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제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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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엘리제 조약은 프랑스와 서독 간의 화해와 협력을 증진하기 위해 1963년 체결된 조약이다. 이 조약은 양국 간의 정기적인 협의, 정상회담, 부처 간 위원회 구성을 통해 방위, 교육, 청소년 문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엘리제 조약 체결 이후 프랑스와 독일은 "본-파리 축" 또는 "프랑스-독일 동맹"으로 불리는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했으며, 프랑스-독일 청소년 사무소, 프랑스-독일 고등학교, 프랑스-독일 군사 여단 설립 등 구체적인 성과를 이루었다. 또한 유럽 통합에 기여했으며, 2019년에는 엘리제 조약의 정신을 계승하는 아헨 조약이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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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제 조약 | |
---|---|
조약 정보 | |
조약 이름 | 엘리제 조약 |
정식 명칭 | 프랑스 공화국과 독일 연방 공화국 간의 프랑스-독일 협력에 관한 조약 |
유형 | 우호 조약 |
체결 배경 | 전후 유럽 프랑스-독일 협력 |
서명일 | 1963년 1월 22일 |
서명 장소 | 파리 엘리제궁 |
발효일 | 1963년 7월 2일 |
원 서명자 | 샤를 드골(프랑스) 조르주 퐁피두(프랑스) 모리스 쿠브 드 뮈르빌(프랑스) 콘라트 아데나워(서독) 게르하르트 슈뢰더(서독) |
당사국 | 프랑스 서독 |
사용 언어 | 프랑스어 독일어 |
위키문헌 | 프랑스어 위키문헌 독일어 위키문헌 |
다른 이름 | (프랑스어) (독일어) (프랑스어) (독일어) 디지털 다이지센 일본대백과전서(니포니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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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적 배경
프랑스와 독일은 오랜 기간 동안 갈등과 대립을 겪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양국의 적대감은 극에 달했다. 독일은 1939년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을 시작했고,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이후 독일은 프랑스를 침공하여 점령했고, 프랑스는 1945년부터 1949년까지 독일 연합군 점령에 참여했다.[2][3][4]
전쟁 이후, 서독의 수상 아데나우어는 프랑스와의 화해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이 서유럽을 배제하고 유럽 문제를 처리하려 하자 프랑스와 서독이 반발했다.[20] 이러한 배경에서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 골과 서독 총리 콘라트 아데나우어는 협력 조약 체결을 결정했다.[19]
왼쪽부터 아데나우어, 드골, 퐁피두
2. 1. 프랑스-독일 적대 관계
프랑스-독일 관계는 오랫동안 두 국가 사이에 자연스러운 경쟁이 있다는 프랑스-독일 적대 관계 개념에 지배되어 왔다.[2] 독일은 1939년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을 시작했다. 프랑스는 이에 독일에 선전포고했고, 이는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독일의 침공과 점령으로 이어졌다.[3] 그 후 프랑스는 1945년부터 1949년까지 독일 연합군 점령에 참여했다.[4]2. 2. 화해 노력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독의 아데나워 총리는 프랑스와의 화해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5] 이는 유럽의 안정과 평화를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58년 9월, 드골 대통령과 아데나워 총리는 콜롱베 레 되 제글리즈에서 첫 회담을 갖고 양국 관계 개선의 초석을 다졌다.3. 조약의 내용
엘리제 조약은 방위, 교육, 청소년 문제 등 주요 분야에서 양국 간 정기적인 협의를 의무화했다.[5][6] 조약에는 정부 수뇌부, 외무·국방·교육 장관, 참모총장의 정기 협의, 정보 교환 확대, 경제 정책 협력, 군부 교류, 청소년 교류 등이 명시되었으며, 체결과 동시에 “아데나우어-드골 선언”을 발표하여 통일 유럽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19]
3. 1. 정기 협의 개최
국가 원수 및 정부 수반은 1년에 최소 2회, 외무 장관은 3개월에 1회 만나 양국 간의 긴밀한 협력을 보장해야 했다.[5][6] 참모총장 간의 정기 협의도 연 6회로 명시하여 군사 분야 협력도 강화했다.[19]두 국가 원수 간의 첫 회담은 1958년 9월 드골 장군의 개인 저택인 콜롬베-레-드뢰제글리즈에서 열렸다. 그 이후로 프랑스와 독일 국가 원수들은 강력한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이는 종종 유럽 통합의 원동력으로 여겨진다.[7][8]
프랑스와 독일 간 협력을 조정하고 감독하기 위해 부처 간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 위원회는 관련된 모든 부처의 고위 관리들로 구성되었다.[6]
3. 2. 부처 간 위원회
이 조약은 프랑스와 서독 간의 협력을 조정하고 감독하기 위해 부처 간 위원회를 설치하도록 했다. 이 위원회는 관련된 모든 부처의 고위 관리들로 구성되었다.[6]3. 3. 기타 내용
이 조약은 방위, 교육 및 청소년 문제와 관련된 모든 중요한 질문에 대해 프랑스와 서독 간의 정기적인 협의를 촉구했다. 또한 고위급 관리 간의 정기적인 정상회담을 요구하는데, 이는 국가 원수 및 정부 수반이 1년에 최소 두 번, 외무 장관은 3개월에 한 번 만나 양국 간의 긴밀한 협력을 보장해야 함을 의미한다.[5][6]두 국가 원수 간의 첫 회담은 1958년 9월 드골 장군의 개인 저택인 콜롬베-레-드뢰제글리즈에서 열렸다. 그 이후로 프랑스와 독일 국가 원수들은 강력한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이는 종종 유럽 통합의 원동력으로 여겨진다.[7][8]
프랑코-저먼 협력을 조정하고 감독하기 위해 부처 간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 위원회는 관련된 모든 부처의 고위 관리들로 구성되었다.[6]
이 조약으로 프랑스와 독일의 대립이 종식되고, “본-파리 축” 또는 “프랑스-독일 동맹”이라고 불리는 협력 관계가 성립되었다.[20][21] 조약에는 정부 수뇌부, 외무·국방·교육 장관, 참모총장의 정기 협의(각각 연 2회, 4회, 6회), 정보 교환 확대, 경제 정책 협력, 군부 교류, 청소년 교류 등이 명시되었고, 체결과 동시에 “아데나우어-드골 선언”을 발표하여 통일 유럽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19]
4. 논란과 비판
엘리제 조약 체결 두 달 후, 새로운 논쟁이 발생했다. 샤를 드골 대통령은 이 조약을 통해 서독이 미국으로부터 멀어지기를 원했다. 그는 서독과 유럽 경제 공동체(EEC) 회원국들이 미국에 종속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 조약은 미국, 영국, NATO, (GATT)을 전혀 언급하지 않아 주목을 받았다.[9]
드골은 후에 "독일인들은 돼지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들은 완전히 미국에 봉사하고 있다. 그들은 프랑코-독일 조약의 정신을 배신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유럽을 배신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1965년, 드골은 측근들에게 "독일인들은 나의 가장 큰 희망이었지만, 나의 가장 큰 실망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4. 1. 미국의 우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주미 서독 대사에게 불만을 표명했다. 그러자 독일 연방의회는 엘리제 조약에 다음과 같은 서문을 붙여 비준했다. 서문의 내용은 프랑스와 서독이 미국과의 긴밀한 협력, 영국의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 체제 하에서의 자유 무역 협정 달성, 그리고 미국의 주도 하에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내 서방의 군사 통합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11] 이는 드골주의적 관점에서 조약의 의미를 사실상 무효화했고, 드골이 EEC를 미국과 소련에 대한 대항마로 육성하려는 희망에 종지부를 찍었다. 샤를 드골 대통령은 서독을 포함한 유럽 경제 공동체(EEC) 회원국들이 미국에 종속되어 있다고 비판했다.[9]4. 2. 서독 의회의 수정
샤를 드골 대통령은 이 조약을 통해 서독이 미국으로부터 멀어지기를 의도했다. 그는 서독과 EEC의 다른 회원국들이 미국에 종속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 조약은 미국, 영국, NATO, (GATT)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9]그러나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주미 서독 대사에게 이에 대해 불만을 표명한 후, 서독 연방의회는 조약 비준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은 서문을 추가했다.[11]
- 미국과의 긴밀한 협력
- 영국의 EEC 가입
- GATT 체제 하에서의 자유 무역 협정 달성
- 미국의 주도 하에 NATO 내 서방의 군사 통합 추구
이는 드골 대통령이 EEC를 미국과 소련에 대한 대항마로 육성하려는 구상에 타격을 주었다. 드골 대통령은 1965년에 "독일인들은 나의 가장 큰 희망이었지만, 나의 가장 큰 실망이기도 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11]
4. 3. 소련의 비판
소련은 엘리제 조약 체결 2주 후인 1963년 2월 5일 서독에 각서를 보내 군사 협력이 유럽의 평화를 파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19]5. 조약의 영향 및 평가
엘리제 조약은 프랑스와 독일 양국 관계를 넘어 유럽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소련은 1963년 2월 5일 서독에 각서를 보내 군사 협력이 유럽의 평화 파괴로 이어진다고 항의했으나,[19] 프랑스-독일 협력은 계속 확대되었다. 1988년에는 독일-프랑스 합동 여단이 설립되었고, 1992년에는 합동 여단을 확대한 합동군이 설립되었으며, 1993년에도 유럽 통합의 견인차 역할을 계속할 것임이 확인되었다.[20] 2003년에는 조약 40주년 기념식이 파리에서 열렸다.[19]
5. 1. 프랑스-독일 관계 발전
엘리제 조약의 직접적인 결과로는 프랑스-독일 청소년 사무소 설립, 프랑스-독일 고등학교 설립, 그리고 수많은 프랑스와 독일 도시, 학교, 지역 간의 자매결연이 있다. 1987년에는 프랑스-독일 군사 여단이 설립되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10]
2003년 1월, 국민의회와 독일 연방의회는 베르사유에서 조약 40주년을 기념하는 회의를 가졌다. 베르사유 궁전은 1871년과 1919년에 각 국가에게 굴욕을 안겨준 곳이었기에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11]
40주년 기념 행사 과정에서 두 국가 간의 새로운 형태의 양자 협력이 만들어졌다. 그 예로 1년에 두 번 회의를 여는 프랑스-독일 장관회의가 있다.[12] 또한, 양국에서 사용되어 역사에 대한 공유된 비전을 육성하는 공동 프랑스-독일 역사 교과서가 처음으로 만들어졌다.[13] 프랑스-독일 대학교는 학생들이 양국에서 국제적 이중 학위를 취득할 수 있도록 한다.[14] 제3국에서 프랑스-독일 문화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한 엘리제 기금(Élysée-Fond)도 설립되었다. 프랑스와 독일 시민의 상대 국가에서의 이중 국적 취득도 더 쉬워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이 서유럽을 배제하고 유럽 문제를 처리하려 하자 프랑스와 서독이 반발했다.[20] 이러한 배경에서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 골과 서독 총리 콘라트 아데나우어가 협력 조약 체결을 결정했다.[19]
이 조약으로 프랑스와 독일의 대립이 종식되고, “본-파리 축” 또는 “프랑스-독일 동맹”이라고 불리는 협력 관계가 성립되었다.[20][21] 조약에는 정부 수뇌부, 외무·국방·교육 장관, 참모총장의 정기 협의(각각 연 2회, 4회, 6회), 정보 교환 확대, 경제 정책 협력, 군부 교류, 청소년 교류 등이 명시되었고, 체결과 동시에 “아데나우어-드골 선언”을 발표하여 통일 유럽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19]
1963년 2월 5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서독에 각서를 보내 군사 협력이 유럽의 평화 파괴로 이어진다고 항의했다.[19] 그러나 프랑스-독일 협력은 그 후에도 확대를 계속하여, 1988년에는 독일-프랑스 합동 여단이 설립되었고, 1992년에는 합동 여단을 확대한 합동군이 설립되었으며, 1993년에도 유럽 통합의 견인차 역할을 계속할 것임이 확인되었다.[20] 2003년에는 조약 40주년 기념식이 파리에서 열렸다.[19]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양국의 의원들과 함께 2018년 1월 55주년을 맞아 "새로운 엘리제 조약"을 촉구했다.[15][16] 소위 아헨 조약은 2019년 1월 22일에 체결되었다.[17]
5. 2. 유럽 통합 기여
엘리제 조약은 유럽 통합의 핵심 동력으로 평가받는다. 프랑스와 독일 양국은 유럽 연합(EU)의 주요 의사 결정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특히, 2019년 체결된 아헨 조약은 엘리제 조약의 정신을 계승하여 양국 관계를 더욱 심화시키고, 유럽 통합에 대한 기여를 강화했다.[17]이 조약의 직접적인 결과로는 프랑스-독일 청소년 사무소의 설립, 프랑스-독일 고등학교 설립, 그리고 수많은 프랑스와 독일 도시, 학교, 지역 간의 자매결연이 있다. 또한 1987년에 설립되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프랑스-독일 군사 여단도 조약의 결과 중 하나이다.[10]
2003년 1월, 국민의회와 독일 연방의회는 베르사유에서 조약 40주년을 기념하는 회의를 가졌다.[11] 이 기념 행사 과정에서 1년에 두 번 회의를 여는 프랑스-독일 장관회의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양자 협력이 만들어졌다.[12] 또한, 양국에서 사용되어 역사에 대한 공유된 비전을 육성하는 공동 프랑스-독일 역사 교과서가 처음으로 만들어졌다.[13] 프랑스-독일 대학교는 학생들이 양국에서 국제적 이중 학위를 취득할 수 있도록 한다.[14]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양국의 의원들과 함께 2018년 1월 55주년을 맞아 "새로운 엘리제 조약"을 촉구했고,[15][16] 아헨 조약이 2019년 1월 22일에 체결되었다.[1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이 서유럽을 배제하고 유럽 문제를 처리하려 하자 프랑스와 서독이 반발했다.[20] 이러한 배경 아래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 골과 서독 총리 콘라트 아데나우어가 협력 조약 체결을 결정했다.[19]
이 조약으로 프랑스와 독일의 대립이 종식되고, “본-파리 축” 또는 “프랑스-독일 동맹”이라고 불리는 협력 관계가 성립되었다.[20][21] 1993년에도 유럽 통합의 견인차 역할을 계속할 것임이 확인되었다.[20]
5. 3. 구체적 성과
이 조약의 직접적인 결과로 프랑스-독일 청소년 사무소가 설립되었고, 프랑스-독일 고등학교들이 설립되었으며, 수많은 프랑스와 독일의 도시, 학교, 지역 간 자매결연이 이루어졌다.[10]1987년에는 프랑스-독일 군사 여단이 설립되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10] 이는 양국 군사 협력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2003년 1월, 프랑스 국민의회와 독일 연방의회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조약 40주년을 기념하는 공동 회의를 개최했다.[11] 1871년과 1919년에 각 국가에게 굴욕을 안겨준 장소였던 베르사유 궁전에서 회의를 개최한 것은 역사적으로 큰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40주년 기념 행사 과정에서 양국은 새로운 형태의 양자 협력을 추진했다. 1년에 두 번 회의를 여는 프랑스-독일 장관회의가 설치되었고,[12] 양국에서 사용되며 역사에 대한 공유된 비전을 육성하는 공동 프랑스-독일 역사 교과서가 처음으로 만들어졌다.[13] 또한, 프랑스-독일 대학교를 통해 학생들이 양국에서 국제적 이중 학위를 취득할 수 있게 되었다.[14] 제3국에서 프랑스-독일 문화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한 엘리제 기금(Élysée-Fond)도 설립되었다. 이와 더불어, 프랑스와 독일 시민이 상대 국가에서 이중 국적을 취득하는 것이 더 쉬워지거나, 어떤 경우에는 가능해졌다.
6. 현대적 계승: 아헨 조약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2018년 1월 엘리제 조약 55주년을 맞아 양국 의원들과 함께 "새로운 엘리제 조약" 체결을 촉구했다.[15][16] 2019년 1월 22일, 양국은 아헨 조약을 체결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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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kel und Macron für neuen Élysée-Vertr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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