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신돈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신돈은 고려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개혁을 시도한 불교 승려이다. 1365년 진평후에 봉해지고, 신진사류를 등용하며 권문세족을 견제했으나, 전민변정도감 설치로 토지 개혁을 추진하면서 기득권 세력의 반발에 직면했다. 1371년 공민왕에 의해 처형되었으며, 이후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후손이라는 설이 퍼지기도 했다. 현대에는 신돈의 개혁 정책에 대한 재평가 여론이 존재하며, 드라마를 통해 대중에게 알려지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신돈 - 공민왕
    공민왕은 고려의 제31대 왕으로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개혁을 추진했지만, 친원 세력의 반발과 외세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개혁 정책과 신돈 등용을 통해 토지 개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시해당했다.
  • 신돈 - 우왕
    우왕은 고려 제33대 국왕으로 공민왕의 아들이며, 이인임의 추대로 10세에 즉위하여 명덕태후의 섭정을 받았으나, 술과 여색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하고 왜구 침입, 명나라와의 관계 설정 문제, 요동 정벌 명령, 위화도 회군 등의 사건을 겪으며 폐위되어 처형되었다.
  • 1371년 사망 - 이존오
    이존오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시인으로, 공민왕 때 신돈의 권세를 비판하다 좌천되었으며, 강직한 성품과 신돈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낸 시조로 알려져 있다.
  • 1371년 사망 - 잔 데브뢰 백작 영애
    잔 데브뢰 백작 영애는 샤를 4세와 결혼하여 카페 왕조 단절에 영향을 미쳤고 예술 후원자로서 유물을 남겼으며, 프랑스 왕위 계승과 관련된 정치적 상황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다.
신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직업불교 승려
무인
정치가
작가
학자
본관영산
작위진평후
신돈
요공
청한거사
법명편조
생애
출생일1322년 1월 21일
출생지고려 경상도 영산현 (現 대한민국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사망일1371년 8월 21일
사망지고려 경기도 수주 (現 대한민국 경기도 수원시)
사인사형
가족
아버지신원경
어머니옥천사의 여비 (생모)
양모박씨 부인
자녀1명
친척신부(이복 동생)
신예 (친척 형)
신순(친척 형)
이인임(친가 친척 자형)

2. 생애

신돈은 고려 공민왕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던 불교 승려로, 고려 사회 개혁을 시도했다. 공민왕은 신돈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1365년 그에게 청한거사(淸閑居士)라는 와 진평후(真平侯)라는 귀족 작위를 내렸다.

신돈은 신진사류 출신의 새로운 고위 관료들을 등용하고, 권력을 너무 많이 잡은 인물들을 축출했다. 또한 1366년 토지 개혁을 위한 정부 기구인 전민변정도감 설치를 추진하여, 기득권을 가진 강력한 구 귀족 세력의 반발에 직면했다. 아첨꾼들에게 둘러싸인 그는 지지 세력이 없었다. 결국 공민왕은 1371년 신돈을 처형했다.[26]


  • 1364년: 공민왕을 만나다.
  • 1365년: 진평후(眞平侯)에 봉해짐.

:수정履順론도섭리보세공신벽상삼한삼중대광령도첨의사사판중방감찰사사취산부원군제조승록사사겸판서운관사(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領都僉議使司事判重房監察司事鷲山府院君提調僧錄司事兼判書雲觀事)

  • 1366년: 전민변정도감(田民弁正都監)을 설치하고, 신돈(辛旽) 판사가 됨.
  • 1369년: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왕에게 천도 계획을 제안하고, 자신을 오도도사심관(五道都事審官)으로 임명할 것을 건의함.

: 국왕 암살 계획 → 수원으로 유배됨[8]
몰락그러나 이상과 목적을 급하게 실현하려는 개혁은 권문세족들과 귀족들을 위시한 상층 계급의 맹렬한 반감을 사기 마련이다. 권문세족들은 신돈이 간통했다, 왕 앞에서 무례하게 행동했다라고 하면서 신돈을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신돈의 집이 일곱 채이며 뇌물을 받았다는 등 부정축재 문제를 거론하기도 했다. 그리고 권문세족들과 귀족들을 위시한 상층 계급은 승려인 신돈이 여자를 가까이 하고 음란하다면서 맹공격하였다. 신돈을 암살하려는 자객이 두 번 신돈의 집 담장을 넘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1367년 영록대부집현전대학사(榮祿大夫集賢殿大學士)에 올라 권문세족들과 귀족들의 세력 기반을 무너뜨리고 자신의 친위 세력을 형성하려 하였으나 이는 평소 개혁에 염증을 느끼던 공민왕에게 공포심과 의구심을 심어 주게 되었고 1369년(공민왕 18) 풍수지리설을 주장하면서 개경에서 충주로 천도할 계획을 건의하였으나 경제 기반을 개경에 둔 권문세족들과 귀족들이 결사반대하여 무산되었다. 1369년 초 신돈은 스스로 오도도사심관(五道都事審官)이[27] 되려고 사심관제도(事審官制度)를 부활시키려 했으나 공민왕과 권문세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26] 이때부터 공민왕과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고 공민왕은 마침내 1370년 10월 친정(親政)할 뜻을 밝히기에 이른다.[26] 하지만 이미 과도하게 성장한 신돈의 세력은 공민왕의 친정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26]
유배와 죽음1369년(공민왕 18) 7월, 공민왕이 신돈을 부담스러워하는 사실을 알게 된 선부(選部) 의랑(議郞)인 이인(李韌)은 한림거사(寒林居士)라고 이름을 속이고 신돈이 반역을 꾀한다고 거짓으로 꾸민 글을 써 재상 김속명(金續命)의 집에 몰래 보냈다.[22] 김속명은 이를 공민왕에게 보고했고 신돈은 곧 공민왕을 살해하려는 역모 고변에 휘말려, 수원에 깊숙이 갇혀 있다가 2년 만인 1371년(공민왕 20) 7월 기현·이춘부·이운목(李云牧)과[28] 함께 사형장에서 목이 잘려 죽었다. 향년 49세였다.[26]

2. 1. 생애 초반

신돈은 1323년 경상도 영산현(靈山縣)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증문하좌정승(贈門下左政丞) 도첨의(都僉議)에 추증(追贈)된 신원경(辛原慶) 또는 신예(辛裔)이고, 어머니는 계성현(桂城縣) 옥천사(玉川寺)의 사비(寺婢)였다.[13] 신돈의 가문은 영산현의 유력한 가문이자 권신 이인임 가문과 사돈 사이였지만, 신돈은 노비에게서 태어난 서자였기에 불당(佛堂)에서 자라다가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그대로 승려가 되었다.

어려서 승려가 되었지만 모계(母系) 탓에 신분상으로 천한 처지에 있어 주위에 용납받지 못하고 늘 산방(山房)에 거처하다[14] 떠돌이 승려가 되었다.

2. 2. 승려 생활

신돈은 매골승(埋骨僧)으로서 불당을 찾는 신도를 신분에 따라 차별하지 않아 신자들이 감동했다.[15] 평소 마른 몸매에 눈빛이 반짝거렸고 사철 누더기 옷을 입고 다녔다.[15] 여자들은 신돈을 신승(神僧)이나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여겼고 백성과 노비들은 성인으로 추앙했다.[15] 한번은 염씨(廉氏) 대가(大家)에서 『고려비기』(高麗祕記)를 몰래 가져와 탐독하며 역사 지식을 쌓았다.

영산현 출신 승려였던 신돈은 당시 생불(生佛)이라는 소문이 있었고, 소문을 들은 공민왕은 영산현까지 직접 내려가 신돈과 대담한 후 개경으로 불러들였다. 이후 신돈은 떠돌이 생활을 마감하고 개경의 현화사 주지로 부임하였다.

2. 3. 왕사 시절

1354년 공민왕은 신돈을 왕사(王師)로 임명하려 하였으나, 노비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문제삼은 권문세족의 반발로 무산되었다.[16] 1358년 공민왕의 개혁을 주도하던 이제현이 사직하고, 공민왕은 왕사 보우를 통해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16] 이때 신돈은 공민왕의 측근인 김원명의 소개로 정식으로 개경 왕궁에 출입하면서 공민왕과 만나 궁중에 드나들기 시작하였다.[16] 공민왕은 꿈에서 어떤 승려가 자신을 구해주는 꿈을 꾸었는데, 다음날 김원명이 신돈을 데려와 인사시켰다. 신돈은 총명하여 공민왕에게 중망(重望)받았고, 공민왕은 불교 관련 일로 신돈을 자주 입궐시켰다.[16] 그러나 신돈의 명성과 특이한 성격, 낡은 사회질서에 구애받지 않는 태도는 반발과 의구심, 편견을 불러일으켰고, “나라를 어지럽힐 자는 필히 이 중놈이리라!”라는 비난도 있었다.[16] 무장인 정세운은 신돈을 요승(妖僧)이라 하여 죽이려 하였으나, 공민왕이 그를 피신시켰다.[16]

공민왕


김용(金鏞)의[17] 계략으로 정세운을 비롯한 공민왕의 많은 측근이 정계에서 사라졌을 때, 신돈은 다시 부름을 받고 입궐하여 공민왕의 개혁정책을 주도한다.[16] 1364년 두타승(頭陀僧)이 되어 공민왕을 알현하고[18] 궁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이어 공민왕은 신돈을 왕사에 임명하고 청한거사라는 를 내렸으며, 궁궐에 출입하게 하였다. 공민왕은 신돈에게 국정을 자문받아 따르지 않는 바가 없었고, 그로 말미암아 많은 추종자가 생겼다. 그는 고려 공민왕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던 불교 승려로, 고려 사회 개혁을 시도했다. 공민왕은 신돈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1365년 그에게 청한거사(淸閑居士)라는 와 진평후(真平侯)라는 귀족 작위를 내렸다.

2. 4. 환속과 개혁

1365년 공민왕신돈에게 국정을 자문받았고, 신돈은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공민왕은 신돈을 환속시키려 하였으나, 신돈은 "소승은 세상을 복되고 이롭게 할 뜻이 있습니다. 비록 권문세족들이 참언이나[19] 방해하더라도 저를 믿어 주어야합니다."라며 사양하였다. 김원명의 추천으로 공민왕에게 신임을 받아 사부(師傅)가 된 신돈은 권문세족과 거리가 먼 인물로, 공민왕의 개혁 정책을 주도했다.[20] 이인복, 최영, 이구수(李龜壽)를[21] 밀어내고 1365년에 정계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했다.[16]

1365년 2월, 왕비 노국대장공주가 산고(産苦)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자,[22] 실의에 빠진 공민왕은 왕사인 신돈에게 정권을 맡기고 자신은 불사(佛事)에 전념하였다.[22] 이에 신돈의 힘이 막강해졌다.[22] 1365년 7월, 신돈은 진평후(眞平侯)에 봉해지고,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등의 칭호를 받으며 정치 개혁을 단행했다. 신돈은 환속 후 속명으로 돈(旽)을 사용했다.[16]

신돈은 공자를 국사(國師)로 존숭케 하고, 1367년 성균관을 중건, 개축, 보수하였으며, 이색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발탁했다. 신돈은 성리학 이념을 부정하지 않았고,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 신진 유학자들을 후원했다.

2. 4. 1. 인사에 관한 쇄신

공민왕에게 후원받은 신돈이 일련의 개혁정책으로써 영향력을 확대하자 권문세족들의 반발은 극심했다.[22] 그 결과 오인택(吳仁澤), 조희고(趙希古), 김원명(金元命)을 위시해 많은 공신이 유배되었고 그 사람들의 가족은 노비로 편입되었다.[22]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려는 사람에 관한 쇄신은 신돈이 집권한 지 30일 만에 친훈(親勳)과 명망 있는 사람을 파면시켜 내쫓으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재상과 대간(臺諫)이 모두 신돈의 입에서 나왔다는 기록은 이런 사정을 웅변한다. 신돈은 관리를 승진시킬 때 근무연한을 고려하는 순자격식(循資格式)을 실시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권세가의 자제들이 남보다 빨리 승진하는 폐단을 막으려는 시도였다.[24] 그리고 신돈은 현량(賢良)의[25] 등용을 강조하면서 개혁 세력을 양성하려고 애썼다. 신돈이 전선(銓選)하면서 현량을 천거한다고 자칭하였으나 제목(除目)이 발표되고 보니 천거된 사람들이 모두 평소에 신돈이 마음에 둔 사람이었다는 기록이 이런 사실을 보여준다.[24] 신돈이 천거한 현량은 대부분 유교 소양을 갖춘 인재들이었다.[24]

2. 4. 2. 전민변정도감과 노비 석방

신돈이 가장 중점을 두고 실시하려 한 개혁정책은 노비와 토지개혁이었다.[16] 이것은 권문세족들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려는 정책이자 민간경제를 활성화시킬 유일책이었다.[16] 또한 그것은 결과로 권문세족의 힘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는 일이기도 하였다. 이런 신돈의 개혁정책은 전민변정도감의 설치로 구체화한다.[26]

1366년 5월 신돈은 토지개혁을 주관하는 관청인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부당하게 겸병당한 토지를 원주인에게 되돌려주고 강압 탓에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양민으로 되돌아가게 하였다.[26] 이는 '전(田)'과 '민(民)', 즉 토지와 백성의 소속을 바로잡는 관청으로서 신돈은 그 총책임을 맡아 농장주들이 불법으로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원주인에게 되돌려주고 강제로 노비가 된 사람을 본래 신분으로 되돌려주었다.[20] 신돈은 민중으로부터 성인으로 칭송받았다.[20]

1367년 말 신돈은 신라 말기 고승 도선의 저서 『도선비기』(道詵祕記)를 근거로 하여 공민왕에게 다른 지역으로 천도하자고 건의하고 서경을 길한 곳으로 택하여 스스로 서경에 가서 상지(相地)까지 하였지만 개경에 경제 기반을 둔 귀족들이 반대하여 실현되지는 않았다. 이어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이용해 부호들이 권세를 악용해 강탈한 토지를 각 소유자에게 돌려주고 권문세족이 불법으로 점유한 농지를 실제로 농사짓는 농민에게 되돌려주는 일을 계속하였으며, 광종 이후 폐지된 노비안검법을 부활시켜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과 생계 문제 탓에 노비를 자청한 사람들을 해방시켰고 부당하게 권문세족이 착복한 돈을 회수하는 등 국가 재정을 잘 관리하여 민심을 얻었다.

이에 따라 노비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성인(聖人)이 나타났다"라고 찬양했는데 노비와 토지를 잃은 권문세족과 귀족을 위시한 양반 계층은 "중놈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라고 비방하였다.[26]

2. 4. 3. 권력 확대와 권문세족의 반발

신돈의 힘이 날로 기세를 떨치자 공민왕의 모후(母后) 명덕태후(공원왕후) 홍씨를 비롯한 왕실 세력과 문신들의 우려가 높아갔지만 신돈을 향한 공민왕의 신뢰는 여전하여 오히려 그 비판 세력들이 제거당했다.[22] 그래서 1370년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보낸 친서에서 공민왕을 고려 국왕이라 칭하고 신돈을 상국으로 부를 만큼 신돈의 위세는 공민왕 못지않게 대단해졌다.[22] 그러나 신돈의 세력 확대는 공민왕에게도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하였다. 권문세족들을 견제하고자 내세운 신돈의 세력이 왕권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다.[22]

이제현


이제현은 관상을 볼 줄 알았는데 그 사람은 공민왕에게 여러 번 참소(讒訴)하면서 '신돈의 골상(骨相)은 옛날 흉인(凶人)의 골상과 같아 후환이 있을 듯하다'라고 '공민왕에게 신돈을 가까이하지 말 것'을 여러 번 요청하였다. 1366년 간관 정추(鄭樞)와 경주 사람 이존오(李存吾)는 신돈을 탄핵하였다가 도리어 공민왕에게 폄축(貶逐)당하기도 하였으나 공민왕의 각별한 신임을 확인한 권문세족들은 신돈을 계속 공격한다.

1367년 10월 오인택(吳仁澤)·경천흥(慶千興)과 신돈을 공민왕에게 소개하고 추천했던 김원명까지 가세하여 신돈을 제거하려고 비밀리에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파직당하고 장류(杖流)당하였다. 1368년 10월에는 김정(金精)·김흥조(金興祖)·김제안(金齊顔)이 신돈을 살해하려고 모의하다가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장류(杖流)되던 도중 모두 살해되었다.

기존 승려들이나 귀족 출신 승려들도 신돈을 안 좋게 보고 폄하하였다. 명덕태후의 친척이기도 한 보우는 신돈을 권력에 맛을 들인 사승(邪僧)으로 지목하여 비난하기도 했다.

2. 5. 축첩과 권력 남용 의혹

신돈은 환속한 뒤 한동안 기현(寄顯)의 집에 기거하였고 1367년 사택(舍宅)을 얻어 독립하면서 타락한 모습을 보였다.[26] 많은 첩을 거느리고 아이를 얻는가 하면 주색에 빠져 드는 일이 잦아 조신(朝臣)들이 비판할 빌미를 제공했다.[26]

2. 6. 생애 후반

그는 고려 공민왕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던 불교 승려로, 고려 사회 개혁을 시도했다. 공민왕은 신돈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1365년 그에게 청한거사(淸閑居士)라는 와 진평후(真平侯)라는 귀족 작위를 내렸다.[26]

신돈은 신진사류 출신의 새로운 고위 관료들을 등용하고, 권력을 너무 많이 잡은 인물들을 축출했다. 또한 1366년 토지 개혁을 위한 정부 기구인 전민변정도감 설치를 추진하여, 기득권을 가진 강력한 구 귀족 세력의 반발에 직면했다. 아첨꾼들에게 둘러싸인 그는 지지 세력이 없었다. 결국 공민왕은 1371년 신돈을 처형했다.[26]

  • 1364년: 공민왕을 만나다.
  • 1365년: 진평후(眞平侯)에 봉해짐.

:수정履順론도섭리보세공신벽상삼한삼중대광령도첨의사사판중방감찰사사취산부원군제조승록사사겸판서운관사(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領都僉議使司事判重房監察司事鷲山府院君提調僧錄司事兼判書雲觀事)

  • 1366년: 전민변정도감(田民弁正都監)을 설치하고, 신돈(辛旽) 판사가 됨.
  • 1369년: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왕에게 천도 계획을 제안하고, 자신을 오도도사심관(五道都事審官)으로 임명할 것을 건의함.

: 국왕 암살 계획 → 수원으로 유배됨[8]
몰락그러나 이상과 목적을 급하게 실현하려는 개혁은 권문세족들과 귀족들을 위시한 상층 계급의 맹렬한 반감을 사기 마련이다. 권문세족들은 신돈이 간통했다, 왕 앞에서 무례하게 행동했다라고 하면서 신돈을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신돈의 집이 일곱 채이며 뇌물을 받았다는 등 부정축재 문제를 거론하기도 했다. 그리고 권문세족들과 귀족들을 위시한 상층 계급은 승려인 신돈이 여자를 가까이 하고 음란하다면서 맹공격하였다. 신돈을 암살하려는 자객이 두 번 신돈의 집 담장을 넘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1367년 영록대부집현전대학사(榮祿大夫集賢殿大學士)에 올라 권문세족들과 귀족들의 세력 기반을 무너뜨리고 자신의 친위 세력을 형성하려 하였으나 이는 평소 개혁에 염증을 느끼던 공민왕에게 공포심과 의구심을 심어 주게 되었고 1369년(공민왕 18) 풍수지리설을 주장하면서 개경에서 충주로 천도할 계획을 건의하였으나 경제 기반을 개경에 둔 권문세족들과 귀족들이 결사반대하여 무산되었다. 1369년 초 신돈은 스스로 오도도사심관(五道都事審官)이[27] 되려고 사심관제도(事審官制度)를 부활시키려 했으나 공민왕과 권문세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26] 이때부터 공민왕과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고 공민왕은 마침내 1370년 10월 친정(親政)할 뜻을 밝히기에 이른다.[26] 하지만 이미 과도하게 성장한 신돈의 세력은 공민왕의 친정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26]
유배와 죽음1369년(공민왕 18) 7월, 공민왕이 신돈을 부담스러워하는 사실을 알게 된 선부(選部) 의랑(議郞)인 이인(李韌)은 한림거사(寒林居士)라고 이름을 속이고 신돈이 반역을 꾀한다고 거짓으로 꾸민 글을 써 재상 김속명(金續命)의 집에 몰래 보냈다.[22] 김속명은 이를 공민왕에게 보고했고 신돈은 곧 공민왕을 살해하려는 역모 고변에 휘말려, 수원부에 깊숙이 갇혀 있다가 2년 만인 1371년(공민왕 20) 7월 기현·이춘부·이운목(李云牧)과[28] 함께 사형장에서 목이 잘려 죽었다. 향년 49세였다.[26]

2. 6. 1. 몰락

그러나 이상과 목적을 급하게 실현하려는 개혁은 권문세족들과 귀족들을 위시한 상층 계급의 맹렬한 반감을 사기 마련이다. 권문세족들은 신돈이 간통했다, 왕 앞에서 무례하게 행동했다라고 하면서 신돈을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신돈의 집이 일곱 채이며 뇌물을 받았다는 등 부정축재 문제를 거론하기도 했다. 그리고 권문세족들과 귀족들을 위시한 상층 계급은 승려인 신돈이 여자를 가까이 하고 음란하다면서 맹공격하였다. 신돈을 암살하려는 자객이 두 번 신돈의 집 담장을 넘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1367년 영록대부집현전대학사(榮祿大夫集賢殿大學士)에 올라 권문세족들과 귀족들의 세력 기반을 무너뜨리고 자신의 친위 세력을 형성하려 하였으나 이는 평소 개혁에 염증을 느끼던 공민왕에게 공포심과 의구심을 심어 주게 되었고 1369년(공민왕 18) 풍수지리설을 주장하면서 개경에서 충주로 천도할 계획을 건의하였으나 경제 기반을 개경에 둔 권문세족들과 귀족들이 결사반대하여 무산되었다. 1369년 초 신돈은 스스로 오도도사심관(五道都事審官)이[27] 되려고 사심관제도(事審官制度)를 부활시키려 했으나 공민왕과 권문세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26] 이때부터 공민왕과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고 공민왕은 마침내 1370년 10월 친정(親政)할 뜻을 밝히기에 이른다.[26] 하지만 이미 과도하게 성장한 신돈의 세력은 공민왕의 친정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26]

2. 6. 2. 유배와 죽음

1369년(공민왕 18) 7월, 공민왕이 신돈을 부담스러워하는 사실을 알게 된 선부(選部) 의랑(議郞)인 이인(李韌)은 한림거사(寒林居士)라고 이름을 속이고 신돈이 반역을 꾀한다고 거짓으로 꾸민 글을 써 재상 김속명(金續命)의 집에 몰래 보냈다.[22] 김속명은 이를 공민왕에게 보고했고 신돈은 곧 공민왕을 살해하려는 역모 고변에 휘말려, 수원부에 깊숙이 갇혀 있다가 2년 만인 1371년(공민왕 20) 7월 기현·이춘부·이운목(李云牧)과[28] 함께 사형장에서 목이 잘려 죽었다. 향년 49세였다.[26]

2. 7. 사후

신돈 일파는 모두 유배되거나 처형되었다.[29] 신돈의 두 살 난 아들과 신순 가문도 모두 처형당하고 가산이 몰수되었다.[29] 신순 집안은 재력가였는데, 신돈의 이복동생인 강을성이 금을 판도사에 납품하고 값을 받기 전에 처형되자 지윤이 강을성의 아내를 첩으로 삼고 포목 일천오백 필을 차지했으며, 지윤은 신순이 처형되자 아들 지익겸을 신순의 딸과 혼인시켜 몰수된 신순의 집과 재산을 차지하였다.[29]

조선왕조 오백 년간 우왕과 창왕은 신돈의 후손이라는 설이 퍼졌다. 이는 공민왕의 후궁이자 우왕의 생모인 반야가 신돈의 시비(侍婢) 출신인 사실을 근거로 하였으며, 조선의 개국을 합리화시키려고 성리학자들이 날조하였다. 우왕과 창왕의 신돈 후손설은 조광조가 비판한 후 송시열이 재비판하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는 신돈 후손설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조작한 설로 인정되었다.

신돈은 이후 왕위를 찬탈한 반역자나 국정을 문란케 한 간신으로 인식되어 왔다.[30] 이는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후손으로 인식시켜 조선 건국을 합리화하려 했던 조선 개국 세력의 역사 왜곡에서 비롯된 것이다.[30] 유교가 국가 이념이었던 조선시대 내내 보우와 함께 전형이 될 만한 요승으로 매도당하고 비판받아 왔다. 1970년대 이후 신돈에 대한 재평가 여론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3. 사상적 측면

신돈은 신분 차별과 남녀 차별이 없는 사회를 지향했다.[15] 토지는 농사짓는 사람에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26] 승려였으나 유교를 배척하지 않고, 1367년에는 숭문관(崇文館) 옛터에 성균관을 중건하고 "공자는 천하 만세의 스승이다"라면서 유학 발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도 했다.[30] 도교 사상에도 마음이 끌려 주의를 기울였다.[30] 같은 해에는 도선비기를 근거로 천도를 건의하고 평양의 지세를 직접 살피기까지 하였으나 이 일은 성사되지 않았다.[30] 주육(酒肉)과 우바이(優婆夷)를 가까이하고, 대승불교를 수행한 승려[15]이기도 했다.

4. 평가와 비판

전민변정도감을 이용하여 많은 양민이 노비에서 환원되었고 권세가들이 부당하게 강탈당한 토지의 상당 부분이 원주인에게 되돌아가거나 국가에 귀속되어 고려는 경제상 안정을 도모할 기반을 구축하였다.[31] 또한 성균관을 중영하여 유학자들이 대거 배출됨으로써 조선 개국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신진사대부층의 성장을 촉진케 하였다.[31]

주요 사료들에서 신돈은 “나라를 망친 요승(妖僧)”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일부에서는 멸망한 고려의 인물을 조선의 기록자들이 업적을 왜곡하여 생긴 오류이며 부패하고 타락한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무엇이 정확한 주장인지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사대부들은 신돈을 요승이라고 비난했다. 여인들과 하층민들은 신분 차별하지 않고 사람을 대하는 신돈을 가리켜 신승(神僧)이나 문수보살의 화신(化身)인 문수 후신(文數 後身)이라며 존경하고 숭배했다.

대체로 신돈의 정치개혁은 공민왕에게 지지받았으나 후대 공민왕이 아내인 노국대장공주가 죽어서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상태에 이르자 신돈을 부담 요소로 파악했다.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을 추모하고자 묘역과 사당을 크게 지으려고 하였는데 신돈이 반대하여 배신감을 느꼈다.

공민왕이 신돈을 등용하여 국정 장악을 시도한 것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이를 위해 신돈에게 거의 전권을 위임하다시피 하였고, 신돈을 국왕과 대등한 위치에 두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1]

4. 1. 긍정적 평가

전민변정도감을 통해 많은 양민이 노비에서 해방되고 권세가들이 부당하게 강탈한 토지가 원주인에게 돌아가거나 국가에 귀속되어 고려 경제 안정에 기여했다.[31] 성균관 중영을 통해 신진사대부층의 성장을 촉진했다.[31]

여인들과 하층민들은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사람을 대하는 신돈을 신승(神僧)이나 문수보살의 화신(化身)인 문수 후신(文數 後身)이라며 존경하고 숭배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신돈의 전민변정도감 설치와 노비 해방 정책을 높이 평가하며, 그의 개혁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4. 2. 부정적 평가

권문세족들은 신돈을 "나라를 망친 요승(妖僧)"으로 비난했다.[31] 신돈은 성균관을 중영하여 신진사대부층의 성장을 촉진하였지만,[31] 사대부들은 그를 요승이라 폄하했다. 여인들과 하층민들은 신분을 차별하지 않는 신돈을 신승(神僧)이나 문수보살의 화신이라며 존경했다.

공민왕노국대장공주 사후 신돈을 부담스러워했고, 묘역과 사당 건축에 반대한 신돈에게 배신감을 느꼈다.[1] 신돈의 정치개혁은 공민왕의 지지를 받았으나, 노국대장공주 사후 공민왕이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틈을 타 신돈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국왕과 대등한 위치에 두었다는 비판을 받았다.[1]

4. 3. 현대적 재평가

1970년대 이후 신돈에 대한 재평가 여론이 대두되었다.[20] 조선 시대 기록자들이 신돈의 업적을 왜곡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20][31] 전민변정도감을 통해 많은 양민이 노비에서 환원되었고 권세가들이 부당하게 강탈당한 토지는 원주인에게 돌아가거나 국가에 귀속되어 고려는 경제적 안정을 찾았다.[31] 성균관 중영으로 유학자들이 대거 배출되어 신진사대부층의 성장을 촉진, 조선 개국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31] 사대부들은 신돈을 요승이라고 비난했지만, 여인들과 하층민들은 신분 차별하지 않는 신돈을 신승(神僧)이나 문수보살(文殊菩薩)의 화신(化身)이라며 존경했다.

MBC 드라마 신돈 방영으로 공민왕 재위 시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드라마에서는 공민왕이 노국공주와 신돈의 도움으로 원으로부터 독립하고 사회 모순 해결을 위해 개혁을 단행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당시, 사회부처 간부는 현 상황을 공민왕-신돈 관계에 비유하며 "국민(한국 국민)이 최순실을 대통령으로 뽑았다"며 비판했다.[9]

5. 가족 관계


  • 아버지 : 신원경(辛原慶)
  • 어머니 : 옥령사(玉靈寺)의 비녀(婢女)
  • 이복동생 : 강을성(姜乙成)

6. 저서

wikitext


  • 留本天符經중국어

7. 대중 문화


  • 1983년 KBS 드라마 《개국》에서 배우 백찬기가 신돈 역을 연기했다.
  • 2001년 드라마 《공민왕비사, 파몽기》에서 배우 최원석이 신돈 역을 연기했다.
  • 2005년부터 2006년까지 방영된 MBC 드라마 《신돈》에서 배우 손창민이 신돈 역을 맡았다. MBC 『신돈 고려중흥의 공신』의 방영으로 공민왕 재위 시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극중 왕은 개혁에 헌신한 군주로 묘사되었다. 드라마에서 공민왕은 원나라와 기황후 외척의 전횡에 시달리다 귀국하여, 노국공주와 신돈의 도움으로 원으로부터 독립하고 사회 모순 해결을 위해 개혁을 단행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 2012년부터 2013년까지 방영된 SBS 드라마 《대풍수》에서 배우 유하준이 신돈 역을 맡았다.
  • 2016년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의 관계에 대해 사회부처 간부는 "현재 상황은 고려시대 공민왕과 '''신돈'''과 같은 상황으로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국민(한국 국민)이 최순실을 대통령으로 뽑았다"며 비웃었다.[9]

참조

[1] 웹사이트 Sin Don http://contents.kore[...]
[2] 문서 동국승니록에 따른 신돈의 행적
[3] 문서 정언 이존우의 신돈 처벌 상소
[4] 문서 신돈 관련 기록 단어
[5] 문서 신돈 관련 기록 단어
[6] 문서 신돈의 반란과 수원 유배
[7] 웹사이트 李 成桂『明清史書の朝鮮記事に対する朝鮮の是正外交』 http://www.hmn.bun.k[...] 京都大学文学研究科21世紀COEプログラム 東アジアにおける国際秩序と交流の歴史的研究 ニュースレターNo. 2003-05-00
[8] 문서 신돈의 반란과 수원 유배
[9] 웹사이트 http://japan.hani.co[...]
[10] 문서 현재의 경기도 수원시
[11] 서적 한국사 X파일 다림 2002-00-00
[12] 문서 신돈과 우왕의 관계
[13] 문서 옥령사(玉靈寺)
[14] 웹사이트 신돈 http://koreandb.nate[...]
[15] 뉴스 요승인가 개혁가인가 … 신돈, 그의 정체는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2006-02-10
[16]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00-00
[17] 문서 신돈의 최후
[18] 문서 은밀히 찾아가 독대(獨對)
[19] 문서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거짓말
[20] 서적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00-00
[21] 문서 신돈의 생애 및 신분
[22]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00-00
[23] 문서 신돈과 혜비 이씨의 관계
[24] 뉴스 신돈, '요승'이름뒤에 숨은 개혁자의 모습 http://www.budreview[...] 불교평론 2002-03-10
[25] 문서 어질고 착한 사람
[26]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00-00
[27] 문서 고려시대 사심관에 대한 설명
[28] 문서 신돈 집권기의 인물, 임견미의 생애
[29] 문서 고려 중엽의 관직, 호부상서에 대한 설명
[30]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00-00
[31]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00-00
[32] 문서 한국의 대처승에 대한 설명
[33]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00-0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