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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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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칙은 전한 문제 연간의 제나라 왕으로, 기원전 179년에 즉위하여 기원전 165년에 사망했다. 유칙은 아버지 유양의 뒤를 이어 제나라 왕이 되었으나, 문제 2년에 영토가 축소되었고, 문제 15년에 후사 없이 사망하여 제나라는 폐지되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 당시 의사 순우의는 젊은 나이의 비만과 운동 부족, 부적절한 침 치료가 원인이 되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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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칙

2. 생애

劉則|유칙중국어은 기원전 179년 아버지 애왕이 죽자 제나라 왕위를 이었다. 전한 문제는 숙부 주허후동모후를 왕으로 봉하면서 제나라 영토를 나누어 주었고, 이로 인해 유칙의 영토는 축소되었다. 기원전 165년에 유칙이 사망하자, 시호는 문(文)이라 하였고, 자식이 없어 제나라는 한나라의 직할지가 되었다. 이듬해 도혜왕의 아들들이 제나라를 나누어 왕이 되면서, 유칙의 제나라는 크게 축소되었다.[1]

2. 1. 제나라 왕 즉위

劉則|유칙중국어은 기원전 179년 아버지 애왕이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했다.[1]

전한 문제 2년(기원전 178년), 전한 문제주허후동모후조나라와 양나라 왕으로 삼기로 한 약속을 깨면서 제나라 영토 중 성양군을 주허후에게, 제북군·제남군을 동모후의 봉토로 헌납해야 했다. 이로써 주허후는 성양왕이, 동모후는 제북왕이 되었다.[1]

2. 2. 영토 축소와 제후왕 분봉

문제 2년(기원전 178년), 문제가 숙부 주허후동모후조나라와 양나라 왕으로 삼으려던 약속을 깨고 제나라 영토 일부를 나누어 주었다.[1] 성양군은 주허후에게 주어 성양왕이 되었고, 제북군제남군은 동모후에게 주어 제북왕이 되었다.

2. 3. 사망과 후사 단절

유칙은 기원전 165년에 사망하였으며, 자식이 없어 후사가 끊겼다. 시호는 문(文)이다.[1] 그의 죽음으로 제나라는 폐지되어 한나라의 직할지가 되었다.[1]

이듬해 4월 병인(丙寅)일, 도혜왕의 아들 양허후(陽虛侯) 유장려가 제왕에 봉해졌다. 이외에도 도혜왕의 다른 다섯 아들이 함께 제나라를 나누어 왕이 되어, 유장려의 새 제나라는 이전 문왕의 제나라의 임치군 서부로 축소되었다.[1]

전한 문제는 제나라의 태창령을 지낸 의사 순우의에게 문왕이 병사한 까닭을 물어보았고, 순우의는 소문으로 들은 문왕의 증세로 병을 진단해 대답했다.[1] 순우의에 따르면 문왕은 병들었을 때 살이 찌고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해 천식이 생겼고, 나이가 미처 20이 되지 못했으나[2] 달리지 않고 걸어 천도에 순응하지 않았다.[1] 나중에 의원들이 침을 놓아서 더욱 위독해졌는데, 문왕의 질병에는 침을 쓰면 안 되는 것이었다.[3]

2. 4. 죽음에 대한 의학적 기록

전한 문제 때 제나라 태창령을 지낸 의사 순우의는 문왕의 병세를 진단하고 치료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1] 순우의의 기록에 따르면, 문왕은 젊은 나이에 비만과 운동 부족으로 인해 천식 증세를 보였다.[2] 또한, 문왕은 달리는 대신 걷는 것을 택하여 천도에 순응하지 않았다. 이후 의원들이 침을 놓았으나, 이는 문왕의 병세에 적합하지 않은 치료법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병세가 악화되었다.[3]

참조

[1] 문서 순우의와 문제의 문답에서 제문왕을 시호로 부르고 당시의 제왕은 전에 양허후(제효왕의 이전 작위)를 지낸 인물이라고 했으므로, 이 문답은 문제의 재위(기원전 180년 ~ 기원전 157년)와 [[유장려|제효왕]] 재위(기원전 164년 ~ 기원전 153년) 중의 일이다.
[2] 문서 아버지 애왕의 몰년으로부터 계산하면 문왕이 죽을 때의 나이는 적어도 25세를 넘긴다.
[3] 서적 사기 권105 편작창공열전제45
[4] 문서 여나라가 도중에 제천나라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유명 (제천왕)|유명]]이 봉해진 [[진류군|제천나라]]와는 연관이 없다.
[5] 문서 작위만 추증된 것으로, 봉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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