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화 (전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유화는 전조의 황제이다. 유연이 한나라를 건국한 후 대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유연이 황제에 즉위하자 대사마를 겸임하고 양왕에 봉해졌다. 310년에 황태자가 되었고, 그 해 7월 유연 사후 황위에 올랐다. 즉위 후 외숙 호연유를 재상으로 임명하고 동생들을 숙청하려 했으나 유총에게 패하여 살해당했다. 재위 기간은 6일 또는 7일이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전조의 황제 - 유연 (전조)
4세기 초 중국 북방 흉노족 출신 유연은 팔왕의 난 시기 한나라 부흥을 명분으로 한 왕조를 건국하고 한왕에 즉위하여 광문제로 추존되었으며, 그의 나라 한은 조카 유요에 의해 한조 또는 전조로 불리게 되었다. - 전조의 황제 - 유찬 (전조)
유찬은 전조의 황족으로 유총의 차남이며, 하내왕으로 활약하다 유총 사후 황제에 즉위했으나 폭정을 일삼다 근준의 쿠데타로 살해당하면서 전조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 310년 사망 - 유연 (전조)
4세기 초 중국 북방 흉노족 출신 유연은 팔왕의 난 시기 한나라 부흥을 명분으로 한 왕조를 건국하고 한왕에 즉위하여 광문제로 추존되었으며, 그의 나라 한은 조카 유요에 의해 한조 또는 전조로 불리게 되었다. - 310년 사망 - 기림 이사금
기림 이사금은 신라의 14대 이사금으로 왜와의 화친, 낙랑 및 대방의 항복을 이끌었으며, 307년 국호를 사로에서 신라로 확정하는 데 기여했다. - 암살된 사람 - 제임스 쿡
제임스 쿡은 18세기 영국의 탐험가이자 해군 장교로서, 세 차례의 태평양 탐험을 통해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 동부 해안을 탐사하고 지도를 제작하는 등 지리적 발견에 기여했으며 남극권에 진입하고 하와이 제도를 기록했으나, 하와이에서 원주민과의 충돌로 사망했다. - 암살된 사람 - 정여립
정여립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동인으로 전향하여 이이를 비판하다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후 대동계를 결성했으나 반란 혐의로 자결했으며, 기축옥사로 동서인 갈등을 심화시킨 인물이다.
유화 (전조) | |
---|---|
기본 정보 | |
이름 | 유화 |
한자 표기 | 劉和 |
로마자 표기 | Ryu Hwa |
시대 | 전조 |
재위 기간 | 310년 |
칭호 | 황제 |
휘 | 유화 |
자 | 현태 |
신상 정보 | |
출생 정보 | 미상 |
사망 일시 | 310년 |
부친 | 유연 |
모친 | 호연황후 |
통치 정보 | |
계승 순서 | 전조 황제 |
즉위 전 | 유연 |
계승 후 | 유총 |
2. 생애
유화는 유연 (호연황후의 아들)의 장남으로 추정된다. 진서에 따르면, 유화는 위풍당당하고 잘생겼으며 건장한 외모를 지녔고 키는 약 1.96m였다. 그는 학문적이었지만 의심이 많고 인색했다.[1] 젊은 시절 『모시』, 『춘추좌씨전』, 『정씨역』을 숙독했다.[5]
308년 '''양왕'''(梁王)에 봉해졌으며,[1] 310년 유연 사후 즉위했으나, 재위 기간은 7일(혹은 6일)에 불과했다.
2. 1. 초기 생애와 황태자 책봉
308년 11월, 한(漢)나라 황제 유연은 유화를 대장군에 임명하였다. 12월에는 대사마에 임명하고 양왕(梁王)에 봉했다.[1]310년 1월, 태자로 책봉되었다.[4] 같은 해 7월, 유연이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했다.[4] 유연은 사망하기 전, 유화의 형제들인 제왕 유유(劉裕), 노왕 유륭(劉隆), 북해왕 유애(劉乂)에게 수도에 상당한 병력을 배치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다른 아들인 초왕 유총이 이미 보유한 대규모 군대에 더하여, 그들이 유화를 보좌하여 정치 및 군사 문제를 처리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2]
그러나 유화의 외숙부인 종정 호연유와 황족인 서창왕 유예는 유연에게 후사를 부탁받지 못했기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4] 그들은 시중 유승과 결탁하여 정변을 모의하고, 유화에게 형제들을 모두 죽여 권력을 장악할 것을 권했다.[4] 유화는 호연유와 가까운 친족이었기에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따랐다.[4]
즉위 이틀 뒤 밤, 유화는 안창왕 유성 등에게 계획을 알렸지만, 유성은 반대하며 간언했다.[4] 그러나 유예와 호연유는 유성을 참살했고, 마경과 유흠은 두려움에 유화를 따랐다.[4] 유화는 사왕(四王) 토벌을 준비했고, 다음 날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4] 상서 전밀과 무위장군 유선은 유예 측에 가담하여 유총에게 계획을 누설했고, 유총은 방비를 갖추었다.[4] 유예는 군대를 돌려 호연유, 유승 등과 합류하여 유륭, 유유를 공격했다. 호연유 등은 유안국, 유흠 또한 배신할까 두려워 그들을 참살했다.[4] 같은 날, 호연유 등은 유유를 살해했고, 다음 날에는 유륭을 살해했다.[4]
하지만 그 다음 날, 유총은 서명문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4] 유예 등은 남궁으로 도망쳤고, 유총의 선봉 부대가 추격했다.[4] 광극 서실에 있던 유화는 유총군에게 붙잡혀 처자식과 함께 처형되었다.[4] 유승, 유예, 호연유 등도 붙잡혀 처형되었으며, 유화의 재위 기간은 불과 6일이었다.[4]
2. 2. 즉위와 형제 살해
310년 유연이 죽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즉위한 직후 외숙인 호연유(呼延攸)를 재상에 임명하였다. 유화는 황제에 즉위하였으나 배다른 동생인 유총(劉聰)을 비롯하여 여러 동생들이 강대한 무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두려워하였다. 마침 호연유가 이들을 숙청할 것을 간언하자, 유화는 그 말을 받아들여 동생들에 대한 숙청에 착수하였다. 유총과 유예를 제외한 다른 동생들은 모두 살해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유총에게는 내통자가 있어 실패하였으며, 황족들 중에서 가장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던 유총에게 군사가 격파당하고 광극전(光極殿)의 서실(西室)에서 살해되었다. 재위 기간은 겨우 7일(혹은 6일)이었다.유화는 유연 (광문황제)의 아들이자 첫 번째 부인 호연황후의 아들로, 아마도 장남이었을 것이다. 진서에 따르면, 유화는 위풍당당하고 잘생겼으며 건장한 외모를 지녔고 키는 약 1.96m였다고 한다. 그는 학문적이었지만 의심이 많고 구두쇠였다.[1] 308년에 '''양왕'''(梁王)으로 봉해졌으며, 이 칭호는 사후에도 그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310년 초, 유연은 그를 태자로 삼았다.[1]
유화의 외숙부인 종정 호연유는 아무런 재능이나 덕행을 갖추지 못한 인물이었으며, 유연 시대에는 요직에 오르지 못했다. 또한, 황족인 서창왕 유예는 유연의 임종에 즈음하여 후사를 전혀 위탁받지 못했기에, 그들은 현 상황에 대해 매우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평소 초왕 유총과 대립하던 시중 유승과 결탁하여 정변을 꾀하고 함께 모의했다.[3]
이들은 유화에게 "선제(유연)의 유조는 권력의 경중이 제대로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삼왕(북해왕 유예·노왕 유륭·제왕 유유)은 금중에서 근위병을 거느리고 있으며, 게다가 대사마·초왕(유총) 또한 10만 명의 정예병을 근교에서 장악하고 있습니다. 폐하는 지금 단지 옥좌에 앉아 있을 뿐, 실권은 그들에게 쥐어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재앙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서둘러 대책을 강구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며 형제들을 모두 주살하여 권력을 장악할 것을 권했다. 유화는 호연유와 상당히 가까운 친족이었기에, 그의 진언을 의심하지 않고 권고에 따랐다.[3]
즉위한 지 이틀 뒤 밤, 유화는 먼저 안창왕 유성, 안읍왕 유흠, 마경 등을 불러 계획에 참여할 것을 알렸지만, 유성은 "선제의 관이 아직 매장되지 않았고, 사왕은 반역의 뜻을 품고 있지 않은데, 아군끼리 서로 죽이는 짓을 한다면 천하의 사람들이 폐하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아직 대업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러한 소인의 참언을 믿고 형제끼리 다투는 일은 그만두십시오. 일족의 제 아우들을 믿지 않고, 도대체 누구를 믿는다는 말입니까"라고 말하며, 오히려 유화를 간했다. 그러나, 이를 들은 유예와 호연유는 화를 내며 "오늘의 논의에, 다른 도리를 말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폐하의 명령대로 군대를 이끌기만 하면 될 것을"이라고 내뱉고 측근에게 명하여 유성을 참살했다. 마경, 유흠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여 "폐하의 조서를, 신들이 죽음으로써 받들면, 실패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마지못해 유화를 따랐다. 그리하여 유화는 그들과 동당에서 맹약을 맺고, 사왕 토벌을 준비했다.[3]
다음 날, 유화는 계획을 실행에 옮겨, 유예에게는 마경을 따라 단우대에 있는 유총을 공격하게 하고, 호연유에게는 영안왕 유안국을 따라 사도부에 있는 유유를 공격하게 했다. 게다가, 유승에게는 유흠을 따라 유륭을 공격하게 하고, 상서 전밀, 무위장군 유선에게는 유예를 공격하게 했다. 하지만, 전밀, 유선은 이 계획에 참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유예 측으로 돌아서서 유예와 함께 관문의 수비병을 죽이고 유총에게 달려가, 계획을 모두 누설했다. 그 때문에, 유총은 방비를 갖추고 유예의 대군을 기다렸다. 유예는 유총의 진영에 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보자, 군대를 돌려 호연유, 유승 등과 합류하여 함께 유륭, 유유를 공격했다. 이때, 호연유, 유승은 전밀 등의 이반을 듣고, 유안국, 유흠 또한 배신할지도 모른다고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게 되어, 그들을 참살했다. 같은 날, 호연유 등은 공격을 계속하여 유유를 살해했고, 다음 날에는 유륭을 살해했다.[3]
하지만 그 다음 날, 유총은 공세로 전환하여 서명문을 공격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놀란 유예 등은 남궁으로 도망쳤고, 유총의 선봉 부대가 이를 추격했다. 다음 날, 광극 서실에 있던 유화는 유총군에게 붙잡혀, 처자식과 함께 그대로 처형되었다. 유승, 유예, 호연유 등도 붙잡혀, 시가에서 효수되었다.[3]
2. 3. 성격 및 평가
유하는 유연 (광문황제)과 호연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아마도 장남이었을 것이다. 진서에 따르면, 유하는 위풍당당하고 잘생겼으며 건장한 외모를 지녔고 키는 약 196cm였다고 한다. 그는 학문적이었지만 의심이 많고 인색했다.[5] 308년에 '''양왕'''(梁王)으로 봉해졌으며, 이 칭호는 사후에도 그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310년 초, 유연은 그를 태자로 삼았다.젊은 시절부터 학업에 힘써 『모시』, 『춘추좌씨전』, 『정씨역』을 숙독했다.[5] 그러나 황태자가 된 이후에는 점차 시기심이 강해져 부하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았다고 한다.[5]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부황 | 고조 광문황제 유연 |
모후 | 무원황후 호연씨 |
아우 | 유공 |
아우 | 소무제 유총 |
아우 | 유유 |
아우 | 유륭 |
아우 | 유애 |
아우 | 유요 (유연의 양자) |
참조
[1]
서적
yi'you day of the 7th month of the 4th year of the Yong'jia era, per vol.87 of Zizhi Tongjian
[2]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Medieval China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009
[3]
서적
The Huns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5-11-19
[4]
서적
資治通鑑によると、劉淵の崩御が秋7月の[[己卯]]の日で、劉和の死が同月の[[乙酉]]の日とする。
[5]
서적
『[[晋書]]』[[載記]]第1劉淵伝、第2劉聡伝より。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