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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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의천은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로, 11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본명은 석후였으나 송나라 철종의 이름과 같아 자인 의천으로 불렸다. 그는 불교 외에도 유교, 도교 등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고, 송나라에서 화엄종, 천태종 등을 배운 뒤 고려로 돌아와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여 속장경을 간행하는 등 고려 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천태종을 창시하고 교관겸수를 주장하며 교단을 통합하려 노력했으며, 숙종 때 주전론을 주장하는 등 사회 경제에도 기여했다. 47세에 국사로 입적했으며, 사후 대각국사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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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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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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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대각국사 (大覺國師, 'National Preceptor Grand Enlightenment') |
속명 | 왕후 (王煦) 또는 왕석후 (王釋煦) |
법명 | 의천 (義天) |
호 | 우세 (祐世) |
종교 | 불교 |
생애 | |
출생 | 1055년 |
출생지 | 고려 개성 (개경) |
사망 | 1101년 (46세) |
사망지 | 고려 개성 총지사 (摠持寺) |
묻힌 곳 | 영통사 (靈通寺), 개성 |
왕조 | 왕씨 |
가족 | |
아버지 | 고려 문종 |
어머니 | 인예왕후 |
학력 및 출가 | |
출가 | 1065년 영통사 (靈通寺) |
스승 | 난원 (爛圓) |
저서 | |
주요 저서 | 《신편제종교장총록》 3권 《신집원종문류(新集圓宗文類)》 22권 《석원사림(釋苑詞林)》 250권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23권 《대각국사외집(大覺國師外集)》 13권 《간정성유식론단과(刊定成唯識論單科》 3권 《천태사교의주(天台四敎儀註)》 3권 |
활동 | |
종파 | 천태종 |
2. 생애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의천은 11세에 스스로 출가를 원하여[3] 1065년 외삼촌인 승려 난원(爛圓)을 스승으로 삼아 영통사(靈通寺)에서 불교와 유교 경전을 공부하였다.[2] 그는 뛰어난 재능을 바탕으로 화엄종 연구에 매진하였으며[4], 다양한 불교 종파의 저작과 중국 고전까지 폭넓게 섭렵하였다.
의천은 화엄종 연구의 대가이자 뛰어난 저술가, 학자, 스승으로 명성을 쌓았으며, 대각국사(大覺國師)라는 칭호로도 알려졌다. '국사(國師)'는 그의 생전 칭호였고, '대각(大覺)'은 사후에 내려진 법명으로 "위대한 깨달음"을 의미한다. 그의 명성은 송나라에까지 알려져 철종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1085년에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송나라로 건너가[7] 여러 고승들과 교류하며 화엄종과 천태종 교학 등을 깊이 연구하였다.[4][7] 특히 그는 천태종의 가르침을 한국 불교에 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5] 또한 요나라를 방문하여 요 도종을 만나고 요나라 승려들과 교류하기도 하였다.
1086년 귀국한 의천은 형인 선종의 요청으로 개성의 흥왕사 주지를 맡아 교장도감을 설치하였다.[7] 그는 이곳에서 신라 이래의 국내 불교 서적은 물론 송나라, 요나라, 일본 등지에서 수집한 4,700여 권의 경전을 모아 《속장경》(續藏經) 간행을 주도하여 고려 불교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6][7] 이후 국청사를 중심으로 고려 천태종을 개창하여 교단의 통합을 시도하였다.[7]
의천은 불교 발전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형인 숙종에게 송나라의 화폐 경제를 본받아 화폐를 주조할 것을 건의하여 주전도감 설치와 해동통보, 삼한통보, 해동중보 등의 화폐 발행에도 영향을 미쳤다.[7]
만년에는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송나라 학자들과 서신 교류를 지속했으며, 《신편제종교장총록》, 《석원사림》 등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 1101년 국사(國師)로 책봉되었으나 곧 병세가 깊어져 입적하였다.[7] 그의 유해는 영통사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7]
2. 1. 출생과 출가
1055년 9월 28일 고려 제11대 왕 문종과 왕비 인예왕후 사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후(煦) 또는 석후(釋煦)였으나, 이름 '후'가 송나라 철종의 이름과 같다는 이유로 자(字)인 의천으로 주로 불렸다.11세 되던 해, 부왕 문종이 왕자들에게 "누가 출가하여 복전(福田)이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스스로 출가를 자원하였다고 전해진다.[3] 1065년 5월 14일, 외삼촌이자 당시 왕사(王師)였던 승려 난원(爛圓)을 은사로 삼아 출가하였다.[2] 문종은 난원을 불러 불일사(佛日寺) 계단(戒壇)에서 직접 의천의 머리를 깎게 하였다. 출가 후 영통사(靈通寺)에서 머물며 공부하였고[2], 같은 해 10월 불일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의천은 승려가 된 후 학문에 더욱 매진하여, 불교의 대승과 소승 경전(삼장)은 물론 유교 전적, 역사서, 제자백가 사상, 도교까지 폭넓게 섭렵하였다. 13세에는 우세(祐世)[8]라는 호를 받고 승통(僧統)이 되었다.[7] 스승 난원이 입적하자 그의 법맥을 이었다.
2. 2. 승려 활동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의천은 11세에 영통사에서 외가 친척인 승려 난원 아래에서 출가하여 불교 경전뿐 아니라 유교 경전까지 폭넓게 공부하였다.[2][3] 그는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화엄종 연구에 깊이 몰두했다.[4]의천은 형인 순종, 선종, 숙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의 명성은 국경을 넘어 요나라까지 알려져, 요 도종의 초청을 받기도 했다. 요 도종은 의천에게 직접 계를 받고 국사(國師)로 모셨으며, 의천이 고려로 돌아간 뒤에도 꾸준히 교류하며 가르침을 구했다.
1085년에는 선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불법을 더 깊이 배우기 위해 비밀리에 송나라로 건너갔다.[7] 송나라 철종의 환대 속에 여러 사찰을 순례하며 정원(淨源), 종간(從揀) 등 50여 명의 고승들과 교류하며 화엄종과 천태종 등의 교학을 깊이 연구하였다.[7][4] 이 과정에서 천태종의 가르침을 고려에 전파할 것을 다짐하였다.[7][5]
1086년 귀국 후 선종의 요청으로 흥왕사 주지가 되어 교장도감 설치를 주도하였다.[7] 이곳에서 국내외 불교 서적을 널리 수집하여 약 4,700여 권에 달하는 《속장경》을 간행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6][7] 이후 국청사를 중심으로 고려 천태종을 개창하였다.[7]
또한 의천은 송나라의 화폐 경제를 참고하여 숙종에게 화폐 유통의 필요성을 건의했고, 이는 주전도감 설치와 해동통보, 삼한통보, 해동중보 등의 화폐 주조로 이어졌다. 그는 『신편제종교장총록』, 『석원사림』 등 중요한 저술을 남겼으며, 사후 대각국사(大覺國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2. 2. 1. 흥왕사 주지와 교장도감 설치
중국 송나라를 순례 중이던 의천에게 선종은 귀국을 요청했다. 이는 아버지 문종이 창건했으나 문종 사후 오랫동안 주지가 공석이었던 흥왕사 때문이었다. 선종은 의천을 귀국시켜 칙명(勅命)으로 흥왕사 주지로 임명하고 강경(講經)과 선담(禪譚)의 법회를 지원하였다.[7]1086년 (선종 3년) 의천은 왕과 왕후의 영접 속에 귀국하여, 송나라에서 가져온 석전(釋典)과 경서 1천 권을 바쳤다. 선종의 칙명으로 흥왕사 주지가 된 의천은 그곳에 교장도감(敎藏都監) 설치를 주도했다.[7] 교장도감에서는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국내 불교 서적뿐만 아니라 송나라, 요나라, 일본 등지에서 경서를 적극적으로 구입하고 고서를 수집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속장경》(續藏經) 4,740여 권이 간행되어 고려 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7]
의천은 흥왕사 주지로 재직하던 중 모후 인예태후와 형 선종이 승하하자 다시 해인사로 물러났다.[7] 이후 헌종의 거듭된 초빙으로 다시 흥왕사 주지를 맡게 되었다.
2. 2. 2. 천태종 개창과 교단 통합 노력
1084년(선종 1) 송나라 정원(淨源) 법사의 초청을 받은 의천은 송나라에 가서 불법을 배우고자 왕에게 청했으나 왕이 말리므로, 1085년 남루한 옷차림으로 제자 수개(壽介)만 데리고 몰래 송나라로 떠났다. 왕은 크게 놀라 관리와 제자 낙진(樂眞), 혜선(慧宣), 도린(道隣) 등으로 수행하게 했다.[7] 의천은 비밀리에 배편으로 송나라에 입국했지만, 소문이 알려져 송나라 철종은 특별히 주객낭중(主客郎中)인 양걸(楊傑)을 보내 의천을 수행하고 인도하게 되었다.의천 일행은 송나라의 밀수(密水), 변하(汴河) 등을 순례하고, 변하에 도착하여 신전(宸殿)에서 철종을 접견하였다. 이후 차례로 여러 사찰을 방문하여 화엄종의 정원(淨源), 양연(懹璉), 택기(擇其)와 천태종의 혜림(慧琳), 종간(從揀) 등 50여 명의 고승들을 만나 불법을 논의했다. 철종은 의천을 계성사(啓聖寺)에 머물게 하고, 화엄종 법사 유성(有誠)과 함께 현수(賢首)의 화엄종과 천태종 양 교학의 같고 다름과 심오한 뜻에 대해 문답하게 하였다.[7] 또한 상국사(相國寺)의 원조선사와 흥국사 서천(西天)의 삼장(三藏) 천길상(天吉詳)을 찾아보고, 금산(金山)의 불인선사(佛印禪師) 요원(了元)에게 들렀으며, 항주(伉州)의 원공(源公, 정원) 법사를 찾아 혜인사(慧因寺)에서 《화엄소초(華嚴疏鈔)》의 의심스러운 점을 물었다.[7]
이때 선종이 귀국을 청하자, 의천은 자변(慈辨) 대사에게 천태종의 경론을 듣고, 천태산(天台山) 지자(智者)대사의 부도(浮圖)에 예배하며 발원문을 지어 천태종을 본국에 중흥할 것을 맹세했다.[7] 또한 영지(靈芝)의 대지(大智) 대사에게 계법을 받는 등 고승 50여 명을 만나 법요를 문답하였다.[7] 선종이 의천의 귀국을 서두른 이유는 문종이 직접 창건했으나 문종 사후 오랫동안 주지 자리가 비어 있던 흥왕사의 주지로 임명하기 위함이었다.
1086년(선종 3) 왕과 왕후의 영접을 받으며 환국한 의천은 송나라에서 가져온 석전(釋典)과 경서 1천 권을 바쳤다. 그는 흥왕사 주지로 임명되어 강경(講經)과 선담(禪譚)의 법회를 열었으며, 왕실의 지원을 받았다.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요나라, 송나라, 일본 등지에서 경서를 구입하고 고서를 수집하여 《속장경》 4천 7백 40여 권을 간행하였다.[7][6]
1094년(선종 11)에는 흥원사(興圓寺)의 주지로 있었고, 이후 해인사와 흥왕사를 오가다가 국청사(國淸寺)가 새로 세워지자 주지를 겸임하고 처음으로 천태교를 강설하며 고려 천태종을 열었다.[7] 흥왕사 주지로 재직 중 모후인 인예태후 이씨와 둘째 형인 선종이 승하하자 의천은 다시 해인사로 물러났다.
헌종이 즉위한 뒤에도 의천은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헌종은 불교 중흥을 위해 해인사에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의천을 개경으로 초빙하였고, 이에 의천은 다시 흥왕사 주지를 맡게 되었다.
2. 3. 생애 후반과 죽음
송나라의 승려 및 불교 학자들과 서신을 통해 사상을 교류하는 한편, 국내에서도 후학 양성에 힘썼다. 숙종 재위 시기에는 주전론(鑄錢論)을 주장하여 사회 경제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1097년에는 조카인 징엄(澄儼)을 제자로 받아들였고, 1098년(숙종 3년) 왕자 징엄이 승려가 되자 그의 스승이 되었다.[7] 형인 숙종은 자신의 다섯째 아들 원명국사 징엄(圓明國師 澄儼, 1090년 ~ 1141년)을 직접 삭발시켜 의천의 제자가 되게 함으로써 법통을 잇게 하였다.1101년(숙종 6년) 10월 3일, 고려 숙종으로부터 국사(國師)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미 병세가 깊어져 이틀 뒤인 10월 5일, 문병을 온 숙종에게 "원래 바라던 바는 불교의 정도(正道)를 중흥시키는 것이었으나, 병마(病魔)가 그 뜻을 빼앗았습니다. 바라옵건대 지극한 정성으로 불법을 보호하시어, 여래께서 국왕과 대신들에게 불법 수호를 당부하신 가르침을 받드신다면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총지사(總持寺)에서 입적하였다.[7] 이때 그의 나이는 47세, 법랍(法臘)은 36세였다.
숙종은 의천의 부음을 듣고 조회를 중단하고 그날을 임시 공휴일로 선포했으며, 직접 다비식을 주관한 뒤 수습된 영골사리(靈骨舍利)를 영통사 동쪽 산에 석실(石室)을 마련하여 안치하였다. 오관산(五冠山) 영통사 동쪽에 장사를 지냈으며, 김부식(金副軾)이 글을 지은 비석이 세워졌다. 또한 남숭산(南嵩山) 선봉사(仙鳳寺)에도 임존(林存)이 글을 지은 해동 천태종 시조 대각국사비가 건립되었다.[7]
그의 제자로는 서호(西湖)의 승려 혜소(惠素)가 있는데, 그는 후에 스승의 행적을 기록한 행록(行錄) 10권을 편찬했다. 태백산인(太白山人) 융응(戎膺) 역시 의천의 법맥을 이은 제자로, '법해(法海)의 용문(龍門)'이라 불렸다.[7]
의천은 여러 저술을 남겼는데, 대표적으로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教藏總錄)》 3권, 《신집원종문류(新集圓宗文類)》 22권, 《석원사림(釋苑詞林)》 250권 등이 있다. 그의 사후 제자들이 그의 행적과 시 등을 모아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23권과 《대각국사외집(大覺國師外集)》 13권을 편찬했으며, 이 외에도 《간정성유식론단과(刊定成唯識論單科)》 3권, 《천태사교의주(天台四敎儀註)》 3권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저술들 대부분은 소실되었고, 현재는 《신편제종교장총록》 3권과 《대각국사문집》, 《대각국사외집》의 일부 낙장본, 《원종문류》와 《석원사림》의 일부, 《간정성유식론단과》 등이 전해지고 있다.
3. 사상과 영향
의천은 화엄종 연구를 중심으로 폭넓은 불교 및 유교 경전을 섭렵한 학승이었다.[2][4]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영통사에서 난원 아래 수학하며 뛰어난 학문적 역량을 보였고, 특히 화엄경 연구에 깊이를 더했다. 의천의 사상은 단순히 경전 연구에만 머무르지 않고, 적극적인 국제 교류를 통해 확장되었다.
1085년에는 송나라로 건너가 철종의 후원을 받으며 당대의 고승들과 활발히 교류했다. 혜인사의 정원에게서는 화엄 교학을, 자변종간에게서는 천태종 교학을 배우는 등 여러 종파의 사상을 폭넓게 수용했다.[4] 특히 송나라에서 접한 천태종 사상은 이후 고려 불교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5] 그는 송나라뿐만 아니라 요나라를 방문하여 요나라 승려들과도 교류하며 국제적인 안목을 넓혔다.
귀국 후 의천은 송나라와 요나라, 일본 등지에서 수집한 방대한 불교 서적과 국내 자료를 바탕으로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속장경』(교장) 간행 사업을 주도했다.[6] 이는 고려 시대 불교 문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형인 숙종의 지원 아래 천태종을 개창하여, 이론 중심의 교종과 실천 중심의 선종 간의 조화를 추구하며 고려 불교계의 통합과 발전을 모색했다.
의천의 영향력은 불교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송나라의 화폐 경제를 참고하여 주전도감 설치를 건의하고 화폐 주조를 추진하는 등 국가 경제 정책에도 관여하며 사회 발전에 기여하고자 했다. 그의 사상과 활동은 『신편제종교장총록』, 『원종문류』, 『석원사림』 등 다수의 저술과 편찬물로 남아 후대에 전해지고 있으며, 이는 고려 불교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3. 1. 교관겸수와 천태종
의천은 어린 시절부터 영통사에서 난원 아래 불교와 유교 경전을 공부하며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특히 화엄종 연구에 깊이를 더했다.[2][4] 그는 화엄경을 중심으로 다양한 불교 종파의 저술과 중국 고전까지 폭넓게 탐구했다.1085년, 의천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송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송나라 철종의 후원을 받으며 여러 사찰을 방문하고 50명이 넘는 고승들과 교류했다.[4] 이 시기 의천은 혜인사의 정원에게서 화엄 교학을, 자변종간에게서 천태종 교학을 배웠으며, 영지 원조에게서는 계율을, 금산 요원과 혜림 원조 등에게서는 선종의 가르침을 받는 등 여러 종파의 사상을 두루 익혔다. 특히 천태종 교학의 학습은 이후 고려 불교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5]
3년간의 수행을 마치고 불경과 유학 서적 약 1,000권을 가지고 귀국한 의천은 고려 불교계의 통합과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개성 근교의 흥왕사 주지로 초빙되어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불교 서적뿐만 아니라 송, 요나라, 일본 등지에서 수집한 방대한 경전과 주석서를 모아 『속장경』(교장) 간행 사업을 주도했다.[6] 이 사업은 다양한 불교 사상을 집대성하여 연구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형인 숙종이 즉위한 후, 의천은 천태종을 정식으로 열 수 있도록 지원받았다. 이는 당시 여러 종파로 나뉘어 있던 고려 불교계에 새로운 통합의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천태종은 이론(교, 敎)과 실천(관, 觀)의 조화, 즉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중시하는 종파로서, 의천이 송나라에서 배운 다양한 사상을 바탕으로 고려 불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했던 의지를 보여준다. 의천은 천태종을 중심으로 교종과 선종의 통합을 시도하며 고려 불교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3. 2. 불교 대중화와 사회 기여
1086년 송나라에서 귀국한 의천은 선종과 왕후의 영접을 받으며 석전과 경서 1천여 권을 바쳤다.[7] 그는 흥왕사 주지로 임명되어 머물면서 강경과 선담 법회를 열어 불교 진흥에 힘썼다. 흥왕사에는 교장도감을 설치하여 요나라, 송나라, 일본 등지에서 경서를 구입하고 국내외 고서를 널리 수집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신라 시대 이래의 불교 서적과 송, 요, 일본의 불서까지 망라하여 《속장경》(교장) 4천 7백 40여 권을 간행하는 업적을 남겼다.[7][6] 이는 고려 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업이었다.1094년에는 흥원사 주지를 지냈으며, 이후 해인사에 잠시 머물다가 국청사가 새로 세워지자 주지를 겸임하며 처음으로 천태교를 강론하기 시작했다.[7] 이는 송나라 유학 중 천태산 지자대사의 부도 앞에서 천태종을 고려에 중흥시키겠다고 다짐했던 서원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7]
숙종 즉위 후에는 국정에도 참여하며 사회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송나라의 화폐 경제를 참고하여 주전론을 적극 주장하였고, 이에 따라 주전도감이 설치되어 해동통보, 삼한통보, 해동중보 등의 화폐가 주조되었다. 또한 1097년에는 조카이자 숙종의 아들인 징엄을 제자로 받아 후학 양성에도 힘썼으며,[7] 송나라 학자들과 서신을 교환하며 학문적 교류를 이어갔다.
의천은 불교 교리의 연구와 전파뿐만 아니라, 경전의 수집과 간행, 후학 양성, 나아가 사회경제적 기여까지 다방면에 걸쳐 큰 족적을 남겼다. 그의 주요 저술 및 편찬물은 다음과 같다.
저서 및 편찬물 | 비고 |
---|---|
속장경 (교장) | 4,740여 권 간행 |
신편제종교장총록 (의천록) | 2권 |
원종문류 | 22권 (현존 2권) |
석원사림 | |
대각국사문집 | |
해동유본견행록 (의천록) |
이러한 저술들은 후대 불교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4. 저서
의천은 화엄종 연구와 ''화엄경''을 중심으로 다수의 저술을 남긴 학자이자 불교 스승이었다.[4] 그는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요나라, 일본 등지에서 수많은 불교 서적과 주석서를 수집하여 목록집인 《신편제종교장총록》(神編諸宗敎藏總錄)을 편찬했다.[6] 이는 당시 동아시아에 흩어져 있던 불교 문헌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집대성한 중요한 작업으로 평가받는다.
이 목록을 바탕으로 의천은 개성의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신라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던 불교 서적을 비롯하여 송나라, 요나라, 일본 등에서 구해온 불서들을 모아 간행하였다. 이를 《속장경》(續藏經), 또는 《교장》(敎藏)이라고 부르며, 이는 고려 시대 불교 문화의 융성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후대 불교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의천의 주요 저술 및 편찬물은 다음과 같다.
- 《신편제종교장총록》(神編諸宗敎藏總錄) 3권: 국내외에서 수집한 불교 서적의 목록으로, '의천록'(義天錄)이라고도 불린다.
- 《신집원종문류》(新集圓宗文類) 22권: 화엄종(원종) 관련 문헌을 모은 책이다(현재 2권만 전해진다).
- 《석원사림》(釋苑詞林) 250권: 불교 용어나 고사 등을 풀이한 일종의 불교 백과사전이다.
-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23권: 의천 자신의 행적과 직접 지은 시와 글을 모은 문집이다.
- 《대각국사외집》(大覺國師外集) 13권: 《대각국사문집》에 실리지 않은 글들을 모은 것이다.
- 《간정성유식론단과》(刊定成唯識論單科) 3권: 유식학의 중요 경전인 성유식론에 대한 해설서이다.
- 《천태사교의주》(天台四敎儀註) 3권: 천태종의 핵심 교리를 설명한 《천태사교의》에 주석을 단 책이다.
- 《해동유본견행록》(海東有本見行錄): 당시 한국(해동)에 전해져 유통되던 불교 문헌 목록을 정리한 것으로, 이 역시 '의천록'(義天錄)이라고도 불린다.
이러한 의천의 저술과 편찬 활동은 고려 불교의 학문적 수준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 귀중한 불교 연구 자료를 남겼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5. 가계
1055년 9월 28일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과 왕비 인예왕후 이씨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석후(釋煦) 또는 후(煦)였으나, 그의 이름 '후'가 송나라 철종의 이름과 같다는 이유로 자(字)인 의천(義天)을 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가 11세가 되던 해, 아버지 문종이 왕자들에게 "누가 출가하여 복전(福田)이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스스로 출가를 자원했다고 전해진다. 1065년 5월 14일, 경덕국사 난원(爛圓)을 은사(恩師)로 삼아 출가하여 영통사(靈通寺)에서 불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문종은 경덕국사에게 직접 명하여 불일사(佛日寺) 계단(戒壇)에서 의천의 삭발을 거행하게 했다. 경덕국사는 의천의 외할아버지인 김은부의 아들이자 원혜왕후와 원성왕후의 오라비로, 의천에게는 외삼촌이 된다.
1065년 왕사(王師) 난원(爛圓)에게 삭발하고 승려가 된 의천은 영통사(靈通寺)에 머물렀다. 13세에는 '우세(祐世)'[8]라는 호를 받고 승통(僧統)의 지위에 올랐다.[7] 같은 해 10월에는 불일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승려가 된 후 학문에 더욱 정진하여, 대승과 소승의 경·율·론 삼장(三藏)은 물론 유교 경전, 역사서, 제자백가 사상까지 폭넓게 섭렵하였다.
스승인 경덕국사가 입적하자 그의 법문(法門)을 이어받았다. 이후 문종으로부터 '광지개종홍진우세승통(廣智開宗弘眞祐世僧統)'이라는 법호를 하사받았다.
구분 | 관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
조부모 | 조부 | 현종(顯宗) | 왕순(王詢) | 992년 ~ 1031년 | 제8대 국왕 |
조모 | 원혜왕후(元惠王后) | 김씨(金氏) | ? ~ 1022년 | 김은부의 딸 | |
부모 | 부왕 | 문종(文宗) | 왕휘(王徽) | 1019년 ~ 1083년 | 제11대 국왕 |
모후 | 인예왕후(仁睿王后) | 이씨(李氏) | ? ~ 1092년 | 이자연의 딸 | |
형제자매 | 형 | 순종(順宗) | 왕훈(王勳) | 1047년 ~ 1083년 | 제12대 국왕 |
형 | 선종(宣宗) | 왕운(王運) | 1049년 ~ 1094년 | 제13대 국왕 | |
형 | 숙종(肅宗) | 왕옹(王雍) | 1054년 ~ 1105년 | 제15대 국왕 | |
본인 | 의천(義天) | 왕후(王煦) | 1055년 ~ 1101년 | 대각국사(大覺國師) | |
동생 | 상안공(常安公) | 왕수(王琇) | ? ~ 1095년 | ||
동생 | 도생승통(道生僧統) | 왕탱(王竀) | ? ~ ? | ||
동생 | 금관후(金官侯) | 왕비(王㶨) | ? ~ 1092년 | ||
동생 | 변한후(卞韓侯) | 왕음(王愔) | ? ~ 1086년 | ||
동생 | 낙랑후(樂浪侯) | 왕침(王忱) | ? ~ 1083년 | ||
동생 | 총혜수좌(聰惠首座) | 왕경(王璟) | ? ~ ? | ||
누이 | 적경궁주(積慶宮主) | 왕씨(王氏) | ? ~ 1113년 | ||
누이 | 보령궁주(保寧宮主) | 왕씨(王氏) | ? ~ 1113년 | ||
외가 | 외조부 | 이자연(李子淵) | 1003년 ~ 1061년 | 문하시중, 경원 이씨 | |
외조모 | 안산군대부인(安山郡大夫人) | 이씨(李氏) | ? ~ ? | 인천 이씨, 이허겸의 딸 | |
외삼촌 | 경덕국사 난원(爛圓) | 김씨(金氏) | ? ~ ? | 의천의 스승, 김은부의 아들 | |
기타 | 조카 | 원명국사 징엄(澄儼) | 왕씨(王氏) | 1090년 ~ 1141년 | 숙종의 아들, 의천의 제자이자 법통 계승자 |
6. 평가
의천이 활동하던 시기 고려의 불교계는 선종과 교종의 대립이 심화되어 있었다. 그는 이러한 교단의 분열과 폐단을 바로잡고 통합하여, 불교의 가르침을 통해 사회를 안정시키고 올바른 국가 사상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천태사상을 중심으로 교단을 정비하려 했다.[3]
의천은 고려 불교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불교 경전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속장경 간행을 주도하였으며, 송나라에 유학하여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돌아와 천태종을 열어 교단 통합과 국가 발전을 꾀했다.[2][4][5] 또한 송나라의 화폐 제도를 참고하여 화폐 주조를 건의하는 등[6] 다방면에 걸쳐 업적을 남겼다. 이러한 활동들은 당시 고려 불교계의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으며, 국제 교류를 통해 고려 문화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사후에는 대각국사(大覺國師)라는 시호를 받았다.[4]
6. 1. 긍정적 평가
의천은 고려 불교가 선종과 교종으로 나뉘어 대립이 심각하던 시기에 활동했다. 그는 이러한 분열과 폐단을 바로잡고 교단을 통합하여 불교의 가르침으로 사회 안정과 올바른 사상 확립을 이루고자 했다.[3] 이러한 목표 달성을 위해 천태사상을 주목했다.그는 불교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받는다. 우선, 흩어져 있던 불교 서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속장경(續藏經) 간행을 주도한 점이 높이 평가된다. 이를 위해 개성 근교의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신라 시대부터 내려오던 불교 서적뿐만 아니라 송나라, 요나라, 일본 등지에서 불서를 광범위하게 수집했다.[6] 이렇게 모인 자료를 바탕으로 1073년부터 1090년까지 수많은 불교 주석서를 모아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편찬했는데, 이는 '교장'(敎藏) 또는 '속장경'이라 불리며, 당시 동아시아 불교학 연구의 중요한 성과로 인정받는다. 특히 중국과 일본에서 수집한 경전까지 포함하여 4,74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규모의 "화엄소초"(華嚴疏鈔)를 출판하기도 했다.
1085년에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송나라로 유학하여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송나라 철종의 후원을 받으며[4] 혜인사의 정원(淨源)에게서 화엄 교학을, 자변종간(慈辯宗侃)에게서 천태 교학을 배우는 등 당대 최고의 학승들과 교류하며 깊이 있는 학문 연구를 수행했다.[4][5] 특히 화엄종 학자 정원과는 귀국 후에도 서신을 주고받으며 학문적 교류를 이어갔다.[4] 또한 요나라를 방문하여 그곳의 승려들과 교류하는 등 국제적인 안목을 넓힌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귀국 후에는 송나라에서 배운 천태종을 한국 불교에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이를 중심으로 분열된 교단을 통합하고자 노력했다. 형인 숙종이 즉위한 후에는 천태종이 국가적으로 공인받으면서 교단 통합과 국가 발전을 위한 활동에 더욱 힘을 실었다. 그는 흥왕사 주지로 임명되어 불교 부흥을 이끌었으며, 국정에도 참여하여 송나라의 화폐 경제를 본받아 주전도감(鑄錢都監) 설치를 건의하고 해동통보, 삼한통보, 해동중보 등 화폐 주조를 통해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의천은 뛰어난 학자이자 저술가로서 화엄종 연구에 깊이를 더했으며, 화엄경 연구에 매진했다.[4] 그의 저술 활동은 고려 불교뿐만 아니라 후대 조선 불교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주요 저서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저서명 | 권수 | 비고 |
---|---|---|
신편제종교장총록 (新編諸宗敎藏總錄) | 2권 | 의천록(義天錄)이라고도 함 |
원종문류 (圓宗文類) | 22권 | 현재 2권만 전함 |
석원사림 (釋苑詞林) | ||
대각국사문집 (大覺國師文集) | ||
해동유본견행록 (海東有本見行錄) | 의천록(義天錄)이라고도 함 |
이처럼 의천은 불교 전적 정비, 새로운 사상 도입, 교단 통합 노력, 국가 발전 기여 등 다방면에 걸쳐 큰 업적을 남겨 고려 불교와 문화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활동은 당시 불교계의 폐단을 극복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으며, 국제 교류를 통해 고려 문화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사후에는 대각국사(大覺國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참조
[1]
서적
The Land of Scholars: Two Thousand Years of Korean Confucianism
https://books.google[...]
Homa & Sekey Books
[2]
웹사이트
의천
https://encykorea.ak[...]
2023-08-14
[3]
Encyclopedia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https://encykorea.ak[...]
[4]
Youtube
Uichon and the Golden Age of Koryo Buddhism - Nam Center for Korean Studies Colloquium Series 1/12/2011
https://www.youtube.[...]
2012-02-09
[5]
서적
Princeton Dictionary of Buddhism.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3
[6]
서적
Under the Microscope: The Secrets of the Tripitaka Koreana Woodblocks
https://books.google[...]
Cambridge Scholars Publishing
2014-09-18
[7]
백과사전
의천
https://ko.wikisourc[...]
[8]
문서
광지개종홍진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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