상 끝에 20만 원으로 감액되었다. 하지만 대한제국 정부는 그 지불조차 어려워 미쓰이로부터 매달 5,000원을 고리로 빌려야 했다.[14]

『일본 외교 문서』 제36권 제1책에 수록된 "군함 구입 건" 문서에 따르면, 매각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03년 1월 25일 매매 계약 체결.[15] 가격은 55만 엔이며 3회 분할 상환이었고, 인도 장소는 인천이며 도착 후 1개월 이내에 1차 20만 엔을 지불하기로 되어 있었다.[15] 함선은 4월 16일에 도착했지만, 기한 내에 지불이 이루어지지 않아 7월 19일에야 미쓰이는 겨우 20만 엔만 지불받았다.[16]

4. 운용

1866년 병인양요를 시작으로 서양의 근대식 군함이 한반도를 공격해오자, 조선군은 속수무책이었다. 고종은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근대식 군함 도입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1881년 군비강화책의 일환으로 공채를 모집하면서 근대식 군함 구입 준비가 시작되었다. 1894년 일본 미쓰이 물산이 25만엔에 구입해 9년간 석탄 운반선으로 사용한 영국 딕슨사 건조의 팰러스(Pallas)호를 1903년 조선 정부가 구조 수리비를 포함하여 총 55만엔(대한제국 돈 110만원)에 구입하였다. 미쓰이 물산은 중역 회의록에서 "배가 워낙 커서 유지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석탄선으로 쓰기에는 채산성이 맞지 않아 대한제국 정부에 판매한다."고 밝혔다. 110만원은 당시 군 예산 400만원의 약 30%였고, 1903년 대한제국 정부 총 예산 1,000만원의 10%가 넘는 금액으로 고종이 무리하게 구매를 강행했다고 볼 수 있다. 4월 15일 인천에 입항한 이 석탄 운반선에 대포(80mm) 4문과 기관총(5mm) 2정을 장착하여 군함으로 개조하였다.

1903년 9월 8일 신순성이 초대 함장으로 임명되었으나[27] 양무호는 너무 낡아 운영비만 많이 들고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양무호는 대한제국 군대의 첫 번째 근대 군함이었다.[14]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식에서 각국 군함과 예포를 교환하기 위해 도입했다는 기록도 있다.[12]

탑재 병장은 함교와 함미루 양현에 12cm 단장포 각 1문(총 4문), 함교와 함미루 양현에 47mm 단장속사포 각 1문(총 4문)이었다.[6] 매매 대금은 처음 55만 이었으나, 너무 고액이라는 이유로 많은 국민들의 비판을 받았다.[14]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당시 양무호는 인천항에 정박 중이었으나, 특별한 군사 행동은 없었다.[19] 1904년 2월, 일본 해군은 양무호를 징발하여 위장 순양함 "요부"로 사용하였다. 양무호(요부)는 일본 해군 제3함대에 편입되어 해주, 산둥반도 등지에서 경계, 보급, 소해부대 지원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20] 1905년 선체 노후화로 인해 군함으로서의 사용이 부적합하다고 판정되어 해역되었다.[22]

러일 전쟁 이후 양무호는 대한제국에 반환되었다. 1909년 11월, 민간 회사인 하라다 상행(原田商行)에 42000KRW에 매각되어[14] "쇼리쓰마루(勝立丸)"라는 이름으로 일본 상선으로 등록되었다.[24] 1913년, 팔마 상점(八馬商店)으로 매각되었다.

4. 1. 대한제국 해군

1866년 병인양요를 시작으로 서양의 근대식 군함이 한반도를 공격해오자, 조선군은 속수무책이었다. 고종은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근대식 군함 도입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양무호는 대한제국의 부국강병과 자주국방 정책의 상징이었다.

1881년 군비강화책의 일환으로 공채를 모집하면서 근대식 군함 구입 준비가 시작되었다. 1894년 일본 미쓰이 물산이 25만엔에 구입해 9년간 석탄 운반선으로 사용한 영국 딕슨사 건조의 팰러스(Pallas)호를 1903년 조선 정부가 구조 수리비를 포함하여 총 55만엔(대한제국 돈 110만원)에 구입하였다.

미쓰이 물산은 중역 회의록에서 "배가 워낙 커서 유지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석탄선으로 쓰기에는 채산성이 맞지 않아 대한제국 정부에 판매한다."고 밝혔다. 110만원은 당시 군 예산 400만원의 약 30%였고, 1903년 대한제국 정부 총 예산 1,000만원의 10%가 넘는 금액으로 고종이 무리하게 구매를 강행했다고 볼 수 있다. 4월 15일 인천에 입항한 이 석탄 운반선에 대포(80mm) 4문과 기관총(5mm) 2정을 장착하여 군함으로 개조하였다.

1903년 9월 8일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신순성이 초대 함장으로 임명되었다.[27] 그러나 양무호는 너무 낡아 운영비만 많이 들고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1903년(明治 36년) 4월 1일, 군함으로 개조 공사를 거쳐 대한제국에 매각되었고, 고종에 의해 "'''양무'''"로 개명되었다.[10][9] 초대 함장은 일본 도쿄상선학교를 졸업한 제1기 관비 유학생 신순성이었다.

1893년 근대 해군 창설을 위해 해군사관학교를 개교했으나, 1895년 청일전쟁 중 일본에 의해 중단되었다.[11] 양무호는 대한제국 군대의 첫 번째 근대 군함이었다.[14] 일본 신문 기자 시오자키 세이게츠(塩崎誓月)에 따르면, 양무호 도입 목적은 1903년 예정된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식에서 각국 군함과 예포를 교환하기 위한 것이었다.[12] 당시 국방장관은 고종에게 "대한제국은 삼면이 바다인데 군함이 한 척도 없어 이웃 나라에 부끄럽다"고 호소하여 예산을 승인받았으나, 예포 발사는 실행되지 못했다.[13]

탑재 병장은 함교와 함미루 양현에 12cm 단장포 각 1문(총 4문), 함교와 함미루 양현에 47mm 단장속사포 각 1문(총 4문)이었다.[6] 매매 대금은 처음 55만 이었으나, 너무 고액이라는 이유로 많은 국민들의 비판을 받았다.[14] 협상 끝에 20만 원으로 감액되었지만, 대한제국 정부는 그 지불조차 어려워 미쓰이로부터 매달 5000KRW을 고리로 빌려야 했다.[14]

『일본 외교 문서』 제36권 제1책에 수록된 "군함 구입 건" 문서에 따르면, 매각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03년 1월 25일 매매 계약 체결.[15] 가격은 55만 엔이며 3회 분할 상환이었고, 인도 장소는 인천이며 도착 후 1개월 이내에 1차 20만 엔을 지불하기로 되어 있었다.[15] 함선은 4월 16일에 도착했지만, 기한 내에 지불이 이루어지지 않아 7월 19일에야 미쓰이는 겨우 20만 엔만 지불받았다.[16] 미쓰이 선박의 『창업 팔십년사』에는 8월 인도 또는 8월 31일 매각으로 기록되어 있다.[17]

4. 2. 러일 전쟁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당시 양무호는 인천항에 정박 중이었으나, 특별한 군사 행동은 없었다.[19] 1904년 2월, 일본 해군은 양무호를 징발하여 위장 순양함 "요부"로 사용하였다. 양무호(요부)는 일본 해군 제3함대에 편입되어 해주, 산둥반도 등지에서 경계, 보급, 소해부대 지원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20] 1905년 선체 노후화로 인해 군함으로서의 사용이 부적합하다고 판정되어 해역되었다.[22]

4. 3. 러일 전쟁 이후

러일 전쟁 이후 양무호는 대한제국에 반환되었다. 1909년 11월, 민간 회사인 하라다 상행(原田商行)에 42000KRW에 매각되어[14] "쇼리쓰마루(勝立丸)"라는 이름으로 일본 상선으로 등록되었다.[24] 1913년, 팔마 상점(八馬商店)으로 매각되었다. 당시 팔마 상점 선박부는 양무호를 포함하여 중고 상선 11척을 잇달아 구입하며 선대를 증강하고 있었다.

5. 침몰

1916년 9월, 쇼리쓰마루(勝立丸)는 해난사고로 침몰했다. 쇼리쓰마루는 중국 한양철장(漢陽鐵廠)에서 선철 3,900톤을 싣고 9월 17일에 출항하여 와카마쓰항(若松港)과 오사카항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22일 오전 3시경부터 강풍이 불고 기상이 악화되면서 선체가 손상되어 침수되었고,[25] 23일에는 보일러 화구가 물에 잠겼다.[25] 배수 작업을 계속했으나 침수는 계속되었고, 27일 오전 9시에 제주도 남서쪽 약 64.37km 지점에서 침몰했다.[25] 승무원들은 배를 버리고 간주마루(干珠丸)에 의해 구조되었다.[25]

6. 함장

대한제국 해군에서는 신순성1903년 4월 1일부터 1904년 2월 27일까지 함장을 맡았다. 일본 해군에서는 1904년 2월 27일부터 우시키 코시로(宇敷甲子郎) 중좌가 양무호의 함장을 맡았다.[26]

6. 1. 대한제국 해군

1903년 4월 1일, 군함으로 개조 공사를 거친 본 선박은 대한제국에 매각되었고, 고종에 의해 "'''양무'''"로 개명되었다.[10][9] 초대 함장은 일본 도쿄상선학교를 졸업한 제1기 관비 유학생 신순성이었다.

대한제국은 그 이전인 1893년에 근대 해군 창설을 시도하여 해군사관학교를 개교하는 등 노력했으나, 청일전쟁 중이던 1895년에 일본에 의해 중단을 강요당했다.[11] 따라서 본 선박은 대한제국 군대의 첫 번째 근대 군함이 되었다.[14] 일본 신문 기자 시오자키 세이게츠(塩崎誓月)에 따르면, “양무” 도입의 목적은 1903년에 예정된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식전에서 각국 군함과 예포를 교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12] 당시 국방장관은 고종에게 "대한제국은 삼면이 바다인데 군함이 한 척도 없어 이웃 나라에 부끄럽다"고 호소하여 예산을 승인받았으나, 그 예포조차 발사하지 못하고 끝났다.[13]

탑재 병장은 함교와 함미루 양현에 12cm 단장포 각 1문(총 4문), 함교와 함미루 양현에 47mm 단장속사포 각 1문(총 4문)이었다.[6] Kang (2008)에 따르면, 매매 대금은 처음 550000KRW이었으나, 너무 고액이라는 이유로 많은 국민들의 비판을 받았다.[14] 협상 끝에 200000KRW으로 감액되었지만, 대한제국 정부는 그 지불조차 어려워 미쓰이(三井)로부터 매달 5000KRW을 고리로 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14]

『일본 외교 문서』 제36권 제1책에 수록된 "군함 구입 건" 문서에 따르면, 매각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03년 1월 25일 매매 계약 체결.[15] 가격은 55만 엔이며 3회 분할 상환이었고, 인도 장소는 인천이며 도착 후 1개월 이내에 1차 20만 엔을 지불하기로 되어 있었다.[15] 함선은 4월 16일에 도착했지만, 기한 내에 지불이 이루어지지 않아 7월 19일에야 미쓰이는 겨우 20만 엔만 지불받았다.[16] 미쓰이 선박의 『창업 팔십년사』에는 8월 인도 또는 8월 31일 매각으로 기록되어 있다.[17] 다카하시 시게오(高橋茂夫)는 그 무렵 남아 있던 보관료(함선은 미쓰이가 보관하고 있었다) 등의 문제가 해결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18]

대한제국 해군 함장
신순성 (초대 함장): 1903년 4월 1일 - (후, 광제호 함장)


6. 2. 일본 해군

1904년 2월 27일부터 우시키 코시로(宇敷甲子郎) 중좌가 양무호의 함장을 맡았다.[26]

7. 평가 및 의의

양무호는 대한제국 최초의 근대식 군함으로서, 병인양요 이후 서양 열강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 자주국방을 이루고자 했던 고종의 의지를 상징한다.[27]

1881년 군비강화책의 일환으로 근대식 군함 구입 준비가 시작되었으나, 실제 도입은 1903년에 이루어졌다. 양무호는 원래 영국에서 건조되어 일본 미쓰이 물산이 석탄 운반선으로 사용하던 팰러스(Pallas)호를 1903년에 대한제국 정부가 구입한 것이다. 미쓰이 물산 측 기록에 따르면, 이 배는 유지비가 많이 들어 채산성이 맞지 않아 대한제국에 판매한 것으로 나타난다.[27]

양무호 구입 가격은 55만 엔(대한제국 돈 110만 원)으로, 당시 대한제국 군 예산의 약 30%, 정부 총 예산의 10%가 넘는 거액이었다. 이러한 무리한 구매 결정은 고종의 자주국방 의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 대한제국의 재정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한계점도 드러낸다.[27]

Kang (2008)에 따르면, 매매 대금은 국민들의 비판을 받아 20만 원으로 감액되었으나, 이마저도 지불이 어려워 미쓰이로부터 매달 5,000원을 빌려야 했다.[14] 『일본 외교 문서』에 따르면, 1903년 1월 매매 계약 체결 후 4월에 함선이 도착했지만, 대금 지불이 지연되어 7월에야 20만 엔이 지불되었다.[15][16]

양무호는 80mm 대포 4문과 5mm 기관총 2정(또는 12cm 단장포 4문, 47mm 단장속사포 4문[6])으로 무장하였고, 신순성이 초대 함장으로 임명되었다.[27] 그러나 낡은 선박이었기 때문에 운영비만 많이 들고 실제 국방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27] 1904년 러일 전쟁 발발과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인해 양무호는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대한제국의 국권 침탈을 막지 못했다.

일본 신문 기자 시오자키 세이게츠(塩崎誓月)는 양무호 도입 목적이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식에서 각국 군함과 예포를 교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12] 그러나 예포조차 발사하지 못하고 끝나, 양무호 도입은 국제 정세에 대한 대한제국의 제한적인 대응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13]

참조

[1] 웹사이트 Ko Yang Moo-1888 http://oceania.pbwor[...]
[2] 웹사이트 Kachidate Maru http://www.wrecksite[...]
[3] 간행물 明治三十六年 日本船名録 帝国海事協会 1903
[4] 웹사이트 なつかしい日本の汽船 勝立丸 http://jpnships.g.dg[...] 長澤文雄 2022-11-21
[5] 간행물 極秘 明治三十七八年海戦史 第六部 艦船艇
[6] 간행물 極秘 明治三十七八年海戦史 第六部 艦船艇
[7] 간행물 (추정) 2006
[8] 간행물 創業八十年史
[9] 간행물 極秘 明治三十七八年海戦史 第七部 医務衛生
[10] 뉴스 종, 최초군함 양무호 명명·신순성 함장 임명
[11] 간행물 (추정) 2008
[12] 서적 最新の韓半島―附 満洲雑記 青木嵩山堂 1906
[13] 웹사이트 高宗の虚勢を想起させる文大統領の6兆ウォン軽空母ショー https://chosunonline[...] 朝鮮日報 2021-10-07
[14] 간행물 (추정) 2008
[15] 간행물 韓国軍艦揚武に関する資料若干
[16] 간행물 韓国軍艦揚武に関する資料若干
[17] 간행물 創業八十年史
[18] 간행물 韓国軍艦揚武に関する資料若干
[19] 서적 極秘 明治三十七八年海戦史 第一部 戦紀 海軍軍令部 n.d.
[20] 간행물 極秘 明治三十七八年海戦史 第七部 医務衛生
[21] 간행물 極秘 明治三十七八年海戦史 第七部 医務衛生
[22] 간행물 極秘 明治三十七八年海戦史 第七部 医務衛生
[23] 간행물 韓国軍艦揚武に関する資料若干
[24] 간행물 明治四十三年 日本船名録 帝国海事協会 1910
[25] 간행물 審判裁決錄 大正五年分
[26] 아시아역사자료센터 明治三十七年辞令通報 2月 (2)
[27] 웹사이트 고종, 최초군함 양무호 명명·신순성 함장 임명 http://www.incheon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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