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니산티 성당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오니산티 성당은 이탈리아 피렌체에 위치한 성당으로, 1250년대에 처음 지어졌으나 1627년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 마테오 니게티의 디자인을 사용한 파사드는 1637년에 지어졌으며, 1872년에 재건되었다. 성당에는 조토,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산드로 보티첼리 등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으며, 특히 기를란다요의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어린 시절 초상화가 있는 프레스코화가 있으며, 그가 브라질에서 발견한 만의 이름은 성당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이탈리아의 바로크 건축 - 나보나 광장
나보나 광장은 이탈리아 로마에 위치한 공공 광장으로, 도미티아누스 경기장 터에 15세기 말 시장이 들어선 후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되어 로마 바로크 예술의 상징이자 다양한 문화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으며, 유명 분수와 함께 대중 매체에도 등장하는 명소이다. - 이탈리아의 바로크 건축 - 반케토니 예배당
반케토니 예배당은 이폴리토 갈란티니가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설립한 예배당으로, 1602년부터 1604년까지 건축되었으며, 1633년부터 1649년까지 여러 화가들이 프레스코화를 그렸고, 현재는 실내악 연주회와 소규모 미팅 장소로 사용된다. - 피렌체의 로마 가톨릭 성당 - 산 조반니 세례당 (피렌체)
산 조반니 세례당은 11~12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피렌체의 팔각형 건물로, 수호성인 세례자 요한에게 봉헌되었으며, 특히 "천국의 문"으로 알려진 청동문과 비잔틴 양식의 모자이크 천장이 유명하다. - 피렌체의 로마 가톨릭 성당 - 산토 스테파노 알 폰테
산토 스테파노 알 폰테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교회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되어 고딕,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되었으며, 보카치오가 《신곡》 강의를 시작한 장소이자 다양한 예술 작품이 소장된 교구 박물관이 있다. - 공식 웹사이트에 알 수 없는 변수를 사용한 문서 - 브루클린 미술관
브루클린 미술관은 1823년 브루클린 견습생 도서관으로 시작하여 현재 약 50만 점의 소장품을 보유한 뉴욕 브루클린 소재의 미술관으로, 다양한 분야의 예술 작품을 전시하며 특히 아프리카 미술과 여성주의 미술에 대한 기여가 크다. - 공식 웹사이트에 알 수 없는 변수를 사용한 문서 - 광주지방기상청
광주지방기상청은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 지역의 기상 예보, 특보, 관측, 기후 정보 제공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기상청 소속 기관으로, 1949년 광주측후소로 설치되어 1992년 광주지방기상청으로 개편되었으며, 기획운영과, 예보과, 관측과, 기후서비스과와 전주기상지청, 목포기상대를 두고 있다.
오니산티 성당 - [지명]에 관한 문서 | |
---|---|
지도 | |
기본 정보 | |
![]() | |
명칭 | 오니산티 성당 |
로마자 표기 | Chiesa di Ognissanti |
위치 |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피렌체 |
상세 정보 | |
국가 | 이탈리아 |
건축가 | 바르톨로메오 페티로시 |
스타일 | 바로크 양식 |
추가 정보 | |
관련 정보 | 오니산티 광장의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
2. 역사
오니산티 성당은 1250년대에 처음 지어졌지만, 17세기 초 바로크 건축 양식으로 내부가 개조되었다. 압스는 피에트라 두라 스타일의 주제단으로 재건되었고,[2] 신랑 쪽 돔형 천장에는 '소토 인 수'라는 원근법 그림(1770년)이 그려졌다.
15세기에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와 산드로 보티첼리가 그린 프레스코화는 신랑에 남아 있다. 보티첼리는 그의 연인 시모네타 베스푸치 근처인 이 교회에 안치되었으며, 그의 프레스코화인 '서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건너편 예배당에 있는 기를란다요의 '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를 마주하고 있다. 이 두 그림은 1480년에 같이 그려졌다.
기를란다요는 또한 클로이스터 사이에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는 리펙터리에 '최후의 만찬'을 그렸는데, 이 작품은 후대에 그려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베스푸치 예배당에 있는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와 그의 형제 다비드가 그린, 베스푸치 가문의 일원들을 보호하는 '자비의 성모'를 묘사하는 프레스코화(1472년경)에는 어린 시절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초상이 담겨 있다고 알려져 있다. 아메리고가 브라질에서 발견한 만은 '산 살바토레 디 오니산티'라고 명명되었는데, 이는 포르투갈어 '상 살바도르 드 토두스 우스 산투스'의 기원이며, 사우바도르와 토두스우스산투스만 등 지명의 기원이 되었다.
성구실에는 바이트 슈토스가 제작한 목제 십자가 상이 있다.
2. 1. 초기 역사 (13세기-16세기)
본래 1250년대에 지어졌으나, 1627년에 건축가 바르톨로메오 페티로시에 의해 바로크 건축 양식으로 거의 완전히 다시 지어졌다. 곧이어, 마테오 니게티의 디자인을 사용하여 새로운 파사드(1637년)가 지어졌는데, 입구 위의 유약을 바른 테라코타 루네트는 델라 로비아의 작품과 유사하나 현재는 베네데토 불리오니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오니산티는 이 르네상스 풍의 도시에 처음으로 지어진 바로크 건축의 예시였다. 파사드의 역순으로 된 필라스터 기둥은 벽감과 창문을 정교한 코니스로 감싸고 있다. 파사드의 왼쪽에는 13세기와 14세기 시대의 종탑이 존재한다.평신도의 헌신과 청렴을 목적으로 한 움일리아티 수도회가 피렌체에서 신망을 얻었고, 이들의 아주 소박한 교회당에 예술품들이 쌓이기 시작하였다. 예시로, 조토의 유명한 '성모자와 두 천사'(1310년경)가 주제단에 쓰이기 위해 그려졌다.[3] 최근 좌측 익랑에 있는 십자가 상의 세척을 통해서 이 십자가 상 역시도 조토가 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3][4] 16세기 기간, 움일리아티 수도회가 쇠퇴하였고, 1571년에 프란치스코회가 이 교회당의 소유권을 획득했으며,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로브 같은 귀중한 성물들을 이곳으로 들여올 수 있었다.
2. 2. 바로크 양식 재건축 (17세기)
1627년경 건축가 바르톨로메오 페티로시에 의해 바로크 양식으로 거의 완전히 재건되었다. 곧이어, 마테오 니게티의 디자인을 사용하여 1637년에 새로운 파사드가 지어졌는데,[1] 입구 위의 유약을 바른 테라코타 루네트는 델라 로비아의 작품과 유사하나 현재는 베네데토 불리오니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오니산티 성당은 르네상스 풍의 도시에 처음으로 지어진 바로크 건축의 예시였다. 파사드의 역순으로 된 필라스터 기둥은 정교한 코니스를 가진 벽감과 창문을 담고 있다.2. 3. 프란치스코회 시대 (16세기 이후)
1571년 움일리아티 수도회가 쇠퇴하면서 프란치스코회가 오니산티 성당의 소유권을 획득하였다.[3] 이들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의복과 같은 귀중한 성물들을 이곳으로 가져왔다.[3]2. 4. 19세기 이후
1872년에 마테오 니게티가 1637년에 디자인했던 파사드가 재건되었다.[1] 이 파사드는 출입구 위에 델라 로비아의 작품과 유사하나 현재는 베네데토 부글리오니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유약을 바른 테라코타 루네트를 보존하고 있다.3. 건축
오니산티 성당은 본래 1250년대에 지어졌으나, 1627년에 건축가 바르톨로메오 페티로시에 의해 바로크 건축 양식으로 거의 완전히 재건되었다. 곧이어, 마테오 니게티의 디자인을 사용하여 새로운 파사드(1637년)가 지어졌는데, 입구 위의 유약을 바른 테라코타 루네트는 델라 로비아의 작품과 유사하나 현재는 베네데토 불리오니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오니산티 성당은 르네상스 풍의 도시에 처음으로 지어진 바로크 건축의 예시였다. 파사드의 역순으로 된 필라스터 기둥은 정교한 코니스를 가진 벽감과 창문을 담고 있다. 파사드의 왼쪽에는 13세기와 14세기 시대의 종탑이 있다.
평신도의 헌신과 청렴을 목적으로 한 비천 수도파(움일리아티)가 피렌체에서 신망을 얻자, 이들의 소박한 교회당에 예술품들이 쌓이기 시작하였다. 조토의 '성모자와 두 천사' (1310년)가 주제단에 쓰이기 위해 그려졌고,[3] 최근 좌측 익랑에 있는 십자가 상의 세척을 통해 이 십자가 상 역시 조토가 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3][4] 16세기, 비천 수도파가 쇠퇴하였고, 1571년에 프란치스코회가 이 교회당의 소유권을 획득하여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로브 같은 귀중한 성물들을 이곳으로 가져왔다.
17세기 초, 성당 내부는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되었고, 후진은 피에트라 두라 스타일의 주제단으로 꾸며졌으며, 신랑 쪽 궁륭형 천장에는 '소토 인 수'라는 원근법 그림(1770년)이 그려졌다.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와 산드로 보티첼리 등의 15세기 프레스코화는 신랑에 남아 있으며, 보티첼리는 그의 연인 시모네타 베스푸치 근처인 이곳 교회당에 안치되었다. 보티첼리의 '서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건너편 예배당 신랑에 있는 기를란다요의 '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를 마주하고 있으며, 이 두 그림은 1480년에 같이 그려졌다. 베스푸치 예배당에는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와 그의 형제 다비드가 그린, 베스푸치 가문의 일원들을 보호하는 '자비의 성모'를 묘사하는 프레스코화 (1472년경)가 있는데, 이 그림에는 어린 시절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초상이 담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를란다요는 또한 클로이스터 사이에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는 리펙터리에 '최후의 만찬'을 그렸는데, 이 작품은 후대 밀라노에 위치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성구실에는 바이트 슈토스가 제작한 목제 십자가 상이 있다.
3. 1. 파사드
1250년대에 처음 지어졌으나, 1627년에 건축가 바르톨로메오 페티로시에 의해 바로크 건축 양식으로 거의 완전히 재건되었다. 곧이어, 마테오 니게티의 디자인을 사용하여 1637년에 새로운 파사드(정면)가 지어졌는데,[1] 델라 로비아의 작품과 유사하나 현재는 베네데토 불리오니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입구 위의 유약을 바른 테라코타 루네트는 보존되었다. 오니산티 성당은 이 르네상스 풍의 도시에 처음으로 지어진 바로크 건축의 예시였다. 파사드의 역순으로 된 필라스터 기둥이 벽감과 창문을 정교한 코니스를 담고 있다. 파사드의 왼쪽에는 13세기와 14세기 시대의 종탑이 있다.3. 2. 종탑
오니산티 성당의 파사드 왼쪽에 있는 종탑은 13세기와 14세기 시대의 것이다.3. 3. 내부 구조
17세기 초, 성당 내부는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되었는데, 후진은 피에트라 두라 스타일의 주제단으로 꾸며졌고, 신랑 쪽 궁륭형 천장에는 '소토 인 수'라는 원근법 그림(1770년)이 그려졌다.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와 산드로 보티첼리 등의 15세기 프레스코화는 신랑에 남아 있으며, 보티첼리는 그의 연인 시모네타 베스푸치 근처인 이곳 교회당에 안치되었다. 보티첼리의 프레스코화인 '서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건너편 예배당의 신랑에 있는 기를란다요의 '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를 마주하고 있으며, 이 두 그림은 1480년에 같이 그려졌다.베스푸치 예배당에는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와 그의 형제 다비드가 그린, 베스푸치 가문의 일원들을 보호하는 '자비의 성모'를 묘사하는 프레스코화 (1472년경)가 있는데, 이 그림에는 어린 시절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초상이 담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주요 예술 작품
오니산티 성당에는 움일리아티 수도회 시절부터 내려오는 귀중한 예술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조토의 성모자와 두 천사[3]와 십자가[3][4], 기를란다요의 최후의 만찬[3], 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3], 자비를 베푸는 성모[3], 보티첼리의 서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4] 프레스코화 등이 대표적이다. 이 외에도 베네데토 불리오니의 테라코타 루네트,[3] 바이트 슈토스의 목제 십자가상[4] 등이 있다.
4. 1. 조토의 작품
조토의 유명한 '성모자와 두 천사'(1310년경)는 주제단에 쓰이기 위해 그려졌다.[3]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최근 좌측 익랑에 있는 십자가 상의 세척을 통해서 이 십자가 상 역시도 조토가 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3][4]4. 2.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작품
도메니코 기를란다요는 수도원 식당에 최후의 만찬을 프레스코화로 그렸는데, 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밀라노 작품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3] 산드로 보티첼리의 서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프레스코화 맞은편에는 기를란다요의 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가 있는데, 두 작품 모두 1480년에 동시에 제작되었다.[3]베스푸치 예배당에는 기를란다요와 그의 형제 다비드가 그린 자비를 베푸는 성모가 베스푸치 가문의 사람들을 보호하는 모습을 묘사한 프레스코화(1472년경)가 있는데, 여기에는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어린 시절 초상화가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4. 3. 산드로 보티첼리의 작품
산드로 보티첼리는 이 성당에 그의 연인이었던 시모네타 베스푸치 근처에 묻혔다.[3] 보티첼리의 프레스코화인 서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당 안의 신랑 건너편 예배당에 있는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와 마주하고 있으며, 이 두 그림은 1480년에 함께 그려졌다.[4] 성당 우측 익랑의 예배당에 있는 작은 원형석이 그가 안치된 장소를 나타내고 있다.4. 4. 기타 작품
성당 입구에는 베네데토 불리오니가 제작한 유약을 바른 테라코타 루네트가 있다.[3] 이 작품은 델라 로비아의 작품과 양식이 유사하다.성구실에는 바이트 슈토스가 만든 목제 십자가상이 있다.[4]
5. 베스푸치 가문과의 연관성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와 그의 형제 다비드가 1472년경에 그린 베스푸치 가문 예배당의 프레스코화에는 자비를 베푸는 성모가 베스푸치 가문의 사람들을 보호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에는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어린 시절 초상화가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4]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브라질의 한 만을 발견하고 '산 살바토레 디 오니산티'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는 포르투갈어로 "상 살바도르 드 토두스 우스 산투스"(San Salvador de Todos os Santos)이다. 이 지명은 사우바도르와 토두스우스산투스만의 기원이 되었다.[4]
참조
[1]
서적
[2]
간행물
BBC News
https://www.bbc.co.u[...]
2010-11-05
[3]
서적
[4]
간행물
BBC 뉴스
https://www.bbc.co.u[...]
2010-11-0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