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렌프리트 발터 폰 치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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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렌프리트 발터 폰 치른하우스는 17세기 독일의 수학자, 철학자, 의학자이자 도자기 연구가였다. 치른하우스 변형으로 알려진 대수 방정식 관련 연구와 카타카우틱 연구를 통해 수학 분야에 기여했다. 그는 또한 철학적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유럽 최초의 도자기 제작 기술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제자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가 기술을 완성하면서 도자기 발명가 논쟁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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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렌프리트 발터 폰 치른하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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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에렌프리트 발터 폰 치른하우스 |
원어 이름 | Ehrenfried Walther von Tschirnhaus |
로마자 표기 | Ereneupreiteu Balleoteo Pon Chireunhauseu |
![]() | |
출생일 | 1651년 4월 10일 |
출생지 | 신성 로마 제국 실레시아 스와니코비체 (폴란드 돌니실롱스크주) |
사망일 | 1708년 10월 11일 |
사망지 | 신성 로마 제국 작센 선제후국 드레스덴 |
국적 | 독일 |
학문 분야 | |
분야 | 수학 철학 물리학 의학 |
소속 및 교육 | |
지도 교수 | 아르놀트 횔링크스 프랑키르쿠스 실비우스 피터르 판 스호턴 |
지도 학생 | 크리스티안 볼프 |
주요 업적 | |
주요 업적 | 치른하우스 변환 도자기 |
기타 |
2. 생애
1651년에 실레지아(오늘날 폴란드의 일부)의 작은 마을인 스와니코비체(Sławnikowicepl)에서 태어났다. 괴를리츠에서 김나지움을 다녔으며, 레이던 대학교에서 수학 · 철학 · 의학을 공부하였다.
이후 프랑스와 이탈리아와 스위스를 여행하였으며, 한때 (1672년~1673년 동안) 네덜란드 군대에 속하기도 하였다.
1683년에는 치른하우스 변형을 출판하였다. 1686년~1687년에는 의학서(醫學書) 《신체의 의학》(Medicina corporisla) 및 《정신의 의학》(Medicina mentisde)을 출판하였다.
말년에는 작센으로 이주한 뒤, 폴란드의 왕이자 작센의 선제후였던 아우구스트 2세의 지원을 받아 동아시아에서 수입된 도자기의 제작법을 연구하였다. 이를 위하여 1704년에 당시 19세의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Johann Friedrich Böttgerde, 1682~1719)를 제자로 두었다. 그러나 1708년 10월 11일에 치른하우스는 갑자기 괴사(怪死)하였다. 치른하우스의 사후 사흘 뒤에 치른하우스의 집에서 도자기 샘플이 도난당했으며, 이에 따라 아마 치른하우스가 이미 생전에 도자기의 제작법을 거의 완성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이듬해 3월 28일에 뵈트거는 (치른하우스를 무시한 채) 스스로 도자기의 제작법의 비밀을 발견했다고 발표하였으며, 도자기를 유럽 최초로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
치른하우스는 1704년 라이프니츠의 비서에게 자신이 구워낸 자기를 보여주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치른하우스는 이 기술을 작센 선제후 겸 폴란드 왕인 아우구스트 2세에게 제안하고 자기 공방 설립을 제안했지만, 아우구스트 2세는 치른하우스의 제안을 거절하고 연금술사뵈트거에게 협력하여 자기 제조 기술을 완성하도록 명령한다. 1707년 치른하우스는 아우구스트 2세에게 자기 제조 기술 제공의 대가로 2561탈러의 지불을 요구했지만, 아우구스트 2세는 공방이 실제로 가동될 때까지 지불을 연기했다. 이듬해 치른하우스가 사망했기 때문에 결국 치른하우스는 이 지불을 받지 못했다.
1709년, 치른하우스의 연구를 계승한 뵈트거가 자기 제조 기술을 완성했다. 이것이 마이센 자기의 시작이다.
당시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치른하우스가 자기를 발명했다. 예를 들어, 1719년 마이센 자기 공장의 사무엘 슈톨첼(Samuel Stölzel)은 비밀 유지 중인 제조법을 가지고 빈(Vienna)으로 가서 그것은 뵈트거가 아니라 치른하우스가 발명한 것이라고 확인했다. 같은 해 마이센 공장의 사무총장도 그 발명이 뵈트거의 것이 아니고 "고인인 폰 치른하우스(Herr von Tschirnhaus)의 서면 자료"를 감독관 슈타인브뤼크가 뵈트거에게 넘겼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뵈트거의 이름은 이 발명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에렌프리트 발터 폰 치른하우스는 1651년에 실레지아(오늘날 폴란드의 일부)의 작은 마을인 스와니코비체(Sławnikowicepl)에서 태어났다.[4] 괴를리츠에서 김나지움을 다녔으며, 레이던 대학교에서 수학 · 철학 · 의학을 공부하였다.[4]이후 프랑스와 이탈리아와 스위스를 여행하였으며, 1672년~1673년 동안 네덜란드 군대에 속하기도 하였다.[4] 여행 중 그는 바뤼크 드 스피노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네덜란드), 아이작 뉴턴(잉글랜드),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파리)를 만났고, 라이프니츠와는 평생 서신을 주고받았다. 또한 파리의 왕립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2. 2. 유럽 여행과 학문적 교류
에렌프리트 발터 폰 치른하우스는 괴를리츠의 김나지움(Gymnasium)을 졸업하고 레이던 대학교에서 수학, 철학, 화학을 공부했다.[4] 그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를 여행했고, 1672년부터 1673년까지 네덜란드 군대에서 복무했다. 여행 중 그는 스피노자, 호이겐스, 뉴턴, 라이프니츠 등 당대 최고의 지성들과 교류하였다.[4] 그는 파리의 왕립 과학 아카데미(Académie Royale des Sciences) 회원이 되었으며, 라이프니츠와는 평생 서신을 주고받았다.2. 3. 수학적 업적
에렌프리트 발터 폰 치른하우스는 대수 방정식에서 특정 중간항을 제거하는 데 사용되는 치른하우스 변형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는 1683년 과학 저널 ''Acta Eruditorum''에 발표되었다.
1682년 폰 치른하우스는 카타카우틱 이론을 연구하여 그것들이 정정 가능하다는 것을 보였다. 이것은 움직이는 직선의 포락선이 결정된 두 번째 사례였다. 포물선의 카타카우틱 중 하나는 여전히 치른하우스 3차 곡선으로 알려져 있다.
1696년 요한 베르누이는 ''Acta Eruditorum'' 독자들에게 최속강하선 문제를 제시했다. 치른하우스는 해답을 제출한 다섯 명의 수학자 중 한 명이었다. 베르누이는 자신의 해답과 함께 이러한 기여(치른하우스의 기여 포함)를 다음 해 5월에 저널에 발표했다.
2. 4. 철학적 사상
에렌프리트 발터 폰 치른하우스는 레이던 대학교 재학 중 스피노자와 서신을 교환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라이프니츠와도 교류했다. 치른하우스는 스피노자의 걸작인 윤리학을 가장 먼저 입수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는데, 현재 바티칸 도서관에 있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출판 전 사본이 그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5] 보존된 스피노자와의 서신에서 그는 윤리학의 일부 주장, 예를 들어 속성의 즉각적인 무한한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 가지 이의를 제기한다.[6] 오랫동안 철학자로서 잊혀졌으며, 그를 다룬 연구들은 종종 당시 다른 철학자들과 과학자들과의 관계에 대해 논한다.2. 5. 자기 개발
1651년에 실레지아(오늘날 폴란드의 일부)의 작은 마을인 스와니코비체(Sławnikowicepl)에서 태어났다. 괴를리츠에서 김나지움을 다녔으며, 레이던 대학교에서 수학 · 철학 · 의학을 공부하였다.이후 프랑스와 이탈리아와 스위스를 여행하였으며, 한때 (1672년~1673년 동안) 네덜란드 군대에 속하기도 하였다.
1683년에는 치른하우스 변형을 출판하였다. 1686년~1687년에는 의학서(醫學書) 《신체의 의학》(Medicina corporisla) 및 《정신의 의학》(Medicina mentisde)을 출판하였다.
말년에는 작센으로 이주한 뒤, 폴란드의 왕이자 작센의 선제후였던 아우구스트 2세의 지원을 받아 동아시아에서 수입된 도자기의 제작법을 연구하였다. 이를 위하여 1704년에 당시 19세의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Johann Friedrich Böttgerde, 1682~1719)를 제자로 두었다. 그러나 1708년 10월 11일에 치른하우스는 갑가지 괴사(怪死)하였다. 치른하우스의 사후 사흘 뒤에 치른하우스의 집에서 도자기 샘플이 도난당했으며, 이에 따라 아마 치른하우스가 이미 생전에 도자기의 제작법을 거의 완성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이듬해 3월 28일에 뵈트거는 (치른하우스를 무시한 채) 스스로 도자기의 제작법의 비밀을 발견했다고 발표하였으며, 도자기를 유럽 최초로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
2. 5. 1. 연구 배경
1651년에 실레지아(오늘날 폴란드의 일부)의 작은 마을인 스와니코비체(Sławnikowicepl)에서 태어났다. 괴를리츠에서 김나지움을 다녔으며, 레이던 대학교에서 수학 · 철학 · 의학을 공부하였다.이후 프랑스와 이탈리아와 스위스를 여행하였으며, 한때 (1672년~1673년 동안) 네덜란드 군대에 속하기도 하였다.
1683년에는 치른하우스 변형을 출판하였다. 1686년~1687년에는 의학서(醫學書) 《신체의 의학》(Medicina corporisla) 및 《정신의 의학》(Medicina mentisde)을 출판하였다.
말년에는 작센으로 이주한 뒤, 폴란드의 왕이자 작센의 선제후였던 아우구스트 2세의 지원을 받아 동아시아에서 수입된 도자기의 제작법을 연구하였다. 이를 위하여 1704년에 당시 19세의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Johann Friedrich Böttgerde, 1682~1719)를 제자로 두었다. 그러나 1708년 10월 11일에 치른하우스는 갑가지 괴사(怪死)하였다. 치른하우스의 사후 사흘 뒤에 치른하우스의 집에서 도자기 샘플이 도난당했으며, 이에 따라 아마 치른하우스가 이미 생전에 도자기의 제작법을 거의 완성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이듬해 3월 28일에 뵈트거는 (치른하우스를 무시한 채) 스스로 도자기의 제작법의 비밀을 발견했다고 발표하였으며, 도자기를 유럽 최초로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
2. 5. 2. 치른하우스의 연구
1683년에는 치른하우스 변형을 출판하였다. 1686년~1687년에는 의학서(醫學書) 《신체의 의학》(Medicina corporisla) 및 《정신의 의학》(Medicina mentisde)을 출판하였다.말년에는 작센으로 이주한 뒤, 폴란드의 왕이자 작센의 선제후였던 아우구스트 2세의 지원을 받아 동아시아에서 수입된 도자기의 제작법을 연구하였다. 이를 위하여 1704년에 당시 19세의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Johann Friedrich Böttgerde, 1682~1719)를 제자로 두었다. 그러나 1708년 10월 11일에 치른하우스는 갑가지 괴사(怪死)하였다. 치른하우스의 사후 사흘 뒤에 치른하우스의 집에서 도자기 샘플이 도난당했으며, 이에 따라 아마 치른하우스가 이미 생전에 도자기의 제작법을 거의 완성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이듬해 3월 28일에 뵈트거는 (치른하우스를 무시한 채) 스스로 도자기의 제작법의 비밀을 발견했다고 발표하였으며, 도자기를 유럽 최초로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
치른하우스는 1704년 라이프니츠의 비서에게 자신이 구워낸 자기를 보여주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치른하우스는 이 기술을 작센 선제후 겸 폴란드 왕인 아우구스트 2세에게 제안하고 자기 공방 설립을 제안했지만, 아우구스트 2세는 치른하우스의 제안을 거절하고 연금술사뵈트거에게 협력하여 자기 제조 기술을 완성하도록 명령한다. 1707년 치른하우스는 아우구스트 2세에게 자기 제조 기술 제공의 대가로 2561탈러의 지불을 요구했지만, 아우구스트 2세는 공방이 실제로 가동될 때까지 지불을 연기했다. 이듬해 치른하우스가 사망했기 때문에 결국 치른하우스는 이 지불을 받지 못했다.
1709년, 치른하우스의 연구를 계승한 뵈트거가 자기 제조 기술을 완성했다. 이것이 마이센 자기의 시작이다.
당시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치른하우스가 자기를 발명했다. 예를 들어, 1719년 마이센 자기 공장의 사무엘 슈톨첼(Samuel Stölzel)은 비밀 유지 중인 제조법을 가지고 빈(Vienna)으로 가서 그것은 뵈트거가 아니라 치른하우스가 발명한 것이라고 확인했다. 같은 해 마이센 공장의 사무총장도 그 발명이 뵈트거의 것이 아니고 "고인인 폰 치른하우스(Herr von Tschirnhaus)의 서면 자료"를 감독관 슈타인브뤼크가 뵈트거에게 넘겼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뵈트거의 이름은 이 발명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2. 5. 3. 뵈트거와의 협력과 갈등
말년에 작센으로 이주한 뒤, 치른하우스는 아우구스트 2세의 지원을 받아 동아시아에서 수입된 도자기의 제작법을 연구하였다. 1704년에 그는 19세의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를 제자로 두었다. 뵈트거는 금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 연금술사였으나, 1707년까지는 치른하우스의 연구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았다.치른하우스는 다양한 규산염과 토류를 혼합하는 체계적인 실험을 통해 도자기 개발을 시도했다. 1704년 초, 그는 라이프니츠의 비서에게 "자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아우구스트 2세에게 자기 공장 설립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카올린과 석고를 사용한 연구는 진전을 보였고, 아우구스트 2세는 치른하우스에게 자기 공장 설립을 위한 감독을 맡겼다. 그러나 치른하우스는 공장이 생산을 시작할 때까지 보수 지급을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다.
1708년 10월 11일, 치른하우스는 갑작스럽게 사망하였고,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 치른하우스 사후 사흘 뒤, 그의 집에서 도자기 샘플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뵈트거는 이 사건을 통해 치른하우스가 이미 생전에 도자기 제작법을 거의 완성했음을 인지했다고 한다.
1709년 3월 28일, 뵈트거는 (치른하우스를 무시한 채) 스스로 도자기 제작법을 발견했다고 발표하고, 유럽 최초로 도자기를 대량 생산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 멜키오르 슈타인브뤼크(Melchior Steinbrück)는 치른하우스의 유산을 평가하고 뵈트거를 만난 뒤, 치른하우스의 연구를 재개했다. 뵈트거는 유럽 최초의 자기 제조소를 이끌게 되었고, 슈타인브뤼크는 감독관이 되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치른하우스가 자기를 발명했다고 증언했다. 1719년, 마이센 자기 공장의 사무엘 슈톨첼(Samuel Stölzel)은 빈으로 가서 자기 제조법이 뵈트거가 아닌 치른하우스의 발명이라고 확인했다. 같은 해 마이센 공장의 사무총장도 뵈트거가 아닌 치른하우스의 자료를 슈타인브뤼크가 뵈트거에게 넘겼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뵈트거의 이름이 이 발명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2. 5. 4. 갑작스러운 죽음과 논란
1708년 10월 11일, 에렌프리트 발터 폰 치른하우스는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치른하우스가 사망하고 3일 뒤, 그의 집에서 절도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의 보고에 따르면 작은 도자기 조각이 도난당했다. 이는 뵈트거 자신이 치른하우스가 이미 도자기를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며, 치른하우스가 뵈트거가 아니라 자기의 발명가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로 여겨진다.1709년 3월 20일, 멜키오어 슈타인브뤼크(Melchior Steinbrück)가 사망한 치른하우스의 유산 (자기 제작에 관한 메모를 포함)을 평가하고 뵈트거를 만난 뒤, 도자기 제조 연구 작업이 재개되었다. 같은 해 3월 28일, 뵈트거는 아우구스트 2세에게 자기가 도자기 발명을 했다고 발표하였다. 이후 뵈트거는 유럽 최초의 도자기 제조소를 이끌도록 임명되었으며, 슈타인브뤼크는 감독관이 되어 뵈트거의 여동생과 결혼하였다.
당시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도자기를 발명한 사람은 치른하우스였다. 1719년 마이센(Meissen) 도자기 공장의 사무엘 슈톨첼(Samuel Stölzel)은 비밀 유지 중인 제조법을 가지고 빈(Vienna)으로 가서, 도자기를 발명한 것은 뵈트거가 아니라 치른하우스라고 확인했다. 같은 해 마이센 공장의 사무총장도 도자기 발명이 뵈트거의 것이 아니고 "고인인 폰 치른하우스(Herr von Tschirnhaus)의 서면 자료"를 감독관 슈타인브뤼크가 뵈트거에게 넘겼다고 증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뵈트거의 이름은 이 발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오늘날에는 뵈트거가 도자기를 발명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2. 5. 5. 뵈트거의 자기 제조 성공과 마이센의 탄생
작센으로 이주한 뒤, 아우구스트 2세의 지원을 받아 동아시아에서 수입된 도자기의 제작법을 연구하였다. 이를 위하여 1704년에 당시 19세의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를 제자로 두었다. 그러나 1708년 10월 11일에 치른하우스는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치른하우스 사후 사흘 뒤에 그의 집에서 도자기 샘플이 도난당했다. 이듬해 3월 28일에 뵈트거는 (치른하우스를 무시한 채) 스스로 도자기의 제작법의 비밀을 발견했다고 발표하였으며, 도자기를 유럽 최초로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
1704년 초, 치른하우스는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의 비서에게 "자기(porcelan)"를 보여주었다. 그는 아우구스트 2세에게 자기 공장 설립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1704년, 치른하우스는 금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 19세의 연금술사 뵈트거의 감독관이 되었다. 뵈트거는 1707년까지 마지못해, 그리고 압력을 받아서야 치른하우스의 연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작센의 슈네베르크) 카올린과 석고를 사용하면서 연구는 진전되어 아우구스트 2세는 그에게 설립하려던 자기 공장의 감독을 맡겼다. 아우구스트 2세는 치른하우스에게 2,561탈러를 지불하도록 명령했지만, 그는 공장이 생산을 시작할 때까지 지급을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다.
치른하우스 사망 3일 후, 그의 집에서 절도 사건이 발생했고, 뵈트거의 보고서에 따르면 작은 자기 조각이 도난당했다. 이 보고서는 치른하우스가 이미 자기를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뵈트거 자신이 인지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며, 치른하우스가 뵈트거가 아니라 자기의 발명가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1709년 3월 20일, 멜키오어 슈타인브뤼크가 사망한 그의 유산(자기 제작에 관한 메모 포함)을 평가하고 뵈트거를 만난 후 작업이 재개되었다. 1709년 3월 28일, 뵈트거는 아우구스트 2세에게 자기 발명을 발표했다. 이제 뵈트거는 유럽 최초의 자기 제조소를 이끌도록 임명되었다. 슈타인브뤼크는 감독관이 되었고 뵈트거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당시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치른하우스가 자기를 발명했다. 예를 들어, 1719년 마이센 자기 공장의 사무엘 슈톨첼은 비밀 유지 중인 제조법을 가지고 빈으로 가서 그것은 뵈트거가 아니라 치른하우스가 발명한 것이라고 확인했다. 같은 해 마이센 공장의 사무총장도 그 발명이 뵈트거의 것이 아니고 "고인인 폰 치른하우스의 서면 자료"를 감독관 슈타인브뤼크가 뵈트거에게 넘겼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뵈트거의 이름은 이 발명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2. 5. 6. 진정한 발명가 논쟁
치른하우스가 도자기 발명에 성공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도자기의 제작법을 연구하던 치른하우스는 1708년 10월 11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치른하우스가 사망하고 3일 뒤, 그의 집에서 도자기 샘플이 도난당했다. 이 때문에 치른하우스가 이미 생전에 도자기의 제작법을 거의 완성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1709년 3월 20일, 멜키오어 슈타인브뤼크(Melchior Steinbrück)가 치른하우스의 유산(자기 제작에 관한 메모를 포함)을 평가하기 위해 뵈트거를 만난 뒤, 1709년 3월 28일에 뵈트거는 (치른하우스를 무시한 채) 스스로 도자기의 제작법의 비밀을 발견했다고 발표하였으며, 도자기를 유럽 최초로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당시 기록을 보면 치른하우스가 도자기를 발명했다는 증언이 많이 남아있다. 1719년 마이센(Meissen) 자기 공장의 사무엘 슈톨첼(Samuel Stölzel)은 제조법을 가지고 빈(Vienna)으로 가서 그것은 뵈트거가 아니라 치른하우스가 발명한 것이라고 확인했다. 같은 해 마이센 공장의 사무총장도 그 발명이 뵈트거의 것이 아니고 "고인인 폰 치른하우스(Herr von Tschirnhaus)의 서면 자료"를 감독관 슈타인브뤼크가 뵈트거에게 넘겼다고 증언했다.
3. 저서
- 에렌프리트 발터 폰 치른하우스, ''Medicina corporis, seu Cogitationes admodum probabiles de conſervandâ Sanitate''(신체의 의학, 또는 건강을 매우 높은 확률로 보존하는 기법), 암스테르담, 1686.
- 에렌프리트 발터 폰 치른하우스, ''Medicina mentis, sive Tentamen genuinæ Logicæ, in quâ diſſeritur de Methodo detegendi incognitas veritates''(정신의 의학, 또는 미지(未知)의 진리의 발견법에 대해 논하는 어떤 참된 논리), 암스테르담, 1687.
- ''Medicina mentis et corporis''(빌헬름 리세(Wilhelm Risse) 서문, 아나스타틱 재판), 게오르크 올름스(Georg Olms), 힐데스하임, 1964.
참조
[1]
웹사이트
Biography of Ehrenfried Walther von Tschirnhaus
http://www.tschirnha[...]
2006-02-09
[2]
논문
The Discovery of European Porcelain Technology
https://arxiv.org/ab[...]
2005
[3]
뉴스
Pots of fame
http://www.economist[...]
2010-03-31
[4]
간행물
The Education of Ehrenfried Walther von Tschirnhaus (1651–1708)
2015
[5]
논문
The Vatican Manuscript of Spinoza's Ethica (review)
Project MUSE
2012-04
[6]
서적
A Spinoza Reader: The Ethics and Other Work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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