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비 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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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비 최씨는 고려 우왕의 비로, 1388년 최영의 딸로서 우왕의 비가 되었다. 위화도 회군 이후 우왕과 함께 유배되었으며, 우왕이 처형될 때 구하려다 실패하고, 이후 우왕의 죽음에 슬퍼하며 지극한 애도를 표했다. 이성계는 그녀에게 수신전을 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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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비 최씨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가문 | 동주 최씨 |
아버지 | 최영 |
어머니 | 은씨 |
배우자 | 고려 우왕 |
자녀 | 없음 |
기타 정보 | |
생년 | 미상 (14세기 중반?) |
몰년 | 미상 (15세기 초반?) |
신분 | 고려 우왕의 후궁 |
종교 | 불교 |
2. 생애
1388년 3월, 신아(申雅)의 딸 정비(正妃), 왕흥(王興)의 딸 선비(善妃)와 함께 우왕의 비가 되었다. 영비 최씨는 명장 최영과 그의 첩 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최영은 자신의 딸이 아름답지 않고 정실 소생도 아니라는 이유로 왕비 간택을 반대하며, 왕비가 된다면 출가하겠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최영의 부하였던 정승가(鄭承可)·안소(安沼) 등의 설득으로 결국 왕비가 되었다. 우왕은 최영의 강직한 성품을 꺼려 그의 집에 잘 가지 않았으나, 영비를 맞이한 후에는 자주 최영의 집을 찾았다.
철령위(鐵嶺衛) 설치와 관련해 우왕과 최영이 요동 정벌을 계획하던 중, 개경(開京)에 사면령이 내려지고 서해도(西海道)로 향하는 우왕을 아버지 최영과 함께 3월부터 호종했으며, 5월에는 우왕의 부벽루(浮碧樓) 행행에도 함께 따랐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일으켜 개경을 공격했고, 군사들은 대궐을 포위한 채 우왕에게 영비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지만, 우왕은 "영비를 내보낸다면 나도 함께 갈 것이다"라며 거절했다. 1388년 6월 8일, 우왕은 영비와 다른 총비인 연쌍비와 함께 한밤중에 개경을 떠나 강화도(江華島)로 쫓겨났다가 7월에 여흥(驪興)을 거쳐 다시 강릉(江陵)으로 옮겨졌다. 최영은 요동 정벌을 주도한 책임을 지고 12월에 유배지 고봉현에서 처형당했다.
공양왕 원년(1389년)에 강화도로 유배된 아들 창왕(昌王)과 함께 우왕이 12월 14일 처형되었다. 이때 왕과 함께 있던 영비 최씨는 달려가 구하려 했으나, 강릉의 아전이 옷자락을 잡으며 제지했다. 영비는 "늙은 놈이 어찌 감히 그 손으로 나를 더럽히느냐!"라고 고함치며 아전이 잡았던 옷자락을 찢어 버렸고, 그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 오싹해했다.
우왕 사후, 영비는 "내가 이 꼴이 된 건 모두 내 아버지 때문이다."라며 10여 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밤낮으로 통곡했으며, 잘 때는 우왕의 시신을 안고 잤다. 곡식을 얻으면 반드시 깨끗이 쓸어서 제사에 사용했다. 이성계는 우왕의 또 다른 왕비인 근비 이씨와 함께 영비 최씨에게도 수신전(守信田) 3백 결(結)을 지급했다.
2. 1. 초기 생애와 입궁
1388년 3월, 신아(申雅)의 딸 정비(正妃), 왕흥(王興)의 딸 선비(善妃)와 함께 우왕의 비로 간택되었다. 영비 최씨는 명장 최영과 그의 첩 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최영은 자신의 딸이 아름답지 않고 정실 소생도 아니라는 이유로 왕비 간택을 반대하며, 왕비가 된다면 출가하겠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최영의 부하였던 정승가(鄭承可)·안소(安沼) 등의 설득으로 결국 왕비가 되었다.[1] 우왕은 최영의 강직한 성품을 꺼려 그의 집에 잘 가지 않았으나, 영비를 맞이한 후에는 자주 최영의 집을 찾았다고 한다. 영비는 궁궐 내에서 근비 다음가는 서열이었다.[1]2. 2. 궁중 생활
1388년 3월, 신아(申雅)의 딸 정비(正妃), 왕흥(王興)의 딸 선비(善妃)와 함께 우왕의 비가 되었다. 우왕은 영비의 아버지 최영의 곧은 성품을 꺼려 그의 집에 잘 가지 않았으나, 영비를 맞이한 후에는 최영의 집을 자주 찾았다.[1] 영비는 모든 후궁들 중에서 근비 다음으로 서열이 높았으며, 영혜부(영혜부)라는 저택에 거처했다. 새로운 후궁 3명이 들어오면서 궁궐의 재정 부담이 커졌고, 우왕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 해 바쳐야 할 곡물 공물을 늘렸다.[1]철령위(鐵嶺衛) 설치와 관련해 우왕과 최영이 요동 정벌을 계획하던 중, 개경(開京)에 사면령이 내려지고 우왕은 서해도(西海道)로 행차했다. 이때 영비는 아버지 최영과 함께 우왕을 수행했으며,[1][2] 5월에는 우왕의 부벽루(浮碧樓) 행행에도 동행했다.[3] 부벽루에서 우왕은 마부에게 활을 쏘고 싸움을 걸어 죽이려 했다. 영비의 아버지 최영이 이를 꾸짖었지만, 우왕은 결국 마부를 죽였다.[3]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을 공격하자, 군사들은 대궐을 포위하고 우왕에게 영비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우왕은 "영비를 내보낸다면 나도 함께 갈 것이다"라며 거절했다. 결국 우왕은 영비 및 다른 총비인 연쌍비(燕雙飛)와 함께 밤중에 개경을 떠나 강화도(江華島)로 쫓겨났고, 이후 여흥(驪興)을 거쳐 강릉(江陵)으로 옮겨졌다. 최영은 요동 정벌을 주도한 죄로 유배지 고봉현에서 처형당했다.
2. 3. 우왕 폐위와 유배
1388년 3월,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일으켜 개경을 공격했다. 군사들은 대궐을 포위한 채 우왕에게 영비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지만, 우왕은 "영비를 내보낸다면 나도 함께 갈 것이다"라며 거절했다.[4][5] 1388년 6월 8일, 우왕은 영비 및 다른 총비인 연쌍비와 함께 한밤중에 개경을 떠나 강화도로 쫓겨났다.[4] 이후 여흥을 거쳐 강릉으로 옮겨졌다.최영은 요동 정벌을 주도한 책임을 지고 1388년 12월 유배지 고봉현에서 처형당했다. 우왕 또한 공양왕 원년(1389년)에 강화도로 유배된 아들 창왕과 함께 12월 14일에 처형되었다. 이때 왕과 함께 있던 영비 최씨는 달려가 구하려 했으나, 강릉의 아전이 옷자락을 잡으며 제지했다. 영비는 "늙은 놈이 어찌 감히 그 손으로 나를 더럽히느냐!"라고 고함치며 아전이 잡았던 옷자락을 찢어 버렸고, 그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 오싹해했다고 한다.(《청파극담》)
2. 4. 우왕 사후
1389년 우왕이 아들 창왕과 함께 처형될 때, 영비 최씨는 달려가 구하려 했으나 강릉의 아전이 옷자락을 잡으며 저지했다. 이에 영비는 "늙은 놈이 어찌 감히 그 손으로 나를 더럽히느냐!"라고 고함치며 아전이 잡았던 옷자락을 찢어 버렸고,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모두 오싹해했다(《청파극담》).우왕이 죽은 후, 영비는 "내가 이 꼴이 된 건 모두 내 아버지 때문이다."라며 10여 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밤낮으로 통곡했으며, 잘 때는 우왕의 시신을 안고 잤다. 곡식을 얻으면 반드시 깨끗이 쓸어서 제사에 사용했다.[7][8] 이성계는 우왕의 또 다른 왕비인 근비 이씨와 함께 영비 최씨에게도 수신전(守信田) 3백 결(結)을 지급했다.
3. 가계
항목 | 내용 |
---|---|
아버지 | 최영(1316~1388) |
어머니 | 씨부인(氏夫人) |
남편 | 우왕(1365~1389, 재위: 1374~1388) |
4. 대중문화에서의 묘사
참조
[1]
서적
Goryeosa
[2]
서적
Goryeosa
[3]
서적
Goryeosa
[4]
서적
Goryeosa
[5]
문서
若出此妃, 我當偕出
[6]
서적
Goryeosa
[7]
문서
妾之至此, 吾父之過也
[8]
서적
Goryeo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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