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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령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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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철령위는 1387년 명나라가 고려에 설치를 통보한 군사 기구이다. 명나라는 과거 원나라의 영토가 명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철령 이북 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했고, 이에 고려는 반발했다. 철령위의 위치에 대해서는 한반도 북부, 압록강 인근에서 원산만까지, 또는 요동 지역 등 다양한 주장이 존재하며, 이는 고려의 요동 정벌 계획과 위화도 회군에 영향을 미쳤다.

2. 원 간섭기 고려와 명의 등장

13세기 이후 100여 년 간 원나라의 부마국 상태에 놓여 있던 고려공민왕 즉위 후 부원 세력을 숙청하고 쌍성총관부동녕부 등 원나라에 빼앗겼던 북방 영토를 되찾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중국 대륙 남쪽에서 새롭게 등장한 명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었다.[1]

그러나 고려의 기대와 달리, 1387년 12월, 명나라는 과거 원나라에 속했던 영토는 모두 명나라에 귀속된다는 논리로 철령 이북 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했다. 1388년 명나라 요동도사(遼東都司)는 “호부(戶部)는 황제의 명을 받들어, 철령 북쪽과 동쪽, 서쪽이 원래 개원(開原)의 관할이므로 이곳에 속해있던 한인, 여진인, 달달인(타타르인), 고려인은 종전대로 요동에 속하게 한다.”고 통보했다.[1]

당시 실권자였던 수시중(守侍中) 최영은 명나라 정료위(定遼衛) 공격과 화친 중 후자를 택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귀국한 고려 사신 설장수홍무제의 말을 전한 후, 재상 회의에서 철령 북쪽 땅을 명나라에 줄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고려는 정당문학 곽추(郭樞)와 밀직제학 박의중(朴宜中)을 명나라에 보내 철령 북쪽은 고려 영역이므로 결정 철회를 요청했다.[1]

같은 해 3월, 서북면도안무사 최원지(崔元沚)는 '명나라 요동도사(遼東都司)가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강계(江界, 압록강 경계)에 철령위를 설치하고, 요동에서 철령까지 10리 간격으로 70여 곳의 역참을 설치하려 한다'고 보고했다. 명나라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는 요동 백호(百戶) 왕득명(王得明)을 보내 철령위 설치를 고려에 통고했다. 최영은 이에 분노하여 명나라 사신 21명을 죽이고 이사경(李思敬) 등 5명은 현지에 잡아두라고 명령했다.[1]

3. 명의 철령위 설치 통보와 고려의 반발

1387년 12월, 명나라는 과거 원나라에 속했던 영토는 모두 명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철령 이북 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했다.[1] 1388년 명의 요동도사(遼東都司)는 이사경(李思敬) 등을 보내 "호부(戶部)는 황제의 명을 받들어, 철령 북쪽과 동쪽, 서쪽이 원래 개원(開原)의 관할이므로 이곳에 속해있던 군민으로 한인, 여진인, 달달인(타타르인), 고려인은 종전대로 요동에 속하게 한다"고 통보하였다.[1]

당시 실권자였던 최영은 명의 정료위(定遼衛) 공격과 화친을 두고 재상들과 논의하여 화친으로 결론을 내렸다.[1] 그러나 명에서 귀국한 사신 설장수(偰長壽)가 홍무제(洪武帝)의 말을 전한 후, 재상 회의에서 철령 북쪽의 땅을 명에 줄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1] 고려는 곽추(郭樞)와 박의중(朴宜中)을 명에 보내 철령 북쪽은 고려의 영역이므로 결정 철회를 요청했다.[1]

같은 해 3월, 서북면도안무사 최원지(崔元沚)는 '명의 요동도사(遼東都司)가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강계(江界, 압록강의 경계)에 철령위를 설치하고, 요동에서 철령까지 약 16.09km 간격으로 70여 곳의 역참을 설치하여 역마다 1백 호씩 주둔하려 한다'고 보고했다.[1] 이어 명의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에서 왕득명(王得明)을 보내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자, 최영은 명군 병사 21명을 죽이고 이사경 등 5명을 잡아두게 했다.[1]

4. 요동 정벌 계획과 위화도 회군

1387년 12월, 명나라는 과거 원나라에 속했던 영토는 모두 명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철령 이북 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했다. 이듬해(1388년) 명의 요동도사(遼東都司)는 철령 북쪽과 동쪽, 서쪽이 원래 개원(開原) 관할이므로, 이곳에 속했던 고려인은 종전대로 요동에 속하게 한다는 황제의 명을 고려에 통보했다.[1]

당시 실권자였던 최영은 명과의 화친을 주장했으나, 명에서 귀국한 사신 설장수홍무제의 말을 전한 후, 재상들은 철령 북쪽의 땅을 명에 줄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고려는 명에 사신을 보내 철령 북쪽은 고려의 영역임을 주장하며 결정 철회를 요청했다.

같은 해 3월, 명의 요동도사가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강계(압록강의 경계)에 철령위를 설치하고, 요동에서 철령까지 10리 간격으로 70여 곳의 역참을 설치하려 한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최영은 분노하여 명군 병사들을 죽이고 일부를 잡아두도록 명했다.

우왕과 최영은 요동 정벌을 결정하고 이성계에게 요양 공격을 명하였다. 이성계는 사불가론을 들어 반대했으나, 우왕은 최영의 손을 들어주었다. 좌·우군은 모두 38,830명, 수송인원은 11,630명이었는데, 팔도도통사로서 총사령관을 맡은 최영은 우왕의 만류로 서경에 남았다.[1]

최영 대신 군을 지휘하게 된 우군도통사 이성계는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이켜(위화도 회군) 개경을 점령하고 최영을 유배 보낸 후, 우왕을 폐위하여 강화도로 내쫓았다. 이후 명은 철령위 설치를 중지하였다.

5. 철령위 위치 비정 논란



철령위 위치는 여말선초 외교 관계와 역사 해석에 중요한 쟁점이다. 《고려사절요》와 《명사》 기록에 따르면, 명은 철령 이북의 땅이 원나라 요동에 속했으므로 명의 영토라 주장했고, 고려는 문주, 화주, 고주, 정주 등이 고려의 옛 땅이라며 반박했다. 고려는 "조종(祖宗) 이래로 문(文)ㆍ화(和)ㆍ고(高)ㆍ정(定) 등 주(州)의 고을은 본래 고려에 예속되어 있었다"라고 주장했다. 반면 명은 "고려는 큰 바다로 막히고 압록강으로 경계를 삼아서 일찍이 옛날에는 따로 나라를 이루었으나, 중국의 역대 조정의 정벌을 자주 입은 것은 분쟁의 단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라고 반박했다.

이 기록에 나오는 지명들의 위치 비정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하며, 하위 섹션에서 기존 학설과 새로운 학설을 상세히 다룬다.

5. 1. 기존 학설: 한반도 북부

조선 시대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철령위 위치를 당시 조선의 정평(定平)ㆍ영평(永平) 등 지방 위에 있는 고개로 비정하면서, 명(明)이 철령 북쪽과 동쪽, 서쪽에 해당하는 지금의 한반도 북부 지역을 모두 명의 판도에 포함시키려 했다고 보았다.

근대 일본인 학자들은 철령위가 압록강 근방에 있었다고 보거나(하야시 다이스케), 철령위의 ‘본부’가 처음 지금의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있었는데 압록강변에서부터 설치된 역참을 따라 그 끝이 한반도의 철령(오늘날의 북한 강원도 고산군회양군의 경계에 있는 높이 677m의 고개)에 세워진 것이라고 주장했다(이케우치 히로시). 이케우치 히로시는 이곳이 예전 원(元)의 쌍성총관부가 있던 곳이었고, 고려가 수복하기 이전에 철령 북쪽 땅을 관할하던 쌍성총관부가 위치한 지금의 북한 함경남도 원산만 지역까지 이어지는 역참 설치를 통해 명이 해당 지역까지 명으로 귀속시키고자 했다고 보았다.

해방 이후 한국 학계에서는 1961년 김용덕이 〈철령위고〉를 통해 철령위 자체는 존재하지 않았고 계획상으로만 존재했다고 보았지만, 이후 대부분 이케우치 히로시의 연구 성과를 받아들였다.

5. 2. 새로운 학설: 요동 지역

鐵嶺衛중국어 문제는 여말선초의 외교 관계는 물론 고려 왕조가 조선 왕조로 교체되던 한국사의 시대 구분의 계기였으며, 현행 국사 교과서에도 鐵嶺衛중국어에 관한 문제가 비중 있게 실려 있다. 2010년 복기대는 〈鐵嶺衛중국어 위치에 대한 재검토〉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이 논문에서 복기대는 기존의 鐵嶺衛중국어 위치 비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제기하였다.[2]

# 집안에서 원산만으로 이어지는 것이 鐵嶺衛중국어였다고 한 것과는 달리, 《고려사》 지리지에는 “(고려의) 사방의 경계는 서북쪽으로는 (唐) 이후로는 압록강을 국경으로 삼고 동북쪽으로는 선춘령(先春嶺)으로 경계로 삼았으니, '''대체로 서북쪽 경계는 고구려에 미치지 못했지마는 동북쪽으로는 더 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서로 맞지 않는다.

# 유사시 위협 목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는 중요한 군대 단위인 鐵嶺衛중국어를 굳이 고려의 중심 지역과는 떨어진 한반도 원산만의 바닷가에 설치한 점이 의문스럽다.

# 鐵嶺衛중국어가 한반도 원산만에 중심을 두고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것에 항의하여 일으킨 원정군은 원산만이 아닌 요동으로 가고 있다는 점이 모순된다.[3]

# 이미 공민왕 때에 수복하여 고려의 영토가 된 쌍성총관부(함경도 일대)에 명이 鐵嶺衛중국어를 설치하기까지, 현지 동향을 알려주는 자료에서 명이 이 지역을 장악했음을 짐작할 만한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이 석연치 않다.

# 원산만 일대에 鐵嶺衛중국어가 설치되어 명의 땅이 되거나 명의 영향력 아래 놓일 정도였다면, 훗날 세종에 의한 사군육진 개척 과정과는 서로 상충된다는 점 또한 의문이다.

복기대는 《명사》 요동도지휘사사조의 “鐵嶺衛중국어는 홍무 21년(1388년) 3월에 옛 철령성 자리에 설치하였는데, 26년(1393년) 4월에 옛 은주 땅으로 옮겼다. 지금의 치소다.”라는 기록과 《대명일통지》의 “鐵嶺衛중국어는 도사성(都司城, 요양) 북쪽으로 240리 되는 곳에 있는데 옛날에는 철령성이었고 지금의 鐵嶺衛중국어 치소 동남쪽으로 5백 리에 있어 고려와 경계를 접했다.”는 기록, 그리고 (淸)의 《성경통지》의 “《요사》 지리지에는 은주라는 지명이 없으니 은주(銀州)여야 마땅한데, 지금의 철령현이 그곳이다.”라는 기록을 제시하였다. 鐵嶺衛중국어라는 이름 자체가 원래 철령성 자리에 설치된 연고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며, 처음 설치된 홍무 21년 당시에는 고려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고 홍무 26년에 옮기기 전 위치, 즉 지금의 중국 요녕성 철령시에서 동남쪽으로 5백 리 떨어진 곳이 진짜 鐵嶺衛중국어가 설치된 지역이며, 그곳은 집안시가 아니라 요녕성 본계시 인근에 해당한다는 것이다.[4]

박원호는 명나라가 한반도에 영토를 확보하려는 욕심 없이 요동 개척을 위한 인력을 확보하고자 고려에 鐵嶺衛중국어 설치를 통보하였으며, 실제 鐵嶺衛중국어는 요동에 설치할 계획이었고 실제로도 요동에 설치되었다고 보았다.[5]

6. 역사적 의의와 영향

1388년 명나라가 일방적으로 철령 이북 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며 철령위 설치를 통보하자, 고려는 이에 반발하였다. 당시 실권자였던 최영은 요동 정벌을 주장했고, 우왕이 이를 승인하면서 이성계가 이끄는 군대가 요동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통해 개경을 점령하고 최영과 우왕을 축출하였다.[1] 이후 명나라는 철령위 설치를 중지하였다.

이 사건은 고려와 명의 외교적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며, 고려 왕조의 멸망과 조선 왕조의 건국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

참조

[1] 인용
[2] 인용
[3] 인용
[4] 논문 철령위 위치에 대한 재검토
[5] 문서 鐵嶺衛 설치에 대한 새로운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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