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여호야킴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여호야킴은 요시야의 아들이자 유다의 왕으로, 파라오 네코 2세에 의해 즉위하여 기원전 598년까지 11년간 통치했다. 그는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세력 다툼 속에서 정치적 입장을 바꾸며 백성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고, 예레미야 등 선지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기원전 598년, 바빌로니아의 침공으로 예루살렘이 포위된 가운데 사망했으며, 예레미야는 그의 비참한 죽음을 예언했다. 랍비 문헌에서는 그를 폭군으로 묘사하며, 영화 《예레미야》에 등장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유다 국왕 - 다윗 왕조
    다윗 왕조는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다윗 왕을 시조로 하는 왕조로서 성경과 고고학적 자료로 존재가 확인되며 유다 왕국 왕들을 배출하여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특히 유대교에서는 메시아가 다윗 가문에서 나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 유다 국왕 - 르호보암
    르호보암은 솔로몬의 아들이자 유다 왕국의 초대 왕으로, 강압적인 정책으로 이스라엘 왕국을 분열시키고 이집트의 침공으로 국력이 쇠퇴했다.
  • 구약성경의 인물 - 시바의 여왕
    시바의 여왕은 성경, 에티오피아, 유대교, 이슬람교 등에서 언급되는 전설적인 인물로, 솔로몬 왕을 방문하여 그의 지혜를 시험하고, 에티오피아 왕조의 기원과 관련되며, 예술 작품과 대중문화에서도 다양하게 묘사된다.
  • 구약성경의 인물 - 호세아
    기원전 8세기 후반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인 호세아는 앗시리아의 꼭두각시 왕으로 즉위했으나 이집트와 손잡고 독립을 추구하다가 사마리아 함락으로 북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하며 통치를 마감했다.
여호야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에호야킴, 기욤 루이의 Promptuarii Iconum Insigniorum, 1553년
칭호유다 왕
이름엘리아킴
로마자 표기Elyaqim
통치
재위 기간기원전 609년 – 기원전 598년
이전 통치자여호아하즈
후임 통치자여호야긴
왕가
왕조다윗 왕조
개인 정보
배우자느후스다
자녀여호야긴, 시드기야
아버지요시야
어머니스부다
출생일기원전 632년경
출생 장소예루살렘
사망일기원전 598년
사망 장소예루살렘

2. 배경

요시아가 죽은 후, 여호야킴의 동생 여호아하스가 왕위에 올랐으나 3개월 만에 파라오 네카우 2세가 그를 폐위시키고 엘리아킴(אֶלְיָקִים|엘리아킴he)을 왕으로 세웠다. 엘리아킴은 왕위에 오르며 이름을 "여호야킴"(יהויקים|여호야킴he)으로 바꾸었다.[18] 여호야킴은 기원전 598년까지 11년간 통치했으며,[19]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를 이었다.

여호야킴은 요시아 왕의 둘째 아들로, 본래 이름은 엘리아킴이었다. 이집트 왕 네코 2세가 요시야를 대신해 왕으로 삼고 여호야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복 동생 여호아하스를 대신하여 11년간 왕위에 있었다. 네코 2세는 많은 공물을 요구했기에 국민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여호야킴에 대해 엄한 예언을 했으며, 예루살렘 문에 끌려가 내던져져 나귀처럼 매장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여호야킴은 이를 듣지 않고 예언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불태워 버렸다.[16]

여호야킴의 통치 기간 동안 이집트의 세력이 약해지고, 바빌론이 세력을 확장해 왔다. 여호야킴은 3년간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를 섬겼으나 그 후에 반역했다. 바빌론에게 공격받아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en:Siege of Jerusalem (597 BC)), 여호야킴은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갔다.[17]

3. 통치

기원전 609년, 이집트 왕 느고 2세는 메기도에서 요시야 왕을 살해하고, 하란 전투에서 돌아온 후 여호야김을 왕으로 임명했다.[20] 느고 2세는 여호야김의 동생 여호아하스를 폐위시키고 이집트로 데려갔다. 여호야김은 이집트의 봉신으로서 막대한 공물을 바치며 통치했다. 그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각 사람의 재산에 따라 세금을 매겨 은과 금을 징수했다.[21]

기원전 605년 카르케미시 전투에서 느부갓네살 2세가 이끄는 바빌로니아가 이집트를 패퇴시킨 뒤 예루살렘을 포위하자, 여호야김은 예루살렘의 파괴를 막기 위해 바빌론으로 충성의 대상을 바꾸었다. 그는 국고를 털어 공물을 바쳤고, 성전의 기물과 왕실 및 귀족들 중 일부를 넘겨주었다. 이때 다니엘도 함께 끌려갔다.[20]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야킴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회개하고 율법을 지킬 것을 촉구했다.[22] 또 다른 예언자인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 역시 같은 메시지를 전했는데, 여호야킴은 그를 처형하라고 명령했다.[23][24]

이 점토판은 느부갓네살 2세가 기원전 597년에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항복을 받아냈다고 적고 있다.


여호야킴은 3년간 바빌로니아의 봉신으로 지냈다. 기원전 601년 바빌로니아의 이집트 침공이 실패하면서 유다에 대한 바빌로니아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여호야킴은 다시 이집트로 충성의 대상을 바꾸었다.[20] 기원전 598년 말, 바빌로니아의 왕 느부갓네살 2세가 유다를 침공하여 다시 예루살렘을 포위했는데, 이 포위는 3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여호야킴은 예루살렘 포위가 끝나기 전에 죽었다.[25] 역대하에서는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빌론으로 잡아갔다고 기록한다.[26]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이 제대로 된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죽을 것이며, 그때 유다 백성이 통곡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또한 여호야김이 예루살렘 문 밖에 던져지고 나귀처럼 매장될 것이라고 예언했다.[27] 그의 시체는 버려져 낮에는 더위, 밤에는 추위를 겪을 것이라고도 예언했다.[28] 요세푸스는 느부갓네살 2세가 고위 장교들과 함께 여호야킴을 죽이고 시신을 "장례를 치르지 않고 성벽 앞에 버리라"고 명령했다고 기록한다.[29]

그의 뒤를 이어 아들 여호야긴이 즉위하였으나, 느부갓네살 2세에 의해 폐위되었다. 이후 여호야김의 동생 시드기야가 유다의 마지막 왕으로 임명되었다. 바빌로니아 연대기는 기원전 597년 아달월 2일 (3월 16일) 예루살렘이 항복했다고 전한다.

3. 1. 친 이집트 정책과 과중한 세금

기원전 609년, 이집트 왕 네카우 2세는 메기도에서 요시야 왕을 살해하고, 하란 전투에서 돌아온 후 여호야김을 왕으로 임명했다.[20] 네카우 2세는 불과 3개월 만에 여호야김의 동생 여호아하스를 폐위시키고 이집트로 데려갔다. 여호야김은 이집트의 봉신으로서 막대한 공물을 바치며 통치했는데, 그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각 사람의 재산에 따라 액수를 정하고 은금을 거두었다.[21]

여호야김이 예레미야의 두루마리를 불태우는 모습


기원전 605년 카르케미시 전투에서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이끄는 바빌로니아가 이집트를 패퇴시킨 뒤 예루살렘을 포위하자, 여호야김은 예루살렘의 파괴를 막기 위해 충성의 대상을 바빌론으로 바꾸었다. 그는 국고를 털어 공물을 바쳤고, 성전의 기물과 왕실 및 귀족들 중 일부를 넘겨주었는데, 이때 다니엘도 함께 끌려갔다.[20]

예레미야는 여호야킴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회개하고 율법을 지킬 것을 촉구했다.[22] 또 다른 예언자인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 역시 같은 메시지를 전했는데, 여호야킴은 그를 처형하라고 명령했다.[23][24]

3. 2. 바빌로니아의 침공과 굴욕적인 항복

기원전 609년, 이집트 왕 네코 2세는 메기도에서 요시야 왕을 살해하고, 3개월 뒤 하란 전투에서 돌아온 후 여호야김을 왕으로 임명했다.[20] 네코 2세는 여호야김의 동생 여호아하스를 폐위시키고 이집트로 데려갔다. 여호야김은 이집트의 봉신으로서 막대한 공물을 바쳐야 했고, 이를 위해 백성들에게 각자의 능력에 따라 은과 금을 징수했다.[21]

기원전 605년 카르케미시 전투에서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이끄는 바빌로니아가 이집트를 패퇴시킨 후,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여호야킴은 예루살렘 파괴를 막기 위해 바빌로니아로 충성의 대상을 바꾸었다. 그는 국고를 털어 공물을 바쳤고, 성전 기물과 왕실 및 귀족들 중 일부를 넘겨주었다. 이때 다니엘도 함께 끌려갔다.[20]

예레미야는 여호야킴의 정책을 비판하며 회개와 율법 준수를 촉구했다.[22] 또 다른 예언자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 역시 같은 메시지를 전했지만, 여호야킴은 그를 처형했다.[23][24]

여호야킴은 3년간 바빌로니아의 봉신으로 지냈다. 기원전 601년 바빌로니아의 이집트 침공 실패로 유다에 대한 바빌로니아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여호야킴은 다시 이집트로 충성의 대상을 바꾸었다.[20] 기원전 598년 말,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유다를 침공하여 다시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이 포위는 3개월간 지속되었다. 여호야킴은 예루살렘 포위가 끝나기 전에 죽었다.[25] 역대기에는 네부카드네자르 왕이 그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빌론으로 잡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26] 예레미야는 여호야킴이 제대로 된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죽을 것이며, 유다 백성이 통곡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또한 여호야김이 예루살렘 문 밖에 던져져 나귀처럼 매장될 것이라고 예언했다.[27] 그의 시체는 버려져 낮에는 더위, 밤에는 추위를 겪을 것이라고도 예언했다.[28] 요세푸스는 네부카드네자르가 고위 장교들과 함께 여호야킴을 죽이고 시신을 "장례를 치르지 않고 성벽 앞에 버리라"고 명령했다고 기록한다.[29]

3. 3. 선지자들의 비판과 탄압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야킴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회개하고 율법을 지킬 것을 촉구했다.[22] 또 다른 예언자인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 역시 같은 메시지를 전했는데, 여호야킴은 그의 처형을 명령했다.[23][24]

예레미야는 여호야킴에 대해 엄한 예언을 했으며, 예루살렘 문에 끌려가 내던져져 나귀처럼 매장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여호야킴은 이를 듣지 않고 예언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불태워 버렸다.[16]

3. 4. 반역과 죽음

기원전 609년, 이집트 왕 느고 2세가 메기도에서 요시야 왕을 살해한 지 3개월 뒤, 하란 전투에서 돌아온 후 여호야김을 왕으로 임명했다.[20] 느고 2세는 여호야김의 동생 여호아하스를 폐위시키고 이집트로 데려갔다. 여호야김은 이집트의 봉신으로서 막대한 공물을 바치며 통치했다. 그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각 사람의 재산에 따라 세금을 매겨 은과 금을 징수했다.[21]

그러나 기원전 605년 카르케미시 전투에서 느부갓네살 2세가 이끄는 바빌로니아가 이집트를 패퇴시킨 뒤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여호야김은 예루살렘의 파괴를 막기 위해 바빌론으로 충성의 대상을 바꾸었다. 그는 국고를 털어 공물을 바쳤고, 성전의 기물과 왕실 및 귀족들 중 일부를 넘겨주었다. 이때 다니엘도 함께 끌려갔다.[20]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야킴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회개하고 율법을 지킬 것을 촉구했다.[22] 또 다른 예언자인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 역시 같은 메시지를 전했는데, 여호야김은 그를 처형하라고 명령했다.[23][24]

여호야김은 3년간 바빌로니아의 봉신으로 지냈다. 기원전 601년 바빌로니아의 이집트 침공이 실패하면서 유다에 대한 바빌로니아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여호야김은 다시 이집트로 충성의 대상을 바꾸었다.[20] 기원전 598년 말, 바빌로니아의 왕 느부갓네살 2세가 유다를 침공하여 다시 예루살렘을 포위했는데, 이 포위는 3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여호야김은 예루살렘 포위가 끝나기 전에 죽었다.[25] 역대하에서는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빌론으로 잡아갔다고 기록한다.[26]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이 제대로 된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죽을 것이며, 그때 유다 백성이 통곡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또한 여호야김이 예루살렘 문 밖에 던져지고 나귀처럼 매장될 것이라고 예언했다.[27] 그의 시체는 버려져 낮에는 더위, 밤에는 추위를 겪을 것이라고도 예언했다.[28] 요세푸스는 느부갓네살 2세가 고위 장교들과 함께 여호야김을 죽이고 시신을 "장례를 치르지 않고 성벽 앞에 버리라"고 명령했다고 기록한다.[29]

3. 5. 바빌론 유수

기원전 609년 이집트 왕 네코 2세는 메기도에서 요시야 왕을 살해하고, 하란 전투에서 돌아온 후 여호야김을 왕으로 임명했다.[20] 네코 2세는 여호야김의 동생 여호아하스를 폐위시키고 이집트로 데려갔다. 여호야김은 이집트의 봉신으로서 막대한 공물을 바치며 통치했다. 그는 백성들로부터 은금을 징수하여 공물을 마련했다.[21]

그러나 기원전 605년 카르케미시 전투에서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이끄는 바빌로니아가 이집트를 패퇴시킨 뒤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여호야킴은 예루살렘 파괴를 막기 위해 바빌론으로 충성 대상을 바꾸었다. 그는 국고를 털어 공물을 바쳤고, 성전 기물과 왕실, 귀족들 중 일부를 넘겨주었다. 이때 다니엘도 함께 끌려갔다.[20]

예레미야는 여호야킴의 정책을 비판하며 회개와 율법 준수를 촉구했다.[22] 또 다른 예언자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 역시 같은 메시지를 전했는데, 여호야킴은 그를 처형하라고 명령했다.[23][24]

여호야킴은 3년간 바빌로니아의 봉신으로 지냈다. 기원전 601년 바빌로니아의 이집트 침공이 실패하면서 유다에 대한 바빌로니아의 지배력이 약화되었고, 여호야킴은 다시 이집트로 충성 대상을 바꾸었다.[20] 기원전 598년 말,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유다를 침공하여 다시 예루살렘을 포위했는데, 이 포위는 3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여호야킴은 예루살렘 포위가 끝나기 전에 죽었다.[25] 역대기는 네부카드네자르 왕이 그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빌론으로 잡아갔다고 기록한다.[26]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이 제대로 된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죽을 것이며, 유다 백성이 통곡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또한 여호야김이 예루살렘 문 밖에 던져지고 나귀 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 예언하였다.[27] 그의 시체는 버려져 낮에는 더위, 밤에는 추위를 당할 것이라고도 예언하였다.[28] 요세푸스는 네부카드네자르가 고위 장교들과 함께 여호야킴을 죽이고 시신을 "장례를 치르지 않고 성벽 앞에 버리라"고 명령했다고 기록한다.[29]

그의 뒤를 이어 아들 여호야긴이 즉위하였으나,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해 폐위되었다. 이후 여호야김의 동생 시드키야가 유다의 마지막 왕으로 임명되었다.

바빌로니아 연대기는 기원전 597년 아달월 2일 (3월 16일) 예루살렘이 항복했다고 전한다.

4. 랍비 문헌에서의 묘사

여호야킴은 아버지 요시야의 장남이었지만, 아버지의 뒤를 이을 자격이 없다고 여겨져 동생 여호아하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여호아하스는 형의 왕위 주장을 무효화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이후 여호야김은 여호아하스가 이집트로 끌려간 후 정권을 잡았는데, 그는 경건한 아버지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는 신성 모독적인 폭군이었으며, 끔찍한 죄를 저질렀다. 그는 어머니, 며느리, 계모와 근친 관계를 맺었으며, 아내를 강간하고 재산을 빼앗은 사람들을 살해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의 옷은 "샤아트네츠"로 만들어졌으며,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수술로 포피즘을 만들고 몸에 문신을 새기기도 했다.[1] 그는 심지어 자신의 불경함을 자랑하며, 하나님이 주신 빛은 더 이상 필요 없으며, 자신들에게는 빛처럼 빛나는 금이 있다고 말했다.[2]

예레미야가 자신의 애가를 쓰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여호야김은 두루마리를 가져오라고 명한 후, 처음 네 구절을 침착하게 읽고 "나는 아직 왕이다"라며 조롱했다. 다섯 번째 구절에서 "주께서 그녀를 그녀의 많은 죄악으로 괴롭게 하셨다"라는 구절을 보자, 그는 두루마리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을 지우고 불 속에 던져 넣었다.[3]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다시 혼돈으로 바꾸는 것을 생각하셨지만, 이 왕 아래의 유대 백성이 경건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4]

그러나 처벌은 유보되지 않았다. 느부갓네살 2세는 군대와 함께 안티오키아 근처 다프네로 와서, 대산헤드린에게 여호야김을 넘겨주면 도시와 주민들을 괴롭히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산헤드린은 여호야김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여호야김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옳은지 묻자, 그들은 반역자 세바의 경우에 다윗이 한 일을 상기시켰다.[5]

여호야김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전해진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예루살렘에서 죽어 느부갓네살이 왕의 시신에 만족해야 했고, 시신은 성벽 너머로 던져졌다고 한다. 또 다른 버전에 따르면 그는 성벽 아래로 내려지는 동안 죽었다. 다른 사람들은 느부갓네살이 유다 전역으로 그를 끌고 다닌 후 그를 죽이고, 시체를 조각내어 개들에게 던져 버렸거나, 죽은 나귀의 가죽 속에 넣었다고 주장한다.[6]

그러나 이 부끄러운 죽음조차도 끝이 아니었다. 그의 두개골에는 "이것과 하나 더"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랍비 페리다의 할아버지인 랍비 히야 바 아부야는 예루살렘 문 앞에서 그 두개골을 발견하고 두 번이나 묻었지만, 땅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여호야김의 두개골이라고 결론 내리고 비단으로 감싸 벽장에 숨겼다. 얼마 후 그의 아내가 그것을 발견하고 이웃에게 보여주자, 이웃은 남편에게 잊을 수 없는 다른 아내가 있었고, 그래서 그녀의 두개골을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내는 그것을 불 속에 던져 넣었고, 남편이 돌아와 "이것과 하나 더"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여호야김의 유해는 예루살렘에서 내쫓겼을 뿐만 아니라 불에 타서 무덤조차 거부당했다.[7] 아가다에서는 여호야김이 여전히 그의 죄에 대한 처벌을 받고 있다고 한다.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그를 올 세상에 갈 자격이 없는 사람에 포함시키지 않지만,[8] 예루살렘 탈무드는 그를 공공연히 율법을 어겨 하늘에 갈 자격을 상실한 사람의 예로 인용한다.

5. 평가

여호야킴은 기원전 609년, 이집트 왕 네코 2세에 의해 왕으로 임명되었다. 네코 2세는 요시야 왕이 므깃도에서 죽은 지 3개월 만에 여호야김의 동생인 여호아하스를 폐위시키고 그를 이집트로 데려갔다. 여호야김은 이집트의 봉신으로서 막대한 조공을 바쳐야 했고, 이를 위해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5]

기원전 605년 갈기미스 전투에서 이집트가 바빌로니아에게 패배한 후, 느부갓네살 2세가 예루살렘을 포위하자 여호야김은 충성을 바꿨다. 그는 예루살렘의 보물창고에서 조공을 지불하고, 일부 성전 유물을 바쳤으며, 왕족과 귀족을 인질로 넘겨주었다.[4] 다니엘서에서 다니엘은 이들 중 한 명으로 묘사된다.

랍비 문헌은 여호야김을 끔찍한 죄를 저지른 무신론적인 폭군으로 묘사한다. 그는 어머니, 며느리, 계모와 근친상간 관계를 맺고, 남자를 살해한 다음 그의 아내를 강간하고 재산을 빼앗는 습관이 있었으며, 몸에 문신을 새기기도 했다.[2]

예언자 예레미야는 왕의 정책을 비판하며 회개와 율법 준수를 주장했다.[6] 또 다른 예언자 우리야 벤 세마이야도 비슷한 메시지를 선포했고, 여호야김은 그를 처형하라고 명령했다.[7]

여호야김은 3년 동안 바빌로니아의 봉신으로 있었지만, 기원전 601년 이집트 침공 실패로 바빌로니아의 통제가 약화되자 다시 이집트로 충성을 바꿨다.[4] 기원전 598년 말,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 2세가 유다를 침공하여 다시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3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여호야김은 포위가 끝나기 전에 사망했다.[3] 역대기는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를 쇠사슬로 묶어 바빌론으로 데려가려고 하였다."[8]라고 기록한다. 예레미야는 그가 제대로 된 장례 없이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다.[16] 요세푸스는 느부갓네살이 여호야김과 고위 관리들을 죽인 후 여호야김의 시신을 "어떤 매장도 없이 성벽 앞에 던지도록" 명령했다고 기록한다.[9]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고니야가 왕이 되었으나, 3개월 후 느부갓네살은 여고니야를 폐위시키고 여호야김의 동생인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다. 여고니야와 유다 인구의 상당수는 바빌론 유수바빌론으로 추방되었다.

바빌론 연대기에 따르면,[11] 예루살렘은 기원전 597년 2 아다르 (3월 16일)에 함락되었다.

6. 대중 문화

여호야킴은 1998년 영화 예레미야에서 안드레아 오치핀티가 연기하였다.[15]

참조

[1] 성경 1 Chronicles 3:16
[2] 웹사이트 Jehoiakim http://www.jewishenc[...]
[3] 서적 The Hebrew Bible Continuum International
[4] 저널 "Jehoiakim Slept with his Fathers…" (II Kings 24:6) – Did He? https://web.archive.[...] 2018-12-08
[5] 성경 2 Kings 23:35
[6] 성경 Jeremiah 36:1–32
[7] 서적 A History of Ancient Israel and Judah Westminster John Knox Press
[8] 성경 2 Chronicles 36:6
[9] 서적 Antiquities of the Jews
[10] 서적 Antiquities of the Jews
[11] 서적 The Illustrated Dictionary & Concordance of the Bible Sterling Publishing Company, Inc.
[12] 간행물 The Babylonian Chronicles The British Museum
[13] 웹사이트 Jewish encyclopedia Jehoiakim http://www.jewishenc[...]
[14] 웹사이트 Encyclopedia.com https://www.encyclop[...]
[15] 웹사이트 The Bible Collection: Jeremiah https://www.imdb.com[...] 2023-06-29
[16] 성경 エレミヤ36:23
[17] 성경 歴代誌36:6
[18] 웹사이트 Jehoiakim http://www.jewishenc[...]
[19] 서적 The Hebrew Bible Continuum International
[20] 저널 "Jehoiakim Slept with his Fathers…" (II Kings 24:6) – Did He? https://web.archive.[...] 2018-12-08
[21] 성경 2 Kings 23:35
[22] 성경 Jeremiah 36:1–32
[23] 서적 A History of Ancient Israel and Judah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4] 성경 예레미야 26:20-23
[25] 서적 The Hebrew Bible Continuum International
[26] 성경 역대하 36장 6절
[27] 성경 예레미야 22:18~19
[28] 성경 예레미야 36:30
[29] 서적 Antiquities of the Jews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