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야케 아카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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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야케 아카하치는 15세기 말, 류큐 왕국에 저항한 야에야마 제도의 인물이다. 하테루마 섬에서 태어나 이시가키 섬의 촌장이 된 그는 미야코 제도 침공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이후 류큐 왕국에 조공을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류큐 왕국은 군대를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했고, 이 사건은 오야케 아카하치의 난으로 불린다. 그는 사키시마 제도의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현재 이시가키 섬에서는 그의 정신을 기리는 축제와 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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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 텐은 류큐 왕국의 마지막 국왕의 장남으로 류큐 왕세자였으며, 류큐 처분 이후 도쿄로 이주하여 일본 귀족원 의원을 역임하다가 슈리에서 사망했다. - 류큐국 사람 - 테이 도
테이 도는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까지 활동한 류큐 왕국의 관료로, 사쓰마 침공 당시 나하 항구 방어를 지휘했으나 항복하지 않고 참수되었다.
| 오야케 아카하치 | |
|---|---|
| 인물 정보 | |
| 이름 | 오야케 아카하치 |
| 다른 이름 | 오야케 아카하치 혼가와라, 호리카와 아카하치 |
| 일본어 표기 | 遠弥計赤蜂 / 於屋計赤蜂 |
| 로마자 표기 | Ōyake Akahachi |
| 사망 | 1500년 |
| 직업 | 류큐의 영주, 반란 지도자 |
| 관련 장소 | 다이라 산 (大平山, 타이빈산) |
2. 생애
오야케 아카하치는 파테루마섬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남다른 기상을 보였다고 전해지지만, 자세한 성장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다. 류큐 왕국 측 역사 자료에는 오하마의 한 호족으로 등장한다. 그는 야에야마 제도의 수령으로서 섬 주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 추잔에 대한 조공을 몇 년간 중단하기도 했다.
이시가키섬 사키하라 공원에는 "오야케 아카하치의 비"가, 오하마 시민 회관 근처에는 "오야케 아카하치 상"이 있다. 비문에는 오야케 아카하치가 1500년(메이오 9년) 류큐 왕부에 대한 조공을 거부하고 반기를 든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독립심과 정의감이 강하고 섬의 자유를 위해 앞장섰으며, 야에야마 사람들에게 태양처럼 숭배받는 영웅이었다고 전해진다.
대한민국에서는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과 오야케 아카하치가 동일인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는 일본의 "요시츠네=징기스칸 설"과 유사한 형태로 받아들여진다.
2001년 5월 4일 장성군에서 열린 "홍길동 국제 학술 심포지엄"에서는 "동일인물설"이 논의되었으나,[9] 역사 연구가 아닌 한일 양국 우호 증진을 위한 행사였다. 한국 측은 시기적 일치(15세기 말)와 후루스토바루 유적에서 고려 시대 도자기 및 고전이 출토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지만,[10] 일본 측 연구자들은 "한국 측의 억측", "애초에 소설 속 등장인물"이라며 부정하고 있다.[11]
2001년 7월 이시가키시에서 예정되었던 한국 극단의 "뮤지컬 홍가와라" 공연은 역사 교과서 문제로 인해 중지되었다.[12]
기타야마 쿄는 "한국에서는 소설을 인물 실존의 증거로 삼고, 의상이나 풍습은 '더 훌륭했을 것이다'라고 마음대로 상상하며 근거 없이 사적으로 인정한다. 단군 신화와 『홍길동전』이 그 예이다."라고 비판했다.[13]
2. 1. 초기 생애와 반란
하테루마 섬에서 태어난 아카하치는 어릴 때부터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다고 전해진다. 청년이 되면서 이시가키 섬으로 이주하여 곧 오하마 마을(오늘날 이시가키 시)의 촌장이 되었다.[3] 그의 영향력은 곧 이시가키 섬 전체로 확장되었고, 나아가 야에야마 제도의 다른 섬들까지 미쳤다.류큐 왕국 측의 역사 자료에는 오하마의 한 호족으로 등장한다. 아카하치는 야에야마 제도의 수령으로서 섬 주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배경으로[4] 류큐 왕국에 대한 조공을 2~3년 끊었다.
비록 패배했지만 류큐의 침공으로부터 다이헤이산을 지키려고 했던 오야케 아카하치는 사키시마 제도의 영웅으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우타키도 이시가키섬에 남아있어 변함없이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현지 전승에 따르면, 오야케 아카하치의 거처는 현재의 오하마 시민 회관 부근으로 여겨진다.[7]
2. 2. 오야케 아카하치의 난
1500년 류큐 왕국의 쇼신 왕이 사키시마 제도를 병합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자, 오야케 아카하치는 이시가키 섬 주민들을 이끌고 이에 맞서 싸웠다. 이를 '''오야케 아카하치의 난'''이라고 한다.류큐 왕국(사키시마 측에서는 류큐(추잔) 왕부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측 역사 자료에는 오야케 아카하치가 야에야마의 수령으로서 추잔에 대한 조공을 2~3년 끊고, 미야코를 공격했기 때문에, 1500년 2월 13일에[5] 류큐군이 쳐들어와 그를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야에야마・미야코에 남아있는 여러 사료를 보면, 원래 미야코・야에야마 양 사키시마는 류큐에 속하지 않는 다이헤이산(타이빈산)이라는 연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야코의 수령 일족인 나카소네 토유미야가 15세기에 들어서면서 류큐 왕부에 복속되었고, 야에야마에도 이러한 관계를 요구했다. 이에 오야케 아카하치가 이끄는 야에야마가 저항한 것이다.
충도씨 가보 정통 등의 사료에는 아카하치에게 섬 전체 주민들이 두터운 신뢰를 보냈으며, "오야케 아카하치의 난"에서는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 섬 주민도 해안에 서서 류큐군의 침공에 저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이시가키섬의 사키하라 공원에 있는 "오야케 아카하치의 비"에는 쇼신 왕이 이시가키의 토착 신앙을 탄압했기 때문에, 1500년에 오야케 아카하치가 반기를 들었으나 류큐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6] 오하마 시민 회관 근처의 "오야케 아카하치 상" 비문에는, 오야케 아카하치가 1500년 류큐 왕부에 대한 조공을 거부하고 반기를 든 영웅이며, 정의감이 강하고 섬의 자유를 위해 앞장선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비록 패배했지만, 류큐의 침공으로부터 다이헤이산을 지키려 했던 오야케 아카하치는 사키시마 제도의 영웅으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그가 믿던 토착 신앙도 우타키(御嶽|우타키ryu) 형태로 남아 이어지고 있다.
현지 전승에 따르면 오야케 아카하치의 거처는 현재의 오하마 시민 회관 부근으로 여겨지며,[7] 일부 학자들은 후루스토하라 유적을 그의 거성지로 추정하고 있다.
대한민국 재야사학계 일각에서는 소설 『홍길동전』의 홍길동과 오야케 아카하치를 동일인물로 보기도 한다. 이들은 1500년이라는 시기적 일치, 후루스토 유적에서 발견된 고려 도자기와 동전 등을 근거로 제시한다.[18] 2001년 5월 4일 장성군에서 “홍길동 국제학술심포지엄”이 개최되어 양국 연구자들이 이 문제를 논의하였으나, 일본 측 연구자들은 홍길동은 “애초에 소설 속 등장인물”이라고 부정했다.[19]
2. 3. 최후
1500년 류큐 왕국이 군선 100척과 병사 3,000명을 보내 오야케 아카하치를 쳐 죽였다.[5] 류큐 왕국은 오야케 아카하치가 조공을 끊고 미야코를 공격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 사건이 '''오야케 아카하치의 난'''이다.미야코・야에야마에 남아있는 여러 사료에 따르면, 오야케 아카하치는 섬 주민들의 두터운 신뢰를 받았으며, 류큐군의 침공에 맞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 섬 주민들도 해안에서 저주를 통해 저항했다고 한다.
쇼신 왕이 이시가키의 토착 신인 '이리키야 아마리 신'[6] 제사를 탄압하자, 1500년 오야케 아카하치는 섬 주민들을 이끌고 반기를 들었으나 결국 패배했다.
패배했지만 류큐의 침공으로부터 사키시마 제도를 지키려 했던 오야케 아카하치는 사키시마 제도의 영웅으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이리키야 아마리 신을 모시는 우타키도 이시가키섬에 남아있어 여전히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7]
3. 유산
오야케 아카하치는 류큐 왕국의 공식 기록에서는 반역자로 묘사되지만, 이시가키를 비롯한 야에야마 제도 지역에서는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3] 파테루마섬에는 그의 탄생 기념비가 있으며, 이시가키섬 오하마 지역에는 그의 명예를 기리는 비석이 있다. 또한 일부 학자들은 후루스토바루 유적을 오야케 아카하치의 거성지로 추정하고 있다.[7]
한국에서는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과 오야케 아카하치가 동일인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는 일본의 "요시츠네=징기스칸 설"과 유사하게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홍길동은 가공의 인물이며, 조선왕조실록에는 1500년에 도적 홍길동이 체포되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8] 2001년에는 장성군에서 "홍길동 국제 학술 심포지엄"이 열려 동일인물설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9] 역사 연구보다는 우호 교류 행사의 성격이 강했다. 한국 측에서 제시하는 동일인물설의 근거는 15세기 말이라는 시기적 일치와 후루스토바루 유적에서 고려 도자기나 동전이 출토되었다는 정도이며,[10] 일본 측 연구자들은 "애초에 소설 속 등장인물"이라며 이를 완전히 부정하고 있다.[11]
3. 1. 야에야마 제도에서의 평가
류큐 왕국이 제작한 공식 기록과 역사에서는 오야케 아카하치를 반역자이자 배신자로 묘사하지만, 이시가키와 주변 섬 지역에서는 그를 자유와 독립을 지키려 했던 영웅으로 평가한다.[3] 그의 명예를 기리는 비석은 오늘날 이시가키시 오하마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류큐 왕국(사키시마 측의 입장에서는 류큐(추잔) 왕부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측의 역사 자료에는 오하마의 한 호족으로 등장한다. "[1500년]] 2월 13일[5]에 류큐군의 군선 100척, 류큐 병사 3,000명을 보내 그를 쳐 죽였다."라고 적혀 있다. 이것이 바로 '''오야케 아카하치의 난'''이다.
야에야마・미야코에 현존하는 여러 사료를 살펴보면, 원래 미야코・야에야마 양 사키시마는 류큐에 속하지 않는 다이헤이산(타이빈산)이라는 연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대로 미야코의 수령 일족인 소라비(나카소네 토유미야)가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추잔 왕부에 공순하여 류큐의 조공국이 되었고, 더 나아가 야에야마에도 이와 같은 주종 관계를 요구했다. 이에 대항한 오야케 아카하치가 이끄는 야에야마라는 구도이다.
충도씨 가보 정통, 조에이 성 가보 대종, 야에야마 섬 넨라이키와 같은 미야코・야에야마에 남아있는 여러 사료에 공통적으로 기록된 것은, 아카하치에게 섬 전체 주민들이 동심하여 두터운 신뢰를 얻고 있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오야케 아카하치의 난"에서는 남성 섬 주민뿐만 아니라 여성 섬 주민도 해안에 서서 저주를 통해 류큐군의 침공에 대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이시가키섬의 사키하라 공원에 위치한 "오야케 아카하치의 비"의 비문에 따르면, "쇼신 왕이 탄압했기 때문에, 1500년에 오야케 아카하치가 섬 주민들을 선두로 하여 반기를 들고 분전했지만, 쳐 죽임을 당했다."[6]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오하마 시민 회관 근처에는 "오야케 아카하치 상"이 있으며, 이 비문에는 "서기 1500년(메이오 9년), 당시 류큐 왕부에 대한 조공을 거부하고 반기를 든 경천동지할 오야케 아카하치의 난의 주인공 오야케 아카하치의 동상. (중략) 정의감이 강하고, 섬의 자유를 위해 앞장서 권력에 맞서, 야에야마 사람들에게 태양으로 숭배받고 신망을 한몸에 받았다. 이래로 오늘날까지 영웅 오야케 아카하치의 유덕은 이시가키섬 사람들에게 '아카하치 정신'으로 계승되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패배했지만 류큐의 침공으로부터 다이헤이산을 지키려고 했던 오야케 아카하치는 사키시마 제도의 영웅으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이리키야 아마리 신을 전하는 우타키도 이시가키섬에 남아있어 변함없이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현지 전승에 따르면 오야케 아카하치의 거처는 현재의 오하마 시민 회관 부근으로 여겨진다.[7]
3. 2. 대한민국과의 관계
한국의 재야사학계에서는 소설 『홍길동전』의 등장인물 홍길동과 오야케 아카하치가 동일인물이라는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일본의 "요시츠네=징기스칸 설"과 유사한 형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동일인물설 때문에 아카하치는 오키나와현과 한국 사이의 우호 행사 소재로 여겨지기도 한다.[8]그러나 “남쪽의 율도국으로 도망간 의적” 홍길동은 소설 속 가공인물일 뿐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실존인물인 정치깡패 홍길동이 아카하치가 류큐군에게 잡혀 죽은 뒤인 1500년 10월 22일에 체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2001년 5월 4일, 장성군에서 “홍길동 국제학술심포지엄”이 개최되어 양국 연구자들이 동일인물설에 대해 논의했다.[9] 하지만 이 심포지엄은 진지한 학술행사라기보다는 친선교류행사에 가까웠다. 동일인물설의 근거로 제시된 것은 1500년이라는 시기적 일치, 후루스토 유적에서 발견된 고려 도자기와 동전 같은 우연적인 것들뿐이었다.[10] 일본측 연구자들은 홍길동은 “애초에 소설 속 등장인물”이라고 완전히 부정했다.[11]
기타야마 쿄는 "한국에서는 소설을 인물 실존의 증거로 삼고, 의상이나 풍습은 '더 훌륭했을 것이다'라고 마음대로 상상하고 근거 없이 사적으로 인정해 버린다. 알기 쉬운 예가 단군 신화와 『홍길동전』이다."라고 비판했다. 또한 "400년 전에 허균이라는 사람이 쓴 가공 소설의 주인공 홍길동이 어느새 실존 인물이 되어, 게다가 15세기에 류큐 왕부에 저항한 야에야마의 호족 오야케 아카하치와 동일인물이라는 설까지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13]
3. 3. 기타
오야케 아카하치는 파테루마섬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영웅적인 면모를 보였다고 전해지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파테루마섬에는 그의 탄생 기념비가 있다. --류큐 왕국 측 역사 자료에는 이시가키섬의 한 호족으로 등장하며, 1500년 류큐 왕국에 의해 토벌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야케 아카하치의 난''') 그러나 야에야마・미야코 지역의 자료에는 류큐와는 다른 독자적인 세력(다이헤이산)의 지도자였다는 기록이 있다.
사키시마 제도에서는 류큐의 침공에 맞서 싸운 영웅으로 전해지며, 이시가키섬에는 그를 기리는 비석과 동상이 있다. --
한국에는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과 오야케 아카하치가 동일인물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는 일본의 "요시츠네=징기스칸 설"과 유사하게 받아들여진다.
홍길동은 한국에서 인기 있는 인물이지만, 도적이자 조선 왕조에 대한 반역자라는 설정이다. 설성경(당시 연세대학교 교수)과 양관승은 홍길동이 율도국으로 도망쳐 '홍가와라'라는 이름으로 위장하고, 그곳에서 백성을 괴롭히는 류큐 왕부에 대항하여 싸웠다고 주장한다.[8]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오야케 아카하치는 오키나와현과 한국 간의 우호 행사 소재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홍길동은 가공의 인물이며,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6년(1500년) 기록에는 도적 홍길동이 체포되었다는 내용만 있을 뿐이다. 소설 『홍길동전』은 이 범죄자를 모델로 17세기 초 조선의 신분 제도와 사회를 풍자한 작품이다.
2001년 5월 4일, 한국 장성군에서 "홍길동 국제 학술 심포지엄"이 열려 "동일인물설"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지만,[9] 역사 연구보다는 우호 행사 성격이 강했다. 한국 측은 "동일인물설"의 근거로 15세기 말이라는 시기적 일치와 후루스토바루 유적에서 고려 시대 도자기나 고전이 출토되었다는 점을 제시했지만,[10] 일본 측 연구자들은 이를 부정하고 있다.[11]
2000년부터 이시가키시 오하마에서 "아카하치 축제"와 "오야케 아카하치 위령제"가 개최되고 있다.[14]
4. 관련 작품
- 이바 난테츠의 서사시.
- 이바 난테츠의 서사시를 원작으로, 시게무네 카즈노부・토요다 시로가 감독하고, 1937년에 발표된 영화 (제작: 도쿄 발성 영화 제작소).
- 어린이 연극 오야케 아카하치 「태양의 난」[15] - 오야케 아카하치를 소재로, 연출가 히라타 다이이치가 지도. 야에야마에 거주하는 초등학교 4학년~고등학교 3학년 총 80명의 어린이들이 노래와 춤과 향토 예능으로 연출하는 현대판 쿠미오도리의 무대.
-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사우스바운드』에서는, 오야케 아카하치의 난을 중심으로 한 오야케 아카하치의 에피소드가 다루어지고 있다.
- 도야마 대학 약학부에 의해, 카프시쿰 키넨세를 기반으로 이시가키 섬에서 품종 개량되어, 2007년에 품종 등록된 고추 「아카하치」는, 오야케 아카하치에 기인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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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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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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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inawa Bunka-s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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延世大 ソル・ソンギョン教授 チャムドン小学校で「古典文学」特別講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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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韓友好の懸け橋に/洪吉童国際学術シン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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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カハチは韓国の義賊」/延世大教授ら来沖、調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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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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琉球新報
1998-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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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韓国劇団が公演中止/アカハチ題材ミュージカル/教科書問題で/石垣市
http://ryukyushimpo.[...]
2001-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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歴女が学んだホントの日韓関係
青林堂
2010-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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盛大にオヤケアカハチ500年祭/石垣市大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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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ども演劇オヤケアカハチ「太陽の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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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榮姓家譜大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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