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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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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군은 백제 좌평을 역임한 명문가 출신으로, 백제 멸망 후 당나라에 투항하여 웅진 도독부에서 백제 유민들을 회유하는 데 힘썼다. 2011년 시안에서 묘지명이 발견되었으며, 묘지명에는 '일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여 일본 열도 지칭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 묘지명에 따르면, 예군은 당나라에서 우무위 절충도위, 좌융위낭장, 우령군위중랑장 등을 역임했으며, 678년 장안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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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한글예군
한자禰軍
로마자 표기Ye gun
인물 정보
이름예군
원어 이름禰軍
군(軍)
온(溫)
출생613년
출생지백제 웅진 우이
사망678년 2월 19일 (66세)
사망지당나라 옹주 장안현 연수리
매장지당나라
능묘예군 묘지
국적백제당나라
가문예씨
아버지예사선
형제자매예식진
관직
작위 (백제)좌평
군주백제 의자왕
군주 칭호국왕
작위 (당나라)우령군중랑장
봉호대당고우위위장군상주국예공(大唐故右威衛將軍上柱國祢公)

2. 백제에서의 활동과 당으로의 투항

예군은 웅진 嵎夷 출신으로, 그의 조상은 중국계와 같으며 영가(永嘉) 말에 난을 피해 동쪽으로 와서 백제에 정착했다. 증조부 예복(禰福), 조부 예예(禰譽), 아버지 예선(禰善)은 모두 백제의 1품 관직인 좌평을 역임했다.[3]

660년, 당나라 군대가 백제를 평정할 때, 예군은 시세를 파악하고 당나라에 귀순했다. 당 고종은 이를 가상히 여겨 그에게 우무위산천부절충도위(右武衛滻川府折衝都尉)라는 벼슬을 내렸다. 당시 일본백제 부흥 세력을 지원하며 당나라에 저항하고 있었는데, 예군은 당나라의 명을 받아 백제 유민들을 위무하고 회유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신하의 절개를 지키며 목숨을 걸고 황제의 명령을 수행하여, 바다를 건너는 매처럼, 산을 넘는 붉은 새처럼 활약했다. 그의 노력으로 하늘과 구름이 통하고, 두려움에 떨던 백성들이 안정을 찾았다.[3]

예군은 천 년 동안 왕위를 僭称) 칭하던 백제의 왕을 설득하여 항복하게 하고, 백제의 유력자 수십 명을 이끌고 당나라에 입조했다. 당 고종은 특별히 그에게 좌융위랑장(左戎衛郎將)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얼마 후, 예군은 우령군위중랑장 겸 검교웅진도독부사마(右領軍衛中郎將兼檢校熊津都督府司馬)로 승진했다. 그는 뛰어난 재능과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백제 유민들을 다스렸다.[3]

673년 11월 21일, 예군은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에 임명되었다. 예군은 궁궐에서 황제를 보필하며 자주 승진했다.[3]

3. 당에서의 활동

2011년 시안에서 발견된 묘지에 따르면, 예씨 가문은 대대로 백제에서 좌평(최상위 관직)을 역임한 명문가였다. 660년, 동생 예식(祢寔進)은 의자왕에게 당나라에 항복할 것을 권유했다는 기록이 당나라 정사에 전해진다.[3]

백제 멸망 후, 예군은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다. 당 고종은 예군을 우무위찬천부절충도위(右武衛滻川府折衝都尉)에 임명하였다. 당시 왜국에 남아있던 백제의 잔존 세력들이 왜를 거점으로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키려 하자, 당 고종은 예군을 파견하여 이들을 회유하고 설득하는 임무를 맡겼다. 예군은 "바다 왼쪽의 일을 잘 파악하고, 동쪽(왜)의 사정을 잘 아는 인물"로 평가받았기에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였다.[3] 이후 예군은 좌융위낭장(左戎衛郎將), 우영군위중랑장 겸 검교웅진도독부사마(右領軍衛中郎將兼檢校熊津都督府司馬)를 거쳐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에 임명되었다.[3]

3. 1. 백제 유민 무마

예군은 백제가 멸망한 후 당나라에 벼슬했으나, 백제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웅진도독부에 파견되어 그들을 위무하는 데 힘썼다.[3]

3. 2. 왜(일본)와의 관계

2011년 시안에서 발견된 예군의 묘지에 따르면, 예군은 백제가 멸망한 후 당나라에 벼슬했으나, 백제 유민들에 의한 반란이 발발하자 웅진 도독부에 파견되어 그들을 위무하는 데 힘썼다. 그 사이, 왜에도 두 번 사신으로 건너갔다고 한다.[3]

3. 3. 신라와의 관계

2011년 시안에서 발견된 묘지에 따르면, 예씨는 대대로 백제에서 좌평(최상위 관직)을 역임한 명문가이다. 660년, 동생 예식(祢寔進)은 의자왕에게 당나라에 항복할 것을 진언했다는 기록이 당나라 정사에 전해진다. 백제 멸망 후 예군은 당나라에서 벼슬했으나, 백제 유민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웅진 도독부에 파견되어 이들을 위무하는 데 힘썼다.[3]

670년, 나당전쟁으로 당나라와 신라의 관계가 악화되자, 예군은 당나라 첩자로 의심받아 신라에 체포되었다. 이후 당나라로 송환되어 장안에서 사망했다.[3]

4. 묘지명 발굴과 논란

2011년 섬서(陝西) 서안(西安)에서 예군의 묘지명이 출토되었다.[2] 이 묘지명과 2007년경 소개된 예식진의 묘지명을 비교하여, 백제 예씨(禰氏) 집안의 선계를 밝혔다.

묘지명 내용 중 '일본(日本)'이라는 단어는 가장 큰 논란거리였다. 묘지명에는 '이때 일본(日本)의 잔여 세력은 부상(扶桑)에 거하여 죽음을 피하여 달아났고, 풍곡(風谷)의 유민은 반도(盤桃)를 의지하여 굳게 저항하였다(于時日本餘噍,據扶桑而逋誅,風谷遺甿,負盤桃而阻固).'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 나·당 연합군이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도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이 저항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일본'이 일본 열도일본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일본'이 일본 열도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주장은, 부상(扶桑), 풍곡(風谷), 반도(盤桃)가 각각 일본, 고구려, 신라의 별칭이므로 '일본' 역시 특정 국가를 직접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지리적 상황을 반영한 별칭일 가능성이 크다는 근거를 제시한다.

'일본'이 ''의 별칭이라는 반론에 대해서는, 묘지명에 이미 '왜'를 가리키는 '부상(扶桑)'이 등장하므로 '일본'을 '왜'로 해석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한다. '일본 잔여 세력이 일본(혹은 왜)에 거하여 죽음을 피하여 달아났다'는 해석은 '일본'과 '부상'이라는 두 표현을 사용해 일본을 지칭하는 것이 부자연스럽고, '죽음(誅)'을 피해 일본에서 일본으로 달아났다는 내용도 어색하다는 것이다. '誅'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황제의 명을 거역한 죄인에게 내리는 처벌을 의미한다.

따라서 '죽음을 피하여 달아났다(逋誅)'는 '당나라 황제의 토벌을 피하여 달아났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또한 일본 조정에서 '일본'이라는 국명을 공식적으로 채택한 것은 예군이 사망한 678년보다 23년 뒤인 701년이었다.[2]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당군의 공격을 피해 '부상'으로 도망쳐 목숨을 부지한 '일본'의 잔여 세력은 백제 유민을 가리키며, '일본'은 '백제'의 별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4. 1. '일본' 표현 논란

2011년 섬서(陝西) 서안(西安)에서 예군의 묘지명이 출토되면서, 묘지명에 등장하는 '일본(日本)'이라는 표현이 일본 열도일본을 지칭하는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2]

묘지명에는 '이때 일본(日本)의 잔여 세력은 부상(扶桑)에 거하여 죽음을 피하여 달아났고, 풍곡(風谷)의 유민은 반도(盤桃)를 의지하여 굳게 저항하였다(于時日本餘噍,據扶桑而逋誅,風谷遺甿,負盤桃而阻固).'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구절은 나·당 연합군이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도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이 저항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일본'이라는 표현은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며, 그 해석에 따라 역사적 사실관계가 달라질 수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4. 1. 1. 일본 열도 지칭 주장과 근거

묘지명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일본(日本)'이라는 단어이다. 묘지명에는 '이때 일본(日本)의 잔여 세력은 부상(扶桑)에 거하여 죽음을 피하여 달아났고, 풍곡(風谷)의 유민은 반도(盤桃)를 의지하여 굳게 저항하였다(于時日本餘噍,據扶桑而逋誅,風谷遺甿,負盤桃而阻固).'라는 구절이 나온다.[2] 이 구절은 나당 연합군이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도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이 저항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 논란의 핵심은 '일본'이 일본 열도일본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를 지니는지이다.

일본이 일본 열도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바탕으로 한다. 묘지명에 나오는 부상(扶桑), 풍곡(風谷), 반도(盤桃)는 각각 일본, 고구려, 신라를 미화하거나 달리 부르는 표현이다. 따라서 '일본' 역시 특정 국가를 직접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지리적 상황을 반영한 별칭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이 '왜(倭)'의 별칭이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묘지명에는 이미 '왜'를 가리키는 '부상(扶桑)'이 등장하기 때문에, '일본'을 '왜'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일본 잔여 세력이 일본(혹은 왜)에 거하여 죽음을 피하여 달아났다'는 해석은, '일본'과 '부상'이라는 두 가지 표현을 사용하여 일본을 지칭하는 것이 부자연스럽고, '죽음(誅)'을 피해 일본에서 일본으로 달아났다는 내용도 어색하다. 여기서 '誅'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황제의 명을 거역한 죄인에게 내리는 처벌을 의미한다.

따라서 '죽음을 피하여 달아났다(逋誅)'는 '당나라 황제의 토벌을 피하여 달아났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또한, 일본 조정에서 '일본'이라는 국명을 공식적으로 채택한 것은 예군이 사망한 678년보다 23년 뒤인 701년이었다.[2]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당군의 공격을 피해 '부상'으로 도망쳐 목숨을 부지한 '일본'의 잔여 세력은 백제 유민을 가리키며, '일본'은 '백제'의 별칭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4. 1. 2. 백제 별칭 주장과 근거

2011년 예군의 묘지명이 섬서(陝西) 서안(西安)에서 출토되었다.[2] 이 묘지명과 함께 앞서 2007년경 소개된 예식진의 묘지명을 비교하여, 백제 예씨(禰氏) 집안의 선계 등을 규명하였다.

특히 묘지명의 내용 중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일본(日本)’이라는 단어이다. 묘지명에는 ‘이때 일본(日本)의 잔여 세력은 부상(扶桑)에 거하여 죽음을 피하여 달아났고, 풍곡(風谷)의 유민은 반도(盤桃)를 의지하여 굳게 저항하였다(于時日本餘噍,據扶桑而逋誅,風谷遺甿,負盤桃而阻固).’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대목은 나·당 연합군이 백제고구려를 멸망한 이후에도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이 저항하였다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 논란이 되는 것은 이 대목의 ‘일본’이 말그대로 일본 열도일본을 지칭하는 것인가이다.

일본(日本)이 일본 열도의 일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로는 다음과 같다. 이 구절에 나오는 부상(扶桑), 풍곡(風谷), 반도(盤桃)는 각각 일본, 고구려, 신라의 미칭(美稱) 혹은 별칭이다. 때문에 여기에 나온 일본 역시 직접적인 국명이 아니라, 어떤 국가의 지리적인 상황을 반영한 미칭 혹은 별칭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그 ‘어떤 국가’는 ‘’이며 ‘일본’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왜(倭)’의 미칭 혹은 별칭으로 보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당시 중국에서 사용된 ‘왜’에 대한 미칭 혹은 별칭인 ‘부상(扶桑)’이 이미 나와있어서 문제가 된다.

이 경우, ‘일본 잔여 세력이 일본(혹은 왜)에 거하여서 죽음을 피하여 달아났다’라는 표현이 된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일본’과 ‘부상’이라는 두 가지 다른 표현을 굳이 사용하는 것도 이상할 뿐더러, ‘죽음(誅)’을 피해 일본에서 일본으로 달아났다는 것 또한 어색하기 때문이다. 이 ‘죽음’을 뜻하는 ‘誅‘자도 보통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誅’라는 한자는 동아시아권에서 흔히 ‘죄 지은 사람, 특히 황제의 명을 거스른 사람에 대하여 처결한다’라는 뜻을 가진다. 황제가 반역자나 죄인을 처형하는 것이기에, 정당성은 황제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피하여 달아났다(逋誅)’는 것은 ‘당나라 황제의 토벌을 피하여 달아났다’는 의미가 된다. 또한 일본 조정에서 ‘일본’이라는 국명이 공식적으로 채택된 것은 예군이 사망한 678년보다 23년 후인 701년이었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였을 때, 당나라 군대의 공격을 피하여 ‘부상’으로 도망가서 목숨을 부지한 ‘일본’의 잔여 세력은 바로 백제 유민들을 가리키는 것이며, 따라서 ‘일본’은 ‘백제’의 별칭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5. 묘지명 내용

예군(禰軍)의 묘지명에 따르면, 공의 휘(諱)는 군(軍), 자(字)는 온(温)이며, 웅진(熊津) 우이(嵎夷) 사람이다. 그 선조는 중국 황제(華)와 같은 조상으로, 영가(永嘉) 말에 난을 피하여 동쪽으로 와서 마침내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예군의 증조부 복(福), 조부 예(譽), 부친 선(善)은 모두 백제에서 일품(一品) 벼슬인 좌평(佐平)을 지냈다.

예군은 현경(顯慶) 5년에 당나라 군대가 백제를 평정할 때, 기미를 알아채고 당나라에 귀순하였다. 성상(聖上)은 이를 가상히 여겨 특별히 높은 품계를 내려 우무위(右武衛) 산천부(滻川府) 절충도위(折衝都尉)로 삼았다.

당시 일본의 남은 무리들이 부상(扶桑)에 의거하여 벌(誅)을 피하고, 풍곡(風谷)의 유민(遺甿)들은 반도(盤桃)를 믿고 굳게 막았다. 예군은 해좌(海左)에서의 계책(謨)과 영동(瀛東)에서의 귀감(龜鏡)으로, 특별히 황제의 간택(簡)을 받아 가서 그들을 초유(招慰)하는 임무를 맡았다. 예군은 신하의 절개(臣節)를 다하여 목숨을 바치고, 〈황화(皇華)〉를 부르며 달려갔다.

참제(僭帝)는 하루아침에 신하라 칭하고, 대수망(大首望) 수십 명을 거느리고 입조(入朝)하여 알현(謁)하게 하였는데, 특별히 은조(恩詔)를 내려 좌융위랑장(左戎衛郎將)으로 삼았다. 얼마 후 우령군위중랑장(右領軍衛中郎將) 겸 검교웅진도독부사마(檢校熊津都督府司馬)로 옮겼다.

함형(咸亨) 3년 11월 21일에 조(詔)를 내려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으로 삼았다.

의봉(儀鳳) 3년 2월 19일에 병에 걸려 옹주(雍州) 장안현(長安縣)의 연수리(延壽里) 저택에서 훙(薨)하니, 춘추(春秋) 66세였다.

황제는 공훈과 옛 정을 생각하여 오랫동안 슬퍼하고 애도하며, 비단 300필과 조(粟) 300섬을 내리고,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모두 관(官)에서 지급하게 하였으며,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 겸 검교본위장사(檢校本衛長史) 왕행본(王行本)을 보내 감독하게 하였다.

그 해 10월 2일에 옹주(雍州) 건봉현(乾封縣)의 고양리(高陽里)에 장사 지냈다.[3]

6. 가족 관계


  • 증조부: 예복(禰福)
  • 조부: 예예다(禰譽多, 혹은 예예禰譽), 백제 좌평
  • 부: 예사선(禰思善, 혹은 예선禰善), 백제 좌평
  • 동생: 예식진(615-672), 당 좌위위(左威衛)
  • 조카: 예소사(禰素士)
  • 조카손자: 예인수(禰仁秀)

참조

[1] 논문 百济人 《祢军墓志》 考论 2011
[2] 논문 百济人 《祢军墓志》 考论 2011
[3] 논문 百济人 《祢军墓志》 考论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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