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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 쇄항 담판 사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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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코하마 쇄항 담판 사절단은 1863년 고메이 천황의 양이 칙명과 막부의 개항장 폐쇄 통보에 대한 조약 당사국들의 반발, 그리고 대외 갈등 심화로 인해 막부가 대외 관계 개선을 위해 파견한 사절단이다. 이케다 나가오키를 정사로 하여 34명으로 구성되었으며, 프랑스와의 배상 협상 및 요코하마 쇄항을 목표로 파견되었다. 1864년 프랑스로 건너가 나폴레옹 3세를 알현했지만, 협상에 실패하고 파리 약정을 체결했다. 귀국 당시 조슈번의 간몬 해협 봉쇄와 시모노세키 전쟁 발발 등 여러 사건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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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 쇄항 담판 사절단
사절단 개요
명칭제2차 일본 사절단 (1864년)
다른 이름요코하마 쇄항 담판 사절단
목적쇄국 유지 협상
파견 시기1864년
파견 배경
배경양이 실행을 요구하는 칙명
추가 배경 정보막부의 권위 회복 및 서양과의 관계 재조정 시도
주요 인물
정사이케다 나가오키
부사가와즈 스코
여정
출발요코하마
경유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러시아
프로이센
귀국요코하마
협상 결과
결과쇄항 담판 실패
추가 설명조약 비준 거부 및 파리 협정 파기
사절단의 영향
영향막부의 권위 실추 및 개국론 대두
추가 영향사절단원들의 서양 문물 경험

2. 파견 배경

1863년 고메이 천황의 존왕양이 칙명과 막부의 개항장 폐쇄 통보로 일본과 서구 열강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막부는 칙명 발령 9일 후 이를 철회했으나, 시모노세키 사건, 사쓰에이 전쟁, 프랑스 장교 카뮈 살해 사건 등이 연이어 발생하며 상황이 악화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막부는 양이파를 회유하고 대외 관계를 개선하고자 요코하마 쇄항 담판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특히 이도가야 사건으로 프랑스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배상 문제가 발생하였고, 사절단은 이 문제도 함께 협상해야 했다. 그러나 요코하마 쇄항은 애초부터 성공하기 어려운 임무였다.

3. 사절단의 구성

사절단은 정사 이케다 나가오키를 비롯하여 34명으로 구성되었다. 부사 가와즈 스케쿠니, 메츠케 가와다 히로시, 이와쿠라 사절단 일등 서기관을 지낸 다나베 다이치 등이 포함되었다.

사절단에는 이 외에도 조사역, 통역관, 하급 관리들이 포함되었으며,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 시오타 사부로: 조사역격 통변 어용 출역, 외국 봉행 지배조두, 청국 특명 전권 공사
  • 스기우라 아이조: 정역, 도쿄 니치니치 신문 창간에 관여
  • 야마우치 로쿠사부로: 번역 어용 출역, 초대 제철소 장관
  • 마스다 다카시: 통변 어용 당분 고용, 미쓰이 물산 설립
  • 미야케 히데: 다나베 다이치 종자, 도쿄 대학 최초의 의학 박사 중 한 명
  • 옷코쓰 와타루: 이발사, 우에다 빈의 아버지

3. 1. 주요 인물

직책이름역할 및 활동
정사이케다 나가오키메츠케, 외국 봉행
부사가와즈 스케쿠니간조 봉행, 나가사키 봉행
메츠케가와다 히로시오메츠케, 메이지 유신 후 시즈오카번 소참사
외국 봉행 지배조두다나베 다이치이와쿠라 사절단 일등 서기관
조사역격 통변 어용 출역시오타 사부로외국 봉행 지배조두, 청국 특명 전권 공사
정역스기우라 아이조도쿄 니치니치 신문 창간에 관여
번역 어용 출역야마우치 로쿠사부로초대 제철소 장관
통변 어용 당분 고용마스다 다카시미쓰이 물산 설립
다나베 다이치 종자미야케 히데도쿄 대학 최초의 의학 박사 중 한 명
이발사옷코쓰 와타루우에다 빈의 아버지


4. 사절단의 여정

1864년 2월 6일, 사절단은 프랑스 군함 르 몽주 호를 타고 일본을 출발했다. 상하이와 인도 등을 거쳐 수에즈에서 육로로 카이로로 이동했다. 이동 도중 기자피라미드스핑크스를 견학하고 사진을 찍었다.

스핑크스 상 앞의 이케다 사절단, 1864년


이후 지중해를 통해 마르세유에 입항했고, 파리에 도착한 일행은 나폴레옹 3세를 알현했다.

나다르의 아들과 이케다 사절단 일행. 왼쪽은 야쓰 칸시로, 오른쪽은 사이토 지로타로(감독관)

5. 협상 과정과 결과

1864년 2월 6일, 이케다 나가오키 일행은 프랑스 군함 르 몽제 호를 타고 일본을 출발했다. 이들은 상하이와 인도 등을 거쳐 수에즈에서 육로로 카이로로 이동했고, 기자피라미드스핑크스를 견학하고 사진을 찍었다. 이후 지중해를 통해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파리에 도착한 일행은 나폴레옹 3세를 만났다. 그러나 요코하마 쇄항에 관한 협상은 프랑스의 반대로 실패했다. 프랑스는 요코하마를 대일 무역 및 외교 거점으로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케다 나가오키는 서구 문명의 위력을 실감하고 개국의 필요성을 느껴 협상을 중단했다.

1864년 6월 20일, 이케다 나가오키는 프랑스 정부와 파리 약정을 체결했다. 일행은 다른 나라를 방문하지 않고 귀국길에 올라 8월 23일 일본으로 돌아왔다.

이케다 나가오키 일행이 일본을 떠날 당시 조슈번간몬 해협을 봉쇄하고 있었고, 귀국할 때까지 봉쇄가 풀리지 않았다. 일행이 귀국하기 직전인 6월 19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4개국은 막부에 해협 봉쇄를 풀지 않으면 무력을 행사하겠다고 통보했다. 파리 약정에는 간몬 해협의 통행을 3개월 안에 허용한다는 조항이 있었지만, 막부는 약정 내용에 불만을 품고 비준하지 않았으며, 8월 25일에 파기했다. 결국 8월 28일, 4개국 연합 함대가 시모노세키를 포격하면서 시모노세키 전쟁이 일어났다.

6. 사절단의 의의와 영향

사절단은 요코하마 쇄항 협상에는 실패했지만, 서구 문물을 직접 경험하고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케다 나가오키를 비롯한 사절단원들은 서구 열강의 힘을 실감하고 개국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러한 사절단의 경험은 이후 일본의 개화 정책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특히, 사절단은 이집트기자에서 피라미드스핑크스를 견학하고 사진을 찍었는데, 이는 당시 일본인들이 서구 문물을 접한 드문 사례 중 하나였다.

또한, 유명한 사진작가 나다르가 사절단의 사진을 다수 촬영하여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나다르의 아들과 이케다 사절단 일행이 함께 찍은 사진도 남아있다.

7. 비판적 시각

요코하마 쇄항 담판 사절단은 막부의 외교적 무능과 시대착오적인 인식을 드러냈다는 비판을 받는다. 사절단은 1863년 고메이 천황의 양이 칙명에 따라 요코하마를 다시 폐쇄하려는 협상을 위해 파견되었으나, 이는 당시 국제 정세에 대한 무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양이 정책은 허구였으며, 서구 열강의 힘을 과소평가한 결과였다.

사절단은 프랑스와의 협상에서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파리 약정을 맺었으나 막부가 이를 비준하지 않고 파기함으로써 시모노세키 전쟁 발발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는 막부가 국제 관계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국내 정치적 상황만을 고려하여 외교 정책을 결정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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