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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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곤 슐츠는 1964년 동독 국경 경비대 병장으로, 베를린 장벽 근처에서 탈출을 돕던 사람들과의 총격전 중 아군의 오발로 사망했다. 동독 정부는 슐츠를 영웅으로 칭송하며 서방 첩자에 의한 암살이라고 발표했지만, 실제 사망 원인은 오발이었다. 독일 통일 이후 진실이 밝혀졌으며,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슐츠의 이름을 딴 시설들은 원래 이름으로 환원되었고, 2004년에는 그의 사망 40주년을 기념하는 현판이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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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슐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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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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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에곤 슐츠 |
출생일 | 1943년 1월 4일 |
출생지 | 그로스 예스틴, 나치 독일 |
사망일 | 1964년 10월 5일 |
사망 장소 | 동베를린, 동독 |
사망 원인 | 총상 (오인 사격) |
시신 발견 장소 | 슈트렐리처 거리 55번지 안뜰 |
정당 |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후보) |
안장 장소 | 로스토크 노이어 프리드호프 |
기념물 | 베를린 슈트렐리처 거리 55번지 건물 측면에 있는 기념 명판 |
군사 경력 | |
복무 기간 | 1963년 - 1964년 |
소속 | 독일 민주 공화국 국경 경비대 |
최종 계급 | 하사 (Unteroffizier) |
주요 활동 | "터널 57" 발견에 대응 중 사망 |
2. 생애
에곤 슐츠는 1943년 1월 4일 독일 포메라니아 콜베르크-쾰린 군 그로스 예스틴(현재 폴란드 서포모제주 코워브제크군 고스치노)에서 트럭 운전사인 아버지 알프레드 슐츠와 웨이트리스인 어머니 프리다 사이에서 두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슐츠는 푸트부스에서 교사 훈련을 받았으며, 1962년 9월 19세의 나이로 로스토크 근처 디에르코프에서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지만, 국민인민군에 징집되면서 교직 생활은 중단되었다. 그의 형 아르민은 화가였으며, 슐츠가 징집될 당시 가족은 로스토크 카를-마르크스-슈트라세 16번지에 거주했다. 슐츠가 사망하기 며칠 전 마지막으로 집에 방문했을 때는 그의 부모가 결혼 25주년을 기념하고 있었다.[1] 사망 당시 슐츠는 3년 복무 중 2년 차였으며, 3년 전에 건설된 베를린 장벽을 지키는 동독 독일 민주 공화국 국경군의 병장이었다.
1964년 10월 4일, 슐츠는 동베를린 베를린-미테의 아르코나플라츠에 있는 지휘소의 예비대로 배정되었다. 자정 직전, 한 슈타지 요원이 국경 경비대에게 지원을 요청했는데, 이들은 베르나우어 슈트라세를 따라 뻗어 있는 서베를린 국경 장벽과 매우 가까운 슈렐리처 슈트라세 55번지에서 수상한 인물들을 조사하고 체포할 예정이었다. 슐츠와 그의 동료 국경 경비대원들은 작전의 실제 목적을 알지 못했다. 슈타지는 정보원으로부터 탈출 작전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던 것이다. 국경 근처 지역을 조사하던 중, 두 명의 슈타지 요원은 슈텔리처 슈트라세 55번지 건물 현관에서 탈출을 돕는 두 남자를 만났다. 탈출 조력자들은 슈타지 요원을 탈출자로 오인하고, 막 구금에서 풀려난 친구를 데리러 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의심을 사지 않고 건물을 떠날 수 있었다. 슈타지 요원들은 탈출 조력자들에게 돌아와 국경 경비대의 지원을 조직하는 동안 기다리도록 했다.[2]
에곤 슐츠의 사망 이후, 동독과 서베를린에서는 탈출 조력자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서베를린 조사관들은 탈출 조력자 중 한 명이 총을 쏜 것은 인정했지만, 슐츠가 그 총격으로 사망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밝혔다. 반면 동독 정부는 슐츠가 서방 요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주장하며, "살인 용의자" 크리스티안 조벨의 범죄인 인도를 요구했다.[2]
사후 그는 독일 민주 공화국에서 민족적 영웅으로 여겨졌고, 동독에서는 많은 학교, 대로, 군 부대 및 시설에 "에곤 슐츠"의 이름이 붙여졌다. 어린이용 전기(傳記)도 만들어졌으며, 대부분의 동독 시민은 학교 교육이나 미디어를 통해 어린 시절부터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사후 그는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에서 민족적 영웅으로 여겨졌고, 동독에서는 많은 학교, 대로, 군 부대 및 시설에 "에곤 슐츠"의 이름이 붙여졌다. 어린이용 전기(傳記)도 만들어졌으며, 대부분의 동독 시민은 학교 교육이나 미디어를 통해 어린 시절부터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3]
[1]
뉴스
Ein Sohn unserer Republik
https://www.nd-archi[...]
Neues Deutschland Archiv
1964-10-10
3. 사망 경위
몇 달에 걸쳐, 서베를린 학생들은 베르나우어 슈트라세의 폐쇄된 빵집에서 시작하여 슈텔리처 슈트라세 55번지 건물 안뜰에 있는 뒷간까지 11m 지하로 이어지는 길이 145m의 긴 터널을 비밀리에 팠다. 이 터널은 나중에 1964년 10월 3일과 4일 밤에 이 터널을 통해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의 수를 나타내는 "터널 57"로 유명해졌다. 탈출 조력자 중 한 명은 우주 비행사가 될 라인하르트 푸러였는데, 그는 크리스티안 조벨, 그리고 다른 두 명의 탈출 조력자들과 함께 동베를린 쪽에서 탈출자들을 터널 입구로 안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정이 지난 지 약 30분쯤, 두 명의 슈타지 요원은 슐츠를 포함한 국경 경비대와 함께 돌아왔고, 그는 총구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닫기 전에 푸러에게 다가갔다. 주변 환경에 익숙했던 푸러는 재빨리 안뜰로 물러났고, 터널 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친구들에게 들이닥치는 경비대에 대해 경고했다. 슈타지 요원과 국경 경비대가 안뜰에 들어섰을 때, 탈출 조력자들과의 총격전이 벌어졌고, 슐츠는 조벨의 총에서 발사된 총알에 어깨를 맞아 땅에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려던 슐츠는 동료 국경 경비대가 사용한 칼라시니코프 소총에서 발사된 더 큰 7.62x39mm 탄환에 다시 맞았다. 탈출 조력자들이 마지막 순간에 터널을 이용하여 탈출하여 서베를린의 안전 구역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면서 총격전은 끝났다. 슐츠는 폴크스폴리차이 병원(People's Police Hospital)으로 이송되는 도중에 사망했다.[2]
1964년 10월 5일, 슐츠의 부대는 국가보안부 요원 2명과 함께 슈렐리처 거리 55번지를 조사하러 갔다. 그러나 그들이 55번지 안뜰에 침입했을 때, 탈출 조력자들과 마주쳐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탈출 조력자 크리스티안 조벨(Christian Zobel)의 권총에서 발사된 탄환이 슐츠의 어깨에 명중했다. 쓰러진 슐츠는 일어나려 했지만, 아군의 MPi-K 돌격 소총 오발로 사망했다.
동독 지도부는 이 사건에 대해 "서방 첩자"인 조벨이 슐츠를 사살했다고 발표했다. 실제로는 슐츠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이 오발이라는 사실이 사건 직후 널리 알려졌지만, 당국은 이 견해를 유지하며 슐츠를 민족 영웅으로 계속 칭송했다. 사건 증거에도 조작이 가해져, 예를 들어 슐츠가 순직할 때 착용했던 제복 사진은 잘려나갔고, 돌격 소총에 의한 탄흔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또한 당국은 탈출 조력자들이 서방 첩자 혹은 암살자로 활동했다는 견해를 밝혔다. 아군의 오발이 있었다는 사실은 국가보안부의 공식 수사 기록에만 남아 있다. 다만, 이 기록에서는 조벨의 첫 번째 총격으로 슐츠가 이미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 사건에 연루된 탈출 조력자 중 한 명은 나중에 우주 비행사가 된 Reinhard Furrer|라인하르트 푸러de였다.
4. 사건의 진실과 왜곡
동독 당국은 슐츠가 동료에게 총을 맞았고, 치명적인 총알이 탈출 조력자가 아닌 칼라시니코프에서 발사된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 조사 결과는 1990년 10월까지 기밀로 유지되었다. 1965년 11월, 서베를린 검찰은 탈출 조력자들에게 불법 무기 소지 혐의로 벌금만 부과하고 사건을 종결했다.[2]
1964년 12월, 에곤 슐츠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이 풍선에 부착되어 동쪽으로 날아갔다. 이 편지는 터널 57을 건설한 탈출 조력자들이 쓴 것이었지만, 동독 언론은 이들이 실제 살인범이라고 주장하며 인도를 요구했다. 이러한 주장은 독일 통일 이후 공산주의 선전이었음이 밝혀졌다.[2]
1965년 1월 4일, 슐츠의 죽음을 기념하는 기념 현판이 Strelitzer Straße 55번지에 세워졌다. 동베를린의 Strelitzer Straße 구간은 에곤-슐츠-슈트라세로 개명되었고, 그에 관한 어린이 책도 출판되었다. 거의 모든 동독 시민들은 학교와 언론을 통해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2]
이 사건은 동독뿐만 아니라 서독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다. ''슈테른'' 편집장 헨리 난넨이 터널 57에 대한 독점권을 구매하여 터널 건설 자금을 지원했기 때문에, 동서독 간 긴장 고조에 책임이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2]
1991년 12월 1일, 에곤-슐츠-슈트라세는 원래 이름인 Strelitzer Straße로 환원되었다. 로스토크에 있는 에곤 슐츠 오버슐레는 Käthe-Kollwitz-Gymnasium으로 개명되는 등, 동독 전역의 많은 학교와 기관들이 원래 이름으로 돌아갔다.[2]
1992년, 전직 국경 경비대에 대한 살인 또는 과실치사 혐의 기소가 시작되었다. 에곤 슐츠 사건과 관련하여 슈타지 요원과 국경 부대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크리스티안 조벨이 첫 번째 총을 쏜 것은 맞지만, 슐츠를 죽인 치명적인 총알은 다른 국경 군인의 칼라시니코프에서 발사된 것으로 밝혀졌다. 법원은 이 국경 군인이 정당방위로 행동했다고 인정하여 사건은 기각되었다.[2]
1994년 5월, 에곤 슐츠를 살해한 혐의로 라인하르트 푸러를 고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푸러가 1995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고, 크리스티안 조벨도 이미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다른 탈출 조력자들을 살인 공범으로 기소하려는 시도는 기각되었다.[2]
2004년, 에곤 슐츠의 사망 40주년을 맞아 기념 현판이 Strelitzer Straße 55번지에 다시 세워졌다.[2]
동독 지도부는 슐츠의 죽음에 대해 "서방 첩자"인 조벨이 슐츠를 사살했다고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슐츠가 아군의 MPi-K 돌격 소총 오발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독 당국은 슐츠를 민족 영웅으로 칭송하며, 사건 증거를 조작했다. 예를 들어, 슐츠가 순직할 때 착용했던 제복 사진에서 돌격 소총에 의한 탄흔은 보이지 않게 잘려나갔다.[3]
사후 슐츠는 독일 민주 공화국에서 민족적 영웅으로 여겨졌고, 많은 학교, 대로, 군 부대 및 시설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어린이용 전기(傳記)도 만들어졌으며, 대부분의 동독 시민은 어린 시절부터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에서도 이 사건은 크게 주목받았는데, 『슈테른』지의 편집장 헨리 난넨이 터널을 매입하여 점유권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서독 간 긴장 고조에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또한 서독 정부 당국이 터널 구축을 지원했다는 사실이 보도되면서, 정치인들을 향한 비난도 일어났다.
1991년 12월 1일, 에곤 슐츠 거리(Egon-Schultz-Straße)는 슈트렐리처 거리(Strelitzer Straße)로 명칭이 되돌려졌다. 그 외에도 그의 이름을 딴 학교 시설 등도 대부분 이전 명칭으로 되돌아가거나, 다른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1995년, 헤노우에 있던 에곤 슐츠 상급 학교가 그림 형제 기초 학교(Gebrüder-Grimm-Grundschule)로 개칭되었다. 슐츠의 기념비 철거도 결정되었으나, 학생, 교사, 지역 대표자들의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3]
2001년, 브리타 바우어는 다큐멘터리 영화 『Heldentod – Der Tunnel und die Lüge』(영웅의 죽음 - 터널과 거짓말)을 제작하여 독일 텔레비전상을 수상했다.
2004년, 전 탈출 지원자, 전 난민, 베를린 장벽 자료 센터, 그리고 슐츠의 친구들이 공동으로 그의 사망 현장에 기념비를 설치하고 위령식을 다시 열었다.
5. 독일 통일 이후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에서도 이 사건은 크게 주목을 받았는데, 당시 『슈테른』지의 편집장이었던 헨리 난넨은 잠정적으로 터널을 매입하여 점유권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건으로 동서독 간에 높아진 긴장과 동독 측의 태도 경직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또한 서독 정부 당국이 터널 구축을 지원했다는 사실이 보도되면서, 정치인들을 향한 비난도 일어났다.
1991년 12월 1일, 사건 현장이자 가장 먼저 개명되었던 에곤 슐츠 거리(Egon-Schultz-Straße)의 명칭은 이전의 슈트렐리처 거리(Strelitzer Straße)로 되돌려졌다. 그 외에도 그의 이름을 딴 학교 시설 등의 명칭도 대부분 이전의 명칭으로 되돌아가거나, 다른 새로운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예를 들어 로스토크의 에곤 슐츠 상급 학교(Egon-Schultz-Oberschule)는 케테 콜비츠 김나지움(Käthe-Kollwitz-Gymnasium)으로 개칭되었고, 동 학교의 학생과 보호자의 기부로 설치되었던 슐츠의 기념비는 철거되었다.
1995년, 헤노에 있던 에곤 슐츠 상급 학교가 학교 회의(Schulkonferenz)의 결정에 따라 그림 형제 기초 학교(Gebrüder-Grimm-Grundschule)로 개칭되었다. 동 회의에서는 과거에 설치되었던 슐츠의 기념비 철거도 결정했으나, 곧 이에 대한 학생, 교사, 지역 대표자들의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헤노우 시장은 『베를리너 차이퉁』지와의 인터뷰에서 "논의할 필요는 전혀 없다. 우리는 우리의 기념비와 함께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3]。
2001년, 브리타 바우어는 1964년 10월의 터널 57의 총격 사건과 그 이전의 탈출 계획에 관련된 다큐멘터리 영화 『Heldentod – Der Tunnel und die Lüge』(영웅의 죽음 - 터널과 거짓말)을 제작했다. 이 영화는 독일 텔레비전상(Deutscher Fernsehpreis)을 수상했으며, 2001년 8월 8일에 『Heldentod – Wer erschoss Egon Schultz?』(영웅의 죽음 - 누가 에곤 슐츠를 쐈는가?)라는 제목으로 방송되었다.
2004년, 전 탈출 지원자, 전 난민, 베를린 장벽 자료 센터, 그리고 슐츠의 친구들이 공동으로 그의 사망 현장에 기념비를 설치했고, 재통일 이후 열리지 않았던 위령식이 다시 열렸다.
6. 현재의 평가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에서도 이 사건은 크게 주목을 받았는데, 당시 『슈테른』지의 편집장이었던 헨리 난넨은 잠정적으로 터널을 매입하여 점유권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건으로 동서독 간에 높아진 긴장과 동독 측의 태도 경직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또한 서독 정부 당국이 터널 구축을 지원했다는 사실이 보도되면서, 정치인들을 향한 비난도 일어났다.[3]
1991년 12월 1일, 사건 현장이자 가장 먼저 개명되었던 에곤 슐츠 거리(Egon-Schultz-Straße)의 명칭이 이전의 슈트렐리처 거리(Strelitzer Straße)로 되돌려졌다. 그 외에도 그의 이름을 딴 학교 시설 등의 명칭도 그 대부분이 이전의 명칭으로 되돌아가거나, 다른 새로운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예를 들어 로스토크의 에곤 슐츠 상급 학교(Egon-Schultz-Oberschule)는 케테 콜비츠 김나지움(Käthe-Kollwitz-Gymnasium)으로 개칭되었고, 동 학교의 학생과 보호자의 기부로 설치되었던 슐츠의 기념비는 철거되었다.[3]
1995년, 헤노우에 있던 에곤 슐츠 상급 학교가 학교 회의(Schulkonferenz)의 결정에 따라 그림 형제 기초 학교(Gebrüder-Grimm-Grundschule)로 개칭되었다. 동 회의에서는, 과거에 설치되었던 슐츠의 기념비 철거도 결정했으나, 곧 이에 대한 학생, 교사, 지역 대표자들의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헤노우 시장은 『베를리너 차이퉁』지와의 인터뷰에서 "논의할 필요는 전혀 없다. 우리는 우리의 기념비와 함께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3]
2001년, 브리타 바우어는 1964년 10월의 터널 57 총격 사건과 그 이전의 탈출 계획에 관련된 다큐멘터리 영화 『Heldentod – Der Tunnel und die Lüge』(영웅의 죽음 - 터널과 거짓말)을 제작했다. 이 영화는 독일 텔레비전상(Deutscher Fernsehpreis)을 수상했으며, 2001년 8월 8일에 『Heldentod – Wer erschoss Egon Schultz?』(영웅의 죽음 - 누가 에곤 슐츠를 쐈는가?)라는 제목으로 방송되었다.[3]
2004년, 전 탈출 지원자, 전 난민, 베를린 장벽 자료 센터, 그리고 슐츠의 친구들이 공동으로 그의 사망 현장에 기념비를 설치했고, 재통일 이후 열리지 않았던 위령식이 다시 열렸다.[3]
참조
[2]
웹사이트
Egon Schultz Biography
http://www.chronik-d[...]
[3]
뉴스
Heftiger Streit um Namenswechsel
http://www.berliner-[...]
Berliner Zeitung
199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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