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식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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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식진은 백제 멸망기에 활동한 인물로, 묘지명을 통해 그의 생애와 가계가 알려졌다. 묘지명은 예식진의 가계, 백제에서의 관직, 당나라로 건너간 경위, 사망 및 장례 등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으며, 예씨 가문의 출자와 중앙 진출, 백제 멸망과 관련된 그의 행적을 보여준다. 예식진은 웅진 출신으로, 백제 멸망 당시 의자왕과 함께 당에 항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아들 예인수의 묘지명에는 예식진이 당나라에서 관직을 얻고 공을 세운 내용이 담겨 있다. 그의 가족으로는 조부 예예다, 아버지 예사선, 형 예군, 아들 예소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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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5년 출생 - 부여융
부여융은 백제 의자왕의 아들이자 당나라 장수로, 백제 멸망 후 당나라 웅진도독으로 임명되어 백제 유민을 다스렸으나 신라와의 관계 악화로 축출되어 낙양에서 사망했으며, 백제 마지막 태자 여부 논쟁과 엇갈린 행적으로 평가가 나뉜다. - 672년 사망 - 덴지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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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융은 백제 의자왕의 아들이자 당나라 장수로, 백제 멸망 후 당나라 웅진도독으로 임명되어 백제 유민을 다스렸으나 신라와의 관계 악화로 축출되어 낙양에서 사망했으며, 백제 마지막 태자 여부 논쟁과 엇갈린 행적으로 평가가 나뉜다.
예식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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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당나라 관직 | |
개인 정보 |
2. 묘지
예식진 묘지명은 1920년대 중국 시안(西安, 당나라 수도)에서 발견되었으나 정확한 발굴 시기와 지점은 알려져 있지 않다. 묘지석은 개석(蓋石)과 지석(志石)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석에는 예식진의 생애와 행적이 289자의 해서체로 기록되어 있다.
묘지에는 백제 유민인 예식진이 당나라 조정에서 좌위위대장군 벼슬을 지냈고, 당에 들어간 지 12년 만인 함형 3년(672년) 5월 25일에 내주(來州) 황현(黃縣)에서 58세로 사망하여 같은 해 11월 21일에 장안으로 유해가 운구된 뒤, 고관대작들이 묻히던 고양원(高陽原)에 묻혔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1]
2. 1. 원문
大唐故左威衞大將軍來遠縣開國子柱國禰公墓誌銘幷序중국어[1]公諱寔進百濟熊川人也중국어[1]
祖佐平譽多父佐平思善竝蕃官正一品雄穀爲姿忠厚成性馳聲滄海效節靑丘公器宇深沉幹略宏遠虛弦落雁挻劍飛猨夙禀貞規早標義節占風異域就日長安式奉文棍爰陪武帳腰鞬玤鶡紆紫懷黃駈十影於香街翊九旗於綺禁豈與夫日磾之輩由餘之儔議其誠績較其優劣者矣方承休寵荷日用於百年遽促浮生奄塵飄於一瞬以咸亨三年五月卄五日因行薨於來州黃縣春秋五十有八恩加 詔葬禮洽䬾終以其年十日月卄一日葬於高陽原爰命典司爲其銘曰중국어[1]
溟海之東遠截 皇風飧和飮化抱義志承榮簪紎接采鵷鴻星搖寶劍月滿雕弓恩光屢洽寵服方隆逝川遽遠非曲俄窮烟含古樹霜落寒叢唯天地兮長久與蘭菊兮無終중국어[1]
3. 묘지에 대한 연구
예식진 묘지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묘지명과 여러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예식진 가문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3. 1. 예씨 집안의 출자와 중앙 진출
예씨 집안의 출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기록상 예씨 성을 쓴 사례는 후한 때의 예형이 유일한데, 이를 들어 예식진의 선대가 중국인으로, 백제가 대방군의 옛 땅을 차지하기 위해 고구려와 대치하는 과정에서 백제로 편입된 것으로 보는 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후한 이후로는 예씨의 존재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과 『예식진묘지명』에서 그의 선대 연원을 중국과 관련지어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무작정 중국계 성씨로 단정할 수만은 없다는 주장도 있다.[1]『예식진묘지명』에는 예씨의 출자와 선대에 대해 조부인 예다까지만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흑치상지묘지명』이나 『연남생묘지명』 등 한국 관련 중국 묘지명에서 묘지 주인공의 증조부까지 언급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따라서 예씨 집안이 백제 조정에서 별다른 영향력을 갖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존재한다.[1]
예식진의 조부와 아버지, 그리고 예식진 본인이 모두 웅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어, 예씨 집안은 웅진(웅천)과 지역적 연관성을 가진 집안으로 볼 수 있다. '예(禰)'라는 글자에 '친묘(親墓)', 즉 아버지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 웅진에 묻힌 선대 왕들의 무덤을 관리하는 등의 제사 주관 의무를 위임받은 가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2]
3. 1. 1. 예씨의 유래
기록상 예씨 성을 쓴 사례는 후한 때의 예형이 유일한데, 이를 들어 흔히 예식진의 선대가 중국인으로, 백제가 대방군의 옛 땅을 차지하기 위해 고구려와 대치하는 과정에서 백제로 편입된 것으로 보는 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후한 이후로는 예씨의 존재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과 『예식진묘지명』에서 그의 선대 연원을 중국과 관련지어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무작정 중국계 성씨로 단정할 수만은 없다는 주장도 있다. 묘지에는 예씨의 출자와 선대에 대해 조부인 예다까지만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흑치상지묘지명』이나 『연남생묘지명』 등 한국 관련 중국 묘지명에서 묘지 주인공의 증조부까지 언급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따라서 예씨 집안이 백제 조정에서 별다른 영향력을 갖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존재한다.[1]3. 1. 2. 예씨 집안과 웅진
예식진의 조부와 아버지, 그리고 예식진 본인이 모두 웅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어, 예씨 집안은 웅진(웅천)과 지역적 연관성을 가진 집안으로 볼 수 있다. '예(禰)'라는 글자에 '친묘(親墓)', 즉 아버지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 웅진에 묻힌 선대 왕들의 무덤을 관리하는 등의 제사 주관 의무를 위임받은 가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2] 이와 관련해 예씨 집안이 예씨라는 성을 칭하게 된 것은 사비성(泗沘城) 천도 이후라는 주장이 있다.[2]3. 2. 백제 멸망과 예씨 가문
예식진 가문은 백제 멸망과 관련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구당서(舊唐書) 및 신당서(新唐書)에는 660년 신라·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할 당시, 백제 대장군이었던 예식(祢植)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4]신채호는 의자왕의 항복이 본의가 아니었을 가능성을 제기했으며,[6] 예식진의 '내부 배신설'은 멸망의 책임을 의자왕 개인에게 돌리는 것에 대한 비판적 관점의 근거로 활용되기도 했다. KBS의 역사 다큐멘터리 「역사추적」에서는 이와 관련된 내용을 방영하기도 했다.
2010년에는 예식진의 아들 예소사(禰素士)와 손자 예인수(禰仁秀)의 묘지명이 발굴되었다. 예인수의 묘지명에는 예식진이 의자왕을 이끌고 당 고종에게 귀의하여 좌위위대장군에 임명되고 내원군개국공에 봉해졌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예식(祢植)이 곧 예식진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증명되었다.[7]
3. 2. 1. 의자왕의 항복과 예식(예식진)
구당서(舊唐書) 및 신당서(新唐書)에는 660년 신라·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할 당시, 백제 대장군이었던 예식(祢植)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4] 예식진 묘지명 발견 이후, 예식과 예식진이 동일인물이라는 분석과 함께 이 기록이 주목받았다. 묘지명의 '占風異域 就日長安'(점풍이역 취일장안)이라는 구절과 함께, 예식진이 의자왕을 배신하고 당군에 투항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즉, 의자왕은 사비성에서 웅진성으로 도주하여 반격을 준비했지만, 웅진 방령 예식(예식진)이 의자왕을 사로잡아 당군에 투항했고, 이 공로로 예식진이 백제 유민 가운데서도 파격적인 승진을 했다는 것이다.신채호는 이미 의자왕의 항복이 본의가 아니었을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으며,[6] 예식진의 '내부 배신설'은 멸망의 책임을 의자왕 개인에게 돌리는 것에 대한 비판적 관점의 근거로 활용되기도 했다. KBS의 역사 다큐멘터리 「역사추적」에서는 이와 관련된 내용을 방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묘지명에는 예식진의 배신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내용은 없다. '與' 또는 '將'이라는 한자 표현에 대한 해석에는 이견이 존재한다. 일본서기는 의자왕과 신하들이 당군에 붙잡힌 것을 '捉'(잡다) 자를 써서 기록했지만, 신·구《당서》에서는 '又將義慈來降'(우장의자래항) 또는 '與義慈降'(여의자항)으로 기록하고 있다. '與'를 '데리고'라고 해석할 수 없고, '將'에는 '데리고 가다' 외에도 여러 뜻이 있다는 것이다.
전쟁 당시 웅진성의 수성책임자인 예식(예식진)이 항복 결정을 내린 것은 합리적인 판단이었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으나, 왕이 있는 상황에서 군책임자가 왕의 의지를 거스르며 항복 결정을 내린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예식진이 백제 조정과 당군과의 교섭에서 항복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당나라에서 높은 지위에 오른 것으로 보아, 백제 멸망 과정에서 모종의 역할을 수행했을 가능성은 부정하기 어렵다.
3. 2. 2. 예인수 묘지명의 발굴
2010년, 예식진의 아들 예소사(禰素士)와 예소사의 장남 예인수(禰仁秀)의 묘지명이 발굴되었다. 이 중 예인수의 묘지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에 (예선의 아들) 예식진 대에 이르러 대대로 관직을 이어받으며 조상의 어짊을 본받았다. 당(唐)이 천명을 이어받고 무도한 자(백제)를 토벌하려 동정하자, (예식진은) 그 왕을 이끌고 고종황제(이치)에게 귀의하였다. 이에 좌위위대장군에 배수되었고 내원군개국공에 봉해졌다.' 이 구절을 통해 신•구당서에 등장하는 예식(祢植)이 곧 예식진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증명되었다.[7]4. 가족
관계 | 이름 | 비고 |
---|---|---|
증조부 | 예복(禰福) | |
조부 | 예예다 | 남부여 좌평(佐平) |
부 | 예사선 | 남부여 좌평(佐平) |
형 | 예군 | 당 우위위(右威衛) |
아들 | 예소사(禰素士) | |
손자 | 예인수 | [8] |
손자 | 예인휘(禰仁徽) | [8] |
손자 | 예인걸(禰仁傑) | [8] |
손자 | 예인언(禰仁彦) | [8] |
손자 | 예인준(禰仁俊) | [8] |
참조
[1]
논문
洛阳、鲁山、西安出土的百济人墓志探索
2007
[2]
서적
백제 사비성 시대 연구
2010
[3]
논문
백제 무왕의 계보와 집권 기반
2005
[4]
역사서
其大將祢植, 又將義慈來降
[5]
역사서
義慈率太子及熊津方領軍等, 自熊津城來降.
[6]
서적
백제부흥운동사
2003
[7]
웹사이트
예인수 묘지명
http://db.history.go[...]
[8]
웹사이트
예소사 묘지명
https://db.history.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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