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왕후
1. 개요
명의왕후는 고려 숙종의 왕비이자 예종의 어머니이다. 유홍과 낙랑국대부인 경주 김씨의 딸로 정주 유씨 출신이며, 숙종이 계림공이었을 때 혼인하여 명복궁주, 연덕궁주로 불렸다. 숙종 즉위 후 왕비가 되었으며, 숙종 사후에는 왕태후로 추존되어 천화전에 거주했다. 1112년에 사망하여 숭릉에 안장되었으며, 사후에 시호가 추가되었다. 슬하에 7남 4녀를 두었다.
| 직위 | 고려의 왕후 |
|---|---|
| 재위 기간 | 1099년 – 1105년 |
| 즉위 | 1099년 |
| 이전 | 사숙왕후 |
| 이후 | 경화왕후 |
| 직위 | 고려의 왕대비 |
| 재위 기간 | 1105년 – 1112년 |
| 즉위 | 1105년 |
| 이전 | 사숙태후 |
| 이후 | 공예태후 |
| 섭정 | 예종 (아들) |
| 섭정 유형 | 군주 |
| 휘 | 왕후 유씨 (명의왕후 유씨) |
| 존호 | 명복궁주 (明福宮主) (1079년 이전) 연덕궁주 (延德宮主) 명의태후 (明懿太后) (1105년 이후) 명의왕태후 (明懿王太后) (1108년 이후) |
| 시호 | 유가광혜명의왕태후 (柔嘉光惠明懿王太后) |
| 출생 | 기원후 1054년/1055년경 |
|---|---|
| 출생지 | 정주시, 개성부, 개경시, 고려 |
| 사망 | 1112년 7월 14일 (60대 후반 / 70대 초반) |
| 사망지 | 신박사, 개성부, 개경시, 고려 |
| 매장일 | 1112년 8월 |
| 매장지 | 숭릉 |
| 배우자 | 숙종 (1079년 결혼) |
| 자녀 | 왕우 대령공주 흥수공주 안수공주 왕필 왕징엄 왕보 왕효 왕서 복녕궁주 왕교 |
| 아버지 | 유홍 |
| 어머니 | 경주 김씨, 김원황의 딸 |
| 씨족 | 정주 유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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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년 사망 -
소철 (북송)
소철은 북송 시대의 문인이자 관료로서, 신법에 반대하다 정치적 고난을 겪었지만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사회 문제 해결에 헌신하며 현실 비판적인 시각과 뛰어난 문장력으로 당대 문단에 큰 영향을 미쳤고, 형인 소식과 함께 당송팔대가로 불린다. -
1112년 사망 -
왕영 (낙랑공)
왕영은 고려 현종의 손자이자 문종의 사위로 낙랑백에 봉해졌고, 여러 관직을 거쳐 수충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사후 경안공의 시호를 받았다. -
정주 류씨 -
원용왕후
원용왕후는 고려 현종의 비로, 대종과 선의왕후의 손녀이자 경장태자의 딸이며, 현종과는 근친혼 관계이고, 1013년 비로 책봉되었으나 자녀는 없었다. -
정주 류씨 -
선의왕후 (고려)
선의왕후는 고려 태조의 딸이자 대종의 부인으로, 성종을 낳았으며 아들이 왕위에 올라 왕후로 추존되었고, 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에 등장한다. -
고려 예종 -
숙비 최씨 (예종)
숙비 최씨는 해주 최씨 출신으로 고려 예종의 후궁이 되어 아들 왕각관을 낳았고, 인종 때 숙비에 책봉되었다. -
고려 예종 -
예종 (고려)
예종은 고려의 제16대 왕으로, 여진과의 갈등, 9성 반환, 교육 진흥 등에 힘썼으며 1122년 종양으로 사망했다.
2. 생애
명의왕후 유씨는 고려 숙종의 왕비이다. 숙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계림공이었을 때 혼인하였으며, 숙종 즉위 후 명복궁주, 연덕궁주로 불리다가 1099년(숙종 4년)에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예종이 즉위하면서 왕태후가 되었고, 거처는 천화전, 부는 숭명부, 생일은 지원절로 불리며 특별히 기려졌다.
1112년(예종 7년) 음력 7월 14일, 궁 밖으로 행차를 나갔다가 신박사에서 갑자기 병이 위독해져 사망했다. 사후 시호는 명의왕태후(明懿王太后)이며, 숭릉에 안장되었다. 요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고, 훗날 시호가 추가되어 유가광혜명의왕후(柔嘉光惠明懿王后)가 되었다.
숙종과의 사이에서 예종을 포함한 7남 4녀를 두었다.
2.1. 초기 생애 및 혼인
아버지는 문하시중을 지낸 유홍이며 어머니는 중추사 병부상서 김원황의 딸 金氏zh-Hant이다. 본관은 정주이며, 태조의 신혜왕후, 정덕왕후 이후 처음으로 배출된 정주(지금의 경기도 개풍군) 출신의 왕비이다.
숙종이 계림공(鷄林公)으로 불리던 시절에 혼인하였다. 처음에는 명복궁(明福宮)에 거주하며 명복궁주(明福宮主zh-Hant)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이후 연덕궁(延德宮)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연덕궁주(延德宮主zh-Hant)로 불렸다. 어머니 김씨 부인은 "낙랑국대부인"(樂浪國大夫人zh-Hant)으로 불렸다.
2.2. 왕비 시절
숙종이 계림공(鷄林公)으로 있을 때 혼인하였다. 숙종이 왕위에 오른 후 명복궁주(明福宮主)에 책봉되었다가 후에 연덕궁주(延德宮主)로 고쳤으며, 1099년(숙종 4년) 3월에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고려사》에는 왕비가 된 후 그녀의 성씨가 유씨가 아닌 이씨(李氏)로 기록되어 있어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2.3. 왕태후 시절
1105년 (숙종 10년) 남편 숙종이 사망하고 아들 예종이 즉위하면서 왕태후로 추존되었다. 왕태후가 된 후에는 천화전에 거주하며, 그녀의 부는 숭명부로 불렸다. 또한 그녀의 생일은 지원절이라 칭해져 특별히 기념되었다.
2.4. 사망과 장례
明懿王太后중국어는 1112년(예종 7년) 음력 7월 14일 궁 밖으로 나갔다가 갑자기 병이 위독해져 신박사에서 사망했다. 사후 시호를 명의왕태후(明懿王太后)라고 하고, 숭릉에 장사지냈다. 그녀가 죽은 이듬해에는 요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그녀를 치제하였다. 훗날 여러 차례에 걸쳐 시호가 추가되어 유가광혜명의왕후(柔嘉光惠明懿王后)라 하였다.
1112년(음력 8월 8일), 명의왕후는 병에 걸려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궁궐 밖 신박사로 요양을 떠났다가 노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같은 해 음력 8월, 숭릉에 묻혔고 시호를 받았다.
요나라는 명의왕후의 장례식에 조문 사절을 보냈다.
2.5. 시호 추상
1140년(인종 18년)에 '柔嘉zh-hant'라는 시호가 추가되었다. 1253년(고종 40년) 10월에 '光惠zh-hant'라는 시호가 추가되었다. 최종 시호는 '柔嘉光惠明懿王后zh-hant'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