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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오사무 (레슬링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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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와타나베 오사무는 1964년 도쿄 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로, 1960년대에 186연승을 기록하며 세계적인 레슬링 선수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전일본 레슬링 선수권 5회 우승, 세계 선수권 2회 우승을 달성했으며,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은퇴 후에는 덴츠에서 근무했으나, 이후 스포츠 용품 회사 임원, 이벤트 회사 운영 등 여러 사업을 시도했으나 어려움을 겪었다. 2004년에는 자수포장을 받았으며, 2022년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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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오사무 (레슬링 선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64년 올림픽의 와타나베 오사무
1964년 올림픽의 와타나베 오사무
이름와타나베 오사무
출생일1940년 10월 21일
출생지홋카이도 와사무
사망일2022년 10월 1일
사망지도쿄
신장1.60m
체중63kg
국적일본
출신 대학주오 대학
스포츠 경력
종목자유형 레슬링
은퇴
올림픽
1964 도쿄금메달 (63kg급)
세계 선수권 대회
1962 털리도금메달 (63kg급)
1963 소피아금메달 (63kg급)
아시안 게임
1962 자카르타금메달 (63kg급)

2. 경력 및 생애

홋카이도 출신으로 주오 대학에 진학하여 레슬링 선수로 활동했다. 대학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 1961년 소련·유럽 원정 전승을 시작으로 1964년 도쿄 올림픽까지 국내외 대회에서 패배하지 않고 186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으며, 이는 기네스 세계 기록에도 등재되었다.[5] 그의 압도적인 강함은 "애니멀", 기술의 정확성은 "스위스 시계"라고 불렸다[5].

1964년 도쿄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에서는 모든 경기에서 단 1점도 내주지 않고 전 경기 폴승으로 금메달을 획득하며 3년 연속 세계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5].

올림픽 이후 현역에서 은퇴하고 광고 회사 덴츠에 입사하여 20년간 근무했다[5]. 퇴사 후에는 스포츠 용품 회사 임원을 거쳐 직접 사업체를 운영했으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5]. 1987년에는 1988년 서울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24년 만에 선수로 복귀했으나 준준결승에서 패배하며 연승 기록이 189승에서 멈췄다[5]. 이후 재혼하여 60대까지 마스터스 레슬링 대회에 출전하며 2003년에는 세계 마스터스 선수권에서 우승하기도 했다[5]. 1992년1995년에는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2004년 스포츠 진흥 공로로 자수포장을 받았으며, 말년에는 전일본 마스터스 레슬링 연맹 이사로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5]. 2022년 10월 1일 자택에서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10][9].

2. 1. 어린 시절

석재 상인의 집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어린 시절에는 돌을 싣고 내리는 일을 도왔다고 한다[5]。아버지는 씨름 선수로도 활동했으며, 와타나베라는 이름은 '무운장구'에서 따온 것이지만, 와타나베는 어릴 적 과로로 류마티스를 앓아 병상에 누웠다。그 후 어머니가 두부 가게를 시작하여 콩을 맷돌로 가는 것이 와타나베의 일과가 되었고, 이로 인해 완력이 길러졌다고 한다。

씨름 선수를 동경했지만, 체격이 작아 체중별 레슬링에 주목하여 홋카이도 시베쓰 고등학교 시절에 시작했다。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비교적 가까운 마시케정 출신의 이케다 미쓰오가 금메달을 획득한 것도 자극이 되어 '세계 제일'을 목표로 삼게 되었다。레슬링부 지도 교사는 주오 대학 출신이었으며, 그 지도 메뉴를 그대로 가져왔다。훈련은 혹독했지만, 덕분에 주오 대학 진학 후의 연습은 고되지 않았다고 한다。

2. 2. 레슬링 입문

석재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에는 돌을 싣고 내리는 일을 도우며 자랐다.[5] 아버지는 씨름 선수였으며, 와타나베의 이름은 '무운장구(武運長久)'에서 따온 것이었다. 하지만 어릴 적 과로로 류마티스를 앓아 병상에 누웠고, 이후 어머니가 두부 가게를 시작하면서 콩을 맷돌로 가는 것이 와타나베의 일과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완력이 길러졌다고 한다.

원래 씨름 선수를 동경했지만 체격이 작아 체급별 경기가 있는 레슬링에 주목했고, 홋카이도 시베쓰 고등학교 시절 레슬링을 시작했다. 특히, 비교적 가까운 마시케정 출신의 이케다 미쓰오가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것에 자극받아 '세계 제일'을 목표로 삼게 되었다. 당시 레슬링부 지도 교사는 주오 대학 출신으로, 주오 대학의 훈련 메뉴를 그대로 도입했다. 훈련은 매우 혹독했지만, 덕분에 와타나베는 주오 대학 진학 후의 연습은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느꼈다고 회상했다.

1960년 주오 대학에 진학했으나, 1학년 때는 상급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경기에 거의 출전하지 못했다. 당시 감독은 1952년 헬싱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이시이 쇼하치였는데, 그는 통금 시간을 어기면 벌을 주는 엄격한 '스파르타식 지도'를 했다. 그러나 와타나베는 "자신이 할 일을 제대로 하기만 한다면 통금은 굳이 지키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고 훗날 밝혔다.

2. 3. 주오 대학 시절

1960년 주오 대학에 진학했다. 1학년 당시에는 상급생의 뒷바라지를 위해 경기에 거의 출전하지 못했다. 감독이자 1952년 헬싱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이시이 쇼하치는 통금 위반에 벌을 주는 '스파르타 지도'를 했지만, 와타나베는 "할 일을 제대로 하기만 하면 통금은 굳이 어겨도 괜찮지 않은가"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961년 소련·유럽 원정에서 전승을 거둔 것을 시작으로, 1962년에는 전미 오픈 선수권, 세계 선수권, 아시아 선수권을 제패했다. 1963년에는 일소 대항전, 세계 선수권, 맨체스터 국제 대회에서 우승했으며, 1964년 소련·동유럽 원정에서도 무패 행진을 이어갔다. 그의 압도적인 강함은 "애니멀", 기술의 정확성은 "스위스 시계"라고 불렸다[5]. "애니멀"이라는 별명은 1963년 특별 참가한 전미 선수권에서 6경기 연속 폴승(총 경기 시간 10분 이내)을 거두자, 미국의 매스컴에서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로) "와일드 애니멀"이라고 불린 것이 발단이라고 한다. "스위스 시계"는 1963년 세계 선수권 이후에 붙여졌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이시이 쇼하치 감독은 "취업은 나에게 맡기고, 지금은 레슬링에 전념하라"는 말을 듣고, 대학 졸업 후 취업하지 않은 채 출전했다. 일본 레슬링 협회 회장인 핫타 이치로로부터 "너는 지면 교수형이다"라는 압박을 받았지만, 와타나베는 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고 후년에 말했다.

도쿄 올림픽 본선에서 와타나베는 모든 경기에서 단 1점도 허용하지 않고[5] 전 경기 폴승으로 금메달을 획득하여, 세계 선수권과 합쳐 3년 연속 세계 제패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와타나베가 이 기간 동안 기록한 186연승기네스 세계 기록에도 게재되었다.

2. 4. 압도적인 연승 행진

1961년 소련·유럽 원정에서 전승을 거둔 것을 시작으로, 1962년에는 전미 오픈 선수권, 세계 선수권, 아시아 선수권에서 연달아 우승했다. 1963년에는 일소 대항전, 세계 선수권, 맨체스터 국제 대회에서 승리했으며, 1964년 소련·동유럽 원정에서도 무패 행진을 이어갔다.

와타나베 오사무 주요 연승 기록 (1961-1964)
연도주요 대회 및 원정결과
1961소련·유럽 원정전승
1962전미 오픈 선수권우승
세계 선수권우승
아시아 선수권우승
1963일소 대항전승리
세계 선수권우승
맨체스터 국제 대회우승
1964소련·동유럽 원정무패



그의 압도적인 강함은 "애니멀"로, 기술의 정확성은 "스위스 시계"로 비유되었다[5]. "애니멀"이라는 별명은 1963년 특별 참가한 전미 선수권에서 6경기를 모두 합쳐 10분 이내에 폴승으로 끝내자, 미국 언론이 그를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와일드 애니멀"이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했다. "스위스 시계"라는 별명은 1963년 세계 선수권 이후 그의 정교한 기술을 칭찬하며 붙여졌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는 주오 대학 레슬링부 감독이자 1952년 헬싱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이시이 쇼하치로부터 "취업은 나에게 맡기고, 지금은 레슬링에 전념하라"는 격려를 받아 대학 졸업 후에도 다른 직업을 갖지 않고 올림픽 준비에만 집중했다. 당시 일본 레슬링 협회 회장이던 핫타 이치로는 "너는 지면 교수형이다"라며 압박했지만, 와타나베 본인은 훗날 인터뷰에서 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도쿄 올림픽 본선에서 와타나베는 모든 경기에서 단 1점도 내주지 않고[5] 전 경기 폴승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로써 세계 선수권 우승을 포함하여 3년 연속 세계 정상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 기간 동안 그가 세운 186연승 기록은 기네스북에도 등재되었다.

이후 현역에서 은퇴했다가 1987년 전일본 사회인 레슬링 선수권에 1988년 서울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24년 만에 복귀했지만, 준준결승에서 패배하면서 그의 공식적인 연승 기록은 189승에서 멈추게 되었다[5].

2. 5. 1964년 도쿄 올림픽 금메달

1961년 소련·유럽 원정에서 전승을 거둔 것을 시작으로, 1962년에는 전미 오픈 선수권, 세계 레슬링 선수권 대회, 아시아 레슬링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 1963년에는 일본-소련 대항전, 세계 레슬링 선수권 대회, 맨체스터 국제 대회에서 승리했으며, 1964년 소련·동유럽 원정에서도 무패 행진을 이어갔다. 그의 압도적인 강함은 "애니멀"로, 기술의 정확성은 "스위스 시계"로 비유되었다[5]. "애니멀"이라는 별명은 1963년 특별 참가한 전미 선수권에서 6경기 연속 폴승(총 경기 시간 10분 이내)을 거두자, 미국 언론이 그를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와일드 애니멀"이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했다. "스위스 시계"라는 별명은 1963년 세계 선수권 이후에 붙여졌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당시 주오 대학 감독이자 1952년 헬싱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던 이시이 쇼하치는 와타나베에게 "취업은 나에게 맡기고, 지금은 레슬링에만 전념하라"고 조언했다. 이 덕분에 와타나베는 대학 졸업 후에도 취업하지 않고 올림픽 준비에 집중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 레슬링 협회 회장이었던 핫타 이치로는 "너는 지면 교수형이다"라며 압박했지만, 와타나베 본인은 훗날 인터뷰에서 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도쿄 올림픽 본선에서 와타나베는 모든 경기에서 단 1점도 내주지 않고[5] 전 경기 폴승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로써 그는 세계 선수권과 올림픽을 포함하여 3년 연속 세계 정상의 자리를 지키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 기간 동안 와타나베가 기록한 186연승기네스 세계 기록에도 등재되었다.

2. 6. 은퇴 이후

1964년 도쿄 올림픽 종료 후인 11월 1일, 와타나베는 덴츠에 입사했다. 처음에는 영업국 중앙부에서 요미우리 신문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5]。 일본 아마추어 레슬링 협회 회장 핫타 이치로는 와타나베에게 자위대에 입대하여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출전을 권유했지만, 주오 대학 시절 감독이었던 이시이 쇼하치는 "올림픽은 두 번 나갈 필요 없다. 끝나면 일을 하라"고 조언하며 자신이 근무하고 있었고, 학생 시절 아르바이트 인연도 있었던 덴츠 입사를 주선했다。 이후 와타나베는 신문 잡지국으로 부서를 옮겼다[5]

덴츠 입사와 함께 레슬링 선수 생활은 은퇴했지만, 격무로 인해 생활 리듬이 불안정해지자 스스로 절제할 계기를 만들기 위해 1971년 전일본 사회인 레슬링 선수권 대회 출전을 결심했다. 이 대회에서 현역 시절보다 한 체급 높은 라이트급으로 출전하여 우승했다。

덴츠에서 20년간 근무한 후, 회사 생활에 염증을 느껴 스포츠 용품 회사의 임원직 제안을 받고 퇴사했다[5]。 그러나 이 회사의 실적이 부진했고, 이후 직접 이벤트 회사를 설립했으나 이 역시 성공하지 못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가정을 잃기도 했다[5]

재기를 위해 1987년 전일본 사회인 레슬링 선수권에 24년 만에 다시 출전하여 1988년 서울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준준결승에서 패배하며 그의 공식 연승 기록은 '189연승'에서 멈추게 되었다[5]。 대회 출전 전 병원 검사에서 경추 손상이 발견되었고, 의사로부터 "무리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경고를 받았으나,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경기에 임했다고 한다。

이후 재혼했으며, 60대까지 마스터스 레슬링 경기에 꾸준히 출전했다[5]2003년에는 마스터스 레슬링 세계 선수권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이 시기 정치에도 도전하여, 1992년 제16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는 나카마쓰 요시로가 창당한 '발명 정치'의 공천으로, 1995년 제17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는 상쾌 신당의 공천으로 각각 비례구에 출마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2004년에는 '스포츠 진흥' 분야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자수포장을 받았다。 스모다이호 고키와 동시에 수상하게 된 것을 매우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2010년에는 홋카이도 도마코마이 시장 선거 출마를 표명했으나[6], 이후 출마 의사를 철회했다[7]

2013년 2월, 레슬링이 2020년 도쿄 올림픽 핵심 종목에서 제외될 위기에 처하자, 언론 인터뷰를 통해 "현역 시절에는 정말 목숨을 걸었다. 올림픽 종목에서 제외된다면 목숨을 빼앗기는 기분"이라며 레슬링의 올림픽 종목 잔류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8]

2017년 시점에는 전일본 마스터스 레슬링 연맹 이사를 맡으며 후배 선수들을 지도하는 활동을 이어갔다[5]

2022년 10월 1일, 심장 발작으로 도쿄도 내 자택에서 사망했다[10][9]。 향년 81세. 그의 부고는 약 6개월 뒤인 2023년 4월 15일, 일본 레슬링 협회 관계자들을 통해 언론에 알려졌다[10]

2. 7. 재기와 도전

1964년 도쿄 올림픽 종료 후 11월 1일, 와타나베는 덴츠에 입사하여 처음에는 영업국 중앙부에서 요미우리 신문을 담당했다. 일본 아마추어 레슬링 협회 회장 핫타 이치로는 그에게 자위대에 들어가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을 목표로 하라고 권유했지만, 주오 대학 시절 감독이었던 이시이 쇼하치는 "올림픽은 두 번이나 할 필요는 없다. 끝나면, 나머지는 일을 하라"고 조언했다. 이시이가 근무하던 덴츠에 그의 인연으로 입사하게 되었으며, 이후 신문 잡지국에 배속되었다[5]

취업과 동시에 레슬링 선수 생활은 은퇴했지만, 격무로 인한 불안정한 생활이 계속되자 절제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1971년 전일본 사회인 레슬링 선수권 대회 출전을 결심했다. 그는 현역 시절보다 한 체급 위인 라이트급으로 출전하여 우승을 차지했다.

덴츠에서 20년간 근무했지만 회사 생활에 염증을 느껴 스포츠 용품 회사 임원으로 초빙된 것을 계기로 퇴사했다[5]。그러나 이 회사의 실적이 부진했고, 이후 직접 이벤트 회사를 설립했지만 이마저도 잘 풀리지 않아 결국 자택과 가정(아내와의 사이에 두 딸)을 잃게 되었다[5]

재기를 위해 1987년 전일본 사회인 레슬링 선수권에 24년 만에 다시 출전하여 1988년 서울 올림픽 출전을 노렸다. 그러나 준준결승에서 패배하며 그의 연승 기록은 "189"에서 멈추게 되었다[5]。대회 출전 전 병원 검사에서 경추 손상이 발견되었고, 의사로부터 "무리하면 당신은 죽을 거예요"라는 경고를 받았지만, 와타나베는 "죽어도 상관없다"는 각오로 경기에 임했다고 한다.

이후 재혼하였고, 60대까지 마스터스 경기에 출전하며[5] 2003년에는 마스터스 레슬링 세계 선수권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정치에도 도전하여, 1992년 제16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는 나카마쓰 요시로가 결성한 "발명 정치"의 공천으로, 1995년 제17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는 상쾌 신당의 공천으로 각각 비례구에서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연도선거정당선거구결과
1992년제16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発明政治|하쓰메이 세이지일본어비례구낙선
1995년제17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さわやか新党|사와야카 신토일본어비례구낙선



2004년에는 "스포츠 진흥" 분야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자수포장을 수여받았다. 오즈모다이호 고키와 동시에 수여받은 것을 매우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2010년에는 도마코마이 시장 선거 출마를 표명했으나[6], 이후 출마를 포기했다[7]

2013년 2월, 레슬링이 2020년 도쿄 올림픽의 핵심 종목에서 제외될 후보가 되자, 와타나베는 언론 인터뷰에서 "현역 시절에는 정말 목숨을 걸었다. 올림픽 종목에서 제외되면, 목숨을 빼앗기는 것 같은 기분이다"라고 말하며 종목 존속을 위해 노력할 의지를 밝혔다[8]

2017년 시점에서는 전일본 마스터스 레슬링 연맹 이사를 맡으며 후배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었다[5]

2022년 10월 1일, 심장 발작으로 도쿄도 내 자택에서 향년 81세로 사망했다[10][9]。 그의 부고는 2023년 4월 15일, 일본 레슬링 협회 관계자들을 통해 언론에 알려졌다[10]

2. 8. 말년과 사망

20년간 근무했던 덴츠에서의 생활에 염증을 느껴 퇴사하고, 스포츠 용품 회사 임원으로 초빙되었으나 회사의 실적이 부진했다[5]. 이후 직접 이벤트 회사를 설립했지만 이마저도 잘 풀리지 않아 자택과 가정을 잃는 어려움을 겪었다[5].

재기를 위해 1987년 전일본 사회인 레슬링 선수권에 24년 만에 출전하여 1988년 서울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준준결승에서 패배하며 그의 공식 연승 기록은 189승에서 멈추게 되었다[5]. 출전 전 병원 검사에서 경추 손상이 발견되어 의사로부터 "무리하면 당신은 죽을 거예요"라는 말을 들었지만, "죽어도 상관없다"는 각오로 경기에 임했다고 한다[5].

이후 재혼하였으며, 60대가 되어서도 마스터스 경기에 꾸준히 출전했다[5]. 2003년에는 마스터스 레슬링 세계 선수권에서 우승하기도 했다[5].

정치에도 도전하여 1992년 제16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는 나카마쓰 요시로가 결성한 '발명 정치'의 공천으로, 1995년 제17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는 상쾌 신당의 공천으로 각각 비례구에 출마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2004년에는 '스포츠 진흥' 분야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자수포장을 수훈했다. 당시 오즈모다이호 고키와 함께 수상한 것을 매우 기뻐했다고 전해진다[5].

2010년에는 도마코마이 시장 선거 출마를 표명했으나[6], 이후 출마를 포기했다[7].

2013년 2월, 레슬링이 2020년 도쿄 올림픽의 핵심 종목에서 제외될 위기에 처하자, "현역 시절에는 정말 목숨을 걸었다. 올림픽 종목에서 제외되면, 목숨을 빼앗기는 것 같은 기분이다"라고 심경을 밝히며 종목 존속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8].

2017년 시점에는 전일본 마스터스 레슬링 연맹 이사를 맡아 후배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었다[5].

2022년 10월 1일, 심장 발작으로 도쿄도 내 자택에서 사망했다[10][9]. 그의 부고는 사망 약 6개월 후인 2023년 4월 15일 일본 레슬링 협회 관계자들을 통해 언론에 알려졌다[10].

3. '애니멀' 관련 일화

와타나베의 별명 '애니멀'은 그의 상징과도 같았으며, 이는 대중문화와 후배 레슬러에게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으로 만화 및 애니메이션 애니멀 1의 제목과 주인공 설정에 영감을 주었고[11], 프로레슬러 애니멀 하마구치에게 직접 별명을 물려주기도 했다.

3. 1. 만화 및 애니메이션 '애니멀 1'

1968년 쇼가쿠칸주간 소년 선데이에 연재된 가와사키 노보루의 아마추어 레슬링 만화 『애니멀 1』은 무시 프로덕션에서 제작하여 후지 TV에서 방영된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제목 '애니멀'은 와타나베의 별명에서 따왔으며, 주인공 역시 와타나베를 모델로 삼았다.[11]

1970년에는 국제 프로 레슬링 사장 요시하라 이사오와 일본 레슬링 협회 회장 핫타 이치로의 요청으로, 당시 국제 프로 레슬링 소속의 젊은 레슬러였던 하마구치 헤이고에게 자신의 별명이었던 "애니멀"을 물려주어 링네임을 애니멀 하마구치로 지어주었다.

3. 2. 애니멀 하마구치

1968년 쇼가쿠칸주간 소년 선데이에 연재된 가와사키 노보루의 아마추어 레슬링 만화이자, 무시 프로덕션이 제작하여 후지 TV에서 방영된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애니멀 1』은 와타나베의 별명이었던 "애니멀"에서 제목을 따왔으며, 주인공 역시 와타나베를 모델로 삼았다.[11]

1970년, 와타나베는 국제 프로 레슬링 사장 요시하라 이사오와 일본 레슬링 협회 회장 핫타 이치로의 부탁을 받았다. 이에 따라 국제 프로 레슬링 소속의 젊은 레슬러였던 하마구치 헤이고에게 자신의 별명 "애니멀"을 물려주어, 링네임을 애니멀 하마구치로 짓게 했다.

4. 주요 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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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연도성적
전일본 레슬링 선수권 대회1960년우승
1961년우승
1962년우승
1963년우승
1964년우승
레슬링 세계 선수권 대회1962년우승
1963년우승
하계 올림픽1964년우승


참조

[1] 웹사이트 FLAWLESS WATANABE SECURES FEATHERWEIGHT WRESTLING GOLD https://www.olympic.[...] olympic.org 2019-10-12
[2] 뉴스 渡辺長武さんが死去、心臓発作で 64年東京五輪金メダリスト レスリング協会発表 https://www.sankei.c[...]
[3] 웹사이트 レスリングのオリンピック日本人男子メダリストを紹介、偉大な功績を残した3選手 https://spaia.jp/col[...] 【SPAIA】スパイア 2020-05-04
[4] 웹사이트 レスリング「アニマル」渡辺長武さん死因は心臓発作 昨年10月に死去 遺族が協会へ情報提供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23-05-11
[5] 뉴스 東京2020年への伝言(6) 64年レスリング金 渡辺長武さん 毎日新聞 2017-01-06
[6] 뉴스 元金メダリストが出馬表明 苫小牧市長選 http://www.tomamin.c[...] 2017-01-07
[7] 뉴스 渡辺氏が出馬を断念 苫小牧市長選 http://www.tomamin.c[...] 2017-01-07
[8] 뉴스 レスリング存続へ「結集を」…東京で金の渡辺氏 http://www.yomiuri.c[...] 読売新聞 2013-02-17
[9] 뉴스 渡辺長武さんが死去、心臓発作で 64年東京五輪金メダリスト レスリング協会発表 https://www.sankei.c[...] 2023-05-11
[10] 뉴스 レスリングの渡辺長武さん死去、81歳…64年東京五輪「金」・「アニマル」の異名 https://www.yomiuri.[...] 2023-04-15
[11] 웹사이트 アニマル1 http://www.mushi-pro[...] 虫プロダクション([[虫プロダクション#虫プロダクション株式会社(新虫プロ)|新虫プロ]]) 2021-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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