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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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엔니우스는 기원전 3세기 로마 공화정 시대의 시인으로, 라틴 문학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헬레니즘화된 도시 루디아에서 태어나 그리스어, 오스칸어, 라틴어 등 세 언어를 구사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 백인대장으로 참전한 후 로마로 건너가 그리스어를 가르치며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엔니우스는 헥사미터 형식의 역사 서사시 《연대기》를 비롯하여 희곡, 풍자시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으며, 로마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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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우투스는 로마 희극 작가이자 배우로서 그리스 신희극을 로마 취향에 맞게 각색하여 큰 인기를 얻었으며, 구어체 라틴어, 언어유희, 음악적 요소를 결합한 130여 편의 희극을 창작하여 후대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고대 로마의 극작가 -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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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루킬리우스는 로마 풍자시의 창시자로, 기원전 2세기 후반 로마 사회를 비판하고 풍자하며 30권의 풍자시를 남겼다.
| 엔니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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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퀸투스 엔니우스 |
| 출생 | 기원전 239년경, 루디아에, 로마 공화국 |
| 사망 | 기원전 169년경 |
| 직업 | 시인 |
| 장르 | 서사시 |
| 언어 | |
| 사용 언어 | 라틴어 |
2. 생애
엔니우스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동시대 사람들은 그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으며, 전해지는 많은 내용은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그의 저작물에서 그 자신에 대한 언급을 바탕으로 추정한 것일 수도 있다.[3] 예를 들어, 《연대기》의 일부 구절과 고대 증언에 따르면, 엔니우스는 호메로스의 영혼이 자신에게 환생했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4] 영혼의 윤회는 그리스인들이 정착한 이탈리아 지역의 사상이었지만, 단순한 문학적 수사일 수도 있다. 엔니우스는 마우루스 세르비우스 호노라투스의 보고에 따르면 자신의 고향 지역의 전설적인 왕 메사푸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등 허풍을 떠는 경향이 있었다.[5]
아울루스 겔리우스에 따르면, 엔니우스는 부분적으로 헬레니즘화된 도시 루디아(현대 아풀리아)에서 태어났으며, 메사피아인들이 정착한 이 지역에서 그리스어, 오스칸어, 라틴어 등 세 겹의 언어적, 문화적 유산을 얻어 "세 개의 심장"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하곤 했다.[6] 엔니우스는 살렌토 반도의 루디아이에서 태어났으며, 그곳은 그리스어, 오스크어, 라틴어가 혼재된 곳이었다. (메사피아어(:en:Messapian language)도 참조).
엔니우스는 중년기에 제2차 포에니 전쟁 동안 백인대장으로 군 복무를 시작했다. 기원전 204년 사르데냐에서 카토의 주목을 받아 로마로 갔다. 그는 그리스어를 가르치고 그리스 희곡을 각색하여 생계를 유지하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풀비우스 노빌리오르 등 로마의 위대한 인물들의 우정을 얻었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와는 아이톨리아 원정(189)에 참여했고, 암브라키아 점령을 희곡과 《연대기》의 주제로 삼았다. 엔니우스는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의 아들 퀸투스의 영향으로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그는 아벤티노 언덕에서 검소하게 살았다.
엔니우스는 약 70세에 《티에스테스》를 제작한 직후 사망했다. 그는 《연대기》 마지막 권에서 자신이 67세였다고 언급하며, 자신의 생애를 올림픽 경기에서 여러 번 우승한 후 휴식을 취하는 용감한 말에 비유했다. 그는 "나를 위해 울거나, 애도하며 장례식을 거행하지 마라.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 사람들 입을 오가며."라는 기념 문구를 남겼다.[7]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기원전 144년 집정관)의 가정교사였을 가능성이 있다.
2. 1. 출생과 배경
엔니우스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전해지는 많은 내용은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그의 저작물에서 그 자신에 대한 언급을 바탕으로 추정한 것일 수도 있다.[3] 예를 들어, 《연대기》의 일부 구절과 고대 증언에 따르면, 엔니우스는 호메로스의 영혼이 자신에게 환생했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4] 영혼의 윤회는 그리스인들이 정착한 이탈리아 지역의 사상이었지만, 단순한 문학적 수사일 수도 있다. 엔니우스는 마우루스 세르비우스 호노라투스의 보고에 따르면 자신의 고향 지역의 전설적인 왕 메사푸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등 허풍을 떠는 경향이 있었다.[5]아울루스 겔리우스에 따르면, 엔니우스는 부분적으로 헬레니즘화된 도시 루디아(현대 아풀리아)에서 태어났으며, 메사피아인들이 정착한 이 지역에서 그리스어, 오스칸어, 라틴어 등 세 겹의 언어적, 문화적 유산을 얻어 "세 개의 심장"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하곤 했다.[6] 엔니우스는 살렌토 반도의 루디아이에서 태어났으며, 그곳은 그리스어, 오스크어, 라틴어가 혼재된 곳이었다. (메사피아어(:en:Messapian language)도 참조).
엔니우스는 중년기에 제2차 포에니 전쟁 동안 백인대장으로 군 복무를 시작했다. 기원전 204년 사르데냐에서 카토의 주목을 받아 로마로 갔다. 그는 그리스어를 가르치고 그리스 희곡을 각색하여 생계를 유지하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풀비우스 노빌리오르 등 로마의 위대한 인물들의 우정을 얻었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와는 아이톨리아 원정(189)에 참여했고, 암브라키아 점령을 희곡과 《연대기》의 주제로 삼았다. 엔니우스는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의 아들 퀸투스의 영향으로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그는 아벤티노 언덕에서 검소하게 살았다.
엔니우스는 약 70세에 《티에스테스》를 제작한 직후 사망했다. 그는 《연대기》 마지막 권에서 자신이 67세였다고 언급하며, 자신의 생애를 올림픽 경기에서 여러 번 우승한 후 휴식을 취하는 용감한 말에 비유했다. 그는 "나를 위해 울거나, 애도하며 장례식을 거행하지 마라.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 사람들 입을 오가며."라는 기념 문구를 남겼다.[7]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기원전 144년 집정관)의 가정교사였을 가능성이 있다.
2. 2. 군 복무와 로마로의 이주
엔니우스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동시대 사람들은 그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으며, 전해지는 많은 내용은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그의 저작물에서 그 자신에 대한 언급을 바탕으로 추정했을 수도 있다.[3] 예를 들어, 《연대기》의 일부 구절과 고대 증언에 따르면, 엔니우스는 호메로스의 영혼이 자신에게 환생했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4] 영혼의 윤회는 그리스인들이 정착한 이탈리아 지역에서 번성했지만, 이는 단순한 문학적 수사일 수도 있다. 엔니우스는 마우루스 세르비우스 호노라투스의 보고에 따르면, 고향 지역의 전설적인 왕 메사푸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등 허풍을 떠는 경향이 있었다.[5]엔니우스는 중년기에 제2차 포에니 전쟁 동안 백인대장으로 군 복무를 시작했다. 기원전 204년 사르데냐에서 카토의 주목을 받아 로마로 갔다. 그는 그리스어를 가르치고 그리스 희곡을 각색하여 생계를 유지했으며, 그의 시적 작품으로 로마의 위대한 인물들의 우정을 얻었고, 그들의 업적을 칭찬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풀비우스 노빌리오르가 그중에 포함되었으며, 그는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와 함께 아이톨리아 원정(189)에 참여했다.[6] 그 후 자신이 참여했던 암브라키아 점령을 희곡과 《연대기》의 에피소드로 삼았다. 엔니우스는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의 아들 퀸투스의 영향으로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그는 아벤티노 언덕의 문학 지구에서 검소하게 살았다.[7]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기원전 144년 집정관)의 가정교사였을 가능성이 있다.
2. 3. 로마에서의 활동과 후원자
엔니우스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동시대 사람들은 그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으며, 그에 대해 전해지는 많은 내용은 현재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그의 저작물에서 그 자신에 대한 언급을 바탕으로 추정했을 수도 있다.[3] 예를 들어, 《연대기》의 일부 구절과 고대 증언에 따르면, 엔니우스는 자신의 서사시를 호메로스가 그의 영혼이 엔니우스로 환생했다고 알려주는 꿈을 꾸는 것으로 시작했다고 한다.[4] 마우루스 세르비우스 호노라투스의 보고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고향 지역의 전설적인 왕 메사푸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5]엔니우스는 중년기에 제2차 포에니 전쟁 동안 백인대장 계급으로 군 복무를 시작했다. 기원전 204년 사르데냐에서 카토의 주목을 받아 로마로 갔다. അവിടെ서 그는 그리스어를 가르치고 그리스 희곡을 각색하여 생계를 유지했으며, 그의 시적 작품으로 로마의 위대한 인물들의 우정을 얻었고, 그들의 업적을 칭찬했다. 이들 중에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풀비우스 노빌리오르가 있었으며, 그는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와 함께 아이톨리아 원정(189)에 참여했다. 그 후 그는 자신이 참여했던 암브라키아 점령을 희곡과 《연대기》의 한 에피소드의 주제로 삼았다. 엔니우스는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의 아들 퀸투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의 영향으로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6] 그는 아벤티노 언덕의 문학 지구에서 검소하고 단순하게 살았다.
엔니우스는 약 70세에 자신의 비극 《티에스테스》를 제작한 직후 사망했다. 그의 서사시 마지막 권에서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역사에 대한 다양한 세부 사항을 언급했는데, 그는 그 작품을 저술할 당시 67세였다고 언급했다. 그는 자신의 생애의 위대한 작품의 완성을 앞두고, 마치 올림픽 경기에서 여러 번 우승한 후 나이가 들어 피로해지자 휴식을 취하는 용감한 말에 비유했다. 위대한 경력의 완성에 대한 비슷한 자부심이 그의 사후 흉상 아래에 놓이도록 작곡된 기념 문구에 표현되어 있다. "나를 위해 울거나, 애도하며 장례식을 거행하지 마라.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 사람들 입을 오가며."[7]
2. 4. 로마 시민권 획득과 죽음
엔니우스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동시대 사람들은 그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으며, 전해지는 많은 내용은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그의 저작물에서 그 자신에 대한 언급을 바탕으로 추정했을 수 있다.[3] 예를 들어, 《연대기》의 일부 구절과 고대 증언에 따르면, 엔니우스는 호메로스의 영혼이 자신에게 환생했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4] 영혼의 윤회는 이탈리아 지역에서 번성했던 사상이지만, 단순한 문학적 수사일 수도 있다. 엔니우스는 마우루스 세르비우스 호노라투스의 보고에 따르면 자신의 고향 지역의 전설적인 왕 메사푸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등 허풍을 떠는 경향이 있었다.[5] 그는 아울루스 겔리우스의 말처럼 "세 개의 심장… 그리스어, 오스칸어 및 라틴어"를 지녔다고 묘사될 정도로, 그리스어, 오스크어, 라틴어가 혼재된 살렌토 반도의 루디아이에서 태어났다.[6]엔니우스는 제2차 포에니 전쟁 동안 백인대장으로 군 복무를 했으며, 기원전 204년 사르데냐에서 카토를 만나 로마로 갔다. 그는 그리스어를 가르치고 그리스 희곡을 각색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그의 시는 로마의 위대한 인물들, 특히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의 우정을 얻게 했다. 엔니우스는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와 함께 아이톨리아 원정(189)에 참여했고, 암브라키아 점령을 희곡과 《연대기》의 주제로 삼았다. 이후 엔니우스는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의 아들 퀸투스의 영향으로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7] 그는 아벤티노 언덕에서 검소하게 살았으며,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기원전 144년 집정관)의 가정교사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엔니우스는 약 70세에 비극 《티에스테스》를 제작한 직후 사망했다. 그는 《연대기》 마지막 권에서 자신이 67세라고 언급하며, 자신의 생애를 올림픽 경기에서 여러 번 우승한 후 휴식을 취하는 용감한 말에 비유했다. 그는 "나를 위해 울거나, 애도하며 장례식을 거행하지 마라.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 사람들 입을 오가며."라는 기념 문구를 남겼다.[7]
3. 작품

엔니우스는 그리스 및 로마 양식의 희곡(공직자극, 팔리아타)을 쓰고, 가장 유명한 작품인 헥사미터 형식의 역사 서사시 ''연대기''를 저술하며 초창기 문학 전통을 이어갔다. 다른 소품으로는 ''에피카르무스'', ''경구시'', ''유헤메루스'', ''헤디파게티카'', ''교훈'' / ''권고'', ''풍자시'' (또는 ''풍자''), ''스키피오'', ''소타''가 있다.[10][11]
《에피카르무스》(Epicharmus)는 코스의 에피카르무스가 발전시킨 철학적 가설에서 영감을 받아, 시인이 죽어서 천상의 깨달음의 장소로 옮겨지는 꿈을 묘사한다. 여기서 그는 에피카르무스를 만나 신들의 본성에 대해 설명하고 엔니우스에게 우주의 물리학을 가르친다.[12]
《에우헤메루스》(Euhemerus)는 메세네의 에우헤메루스의 주장을 바탕으로, 올림포스 산의 신들이 인간의 삶에 개입하는 초자연적인 힘이 아니라, 사후 신격화된 옛 영웅이라고 주장했다.[13]
《헤디파게티카》(Hedyphagetica)는 젤라의 아르케스트라토스의 미식 서사시에서 많은 내용을 가져왔으며, 독자가 최고의 종류의 생선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논의한다. 육보격으로 쓰여졌지만, "운율적 관행" 측면에서 《연대기》와 다르다.[14]
《교훈》과 《권고》라는 제목은 동일한 작품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을 것이나,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8][15]
《풍자시》(Saturae)는 약 30행의 풍자시 모음으로 로마 풍자의 첫 번째 현존하는 사례이다.[8] 이 행들은 다양한 시적 운율로 쓰여졌다.[16]
《스키피오》(Scipio)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17]
《소타》(Sota)는 그리스 시인 소타데스의 이름을 딴 시였다.[18]
3. 1. 《연대기》(Annales)
엔니우스는 그리스 및 로마 양식의 희곡(공직자극, 팔리아타)을 쓰고, 헥사미터 형식의 역사 서사시 ''연대기''를 저술하며 초창기 문학 전통을 이어갔다.[9]
안날레스는 15권으로 시작하여 나중에 18권으로 확장된 서사시로, 기원전 1184년 트로이 몰락부터 기원전 184년 대 카토의 감찰관 임명까지의 로마 역사를 다루고 있다.[9] 이 작품은 그리스 서사시와 교훈시에서 사용되던 장단 6보격을 채택한 최초의 라틴 시로, 라틴 시에서 이러한 장르의 표준 운율이 되었다.[9] 《안날레스》는 로마 학동들의 교과서가 되었지만, 결국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 의해 대체되었다.[9] 약 600행이 남아 있다.
엔니우스는 "무익한 마음은 그것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라는 격언을 남겼다. 또한 "Amicus certus in re incerta cernitur(진정한 친구는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발견된다)"라는 격언은 키케로가 『라일리우스, 또는 우정에 관하여』(17.64)에서 인용하여 유명해졌다.
3. 2. 비극
라파엘로의 ''파르나소스'' 세부 묘사에는 엔니우스, 단테, 호메로스가 함께 등장한다. 엔니우스는 그리스 및 로마 양식의 희곡(공직자극, 팔리아타)을 썼다. 다른 소품으로는 ''에피카르무스'', ''경구시'', ''유헤메루스'', ''헤디파게티카'', ''교훈'' / ''권고'', ''풍자시'' (또는 ''풍자''), ''스키피오'', ''소타''가 있다.3. 3. 희극
라파엘로의 ''파르나소스'' 세부 묘사에는 엔니우스, 단테와 호메로스가 함께 등장한다. 엔니우스는 그리스 및 로마 양식의 희극(공직자극, 팔리아타)을 썼다.3. 4. 기타 작품
엔니우스는 그리스 및 로마 양식의 희곡(공직자극, 팔리아타)을 쓰고, 가장 유명한 작품인 헥사미터 형식의 역사 서사시 ''연대기''를 저술하며 초창기 문학 전통을 이어갔다. 다른 소품으로는 ''에피카르무스'', ''경구시'', ''유헤메루스'', ''헤디파게티카'', ''교훈'' / ''권고'', ''풍자시'' (또는 ''풍자''), ''스키피오'', ''소타''가 있다.[10][11]《에피카르무스》(Epicharmus)는 코스의 에피카르무스가 발전시킨 철학적 가설에서 영감을 받아, 시인이 죽어서 천상의 깨달음의 장소로 옮겨지는 꿈을 묘사한다. 여기서 그는 에피카르무스를 만나 신들의 본성에 대해 설명하고 엔니우스에게 우주의 물리학을 가르친다.[12]
《에우헤메루스》(Euhemerus)는 메세네의 에우헤메루스의 주장을 바탕으로, 올림포스 산의 신들이 인간의 삶에 개입하는 초자연적인 힘이 아니라, 사후 신격화된 옛 영웅이라고 주장했다.[13]
《헤디파게티카》(Hedyphagetica)는 젤라의 아르케스트라토스의 미식 서사시에서 많은 내용을 가져왔으며, 독자가 최고의 종류의 생선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논의한다. 육보격으로 쓰여졌지만, "운율적 관행" 측면에서 《연대기》와 다르다.[14]
《교훈》과 《권고》라는 제목은 동일한 작품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을 것이나,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8][15]
《풍자시》(Saturae)는 약 30행의 풍자시 모음으로 로마 풍자의 첫 번째 현존하는 사례이다.[8] 이 행들은 다양한 시적 운율로 쓰여졌다.[16]
《스키피오》(Scipio)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17]
《소타》(Sota)는 그리스 시인 소타데스의 이름을 딴 시였다.[18]
라파엘로의 ''파르나소스'' 세부 묘사에는 엔니우스, 단테와 호메로스가 묘사되어 있다.
4. 평가 및 영향
라파엘로의 ''파르나소스''에는 단테, 호메로스와 함께 엔니우스가 묘사되어 있다. 엔니우스는 그리스 및 로마 양식의 희곡(공직자극, 팔리아타)을 쓰고, 헥사미터 형식의 역사 서사시 ''연대기''를 저술하며 초창기 문학 전통을 이어갔다. 다른 소품으로는 ''에피카르무스'', ''경구시'', ''유헤메루스'', ''헤디파게티카'', ''교훈'' / ''권고'', ''풍자시'' (또는 ''풍자''), ''스키피오'', ''소타''가 있다.
참조
[1]
문서
Smith (1852)
[2]
서적
Merriam-Webster's Encyclopedia of Literature
Merriam-Webster Inc. Publishers
[3]
간행물
Ennius and his Friends
https://books.google[...]
Fondation Hardt
[4]
문서
Aicher (1989)
[5]
웹사이트
Commentary on the Aeneid
https://www.perseus.[...]
[6]
웹사이트
Noctes Atticae
https://www.perseus.[...]
[7]
문서
Encyclopaedia Britannica 1911 edition
[8]
문서
La Barbera (2014)
[9]
웹사이트
FJCL Latin Literature Study Guide
http://www.fjcl.org/[...]
Florida Junior Classical League
2014-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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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ditors of Encyclopædia Britannica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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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nius, Goldberg, & Manuwald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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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ry (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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