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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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 도종은 1055년 요나라의 황제가 되어 1101년까지 재위했다. 그는 불교를 장려하고, '대요'라는 국호를 부활시키는 등 업적을 남겼으나, 말년에는 측근 야율을신의 전횡과 부패, 사치스러운 궁궐 건설로 인해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결국 민생이 피폐해지고, 여진족의 반란으로 요나라의 멸망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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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도종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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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찰라 (거란 이름) |
휘 | 야율날린 |
묘호 | 도종(道宗) |
시호 | 인성대효문황제(仁聖大孝文皇帝) |
생애 | |
출생일 | 1032년 9월 14일 |
사망일 | 1101년 2월 12일 |
매장지 | 영복릉(永福陵, 현재 바린 우기, 내몽골)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요 흥종(遼興宗) |
어머니 | 소달리(蕭撻里) 황후 |
배우자 | 소관음(蕭觀音) 소탄사(蕭坦思) |
재위 | |
즉위일 | 1055년 8월 28일 |
퇴위일 | 1101년 2월 12일 |
재위 기간 | 1055년 - 1101년 |
연호 | 청녕(清寧): 1055년–1064년 함옹(咸雍): 1065년–1074년 대강(大康): 1075년–1084년 대안(大安): 1085년–1094년 수창(壽昌): 1095년–1101년 |
즉위 전 작위 | |
즉위 전 작위 | 연조국왕(燕趙國王), 연국왕(燕國王), 양왕(梁王) |
왕조 | |
왕조 | 요나라(遼朝) |
봉호 | 야율(耶律) |
기타 | |
계승자 | 요 천조제(遼天祚帝) |
존호 | 성문신무전공대략광지총인예효천우황제(聖文神武全功大略廣智總仁睿孝天佑皇帝) |
이름 (언어별) | |
한국어 | 요 도종(遼道宗) |
중국어 간체 | 辽道宗 |
중국어 병음 | Liáo Dàozōng |
거란어 | 찰라(查剌) |
중국어 | 耶律洪基 |
일본어 | 도종 예율사랄 |
2. 생애
1055년 아버지 흥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요 도종의 치세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즉위 초, 국호 복구와 불교 장려, 내란과 간신의 전횡, 그리고 말년과 죽음이다.
요 도종은 1063년 거란족의 습격으로 암살 위협을 겪었고, 1075년에는 간신 야율을신의 모함으로 아들 야율준을 잃는 등 순탄치 않은 시기를 보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1066년 요 태종이 사용했던 '대요'라는 국호를 부활시키고, 불궁사 석가탑을 건립하는 등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도종의 치세는 전반적으로 부패와 사치, 그리고 간신 야율을신의 전횡으로 얼룩졌다. 야율을신은 황후 소관음과 황태자 야율준을 모함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으며, 조정의 기강을 무너뜨렸다. 도종은 뒤늦게 야율을신의 악행을 깨달았지만, 이미 요나라는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결국 1101년 도종이 사망하고 손자 천조제가 즉위했지만, 요나라는 여진족의 반란으로 멸망하게 된다. 요나라의 정사인 『요사』는 도종의 치세를 가혹하게 평가하고 있다.[4]
2. 1. 즉위 초
1055년 아버지 흥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1056년 불궁사 석가탑을 건설하였고, 1066년에는 요 태종이 사용하였던 '대요'라는 국호를 부활시켰다. 선대와 마찬가지로 불교에 심취하여 불교의 대장경을 모방해 요나라에 만들었고, 산스크리트어에 능숙했다고 한다.요 도종은 생애 동안 여러 차례 암살 시도에 직면했다. 1063년, 부족 사법 체계가 한족에 의해 지방 행정으로 넘어가자 분노한 거란족 무리가 황제가 사냥을 나간 틈을 타 습격했다. 요 도종은 이 공격에서 살아남았고 반군은 처형되었으나, 황제로서의 정통성을 다시 확립하기 위해 전통적인 "재탄생" 의식을 치러야 했다.
치세 전반에는 "직언을 구하고, 치도를 찾는다"는 취지 아래 권농, 학교 건설, 구휼 등에 힘썼지만, 유렵과 불교에 빠져 당탑의 건립과 승려에 대한 보시에 거액의 국비를 낭비했다.
2. 2. 국호 복구와 불교 장려
1055년 아버지 흥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1056년 석가탑을 건설하였고, 1066년에는 요 태종이 사용하였던 '대요'라는 국호를 부활시켰다.[1] 선대와 마찬가지로 불교에 심취하여 불교의 트리피타카를 모방해 요나라에서 만들었고, 산스크리트어에 능숙했다고 한다.[1]치세 전반에는 "직언을 구하고, 치도를 찾는다"는 취지 아래 권농(농업 진흥), 흥학(학교 건설), 구휼 등에 힘썼지만, 이후 사냥과 불교에 빠져 당탑 건립과 승려에 대한 보시에 거액의 국비를 낭비하고, 불사 및 승려의 범람을 조장했다.[4] 정치를 돌보지 않게 되었고, 야율을신의 전횡을 허용했다.[4]
2. 3. 내란과 간신의 전횡
1055년 아버지 흥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 시기 요나라는 잦은 내란으로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으며, 정부는 부패했고 군대는 흩어졌다. 간신 야율을신의 모함으로 아들 야율준이 20세에 요절하기도 하였다.요 도종은 생애 동안 여러 차례 암살 시도에 직면했다. 1063년, 부족 사법 체계가 한족에 의해 지방 행정으로 넘어가자 분노한 거란족 무리가 황제가 사냥을 나간 틈을 타 습격했다. 요 도종은 이 공격에서 살아남았지만, 황제로서의 정통성을 다시 확립하기 위해 전통적인 "재탄생" 의식을 치러야 했다.[1]
요 도종의 부인 소관음은 훌륭한 지도자가 되도록 조언했지만, 요 도종은 제국 통치에 관심이 없었고 그녀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패한 관리 야율을신은 황후를 제거하려 음모를 꾸몄고, 결국 요 도종은 야율을신의 말을 믿고 1075년에 황후를 처형했다. 야율을신은 태자와 다른 관리들까지 처형했지만, 결국 요 도종은 이를 알아차리고 야율을신의 특권을 하나씩 빼앗았다. 야율을신은 송나라로 망명하려다 발각되어 1083년에 처형되었지만, 그가 제국에 끼친 피해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2]
요 도종의 치세는 부패로 얼룩졌고, 그의 통치 아래 많은 백성들은 높은 세금에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켰다.[3] 특히 여진족의 반란은 요나라 멸망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3]
1063년 7월, 보길지·열로고 부자가 모반을 일으키자 모후인 인의황후가 중심이 되어 야율인선·야율을신 등에게 명하여 이를 평정했다.[4]
1075년 11월, 총명한 황태자 야루알을 꺼린 야율을신은 황태자의 생모인 의덕황후(소관음)를 모함했다. 야율을신과 결탁한 장효걸의 증언에 의해 황후의 부정을 믿은 도종은 격노하여 황후에게 자살을 명했다. 야율을신은 이어서 황태자를 무고한 죄로 몰아 유폐 끝에 암살했다.[5]
그러나, 도종의 황자는 야루알 뿐이었기에, 늙은 도종은 고 황태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강해져, 마침내 그 아들 아과를 불러 황태손으로 삼았다. 도종도 서서히 야율을신의 음험함을 깨닫게 되었고, 불안을 느낀 야율을신은 1081년, 황태손을 해치려다 발각되어, 그 다음 해에 병기를 숨기고 송으로 도망하려다 주살되었다.[6]
도종의 치세는, 황제의 어리석음과 간신의 전횡으로 충신이 박해받거나, 귀족 간의 갈등이 계속되어 조정은 혼란에 빠졌다. 또한, 토지 겸병이 진행됨에 따라 민중의 불만이 커졌고, 특히 압박을 받은 동북의 여진은 반항에 나섰다. 여진의 반란은, 도종의 사후 25년 만에 요를 멸망시키는 불길이 되었다.[7]
2. 4. 말년과 죽음
1075년, 간신 야율을신의 모함으로 아들 야율준이 20살에 요절하였다. 1101년에 사망하여 손자 천조제가 황위를 계승하였다.요 도종의 치세는 부패로 얼룩졌다. 그는 자신의 궁궐과 불교 숭배에 사치스러운 지출을 했다. 그의 통치 아래 많은 백성들은 높은 세금에 분노하여 요나라 왕조에 반란을 일으켰으며, 특히 여진족이 두드러졌는데, 이들은 결국 금나라(1115–1234)를 세워 요나라 왕조를 멸망시켰다.[3]
도종의 황자는 야율준 뿐이었기에, 늙은 도종은 죽은 황태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강해져, 마침내 그 아들 야율아과를 불러 황태손으로 삼았다. 도종도 서서히 야율을신의 음험함을 깨닫게 되었고, 불안을 느낀 야율을신은 태강 7년(1081년)에 황태손을 해치려다 발각되어, 그 다음 해에 병기를 숨기고 송으로 도망하려다 주살되었다. 이로써 겨우 황태손의 지위가 안정되고, 도종조의 정치적 혼란은 수습되었다. 수창 7년(1101년) 정월, 행궁에서 70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유조에 의해 뒤를 황태손인 연왕 아과(천조제)가 이었다.[4]
도종의 치세는, 황제의 어리석음과 간신의 전횡에 의해 충신이 박해받거나, 귀족과 신하 간의 갈등이 계속되어, 조정은 혼란에 빠졌다. 또한, 토지 겸병이 진행됨에 따라 민중의 불만이 커졌고, 특히 압박을 받은 동북의 여진은 반항에 나섰다. 여진의 반란은, 도종의 사후 25년 만에 요나라를 멸망시키는 불길이 되었다. 다음 시대에 재앙의 씨앗을 충분히 뿌린 도종의 47년에 걸친 치세는, 요나라를 전성기에서 쇠망으로 이끈 반세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요나라의 정사인 『요사』도 가혹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4]
3. 가족 관계
요 도종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요 도종은 세 명의 황후와 후궁을 두었으며,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
3. 1. 황후와 후궁
봉호 | 시호 | 이름(성씨) | 별칭 | 재위년도 | 생몰년도 | 국구(장인/장모) | 능묘 | 비고 |
---|---|---|---|---|---|---|---|---|
황후(皇后) | 선의황후 (宣懿皇后) | 소관음 (蕭觀音) | [2] | 1055년 ~ 1075년 | 1040년 ~ 1075년 | 위국왕(魏國王) 소혜(蕭惠) | 경릉(慶陵) | |
폐황후(廢皇后) | 소탄사 (蕭坦思) | [3] | 1076년 ~ 1082년 | ? ~ 1118년 | 소아랄(蕭阿剌) | [4] | ||
궁인(宮人) | 소알특라 (蕭斡特懶) |
선의황후 소씨는 요 도종의 부인으로, 현명하여 요 도종에게 훌륭한 지도자가 되도록 조언하고 부패한 관리들을 숙청하도록 설득했다.[2] 그러나 요 도종은 제국 통치에 관심이 없어 그녀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관음은 침실에서 시를 쓰며 시간을 보냈는데, 부패한 관리 야율이신은 그녀를 제거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야율이신은 궁녀와 공모하여 황후가 연애 시를 쓰도록 속이고, 이 시에 다른 남자와의 불륜을 암시하는 내용이 있다고 요 도종에게 诬告했다. 요 도종은 이를 믿고 1075년에 황후를 처형했다.[2]
3. 2. 황자
3. 3. 황녀
순서 | 봉호 | 이름 | 생몰년도 | 생모 | 부마 |
---|---|---|---|---|---|
1 | 위국공주 (魏國公主) | 야율 살갈지 (耶律 撒葛只) | ? ~ 1075년 | 선의황후 소관음 | 류성군왕(柳城郡王) 소하말(蕭霞抹) [7] |
2 | 조국공주 (趙國公主) | 야율 규리 (耶律 糾里) | ? ~ 1089년 | 선의황후 소관음 | 난릉군왕(蘭陵郡王) 소달불야(蕭撻不也) [8] |
3 | 양송국대장공주 (梁宋國大長公主) | 야율 특리 (耶律 特里) | 선의황후 소관음 | 소수알(蕭酬斡) [9] | |
북원선휘사(北院宣徽使) 소특말(蕭特末) |
- 야율살갈지(위국 공주)
- 야율규리(조국 공주) - 오빠를 살해한 야율을신을 처벌했다.
- 야율특리(양송국 대장공주)
4. 연호
연호 | 기간 | 햇수 | 간지 |
---|---|---|---|
청녕(淸寧) | 1055년 ~ 1064년 | 10년 | 을미(乙未) ~ 갑진(甲辰) |
함옹(咸雍) | 1065년 ~ 1074년 | 10년 | 을사(乙巳) ~ 갑인(甲寅) |
대강(大康) | 1075년 ~ 1084년 | 10년 | 을묘(乙卯) ~ 갑자(甲子) |
대안(大安) | 1085년 ~ 1094년 | 10년 | 을축(乙丑) ~ 갑술(甲戌) |
수창(壽昌) | 1095년 ~ 1101년 | 7년 | 을해(乙亥) ~ 신사(辛巳) |
5. 평가 및 영향
요 도종은 1055년에 아버지 요 흥종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1066년, 요 태종이 처음 사용했던 "대요"라는 공식 왕조명을 부활시켰다. 요 도종의 치세 동안 주목할 만한 업적으로는 불교 ''대장경''의 요나라 판 완성, 그리고 1056년에 석가탑 건설이 있다.[1]
요 도종은 여러 차례 암살 시도에 직면했다. 1063년에는 거란족 무리가 황제를 습격했으나, 요 도종은 살아남았고 반군은 처형되었다. 1070년에는 요나라 법률 시스템을 재구성했다.[1]
요 도종의 부인 소관음은 훌륭한 지도자가 되도록 조언했지만, 요 도종은 그녀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패한 관리 야율이신은 소관음을 모함하여 1075년에 황후가 처형되게 만들었다. 야율이신은 태자와 다른 관리들을 처형했지만, 결국 요 도종에게 발각되어 1083년에 처형되었다.[1]
요 도종의 치세는 부패로 얼룩졌으며, 사치스러운 지출과 높은 세금으로 백성들의 불만이 커졌다. 특히 여진족의 반란이 두드러졌는데, 이들은 결국 금나라를 세워 요나라를 멸망시켰다.[1] 요나라의 정사인 『요사』는 도종의 치세에 대해 가혹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4]
참조
[1]
서적
遼史 興宗本紀
1032-09-14
[2]
문서
황비/의덕황후
[3]
문서
혜비/태황태비
[4]
문서
폐출 후 혜비로 강등. 요 천조제 때 태황태비로 존봉.
[5]
문서
양왕
[6]
문서
제9대 황제 요 천조제의 아버지. 천조제 즉위 후 순종(順宗)으로 추존됨.
[7]
문서
정국공주
[8]
문서
제국공주
[9]
문서
월국공주/진진국대장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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