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양 (제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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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양(劉襄)은 전한 시대의 제나라 왕으로, 제도혜왕 유비의 아들이다. 기원전 18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나라 왕이 되었으며, 여태후 사후 여씨 일족의 반란에 연루되어 황제 옹립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전한 문제 유항이 황위에 오르면서 제나라로 돌아갔고, 문제 원년에 사망하여 애(哀)라는 시호를 받았다.

유양 (제애왕)
인물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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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양의 묘비
이름유양
로마자 표기Yu Xiang
생몰년기원전 230년 ~ 기원전 179년
봉호제애왕
작위
아버지유비
어머니사씨
형제유흥거, 유장, 유벽강, 유지, 유모
자녀유칙, 유현, 유앙, 유지
시대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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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혜제 7년(기원전 188년), 아버지 제도혜왕이 죽자 제왕의 자리를 이었다. 당시 여후가 태후, 태황태후로 임조칭제하며 권력을 잡고 있었다. 여후 원년(기원전 187년), 여후는 여태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제나라의 제남군을 여나라 봉토로 헌납하도록 강요했고, 여후 7년(기원전 181년)에는 유택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낭야군을 분할하도록 했다.

기원전 180년, 여후가 사망하자 여씨 일족은 반란을 계획했고, 유양은 장안에 있던 동생 성양경왕과 연락하여 거병을 준비했다. 유양은 여씨가 파견한 승상 소평을 공격하여 자살로 내몰고, 군사를 일으켜 낭야왕 유택을 속여 군사를 빼앗고, 여나라를 공격했다. 또 제후왕들에게 여씨 일족을 규탄하는 서신을 보냈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대장군 관영을 파견해 형양(滎陽)에 주둔시키며 사태를 관망하게 했고, 유양은 국경에서 대기하며 여씨 일족이 제거되기를 기다렸다.

여후가 사망한 후 여산, 여록 등의 여씨 일족은 유장과 주발, 진평 등에 의해 제거되었고,(呂氏之亂중국어) 대신들은 유양의 외가 사(駟)씨 가문에 악인이 많다는 이유를 들어 유항을 황제로 추대했다. 유양은 군사를 이끌고 봉국으로 돌아갔고, 문제는 유양에게 성양군, 낭야군, 제남군을 반환했다.

기원전 179년, 유양은 사망했다. 시호는 애왕(哀王)이며, 아들 유칙이 제왕의 자리를 계승했다.

2.1. 여후 집권기

혜제 7년(기원전 188년), 아버지 제도혜왕이 죽자 제왕의 자리를 이었다. 당시 여후가 태후, 태황태후로 임조칭제하며 권력을 잡고 있었다.

여후 원년(기원전 187년), 여후는 여태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제나라의 제남군을 여나라 봉토로 헌납하도록 강요했다. 여후 7년(기원전 181년)에는 고제의 종제이자 여씨 일족을 왕으로 세우는 데 동조한 유택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낭야군을 분할하도록 했다.

2.2. 여씨의 난 진압

기원전 180년, 여후가 사망하자 여씨 일족은 반란을 계획했다. 유양은 장안에 있던 동생 성양경왕과 연락하여 거병을 준비했다. 유양은 여씨가 파견한 승상 소평을 공격하여 자살로 내몰고, 장인 사균, 낭중령 축오, 중위 위발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낭야왕 유택을 속여 군사를 빼앗고, 여나라를 공격했다. 또 제후왕들에게 여씨 일족을 규탄하는 서신을 보냈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대장군 관영을 파견해 형양(滎陽)에 주둔시키며 사태를 관망하게 했다. 관영은 여씨 일족이 득을 보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제나라를 공격하는 대신, 제후왕들에게 여씨 일족이 타도될 때까지 기다리라는 공문을 보냈다. 유양은 국경에서 대기하며 여씨 일족이 제거되기를 기다렸다.

2.3. 황제 추대 실패와 사망

기원전 180년, 여후가 사망한 후 여산, 여록 등의 여씨 일족은 유장과 주발, 진평 등에 의해 제거되었다.(呂氏之亂중국어) 대신들은 다음 황제를 누구로 할지에 대해 논의했는데, 제애왕(유양)의 외가 사(駟)씨 가문에 악인이 많다는 이유를 들어 제애왕 대신 고조의 넷째 아들인 대왕 유항을 황제로 추대했다. 이가 곧 문제이다. 유양은 군사를 이끌고 봉국으로 돌아갔다. 문제는 유양에게 성양군, 낭야군, 제남군을 반환했다.

기원전 179년, 유양은 사망했다. 시호는 애왕(哀王)이다. 아들 유칙이 제왕의 자리를 계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