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 (제도혜왕)
1. 개요
유비는 전한 고제의 서장자로, 제도혜왕에 봉해졌다. 기원전 201년에 제왕이 되었으며, 회남왕 영포의 반란에 고제를 따라 참전했다. 혜제 시대에는 여태후의 경계를 받았으며, 독이 든 술을 마실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 이후 성양군을 노원공주에게 주어 여태후의 환심을 샀다. 기원전 189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들이 오초칠국의 난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등 역사적 사건과 연관되었다.
| 이름 | 유비 |
|---|---|
| 작위 | 제나라 도혜왕 (齊悼惠王) |
| 생몰년 | 기원전 201년 ~ 기원전 189년 11월경 |
| 아버지 | 유방 (한고조) |
| 어머니 | 조희 |
| 작위 | 제왕/제후왕 |
|---|---|
| 통치 기간 | 기원전 201년 ~ 기원전 189년 말 |
| 아버지 | 유방 |
|---|---|
| 어머니 | 조희 |
| 사기 기록 | 사기 제52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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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89년 사망 -
번쾌
번쾌는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기여한 인물로, 홍문의 회에서 유방을 구하고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워 열후, 상국에 이르렀으나 여씨 일족의 모함으로 처형될 뻔했다. -
전한 고제의 황자 -
유여의
전한 고조 유방의 아들 유여의는 척부인의 소생으로 고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여태후와 중신들의 반대로 황태자 경쟁에서 실패한 후 대왕과 조왕에 봉해졌지만 여태후의 미움을 받아 독살당하고 그의 죽음은 혜제에게 정치적 무관심을 야기했다. -
전한 고제의 황자 -
전한 혜제
전한 혜제는 고조 유방과 여태후의 적자로 태어나 전한의 제2대 황제에 즉위했으나, 여태후의 섭정으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정치에 뜻을 잃어 국정을 소홀히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역사에 관한 -
광서제
광서제는 도광제의 손자이자 순친왕 혁현의 아들로, 1875년 청나라의 황제가 되었으며, 서태후의 섭정 아래 무술변법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유폐된 채 사망했다. -
역사에 관한 -
2013년
2013년은 박근혜 대통령 취임, 교황 사임, 북한 핵실험, 용산 개발 사업 부도, 윤창중 사건, 스노든 폭로, 김연아 우승, 방탄소년단 데뷔, 넬슨 만델라 사망 등 국내외적으로 다양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사건들이 발생한 해이다.
2. 생애
유방(고조)의 서장자로, 생모는 조씨이다.
기원전 201년, 초왕으로 봉해진 한신을 대신하여 제왕에 봉해졌다. 한나라에서 종실 (유씨 일문)을 제후왕으로 세운 초기 사례였다. 유비는 유방의 아들 중 이미 성인이었다. 또한, 역전의 명장 평양후 조참을 재상 (제후상)으로 배정받았다.
기원전 196년 회남왕 영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조를 따라 조참을 부장으로 12만 군세를 이끌고 종군했다.
기원전 195년, 고조가 붕어하고 이복 동생인 혜제가 즉위하자, 유비의 입장은 미묘해졌다. 척씨의 아들 유여의가 혜제와 황태자 지위를 다툰 이후, 혜제의 어머니 여태후는 종실에 대해 깊은 의심을 품게 되었다. 유비의 어머니 조씨는 출신이 보잘것없었지만, 유비는 고조의 장자이자 혜제의 형이었기에, 여태후는 불안감을 느꼈다.
기원전 193년, 유비는 장안 궁궐에서 의식을 치르고 혜제와 여태후의 연회에 초대되었다. 혜제는 "궁중에서는 황제와 신하라는 관계 때문에 여러모로 딱딱해졌지만, 지금은 가족들만 있으니 좀 더 편하게 지내자"라고 말하며 유비를 상석에 앉게 했다. 그러나 여태후는 불만을 품었다. 유비는 독이 든 술을 마실 뻔했지만, 혜제가 독배를 들자 여태후가 당황하여 술잔을 버리게 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훗날 이 사실을 안 유비는 신하의 조언에 따라 성양군을 노원공주에게 탕목읍으로 바쳐 여태후의 환심을 샀다.
2.1. 제왕 즉위와 혜제 시대
기원전 201년, 초왕으로 봉해진 한신을 대신하여 제왕에 봉해졌고, 교동, 교서, 임치, 제북, 박양, 성양 6군 73현을 통치했다. 조참을 상국으로, 부관을 우승상으로 두었다.
기원전 196년, 회남왕 영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제를 따라 종군하였다.
이듬해, 고제가 붕어하고 이복동생 혜제가 즉위하였다. 고제의 총애가 두터웠던 척부인의 아들 유여의가 혜제와 함께 황태자 자리를 놓고 다툰 이래로, 혜제의 생모인 여태후는 종실에 의심을 품기 시작하였다. 유비의 모친 조씨는 근본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한미한 자였으나, 유비는 고제의 장자였기 때문에 여태후는 이를 불안히 여겼다.
기원전 193년, 유비는 장안의 궁궐에서 의식을 치르고 혜제와 여태후의 연회에 초대되었다. 이때 혜제는 이번 연회에서는 허물없이 시간을 보내자고 제안하였고, 이에 고제의 장자인 유비가 상석에 앉게 되었다. 그러나 여태후는 이를 불쾌히 여겼고, 유비는 아무것도 모른 채 독이 든 술을 마실 뻔하였으나 혜제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 훗날 이 사실을 안 유비는 신하의 조언을 따라, 자신의 영지 중 성양군을 노원공주에게 주어 여태후의 환심을 샀다.
기원전 189년, 숨을 거두었다. 시호를 도혜라 하였고, 아들 유양이 작위를 이었다.
2.2. 사후
혜제 6년(기원전 189년), 유비는 숨을 거두었다. 시호는 도혜이며, 아들 유양이 제왕의 작위를 이었다. 이후 기원전 180년에 일어난 여씨 일족 타도 쿠데타에서 유비의 장자인 제왕 유양과 차자인 주허후 유장(후의 성양왕)은 큰 역할을 했다. 기원전 154년에 일어난 오초칠국의 난에서는 모반을 일으킨 7명의 왕 중 4명이 유비의 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