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호 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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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이호 고키는 1940년 사할린에서 태어난 일본의 스모 선수로, 제48대 요코즈나였다. 그는 1961년부터 1971년 은퇴할 때까지 요코즈나로 활동하며 통산 32회 우승을 기록, "쇼와 시대의 다이요코즈나"로 불렸다. 1960년대에는 '거인·대붕·계란말이'라는 유행어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2013년 심실빈맥으로 사망한 후 국민영예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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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호 고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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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본명 | 나야 고키 (納谷 幸喜), 이반 마르키야노비치 보리슈코 (Іван Маркіянович Боришко) |
출생일 | 1940년 5월 29일 |
출생지 | 가라후토 시스카 (현재의 포로나이스크) |
사망일 | 2013년 1월 19일 |
사망지 | 도쿄 신주쿠 |
신장 | 187 cm |
체중 | 153 kg |
소속 헤야 | 니쇼노세키 헤야 |
최고 계급 | 요코즈나 (1961년 9월) |
은퇴일 | 1971년 5월 |
시코나 | 다이호 (大鵬) |
총 전적 | 872승 181패 136휴 |
마쿠우치 우승 | 32회 |
주료 우승 | 1회 |
산단메 우승 | 1회 |
삼상 | 기량상 1회, 감투상 2회 |
금성 | 1개 (아사시오 3세에게 1개) |
최종 갱신일 | 2020년 6월 |
일본어 이름 | 大鵬 幸喜 (たいほう こうき) |
일본어 본명 | 納谷 幸喜 (なや こうき) |
우크라이나어 이름 | Іван Маркіянович Боришко |
수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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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 정보 | |
별칭 | 컴퓨터, 북해의 흰곰, 지지 않는 ○○ |
출신지 | 홋카이도가와카미군데시카가정 (출생지는 가라후토시키카군시키카정) |
신체질량지수 | 43.75 |
특기 | 왼쪽 샅바, 요리, 스쿠이나게, 우와테나게 |
첫 스모 데뷔 | 1956년 9월 장소 |
쥬료 데뷔 | 1959년 5월 장소 |
마쿠우치 데뷔 | 1960년 1월 장소 |
취미 | 야구, 마작 (현역 시절) |
전적 | |
생애 전적 | 872승 182패 136휴 (87개 장소) |
마쿠우치 전적 | 746승 144패 136휴 (69개 장소) |
2. 생애
다이호 고키는 가라후토청 시스카정(현재의 러시아 사할린주 포로나이스크)에서 우크라이나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7] 그의 아버지는 러시아 혁명 이후 사할린섬으로 망명한 우크라이나인 카자크 기병대 장교 출신인 마르키얀 보리슈코(Маркіян Боришкоuk)였다. 1945년 소련이 사할린섬을 점령한 이후 가족들과 함께 홋카이도로 이주했다.[12]
1956년부터 스모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1960년 오제키로 승격되었다. 1961년부터 1971년 은퇴할 때까지 제48대 요코즈나를 지냈다. 스모 대회 통산 32회 우승 기록을 세우며 '쇼와 시대(昭和)의 다이요코즈나'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마쿠우치 32회, 주료 1회, 산단메 1회 우승 기록을 세웠다. 1960년대 일본에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계란말이와 함께 어린이가 좋아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96] 1970년에는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을 수상했다.
은퇴 후에는 大鵬部屋(다이호베야)를 창립하여 巨砲丈士(쿄호죠시), 嗣子鵬慶昌(시시호호케이쇼) 등을 육성했다. 1976년 35세의 젊은 나이로 임원 대우 및 심판부 부부장에 취임했지만, 1977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좌반신 마비 등 후유증이 남았다.[75] 1980년 이사에 취임하여 지방 장소(나고야 장소 담당) 부장, 相撲教習所(스모 교습소) 소장 등을 역임하고, 8기 재임 후 1996년 임원 대우로 물러났다.[78] 2000년에는 환갑 도이리를 선보였다.
2001년 사할린주에서 아버지 마르칸 볼리시코[40]의 생애가 밝혀지고, 사할린주의 일본 연구자 주선으로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시에 대호 기념관이 건설되었다. 2002년 북오세티아 공화국 출신 볼라조프 형제를 일본에 초청, 형 소스란을 露鵬幸生(로호 코키)로 자신의 훈련장에 입문시켰다. 2005년 65세가 되어 정년 퇴직하고, 스모 박물관 관장에 취임했다. 2008년 11월 16일, 건강 문제로 스모 박물관 관장을 사임했다.[79]
2009년 10월 27일, 스모계 최초로 2009년도 문화공로자로 선정되었다. 1982년 "세계 인도주의자상"을 수상했다.[77]
2013년 1월 19일 도쿄도 신주쿠에 있는 병원에서 심실빈맥으로 인해 향년 72세로 사망했다. 일본 정부는 2013년 2월 25일 국민영예상을 추서했다.
2. 1. 어린 시절
가라후토청 시스카정(현재의 러시아 사할린주 포로나이스크)에서 우크라이나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7] 그의 아버지는 러시아 혁명 이후에 사할린섬으로 망명한 우크라이나인 카자크 기병대 장교 출신인 마르키얀 보리슈코(Маркіян Боришкоuk)였다. 1945년 소련이 사할린섬을 점령한 이후 가족들과 함께 홋카이도로 이주했다.[12]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에 대한 미군의 원폭 투하 이후 소련군이 남사할린에 침공하자, 어머니와 함께 마지막 귀환선이었던 오가사와라마루(小笠原丸)를 타고 홋카이도로 귀환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오타루로 향할 예정이었으나, 어머니가 배멀미와 피로로 인해 왓카나이에서 중도 하선하였다.[42] 오가사와라마루는 그 후 루모에 앞바다에서 소련 잠수함 L-12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였지만, 다이호 모자는 그 전에 하선하였기에 가까스로 화를 면하였다(삼선순난사건(三船殉難事件)).[43]
홋카이도에서의 생활은 모자 가정이었기에 매우 가난하였고, 어머니의 재혼으로 스미요시(住吉) 성으로 개명하였다. 재혼 상대가 교사였기 때문에 매년 학교를 옮겨 다녔고, 한동안 홋카이도 각지를 전전하였다. 극심한 가난 때문에 다이호 자신이 생계를 돕기 위해 된장을 팔러 다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재혼 상대와는 다이호가 10살 때 이혼하였기 때문에, 다이호는 나야(納谷) 성으로 되돌아갔다. 중학교 졸업 후에는 홋카이도 뎃시쿠 고등학교 정시제(定時制)에 다니면서 임야청(林野庁) 관련 일을 하고 있었지만, 1956년에 사가노하나 카츠미(니쇼노세키) 일행이 훈코후쵸에 순회 공연을 왔을 때 소개되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입문하였다.[44]
소년 시절을 보낸 홋카이도 데시쿠베촌 가와유온천의 온천거리에는, 1984년에 개관한 다이호 스모 기념관이 있으며, 다이호가 실제로 사용했던 화장샅바와 우승 트로피 등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2. 2. 스모 선수 시절
가라후토청 시스카정(현재의 러시아 사할린주 포로나이스크)에서 태어난 다이호 고키는 1956년부터 스모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6] 본명은 나야 고키(納谷幸喜)였으며, 1959년 5월 주료(十両)로 승격하면서 "다이호(大鵬)"라는 시코나(四股名, 스모 선수 이름)를 받았다. 이는 "큰 봉황"을 의미한다.[48]1960년 1월 마쿠우치(幕内, 스모 1부 리그)에 데뷔하여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데뷔 첫 대회에서 11연승을 기록하고, 12승 3패로 준우승과 함께 간토쇼(敢闘賞, 감투상)를 수상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세키와케(関脇) 계급에서 첫 우승을 차지하고, 오제키(大関)로 승격했다.[52]
1961년 9월, 오제키로서 두 번 연속 우승(통산 2, 3번째 우승)을 달성한 후, 만 21세 3개월의 나이로 제48대 요코즈나로 승진했다. 이는 당시 최연소 요코즈나 기록이었다.[55][56] 가시와도 쓰요시와 함께 요코즈나로 승진하여, 두 사람의 라이벌 관계는 "하쿠호(柏鵬) 시대"로 불리며 스모계를 이끌었다.[14]
요코즈나 시절, 다이호는 통산 32회 우승, 6회 연속 우승 2회, 전승 우승 8회 등 뛰어난 기록을 남겼다. 특히 1968년 9월부터 1969년 3월까지 기록한 45연승은 큰 화제를 모았다.[17] 1971년 1월, 다마노우미와의 플레이오프 끝에 마지막 우승을 차지하고, 같은 해 5월 은퇴했다.[12]
다이호는 "쇼와 시대(昭和)의 다이요코즈나(大横綱)"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요미우리 자이언츠(거인), 계란말이와 함께 1960년대 일본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꼽히기도 했다.[96]
다이호의 스모 스타일은 유연한 몸과 깊은 가슴을 바탕으로, 상대의 공격을 막고 자신의 유리한 자세로 만들어 승리하는 방식이었다. 특히 왼손을 깊숙이 넣어 던지는 스쿠이나게(掬い投げ, 떠서 던지기)는 그의 주특기였다.[101]
다음은 다이호 고키의 스모 선수 시절 주요 기록을 정리한 표이다.
기록 종류 | 내용 |
---|---|
마쿠우치 우승 | 32회 |
주료 우승 | 1회 |
산단메 우승 | 1회 |
연간 최다승 | 1960년 (74승 16패) |
기타 | 간토쇼(감투상) 2회, 긴보시(금성) 1개 |
2. 3. 은퇴 이후
다이호 고키는 1971년 12월 기존의 헤야에서 독립하여 태호(大鵬) 훈련장을 설립했다.[2] 1977년 2월, 36세의 나이에 뇌졸중을 겪었고, 이후 건강 문제로 일본 스모협회 회장직에 오르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2] 그는 왼쪽 신체의 움직임을 회복하기 위해 광범위한 재활 치료를 받았다.[15] 선수 시절의 성공을 지도자로서 재현하지는 못했지만, 1979년부터 1992년까지 78개의 연속된 최상위부 토너먼트에 출전한 오즈츠(大津)라는 세키와케를 배출했다. 2000년 환갑을 맞아 칸레키 도효이리 의식을 가졌지만, 제한된 이동성 때문에 완벽하게 수행할 수 없었다. 36세에 뇌졸중을 앓았기 때문에 원래는 의식 자체를 치르지 않고 기념사진만 찍을 예정이었으나, 왼손 손가락으로 배의 살을 세게 꼬집어 운류 입장 방식을 완료할 수 있었다.[20] 2002년 5월 태호는 러시아 출신 레슬러 로호(千代大海)를 영입했다. 2003년 2월 사위이자 전 세키와케인 貴闘力에게 훈련장 운영권을 넘겼다.2005년 5월 65세의 의무 퇴직 연령에 도달하여 료고쿠 국기관의 스모 박물관 관장이 되었다.[21] 그는 자신의 옛 훈련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2008년 5월 요코즈나 하쿠호를 초청하여 훈련을 받게 했다.[22][23]
2004년 일본 정부로부터 자수포장을 받았다.[24] 2009년 11월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문화공로자상(15명 중 한 명)을 수상하여 이 상을 받은 최초의 스모 선수가 되었다.[25]
1977년 36세에 뇌졸중을 앓은 후, 생애 마지막 단계에서 휠체어를 사용했다.[26][27] 2013년 1월 19일 도쿄 병원에서 72세의 나이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28] 그의 사망은 일본 스모 협회에 의해 발표되었다.[29][30] 닛칸 스포츠(日刊スポーツ)는 부고 기사에서 그를 "역사상 가장 강력한 요코즈나"라고 불렀다.[27][31] 2013년 2월 그는 사후 두 번째로 스모 선수에게 수여되는 국민영예상을 수상했고, 스가 요시히데는 그를 "국민 영웅"이라고 불렀다.[32] 2013년 3월 우승을 차지한 하쿠호는 관중들에게 일어서서 태호의 명복을 비는 묵념을 하도록 했다.[33] 그는 태호가 자신에게 꾸준히 조언을 해주었고, 기록은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밝혔다.[33] 하쿠호는 태호의 사망 2년 후인 2015년 1월 33번째 우승을 차지하며 태호의 역대 최다 우승 기록을 뛰어넘었다.
은퇴 후에는 大鵬部屋(다이호베야)를 창립하여 巨砲丈士(쿄호죠시)·嗣子鵬慶昌(시시호호케이쇼) 등을 육성했다. 정년 후에는 장인 貴闘力忠茂(키토리키 타다시게)(二子山部屋(후타고야마베야) 소속 시절)에게 훈련장을 물려주었지만, 훈련장 이름은 “대호”가 일대 연로였기 때문에 원래 소유하고 있던 “大嶽(다이가쿠)” 훈련장으로 했다. 그러나 키토리키는 도박 문제로 2010년에 해고되어, 그 후에는 대호의 직제자인 大竜忠博(다이류 타다히로)(최고위는 십량)가 훈련장을 잇게 되었다.
1976년에 35세의 젊은 나이로 임원 대우·심판부 부부장에 취임했지만, 1977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좌반신 마비 등 후유증이 남아 이사장 등 중요 직책에 취임할 전망이 없어졌다.[75] 은퇴 후 연로 이름을 '''大鵬 翔己(다이호 쇼키)'''로 하고 있었지만, 이 병을 앓은 이후 현역 시절의 “대호 코키”로 돌아왔다. 불굴의 정신과 아내·방자의 헌신 덕분에 재활[76]을 거듭하면서 회복하여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하여,[77] 1980년에는 이사에 취임했다. 지방 장소(나고야 장소 담당) 부장, 相撲教習所(스모 교습소) 소장 등을 역임하고, 8기를 역임한 후 1996년에 임원 대우로 물러났다.[78] 「자이언츠, 대호, 계란말이」라고 불린 시대의 용자인 長嶋茂雄(나가시마 시게오)가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에는 특별한 감정이 솟았다고 한다. 2000년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쇼와의 대요코즈나」라고 평가되는 北の湖敏満(키타노우미 토시미츠)(다치모치)와 九重貢(쿠쥬우 미츠구)(전·치요노후지 미츠구, 로우바라이)의 2명을 따라 환갑 도이리를 선보였다. 뇌졸중의 후유증으로 인해 시코가 밟을 수 없었기 때문에, 도이리 자체는 할 수 없고, 붉은 끈을 묶고 도이조 위에서 운룡형의 세리오가리의 준비를 취하는 것과, 도이조 중앙에 서서 카시와데를 치는 것(1회로는 잘 되지 않았다)이라는 일부 동작만을 선보였다.
2001년에는 사할린주에서 아버지 마르칸 볼리시코[40]의 생애가 밝혀지고, 사할린주의 일본 연구자의 주선으로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시에 대호 기념관이 건설되었다. 대호 자신도 하르키우에서 스모 대회를 기획하고 있으며, 러시아를 사이에 두고 일본과 우크라이나의 국제 교류의 주역으로 주목받고 있다. 2002년에는 북오세티아 공화국 출신 볼라조프 형제를 일본에 초청하여, 형 소스란을 「露鵬幸生(로호 코키)」으로 자신의 훈련장에 입문시켰다(동생 바트라즈는 「白露山佑太(시라츠유야마 유타)」으로 二十山部屋(니지야마베야)에 입문시켜, 후에 北の湖部屋(키타노우미베야)로 전적). 대호는 소스란의 시코나에 자신의 「호」, 이름에도 본명의 「코키」의 글자를 넣었고, 기대에 부응한 로호는 2006년 3월 장소에서 소결까지 승진했지만, 2008년에 도핑 검사에서 대마의 양성 반응이 나온 것으로 동생과 함께 일본 스모 협회에서 해고되었다.
2005년에 65세가 되어 정년 퇴직하고, 9년 가까이 공석이었던 스모 박물관 관장에 취임했다. 협회 재적 중에는 이사장이나 집행부 재임 경험이 없고(1기만 심판부 부부장을 역임했지만 뇌졸중으로 퇴임하고, 지방 장소 부장의 직책이 길었다), 먼저 정년 퇴직하고 있던 이사장 경험자 사다야마 신마츠와 호우야마 카츠오가 건재함에도 관장직에 취임한 것은 이례적인 발탁이라고 한다.
2008년 11월 16일자로, 협회의 이사회에서 건강 불량을 이유로 스모 박물관 관장을 사임하는 것이 승인되었다.[79] 같은 해 12월 26일, 협회의 일 마무리 날에 스모 박물관 관장직을 물러났지만, 「가끔 국기관에 가서 (스모를) 천천히 보고 싶다」라고 스모에 대한 생각은 변함없다고 말했다.[80]
2009년 10월 27일, 스모계로부터 처음으로 2009년도 문화공로자로 선출되었다. 대호는 기자 회견에서 「나 혼자만의 힘이 아니고, 여러분이 힘을 보태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큰 상을 받게 되어 정말로 감사한 일입니다」라고 말했다.[81] 그 마음은 이소노세키 일문의 분열, 열세 상태의 책임을 느끼고 있으며, 문화공로자 선출 후에는 8대 이소노세키와 6대 이소노세키의 무덤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77]
- 1982년 "세계 인도주의자상"을 수상했다.[77]
- 대호(大鵬)베야 창설 초기, 벤츠로 창코 재료를 구입했다.[77]
- 로호의 대마 문제에서는 북의호 이사장과 대응책을 협의했다.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후계자이자 사위인 다이가쿠가 책임을 지고 일본 스모협회 위원에서 평년기로 2계급 강등 처분을 받았고, 북의호(北の湖) 이사장도 이사장직에서 사퇴했다. 대호 자신도 그 전후로 스모 박물관 관장직을 사퇴했다.
- 한때 제68대 요코즈나 아사쇼류의 좋은 조언자로 알려져, 아사쇼류를 엄격하면서도 따뜻하게 지켜보았다. 그러나 아사쇼류는 2005년 7개 대회 연속 우승, 연간 6개 대회 완전 제패, 연간 최다 승리 갱신(84승)이라는 신기록을 달성한 무렵부터 대호에게 상담을 오지 않았다고 한다.[120] 결국 아사쇼류는 반복되는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는 형태로 2010년 1월 장소 이후 현역 은퇴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대호는 은퇴 기자회견을 보고 "기자회견에서 사과 없이 분하다"며 분개했다.[120]
- * 아사쇼류의 현역 시절, 강연에서 역사의 태도와 매너에 대한 질문에 아사쇼류에게 전화하자 "아, 그런 것은 (현역을) 그만둘 무렵이 되면 능숙해집니다"라고 대답했다.[120] 이것이 계기가 되어 대호도 아사쇼류를 버렸다고 한다.[121]
- 2004년, 대호(大鵬)베야는 셋째 딸의 남편인 키토우리키(16대 다이가쿠)가 계승하여 다이가쿠(大嶽)베야로 개칭했지만, 방 운영은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주 부딪혔다고 한다.[122]
- 키노하나가 니쇼노세키 일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 출마하여 당선된 "키노 난"에서는 큰 역할을 했다. "니쇼노세키 일문이 (키노하나 장로를) 파문한다고 했다. 내 말로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자신의 일만 생각해서 하는 것은 안 된다. 협회의 미래라든가 전체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며 출마에 "GO 사인"을 냈다. 이사 선거의 밤, 키노하나는 자신의 그룹 장로들을 이끌고 대호의 집을 방문하여 당선을 보고했다.[123]
- 사망할 때까지 닛칸 스포츠의 스모 담당 평론가를 역임하며, 본 장소 개최 중(홀수째 날)에는 "'''토평'''"을 연재했다 (짝수째 날은 다카사고 우라 고로의 "대짱 대분석").
- 니쇼노세키 베야 소멸 문제에서는 "시대의 흐름으로 어쩔 수 없겠지만, 다시 한번 방 재흥을 바란다"는 담화를 발표했다.[124]
3. 주요 기록
다이호 고키는 스모 선수로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다음은 그의 주요 기록을 정리한 것이다.
- 통산 성적: 872승 182패 136휴 (승률 .827)
- 마쿠우치 성적: 746승 144패 136휴 (마쿠우치 승수는 역대 5위, 승률 .838)
- 요코즈나 성적: 622승 103패 136휴 (요코즈나 승수는 역대 4위, 승률 .858)
- 오제키 성적: 58승 17패 (승률 .773)
- 통산 재위: 87개소
- 마쿠우치 재위: 69개소
- 요코즈나 재위: 58개소 (역대 4위)
- 오제키 재위: 5개소
- 산야쿠 재위: 3개소 (세키와케 2개소, 고무스비 1개소)
- 요코즈나전 승리: 43승 (와카노하나 간지 (초대)와 공동 역대 1위, 승률도 6할을 넘는다)
- 연간 최다승: 6회 (하쿠호 쇼의 10회, 기타노우미 도시미쓰의 7회에 이어 역대 3위. 1960년~1964년 5년 연속 최다승도 하쿠호 쇼의 9년 연속에 이어 역대 2위)
- 1960년 (66승 24패), 1961년 (71승 19패), 1962년 (77승 13패), 1963년 (81승 9패), 1964년 (69승 11패 10휴), 1967년 (70승 6패 14휴·가시와도와 동수)
- 연속 6개소 승리: 84승 (1966년 3월 장소~1967년 1월 장소, 1966년 5월 장소~1967년 3월 장소, 1966년 7월 장소~1967년 5월 장소)
- 통산 (마쿠우치) 연속 가치코시 기록: 25개소 (역대 10위, 1960년 5월 장소~1964년 5월 장소)
- 마쿠우치 연속 두 자릿수 승리 기록: 25개소 (하쿠호 쇼 51개소·기타노우미 37개소에 이어 역대 3위, 1960년 5월 장소~1964년 5월 장소)
- 마쿠우치 연속 12승 이상 승리: 11개소 (역대 5위, 1962년 7월 장소~1964년 3월 장소)

- 마쿠우치 최고 우승 32회는 하쿠호 쇼에 이어 역대 2위 기록이지만, 은퇴 당시에는 최다 우승 기록이었다. 특히 입문(1960년)부터 은퇴(1971년)까지 12년간 매년 최소 1회 우승한 기록은 "가장 깨기 어려운 기록"이라고 불렸다 (현재는 하쿠호 쇼의 16년 연속에 이어 역대 2위이지만 하쿠호 쇼도 "입문년 우승"은 달성하지 못했다).
- 21세 3개월의 나이로 요코즈나에 승진하여 역사상 최연소 요코즈나가 되었으나, 이 기록은 이후 기타노우미에게 깨졌다. 신예 요코즈나로서는 이례적으로 승진 후 첫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14]
- 가시와도와 동시에 승진했고, 두 사람의 라이벌 관계는 "하쿠호(柏鵬) 시대"라 불리는 시대를 만들었다.[14] "하쿠호 시대"는 고도경제성장 시대와 맞물려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 1968년 9월 대회에서 45연승을 기록했으나,[17] 1969년 3월 심판의 잘못된 판정으로 인해 연승이 깨졌다. 이 사건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켜 이후 비디오 판독이 도입되었다.[18]
- 1971년 5월 대회 5일째 다카노하나에게 패한 뒤 은퇴를 발표했다.[12]
- 뛰어난 업적을 인정받아 일본 스모 협회의 회원으로 초청받아(그리고 수락하여) 전직 리키시 중 최초로 회원이 되었다.[19]
상대 전적은 다음과 같다.
상대 | 승 | 패 | 상대 | 승 | 패 | 상대 | 승 | 패 | 상대 | 승 | 패 |
---|---|---|---|---|---|---|---|---|---|---|---|
아오노사토 | 14 | 2 | 아사시오 | 4 | 4 | 아사세가와 | 7 | 1 | 아사토시 | 2 | 0 |
아마가제 | 4 | 0 | 이즈미요 | 1 | 0 | 이치노야 | 1 | 0 | 이와카제 | 17 | 2 |
우타가와 | 3 | 0 | 오이데야마 | 1 | 0 | 다이코 | 7 | 1 | 고지로노하나 | 19 | 1 |
우미노야마 | 21 | 4 | 가이류잔 | 16 | 4 | 가시와도 | 21** | 16 | 와코 | 1 | 0 |
가네노하나 | 7 | 1 | 기타노요 | 7 | 1 | 기타노후지 | 26 | 5 | 기타하야마 | 24 | 11 |
기미니시키 | 1 | 0 | 세이코쿠 | 29 | 4(1) | 구로히메야마 | 2 | 1 | 고테쓰잔 | 7 | 1 |
고토자쿠라 | 22 | 4 | 사다노야마 | 27(1)* | 5(1)* | 사와히카루 | 1 | 0 | 시오니시키 | 4 | 0 |
시부야마 | 2 | 0 | 다이고 | 9 | 0 | 다이주 | 3 | 1 | 다이세쓰 | 1 | 0 |
다이오 | 5 | 0 | 다이류가와 | 2 | 0 | 다카노하나 | 3 | 2 | 다카미야마 | 11 | 0 |
다마노우미 | 21* | 7(1)* | 도키니시키 | 2 | 0 | 쓰루가미네 | 19 | 1 | 데와니시키 | 17(1) | 3 |
도키쓰야마 | 3 | 0 | 도키하야마 | 3 | 0 | 도치히가시 | 6 | 2(1) | 도치오야마 | 5 | 0 |
도치니시키 | 0 | 1 | 도치노우미 | 17 | 6 | 도치미쓰 | 24 | 6 | 도치후지 | 0 | 1 |
호쿠니 | 10 | 3 | 나루토우미 | 1 | 0 | 나리야마 | 2 | 1 | 니시키요 | 0 | 1 |
하구로이와 | 6 | 1 | 하구로가와 | 14 | 1 | 하구로야마 | 21 | 0 | 하세가와 | 21 | 2 |
하나히카리 | 1 | 0 | 히로카와 | 7 | 0 | 후쿠다야마 | 0 | 2 | 후쿠노하나 | 10 | 1(1) |
후사니시키 | 6 | 5 | 후지니시키 | 27 | 3 | 후지노가와 | 16 | 1 | 후타고다케 | 7 | 1 |
마에다가와 | 8 | 3 | 마에노야마 | 13 | 3 | 미에노우미 | 3 | 1 | 미소호 | 1 | 0 |
미네야마 | 1(1) | 0 | 아케타케 | 20* | 5 | 무쓰아라시 | 10 | 3(2) | 호야마 | 28 | 4 |
기노하나 | 4 | 1(1) | 류코 | 9 | 1 | 와카스기야마 | 1 | 0 | 와카치치부 | 4 | 0 |
와카텐류 | 2 | 0 | 와카나미 | 8 | 1(1) | 와카하구로 | 13 | 2 | 와카니세 | 8 | 0 |
와카마에다 | 4 | 0 | 와카미야마 | 11 | 0 |
- 그 외 우승 결정전에서 가시와도에게 2승, 아케타케에게 1승, 사다노야마・다마노우미에게 각각 1승 1패가 있다.
3. 1. 우승 기록
{| class="wikitable"|-
! 대회 !! 성적 !! 비고
|-
| 마쿠우치 우승 || 32회
|
1960년 11월 장소 |
1961년 7월 장소, 9월 장소, 11월 장소 |
1962년 1월 장소, 7월 장소, 9월 장소, 11월 장소 |
1963년 1월 장소, 3월 장소, 5월 장소 |
1964년 1월 장소, 3월 장소, 9월 장소, 11월 장소 |
1965년 3월 장소, 7월 장소, 11월 장소 |
1966년 3월 장소, 5월 장소, 7월 장소, 9월 장소, 11월 장소 |
1967년 1월 장소, 5월 장소, 9월 장소 |
1968년 9월 장소, 11월 장소 |
1969년 1월 장소, 5월 장소 |
1970년 3월 장소 |
1971년 1월 장소 |
|-
| 전승 우승 || 8회 ||
|-
| 연패 || 6연패 2회 || 1962년 7월 장소 - 1963년 5월 장소, 1966년 3월 장소 - 1967년 1월 장소
|-
| 주료 우승 || 1회 || 1959년 11월 장소
|-
| 산단메 우승 || 1회 || 1958년 3월 장소
|}
3. 2. 연승 기록
다이호 고키의 연승 기록은 다음과 같다.- 45연승: 1968년 9월 장소 2일째부터 1969년 3월 장소 첫날까지 (1926년 동서 스모 합병 이후 역대 4위).[17][65]
- 1969년 3월 장소 2일째에 도다 도모지로에게 패배하여 연승이 중단되었는데, 비디오 판독 결과 오심으로 판명되어 논란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다음 장소부터 비디오 판독이 도입되었다.[18]
그 외 20연승 이상 기록은 다음과 같다.
횟수 | 연승 | 기간 | 연승을 저지한 선수 | 비고 | 연승을 저지한 선수가 사용한 기술 | 연승이 끊긴 장소에서 연승을 저지한 선수의 순위 |
---|---|---|---|---|---|---|
1 | 25 | 1962년 7월 장소 3일째 ~ 1962년 9월 장소 12일째 | 기타노하 | 우차리 | 서 오제키 2인자 | |
2 | 30 | 1963년 3월 장소 5일째 ~ 1963년 7월 장소 4일째 | 아오노리 | 1963년 5월 장소 전승 우승 | 요리키리 | 동 마에가시라 3인자 |
3 | 34 | 1963년 11월 장소 마지막 날 ~ 1964년 5월 장소 3일째 | 마에다가와 | 1964년 1월 장소 ~ 3월 장소 2연속 전승 우승 | 히키오토시 | 서 마에가시라 2인자 |
4 | 20 | 1964년 9월 장소 5일째 ~ 1964년 11월 장소 9일째 | 묘부다니 | 쓰키다시 | 동 세키와케 | |
5 | 26 | 1966년 5월 장소 2일째 ~ 1966년 7월 장소 12일째 | 호잔 | 가테나게 | 동 오제키 | |
6 | 34 | 1966년 11월 장소 첫날 ~ 1967년 3월 장소 4일째 | 아사세가와 | 1966년 11월 장소 ~ 1967년 1월 장소 2연속 전승 우승 | 요리키리 | 동 마에가시라 3인자 |
7 | 25 | 1967년 9월 장소 첫날 ~ 1967년 11월 장소 10일째 | 우미노야마 | 1967년 9월 장소 전승 우승 | 게타구리 | 서 세키와케 |
8 | 45 | 1968년 9월 장소 2일째 ~ 1969년 3월 장소 첫날 | 도다 | 1968년 11월 장소 ~ 1969년 1월 장소 2연속 전승 우승 | 오시다시 | 동 마에가시라 필두 |
9 | 20 | 1970년 11월 장소 6일째 ~ 1971년 1월 장소 10일째 | 고토자쿠라 | 오시다시 | 동 오제키 2인자 |
- 20연승 이상 9회, 30연승 이상 4회를 기록했다.
3. 3. 기타 기록
다이호 고키의 기타 기록은 다음과 같다.- 통산 성적: 872승 182패 136휴 (승률 .827)
- 마쿠우치 성적: 746승 144패 136휴 (마쿠우치 승수는 역대 5위, 승률 .838)
- 요코즈나 성적: 622승 103패 136휴 (요코즈나 승수는 역대 4위, 승률 .858)
- 오제키 성적: 58승 17패 (승률 .773)
- 통산 재위: 87개소
- 마쿠우치 재위: 69개소
- 요코즈나 재위: 58개소 (역대 4위)
- 오제키 재위: 5개소
- 산야쿠 재위: 3개소 (세키와케 2개소, 고무스비 1개소)
- 요코즈나전 승리: 43승 (와카노하나 간지 (초대)와 공동 역대 1위, 승률도 6할을 넘는다)
- 연간 최다승: 6회 (하쿠호 쇼의 10회, 기타노우미 도시미쓰의 7회에 이어 역대 3위. 1960년~1964년 5년 연속 최다승도 하쿠호 쇼의 9년 연속에 이어 역대 2위)
- 1960년 (66승 24패), 1961년 (71승 19패), 1962년 (77승 13패), 1963년 (81승 9패), 1964년 (69승 11패 10휴), 1967년 (70승 6패 14휴·가시와도와 동수)
- 연속 6개소 승리: 84승 (1966년 3월 장소~1967년 1월 장소, 1966년 5월 장소~1967년 3월 장소, 1966년 7월 장소~1967년 5월 장소)
- 통산 (마쿠우치) 연속 가치코시 기록: 25개소 (역대 10위, 1960년 5월 장소~1964년 5월 장소)
- 마쿠우치 연속 두 자릿수 승리 기록: 25개소 (하쿠호 쇼 51개소·기타노우미 37개소에 이어 역대 3위·1960년 5월 장소~1964년 5월 장소)
- 마쿠우치 연속 12승 이상 승리: 11개소 (역대 5위·1962년 7월 장소~1964년 3월 장소)
- 마쿠우치 최고 우승 32회는 하쿠호 쇼에 이어 역대 2위 기록이지만, 은퇴 당시에는 최다 우승 기록이었다. 특히 입문(1960년)부터 은퇴(1971년)까지 12년간 매년 최소 1회 우승한 기록은 "가장 깨기 어려운 기록"이라고 불렸다 (현재는 하쿠호의 16년 연속에 이어 역대 2위이지만 하쿠호도 "입문년 우승"은 달성하지 못했다).
- 21세 3개월의 나이로 요코즈나에 승진하여 역사상 최연소 요코즈나가 되었으나, 이 기록은 이후 기타노우미에게 깨졌다. 신예 요코즈나로서는 이례적으로 승진 후 첫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14]
- 가시와도와 동시에 승진했고, 두 사람의 라이벌 관계는 "하쿠호(柏鵬) 시대"라 불리는 시대를 만들었다.[14]
- 1968년 9월 대회에서 45연승을 기록했으나,[17] 1969년 3월 심판의 잘못된 판정으로 인해 연승이 깨졌다. 이 사건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켜 이후 비디오 판독이 도입되었다.[18]
- 1971년 5월 대회 5일째 다카노하나에게 패한 뒤 은퇴를 발표했다.[12]
- 뛰어난 업적을 인정받아 일본 스모 협회의 회원으로 초청받아(그리고 수락하여) 전직 리키시 중 최초로 회원이 되었다.[19]
상대 전적은 다음과 같다.
상대 | 승 | 패 | 상대 | 승 | 패 | 상대 | 승 | 패 | 상대 | 승 | 패 |
---|---|---|---|---|---|---|---|---|---|---|---|
아오노사토 | 14 | 2 | 아사시오 | 4 | 4 | 아사세가와 | 7 | 1 | 아사토시 | 2 | 0 |
아마가제 | 4 | 0 | 이즈미요 | 1 | 0 | 이치노야 | 1 | 0 | 이와카제 | 17 | 2 |
우타가와 | 3 | 0 | 오이데야마 | 1 | 0 | 다이코 | 7 | 1 | 고지로노하나 | 19 | 1 |
우미노야마 | 21 | 4 | 가이류잔 | 16 | 4 | 가시와도 | 21** | 16 | 와코 | 1 | 0 |
가네노하나 | 7 | 1 | 기타노요 | 7 | 1 | 기타노후지 | 26 | 5 | 기타하야마 | 24 | 11 |
기미니시키 | 1 | 0 | 세이코쿠 | 29 | 4(1) | 구로히메야마 | 2 | 1 | 고테쓰잔 | 7 | 1 |
고토자쿠라 | 22 | 4 | 사다노야마 | 27(1)* | 5(1)* | 사와히카루 | 1 | 0 | 시오니시키 | 4 | 0 |
시부야마 | 2 | 0 | 다이고 | 9 | 0 | 다이주 | 3 | 1 | 다이세쓰 | 1 | 0 |
다이오 | 5 | 0 | 다이류가와 | 2 | 0 | 다카노하나 | 3 | 2 | 다카미야마 | 11 | 0 |
다마노우미 | 21* | 7(1)* | 도키니시키 | 2 | 0 | 쓰루가미네 | 19 | 1 | 데와니시키 | 17(1) | 3 |
도키쓰야마 | 3 | 0 | 도키하야마 | 3 | 0 | 도치히가시 | 6 | 2(1) | 도치오야마 | 5 | 0 |
도치니시키 | 0 | 1 | 도치노우미 | 17 | 6 | 도치미쓰 | 24 | 6 | 도치후지 | 0 | 1 |
호쿠니 | 10 | 3 | 나루토우미 | 1 | 0 | 나리야마 | 2 | 1 | 니시키요 | 0 | 1 |
하구로이와 | 6 | 1 | 하구로가와 | 14 | 1 | 하구로야마 | 21 | 0 | 하세가와 | 21 | 2 |
하나히카리 | 1 | 0 | 히로카와 | 7 | 0 | 후쿠다야마 | 0 | 2 | 후쿠노하나 | 10 | 1(1) |
후사니시키 | 6 | 5 | 후지니시키 | 27 | 3 | 후지노가와 | 16 | 1 | 후타고다케 | 7 | 1 |
마에다가와 | 8 | 3 | 마에노야마 | 13 | 3 | 미에노우미 | 3 | 1 | 미소호 | 1 | 0 |
미네야마 | 1(1) | 0 | 아케타케 | 20* | 5 | 무쓰아라시 | 10 | 3(2) | 호야마 | 28 | 4 |
기노하나 | 4 | 1(1) | 류코 | 9 | 1 | 와카스기야마 | 1 | 0 | 와카치치부 | 4 | 0 |
와카텐류 | 2 | 0 | 와카나미 | 8 | 1(1) | 와카하구로 | 13 | 2 | 와카니세 | 8 | 0 |
와카마에다 | 4 | 0 | 와카미야마 | 11 | 0 |
- 그 외 우승 결정전에서 가시와도에게 2승, 아케타케에게 1승, 사다노야마・다마노우미에게 각각 1승 1패가 있다.
4. 수상 및 서훈
연도 | 수상 내역 |
---|---|
1960년 | 삼상 감투상(敢闘賞) (1월, 5월) |
1960년 | 삼상 기능상(技能賞) (9월) |
1960년 | 뢰전상(雷電賞) (1월, 9월, 11월) |
- | 금성 1개 (아사시오 1개) |
1970년 |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52] |
2009년 | 문화공로자[81] |
2013년 | 국민영예상[90] |
2013년 | 종4위 욱일중광장(旭日重光章)[89] |
5. 평가 및 영향
다이호 고키는 가라후토청 시스카정(현재의 러시아 사할린주 포로나이스크)에서 우크라이나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40] 라이벌 가시와도 고와 함께 '카시와호 시대'로 불리는 스모 황금기를 이끌었다. 통산 32회 우승(6연패 2회), 45연승 등의 기록을 세워 '쇼와의 대요코즈나'로 불리며, 전후 최강의 요코즈나로 평가받는다.[95]
현역 시절에는 상당한 미남으로,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모아놓은 '거인·대붕·계란말이'라는 유행어는 당시 그의 인기와 인지도를 보여주는 유명한 말이다. 그러나 다이호 자신은 단체 경기인 야구와 개인 경기인 스모를 비교하는 것과 '다이호의 스모에는 형식이 없다'는 비판 때문에 안티 거인으로서 거론되는 것을 꺼렸다.[96] 하지만, 후에 『거인 대붕 계란말이 ― 나의 이력서』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출간했다. 1940년생 동갑내기인 왕정치와는 매우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97] '거인·대붕·계란말이'는 1960년대 고도 경제 성장기에 사카이야 타이치가 사용하면서 퍼져나갔다.[98][99]
현역 시절부터 자선 활동에 힘썼으며, '다이호 자선 유카타' 판매 수익금으로 노인 요양 시설과 보호 시설에 텔레비전을 기증하고, 일본 적십자사에 '다이호호' 혈액 운반차를 기증했다.[77]
젊은 시절에는 엄청난 주당으로 하루에 18L(1斗)의 술을 마시거나, 맥주를 36L(1升 병으로 20병) 마신 적도 있다고 한다.[37][38] 왕정치와 밤새 술을 마신 일화도 있으며, 수행원에게 "내가 왜 오제키와 겨룰 텐데 자야 하겠느냐"라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112] 그러나 과음은 뇌졸중 등 건강 악화의 원인이 되었다.
젊은 시절, 여성과 아이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으며, 그의 시합 때는 목욕탕 여자탕이 비었다고 한다.[113] 그의 이름을 딴 미타니 코키처럼 '코키'라는 이름이 유행하기도 했다.[114]
1961년 에어프랑스 초대로 프랑스 여행을 했고, 1962년부터 1964년까지 1월 대회 3연패로 프랑스를 여행했다. 1964년 프랑스 여행에는 하나가고 장로나 고토사쿠라[115]가 동행했고, 파리에서 카가 마리코와 함께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116][117] 파리 신문에서는 '그랜드 피닉스 타이호'라고 칭찬받았고, 토니 커티스에게서 팬레터를 받기도 했다.[37][38]
이이쿠라의 '레스토랑 류' 서로인스테이크를 즐겨 먹었으며, "일본이구나"라고 느꼈다고 한다.[37][38] 요코즈나 시절 노래 레퍼토리는 산타 루치아, 오 솔레 미오, 엘비스 프레슬리, 보비 달린 등이었다.[37][38]
텐류 겐이치로는 니쇼노세키 방이 다이호의 명성으로 번영했지만, 그가 없으면 매력이 없다고 평가했다.[118]
아베 신조는 국민 영예상 수여 당시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처신이 아름다운 역사"였다며, '거인·대붕·계란말이' 세대로서 '대붕 킬러' 아케타니를 응원했지만, 다이호와의 시합을 응원했다고 회고했다.[119]
1982년 '세계 인도주의자상'을 수상했다.[77] 로마 교황도 수상한 상이다.
대호(大鵬)部屋 창설 초기, 벤츠로 찬코 재료를 구입했다.[77]
로호의 대마 문제 때 기타노우미 이사장과 협의했고, 사위 다이가쿠가 책임을 지고 일본 스모 협회 위원에서 평년기로 강등, 기타노우미 이사장은 사퇴했다. 다이호도 스모 박물관장직을 사퇴했다.
아사쇼류의 조언자였으나, 아사쇼류가 신기록을 달성할 무렵부터 상담을 오지 않았고, 은퇴 기자회견에서 사과 없이 분하다고 말했다.[120] 아사쇼류는 전화로 "그런 것은 (현역을) 그만둘 무렵이 되면 능숙해집니다"라고 답해, 다이호가 그를 포기하게 되었다고 한다.[121]
2004년 키토우리키(16대 다이가쿠)가 대호(大鵬)部屋를 계승하여 다이가쿠 部屋로 개칭했지만, 방 운영은 함께하며 자주 충돌했다고 한다.[122]
기노하나의 이사 선거 강행 출마('기노 난') 때, 니쇼노세키 일문의 반대에도 출마를 지지했다.[123]
사망할 때까지 닛칸 스포츠 스모 담당 평론가로, 본 장소 중 해설 '토평'을 연재했다.
니쇼노세키 部屋 소멸 문제에 대해 "시대의 흐름으로 어쩔 수 없지만, 방 재흥을 바란다"는 담화를 발표했다.[124]
6. 논란 및 비판
다이호 고키는 뛰어난 실력과 빠른 성장으로 주목받았지만, 그의 스모 스타일에 대한 비판과 논란도 존재했다.
젊은 시절 다이호는 모로자시(もろ差し)[100]를 활용하여 가시와도 쓰요시와 같이 돌진력이 좋은 상대를 방어하는 데 능숙했다. 입막(入幕) 초기에는 입합(立合)에서의 충돌이나 찌르기가 강하지 않았지만, 이는 밀어붙이기(差し身)와 잘 연결되었다.[101] 그는 상대에 따라 찌르기 후 밀어붙이거나, 갑자기 밀어붙이는 등 유연한 전략을 구사했다.[101]
다이호는 "역・쿠노지(逆・くの字)" 자세로 상대의 공격을 막고, 옆으로 돌면서 유리한 자세를 만들어 던지거나 밀어냈다. 특히 왼쪽 밀어붙인 손을 활용한 스쿠이나게(掬い投げ)는 그의 주특기로, '가보'(家宝)라고 불릴 정도였다.[101] 1970년 5월 기타노후지 가쓰아키와의 대결에서 스쿠이나게로 승리한 후, 기타노후지는 "부드러움에 졌다"라고 평했다.
그러나 1968년 왼쪽 무릎 부상 이후, 다이호는 하타키코미(叩き込み)와 같은 당기는 기술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여 비판을 받았다.[101] 또한, 허리가 약하다는 약점 때문에 가슴을 맞대고 꽉 붙잡히면 고전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특히 초반 평막(平幕)과의 경기에서 약점을 드러냈다.[104]
다이호의 스모 스타일은 '형태가 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일부 평론가들은 그의 "역・쿠노지" 자세를 비판하고, 허리 힘을 사용하지 않는 '작은 스모'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니쇼노세키는 "형태가 없는 것이 다이호의 형태"라며 반박했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자연체'(自然体)라는 평가도 나왔다.
다이호는 스스로를 "노력형"이라고 강조하며, 천재라는 평가를 거부했다. 그는 니쇼노세키의 혹독한 지도 아래 스파르타식 훈련을 받았으며, 전성기에는 1시간 동안 부딪히는 훈련(ぶつかり稽古)을 소화할 정도였다.[105] 그는 바벨이나 익스팬더 등을 이용한 과학적인 트레이닝도 도입하는 등 훈련에 매진했다.[37][38]
7. 사후
다이호 고키는 1977년 36세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왼쪽 반신 마비 등의 후유증을 겪었으나,[75] 불굴의 정신과 가족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재활 치료를 받아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다.[76][77] 1980년에는 일본 스모 협회 이사에 취임하여 지방 장소(나고야 장소 담당) 부장, 스모 교습소 소장 등을 역임했다.[78]
2000년에는 환갑 도이리를 선보였는데, 뇌졸중 후유증으로 인해 완전한 동작은 불가능했지만, 일부 동작만이라도 선보이며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20]
2004년 일본 정부로부터 자수포장을 받았고,[24] 2009년에는 문화공로자상을 수상하여 스모 선수로는 최초로 이 상을 받게 되었다.[25]
2013년 1월 19일, 심실빈맥으로 도쿄도 신주쿠구에 있는 병원에서 7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28] 일본 스모 협회는 그의 사망 소식을 발표하며 애도를 표했고,[29][30] 닛칸 스포츠는 부고 기사에서 그를 "역사상 가장 강력한 요코즈나"라고 칭했다.[27][31] 일본 정부는 2013년 2월 25일에 국민영예상을 추서하며 그를 "국민 영웅"이라고 불렀다.[32] 하쿠호 쇼는 2013년 3월 대회 우승 후 관중들에게 다이호를 위한 묵념을 제안하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33]
7. 1. 추모 및 기념 사업
다이호 고키는 현역 은퇴 후, 다이호베야를 설립하여 교호, 시시호 등을 육성했다.[75] 정년 후에는 사위인 후타고야마베야 소속 기토리키에게 방을 물려주었지만, '다이호'라는 이름이 일대 연고였기 때문에 원래 소유하고 있던 '오타케' 방으로 했다. 그러나 기토리키는 도박 문제로 2010년 7월 4일에 해고되어, 그 후에는 다이호의 직계 제자인 오류(최고위는 십량)가 방을 잇게 되었다.2001년에는 사할린주에서 자신의 아버지인 마르칸 보리시코[40]의 생애가 밝혀졌고, 사할린주의 일본 연구자의 주선으로 우크라이나의 하르키우시에 다이호 기념관이 건설되었다. 다이호 자신도 하르키우에서 스모 대회를 기획하는 등, 일본과 우크라이나의 국제 교류에 기여했다.
2005년에는 65세가 되어 정년 퇴직하고, 9년 가까이 공석이었던 스모 박물관 관장에 취임했다. 2008년 11월 16일자로, 협회의 이사회에서 건강 불량을 이유로 스모 박물관 관장을 사임하는 것이 승인되었다.[79]
2009년 10월 27일에는 스모계에서 처음으로 2009년도 문화공로자로 선출되었다.[81]
2013년 1월 19일, 심실빈맥으로 도쿄도 신주쿠구의 게이오기주쿠대학병원에서 사망했다.[82][83][84] (향년 73세). 사후, 1월 19일자로 정사위와 욱일중광장이 추서되었다.[89] 또한, 2월 15일자로 국민영예상이 수여되었다.[90]
2014년 8월 15일, 고향 사할린에 다이호의 동상이 세워졌다.[93]
묘소는 묘큐지(도쿄도 에도가와구, 나야 가문의 보리사)이다. 법명은 ‘대도원전인수련성일붕대거사(大道院殿忍受錬成日鵬大居士)’이다.
소년 시절을 보낸 홋카이도 데시카가정 가와유 온천의 온천 거리에는, 1984년에 개관한 다이호 스모 기념관(설립 당시 명칭은 데시카가정 가와유 스모 기념관)이 있으며, 다이호가 실제로 사용했던 화장 마와시와 우승 트로피 등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 앞에는 다이호의 동상도 세워져 있다.
7. 2. 가족 관계
다이호 고키는 가라후토청 시스카정(현재의 러시아 사할린주 포로나이스크)에서 우크라이나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러시아 혁명 이후 사할린섬으로 망명한 우크라이나인 카자크 기병대 장교 출신인 마르키얀 보리슈코(Маркіян Боришкоuk)이다.[35]1966년, 다이호는 여관 주인의 딸과 결혼했다. 도쿄 제국호텔에서 열린 결혼식에는 1,000명이 넘는 하객과 200명이 넘는 기자들이 참석했다. 그는 기자회견을 연 최초의 스모 선수였으며, 이는 현재 스모 결혼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되었다.[35]
다이호의 막내딸은 전 세키와케 다카토리키와 결혼했으며, 다카토리키는 다이호의 은퇴 후 다이호 스테이블(太鵬部屋)을 이어받아 오타케 스테이블(大竹部屋)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다카토리키가 도박 스캔들로 스모계에서 해고되면서 다이호의 딸과 이혼했다. 다이호의 손자 나야 고노스케(納谷幸之助, 2000년생)는 2018년 1월 오호(大鵬)라는 시코나(四股名)로 오타케 스테이블에 입문했다. 그의 형제들인 고세이(2019년 11월)와 다카모리(2020년 3월)도 스모에 입문했다. 다이호의 넷째이자 장손인 나야 유키오(納谷幸雄, 1994년생)는 프로레슬러이다.[35]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마르키얀 보리슈코 (Маркіян Боришкоuk) | 우크라이나인 카자크 기병대 장교 출신 |
부인 | (이름 미상) | 여관 주인의 딸 |
막내딸 | (이름 미상) | 다카토리키와 결혼 후 이혼 |
사위 | 다카토리키 | 전 세키와케, 오타케 스테이블(大竹部屋) |
손자 | 나야 고노스케 (納谷幸之助) | 스모 선수, 시코나(四股名)는 오호(大鵬) |
손자 | 나야 고세이 (納谷幸成) | 스모 선수 |
손자 | 나야 다카모리 (納谷 貴盛) | 스모 선수 |
손자 | 나야 유키오 (納谷幸雄) | 프로레슬러 |
셋째 딸의 증언에 따르면, 다이호는 딸들 중 누군가가 역사와 결혼하여 방을 계승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셋째 딸이 다카토리키와 결혼한 것을 기뻐했지만, 다카토리키의 도박 습관을 걱정했다.[128] 다이호는 다카토리키가 도박으로 진 빚을 여러 번 대신 갚아주었으나, 다카토리키는 도박을 끊지 못하고 야구 도박에도 손을 대 2010년 7월에 스모 협회에서 해고되었다. 다이호는 다카토리키에게 이혼을 요구했고, 셋째 딸과 다카토리키는 이혼했다.[131] 다이호는 셋째 딸에게 "너는 아무 잘못이 없다. 당당하게 살아라"라고 말하며 격려했다.[129]
다이호는 4명의 아들을 모두 역사로 만들겠다는 다카토리키와는 달리, "그렇게 할 필요 없다. 좋아하는 것을 하면 된다"라고 항상 말했다. 장남은 자신의 의지로 프로레슬러, 차남, 삼남, 사남은 스모 선수의 길을 선택했다. 다이호가 사망했을 때 차남(나타니 유키린(納谷幸林))은 중학생이었고, 다이호가 손자들에게 스모를 지도할 기회는 없었다.[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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