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약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염약거는 청나라의 학자로, 유년 시절에는 명민하지 못했으나 학문에 정진하여 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고문상서소증》을 저술하여 《고문상서》가 위작임을 증명하는 등 청나라 고증학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대청일통지》 편찬에 참여하고, 만년에는 안친왕 마이혼의 후대를 받았다. 염약거는 주자학을 연구했지만 이에 맹종하지 않고, 한나라 유학의 방법으로 글을 읽을 것을 주장하며 독자적인 학문적 특징을 보였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청나라의 유학자 - 도광제
도광제는 청나라의 제8대 황제로, 아편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으나 제1차 아편 전쟁에서 패배하는 등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체제를 심화시키며 청나라의 쇠퇴를 초래했다. - 청나라의 유학자 - 고염무
고염무는 명말청초의 유학자이자 사상가로, 주자학 비판과 경세치용 학풍 주창, 반청복명 운동 참여, 그리고 《일지록》 등의 저술 활동을 통해 청대 고증학의 선구자이자 청초 3대 유학자로 평가받으며 "천하흥망 필부유책"이라는 어록으로도 알려져 있다. - 중국의 지리학자 - 심괄
심괄은 중국 송나라 시대의 과학자, 정치가, 외교관, 예술가, 문인으로, 천문학, 지리학, 약학, 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으며, 저서 《몽계필담》을 통해 과학적 사고를 보여준다. - 중국의 지리학자 - 고염무
고염무는 명말청초의 유학자이자 사상가로, 주자학 비판과 경세치용 학풍 주창, 반청복명 운동 참여, 그리고 《일지록》 등의 저술 활동을 통해 청대 고증학의 선구자이자 청초 3대 유학자로 평가받으며 "천하흥망 필부유책"이라는 어록으로도 알려져 있다. - 1636년 출생 - 상지신
상지신은 청나라 초 평남왕 상가희의 아들로, 삼번의 난에서 오삼계에게 투항 후 청에 귀순했으나 강희제의 의심으로 자결했으며, 그의 삶에 대해 기회주의적이라는 평가와 가문 보존을 위한 선택이라는 옹호론이 있다. - 1636년 출생 - 니콜라 부알로
니콜라 부알로는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 확립에 기여하고, 시의 규칙을 정립하며 다양한 작품 활동을 펼친 시인이자 비평가이다.
| 염약거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염약거 |
| 한자 | 閻若璩 |
| 자 | 백시 |
| 호 | 잠구 |
| 출생 | 1636년 11월 1일 (숭정 9년 10월 14일) |
| 출생지 | 청나라 회안부 산양현 |
| 사망 | 1704년 7월 9일 (강희 43년 6월 8일) |
| 향년 | 69세 |
| 사망지 | 청나라 북경 |
| 국적 | 청나라 |
| 가족 | |
| 아버지 | 염수령 |
| 배우자 | 미상 |
| 자녀 | 미상 |
| 학문 | |
| 시대 | 청나라 초기 |
| 분야 | 고증학 |
| 학파 | 미상 |
| 연구 기관 | 미상 |
| 영향 받은 인물 | 주희 고염무 황종희 |
| 영향을 준 인물 | 미상 |
| 주요 저서 | |
| 대표 저서 | 『상서고문소증』 |
| 기타 저서 | 『사서석지』 『맹자생졸년월고』 『잠구차기』 |
2. 생애
염약거는 유년 시절 명민하지는 못했으나, 꾸준히 노력하여 경학(經學)과 사학(史學) 연구에 매진, 학자로서 명성을 쌓았다. 30대 중반 고염무가 태원을 방문했을 때 그의 저서 《일지록(日知錄)》의 오류를 지적하여 쾌히 받아들여졌다. 향시(鄕試)와 박학홍사과(博學鴻詞科)에 급제하지는 못했지만, 학문적 명성은 흔들리지 않아 북경에 머물며 서건학과 교류하였다. 이후 서건학이 총재를 맡은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편찬 사업에 참여했고, 만년에는 뛰어난 학식으로 안친왕(安親王) 마이혼(馬爾渾)의 후대를 받았다.
1703년 12월 (강희 42년 11월), 황사자 윤진(후의 옹정제)의 초빙에 응하여 1704년 3월 (강희 43년 2월) 상경했다. 같은 해 7월 (강희 43년 6월) 베이징에서 서거했고, 향년 69세였다.
2. 1. 유년 시절과 학문적 성장
염약거는 유년 시절에 명민하지는 못했지만, 열심히 공부해 경학(經學)과 사학(史學) 연구에 힘써 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30대 중반, 고염무가 태원을 방문했을 때 그의 저서 《일지록(日知錄)》의 오류를 지적하여 인정을 받았다. 비록 향시(鄕試)와 박학홍사과(博學鴻詞科, 강희제가 명나라 유신들을 회유하기 위해 만든 특별 임용 제도)에 합격하지는 못했지만, 학문적 명성은 여전하여 북경에 머물며 서건학과 교류하였다. 이후 서건학이 총재를 맡은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편찬에 참여했고, 만년에는 뛰어난 학식으로 안친왕(安親王) 마이혼(馬爾渾)의 후대를 받았다.염약거의 조상은 태원부 태원현 사람이지만, 고조부 염한 때부터 회안부 산양현에 살기 시작했다. 증조부는 염국순이다. 할아버지 염세과는 만력 연간의 진사로 참의를 지냈으며, 염약거를 아끼며 "우리 집안을 크게 일으킬 문인이 되라"고 격려했다. 아버지는 시인 염수령이다. 염약거는 6세부터 글을 읽었지만 이해력이 부족하고 병치레가 잦았다. 어머니는 염약거에게 암기를 시키고 낭독을 그만두게 했다. 10년 후인 15세 겨울, 추운 날씨에도 독서를 계속하자 갑자기 글을 막힘없이 이해하게 되었다. 이 해에 학관에 들어가 제생(諸生)이 되어 경사를 연구했다. 1662년(강희 원년) 베이징으로 가 龔鼎孳|공정자중국어를 알게 되어 유명해졌다. 1678년(강희 17년) 다시 베이징으로 가 박학홍사과에 응시했지만 낙방했다. 이후 베이징에 머물며 여러 학자들과 교류했다. 이 기간 동안 고염무의 《일지록》을 개정하거나, 왕완의 《오복고이》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또한 서건학이 조서에 의해 《大清一統志|대청일통지중국어》를 편찬할 때 호위 등과 함께 참여했다.
2. 2. 관직 진출과 학문 활동
유년 시절에는 명민하지 못했으나, 경학(經學)과 사학(史學) 연구에 힘써 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30대 중반, 고염무가 태원을 방문했을 때 그의 저서 《일지록》의 오류를 지적하여 인정을 받았다. 이후 향시(鄕試)와 박학홍사과(博學鴻詞科, 강희제가 명나라 유신을 회유하기 위해 설치한 특별 임용 제도)에는 급제하지 못했으나, 학문적 명성은 여전하여 북경에 머물며 서건학과 교류하였다. 이후 서건학이 총재가 된 《대청일통지》 편찬 사업에 참여하였고, 만년에는 뛰어난 학식으로 안친왕(安親王) 마이혼(馬爾渾)의 후대를 받았다.[1]1662년(강희 원년) 베이징으로 가 龔鼎孳|공정자중국어를 알게 되어 유명해졌다. 1678년(강희 17년) 다시 상경하여 박학홍사과에 응시했으나 낙제했다. 이후 베이징에 머물며 여러 학자들과 교류하며 고염무의 《일지록》을 개정하거나, 왕완의 《오복고이》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또한 서건학이 조서에 의해 《대청일통지》를 편수할 때 호위 등과 함께 종사했다.[1]
2. 3. 사망
훗날 옹정제가 되는 황사자 윤진의 초빙에 응하여, 1704년 3월 (강희 43년 2월) 상경했다. 같은 해 7월 (강희 43년 6월) 베이징에서 서거했고, 향년 69세였다.3. 사상과 학문적 업적
염약거는 주자학을 공부하였지만, 이에 맹종하지 않고 자신만의 학문적 길을 걸었다. 청년 시절부터 20여 년간 《고문상서(古文尙書)》를 면밀히 검토하여 《고문상서소증(古文尙書疏證)》을 저술, 《고문상서》가 위작임을 증명하였다. 이는 당시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지던 유교 경전에 대해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연구 방법을 시도한 것으로, 청나라 고증학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1]
주희를 존중하면서도 한나라 유학의 방법론을 취하며, 고염무와 황종희의 넓은 학식을 본받고자 하였다. 비록 학문적 규모는 그들에 미치지 못했지만, 꼼꼼하고 세밀한 연구를 통해 청나라 고증학의 시조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주요 저서로는 《사서석지(四書釋地)》, 《잠구잡기》, 《맹자생졸연월고》 등이 있다. 특히 《잠구잡기》는 고염무의 《일지록》과 함께 높은 평가를 받는다.
3. 1. 《고문상서소증》과 고증학
그는 주자학을 하였지만 이에 맹종하지 않고, 청년 시대부터 20여 년에 걸쳐 《고문상서(古文尙書)》( 동진 때에 나왔다. 옛 문자로 쓰여진 것으로 25편)를 면밀하게 검토하여 《고문상서소증(古文尙書疏證)》을 저술함으로써 《고문상서》가 위작임을 증명하였다. 여기에 제시된 논증은 그때까지 신성불가침으로 되어 있던 유교 경전에 대하여 객관적 실증적 연구 방법을 시도한 것으로서 청조 고증학 발전의 초석을 이루는 것이다.[1]『상서고문소증』은 상서 고문 25편이 위서임을 입증하기 위해 30여 년을 소비한, 필생의 저작이다. 주희를 존중하는 학자이지만, 한나라 유학의 방법으로 글을 읽을 것을 주장하며, 고염무, 황종희의 박식을 모범으로 삼았다. 구상이나 규모에서는 고염무, 황종희에 미치지 못하지만, 박학하고 세밀한 점에 특징이 있으며, 청나라 고증학의 시조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3. 2. 기타 저술
그는 주자학을 공부하였지만, 이에 맹종하지 않고 청년 시절부터 20여 년간 《고문상서(古文尙書)》를 면밀히 검토하여 《고문상서소증(古文尙書疏證)》을 저술, 《고문상서》가 위작임을 증명하였다. 여기서 제시된 논증은 당시까지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지던 유교 경전에 대해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연구 방법을 시도한 것으로, 청나라 고증학 발전의 초석을 이루었다. 그 밖의 저서로는 《사서석지(四書釋地)》, 《잠구답기》 등이 있다.《상서고문소증》은 상서 고문 25편이 위서임을 입증하기 위해 30여 년을 들인 필생의 역작이다. 또 다른 주요 저서인 《사서석지》는 사서에 나오는 지리에 관한 고증 등을 담고 있다. 또한 《맹자생졸연월고》, 《잠구잡기》가 있으며, 《잠구잡기》는 《일지록》과 함께 칭송받는다. 주희를 존중하는 학자이지만, 한나라 유학의 방법으로 글을 읽을 것을 주장하며, 고염무, 황종희의 박학다식함을 모범으로 삼았다. 구상이나 규모는 고염무, 황종희에 미치지 못하지만, 박학하고 세밀한 점이 특징이며, 청나라 고증학의 시조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3. 3. 학문적 특징
염약거는 주자학을 공부하였지만 이에 맹종하지 않고, 청년 시대부터 20여 년에 걸쳐 《고문상서(古文尙書)》를 면밀하게 검토하여 《고문상서소증(古文尙書疏證)》을 저술함으로써 《고문상서》가 위작임을 증명하였다. 여기서 제시된 논증은 그때까지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졌던 유교 경전에 대해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연구 방법을 시도한 것으로, 청나라 고증학 발전의 초석을 이루었다.[1] 주희를 존중했지만, 한나라 유학의 방법으로 글을 읽을 것을 주장하며, 고염무와 황종희의 박식을 모범으로 삼았다. 구상이나 규모는 고염무, 황종희에 미치지 못하지만, 박학하고 세밀한 점이 특징이며, 청나라 고증학의 시조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주요 저서로는 『상서고문소증』, 『사서석지』, 『맹자생졸연월고』, 『잠구잡기』 등이 있다.[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