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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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1646년 독일에서 태어난 철학자, 수학자, 과학자, 법학자, 외교관, 그리고 역사가였다. 그는 미적분법을 아이작 뉴턴과 독립적으로 개발했고, 현재 사용되는 미분과 적분 표기법을 고안했다. 라이프니츠는 또한 기호 논리의 선구자였으며, 컴퓨터 과학과 정보 이론의 기초를 다졌다. 그의 철학은 단자론, 예정조화설, 그리고 낙관주의를 포함하며,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영향을 미쳤다. 라이프니츠는 유럽 연합의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중국 철학에 관심을 갖는 등 폭넓은 활동을 펼쳤다. 그는 생전에 널리 존경받았지만, 사후에는 그의 명성이 쇠퇴하기도 했으나, 20세기 이후 그의 업적은 재평가되어 현대 철학, 수학, 과학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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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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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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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646년 7월 1일 |
출생지 | 신성 로마 제국 라이프치히 |
사망일 | 1716년 11월 14일 |
사망지 | 신성 로마 제국 하노버 |
로마자 표기 | Gottfried Wilhelm Leibniz |
다른 이름 | Godefroi Guillaume Leibnitz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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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
교육 기관 | 알테 니콜라이슐레 라이프치히 대학교 (문학사, 1662년; 문학 석사, 1664년; 법학사, 1665년; 철학박사 학위, 1666년) 예나 대학교 (1663년) 알트도르프 대학교 (법학박사, 1666년) |
박사 학위 지도 교수 | 바르톨로메우스 레온하르트 폰 슈벤덴되르퍼 |
학문 지도 교수 | 에르하르트 바이겔 야코프 토마지우스 요한 아담 셰르처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
주요 제자 | 야코프 베르누이 크리스티안 볼프 |
철학 및 사상 | |
시대 | 17세기 철학/18세기 철학 |
지역 | 서양 철학 |
주요 관심사 | 수학 물리학 지질학 의학 생물학 발생학 역학 수의학 고생물학 심리학 공학 도서관학 언어학 문헌학 사회학 형이상학 윤리학 경제학 외교 역사 정치 음악 이론 시 논리학 신정론 보편 언어 보편 과학 |
학파 | 합리주의 다원적 이상주의 기초주의 개념주의 낙관주의 간접 실재론 대응 이론 관계주의 |
주요 사상 | 대수 논리 이진법 미적분학 미분 방정식 보편 수학 모나드 최선의 세계 예정 조화 식별 불가능성의 원리 행렬 (수학) 함수 (수학) 미적분학의 기본 정리 라이프니츠 표기법 라이프니츠 적분 규칙 적분 기호 라이프니츠 조화 삼각형 라이프니츠 판정법 원주율에 대한 라이프니츠 공식 행렬식에 대한 라이프니츠 공식 분수 미적분 연쇄 법칙 몫의 법칙 곱의 법칙 라이프니츠 수레바퀴 계산기 라이프니츠 간극 개념 대수 활력 최소 작용 원리 진리 보존 계단 계산기 기호 논리학 위상수학 충분 이유율 연속의 법칙 동차성의 선험적 법칙 조합술 보편 문자 추론 계산기 공가능성 부분 분수 분해 원초지 무(無)로부터 존재함에 대한 문제 다원적 이상주의 형이상학적 역동주의 관계주의 앱퍼셉션 선험적/후험적 구별 의무 논리학 적절한 현상 |
학위 논문 | De Arte Combinatoria (1666년 3월) Disputatio Inauguralis de Casibus Perplexis in Jure (1666년 11월) |
영향 | |
영향을 준 인물 | 성경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플로티노스 아우구스티누스 스코라 철학 토마스 아퀴나스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프란시스코 수아레스 조르다노 브루노 르네 데카르트 토머스 홉스 피코 델라 미란돌라 야코프 토마지우스 피에르 가상디 니콜라 말브랑슈 존 로크 바뤼흐 스피노자 자크 베니뉴 보쉬에 블레즈 파스칼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야코프 베르누이 에르하르트 바이겔 가브리엘 바그너 니콜라스 스테노 라몬 룰 |
영향을 받은 인물 | 크리스티안 볼프 요하네스 니콜라우스 테텐스 피에르 루이 모페르튀이 잠바티스타 비코 에른스트 플라트너 루저 요시프 보스코비치 샤를 보네 드니 디드로 데이비드 흄 에드문트 후설 이마누엘 칸트 가브리엘 바그너 루이 가브리엘 드 보날드 버트런드 러셀 조지 홈스 하위슨 베르나르디노 바리스코 그레고리 차이틴 쿠르트 괴델 마르틴 하이데거 린든 라루시 에밀리 뒤 샤틀레 페르디난트 게오르크 프로베니우스 프리드리히 니체 펠릭스 라베송 앙리 베르그송 니콜라스 레셔 질 들뢰즈 가브리엘 타르드 테오도어 아도르노 |
기타 정보 |
2. 생애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1646년 30년 전쟁이 끝날 무렵 작센 라이프치히에서 라이프치히 대학교 도덕 철학 교수였던 아버지 프리드리히 라이프니츠와 어머니 카타리나 쉬먹 사이에서 태어났다.[24] 그는 개신교 신자로, 같은 해 7월 3일 성 니콜라스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대부는 루터란 신학자 마틴 게이어였다.[25] 6살 때 아버지가 사망한 후, 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다.[26]
라이프니츠는 아버지의 개인 서재를 물려받아 일곱 살 때부터 자유롭게 이용하며, 대학 시절 이전부터 다양한 고급 철학 및 신학 서적들을 접할 수 있었다.[27] 주로 라틴어로 쓰여진 아버지의 서재 덕분에 그는 열두 살에 라틴어에 능통하게 되었으며, 열세 살에는 학교 특별 행사를 위해 하루 아침에 300행의 라틴시를 지었다.[28]
1661년 4월, 14세의 나이로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입학하여[29][1][30] 야코프 토마시우스 등의 지도를 받았다. 1662년 12월 철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고, 1663년 6월 9일(구력 5월 30일) 개체화 원리를 다룬 논문 "개체화 원리에 관한 형이상학적 논쟁"을 통해 초기 형태의 단자론을 제시했다.[31] 1664년 2월 7일 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31] 같은 해 12월 "법학에서 모아진 철학적 문제에 대한 예시"라는 논문을 발표 및 변론하여 철학과 법학 사이의 이론적 및 교육적 관계를 주장했다.[31] 1년간의 법학 공부 후 1665년 9월 28일 법학 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그의 논문 제목은 "조건들에 관하여"였다.[31][32]
1666년 초, 19세의 나이에 첫 번째 책인 "결합술에 관하여"를 저술했는데, 이 책의 첫 번째 부분은 그의 철학 학위 논문이기도 하며 1666년 3월에 변론했다.[31][33] "결합술에 관하여"는 라몬 율의 "대작"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기하학적 형태로 제시된 신의 존재 증명과 운동 논증을 포함하고 있다.
그의 다음 목표는 법학 면허와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것이었으나, 1666년 라이프치히 대학교는 그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박사 학위 신청을 거절했다.[34][35] 그 후 라이프니츠는 라이프치히를 떠나[36] 알트도르프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에서의 모호한 사례에 관한 개시 논쟁"이라는 논문을 제출하고, 1666년 11월 법학 면허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31][37] 그는 알트도르프 대학교의 교수직 제안을 거절하며 "나의 생각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38]
성인이 된 후 라이프니츠는 종종 자신을 "고트프리트 폰 라이프니츠"라고 소개했으며, 사후 출판된 그의 저술 중 많은 판본에서는 표지에 "프라이헤어 G. W. 폰 라이프니츠"라고 표기되었다. 그러나 동시대 정부 문서에서는 그의 귀족 작위 임명을 언급하는 내용을 찾을 수 없다.[39]
2. 1. 유년기 및 교육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1646년 30년 전쟁이 끝날 무렵 작센 라이프치히에서 라이프치히 대학교 도덕 철학 교수였던 아버지 프리드리히 라이프니츠와 어머니 카타리나 쉬먹 사이에서 태어났다.[24] 그는 개신교 신자로, 같은 해 7월 3일 성 니콜라스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대부는 루터란 신학자 마틴 게이어였다.[25] 6살 때 아버지가 사망한 후, 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다.[26]라이프니츠는 아버지의 개인 서재를 물려받아 일곱 살 때부터 자유롭게 이용하며, 대학 시절 이전부터 다양한 고급 철학 및 신학 서적들을 접할 수 있었다.[27] 주로 라틴어로 쓰여진 아버지의 서재 덕분에 그는 열두 살에 라틴어에 능통하게 되었으며, 열세 살에는 학교 특별 행사를 위해 하루 아침에 300행의 라틴시를 지었다.[28]
1661년 4월, 14세의 나이로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입학하여[29][1][30] 야코프 토마시우스 등의 지도를 받았다. 1662년 12월 철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고, 1663년 6월 9일(구력 5월 30일) 개체화 원리를 다룬 논문 "개체화 원리에 관한 형이상학적 논쟁"을 통해 초기 형태의 단자론을 제시했다.[31] 1664년 2월 7일 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31] 같은 해 12월 "법학에서 모아진 철학적 문제에 대한 예시"라는 논문을 발표 및 변론하여 철학과 법학 사이의 이론적 및 교육적 관계를 주장했다.[31] 1년간의 법학 공부 후 1665년 9월 28일 법학 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그의 논문 제목은 "조건들에 관하여"였다.[31][32]
1666년 초, 19세의 나이에 첫 번째 책인 "결합술에 관하여"를 저술했는데, 이 책의 첫 번째 부분은 그의 철학 학위 논문이기도 하며 1666년 3월에 변론했다.[31][33] "결합술에 관하여"는 라몬 율의 "대작"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기하학적 형태로 제시된 신의 존재 증명과 운동 논증을 포함하고 있다.
그의 다음 목표는 법학 면허와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것이었으나, 1666년 라이프치히 대학교는 그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박사 학위 신청을 거절했다.[34][35] 그 후 라이프니츠는 라이프치히를 떠나[36] 알트도르프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에서의 모호한 사례에 관한 개시 논쟁"이라는 논문을 제출하고, 1666년 11월 법학 면허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31][37] 그는 알트도르프 대학교의 교수직 제안을 거절하며 "나의 생각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38]
성인이 된 후 라이프니츠는 종종 자신을 "고트프리트 폰 라이프니츠"라고 소개했으며, 사후 출판된 그의 저술 중 많은 판본에서는 표지에 "프라이헤어 G. W. 폰 라이프니츠"라고 표기되었다. 그러나 동시대 정부 문서에서는 그의 귀족 작위 임명을 언급하는 내용을 찾을 수 없다.[39]
2. 2. 초기 경력 (1666년 ~ 1676년)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30년 전쟁이 끝날 무렵인 1646년 7월 1일 색소니의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211] 라이프니츠는 라이프치히 대학교 철학 교수였던 아버지 프리드리히 라이프니츠(Friedrich Leibniz)와 어머니 카타리나 쉬먹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같은 해 7월 3일 성 니콜라스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대부는 루터란 신학자 마틴 게이어였다. 6살 때 아버지가 사망한 후, 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하였다.[211] 부친은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도덕 철학 교수였으며, 라이프니츠는 부친의 개인 도서실을 상속받아 방대한 서적을 접할 수 있었다.
1653년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 학원에 입학한 라이프니츠는 1661년 졸업 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수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1663년 6월 철학 학사 논문을 제출하고, 4개월 동안 예나 대학교에서 수학, 법학, 역사학을 공부했다.[212] 1663년 10월에 라이프치히 대학교로 돌아와 1664년에는 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666년 뉘른베르크 근교의 알트도르프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논문을 제출하고 같은 해 11월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212]
라이프니츠의 첫 직책은 뉘른베르크의 연금술 단체의 급여를 받는 서기였다.[40] 그는 곧 마인츠 선제후 요한 필리프 폰 쇤본의 해임된 수상인 요한 크리스티안 폰 보이네부르크(1622–1672)를 만났고,[41] 보이네부르크는 라이프니츠를 조수로 고용했다. 이후 라이프니츠는 법률에 관한 논문을 선제후에게 헌정하여 1669년 항소법원 평가관으로 임명되었다.[42] 보이네부르크가 1672년 사망한 후에도, 라이프니츠는 그의 미망인 밑에서 1674년까지 일했다.[43]
보이네부르크의 도움으로 라이프니츠의 명성은 높아졌고, 선제후를 섬긴 후 외교적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는 가상의 폴란드 귀족의 가명으로 논문을 발표하여 폴란드 왕위에 대한 독일 후보를 주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당시 유럽의 주요 세력은 프랑스 루이 14세였으며, 30년 전쟁으로 독일어권 유럽은 쇠약해진 상태였다. 라이프니츠는 루이 14세의 관심을 이집트로 돌려 독일어권 유럽을 보호할 계획을 제안했다. 프랑스가 이집트를 네덜란드 동인도 정복을 위한 발판으로 삼도록 하고, 그 대가로 프랑스는 독일과 네덜란드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1672년 프랑스 정부는 라이프니츠를 파리로 초청했지만,[44]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으로 인해 이 계획은 무의미해졌다. 훗날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략 실패(1798년)는 라이프니츠 계획의 늦은 실행으로 볼 수 있다.

1672년 라이프니츠는 파리에서 네덜란드의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인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를 만났고, 자신의 수학 및 물리학 지식 부족을 깨닫고 하위헌스를 멘토로 삼아 자기 학습을 시작했다. 그는 니콜라 말브랑슈와 앙투안 아르노를 만나 데카르트와 파스칼의 저술을 연구했고,[45] 독일 수학자 에렌프리트 발터 폰 치른하우스와 친분을 맺었다.
1673년 초, 라이프니츠는 런던의 영국 정부에 파견되어 헨리 올덴버그와 존 콜린스를 만났다. 왕립 학회에서 자신이 설계한 계산기를 시연했고, 학회는 그를 외부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1673년 2월 12일 선제후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라이프니츠는 파리로 돌아왔다.[47]
1669년 라이프니츠를 하노버로 초대한 브런스비크-뤼네부르크 공작 요한 프리드리히는 1673년 라이프니츠에게 고문직을 제안했다. 라이프니츠는 2년 후 이 직책을 수락했다.[48] 1675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외국 명예 회원으로 입회하려 했으나 거절당하고, 1676년 10월 파리를 떠났다.
1668년부터 마인츠 선제후를 섬기면서 많은 서신 왕래가 시작되었다.[213] 1675년에는 미적분법을 발견했다.
2. 3. 하노버 궁정 봉직 (1676년 ~ 1716년)
30년 전쟁이 끝날 무렵인 1646년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난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6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도덕 철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개인 서재를 상속받아 방대한 서적을 접할 수 있었다.[211] 라이프니츠는 평생 미혼의 프로테스탄트이자 철학적 유신론자로, 삼위일체를 따르는 기독교인이었다.
1676년 말, 런던으로의 짧은 여행 후 하노버에 도착한 라이프니츠는 헤이그에서 안톤 판 레이우엔훅을 만나 미생물에 대한 연구를 접하고, 바뤼크 스피노자와 그의 저서 ''윤리학''에 대해 열띤 논의를 나누었다.[50] 1677년, 그는 사법 참사관으로 승진하여 평생 동안 브런즈윅가의 세 명의 통치자를 섬기며 역사가, 정치 고문, 공작 도서관 사서로 일했다.[48] 이후 라이프니츠는 브런즈윅가와 관련된 모든 정치적, 역사적, 신학적 문제에 관여했으며, 그 결과 나온 문서들은 그 시대의 역사 기록에서 귀중한 부분을 차지한다.
라이프니츠는 하르츠 산맥의 광산 작업 개선을 위해 풍차 사용 프로젝트를 추진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685년 중단되었다.[48]
하노버의 소피아, 그녀의 딸 하노버의 소피아 샤를로테, 그리고 안스바흐의 캐롤라인 등은 라이프니츠를 지지하고 그와 교류한 주요 인물들이었다.[51] 이들은 라이프니츠와 서신을 교환하고 조언을 구하며 친구가 되었고, 영국의 조지 1세보다 라이프니츠를 더 높게 평가했다.[51]
1692년, 브런즈윅 공작은 신성 로마 제국의 세습 선제후가 되었다. 1701년 왕위 계승법에 따라 선제후 소피아와 그녀의 후손이 영국의 왕족으로 지정되었고, 라이프니츠는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라이프니츠는 1674년부터 미적분 연구를 시작하여 1675년에 초기 증거를 남겼고, 1677년에는 일관된 시스템을 완성했으나 1684년까지 발표하지 않았다.[49] 그의 주요 수학 논문은 1682년과 1692년 사이에 ''학자록''에 게재되었으며, 이는 그의 수학적, 과학적 명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52]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라이프니츠에게 브런즈윅가의 역사를 쓰도록 의뢰했고, 라이프니츠는 1687년부터 1690년까지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자료를 수집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이 역사서를 완성하지 못했고, 19세기에 이르러서야 그의 자료가 3권으로 출판되었다.
1691년, 라이프니츠는 볼펜뷔텔에 있는 헤르초크 아우구스트 도서관의 사서로 임명되었다.
1708년, 존 케일은 라이프니츠가 뉴턴의 미적분을 표절했다고 비난했고, 이는 미적분 우선권 논쟁으로 이어져 라이프니츠의 남은 생애를 어둡게 했다.[52]
1712년, 라이프니츠는 빈에서 2년간 거주하며 합스부르크가의 황실 법정 평의원으로 임명되었다. 1714년 앤 여왕의 사망으로 선제후 조지 루이스가 영국의 조지 1세가 되었으나, 라이프니츠는 브런즈윅 가문의 역사서를 완성하지 못해 런던으로 가지 못했다. 조지 1세는 라이프니츠를 런던 궁정에 포함시키는 것을 뉴턴에 대한 모욕으로 여겼고, 그의 친한 친구였던 선제후 미망인 소피아도 1714년에 사망했다.
1716년, 북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러시아 차르 표트르 대제는 바트 피르몬트에 들러 1708년부터 러시아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1711년 고문으로 임명된 라이프니츠를 만났다.[53]
2. 4. 개인적인 삶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1646년 30년 전쟁이 끝날 무렵 색소니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로테스탄트이자 철학적 유신론자였으며,[57][58][59][60] 평생 삼위일체를 따르는 기독교인이었다.[61]그는 라이프치히 대학교 철학 교수였던 아버지 프리드리히 라이프니츠와 어머니 카타리나 쉬먹 사이에서 태어났으며,[211] 같은 해 7월 3일 성 니콜라스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대부는 루터란 신학자 마틴 게이어였다. 6살 때 아버지가 사망한 후, 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아버지의 개인 서재를 상속받아 어린 나이부터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접할 수 있었다. 1653년에는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 학원에 입학했다. 1661년 니콜라이 학원을 졸업하고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입학하여 수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1663년 6월에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철학 학사 논문을 제출하고, 4개월 동안 예나 대학교로 이동하여 수학, 법학, 역사학을 공부했다. 10월에 라이프치히 대학교로 돌아와 1664년에는 철학 석사 논문을 제출하고 석사 학위를 받았다. 1666년에는 뉘른베르크 근교의 알트도르프 대학교로 옮겨 법학 박사 논문을 제출하고, 같은 해 11월에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212]
라이프니츠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50세에 한 여성에게 청혼했지만 거절당했다.[54] 그는 돈에 대해 불평하기도 했지만, 유일한 상속인인 여동생의 의붓아들에게 상당한 재산을 남긴 것으로 보아 브라운슈바이크 가문으로부터 상당한 수입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외교관들에게 흔했던 비도덕적인 행위를 하기도 했으며, 미적분 논쟁에서 불리하게 작용했던 개인 원고의 날짜를 소급하여 수정하기도 했다.[55]
그는 매력적이고 예의 바른 성격으로, 유머와 상상력이 풍부했다.[56] 유럽 전역에 걸쳐 많은 친구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1668년에는 마인츠 선제후를 섬겼으며, 이 시기에 많은 사람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213] 1672년에는 마인츠 선제후의 명으로 루이 14세에게 이집트 원정을 제안하기 위해 파리에 머물렀지만, 프랑스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673년 후원자였던 마인츠 선제후가 사망하자 파리에서 여러 학자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직업을 찾았다. 1675년에는 미적분법을 발견했다. 1676년, 하노버로 이주하여 카렌베르크 변경백 요한 프리드리히의 고문관 겸 도서관장으로 임명되었고, 죽을 때까지 하노버 궁정을 섬겼다. 1678년에는 하르츠 광산 개량 사업을 지시받았으나 7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 1687년부터 1690년까지 벨펜 가문의 가계사 편찬을 위해 남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1697년에는 "중국 최신 사정"을 출판했다. 1700년 베를린으로 초청되어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 설립에 기여하고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214] 1710년에는 『弁神論』을 익명으로 발표했다. 171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에 의해 제국 궁정 고문관으로 임명되었다. 1714년에는 『모나도로지』의 초고를 완성했지만, 출판은 그의 사후인 1720년에 이루어졌다. 1716년, 하노버에서 생을 마감했다.
3. 철학
라이프니츠는 형이상학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걸로 유명하다. 그는 "왜 무가 아니고 무언가가 존재하는가"[235]라고 물었다. 그는 그에 대한 답으로 "왜냐하면 무는 그 어떤 것보다 더 단순하고 더 용이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가 사물들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전제한다면, 우리는 왜 그들이 그렇게 존재해야만 하고 달리 존재해서는 안 되는가에 대해서 이유를 진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라이프니츠의 철학 사상은 주로 단편적인 글들, 즉 논문, 사후에 출판된 원고, 그리고 서신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단편적으로 보인다. 그는 두 권 분량의 철학 논문을 저술했지만, 1710년의 『테오디세』(Théodicée)만 생전에 출판되었다.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철학적 시작을 1686년에 니콜라 몰리네르와 앙투안 아르노 사이의 지속적인 논쟁에 대한 논평으로 저술한 『형이상학 논고』(Discourse on Metaphysics)로 거슬러 올라간다.[62] 이는 아르노와의 광범위한 서신 왕래로 이어졌고; [62] 이 논고와 서신들은 19세기까지 출판되지 않았다. 1695년 라이프니츠는 "자연과 실체의 교통에 관한 새로운 체계"(New System of the Nature and Communication of Substances)라는 논문으로 유럽 철학계에 공식적으로 등장했다.[63] 1695년에서 1705년 사이에 그는 존 로크의 1690년 저서 『인간 오성에 관한 에세이』(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에 대한 장문의 논평인 『인간 오성에 관한 새로운 에세이』(New Essays on Human Understanding)를 저술했지만, 1704년 로크의 사망 소식을 듣고 출판 의지를 잃어 『새로운 에세이』는 1765년까지 출판되지 않았다. 1714년에 쓰여져 사후에 출판된 『모나돌로지』(Monadologie)는 90개의 격언으로 구성되어 있다.
라이프니츠는 또한 "최초의 진리"(Primae veritates)라는 단편 논문을 저술했는데, 이는 루이 쿠튀라에 의해 1903년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518–523쪽).[64] 이 논문은 형이상학에 대한 그의 견해를 요약하고 있다. 이 논문에는 날짜가 없었는데, 그가 1689년 비엔나에서 이 논문을 썼다는 것은 1999년에야 비로소 밝혀졌다. 당시 계속되고 있던 비평판이 마침내 1677년부터 1690년까지 라이프니츠의 철학적 저술들을 출판했기 때문이다.[65] 쿠튀라의 이 논문에 대한 해석은 특히 분석철학자들 사이에서 20세기 라이프니츠에 대한 사고에 큰 영향을 미쳤다. 1688년까지 라이프니츠의 모든 철학적 저술들을 꼼꼼하게 연구한 머서(2001)는 (1999년 비평판에 추가된 내용을 바탕으로) 쿠튀라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았다.
라이프니츠는 1676년 바뤼크 스피노자를 만나 그의 미출판 저술들을 읽었고, 그 이후로 스피노자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와 친구가 되어 그의 강력한 지성에 감탄했지만, 스피노자의 결론, [66] 특히 그것이 기독교 정통 신앙과 일치하지 않을 때는 실망했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와 달리 라이프니츠는 대학에서 철학 교육을 받았다. 그는 라이프치히(Leipzig) 교수였던 야코프 토마시우스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는 또한 라이프니츠의 철학 학사 논문을 지도했다.[67] 라이프니츠는 프란시스코 수아레스, 즉 루터교 대학에서도 존경받는 스페인의 예수회 신부의 저술도 읽었다.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 호이겐스, 뉴턴, 로버트 보일의 새로운 방법과 결론에 깊은 관심을 가졌지만, 그가 교육받은 기존 철학적 사상이 그의 연구에 대한 견해에 영향을 미쳤다.
=== 원리 ===
라이프니츠는 다양하게 일곱 가지 기본적인 철학적 원리 중 하나 또는 다른 원리를 언급했다.[68]
- 항등/모순. 어떤 명제가 참이라면 그 명제의 부정은 거짓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 동일자의 동일성. 두 개의 구별되는 사물은 모든 속성을 공유할 수 없다. x가 가지고 있는 모든 술어를 y도 가지고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면, 실체 x와 y는 동일하다. 두 가지 구별할 수 없는 것을 상정하는 것은 두 가지 이름으로 같은 것을 상정하는 것이다. "동일자의 동일성"은 현대 논리와 철학에서 자주 언급된다. 특히 입자 철학과 양자 역학으로부터 가장 많은 논쟁과 비판을 받았다. 이것의 역은 종종 라이프니츠 법칙 또는 동일자의 불가분성이라고 불리며, 대부분 논란의 여지가 없다.
- 충분 이유의 원리. "어떤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 어떤 사건이 발생하기 위해서, 어떤 진리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69]
- 전성적 조화.[70] "[각 실체의 적절한 본성은 하나에게 일어나는 일이 다른 모든 것들에게 일어나는 일과 일치하도록 하지만, 서로 직접적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형이상학 논고』, XIV) 떨어뜨린 유리가 깨지는 것은 바닥에 부딪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 바닥과의 충격이 유리를 깨뜨리도록 "강요"하기 때문이 아니다.
- 연속성의 법칙. ''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71] (문자 그대로, "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
- 낙관론. "하느님은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신다."[72]
- 충만의 원리. 라이프니츠는 모든 가능성 중 가장 좋은 세계는 모든 진정한 가능성을 실현할 것이라고 믿었고, 『테오디세』에서 이 모든 가능성 중 가장 좋은 세계는 모든 가능성을 포함할 것이며, 우리의 유한한 영원에 대한 경험은 자연의 완벽성에 이의를 제기할 이유를 주지 않는다고 주장했다.[73]
라이프니츠는 때때로 특정 원리에 대한 합리적인 옹호를 제시했지만, 더 자주 당연하게 여겼다.[74]
모나돌로지(단자론)과 예정조화설을 제창하였다. 그의 사상은 단순한 철학, 형이상학의 범위에 그치지 않고, 논리학, 기호학, 심리학, 수학, 자연과학 등의 매우 넓은 영역에 걸쳐 있다. 또한 동시에, 그것들을 개별 학문으로 연구할 뿐만 아니라, “보편학”으로서 체계화하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학문적 경향으로는, 일반적으로 데카르트를 시작으로 하는 대륙 합리론의 흐름 속에 위치 지워지지만, 존 로크의 경험론에도 깊이 배우고, 로크의 데카르트 비판을 받아 정신과 물질을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존재론 및 거기서 생기는 인식론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세계 전체를 표상하는 모나드의 집합으로 보는 존재론으로부터 합리론, 경험론의 대립을 회복하려고 했다고 할 수 있다.
모나돌로지의 입장에 서 있는 라이프니츠에게 있어서, 인식은 주체와 객체 사이에 생기는 작용이 아니며, 따라서 직관도 경험도 아니다. 자신의 사상을 로크의 사상과 비교하면서 명확히 하는 시도로서, 대저 「인간 지성 신론」을 집필했지만, 탈고 직후에 로크가 사망했기 때문에(1704년) 공개하지 않았다. 이것이 공개되는 것은 라이프니츠의 사후 49년이 지난 1765년의 일이었다. 라이프니츠의 인식론에는, 무의식 사상의 선취도 보인다. 또한, 후설이나 하이데거를 비롯한 현상학 연구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아 여러모로 언급되고 있다.
더욱이 라이프니츠는,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필연적 진리는 모든 가능 세계에서 참이 되는 진리이다”라는 가능세계 의미론에 기반하는 양상 이해의 선구자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루돌프 카르납의 『의미와 필연성』을 시초로 하여, 그 후 어빈 플랜틴가나 데이비드 루이스 등의 영향도 있어, 라이프니츠의 양상 개념에 대한 통설로 정착된 감이 있다.
그 외, 최근에는, 최말년(1714년)에 저술한 『중국 자연 신학론』이 주목을 받아, 비교 사상의 관점에서도(서양과 동양을 막론하고)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라이프니츠는 당대의 저명한 지식인들과 거의 모두 교류했다고 해도 좋을 만큼 활동적이었다.
-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1676년에 바뤼흐 드 스피노자를 방문한 일이다. 거기서 라이프니츠는 『에티카』의 초고를 보았다. 그러나 정치적 문제도 있었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체 개념과 세계관(특히 "필연성"과 "우연성"과 같은 측면에 대한 논의)의 차이로 인해 스피노자 철학을 평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외에도 말브랑슈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 라이프니츠가 생애 동안 서신을 교환한 상대는 1,000명을 훨씬 넘는다고 알려져 있다. 왕족 귀족부터 완전한 평민에 이르기까지 서신 상대 중에서 특히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인물로는, 『형이상학 서설』을 둘러싸고 서신을 교환했던 앙투안 아르노
, 데카르트주의자 자연과학자이자 피에르 베르의 친구로도 알려진 부르샤르 드 폴더, 말년 10년간 130통에 달하는 서신을 주고받았던 예수회 사제 바르톨로마이우스 드 보스, 최말년 2년간 아이작 뉴턴의 자연과학 및 철학과의 전면적인 대결의 장이 되었던 사무엘 클라크(뉴턴의 제자이자 친구이기도 했다) 등이 알려져 있다.
3. 1. 주요 철학 원리
라이프니츠는 형이상학의 근본적인 질문, "왜 무가 아니고 무언가가 존재하는가"[235]라고 물었다. 그는 답으로 "무는 그 어떤 것보다 더 단순하고 더 용이하기 때문"이며, "사물들이 존재해야만 한다면, 왜 그들이 그렇게 존재해야만 하고 달리 존재해서는 안 되는가에 대해서 이유를 진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235]모나돌로지(단자론)과 예정조화설을 제창한 그의 사상은 철학, 형이상학뿐만 아니라 논리학, 기호학, 심리학, 수학, 자연과학 등 넓은 영역에 걸쳐 있다. 그는 이러한 학문들을 개별적으로 연구할 뿐만 아니라, “보편학”으로서 체계화하려는 구상을 했다. 대륙 합리론의 흐름 속에 있으면서도, 존 로크의 경험론에서 영향을 받아 데카르트 비판을 수용했다. 정신과 물질을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존재론 및 인식론과는 달리, 세계를 모나드의 집합으로 보는 존재론을 통해 합리론과 경험론의 대립을 회복하려 했다.
모나돌로지에 따르면, 인식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작용이 아닌, 직관이나 경험도 아니다.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사상을 로크와 비교하며 『인간 지성 신론』을 집필했지만, 로크의 사망(1704년)으로 공개하지 않았다가 사후 49년이 지난 1765년에 공개되었다. 라이프니츠의 인식론에는 무의식 사상의 선취도 보이며, 후설이나 하이데거를 비롯한 현상학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세기 후반, 라이프니츠는 “필연적 진리는 모든 가능 세계에서 참이 되는 진리이다”라는 가능세계 의미론에 기반하는 양상 이해의 선구자로 여겨졌다. 이러한 생각은 루돌프 카르납의 『의미와 필연성』, 어빈 플랜틴가, 데이비드 루이스 등의 영향으로 라이프니츠의 양상 개념에 대한 통설로 정착되었다.
최근에는 최말년(1714년) 저술한 『중국 자연 신학론』이 주목받아, 비교 사상 관점에서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3. 2. 모나드론
라이프니츠는 형이상학의 근본적인 질문인 "왜 무가 아니고 무언가가 존재하는가"에 대해 "무는 그 어떤 것보다 더 단순하고 더 용이하기 때문"이며, "사물들이 존재해야만 한다면, 왜 그들이 그렇게 존재해야만 하고 달리 존재해서는 안 되는가에 대해서 이유를 진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235]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에 대한 가장 잘 알려진 기여는 『모나돌로지(Monadologie)』에서 설명된 모나드 이론이다. 그는 우주가 모나드라고 알려진 무한한 수의 단순한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론을 제시한다.[75] 모나드는 르네 데카르트 등의 기계론적 철학(mechanical philosophy)의 소립자(corpuscles)와 비교될 수도 있다. 이러한 단순한 실체 또는 모나드는 "자연에서 존재의 궁극적인 단위"이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속성에 의해 존재한다. 각 모나드는 독특하며, 창조와 소멸에만 영향을 받는다.[76] 모나드는 힘(force)의 중심이며, 공간, 물질, 운동은 단순히 현상적인 것이다. 그는 뉴턴에 반대하여 공간, 시간, 운동은 완전히 상대적이라고 주장했다.[77] 아인슈타인은 막스 야머의 책 『공간 개념(Concepts of Space)』 서문에서 라이프니츠주의가 뉴턴주의보다 우월했다고 평가했으며, 조셉 아가시는 라이프니츠가 상대성 이론의 길을 열었다고 주장한다.[79]
라이프니츠의 신에 대한 증명은 『테오디세(Théodicée)』에서 요약할 수 있다.[80] 이성은 모순율과 충족 이유율에 의해 지배되며, 라이프니츠는 모든 것의 첫 번째 이유가 신이라고 결론지었다.[80] 우연적인 세계는 그 존재에 대한 필연적인 이유를 가져야 하며, 라이프니츠는 기하학 책의 무한한 사본 사슬을 예로 들어 "모나드들의 모나드" 또는 신이 있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81]
모나드의 존재론적 본질은 그것의 환원 불가능한 단순성이다. 모나드는 물질적이거나 공간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완전한 상호 독립성으로 인해 모나드 간의 상호 작용은 단지 외관상일 뿐이다. 예정 조화설에 따라 각 모나드는 자신에게 특유한 "지시 사항"의 사전 프로그래밍된 집합을 따르므로 모나드는 각 순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각 모나드는 우주의 작은 거울과 같으며, 자유 의지는 문제가 된다.
모나드는 정신과 물질 사이의 상호 작용, 개별화 부족과 같은 문제점을 제거한 것으로 여겨진다. 모나돌로지(단자론)과 예정조화설을 제창한 그의 사상은 철학, 형이상학뿐만 아니라 논리학, 기호학, 심리학, 수학, 자연과학 등 넓은 영역에 걸쳐 있으며, 이들을 "보편학"으로 체계화하려는 구상을 했다. 대륙 합리론의 흐름 속에 위치하지만, 존 로크의 경험론에도 깊이 배우고, 정신과 물질을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존재론 및 인식론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모나드의 집합으로 보는 존재론으로부터 합리론, 경험론의 대립을 회복하려고 했다.
라이프니츠에게 인식은 주체와 객체 사이에 생기는 작용이 아니며, 직관도 경험도 아니다. 후설이나 하이데거를 비롯한 현상학 연구자들에게 주목받고 있으며, 가능세계 의미론에 기반하는 양상 이해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최근에는 『중국 자연 신학론』이 주목받아 비교 사상의 관점에서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부분이 없는 단순한 실체로 이루어진 복합체인 모나드는 자연 속의 참된 원자(不可分なるもの)이며, 우주 안의 참된 존재자이다. 모나드는 표상(perception)과 욕구(appetite)를 가지고 있어 자발적으로 세계 전체를 자신의 내부에 비추어 세계 전체를 인식하고, 그 내부에 다양성과 변화를 인정할 수 있다. 모나드는 "창이 없다"고 하여 다른 모나드로부터 영향을 받지는 않지만, 신이 창조 시에 마련해 둔 "예정조화"에 의해 다른 모나드와 조화로운 방식으로 자신의 표상을 전개한다.[215]
3. 3. 신정론과 낙관주의
라이프니츠의 저서 《신정론》(Théodicée)[82]은 모든 가능한 세계 중 최선의 세계라는 주장을 통해 세상의 명백한 불완전성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한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전능하고 전지한 신이 창조했기 때문에 이 세상은 가능한 최선이자 가장 균형 잡힌 세계여야 한다. 만약 더 나은 세계가 신에게 알려져 있거나 존재할 수 있다면, 신은 불완전한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 발견될 수 있는 명백한 결함들은 모든 가능한 세계에 존재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신은 그러한 결함을 배제한 세계를 창조했을 것이다.[83]라이프니츠는 신학(종교)과 철학의 진리가 서로 모순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성과 신앙은 모두 "신의 선물"이기 때문에, 이 둘의 갈등은 신이 스스로와 싸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정론》은 라이프니츠가 자신의 철학 체계와 기독교 교리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조정하려는 시도이다.[84]
라이프니츠는 이성과 신앙이 완전히 조화되어야 하므로, 이성으로 방어할 수 없는 신앙의 어떤 교리도 거부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기독교 유신론의 중심적인 비판 중 하나인 악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한다.[85] 신은 지혜와 능력에 있어 무한하지만, 인간은 지혜와 의지(행동할 능력) 모두에 있어서 제한되어 있다. 이것은 인간을 잘못된 믿음, 잘못된 결정 및 비효율적인 행동으로 이끈다. 신은 인간에게 고통과 고난을 가하지 않지만, 인간이 잘못된 결정을 식별하고 수정할 수 있는 수단으로, 그리고 진정한 선과의 대조로서 '형이상학적 악'(불완전성)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도덕적 악'(죄)과 '물리적 악'(고통과 고난) 모두를 허용한다.[86]
인간의 행동이 궁극적으로 신에게서 발생하는 이전의 원인으로부터 흘러나오고 형이상학적 확실성으로 신에게 알려져 있지만, 개인의 자유 의지는 자연 법칙 내에서 행사되며, 그 선택은 "놀라운 자발성"에 의해 결정되어 개인에게 엄격한 예정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라이프니츠는 모나돌로지(단자론)과 예정조화설을 제창하였다. 그의 사상은 형이상학의 범위에 그치지 않고, 논리학, 기호학, 심리학, 수학, 자연과학 등의 매우 넓은 영역에 걸쳐 있다. 그는 개별 학문을 연구할 뿐만 아니라, “보편학”으로서 체계화하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대륙 합리론의 흐름 속에 위치하지만, 존 로크의 경험론에도 깊이 배우고, 로크의 데카르트 비판을 받아 정신과 물질을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존재론 및 인식론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모나드의 집합으로 보는 존재론으로부터 합리론, 경험론의 대립을 회복하려고 했다.
라이프니츠의 인식론에는 무의식 사상의 선취도 보이며, 후설이나 하이데거를 비롯한 현상학 연구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20세기 후반, 라이프니츠는 “필연적 진리는 모든 가능 세계에서 참이 되는 진리이다”라는 가능세계 의미론에 기반하는 양상 이해의 선구자로 여겨지게 되었다.
최근에는 최말년에 저술한 『중국 자연 신학론』이 주목을 받아, 비교 사상의 관점에서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3. 4. 형이상학 논고
라이프니츠는 "왜 무가 아니고 무언가가 존재하는가"[235]라는 형이상학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는 "무는 그 어떤 것보다 더 단순하고 더 용이하기 때문"이라고 답하며, "사물들이 존재해야만 한다면, 왜 그들이 그렇게 존재해야만 하고 달리 존재해서는 안 되는가에 대해서 이유를 진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235]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 질문을 "형이상학의 근본적인 질문"이라고 불렀다.[89][90] 라이프니츠는 "도대체 왜 무가 아닌 유가 있는가? 충분한 이유…는 … 그 존재 이유를 스스로 내포하는 필연적인 존재인 실체 속에서 발견된다."라고 썼다.[88]라이프니츠에게 "신은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이며, 모든 종류의 완전성이 "가장 높은 수준으로 그(신)에게 속한다"(I).[235] 그는 완전성을 가장 실질적인 결과를 낳는 것의 가장 단순한 형태로 묘사한다 (VI).[235] 라이프니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덜 완전하게 행동한다면 불완전하게 행동하는 것"이며, 신은 완전한 존재이므로 불완전하게 행동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III).[235] 신이 불완전하게 행동할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세상에 대해 내리는 결정은 완벽해야 한다. 라이프니츠는 또한 신을 사랑하는 자들은 해를 입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을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인데, "신이 원하는 것을 원하도록 마음이 기울어져 있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IV).[235] 라이프니츠는 우리가 진정으로 신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의 뜻에 따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에 만족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IV).[235]
신은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이므로 (I),[235] 신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세상을 만들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235] 라이프니츠는 신의 뜻에 따라 우리는 신이 "모든 주인 중 가장 훌륭한 분"이며, 그의 선이 성공할 때를 알 것이므로, 따라서 우리는 그의 선한 뜻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IV).[235] 라이프니츠는 창조주 때문에 작품을 칭찬해서는 안 되며, 그가 한 일 때문에 창조주를 칭찬해야 한다고 말한다 (II).[235]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뜻 때문에 지구가 좋다고 말하고, 어떤 선의 기준에 따라 좋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반대되는 행동도 칭찬할 만하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하신 일을 칭찬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II).[235] 라이프니츠는 다른 원리와 기하학은 단순히 하나님의 뜻에서 나올 수 없으며, 그의 이해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다.[87]
그의 사상은 단순한 철학, 형이상학의 범위를 넘어, 논리학, 기호학, 심리학, 수학, 자연과학 등의 매우 넓은 영역에 걸쳐 있다. 또한, “보편학”으로서 체계화하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대륙 합리론의 흐름 속에 위치하지만, 존 로크의 경험론에도 깊이 배우고, 데카르트 비판을 받아들여 정신과 물질을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존재론 및 인식론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모나드의 집합으로 보는 존재론으로부터 합리론, 경험론의 대립을 회복하려고 했다. 라이프니츠의 인식론에는 무의식 사상의 선취도 보이며, 후설이나 하이데거를 비롯한 현상학 연구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라이프니츠는 "필연적 진리는 모든 가능 세계에서 참이 되는 진리이다”라는 가능세계 의미론에 기반하는 양상 이해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이러한 생각은 루돌프 카르납의 『의미와 필연성』을 시작으로, 어빈 플랜틴가나 데이비드 루이스 등의 영향으로 라이프니츠의 양상 개념에 대한 통설로 정착되었다.
3. 5. 상징적 사고와 논리
라이프니츠는 인간의 추론을 계산으로 환원하여 의견 차이를 해소할 수 있다고 믿었다.[91][92][93] 그는 수학처럼 명확한 추론을 통해 실수를 발견하고, 논쟁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계산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으로, 그는 기호 논리와 유사한 계산기(calculus ratiocinator)를 고안했다.[94]라이프니츠는 기호가 인간의 이해에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좋은 표기법 개발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95] 그의 미적분 표기법은 이러한 기술을 보여주는 예시이다. 그는 기호와 표기법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기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95]
라이프니츠는 여기서 더 나아가, 각 기본 개념이 고유한 "실제" 기호로 표현되는 인간 사고의 알파벳을 기반으로 하는 ''보편 특성(characteristica universalis)''의 창조를 제안했다.[96] 그는 복잡한 생각이 단순한 생각에 대한 기호를 결합하여 표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라이프니츠는 소인수분해의 고유성이 보편적 특성에서 소수의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는데, 이는 괴델 번호 매기기를 예견한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보편 특성''을 보편 언어 또는 문자로 생각했다. 1676년에 그는 기존의 대수학과 표기법을 모델로 하는 "사고의 대수학"을 고안했다. ''보편 특성''에는 논리적 계산, 조합론, 대수학, 위치 해석(analysis situs)(상황 기하학), 보편적 개념 언어 등이 포함되었다.[98] 라이프니츠의 아이디어는 튜링 완전성과 같이 계산이 동등한 보편 언어를 정의하는 데 사용된 20세기의 형식 시스템 발전을 예견한 것으로 평가된다.
라이프니츠의 사상은 철학, 형이상학뿐만 아니라 논리학, 기호학, 심리학, 수학, 자연과학 등 넓은 영역에 걸쳐 있다. 그는 대륙 합리론의 흐름 속에 있으면서도, 존 로크의 경험론을 수용하여 정신과 물질을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존재론 및 인식론과는 다른, 세계를 모나드의 집합으로 보는 존재론을 제시했다.
라이프니츠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작용이 아닌, 모나돌로지(단자론)에 기반한 인식을 주장했다. 그의 인식론에는 무의식 사상의 선취도 보이며, 후설이나 하이데거 등 현상학 연구자들에게 주목받았다.
20세기 후반, 라이프니츠는 "필연적 진리는 모든 가능 세계에서 참이 되는 진리이다"라는 가능세계 의미론에 기반하는 양상 이해의 선구자로 여겨지게 되었다. 또한, 최말년 저술인 『중국 자연 신학론』은 비교 사상 관점에서 서양과 동양을 아우르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3. 6. 형식 논리
라이프니츠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프레게(Gottlob Frege)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논리학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99] 그는 현재 연결사, 선언, 부정, 항등, 집합 포함, 공집합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주요 속성을 설명했다. 라이프니츠 논리의 원리와 그의 전체 철학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우리의 모든 사상은 인간 사고의 알파벳을 형성하는 매우 적은 수의 단순한 사상들로부터 복합적으로 구성된다.
# 복합적인 사상들은 산술적 곱셈과 유사한 균일하고 대칭적인 결합에 의해 이러한 단순한 사상들로부터 나온다.
20세기 초에 등장한 형식 논리는 최소한 일항 부정과 어떤 담화의 영역에 걸쳐 있는 양화된 변수를 필요로 한다. 라이프니츠는 생전에 형식 논리에 관한 어떤 것도 출판하지 않았으며, 그가 이 주제에 대해 쓴 것 대부분은 작업 초안으로 남아있다.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그의 ''서양철학사''에서 라이프니츠가 그의 미발표 저술에서 논리를 200년 후에야 달성된 수준으로 발전시켰다고 주장했다.
러셀은 라이프니츠의 철학적 사상과 주장에서 기본적인 모나드 각각이 전체 우주를 반영한다는 것이 사물 사이의 '관계'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기각하려는 라이프니츠의 의식적인 선택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따른다는 것을 발견했다. 라이프니츠는 공간과 시간을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것으로 선언했다.[100]
1690년 라이프니츠가 발견한 '''개념의 대수'''[101][102](부울 대수와 연역적으로 동등함)[103]와 관련된 형이상학은 현재 계산 형이상학에서 관심의 대상이다.[104]
4. 수학
라이프니츠는 아이작 뉴턴과 함께 미적분학(미분적분학)을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으며,[120] 현재 사용되고 있는 미분과 적분의 기호는 라이프니츠가 고안한 것이다.[216] 그 당시 추상적이던 삼각함수, 로그함수의 수학적 개념을 1692년과 1694년에 명료화시켰으며,[223] 가로좌표, 세로좌표, 기울기, 현, 수직선과 같은 기하학적 개념들을 함수의 그래프로부터 이끌어 내었다.[223] 18세기에는 함수와 이런 기하학적 개념들 사이의 연관성이 약해졌다.
라이프니츠는 선형 방정식의 계수를 배열(오늘날의 행렬)로 생각하여 해를 쉽게 찾는 방법을 고안했으며,[109] 이 방법은 후에 가우스 소거법으로 명명되었다. 라이프니츠는 연립일차방정식 계수들을 배열하여, 이제는 행렬이라고 불리는 배열로 정리하여 해가 존재하는 경우 연립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방법을 고안했다.[109] 이 방법은 나중에 가우스 소거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라이프니츠는 일본 수학자 세키 다카카즈도 독자적으로 발견했지만, 행렬식의 기초와 이론을 마련했다.[110][111] 그의 연구는 여인수를 이용하여 행렬식을 계산하는 것을 보여준다.[112] 여인수를 이용한 행렬식 계산은 행렬식의 라이프니츠 공식이라고 한다. 이 방법으로 행렬식을 구하는 것은 큰 n에 대해서는 비실용적이며, n!개의 곱을 계산해야 하고 n-순열의 개수만큼 계산해야 한다.[113] 그는 또한 행렬식을 이용하여 연립일차방정식을 풀었는데, 이는 현재 크래머 공식이라고 불린다. 행렬식에 기반한 연립일차방정식 풀이 방법은 1684년 라이프니츠가 발견했으며 (가브리엘 크래머는 1750년에 그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111] 가우스 소거법은 의 산술 연산을 필요로 하지만, 선형대수학 교재는 여전히 LU 분해보다 여인수 전개를 먼저 가르친다.[114][115]
라이프니츠는 2진법을 연구하였으며, 중국 고전 주역에 나오는 선천도가 자신이 고안한 2진법 계산술과 관련이 있음을 발견했다. 라이프니츠의 π 공식은 다음과 같이 나타낸다.
:
라이프니츠는 원을 "가장 간단하게 이 급수, 즉 번갈아 더하고 빼는 분수들의 집합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썼다.[116] 그러나 이 공식은 많은 항을 사용해야만 정확하며, 소수점 아래 8자리까지 정확한 |4}} 값을 얻으려면 1,000만 개의 항을 사용해야 한다.[117] 라이프니츠는 평행선 공준을 증명하려고 시도하는 동안 직선에 대한 정의를 만들려고 시도했다.[118] 대부분의 수학자들은 직선을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로 정의했지만, 라이프니츠는 이것이 직선의 정의라기보다는 직선의 성질일 뿐이라고 생각했다.[119]
라이프니츠는 “위치해석(analysis situs)”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이며,[127]이 용어는 19세기에 현재의 위상수학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라이프니츠가 "직선은 곡선과 같고, 어떠한 부분도 전부와 닮았다."라고 쓴 것을 보면, 라이프니츠는 2세기 앞서 위상수학을 예견한 것이다. 프랙탈 기하학은 라이프니츠가 말한 자기유사성과 연속의 성질을 기반으로 브누아 망델브로가 창시한 것이다.
최초의 기계식 계산기 중 하나를 발명한 라이프니츠는 계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훌륭한 사람들이 기계를 사용하면 누구에게든 안전하게 맡길 수 있는 계산이라는 노동에 노예처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108]
5. 과학 및 공학
라이프니츠는 그 당시 등장하던 정역학과 동역학에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종종 데카르트와 뉴턴과 의견을 달리했다.[225] 그는 운동 에너지와 위치 에너지를 바탕으로 운동(동역학)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고안했는데, 뉴턴이 공간을 절대적인 것으로 확신한 반면, 라이프니츠는 공간을 상대적인 것으로 보았다. 라이프니츠의 성숙한 물리적 사고의 중요한 예는 1695년의 《Specimen Dynamicum》이다.[131]
라이프니츠는 뉴턴의 실체론적 견해에 반대하여 관계적 개념의 공간과 시간을 옹호했다.[132][133][134] 일반 상대성 이론의 등장과 그 후 물리학의 역사에서의 연구는 라이프니츠의 입장을 더욱 유리하게 만들었다. 라이프니츠의 프로젝트 중 하나는 뉴턴의 이론을 소용돌이 이론으로 재구성하는 것이었으나,[135] 그의 프로젝트는 물질의 응집력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포함하여 소용돌이 이론을 넘어섰다.[135] 충족 이유율은 최근 우주론에서 언급되었으며, 그의 동일성의 원리는 양자 역학에서 언급되었다.[226]
라이프니츠의 활력은 현대물리학에서의 운동에너지의 2배인 mv2이었다. 그는 특정한 역학계에서 에너지의 총량이 보존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것을 물질의 본질적인 특성으로 여겼다.[136] 라이프니츠의 생각은 영국과 프랑스에서 각각 뉴턴과 데카르트가 옹호하는 운동량 보존과 경쟁 관계로 여겨져, 그 두 나라는 라이프니츠의 생각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오늘날 밝혀진 바에 의하면, 에너지와 운동량 모두 보존되며, 두 가지 접근 방식 모두 유효하다.
지질학에서 라이프니츠는 지구가 융해된 상태의 핵을 가지고 있다고 제안하였는데, 이는 현대 지질학과 일치한다. 발생학에서 그는 전성설 지지자였지만, 유기체들이 무한 가지의 조합이 가능한 미세구조로부터 생겨났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생명과학 및 고생물학에서 라이프니츠는 비교해부학과 화석을 통해 변형설에 관한 놀라운 통찰을 얻었으며, 그의 주요한 업적인 《Protogaea》는 최근에 이르러서야 영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라이프니츠는 최초로 유기체 이론을 연구한 사람이기도 하다.[137] 의학 분야에서 라이프니츠는 당시 의사들에게 자세한 비교 관찰과 검증된 실험에 기반해야 하며, 견고한 과학적 사실과 형이상학적 관점을 구분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심리학에서 라이프니츠는 의식과 무의식 상태의 구분을 제안했다.[138][139][140] 라이프니츠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지만 인지하는 작은 지각들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잠재적 자극의 개념은 그의 작은 지각 이론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151]
공중 위생학 분야에서 라이프니츠는 역학과 수의학을 총괄하는 행정상의 기관을 만들자고 주장했다. 경제학에서 라이프니츠는 세금 개혁과 국민 보험을 제안했고, 무역수지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심지어 라이프니츠는 오늘날의 게임 이론과 유사한 이론을 제안하기도 했다. 사회학에서 라이프니츠는 의사소통 이론의 기반을 닦았다.
라이프니츠는 1671년에 사칙연산을 수행할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하기 시작했고, 수 년에 걸쳐 발전시켜 '단계 계산기'라고 불린 이 발명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받아올림과 받아내림을 완벽하게 자동화시키지는 못했으므로 큰 성공은 아니였다.[232] 라이프니츠는 찰스 배비지와 에이다 러브레이스에 의해서 만들어질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개념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결과, 라이프니츠는 1679년에 펀치 카드의 초기 형태인 공깃돌로 이진수를 표현하는 방식의 기계를 고안했다.[233]
라이프니츠는 최초의 컴퓨터 과학과 정보 이론가일지도 모른다.[230] 젊은 시절에, 라이프니츠는 이진법을 다듬었고 전 생애에 걸쳐 그 체계를 사용했다.[231] 라이프니츠는 라그랑주 다항식과 알고리즘 정보 이론을 예견했다. 라이프니츠의 논리 계산학은 임의의 튜링 기계가 임의의 입력으로 연산하게 되는 만능 튜링 기계의 발명을 앞당겼다.
독일 하노버와 볼펜뷔텔의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면서, 라이프니츠는 도서관학의 창시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 Bodleian 도서관의 색인 체계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다른 색인 체계를 독자적으로 고안했다. 라이프니츠는 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그의 이상언어이론과 논리 계산학은 각각 에스페란토 같은 인공어와 수리논리학을 예견한 것으로 여겨진다.
라이프니츠는 연구에 협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영국 왕립 학회나 프랑스의 파리 과학 아카데미 같은 국립 과학 학사원의 설립을 지지했다. 실제로 라이프니츠는 여행을 통해 독일 드레스덴과 베를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오스트리아 빈에서의 과학 학사원 설립을 직접적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 1700년에 설립된 베를린 학사원의 회장을 맡았으며, 이 학회는 후에 독일 과학 학회가 되었다.[234]
6. 법률 및 윤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제외하면, 라이프니츠만큼 실용적인 일을 많이 한 철학자는 드물다. 라이프니츠의 법률, 윤리, 정치에 관한 저술[241]은 오랫동안 영어권 학자들에게 간과되었지만, 최근 들어 이러한 상황이 바뀌고 있다.[242]
라이프니츠는 토머스 홉스처럼 절대군주제나 폭정을 옹호하지 않았으며, 존 로크의 정치적 견해를 반영하지도 않았다. 1695년 바론 J.C. 보이네버그의 아들 필립에게 보낸 편지에서 라이프니츠는 "나는 국왕의 권력과 복종에 대한 질문에 대해 왕자(王者)에게는 국민들이 저항할 권리를 가지라고 설득하는 것이 좋고, 반대로 국민들에게는 나라에 수동적으로 복종하라고 설득하는 것이 좋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나는 원칙적으로 혁명의 사악함이 혁명을 일으키는 것보다 훨씬 악하다는 그로티우스의 의견에 동의한다."라고 밝혔다. 다만, 왕자가 도를 넘어설 경우 참고 견딜 의무는 사라진다고 보았으며, 이 경우 매우 드물지만 과도함은 부족함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경고했다.[243]
1677년, 라이프니츠는 각 나라를 대표하는 자가 모여 그들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고 운영되는 유럽 연맹을 촉구했다.[244] 이는 유럽 연합을 예측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는 유럽이 하나의 종교를 채택할 것이라고 믿었으며, 1715년에 이러한 제안을 반복했다. 또한 종교 간 및 다문화 프로젝트를 제안하여 보편적인 사법 시스템을 만들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언어학(특히 중국학), 도덕 및 법철학, 경영, 경제학 및 정치를 결합했다.[177]
라이프니츠는 알트도르프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법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실무에서 자연법까지 광범위하였다. 그는 법학의 후진성과 난잡함에 불만을 품고, 에르하르트 바이겔(Erhard Weigel)의 지도 아래 합리주의적 수학적 방법으로 법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다.[178] 이러한 시도는 『법에서 수집된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표본 연구(Specimen Quaestionum Philosophicarum ex Jure collectarum)』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복잡한 사건들에 관한 취임 논문』[178]은 초기 조합론을 사용하여 일부 법적 분쟁을 해결하고, 1666년 『조합술에 관한 논문』[179]은 예시로 간단한 법적 문제를 포함한다.
법적 및 도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합론적 방법의 사용은 아타나시우스 키르허(Athanasius Kircher)와 다니엘 슈벤터(Daniel Schwenter)를 통해 라이문도 율리(Ramón Llull)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80] 1660년대 후반, 요한 필립 폰 쇤보른(Johann Philipp von Schönborn)은 법 체계 개정을 발표하고 라이프니츠에게 직책을 제공했다. 라이프니츠는 『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새로운 방법』(The New Method of Teaching and Learning the Law)을 저술하여[181] 법 교육 개혁을 제안했고, 폰 쇤보른의 인정을 받아 그 직책을 얻게 되었다. 1667년부터 1672년까지 마인츠에서 일하면서 라이프니츠는 법의 보편적인 합리적 핵심을 찾고, '정의 과학'[182]을 발견하려는 시도를 했다. 『자연법 원리』(Elementa Juris Naturalis)를 통해 권리(가능성)와 의무(필요성)의 양상 개념을 구축했다.[184] 라이프니츠는 사망할 때까지 초고 작업을 계속하고 그의 아이디어를 서신 교환을 통해 홍보했다. 또한 주권을 연구하고, 독일과 유럽의 연방화를 구상하였다.
7. 중국 철학
라이프니츠는 중국 문명에 대한 관심을 보인 최초의 유럽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중국에 거주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글을 통해 중국에 대해 접했던 것으로 보이며, 『중국 철학자 공자(Confucius Sinarum Philosophus)』의 출판 첫 해에 이를 읽었다.[237][189] 라이프니츠는 유럽인들이 중국 유교 전통 윤리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보았다.[237] 그는 중국 한자가 보편적 특성을 띠는 부지불식간의 형태일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였다.[238][190]
그는 『주역(周易)』의 괘(卦)가 000000부터 111111까지 이르는 이진법 숫자와의 연관성에 대해 주목하였고, 이는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는 철학적 수학의 한 종류로서 중국인들이 도달한 중요한 업적이라고 결론내렸다.[238][190] 라이프니츠는 중국 황제에게 기독교가 무엇인지 보여줄 수 있는 것으로서의 2진법에 대해 말하면서 이것이 황제를 개종시킬 수 있는 방식이기를 바랐다.[239][187] 그는 유학적 개념을 유럽인들의 신앙에 수용시키려고 한 유일한 희대의 서구 철학자였다.[240][191]
라이프니츠가 중국 철학에 보인 관심은 중국 철학이 자신의 것과 유사하다는 생각에서 기인하였다.[237][189] 역사학자 휴즈(E.R. Hughes)는 '단자(simple substance)'와 '예정조화(pre-established harmony)'라는 라이프니츠의 개념이 유학의 영향을 곧바로 받았으며, 이러한 것들은 라이프니츠가 '중국 철학자 공자'를 읽고 있던 시기에 잉태되었다고 지적하였다.[237][189]
8. 저술 활동
라이프니츠는 주로 학술적인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저술했다. 생전에 그는 많은 팸플릿과 학술 논문을 출판했지만, 철학 저서로는 『결합술에 관하여』와 『변신론』 단 두 권뿐이었다.[202] 그는 브런스비크뤼네부르크가를 위해 익명으로 많은 팸플릿을 출판했는데, 특히 주권의 본질에 대한 주요 논의인 "De jure suprematum"을 포함한다.[202] 존 로크 사후 출판을 보류했던 그의 중요한 저서 『인간오성신론』은 사후에 출판되었다.[202]
1895년 보데만이 라이프니츠의 원고와 서신 목록을 완성했을 때, 1,000명이 넘는 수신자에게 보낸 약 15,000통의 편지와 40,000점이 넘는 기타 자료 등 그의 방대한 유고(Nachlass)의 규모가 명확해졌다.[202] 이 편지들 중 상당수는 수필 길이이며, 1700년 이후의 편지를 포함한 상당 부분이 아직 출판되지 않았고, 출판된 것조차도 최근 수십 년 동안에야 나온 것이 많다.[202] [https://leibniz-katalog.bbaw.de/en 라이프니츠 판본 목록]의 67,000개가 넘는 기록은 그의 알려진 저술과 그에게서 온 편지, 그리고 그에게 보낸 편지를 거의 모두 포함한다. 라이프니츠는 자신이 얼마나 산만하고 분주한지, 기록 보관소에서 낡은 문서를 찾고 미출판 문서를 찾아 브런스비크가의 역사에 대한 통찰을 얻으려 노력하며, 엄청난 수의 편지에 답장하고, 동시에 많은 수학적 결과, 철학적 사고, 문학적 혁신들이 있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편지에서 묘사했다.[202]
라이프니츠 저술의 비평판본[203]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 제1부: 『정치, 역사, 일반 서신』 25권, 1666~1706년.
- 제2부: 『철학 서신』 3권, 1663~1700년.
- 제3부: 『수학, 과학, 기술 서신』 8권, 1672~1698년.
- 제4부: 『[https://leibniz-potsdam.bbaw.de/ 정치 저술]』 9권, 1667~1702년.
- 제5부: 『[https://leibniz-potsdam.bbaw.de/ 역사 및 언어학 저술]』 준비 중.
- 제6부: 『철학 저술』 7권, 1663~1690년, 그리고 『인간오성신론』.
- 제7부: 『수학 저술』 6권, 1672~1676년.
- 제8부: 『과학, 의학, 기술 저술』 1권, 1668~1676년.
1901년 라이프니츠 유고 전체의 체계적인 목록 작성이 시작되었으나,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냉전의 "철의 장막"으로 인한 독일 분단으로 학자들이 분리되고 그의 문학 유산 일부가 분산되어 수십 년 동안 방해받았다.[202] 1985년 재구성되어 독일 연방 및 주(Länder) 아카데미의 공동 프로그램에 포함된 이 프로젝트는 약 20만 페이지의 필사본과 인쇄본에 담긴 7개 언어의 저술을 다루어야 했다.[202] 그 이후 포츠담, 뮌스터, 하노버, 베를린의 지부는 평균 870페이지의 비평판본 57권을 공동 출판하고 색인 및 콘코르당스 작업을 준비했다.[202]
다음은 라이프니츠의 주요 저술 목록이며, 작품이 완성된 연도를 기준으로 한다.
- 1666년 (출판 1690년). ''결합술에 관하여''[202]
- 1671년. ''Hypothesis Physica Nova'' (''새로운 물리적 가설'')[202]
- 1673년 철학자의 신조[202]
- 1684년 10월. "Meditationes de cognitione, veritate et ideis" ("지식, 진리, 관념에 대한 명상")[202]
- 1684년 11월. "극대극소를 위한 새로운 방법"[202]
- 1686년. ''형이상학 논고''[202]
- 1695년. ''Système nouveau de la nature et de la communication des substances'' (''자연과 실체의 교통에 대한 새로운 체계'')[202]
- 1703년. "Explication de l'Arithmétique Binaire" ("이진법에 대한 설명")[202]
- 1710년. ''변신론''[202]
- 1714년. "Principes de la nature et de la Grâce fondés en raison"[202]
- 1714년. ''모나돌로지''[202]
- 1704년 (출판 1765년). ''인간오성신론''[202]


9. 사후 평가 및 영향
라이프니츠가 사망했을 당시 그의 명성은 쇠퇴하여, 단 한 권의 책, 『테오디세』[192]만으로 기억되었다. 그 책의 중심 논제는 볼테르의 『캉디드』에서 풍자되었는데, 이는 라이프니츠 사상에 대한 평가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크리스티안 폰 볼프의 독단적인 관점 또한 라이프니츠의 명성에 해를 끼쳤다.[193] 라이프니츠는 데이비드 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193] 그러나 당시 철학적 유행은 라이프니츠가 지지했던 합리론과 체계 구축에서 멀어지고 있었고, 그의 법률, 외교, 역사에 대한 업적은 일시적인 관심사로 여겨졌으며, 방대한 서신의 가치는 인식되지 못했다.
1765년 『Nouveaux Essais』의 출판과 함께 라이프니츠의 명성은 회복되기 시작했다. 1768년 루이 뒤탕은 라이프니츠 저술의 최초 다권본을 편집했고, 19세기에는 여러 판본이 뒤따랐다. 앙투안 아르노, 새뮤얼 클라크, 하노버의 소피아, 하노버의 소피아 샤를로테 등과의 서신도 출판되었다.
1900년 버트런드 러셀은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발표했고,[194] 루이 쿠튀라는 라이프니츠의 논리학에 관한 저술을 편집, 출판했다. 이는 라이프니츠가 20세기 영어권 분석 및 언어 철학자들 사이에서 존경받는 계기가 되었다. 윌러드 반 오르만 콰인은 라이프니츠의 ''살바 베리타테'' 개념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 문헌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등장했는데, 특히 영어권 국가에서 그러했다. 르로이 뢰머는 미국의 라이프니츠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질 들뢰즈에게도 높이 평가받았으며,[195] 들뢰즈는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를 출판했다.
니콜라스 졸리는 라이프니츠의 철학자로서의 명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을 수 있다고 추측했다.[196] 항등, 개체화, 가능세계와 같은 그의 개념은 현대 철학에서 계속 언급되고 있다. 17세기와 18세기 사상의 역사에 대한 연구는 17세기 "지적 혁명"을 더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독일에서는 여러 기관들이 라이프니츠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하노버 라이프니츠 대학교''
- ''라이프니츠 아카데미''
-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도서관 – 니더작센 주립도서관''
- ''고트프리트-빌헬름-라이프니츠-게젤샤프트''
하노버 외 지역:
- ''라이프니츠 협회'', 베를린
- ''베를린 라이프니츠 과학 학회''
- 튀빙겐 대학교의 ''라이프니츠 콜레기움''
- 라이프니츠 슈퍼컴퓨팅 센터, 뮌헨
- 독일 전역에 20개 이상의 학교
수상:
- ''라이프니츠-링-하노버''
- 베를린-브란덴부르크 과학 아카데미의 ''라이프니츠 메달''
- 라이프니츠 학회의 ''고트프리트-빌헬름-라이프니츠-메달''
- 마인츠 과학 및 문학 아카데미의 ''라이프니츠 메달''
1985년 독일 정부는 라이프니츠 상을 제정했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도서관 – 니더작센 주립도서관에 소장된 라이프니츠의 수기 논문집은 2007년 유네스코의 세계 기록 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197]
라이프니츠는 삼십년 전쟁의 후유증이 남아 있던 독일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철학 교수였다. 라이프니츠는 14세에 같은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당시 독일 대학은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다.
라이프니츠는 하노버 선제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부인 소피아와 그녀의 딸 소피아 샤를로테, 그리고 손자 게오르크 아우구스트의 왕비 캐롤라인 등의 존경을 받았다. 1700년 라이프니츠는 베를린으로 가서 과학 아카데미 설립에 참여하여 초대 총재가 되었다. 그러나 왕비 소피아가 사망한 후 베를린은 그에게 편안한 곳이 아니게 되었다.
하노버에서도 1714년 선제후비 소피아가 사망하고, 그녀의 아들 조지 1세가 영국 국왕을 겸임하게 되자, 라이프니츠는 하노버에 남겨졌다. 그는 정치적 후원자를 잃었고, 말년에는 선제후가의 가계도 편찬과 외국 학자들과의 서신 교환에 몰두했다.
10. 한국의 관점에서 본 라이프니츠
라이프니츠는 삼십년 전쟁의 후유증이 남아 있던 독일 출신으로, 당시 독일의 학문적 환경은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다. 그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하노버 선제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부인 소피아와 그녀의 딸 소피아 샤를로테, 그리고 손자 게오르크 아우구스트의 왕비 캐롤라인 등은 라이프니츠를 존경했다. 1700년, 라이프니츠는 소피아 샤를로테의 초청으로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 설립에 참여하여 초대 총재가 되었다. 그러나 소피아 샤를로테가 사망하면서 베를린에서의 생활은 어려워졌다.
1714년 선제후비 소피아가 사망하고, 그녀의 아들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영국 왕위를 겸임하게 되면서 라이프니츠는 정치적 후원자를 잃었다. 조지 1세는 라이프니츠를 탐탁지 않게 여겨 영국으로 데려가지 않았고, 라이프니츠는 하노버에 남겨졌다. 말년에 라이프니츠는 선제후가의 가계도 편찬에 종사하며, 국외 학자들과 서신을 교환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서신 교환 상대는 천 명이 넘었고, 그중에는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도 있었다.[217]
"능력이 뛰어나면서 후세에 이렇게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한 사람은 드물다"는 평가가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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