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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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상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의사로, 1897년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났다. 3.1 운동에 참여하고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으며, 흥사단에서 활동하며 안창호의 비서관을 지냈다.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외과 의사로 활동하며 동우회, 조선의사협회 등에서 활동했다. 환자를 치료하다 단독에 감염되어 1936년 사망했으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유상규는 환자를 치료하던 중 단독(丹毒)에 감염되어[2] 1936년 7월 18일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 강사로 근무하던 중 순직했다.
이광수가 쓴 묘비명에 따르면, 유상규는 상하이에서 도산 안창호를 위해 도산의 아들처럼 헌신적으로 힘을 썼다. 귀국 후 경성의학전문학교 강사로 재직하다가 사퇴한 후에는 남을 돕는 데 시간을 보냈다.[1]
2. 생애
그의 '''장례'''는 대전에서 출옥하여 국내에 체류 중이던 '''안창호'''가 주관하여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정에서 치러졌다(1936년 7월 20일).[2] 장의 행렬은 경성의전부속병원(현 삼청동)으로부터 식장(현 이화동)까지 이어졌고, 당시 기록에는 유상규의 장례식은 불법집회로 의심받을 만큼 많은 친지와 동지가 모였고, 그의 은사 오사와 마사루 교수도 슬픔에 떨리는 음성으로 조사를 낭독했다고 한다.[2] 유상규는 장례 후 망우리공원 묘지에 안장되었으며,[2]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1][2]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유상규는 1897년 11월 10일 평안북도 강계군 강계읍 서부동에서 태어났으며,[1] 아호는 태허이다. 1916년 3월 경신중학교를 제11회로 졸업하고, 4월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에 제1회로 입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을 모으고 동원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나,[2] 졸업을 1년 앞두고 학업을 포기, 상하이로 망명하여 학교에서 퇴교당했다.[2]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임시정부 교통국에 근무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조직한 임정 조사원 강계지역 책임자로 독립운동 자료조사 및 수집 등의 활동을 하였다.[1] 1919년 5월에는 안창호의 비서관이 되었으며, 흥사단에 입단하여 흥사단 원동지부에 소속되었다.[1] 안창호는 한민족은 인재가 필요한 민족이라며 유상규에게 고국에 돌아가 학업을 마치라고 권고했고, 1923년 6월 유상규는 상해를 떠나 일본 오사카에서 노동을 하였다. 6개월간 토목현장 막노동자, 비누공장 노동자로서 조선인 공동 숙박소에 머무르며 육체노동을 체험했다.[1] 1924년 귀국하려다 경찰에 검거되어 수감되었다가 동년 4월 일본에서 추방되어 강제 귀국하였다.
1925년 경성의학전문학교 3학년으로 복학하여 학업을 계속하면서도 동우회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2] 상해 망명으로 인해 1927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입학 동기들보다 7년 늦게 졸업하였다.[1] 그의 학교 동문으로는 백인제, 유석창 등이 있다. 졸업 후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 외과의사 및 강사로 근무하면서 후배 양성과 환자 치료에 전념하였고, 박사학위를 준비하며 동아일보 등 여러 출판물에 대중 보건위생 계몽과 관련된 글을 기고하고 강연회 연사로 활동하였다.[2] 1930년 조선의사협회와 조선위생협회 창설을 주도하고 임원으로 활동했다.[2]
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 중인 1926년 1월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의 통합에 힘써 '''동우회'''를 조직, 초대 심사부 임원이 되었고, 의사면허 취득 후인 1929년에도 동우회 심사부 임원으로 재임명되어 활동했다. 1930년 11월 동우회 기관지 '''동광'''사 임원으로서 동광지 속간을 이뤘고, 1931년 8월 동우회 하계수양대회를 추진하여 대동강변에서 개최하고 수양동우회 강령 선전과 발전을 위해 청년개척군 조직을 협의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1] 그는 치료비를 받지 않는 왕진에도 열심이었고, 휴가에도 친구를 간호하기도 했다.
1936년 7월 18일, 환자를 치료하던 중 단독(丹毒)에 감염되어[2]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 강사로 근무하던 중 순직했다. 그의 '''장례'''는 대전에서 출옥하여 국내에 체류하던 '''안창호'''가 주관하여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정에서 치러졌다(1936.7.20.).[2] 장례 후 망우리공원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2]
2. 2.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유상규는 1897년 11월 10일 평안북도 강계군 강계읍 서부동에서 태어났으며, 아호는 태허이다.[1] 1916년 3월 경신중학교를 제11회로 졸업하고, 4월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에 제1회로 입학하였다.[2]
1919년 3·1운동에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을 모으고 동원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2]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 참조) 3학년을 마치고 졸업을 1년 앞둔 시점에 학업을 포기하고 상하이로 망명하여 학교에서 퇴교 처분을 받았다.[2]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설립되자 임시정부 교통국에서 근무하였으며,[2]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조직한 임정 조사원 강계지역 책임자로서 독립운동 자료 조사 및 수집 등의 활동을 하였다.[1] 1919년 5월 상해에서 임정 내무총장을 지낸 안창호의 비서관이 되었고, 흥사단에 입단하여 흥사단 원동지부에 속하였다.[1]
안창호는 한민족에게는 인재가 필요하다며 고국으로 돌아가 학업을 마치라고 권고했고, 이에 유상규는 1923년 6월 상해를 떠나 일본 오사카에서 노동을 체험하였다. 6개월간 토목현장 막노동자와 비누공장 노동자로서 조선인 공동 숙박소에 머무르면서 육체노동을 하였다. 1924년 귀국하려 할 때 경찰에 검거되어 수감되었다가 동년 4월 일본에서 추방되어 강제 귀국하게 되었다. 관동대지진을 오사카에서 겪으며 일본 노동환경에 대한 체험을 하였다.(수기 "방랑의 일편", 동광 창간1호,1926년 5월호)
1925년 경성의학전문학교 3학년으로 복학하여 학업을 계속하면서도 동우회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2] 상해 망명으로 인해 1927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입학 동기들보다 7년 늦게 졸업하였다.[1] 백인제, 유석창 등이 그의 학교 동문이다. 졸업 후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 외과의사로서 경성의전 강사로 근무하면서 후배 양성과 환자 치료에 전념하였고, 박사 학위를 준비하며 동아일보 등 여러 출판물에 대중 보건위생 계몽과 강연회에 꾸준히 연사로 활동하였다.[2] 1930년 조선의사협회와 조선위생협회 창설을 주도하고 임원으로 활동하는 등 바쁘게 일했다.[2]
1926년 1월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의 통합에 힘써 '''동우회'''를 조직하면서 초대 심사부 임원이 되었고, 의사면허 취득 후에도 1929년 동우회 심사부 임원으로 재임명되어 활약을 지속하였다. 1930년 11월 동우회 기관지 '''동광'''사 임원으로서 동광지 속간을 이루고, 1931년 8월 동우회 하계수양대회를 추진하여 대동강변에서 개최하고 수양동우회 강령 선전과 발전을 위해 청년개척군 조직을 협의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1] 그는 치료비를 받지 않는 왕진에도 열심이었고, 휴가에도 친구의 병간호를 하기도 했다.
유상규는 의전에서 교육, 치료, 국민 보건위생 계몽에 헌신하면서도 '''흥사단''' 운동 확장에 앞장섰다. 그러다 환자를 치료하던 중 단독(丹毒)에 감염되어[2] 1936년 7월 18일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 강사로 근무 중 순직했다.
그의 '''장례'''는 대전에서 출옥하여 국내에 체류하던 '''안창호'''가 주관하여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정에서 치러졌다(1936.7.20.). 장의 행렬은 경성의전부속병원(현 삼청동)으로부터 식장(현 이화동)까지 이어졌고, 당시 기록에는 유상규의 장례식은 불법집회로 의심받을 만큼 많은 친지와 동지가 모였고, 그의 은사 오사와 마사루 교수도 슬픔에 떨리는 음성으로 조사를 낭독했다고 한다.[2] 유상규는 장례 후 망우리가족묘지(현 망우리공원 묘지)에 묻혔으며,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2]
2. 3. 귀국과 의사 활동
유상규는 1923년 6월 안창호의 권고로 귀국길에 올라, 일본 오사카에서 6개월간 토목현장 막노동자와 비누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조선인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1924년 귀국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 수감되었다가 같은 해 4월 추방되어 강제 귀국하였다. 관동대지진을 오사카에서 겪으며 일본 노동환경을 체험했다.(수기 "방랑의 일편", 동광 창간1호,1926년 5월호)
귀국 후 1925년 경성의학전문학교 3학년으로 복학하여 학업을 계속하면서도 동우회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27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백인제, 유석창 등이 그의 학교 동문이다. 졸업 후에는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 외과의사 겸 경성의전 강사로 근무하면서 후배 양성과 환자 치료에 전념하였다. 박사 학위를 준비하며 동아일보 등 여러 출판물에 대중 보건위생 계몽 관련 기고를 하고 강연회 연사로도 활동하였다. 1930년 조선의사협회와 조선위생협회 창설을 주도하고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 중인 1926년 1월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의 통합에 힘써 '''동우회'''를 조직, 초대 심사부 임원이 되었고, 의사면허 취득 후인 1929년에도 동우회 심사부 임원으로 재임명되어 활동을 지속하였다. 1930년 11월 동우회 기관지 '''동광'''사 임원으로서 동광지 속간을 이끌었으며, 1931년 8월 동우회 하계수양대회를 대동강변에서 개최하고 수양동우회 강령 선전과 발전을 위해 청년개척군 조직을 협의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는 치료비를 받지 않는 왕진에도 열심이었고, 휴가에도 친구의 병간호를 하기도 했다.
2. 4. 독립운동과 사회 활동
유상규는 1897년 11월 10일 평안북도 강계군 강계읍 서부동에서 태어났으며, 아호는 태허이다.[1] 1916년 3월 경신중학교를 제11회로 졸업하고, 4월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제1회로 입학하였다.[2]
1919년 3·1운동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을 모으고 동원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미륵의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에도 이 내용이 묘사되어 있다. 3.1 운동 이후 학업을 포기하고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국에서 근무하였다.[2]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조직한 임정 조사원 강계지역 책임자가 되어 독립운동 자료조사 및 수집 등 활동을 하였다.[1] 1919년 5월에는 안창호의 비서관이 되었으며, 흥사단에 입단하여 흥사단 원동지부에서 활동하였다.[1]
안창호는 한민족에게는 인재가 필요하다며 유상규에게 고국으로 돌아가 학업을 마칠 것을 권고하였다. 이에 유상규는 1923년 6월 상해를 떠나 일본 오사카로 가서 6개월간 토목현장 막노동자와 비누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조선인 노동자들의 삶을 체험하였다. 1924년 귀국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가 같은 해 4월 추방되어 강제 귀국하였다. (수기 "방랑의 일편", 동광 창간1호,1926년 5월호)
1925년 경성의학전문학교 3학년으로 복학하여 학업을 이어가면서도 동우회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2] 1926년 1월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를 통합하여 '''동우회'''를 조직하고 초대 심사부 임원이 되었다. 의사면허 취득 후인 1929년에도 동우회 심사부 임원으로 재임명되어 활동을 이어갔다. 1930년 11월 동우회 기관지 '''동광'''사 임원으로서 동광지 속간을 이끌었으며, 1931년 8월 동우회 하계수양대회를 대동강변에서 개최하고 수양동우회 강령 선전과 발전을 위해 청년개척군 조직을 협의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1]
1927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1],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 외과의사이자 경성의전 강사로서 후배 양성과 환자 치료에 전념하였다. 박사 학위를 준비하며 동아일보 등 여러 출판물에 대중 보건위생 계몽 관련 글을 기고하고 강연회 연사로도 활동하였다. 1930년 조선의사협회와 조선위생협회 창설을 주도하고 임원으로 활동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였다.[2] 그는 치료비를 받지 않는 왕진을 하거나, 휴가 때 친구의 병간호를 하는 등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다.
유상규는 의학 교육, 치료, 국민 보건위생 계몽 활동과 더불어 '''흥사단''' 운동 확장에도 힘썼다. 그러나 환자를 치료하던 중 단독(丹毒)에 감염되어[2] 1936년 7월 18일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 강사로 근무하던 중 순직했다.
대전에서 출옥하여 국내에 머물던 '''안창호'''가 유상규의 '''장례'''를 주관하여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정에서 치렀다(1936.7.20.). 장례 행렬은 경성의전부속병원(현 삼청동)에서 식장(현 이화동)까지 이어졌으며, 당시 기록에 따르면 불법집회로 의심받을 만큼 많은 친지와 동지가 모였다고 한다. 그의 은사인 오사와 마사루 교수도 슬픈 목소리로 조사를 낭독했다.[2] 유상규는 망우리공원 묘지(당시 망우리가족묘지)에 안장되었으며,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2]
2. 5. 사망
유상규는 환자를 치료하던 중 단독(丹毒)에 감염되어[2] 1936년 7월 18일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 강사로 근무하던 중 순직했다.
그의 '''장례'''는 대전에서 출옥하여 국내에 체류 중이던 '''안창호'''가 주관하여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정에서 치러졌다(1936.7.20.).[2] 장의 행렬은 경성의전부속병원(현 삼청동)으로부터 식장(현 이화동)까지 이어졌고, 당시 기록에는 유상규의 장례식은 불법집회로 의심받을 만큼 많은 친지와 동지가 모였고, 그의 은사 오사와 마사루 교수도 슬픔에 떨리는 음성으로 조사를 낭독했다고 한다.[2] 유상규는 장례 후 망우리공원 묘지에 안장되었으며,[2]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1][2]
3. 사상 및 평가
장이욱은 '도산의 인격과 생애'에서 유상규가 도산을 스승으로만이 아니라 어버이로 모셨다고 평가했다. 도산 앞에서의 행동은 물론이고, 도산의 신상 모든 일에 대해 세심한 정성을 기울이는 모습이 훌륭한 '효자'와 같았다고 한다.[3] 도산은 유상규의 정성어린 섬김에 깊이 고마워했으며, 대동강 하류 만경대의 과수 밭을 유상규의 맏아들(옹섭)과 도산의 둘째아들(안필선)의 이름으로 보관하게 했다.[3]
도산 안창호는 자신의 사후 유상규의 묘소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실제로 1938년 유상규 묘 위에 안장되었다.[3] 1973년 도산 묘는 도산공원으로 이장되었으며, 현재 유상규 묘역에는 묘지석만 남아있다.[3]
3. 1. 안창호와의 관계
유상규는 상하이에서 도산 안창호를 위해 헌신적으로 힘을 썼다.[1] 장이욱은 '도산의 인격과 생애'에서 유상규가 도산을 스승으로만이 아니라 어버이로 모셨다고 평가했다.[3] 도산은 유상규의 정성어린 섬김에 깊이 고마워했으며, 대동강 하류 만경대의 과수 밭을 유상규의 맏아들(옹섭)과 도산의 둘째아들(안필선)의 이름으로 보관하게 했다.[3]
도산 안창호는 자신의 사후 유상규의 묘소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실제로 1938년 유상규 묘 위에 안장되었다.[3] 1973년 도산 묘는 도산공원으로 이장되었으며, 현재 유상규 묘역에는 묘지석만 남아있다.[3]
4. 연보
- 1897년 11월 10일 평안북도 강계군 강계읍 서부동 418번지에서 출생하였다.
- 1908년 사숙(私塾)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 1912년 강계 사립명신소학교를 졸업하였다.
- 1913년 경성사립경신학교에 입학하였다.
- 1916년 3월 경신학교를 제11회로 졸업하였다.
- 1916년 4월 20일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제1회로 입학하였다.
- 1919년 3월 1일 기미운동에 참여했다가 경성의전 3학년에서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상해로 망명하였다.
- 1919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서리 안창호의 비서로 활동하였다.
- 1919년 11월 임시정부 교통국 조사원을 겸임하였다.
-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상해 인성학고 교사를 겸임하였다.
- 1920년 2월 22일 흥사단 원동지부에 입단 문답을 하였다.
- 1920년 3월 유기준의 추천으로 흥사단에 입단하였다.
- 1920년 9월 9일 흥사단에 입단하여 단원번호 116번을 받았다.
- 1920년 12월 29일 흥사단 제7회 원동대회 준비위원 겸 설비위원을 맡았다.
- 1920년 말경 김경하를 금능신학교 백영엽에게 입학 주선하였다.
- 1922년 4월 15일 흥사단 제81회 상해지방강연회에서 '사회주의'를 주제로 강연하였다.
- 1922년 여름 김경하를 흥사단에 추천하였다.
- 1922년 7월 20일 한벽례학교 상과 1학년에 재학하면서 햄불리스쿨에서 수학하였다.
- 1923년 흥사단원동위원부 16반장(모이명 301)을 맡았다.
- 1923년 6월 23일 상해를 출발하여 6월 24일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 1923년 6월 25일 일본 오사카에서 노동일에 종사하였다.
- 1924년 1월 15일 일본 경찰범으로 구류되었다.
- 1924년 2월 6일 석방 후 강제 귀국되었다.
- 1925년 4월 13일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복학하였다.
- 1925년 11월 18일 이광수의 집에서 강경목을 만나 인쇄일로 2000원 지원 약속을 받았다.
- 1925년 11월 21일 이광수의 소개로 강경묵, 김경하와 함께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를 예방하였다.
- 1925년 12월 이윤재에게 수양동우회 가입을 추천하였다.
- 1926년 1월 이광수의 집에서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의 통합을 논의하였다.
- 1926년 1월 6일 동우회 심사부 임원으로 피선되었다.
- 1926년 4월 4일 동우회 기관지 「동광」 발행을 위한 이사회가 결정되었다.
- 1926년 4월 12일 동우회 개정 약법 제2조 수정에 합의하였다.
- 1927년 3월 23일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 1927년 3월 조선총독부의원 외과부수로 임명되었다.
- 1927년 5월 5일 강계에서 이애신과 결혼하였다.
- 1927년 6월 1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의사면허(증 808호)를 받았다.
- 1928년 4월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 외과교실 조수로 임명되었다.
- 1929년 3월 동우회 심사부 이사 및 경성지회 이사로 선임되었다.
- 1930년 2월 21일 조선의사협회 창립총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서무부 간사로 피선되었다.
- 1930년 4월 12일 이광수의 집에서 주요한 등과 동우회 약법 제2조 수정(대공주의 삽입)을 결정하였다.
- 1930년 경성제국대학 의과대학 약리학교실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하였다.
- 1930년 11월 6일 동우회 출판사인 동광사(東光社)의 이사로 선임되었다.
- 1931년 1월 1일 “동광”지가 속간되었다.
- 1931년 2월 22일 제1회 동우회 하계수양대회 개최가 결정되었고, 동우회 진흥책의 일환으로 청년개혁국 조직을 협의하였다.
- 1931년 8월 17일 대동강에서 제1회 동우회 하계수양대회가 개최되었다. 1934년까지 동우회 이사를 연임하였다.
- 1932년 1월 29일 동우회 사업설계위원, 평양지회 수석위원으로 선임되었다.
- 1932년 3월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 강사로 임명되었다.
- 1932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오사와(大澤) 약리학교실에서 연구하였다.
- 1933년 9월 14일 조선우생협회 창립대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 1934년 의학 논문 2편을 발표하였다.
- 1935년 의학 논문 1편을 발표하였다.
- 1936년 박사학위 논문 “약리학적 입장에서 관찰한 Rentogen선 작용에 관한 일고찰에 관하야”(Contributions to the Pharmacological Studies on X-ray)를 발표하였다. (조선의보, 제6권 제3호, 1936.9. 조선의사협회)
- 1936년 2월 4일 이용설의 집에서 안창호 주관 하에 동우회 회세 부활 및 회의 개최를 결정하고, 직업학교 및 동우회 회관 건립을 결정하였다.
- '''1936년 7월 18일 병사, 향년 39세'''.
- 1936년 7월 20일 장례는 경성의학전문학교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안창호 주관으로 서울 망우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 1938년 3월 10일 안창호가 사망하면서, 그의 유언에 따라 망우리 공동묘지 유상규 묘 위에 안장되었다.
-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제94호)이 추서되었다.
- 1993년 6월 1일 국가유공자(제11-447호)로 지정되었다.
활동
- 수양동맹회, 수양동우회 임원
- 동광사(東光社) 임원
- 조선의사협회 간사, 창립 발기인
- 조선우생협회 창립발기인
- 유린회(有隣會) 경성지회 창립
의학 업적
- 충양돌기염 수술후의 혈전성정맥염에 관하야
- 자외선조사혈액 재주사의 혈액신생촉진작용의 연구, 제1보
- S자장 원발성(原發性)암에 대하여
- 사독(蛇毒)면역에관한 연구(미발표)(오사와교실에서 연구)
- X선의 약리학적작용의 연구(미발표)(오사와교실에서 연구)
5. 가족 관계
유상규의 부인은 이애신(李愛信, 1902년 11월 26일 ~ 1990년 1월 21일)으로, 이화학당사범과를 졸업했다. 본관은 용문(龍門)이씨이다. 아들 유공섭은 병으로 요절했고, 다른 아들로는 유옹섭(1933년생)과 유종섭(1935년생, 2002년 사망)이 있다.
6. 저술 및 발표 글
유상규는 1926년 동광(東光) 창간호부터 1926년 8호까지 필명 태허(太虛)로 '방랑의 일편'을 연재했다. 1931년부터 1932년까지는 동광에 '처녀시대의 위생', '피로그린 수기', '병마의 낙원 조선', '의사평판기' 등을 기고했다. 같은 기간, 유상규 필명으로 '외상구급법', '가정비극 엄정비판', '청춘의 신비', '병원을 바로 이용하는 법' 등을 발표했다.
1932년부터 1935년까지 신동아(新東亞)에 '2천여 의사 제위에게'를 시작으로 '수술대', '조선인의 체격과 보건체조의 보편화책', '세브란스병원 문제를 중심으로', '우생학상으로 본 조선민족' 등을 기고했다. 신여성(新女性)에는 1933년에 '조선여성과 산아제한', '숫자로 나타난 조선의 혼인조사', '노의학사(魯醫學士)의 자살과 그 비판'을 발표했다. 1934년부터 1935년까지 신가정(新家庭)에 '값싼 동족애(同族愛)', '도시생활의 전원미를 가하는 방법'을 기고했다.
개벽(開闢)에는 1934년 '병원 야화(病院夜話)', 1935년 '신문에 대한 각계인사의 불평 희망'을 발표했다. 1936년 조광(朝光)에는 '불치의 환자를 속히 약이나 수술로 죽이는 것이 가한가? 불가한가?'라는 주제로 글을 기고했다. 1936년 조선중앙일보에는 '가정위생학'을 연재하고 '정결한 생활과 주부'라는 글을 발표했다.
1931년부터 1935년까지 경성의전강연부와 조선우생협회에서 주최한 강연회에서 '산아문제', '외과적 수술', '사회학상으로 본 의학', '우생학상으로 본 산아제한' 등을 주제로 강연했다.
7. 의학 업적
유상규는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의사로, 다양한 의학 관련 저술 및 강연 활동을 통해 의학 지식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그는 동광, 신동아, 신여성, 신가정, 개벽, 조광 등 여러 잡지에 의학 관련 글을 기고했다.
1931년에는 동광에 '처녀시대의 위생', '병마의 낙원 조선', '의사평판기' 등을 기고하여 당시 조선의 열악한 위생 환경과 의료 현실을 비판했다. 1932년에는 신동아에 '2천여 의사 제위에게'라는 격문을 발표하고, '수술대' 연작을 통해 가난한 환자들의 현실과 의료 윤리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1933년에는 신여성에 '조선여성과 산아제한', '숫자로 나타난 조선의 혼인조사' 등을 기고하여 여성 보건 문제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1935년에는 신가정에 '도시생활의 전원미를 가하는 방법'을 기고하여 위생적인 생활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유상규는 조선중앙일보에 '가정위생학'을 연재하고, 경성의전 강연부와 조선우생협회가 주최하는 강연회에서 '산아문제', '외과적 수술', '우생학상으로 본 산아제한' 등을 주제로 강연하며 대중들에게 의학 지식을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1935년 4월에는 신동아에 '세브란스병원 문제를 중심으로' 와 '우생학상으로 본 조선민족'을 기고했다.
참조
[1]
뉴스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http://ww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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