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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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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영은 고려 후기의 무신으로, 왜구, 홍건적 격퇴에 큰 공을 세웠으며, 특히 16세에 "황금을 돌처럼 보라"는 가훈을 받들어 청렴한 삶을 살았다. 공민왕 대에는 반원 자주 정책을 추진하며 북방 영토를 수복하고, 제주도 목호의 난을 진압하는 등 군사적 업적을 쌓았다. 하지만,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 요구에 대응하여 요동 정벌을 추진하다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의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고, 사후 충신으로 평가받아 조선 시대에 '무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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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최영 장군
이름최영
한글최영
한자崔瑩
로마자 표기Choe Yeong
다른 이름무민
武愍
Mumin
출생일1316년
출생지철원군, 고려
사망일1388년
사망지개성, 고려
묘소고양시
군사 경력
소속고려
복무 기간1348년~1388년
가족 관계
배우자문화 유씨 부인
자녀최담 (아들)
영비 최씨
최씨 (딸)
아버지최원직
어머니봉산 지씨
친척김저 (생질)
맹사성 (손녀사위)
관직
주요 관직우달치(于達赤)
대호군(大護軍)
서해평양니성강계체복사(西海平壤泥城江界體覆使)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평양윤(平壤尹)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巡問使)
전리판서(典理判書)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평리(評理)
찬성사(贊成事)
동서강도지휘사(東西江都指揮使)
계림윤(鷄林尹)
육도도순문사(六道都巡察使)
경상전라양광도순문사(慶尙全羅楊廣都巡問使)
양광전라경상도도통사(楊廣全羅慶尙道都統使)
판삼사사(判三司事)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
수시중(守侍中)
문하시중(門下侍中)
봉군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사당
사당 위치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최영장군 사당
경기도 개성특급시 덕물산 최영장군사(崔瑩將軍祠)
경기도 양주시 최영장군당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왕산 국사당
경상남도 통영시 사량면 최영장군사당
남해군 미조면 최영장군사당 무민사(武愍祠)
부산광역시 수영구 무민사(武愍祠)
부산광역시 동구 무민공 최영장군사당
충청북도 청주시 기봉영당(奇峰影堂)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추자면 추자도 최영장군사당
기타 정보
시호무민공(武愍公)
가문동주 최씨
주군충정왕
공민왕
우왕

2. 생애

최영은 소년 시절부터 활달하고 위엄이 있었다.[10] 16세에 아버지가 남긴 "황금을 돌멩이처럼 여기라"는 가훈[12]을 평생 지키며 청렴하게 살았다.[10]

무신으로서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웠고, 1352년 조일신을 제거하며 이름을 떨쳤다.[10] 1354년 원나라의 요청으로 고려 정예병 2000명이 파견될 때 원나라에도 이름을 알렸다.[10]

1355년 공민왕의 반원 운동 때 압록강 서쪽의 여덟 군사 기지를 탈환하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함경도 일대를 수복했다.[9] 1358년 왜구가 침입하자 왜선 400척을 격파했다.[9] 1359년 홍건적이 4만 군세로 침입하자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거의 전멸시켰다.[9][11] 1361년 홍건적이 10만 대군으로 재침입했을 때 총사령관으로서 이들을 격파했다.[9]

1388년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요구하자, 우왕과 최영은 요동 정벌을 계획했다.[13] 최영은 총사령관을 맡았고, 이성계와 조민수가 전선 지휘를 담당했다.[9] 이성계는 4불가론을 내세워 반대했지만, 우왕은 최영의 의견을 따랐다.[17]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가 회군하자, 최영은 저항했으나 실패했다.[20] 백성들은 회군을 환영했고, 고려 왕조는 이미 지지를 잃은 상태였다.[20] 최영은 유배 후 처형되었으며, 죽기 전 자신의 무덤에는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다.[20] 실제로 그의 무덤에는 풀이 자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20]

최영 장군 묘

2. 1. 초기 생애

최영은 고려 후기 학자 최유청의 5대손이자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용력이 출중하여 무인의 길을 걸었다.[10] 16세 때 아버지 최원직으로부터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유훈을 받았고, 평생 이 가르침을 지키며 청렴한 삶을 살았다.[10][12] 무신으로서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웠고, 1352년에는 조일신의 반란을 진압하여 이름을 떨쳤다.[10]

2. 2. 관료 생활과 군사적 업적

최영은 소년 시절부터 활기차고 위엄이 있었으며, 16세에 아버지로부터 "황금을 돌멩이처럼 여기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가훈을 유언으로 받았다.[10][12] 최영은 평생 이 가르침을 지키며 청렴하고 사욕 없는 삶을 살았다.[10]

무신으로서 왜구 토벌에 공을 세우고 조정의 근위병 대장이 되었으며, 1352년에는 조정에 반역하여 권력을 장악했던 조일신을 멸하고 명성을 떨쳤다.[10] 1354년, 잇따른 반란에 고통받던 원(元)의 구원 요청을 받아 고려는 정예병 2000명을 지원군으로 보냈고, 최영은 이 과정에서 원(元)에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10]

1355년, 공민왕의 쇠퇴를 이용하여 반원 운동을 전개했다.[13] 최영은 왕명을 받들어 원(元)에 점령당했던 압록강 서쪽 여덟 개의 군사 기지를 탈환하고, 원(元)의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함경도 일대를 수복했다.[9] 1358년 왜구(전기 왜구)가 침입해 오자 최영은 신속히 출전하여 왜선 400척을 무찔렀다.[9]

1363년, 홍건적의 침입 등을 틈타 권력을 잡은 반역자를 멸하고[10] 진충분의좌명공신일등이 되어 찬성사에 이르렀다.[14] 1364년, 원(元)은 고려의 반역자 최유(崔儒)에게 원병 1만을 주어 고려에 침입시켰으나, 최영 등이 이끄는 고려군에 국경 부근에서 섬멸당했고,[10] 공민왕의 복위를 인정하고, 최유를 고려로 송환했다.[13] 이로써 고려는 원(元)의 간섭에서 거의 완전히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13]

그러나 남쪽 제주도에서는 원(元)의 잔당(몽골계 목자, 목호라고도 함)이 빈번히 반란을 일으켰다.[8][15] 최영은 314척의 배와 25,605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반란을 진압했고, 포로들은 가차 없이 살해했다.[5] 최영의 토벌 이후에야 비로소 제주도의 군현화가 진행되었다.[16] 난을 평정한 후, 최영은 판삼사사에 임명되었다.[14]

몽골의 간섭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중국을 통일한 명(明)1388년, 고려 영토인 철령 이북의 할양을 일방적으로 통고해 왔다. 그래서 고려 제32대 국왕 우왕과 최영은 요동 지역을 지배함으로써 명(明)의 압력을 물리치려고 계획했다.[13] 최영은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우왕 밑에서 개경에서 지휘를 맡고, 이성계·조민수가 전선 지휘를 담당했다.[9] 이성계는 이 원정에 반대했지만(자세한 내용은 이성계 항목 참조), 우왕은 최영의 의견을 따라 반대론을 무시하고 원정을 시작했다.[17]

2. 2. 1. 초기 관직 생활과 외세 격퇴

최영은 처음 무인으로서 양광도 도순문사의 휘하에서 왜구를 여러 번 토벌하여 공을 세워 우달치에 임명되었다. 1352년(공민왕 원년) 음력 9월에는 조일신의 역모를 안우, 최원 등과 함께 진압하여 호군(護軍)으로 출세했다.[10]

당시 고려는 80년 넘게 원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1354년(공민왕 3년) 중국 산동 지역에서 장사성 등의 홍건적이 원 조정에 반기를 들자, 원은 고려에 이들을 토벌하기 위한 조정군(助征軍)을 요청했다. 이때 최영은 대호군(大護軍) 대장군으로서 류탁, 염제신 등과 함께 병력 2천 명을 이끌고 출정했다. 그의 나이 39세였고, 원에서 대기 중이던 고려인 2만 명을 합류시켜 지휘하였다.[10]

1355년(공민왕 4년), 원정에서 돌아온 최영은 왕명으로 원에게 침식된 동북면의 쌍성총관부를 수복하고, 서쪽으로 압록강을 넘어 요양에 이르는 실지 회복에 나섰다. 이성계와 그의 아버지 이자춘의 도움으로 쌍성총관부를 되찾을 수 있었고, 이들은 이후 고려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최영은 1350년경부터 왜구를 상대로 수많은 승리를 거두면서 병사들과 국왕 모두의 신임을 얻었다.[10] 1352년 조일신의 난을 진압하며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10]

소년 시절부터 활기차고 위엄이 있었던 최영은[10] 16세에 아버지로부터 “황금을 돌멩이처럼 여기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가문의 가훈을 유언으로 받았다.[12][10] 최영은 평생 이 가르침을 지키며 청렴하고 사욕 없는 삶을 살았다.[10]

1358년, 왜구(전기 왜구)가 침입하자 최영은 신속히 출전하여 왜선 400척을 무찔렀다.[9] 1359년에는 홍건적이 약 4만의 군세로 고려에 침입해오자, 안우, 이방실 등과 함께 맞서 싸워[11] 거의 전멸시켰다.[9] 1361년, 홍건적이 10만 대군으로 다시 침입했을 때, 최영은 총사령관으로서 군대를 이끌고 이들을 격파했다.[9]

2. 2. 2.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격퇴

1358년 양광·전라도 왜적 체복사(倭賊體覆使)가 되어 오예포(吾乂浦 : 지금의 장연)에 침입한 왜구 4백여 척을 격파했다.[23] 1359년에는 홍건적이 약 4만 군세로 고려에 침입해오자,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맞서 싸워 거의 전멸시켰다.[9][11] 1361년 홍건적이 10만 대군으로 다시 침입해오자, 최영은 총사령관으로서 군대를 이끌고 이들을 격파했다.[9][11] 1364년에는 원나라 기황후의 지원을 받은 최유가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고자 군사 1만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왔으나, 최영이 이들을 격퇴하였다.[22] 1365년에는 왜구가 교동(喬桐)·강화를 노략질하자 동서강도지휘사(都指揮使)로 왜구를 대적, 경계하였다.[23]

이후에도 왜구와 1376년 홍산[8], 1377년 서강[14], 1378년 승천부에서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8] 최영은 1376년 전투 후 철원부원군이라 칭해졌고, 1378년 전투 후에는 안사공신의 호를 받았다.[14]

2. 2. 3. 제주도 목호의 난 진압

1374년, 제주도에서 목호(牧胡)의 난이 일어나자, 최영은 양광전라경상도통사(문하찬성사)로서 진압군을 이끌고 파견되었다.[5] 고려는 314척의 배와 25,605명의 군사를 동원했다.[5]

당시 토벌군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

직책이름당시 관직
양광전라경상도통사최영문하찬성사
도병마사염흥방밀직제학
양광도원수이희필 (상원수)삼사좌사
양광도원수변안렬 (부원수)판밀직사사
전라도원수목인길 (상원수)찬성사
전라도원수임견미 (부원수)밀직
경상도원수지윤 (상원수)판숭경부사
경상도원수나세 (부원수)동지밀직사사
삼도조전원수 겸 서해도순문사김유지문하사



10월 4일, 최영은 탐라에 상륙하여 몽골군과 격전을 벌인 끝에 승리하여 섬을 해방시켰다.[5] 반란 주동자 3명은 처형되었고, 그들의 목은 수도로 보내졌다.[5] 최영의 토벌 이후 제주도는 군현화가 진행되었다.[16]

2. 3. 권력 장악과 요동 정벌

최영은 고려원나라의 조공국이자 부마국(駙馬國)이던 시절, 원나라의 요청으로 홍건적의 난 진압에 참여하여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며 명성을 얻었다. 공민왕에게 원나라의 쇠퇴를 보고하고, 압록강 서쪽의 여러 고을을 회복하는 등 고려의 영토 회복에 기여했다.[9] 1356년에는 원산에 있는 몽골-고려 달루가치인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는데, 이때 항복한 달루가치가 이자춘이고 그의 아들이 이성계였다.

1360년에는 홍건적을 물리쳤고, 1363년에는 왕을 암살하려는 반란을 진압했다.[3] 평양 수령으로 재직하며 농업 생산 증대와 기근 완화에 힘써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1364년에는 원나라의 지원을 받은 덕흥군의 침입을 막아내며 고려의 독립을 확고히 했다.[4] 1368년 명나라가 몽골에 대항하는 동맹을 제의했을 때, 공민왕은 최영에게 만주의 몽골 수비대를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최영은 요양을 함락시키기도 했다.

1388년,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요구하자, 최영은 우왕과 함께 요동 정벌을 계획했다. 최영은 총사령관을 맡고, 이성계와 조민수가 전선 지휘를 담당했다.[9] 그러나 이성계는 4불가론(四不可論)을 주장하며 요동 정벌에 반대했다.

이성계의 4불가론[6][24]
1.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
2. 여름철 농번기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3. 북쪽으로 군사를 보내면 남쪽에서 왜구가 침입할 수 있다.
4. 장마철에는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사용하기 어렵고, 전염병이 발생할 수 있다.



우왕은 최영의 의견을 따라 요동 정벌을 강행했지만,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에 의해 최영은 체포되어 유배된 후 처형되었다.[17]

2. 3. 1. 조반의 난과 권문세족 숙청

1388년 (무진년) 정월 초하루, 염흥방우왕에게 강권하여 조반을 수배하였다. 염흥방의 종 이광이 조반의 땅을 빼앗자 조반이 이광을 죽였는데, 염흥방이 조반이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허위 보고를 한 것이었다. 체포된 조반은 순군옥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6, 7 명의 탐욕스러운 재상들이 사방에 종을 놓아 남의 노비와 토지를 빼앗고 백성들을 해치며 학대하니 이들이 큰 도적이다. 지금 이광을 벤 것은 오직 국가를 돕고 백성을 해치는 도적을 제거하려 한 것인데, 어찌 반란을 꾀한다고 하느냐.”라고 항변하였다. 그러나 염흥방은 고문을 통해 기어코 반역 사건으로 몰려 했다.[3]

염흥방은 젊어서 학문에 뛰어나 여러 번 동지공거가 되었고 개혁을 주창하는 인물이었으나 이인임에게 항거하다 귀양을 다녀온 이후 권문세도가와 친분을 쌓아 탐욕에 찬 간신이 되어 있었다. 우왕은 전횡을 일삼는 것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하여 최영과 이성계에 명하여 병력을 동원, 왕궁을 숙위하게 하고 삼사좌사 염흥방을 비롯하여 영삼사사 임견미, 찬성사 도길부를 체포하도록 했다.

우왕은 인사 발령을 통해 최영을 문하시중, 이성계를 수문하시중, 이색을 판삼사사, 우현보, 윤진, 안종원을 문하찬성사, 문달한, 송광미, 안소를 문하평리, 성석린을 정당문학, 왕흥을 지문하사, 인원보를 판밀직사사로 임명하였다.

오랫동안 전장에서 생활하며 왜구와 야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최영은 공로와 경륜과 함께 염흥방의 무고로 발생된 허위 조반의 난을 기회로 1388년문하시중의 지위까지 다시 올랐다.

2. 3. 2. 요동 정벌 추진과 위화도 회군

1388년(우왕 14년) 2월, 명나라는 철령 이북의 땅이 원래 원나라의 쌍성총관부가 있던 지역이므로 그곳을 다스려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철령위를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겠다는 통고를 고려에 보내왔다.[24] 이에 반발한 최영은 4월, 우왕과 함께 요동을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이자송(李子松)이 요동 정벌의 불가함을 따지자, 최영은 이자송을 임견미 일당으로 몰아 곤장 107대를 때린 후 전라도 내상(內廂)으로 유배했다가 얼마 뒤에 죽였다. 이성계는 요동 정벌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이유를 들었다.[24]

#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할 수는 없다.

# 농사철에 군대를 동원할 수는 없다.

# 모든 군사가 북쪽으로 몰려간 틈에 왜구가 쳐들어올 소지가 있다.

# 여름이라 비가 자주 내리므로 활의 아교가 녹아 쓰기 어렵고 군사들은 전염병에 시달린다.

이를 '4불가론'이라고 한다. 그러나 요동 정벌은 단행되었고, 이성계 등은 대국을 건드릴 수 없다며 위화도에서 회군을 단행하였다.

최영 장군은 부하였던 이성계에게 배신당해 처형당했다.

1388년, 최영은 이성계에게 명나라군을 요동 반도에서 몰아낼 것을 명령했다. 이성계는 북벌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이유를 들었다.[6]

#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유교 질서에 어긋난다.

# 여름 농사철에 군사 원정을 벌이는 것은 백성의 흉년을 초래한다.

# 병사들이 북쪽으로 대거 이동하면 남쪽에서는 왜구가 활개 칠 것이다.

# 장마로 인해 군대의 주력 무기인 활의 효과가 떨어지고, 군영 내 전염병이 확산될 것이다.

최영은 어린 우왕의 지지를 받아 침략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고위 관료와 일반 백성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알고 개경으로 돌아와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사건은 위화도 회군으로 알려졌으며, 조선 건국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성계가 개경으로 돌아오자, 최영은 궁궐에서 용감하게 저항했지만, 수적으로 열세하여 패배했다. 최영은 체포되어 고양으로 유배된 후 이성계 정부에 의해 참수되었다. 처형 전, 최영은 자신의 부당한 죽음으로 인해 그의 무덤에는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1976년까지 그의 무덤에는 풀이 자라지 않았으며, 붉은 토양 때문에 '적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명(明)은 1388년, 고려 영토인 철령 이북의 할양을 일방적으로 통고해 왔다. 고려 제32대 국왕 우왕과 최영은 요동 지역을 지배함으로써 명의 압력을 물리치려고 계획했다.[13] 최영은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우왕 밑에서 개경에서 지휘를 맡고, 이성계·조민수가 전선 지휘를 담당했다.[9] 이성계는 이 원정에 반대했지만(자세한 내용은 이성계 항목 참조), 우왕은 최영의 의견을 따라 반대론을 무시하고 원정을 시작했다.[17] 1388년 5월, 원정군은 압록강 하구의 위화도에 도착했지만, 폭우로 인한 홍수로 강을 건널 수 없었고, 날이 갈수록 탈영하는 병사가 끊이지 않았으며, 식량 보급도 어려워졌다.[18] 이러한 상황을 이유로 이성계는 철군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성계는 독자적으로 철군을 시작했다(위화도 회군)[19] 최영은 회군 소식을 듣고 저항군을 조직하려 했지만, 모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20] 회군이 백성에게 환영받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고려 왕조는 이미 백성의 지지를 잃은 것이었다.[20] 최영은 잡혀 유배형을 받고, 곧 처형되었다.[17] 최영은 죽기 직전 “만약 나에게 조금이라도 사심이 있었다면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풀은 자라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20] 그래서인지 최영의 무덤에는 풀이 전혀 자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20]

2. 4. 최후

1388년,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일으켜 개경으로 돌아왔다.[25] 정도전, 조준, 정몽주 등은 이성계에 대한 반대 여론을 무마시켰다.[25] 최영은 이성계의 군대에 맞서 싸웠으나, 결국 패배하여 붙잡혔다.[26]

최영은 경기도 고봉으로 유배되었다가[26] 개경으로 소환되어 처형당했다. 향년 73세였다. 최영은 죽기 전 "자신에게 탐욕이 있었다면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결백하다면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고 유언했다.[26] 실제로 그의 무덤에는 풀이 자라지 않아 '적분'이라 불렸으며, 최근에는 유가족이 풀을 심었다.[26]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결심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들었다.[6]

이유내용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공격하는 것세계의 유교 질서에 어긋남
여름 농사철에 군사 원정을 하는 것백성의 흉년을 초래함
병사들이 북쪽으로 이동하면남쪽에서 왜구가 활개칠 것임
장마철군대의 주력 무기인 활의 효과가 떨어지고, 군영 내 전염병 확산



최영은 우왕의 지지를 받아 명나라 공격을 명령했지만, 이성계는 백성과 관료들의 지지를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는 조선 건국의 시작이었다.[6]

최영은 궁궐에서 저항했지만, 수적으로 열세하여 패배하고 고양으로 유배된 후 처형되었다. 최영은 죽기 전 자신의 무덤에는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1976년까지 실제로 풀이 자라지 않아 '적분'(赤墳|적분중국어)이라 불렸다.[6]

3. 평가와 비판

최영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엇갈린다. 하나는 고려의 충신이라는 평가이고, 다른 하나는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한 고집스러운 인물이라는 평가이다.


  • 고려의 충신: 최영은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치고 왕에게 충성하며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했다.[10]
  •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한 인물: 권문세가의 횡포로 고려가 이미 쇠퇴하고 있었음에도, 백성들의 고통을 해결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는 민심을 헤아리지 못했다.[10]


그러나 최영이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컸으며, 그의 청렴함과 강직함은 본받아야 할 점으로 평가받는다.[10]

3. 1. 긍정적 평가

최영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고려를 향한 그의 충성심과 백성을 위한 헌신에 집중된다. 고려 말,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최영은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치고 왕에게 충성을 다한 충신으로 묘사된다.[10] 그는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컸으며, 이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으로 강조된다.[20]

소년 시절부터 활기차고 위엄이 있었던 최영은 아버지의 유언인 "황금을 돌멩이처럼 여기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가르침을 평생 지키며 청렴하고 사욕 없는 삶을 살았다.[10][12] 무신으로서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웠고, 조신일(趙新日)의 반역을 진압하며 명성을 떨쳤다.[10] 공민왕의 반원 정책을 도와 압록강 서쪽과 쌍성을 공격하여 함경도 일대를 수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9][13] 또한,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고, 홍건적을 격파하는 등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보여주었다.[9][11]

명(明)의 철령 이북 할양 요구에 맞서 요동 정벌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그의 죽음은 백성들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17][18][19][20] 최영은 죽기 직전까지도 사심 없이 나라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그의 무덤에는 풀이 자라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청렴결백한 인물로 평가받는다.[20] 조선왕조 건국 후에도 그의 충절은 인정받아 "무민(武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9] 조선 시대에 편찬된 역사서에서도 최영은 정규 "열전"에 수록되어 있으며,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격언과 함께 강직하고 청렴한 충신으로 묘사되고 있다.[20]

3. 2. 부정적 평가

최영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엇갈린다. 첫째는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 한 충신이라는 평가이다. 그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치고 왕에게 충성을 다했다.[10] 둘째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고집스러운 인물이라는 평가이다. 당시 고려는 권문세가의 횡포로 인해 이미 나라의 운명이 다해가고 있었고, 백성들은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영은 이러한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결국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하는 불운한 최후를 맞이했다.[10]

하지만 최영이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컸으며, 이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10]

3. 3. 종합적 평가

최영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엇갈린다. 첫째는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 한 충신이라는 평가이다. 그는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치고 왕에게 충성하며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했다.[10] 둘째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고집스러운 인물이라는 평가이다. 권문세가의 횡포로 고려가 이미 쇠퇴하고 있었음에도, 백성들의 고통을 해결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는 민심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하는 불운을 맞았다.[10]

그러나 최영이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컸으며, 이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활기차고 위엄이 있었으며,[10] 아버지의 유언인 "황금을 돌멩이처럼 여기라"는 가르침을 평생 지키며 청렴하고 사욕 없는 삶을 살았다.[10][12]

조선왕조 건국 후, 이성계는 최영의 죄를 없애고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렸다.[9] 조선 시대에 편찬된 『고려사』, 『태조실록』에서 신돈(辛旽)·우왕은 "반역열전"에, 조민수는 "간신(裏切り者)열전"에 수록되었지만, 최영은 정규 "열전"에 수록되었다.[20] 이는 최영의 강직하고 충성스러우며 청렴한 인품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20]

4. 기타

최영은 소년 시절부터 활기차고 위엄이 있었으며, 16세에 아버지로부터 “황금을 돌멩이처럼 여기라”라는 가훈을 유언으로 받았다.[10][12] 그는 평생 이 가르침을 지키며 청렴한 삶을 살았다.[10] 그는 죽기 직전 “만약 나에게 조금이라도 사심이 있었다면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풀은 자라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실제로 그의 무덤에는 풀이 자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20]

조선 건국 후, 최영은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9] 조선 시대에 편찬된 『고려사』, 『태조실록』에서 신돈·우왕은 “반역열전”에, 조민수는 “간신열전”에 수록되었지만, 최영은 정규 “열전”에 수록되었다.[20] 최영의 인품은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격언과 “강직하고 충신이며, 더욱이 청렴하다”라는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20]

최영 장군 사당은 최영을 모시기 위해 세워졌으며, 중부 무속 신앙에서 인물신으로 모셔지고 있다.[21] 대한민국 해군의 이순신급 구축함 6번함 최영함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최영장군 위령굿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토담동 지역에서 최영 장군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매년 열리는 굿판으로, 2012년 12월 6일 고양시 향토유적 제61호로 지정되었다.

4. 1. 민간 신앙

무속에서 ‘최영 장군’은 수명장수와 안과태평의 신으로, 무속에서 가장 많이 모시는 신령 가운데 하나이다.

제주도 추자도에는 최영의 사당이 있다. 상추자도 추자초등학교 북서쪽 벼랑 위에 있는 이 사당은 제주도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최영이 1374년(공민왕 23년) 9월 30일(음력 8월 24일)부터 10월 4일(음력 8월 28일)까지, 또 토벌 종료 후인 10월 28일(음력 9월 23일)부터 11월 14일(음력 10월 10일)까지 추자도에 머물렀는데, 이때 주민을 많이 도와준 최영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4. 2. 가족 관계

관계이름
아버지최원직
어머니봉산 지씨
누나김윤명(金允明)에게 출가
조카김저
누나전유겸(錢惟謙)에게 출가
조카전현(錢玹), 전진(錢䂦), 전민(錢珉)
누나이양길(李陽吉)에게 출가
조카이종주(李從周)
부인문화 류씨
장남최담
며느리김제 조씨
손자최귀덕(崔貴德)
손자최주(崔澍)
손자최도(崔渡)
손자최식(崔湜)
손녀맹사성에게 출가
차남최언(崔彦)
사공민(司空敏)에게 출가
부인(夫人)
영비 최씨
사위우왕 (재위: 1374~1388)



우왕의 후궁이 된 영비 최씨는 최영의 첩이 낳은 서녀였다. 따라서 우왕이 영비를 후궁으로 삼으려 했을 때 그는 간곡히 만류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1]

4. 3. 최영을 다룬 작품

4. 4. 관련 정보


  • 대한민국 해군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 중 하나인 최영함은 최영 장군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0] 이순신급 구축함의 6번함이다.
  • 최영장군 위령굿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토담동 지역에서 최영 장군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매년 열리는 굿판이다. 장군거리 등에서는 작두를 타는 의식도 진행된다. 2012년 12월 6일 고양시 향토유적 제61호로 지정되었다.
  • 최영 장군 사당은 최영 장군을 모시는 사당으로, 중부 지역의 무속 신앙에서 중요한 인물신으로 숭배되고 있다.[21]

참조

[1] 웹사이트 Introduction hongseong > Great Names > Choi Young http://www.hongseong[...] 2017-08-00 #날짜 정보가 불완전하여 00으로 표기
[2] 웹사이트 Choe Yeong, the Victorious General of Goryeo Dynasty http://world.kbs.co.[...] 2012-11-28
[3] 서적 Empire's twilight: Northeast Asia under the Mongols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for the Harvard-Yenching Institute 2009
[4] 웹사이트 최유가 덕흥군을 받들고 압록강을 건너 진격해오다 https://db.history.g[...]
[5] 서적 Korea and the fall of the Mongol Empire: alliance, upheaval, and the rise of a new East Asian ord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2
[6] 간행물 국역 고려사 권111 열전 24
[7] 웹사이트 The King of Tears, Lee Bang-won https://en.wikipedia[...] 2024-05-05
[8] 서적 2005
[9] 서적 2002
[10] 서적 1989
[11] 서적 1986
[12] 웹사이트 131番目、家訓 - 豆知識 - 韓国文化院HP 2009-01-15
[13] 서적 2007
[14] 웹사이트 崔瑩 - 報恩の人物 - 報恩郡HP
[15] 서적 고려史日本伝(上) 岩波文庫 2005
[16] 서적 高麗史日本伝(上) 岩波文庫 2005
[17] 서적 2006
[18] 서적 2006
[19] 서적 2006
[20] 서적 2006
[21] 웹사이트 崔瑩将軍祀堂 - 統制営遺跡地 - 文化観光 - 統営の旅 - 統営市HP
[22]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1997
[23] 웹사이트 최영 [崔瑩] https://terms.naver.[...]
[24] 서적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25] 서적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26] 웹인용 내가 니 “시다바리”가 http://www.koya-cult[...] 우리문화신문 2010-10-09
[27] 뉴스 최영 장군 묘역, 명승지로 개발 http://news.chosun.c[...] 조선닷컴 2008-01-20
[28] 기타 # 분류 불가능 충성을 다하고 명을 받들어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안전하게 한 공신이란 뜻.
[29] 기타 # 분류 불가능 시호
[30] 기타 # 분류 불가능 죽은 사람의 이름을 높여 부르는 말.
[31] 서적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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