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람 (이스라엘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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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람은 이스라엘 왕국의 왕으로, 아버지 아합의 뒤를 이어 사마리아에서 12년간 통치했다. 그는 바알 숭배를 제거했으나, 여로보암 1세의 죄를 따라 우상 숭배를 지속했다. 요람은 모압과의 전쟁에서 엘리사의 도움을 받아 승리했지만, 모압 왕 메사가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자 철수했다. 또한 아람과의 전쟁 중 하사엘에게 공격을 받았으며, 이스르엘에서 예후에게 살해당하면서 오므리 왕조는 멸망하고 예후 왕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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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 (이스라엘 왕국)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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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칭호 | 이스라엘 왕 (북왕국) |
재위 기간 | 기원전 852년경 – 기원전 841년경 |
이전 | 아하시야 |
이후 | 예후 |
아버지 | 아합 |
어머니 | 이세벨 |
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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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Yehoram |
2. 즉위
아합의 아들로 전왕 아하시야가 아들 없이 죽자 사마리아에서 왕위에 올라 12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1] 아버지 아합이 만든 바알의 기념 기둥을 치웠으나, 여로보암 1세의 죄에는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했다.
요람은 선임자들과 달리 바알을 숭배하지 않았다. 열왕기하 3장 2절에 따라 "바알의 기둥"을 제거했는데, 이는 아마도 아합이 당시 수도였던 이즈르엘의 궁궐 근처에 세운 특별한 기둥이었을 것이다.[2] 그러나 열왕기하의 저자는 그가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을 죄에 빠지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다"고 말한다.
모압의 임금 메사는 이스라엘 임금에게 해마다 어린 양 10만 마리와 숫양 10만 마리의 털을 바쳐 왔었다. 그러나 아합이 죽은 것을 틈타 아하시야 왕 때 반란을 일으켰다. 아하시야 왕은 반란을 진압하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고, 요람 왕이 이스라엘군을 모두 동원하고 유다 임금 여호람, 에돔 왕과 함께 반란을 진압하러 갔다.
아하시야가 아들이 없이 죽자 그의 뒤를 이었다. 즉위 연도와 재위 기간은 『열왕기 (하)』 제1장 17절에서는 "유다의 여호사밧의 아들 요람이 재위 2년째에 즉위 (재위 기간은 불명)" 제3장 1절에서는 "유다의 여호사밧이 재위 18년째에 왕이 되어 12년 동안 다스렸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병상에 있던 형을 대신하여 공동 왕이었던 기간과 중복되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유다의 요람도 아버지와 공동 왕 시대가 있었다).[6]
아버지가 만든 바알의 석주를 제거했지만, 여로보암과 마찬가지로 우상 숭배를 했다.
3. 종교 정책
요람은 아버지가 만든 바알의 석주는 제거했지만, 여로보암과 마찬가지로 우상 숭배를 했다.
4. 모압과의 전쟁
그러나 도중에 기병대가 마실 물이 떨어져 큰 위기에 빠졌으나, 엘리사의 도움으로 모압군을 제압했다. 메사가 맏아들을 제물로 바치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분노하여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7]
4. 1. 출애굽 전승과의 유사성
모압 왕 메사의 이야기는 출애굽기와 매우 유사하다. 모압 왕 메사라는 이름은 모세의 이름과 관련이 있다. 메사는 또한 출애굽과 정복 이야기와 관련이 있으며, 그에 관한 이야기의 몇 가지 모티브는 출애굽 이야기와 이스라엘이 모압과 전쟁을 벌인 이야기(열왕기하 3장)와 공유된다. 모세처럼 압제에 반항하는 모압 왕 메사는 모세가 이집트에서 했던 것처럼 그의 백성을 이스라엘 밖으로 인도하고 그의 맏아들은 출애굽기 이야기에서 이스라엘의 맏아들이 학살을 선고받은 것처럼 길하레셋 성벽에서 죽임을 당했다.[11]
5. 아람과의 전쟁
엘리사의 도움으로 아람 임금 벤 하닷이 사마리아를 포위했을 때 아람군을 무찔렀다.[3] 그러나 요람은 전왕 아합이 아람군과 싸우다 전사했던 길르앗 라못에서 싸우다가 부상을 입었다.[3] 유다의 왕 아하시야가 그의 병문안을 위해 이스르엘 성으로 왔으나, 그 틈을 타 엘리사는 군대 사령관 예후를 새 임금으로 세웠다.[3] 요람 왕은 예후가 이스르엘 성으로 진군하는 것을 구원군이 온 것으로 오인하고 마차를 타고 나갔다가 예후의 군사들이 쏜 화살에 맞아 아하시야 왕과 함께 죽었다.[3]
하사엘이 엘리사가 예언한 대로 다마스쿠스에서 폭력적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여호람은 그의 조카 유다의 왕 아하시야와 동맹을 맺었다.[3] 두 왕은 길르앗 라못을 아람-다마스쿠스에서 빼앗기 위해 나섰으나 전투는 실패했고, 여호람은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이즈르엘로 물러나 회복했다.[3]
요람은 아람 왕 하사엘과 싸우다가 상처를 입고,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 이스르엘로 돌아왔다.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는 예언자의 말에 따라 자신이 왕이 될 것을 듣고, 요람을 활로 쏘아 죽였다.[9] 요람의 유해는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소유 밭에 던져졌다.[9]
이후 하사엘이 세웠다고 하는 텔단 비문에서는, 요람의 최후가 약간 다르게 묘사되어 요람은 그의 공격으로 "부상"이 아니라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0]
6. 죽음과 오므리 왕조의 종말
요람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이스르엘 성으로 돌아와 치료를 받았다. 이때 유다 왕 아하시야가 병문안을 왔다. 그러나 이 틈을 타 엘리사는 군대 사령관 예후를 새 왕으로 세웠다.[9] 요람 왕은 예후가 이스르엘 성으로 진군하는 것을 구원군이 온 것으로 오인하고 마차를 타고 나갔다가 예후의 군사들이 쏜 화살에 맞아 아하시야와 함께 죽었다.[9] 요람의 시신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밭에 던져졌는데, 이는 나봇의 땅을 불법으로 빼앗은 그의 부모에 대한 벌이었다.[9] 이로써 오므리 왕조는 막을 내리고 예후 왕조가 시작되었다.[9]
텔단 비문에는 요람의 최후가 다르게 묘사되어 있는데, 요람은 아람-다마스쿠스의 하사엘의 공격으로 "부상"이 아니라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0]
7. 고고학적 발견
텔단 비문(기원전 9세기, 1993년과 1994년에 발견)과 메사 석비(기원전 840년경)는 요람 통치 시기의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이다. 텔 단 비문에는 유다의 아하시야와 이스라엘의 여호람(요람)을 모두 죽였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람-다마스쿠스의 하사엘을 저자로 추정한다.[4] 메사 석비에는 모압 왕 메사가 오므리 왕조에게 40년간 억압받은 후 이스라엘에 대한 승리를 주장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5]
7. 1. 텔 단 비문
텔 단 비문(기원전 9세기, 1993년과 1994년에 발견)의 저자는 유다의 아하시야와 이스라엘의 요람(여호람)을 모두 죽였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람-다마스쿠스의 하사엘(기원전 842년 ~ 806년 경)을 저자로 보고 있다.[4] 아합과 하닷에제르 사이에 맺어진 연합은 카르카르 전투에서 아시리아 왕 살마네세르 3세를 저지하는 주요 세력이 되었지만, 그들의 후계자들 아래에서 와해되었고, 이스라엘과 유다가 아람-다마스쿠스에 대항하여 벌인 잇따른 전쟁에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이 죽임을 당했다. 중요한 군사 지도자였던 예후가 이 사건 이후 왕이 되었다.이후 하사엘이 세웠다고 하는 텔 단 비문에서는, 요람의 최후가 약간 다르게 묘사되어 요람은 그의 공격으로 "부상"이 아니라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0]
7. 2. 메사 석비
모압의 왕 메사는 아합이 죽은 틈을 타 아하시야 왕 때 반란을 일으켰다. 아하시야 왕은 반란을 진압하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고, 요람 왕이 이스라엘군을 모두 동원하고 유다 임금 여호람, 에돔 왕과 함께 진압하러 갔다. 그러나 도중 기병대가 마실 물이 떨어져 큰 위기에 빠졌고, 엘리사의 도움으로 모압군을 제압했으나, 메사가 맏아들을 제물로 바치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분노하여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7]메사 석비는 기원전 840년경에 작성되었으며, 모압 왕 메사가 오므리와 그의 아들에게 40년 동안 억압받은 후 이스라엘에 대한 중요한 승리를 거두고 여러 도시와 많은 전쟁 포로를 되찾았다고 기록했다. 성경 이야기는 이 반란이 유다의 아하시야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시작되어 열왕기하 3장의 여호람 통치까지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오므리의 "아들"에 대한 언급은 일부 학자들에 의해 오므리의 직계 아들보다는 2세대 또는 3세대 후손(아하시야 또는 여호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5]
모압 왕 메사의 이야기는 출애굽기와 매우 유사하다. 모압 왕 메사라는 이름은 모세의 이름과 관련이 있다. 메사는 또한 출애굽과 정복 이야기와 관련이 있으며, 그에 관한 이야기의 몇 가지 모티브는 출애굽 이야기와 이스라엘이 모압과 전쟁을 벌인 이야기와 공유된다 (열왕기하 3장). 모세처럼 압제에 반항하는 모압 왕 메사는 모세가 이집트에서 했던 것처럼 그의 백성을 이스라엘 밖으로 인도하고 그의 맏아들은 출애굽기 이야기에서 이스라엘의 맏아들이 학살을 선고받은 것처럼 길하레셋 성벽에서 죽임을 당했다.[11]
참조
[1]
서적
The Mysterious Numbers of the Hebrew Kings
Zondervan/Kregel
[2]
웹사이트
Cambridge Bible for Schools and Colleges on 2 Kings 3
http://biblehub.com/[...]
2017-12-20
[3]
간행물
Jehoram
http://www.jewishenc[...]
Jewish Encyclopedia
[4]
서적
Epigraphy, Iconography, and the Bible
Sheffield Phoenix Press
[5]
웹사이트
Biblical Archaeology 4: The Moabite Stone (a.k.a. Mesha Stele)
https://theosophical[...]
2011-07-15
[6]
서적
ティンデル聖書注解 列王記
いのちのことば社
[7]
문서
列王記』下3章全般
[8]
문서
『列王記(下)』6章全般
[9]
문서
『列王記(下)』9章全般
[10]
문서
私はアハブの息子ヨラムを殺した
[11]
서적
1 & 2 Kings
Brazos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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