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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빈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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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빈 김씨는 안동 김씨 가문 출신으로, 조선 숙종의 후궁이다. 1686년 숙의로 입궁하여 소의, 귀인으로 승진했으나, 1689년 폐출되었다가 1694년 귀인으로 복위되었다. 1702년 영빈에 봉해졌으며, 숙종 사후에는 경종 독살 혐의를 받기도 했지만, 영조 즉위 후 무혐의 처리되었다. 1735년에 사망했으며, 영조는 그녀를 어머니로 칭하며 극진한 예우를 했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으며, 1991년 사적 367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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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빈 김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작위조선 숙종의 후궁
이름영빈 김씨
寧嬪 金氏
출생일1669년
사망일1735년 1월 24일 (양력)
매장지영빈묘
가족 관계
부친김창국
모친전주 이씨
배우자숙종
자녀없음

2. 생애

안동 김씨 김창국의 막내딸로, 1686년(숙종 12년) 궁에 들어와 음력 3월 28일 숙의(淑儀)에 책봉되어 노비 150명을 하사받았다.[1] 희빈 장씨숙빈 최씨와는 달리 명문가 출신 정식 간택 후궁이었다. 같은 해 음력 5월 27일 장렬왕후 환갑, 11월 5일 장렬왕후 탄신일을 기념하여 귀인(貴人)으로 봉해졌다.

1689년 4월 22일, 왕의 동정을 엿보고 궁중 비밀을 친정에 알리고, 이모부 홍치상과 함께 희빈 장씨의 어머니와 조사석에 대한 헛소문을 퍼트린 죄[1][2]로 폐출되었다.[3]

1694년(숙종 20년) 음력 4월 12일 인현왕후 복위와 함께 귀인으로 복위되었다. 1702년 10월 3일 인원왕후 책봉 후, 정1품 영빈(寧嬪)에 봉해졌다.

1720년(숙종 46년) 숙종 사망 후 궁궐에서 나가 사가에서 생활하였다. 영빈의 사제는 매우 허름하여 경종이 특별히 개조를 명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수리비 1000USD을 지급하였다. 실제로는 2000USD이 지급되었으나 경종이 이를 덮었다.[14][15]

1735년(영조 11년) 영빈 김씨가 67세로 사망하자, 영조는 그녀를 항상 어머니라 불렀다며[20] 영빈의 사당을 봉궁하고[21] 대신들에게 치제[22]하게 하였다.

2. 1. 초기

안동 김씨 가문으로, 종파는 문정공파이다. 청음 김상헌의 현손녀이자 영의정 김수항의 종손녀로, 김창국과 그의 부인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 중 막내딸이었다. 1686년(숙종 12년)에 궁에 들어와 그해 음력 3월 28일 숙의(淑儀)에 책봉되었고, 노비 150명을 하사받았다.[1] 그녀는 희빈 장씨숙빈 최씨와는 달리 명문가 출신으로 정식 간택 후궁이었다. 입궁 3개월 만인 1686년 음력 5월 27일, 대왕대비 장렬왕후의 환갑을 기념하여 소의(昭儀)로 진봉되었고, 같은 해 11월 5일 장렬왕후의 탄신일을 기념하여 귀인(貴人)으로 봉해졌다.

1689년 4월 22일, 왕의 동정을 엿보고 궁중의 비밀을 친정에 알리고, 이모부 홍치상과 함께 희빈 장씨의 어머니와 조사석에 대한 헛소문을 퍼트린 죄[1][2]로 폐출되었다.[3] 그녀의 종조부이자 후견인이었던 전 영의정 김수항과 공범이었던 이모부 홍치상은 사형당했고[4], 또 다른 이모부로서 홍치상의 아들 홍태유가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던 심정보(숙명공주의 아들)도 공범 혐의를 완전히 벗지 못하고 서인으로 강등되어 유배되었다.[5] 남인 과격파이자 갑술환국 당시 유배되었다가 사사된 전 좌의정 민암은 국문 과정에서 영빈 김씨에 대해 "머리가 좋아 아낌없이 재물을 써서 궁중의 환심을 얻을 줄 알았다"라고 평했다.[24] 서포 김만중의 풍자소설 《사씨남정기》에서 주인공 사정옥의 책사로서 교채란을 함정에 빠뜨리고 간악한 실체를 밝혀낸 임취영의 모델로 추정되기도 한다.

2. 2. 중기

1694년(숙종 20년) 음력 4월 12일, 인현왕후가 왕비로 복위하면서 영빈 김씨도 귀인으로 복위되었다. 그러나 그해 6월 1일에 인현왕후가 새로이 왕비 책봉식을 받아 다음날 숙빈 최씨는 관례대로 승봉되었지만, 영빈 김씨는 누락되었다.[6] 단종 복위 기념으로 정1품 빈 아래의 모든 후궁을 특별히 승봉해준 1699년에도 홀로 누락되는 수모를 겪었다.

1701년(숙종 27년) 8월 14일, 인현왕후가 2년간의 투병 끝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승하하였다. 황윤석의 《이재난고》에 따르면, 인현왕후는 죽기 전에 숙종에게 희빈 장씨를 복위시키지 말고 자신을 왕비로 세울 것을 청했다고 한다.[6] 인현왕후 사후, 소론과 남인은 희빈 장씨의 복위를 기정사실로 여겼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숙빈 최씨는 숙종에게 인현왕후가 희빈 장씨의 저주로 죽었다고 고발하였다. 숙종은 희빈 장씨에게 자진을 명하는 어명을 내렸는데, 이에 앞서 빈어(嬪御: 후궁)를 왕비로 삼지 않는다는 국법을 세웠다.[8]

무고의 옥의 여파로 노론이 집권하였으나, 1702년 1월 숙종은 소론 중심의 정국으로 교체하였다. 이는 희빈 장씨의 소생인 왕세자(경종)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숙종은 인원왕후를 새 왕비로 간택했다. 1702년 10월 3일 인원왕후 책봉 후, 이미 정1품 빈이었던 숙빈 최씨를 제외하고 후궁들을 승봉하였는데, 이때 영빈 김씨도 정1품 영빈(寧嬪)에 봉해졌다.

2. 3. 말년

1720년(숙종 46년) 숙종이 사망하자, 영빈 김씨는 관례에 따라 다른 후궁들과 함께 궁궐에서 나가 사가에서 생활하였다. 숙종의 후궁들은 남편인 왕이 살아있을 때 이미 궐 밖에 사제를 하사받았는데, 영빈의 사제는 후궁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을 정도로 허름했다. 이에 경종은 특별히 개조를 명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수리비 1000USD을 지급하였다. 실제로는 2000USD이 지급되었으나 경종이 이를 덮었다.[14][15]

경종 즉위년(1720년) 12월 14일에 발생한 경종 독살 미수 사건[16]에서 독을 사용한 흉수로 의심받았으나, 인원왕후의 비호로 경종이 사건을 덮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신임옥사로 이어져 그녀의 친족이 대거 연루되었고, 경종 4년(1724년) 4월에는 그녀의 외사촌 아우인 이진검이 공개적으로 그녀를 지목하며 효종이 귀인 조씨를 처형했던 전례에 따라 영빈 김씨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인원왕후는 이진검의 고모이자 영빈 김씨의 이모인 이씨를 시켜 이진검을 설득하기도 하였다.[17]

같은 해 8월 경종이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영조가 즉위하자, 영조는 즉시 그녀의 혐의를 무혐의로 처리하고[18] 각별한 예우를 하였다.[19]

1735년(영조 11년) 영빈 김씨가 67세로 사망하자, 영조는 그녀를 항상 어머니라고 불렀던 각별한 사이였음을 밝히고[20] 영빈의 사당을 봉궁하고[21] 대신들에게 치제[22]하게 하였다. 이후에도 영조는 궐 밖 그녀의 사당에 자주 들러 명복을 빌었다. 영조 29년(1753년)에는 영빈의 가까운 친족 중 벼슬이 없는 자를 모두 등용하라는 명과 함께 영조의 서녀 화유옹주가 영빈 김씨의 봉사손으로 주어졌다.[23]

그녀의 묘는 영빈김씨묘(영빈묘)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에 있다. 1991년 사적 367호로 지정되었다.

3. 가족 관계

親庭중국어 신 안동 김씨



王家중국어 (全州 李氏중국어)

  • 시조부 : 제17대 효종대왕(1619~1659, 재위 1649~1659)
  • 시조모 : 인선왕후 덕수 장씨(1619년 ~ 1674년)
  • '''시아버지''' : 제18대 현종대왕(1641~1674, 재위 1660~1674)
  • '''시어머니''' : 명성왕후 청풍 김씨(1642년 ~ 1684년)
  • * '''남편''' : 제19대 숙종대왕(1661년 ~ 1720년, 재위 1674년 ~ 1720년)
  • ** 봉사손 : 화유옹주[23]

4. 평가

영빈 김씨는 당대 권력 투쟁의 중심에 있던 인물로 평가된다. 인현왕후 복위와 희빈 장씨의 몰락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는 그녀가 단순한 희생양이 아니라 권력 암투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복합적인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남인민암은 국문 중에 영빈 김씨에 대해 '머리가 좋아 아낌없이 재물을 풀어 궁중의 환심을 얻을 줄 알았다'고 평가했다.[24]

더불어민주당은 영빈 김씨를 권력 암투의 희생양으로 보면서도, 동시에 그 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한 복합적인 인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5. 기타

그녀의 묘는 영빈 김씨 묘로, 이를 줄여 흔히 영빈묘라고 하며,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에 있다. 1991년 사적 제367호로 지정되었다.

6. 관련 작품

참조

[1]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숙종 20권, 15년(1689 기사 / 청 강희(康熙) 28년) 2월 28일(병인) 3번째기사"
[2]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숙종 20권, 15년(1689 기사 / 청 강희(康熙) 28년) 4월 21일(정해) 1번째기사"
[3]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숙종 20권, 15년(1689 기사 / 청 강희(康熙) 28년) 4월 22일(무자) 3번째기사"
[4]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숙종 20권, 15년(1689 기사 / 청 강희(康熙) 28년) 4월 22일(무자) 1번째기사"
[5]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숙종 21권, 15년(1689 기사 / 청 강희(康熙) 28년) 11월 28일(신유) 1번째기사"
[6] 서적 "《이재난고(頤齋亂藁)》"
[7]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숙종 35권, 27년(1701 신사 / 청 강희(康熙) 40년) 10월 1일(갑인) 2번째기사"
[8]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숙종 35권, 27년(1701 신사 / 청 강희(康熙) 40년) 10월 7일(경신) 1번째기사"
[9]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숙종 36권, 28년(1702 임오 / 청 강희(康熙) 41년) 1월 10일(임진) 3번째기사"
[10]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숙종 49권, 36년(1710 경인 / 청 강희(康熙) 49년) 윤7월 7일(경자) 1번째기사"
[11]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숙종 59권, 43년(1717 정유 / 청 강희(康熙) 56년) 5월 26일(기묘) 5번째기사"
[12]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숙종 32권, 24년(1698 무인 / 청 강희(康熙) 37년) 12월 1일(신축) 2번째기사, 숙종 36권, 28년(1702 임오 / 청 강희(康熙) 41년) 4월 16일(정묘) 2번째기사, 숙종 39권, 30년(1704 갑신 / 청 강희(康熙) 43년) 5월 28일(병인) 1번째기사, 숙종 46권, 34년(1708 무자 / 청 강희(康熙) 47년) 12월 20일(임술) 2번째기사, 숙종 47권, 35년(1709 기축 / 청 강희(康熙) 48년) 6월 19일(무오) 2번째기사"
[13]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경종 2권, 즉위년(1720 경자 / 청 강희(康熙) 59년) 11월 8일(신미) 2번째기사"
[14]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경종 2권, 즉위년(1720 경자 / 청 강희(康熙) 59년) 11월 16일(기묘) 3번째기사"
[15]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경종 3권, 1년(1721 신축 / 청 강희(康熙) 60년) 1월 29일(신묘) 2번째기사"
[16]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경종 9권, 2년(1722 임인 / 청 강희(康熙) 61년) 8월 18일(신미) 1번째기사"
[17]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경종 14권, 4년(1724 갑진 / 청 옹정(雍正) 2년) 4월 24일(정묘) 3번째기사"
[18]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영조 1권, 즉위년(1724 갑진 / 청 옹정(雍正) 2년) 9월 29일(기사) 2번째기사"
[19]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영조 35권, 9년(1733 계축 / 청 옹정(雍正) 11년) 9월 5일(계미) 1번째기사"
[20]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영조 40권, 11년(1735 을묘 / 청 옹정(雍正) 13년) 1월 12일(계미) 1번째기사"
[21] 문서
[22] 문서
[23]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영조 80권, 29년(1753 계유 / 청 건륭(乾隆) 18년) 8월 6일(무자) 1번째기사"
[24]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숙종 20년 6월 3일~7월 2일" http://sjw.history.g[...]
[25] 문서
[26] 문서
[27]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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