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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키자카 야스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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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와키자카 야스마사는 1633년 홋타 마사모리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와키자카 야스모토의 양자가 되어 이이다번 경영에 참여했다. 1654년 야스모토의 사망으로 가문을 계승했으며, 1672년 다쓰노번으로 전봉되어 성을 재건하고 조카마치를 정비했다. 1678년 후계자 문제로 갈등을 겪었으며, 1683년 막부에 와키자카 가문의 후다이 다이묘 변경을 요청하여 허가를 받았다. 1684년 은거 후 1694년 다쓰노에서 사망했다.

2. 생애

에도 시대 전기의 다이묘. 1633년 홋타 마사모리의 차남으로 태어나, 1640년 시나노 이이다번 번주 와키자카 야스모토의 양자가 되었다. 1654년 양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이다 번주가 되었으며, 1672년에는 하리마 다쓰노번으로 전봉되었다. 다쓰노에서는 황폐해진 다쓰노성을 재건하고 조카마치를 정비하는 등 번의 발전에 힘썼다. 또한, 1683년에는 자신의 본가인 홋타 가문이 후다이 다이묘임을 내세워 와키자카 가문의 지위를 도자마에서 후다이 다이묘로 변경하는 데 성공했다. 1684년 다섯째 아들 야스테루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퇴했으며, 1694년 향년 62세로 다쓰노에서 사망했다.

2. 1. 어린 시절과 가독 상속

간에이 10년(1633년), 홋타 마사모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시나노 이이다번의 번주였던 와키자카 야스모토는 후계자 야스쓰구가 빈추 마쓰야마번 초대 번주 이케다 나가요시의 유산을 둘러싼 다툼 중 이케다 나가요리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에 야스모토는 홋타 마사모리의 동생인 야스토시를 양자로 들였으나, 야스토시마저 1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결국 야스모토는 야스토시의 조카이자 마사모리의 차남인 야스요시(훗날의 야스마사)를 간에이 17년(1640년)에 새로운 양자로 맞이하게 되었다.

양자가 된 야스마사는 명군으로 알려진 양아버지 야스모토 밑에서 이이다번 경영에 깊이 관여하며 실무를 익혔다. 같은 해에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를 알현하는 기회를 가졌다. 케안 4년(1651년)에는 종5위하 추무소후(主馬首)에 서임되었다. 조오 3년(1654년), 양아버지 야스모토가 사망하자 가독을 상속받았다. 이때 상속받은 5만 5천 석 중 2천 석을 야스모토의 동생인 와키사카 야스후사에게 나누어 주었다(분지).

2. 2. 이다 번주 시대

간에이 10년(1633년), 홋타 마사모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시나노 이이다번의 번주였던 와키자카 야스모토는 후계자 야스쓰구가 빈추국 마쓰야마번 초대 번주 이케다 나가요시의 유산을 둘러싼 분쟁 중 이케다 나가요리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후 양자로 들인 홋타 마사모리의 동생 야스토시마저 19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야스모토는 야스토시의 조카이자 마사모리의 차남인 야스마사(당시 이름은 야스요시)를 간에이 17년(1640년)에 새로운 양자로 맞이했다.

양자가 된 야스마사는 명군으로 알려진 양아버지 야스모토 밑에서 이이다번의 경영에 깊이 관여하며 실무를 익혔다. 같은 해에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를 알현하였고, 케안 4년(1651년)에는 종5위하 추무소후에 서임되었다. 조오 3년(1654년), 양아버지 야스모토가 사망하자 가독을 상속받아 이이다 번주가 되었다. 이때 상속받은 5만 5천 석 중 2천 석을 야스모토의 동생인 와키사카 야스후사에게 나누어 주었다(분지(分知)).

번주가 된 후 야스마사는 막부의 여러 공역에 참여하며 충실히 역할을 수행했다. 만지 원년(1658년)에는 에도성 혼마루 수리에 참여했으며,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오사카성 가반(加番, 성 수비 책임자)을 맡았고, 쇼렌인노미야와 칙사를 접대하는 직무를 수행하는 등 막부 정치에 공헌했다.

만지 3년(1660년)에는 친형이자 시모사국 사쿠라번 10만 석의 번주였던 홋타 마사노부가 하타모토의 곤궁 등을 이유로 막부 정치를 비판하고 무단으로 영지로 돌아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마사노부는 개역(改易) 및 칩거(蟄居) 처분을 받았는데, 이때 야스마사는 막부의 명령에 따라 형의 신병을 인도하는 역할을 맡았다[1]

간분 12년(1672년), 야스마사는 이이다에서 하리마 다쓰노번으로 전봉(転封)되었다[2]. 이로써 그의 이이다 번주 시대는 막을 내렸다.

2. 3. 다쓰노 번주 시대

간분 12년(1672년), 시나노 이이다에서 하리마 다쓰노번[2]으로 전봉되었다. 당시 다쓰노는 만지 원년(1658년)에 교고쿠 가문이 마루가메번으로 옮겨간 이후 14년 동안 막부 직할령이었기 때문에 성이 파괴되어 황폐한 상태였다. 기록에 따르면 "성터와 무가 저택 자리는 모두 논밭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성곽이 허물어져 있었다. 야스마사는 막부의 허가를 받아 즉시 성의 재건에 착수하여, 마을과 농가에 머물며 약 1년 만에 성을 수리하고 재건했다. 이는 파괴된 부분을 복구하는 수준이었으며, 이전 교고쿠 시대의 성을 복원한 것에 가깝다고 평가된다. 이때 지어진 성이 현재 다쓰노성의 기초가 되었다[3]. 이후 성 아랫마을인 조카마치 정비도 진행하여 현재 다쓰노시[4]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와키자카 시대의 다쓰노 조카마치는 26만 석 다이묘였던 교고쿠 시대에 비해 규모가 크게 축소되었으며, 야스마사는 조카마치의 중심부를 집중적으로 정비하고 발전시키는 데 주력했다. 또한, 현재도 다쓰노시의 명산품인 "엷은 간장" 생산을 장려하는 등 다쓰노번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엔포 6년(1678년), 야스마사는 병약하다는 이유로 적자 야스무라를 폐적시키고, 다섯째 아들 야스테루를 새로운 적자로 삼았다. 그러나 야스무라는 폐적되기 전에 이미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를 알현하고 관위 서임까지 마친 상태였기에 이에 불만을 품고 직접 행동에 나섰다. 덴와 2년(1682년), 야스무라는 후다이 다이묘오미 히코네번 번주 이이 나오오키에게 직접 담판을 시도했으나 면회를 거절당했고, 이어서 우에노의 텐신 법친왕에게 직접 호소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오히려 막부의 분노를 샀고, 막부는 야스무라의 신병을 오바마번 번주 사카이 다다타카에게 맡겨 약 19년 동안 유폐시켰다[5].

덴와 3년(1683년), 야스마사는 자신의 본가인 홋타 가문이 후다이 다이묘라는 점을 내세워 와키자카 가문의 지위를 도자마에서 후다이 다이묘로 변경해 줄 것을 막부에 요청하여 허가를 받았다. 이후 에도성 내에서의 좌석도 후다이 다이묘들이 자리하는 제감간(帝鑑間)으로 옮겨져, 와키자카 가문은 도자마에서 "원래 후다이였던 가문"으로 취급받게 되었다.

조쿄 원년(1684년), 야스테루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하여 뇨스이(如水)라는 호를 사용했다. 겐로쿠 7년 4월 20일(1694년 5월 13일), 다쓰노에서 향년 62세로 사망했다.

2. 4. 후계자 문제와 가문 내 갈등

엔포 6년(1678년), 야스마사는 적자인 야스무라를 잦은 병치레를 이유로 폐적시키고, 다섯째 아들 야스테루를 적자로 삼았다. 그러나 야스무라는 폐적되기 전에 이미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를 알현하고 서임을 마쳤기 때문에, 불만을 품고 직접 행동에 나섰다. 덴와 2년(1682년), 야스무라는 후다이 다이묘인 오미국 히코네번 번주 이이 나오오키에게 직접 담판을 시도했으나 거절당했고, 이어서 우에노의 텐신 법친왕에게 직소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아, 이를 들은 막부는 격노하여 야스무라의 신병을 오바마번 번주 사카이 다다타카에게 맡기고 19년 남짓 유폐시켰다[5].

2. 5. 도자마 다이묘에서 후다이 다이묘로

덴와 3년(1683년), 야스마사는 자신의 실가가 후다이 다이묘인 홋타가임을 근거로, 와키사카가의 지위를 도자마에서 후다이로 변경해 줄 것을 막부에 신청했다. 막부는 이를 허가했고, 이후 에도성 내에서 와키자카 가문의 시코석(伺候席, 다이묘가 쇼군을 알현할 때 앉는 자리)은 후다이 다이묘들이 앉는 제감간(帝鑑間)으로 옮겨졌다. 이로써 와키자카 가문은 도자마 다이묘에서 "원부대"(願譜代, 간청에 의해 후다이가 된 다이묘)가 되었다. 조쿄 원년(1684년), 야스마사는 적자로 삼은 5남 야스테루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하여 뇨스이(如水)라는 호를 사용했다.

2. 6. 은거와 죽음

조쿄 원년(1684년)에 가독을 다섯째 아들 야스테루에게 물려주고 은거했으며, 뇨스이(如水)라는 호를 사용했다. 겐로쿠 7년 4월 20일(1694년 5월 13일) 다쓰노번의 다쓰노에서 향년 62세로 사망했다.

3. 가계


  • 아버지: 홋타 마사모리 (1609년 ~ 1651년)
  • 어머니: 아구리 - 사카이 타다카츠 (오바마 번주)의 다섯째 딸
  • 양아버지: 와키자카 야스모토 (1584년 ~ 1654년)
  • 정실: 쇼센인 - 마쓰다이라 야스에이의 딸
  • * 장남: 와키자카 야스무라 (1656년 ~ 1706년)
  • 측실: 겟코인 - 이마이 소주로의 딸
  • * 다섯째 아들: 와키자카 야스테루 (1658년 ~ 1722년)
  • 생모 불명의 자녀
  • * 장녀: 세이 - 아리마 키요스미의 계실
  • * 차녀: 사무 - 가토 야스쓰네의 정실

참조

[1] 문서 後に安政の龍野移封の際には、母方の叔父に当たる[[若狭国]][[小浜藩]]主[[酒井忠直]]に預け替えとなった。
[2] 문서 揖東・揖西・三木の三郡。
[3] 문서 ただし、建物などは[[明治維新]]以降に再び破却され、現在見られる建物は[[昭和]]54年([[1979年]])になって順次再建されたものである。
[4] 문서 旧[[龍野市]]。
[5] 문서 後に許されている。
[6] 문서 친부는 [[노중]] [[홋타 마사모리]], 친동생은 [[다이로]] [[홋타 마사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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