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양 (제애왕)
1. 개요
유양(劉襄)은 전한 시대의 제나라 왕으로, 제도혜왕 유비의 아들이다. 기원전 18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나라 왕이 되었으며, 여태후 사후 여씨 일족의 반란에 연루되어 황제 옹립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전한 문제 유항이 황위에 오르면서 제나라로 돌아갔고, 문제 원년에 사망하여 애(哀)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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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유양 |
|---|---|
| 로마자 표기 | Yu Xiang |
| 생몰년 | 기원전 230년 ~ 기원전 179년 |
| 봉호 | 제애왕 |
| 작위 | 왕 |
| 아버지 | 유비 |
| 어머니 | 사씨 |
| 형제 | 유흥거, 유장, 유벽강, 유지, 유모 |
| 자녀 | 유칙, 유현, 유앙, 유지 |
| 시대 | 전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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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79년 사망 -
필리포스 5세
필리포스 5세는 기원전 221년부터 기원전 179년까지 마케도니아 왕국을 통치한 왕으로, 즉위 후 그리스 내 입지를 다지고 로마와 충돌했으며 말년에는 국가 재건에 힘썼다. -
기원전 179년 사망 -
임오 (전한)
임오는 전한 초 고조를 도와 풍 땅을 지키고 상당태수를 지냈으며, 진희의 반란을 막은 공으로 광아후에 봉해졌으나 여후 시기에 어사대부에서 면직되었고 문제 원년에 사망한 인물이다. -
생년 미상 -
손니 알리
손니 알리는 송가이 제국의 군주로서 니제르 강 유역을 장악한 후 팀북투와 젠네를 정복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제국을 확장했으며, 전통 신앙과 이슬람교 조화, 법에 의한 국가 통제, 무역 확립 등 내치에도 힘썼다. -
생년 미상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
기원전 2세기 중국 사람 -
신도가
신도가는 전한 시대의 무관 출신으로, 항우와의 싸움과 영포의 난에 참여하고 혜제 때 회양태수를 거쳐 승상에 올랐으며, 청렴한 성품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던 등통을 처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조조와의 갈등 끝에 죽음을 맞이하여 절후의 시호를 받았다. -
기원전 2세기 중국 사람 -
사마천
사마천은 중국 전한 시대의 역사가, 천문학자, 역법가로서 중국 최초의 통사로 평가받는 『사기』를 저술하여 기전체를 확립하고 역사 서술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이릉 변호 사건으로 궁형을 받는 고난을 겪었으며 태초력 제정에도 참여하는 등 천문학과 역법에도 업적을 남겼다.
2. 생애
혜제 7년(기원전 188년), 아버지 제도혜왕이 죽자 제왕의 자리를 이었다. 당시 여후가 태후, 태황태후로 임조칭제하며 권력을 잡고 있었다. 여후 원년(기원전 187년), 여후는 여태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제나라의 제남군을 여나라 봉토로 헌납하도록 강요했고, 여후 7년(기원전 181년)에는 유택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낭야군을 분할하도록 했다.
기원전 180년, 여후가 사망하자 여씨 일족은 반란을 계획했고, 유양은 장안에 있던 동생 성양경왕과 연락하여 거병을 준비했다. 유양은 여씨가 파견한 승상 소평을 공격하여 자살로 내몰고, 군사를 일으켜 낭야왕 유택을 속여 군사를 빼앗고, 여나라를 공격했다. 또 제후왕들에게 여씨 일족을 규탄하는 서신을 보냈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대장군 관영을 파견해 형양(滎陽)에 주둔시키며 사태를 관망하게 했고, 유양은 국경에서 대기하며 여씨 일족이 제거되기를 기다렸다.
여후가 사망한 후 여산, 여록 등의 여씨 일족은 유장과 주발, 진평 등에 의해 제거되었고,(呂氏之亂중국어) 대신들은 유양의 외가 사(駟)씨 가문에 악인이 많다는 이유를 들어 유항을 황제로 추대했다. 유양은 군사를 이끌고 봉국으로 돌아갔고, 문제는 유양에게 성양군, 낭야군, 제남군을 반환했다.
기원전 179년, 유양은 사망했다. 시호는 애왕(哀王)이며, 아들 유칙이 제왕의 자리를 계승했다.
2.1. 여후 집권기
혜제 7년(기원전 188년), 아버지 제도혜왕이 죽자 제왕의 자리를 이었다. 당시 여후가 태후, 태황태후로 임조칭제하며 권력을 잡고 있었다.
여후 원년(기원전 187년), 여후는 여태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제나라의 제남군을 여나라 봉토로 헌납하도록 강요했다. 여후 7년(기원전 181년)에는 고제의 종제이자 여씨 일족을 왕으로 세우는 데 동조한 유택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낭야군을 분할하도록 했다.
2.2. 여씨의 난 진압
기원전 180년, 여후가 사망하자 여씨 일족은 반란을 계획했다. 유양은 장안에 있던 동생 성양경왕과 연락하여 거병을 준비했다. 유양은 여씨가 파견한 승상 소평을 공격하여 자살로 내몰고, 장인 사균, 낭중령 축오, 중위 위발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낭야왕 유택을 속여 군사를 빼앗고, 여나라를 공격했다. 또 제후왕들에게 여씨 일족을 규탄하는 서신을 보냈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대장군 관영을 파견해 형양(滎陽)에 주둔시키며 사태를 관망하게 했다. 관영은 여씨 일족이 득을 보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제나라를 공격하는 대신, 제후왕들에게 여씨 일족이 타도될 때까지 기다리라는 공문을 보냈다. 유양은 국경에서 대기하며 여씨 일족이 제거되기를 기다렸다.
2.3. 황제 추대 실패와 사망
기원전 180년, 여후가 사망한 후 여산, 여록 등의 여씨 일족은 유장과 주발, 진평 등에 의해 제거되었다.(呂氏之亂중국어) 대신들은 다음 황제를 누구로 할지에 대해 논의했는데, 제애왕(유양)의 외가 사(駟)씨 가문에 악인이 많다는 이유를 들어 제애왕 대신 고조의 넷째 아들인 대왕 유항을 황제로 추대했다. 이가 곧 문제이다. 유양은 군사를 이끌고 봉국으로 돌아갔다. 문제는 유양에게 성양군, 낭야군, 제남군을 반환했다.
기원전 179년, 유양은 사망했다. 시호는 애왕(哀王)이다. 아들 유칙이 제왕의 자리를 계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