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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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총은 전조의 4대 황제이자 유연의 아들로, 부친 사후 형 유화를 살해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그는 낙양 공략을 주도하여 서진 회제를 사로잡는 영가의 난을 일으켰으며, 이후 장안을 함락시키고 서진 민제를 죽여 서진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통치 후반에는 주색에 빠지고 폭정을 일삼았으며, 만년에 아들 유애를 살해하고 318년에 사망했다. 유총 사후 전조는 혼란에 빠졌고, 그의 치세는 폭정과 전조의 쇠퇴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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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8년 사망 - 서진 민제
서진 민제는 313년 유총에 의해 즉위하여 장안에 임시 정부를 세웠지만, 한나라의 침공에 대응하지 못하고 유요에게 항복하여 살해당함으로써 서진을 멸망시킨 인물이다. - 318년 사망 - 유찬 (전조)
유찬은 전조의 황족으로 유총의 차남이며, 하내왕으로 활약하다 유총 사후 황제에 즉위했으나 폭정을 일삼다 근준의 쿠데타로 살해당하면서 전조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 전조의 장군 - 석륵
석륵은 갈족 출신으로 노예 생활과 산적 생활을 거쳐 유연의 한에 귀순한 뒤 세력을 키워 후조를 건국하고 화북 지역을 장악한 오호십육국 시대의 군주이다. - 전조의 장군 - 유찬 (전조)
유찬은 전조의 황족으로 유총의 차남이며, 하내왕으로 활약하다 유총 사후 황제에 즉위했으나 폭정을 일삼다 근준의 쿠데타로 살해당하면서 전조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 전조의 황제 - 유연 (전조)
4세기 초 중국 북방 흉노족 출신 유연은 팔왕의 난 시기 한나라 부흥을 명분으로 한 왕조를 건국하고 한왕에 즉위하여 광문제로 추존되었으며, 그의 나라 한은 조카 유요에 의해 한조 또는 전조로 불리게 되었다. - 전조의 황제 - 유찬 (전조)
유찬은 전조의 황족으로 유총의 차남이며, 하내왕으로 활약하다 유총 사후 황제에 즉위했으나 폭정을 일삼다 근준의 쿠데타로 살해당하면서 전조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유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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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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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류총 (劉聰) |
자 | 현명 (玄明) |
이명 | 재 (載) |
시호 | 소무황제 (昭武皇帝) |
묘호 | 열종 (烈宗) |
생년 | 알 수 없음 |
몰년 | 318년 8월 31일 |
능묘 | 선광릉 (宣光陵) |
통치 | |
왕조 | 한-조 |
재위 기간 | 310년 9월 28일 - 318년 8월 31일 |
이전 통치자 | 유화 (한-조) |
다음 통치자 | 유찬 |
연호 | 광흥 (光興): 310년–311년 가평 (嘉平): 311년–315년 건원 (建元): 315년–316년 린자 (麟嘉): 316년–318년 |
가문 | |
씨족 | 난디 (씨족) (Liu) |
아버지 | 유연 (한-조) |
어머니 | 장황후 (전조) (Consort Zhang) |
배우자 | 호연황후 (류총의 부인) 장회광 류아 (한 조) 외 다수 (among others) |
자녀 | 참조 |
2. 생애
유총은 유연의 아들로, 310년 유연이 죽자 형 유화를 제거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유총은 석륵, 왕미를 파견하여 화북 일대를 초토화시켜 낙양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취하는 한편, 유요, 호연안에게 낙양을 직접 압박하게 하였다.
311년, 유총은 서진의 수도 낙양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서진 회제를 사로잡았다. 이 사건을 영가의 난이라 부른다. 낙양 함락 이후 유총은 유요에게 장안에 세워진 서진 민제의 임시정부를 공격하게 하였으며, 석륵, 왕미 등은 화북 일대를 정복하였다. 316년 장안이 함락되고 민제가 포로로 끌려오자 유총은 민제를 모욕하다가 317년에 살해하였다.
유총은 낙양 함락 이후 점차 주색에 빠져 폭정을 일삼았으며 환관이 득세하였다. 312년에는 포로로 끌고 온 서진 회제에게 갖은 모욕을 주다가 살해하였다. 318년에 유총은 병사하였고, 그의 사후 전조는 곧 내분으로 멸망하였다.[8]
2. 1. 초기 생애 및 배경
유총은 유연의 넷째 아들이었으며, 장 소의 소생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교육을 담당하던 박사 주기로부터 범상치 않다는 칭찬을 받았다.[8]14세가 되자, 경사(경서・사서)・제자백가의 학문・손무・오기의 병법에 정통하게 되었고, 이들을 암송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문장에도 재능이 있어, 초서・예서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저술한 회시(자신의 심정을 나타내는 시)는 100편을 넘었고, 부와 송(시경의 분류)은 50편을 넘었다.[8]
15세 때는 무예를 배우게 되었다. 매우 긴 팔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궁술에 뛰어나, 300근의 활을 다룰 수 있었다. 그 억셈과 민첩함은 당시 견줄 자가 없을 정도였다. 위 진 왕조의 중신이며, 아버지 유연의 친우이기도 한 왕혼은, 유총을 만나자 크게 기뻐하며, 유연에게 "이 아이의 힘은 나로서는 헤아릴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8]
20세가 되자 낙양으로 유학하여, 많은 명사들과 교류를 깊이 했으며, 조정의 제1인자인 낙광・장화로부터 크게 평가받았다.[8]
후에 신흥군 태수 곽이로부터 초빙되어, 그 주부가 되었다. 곽이로부터 량장(효렴을 시작으로 하는 찰거 과목 중 하나)으로 추천되어, 효기별부사마로 발탁되었다. 더 나아가 승진하여 우부도위가 되자, 백성들을 잘 위무하고 받아들여, 오부 흉노의 호족 중에서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당시, 흉노의 여러 부족은 위진 왕조에 복속하여 병주 영내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좌부・우부・남부・북부・중부의 다섯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를 오부 흉노라고 한다).[8]
이윽고 조정의 권력자인 하간왕 사마옹의 상주에 의해, 적사중랑장으로 임명되었다.[8]
당시, 아버지 유연은 업을 통치하는 성도왕 사마영을 섬기고 있었으나, 진 국내에서는 정변에 의한 공신 숙청이 잇따랐으므로, 유총은 유연 또한 사마영에게 살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불안해했다. 그 때문에, 그는 사마옹의 밑에서 이반하여, 아버지 있는 업으로 옮겨갔다. 사마영으로부터 우적노장군・참전봉전사에 임명되어, 군의 선봉이 되어 전쟁에 참여했다.[8]
304년 8월, 우현왕으로 세워졌다. 유연이 사마영으로부터 이반하여 향리로 귀환하자, 유총도 이를 따랐다. 흉노의 근거지인 좌국성에 도착하자, 유연은 종조인 유선 등으로부터 상당우의 칭호를 받았고, 유총도 또한 다시 녹리왕으로 봉해졌다.[8]
2. 2. 한(전조) 건국과 유총의 역할
304년 유연이 한왕을 칭하며 한조를 건국한 후, 유총은 핵심 장군 중 한 명이 되어 초왕에 봉해졌다. 309년, 석륵과 함께 진나라 장군 왕광을 상평(오늘날 산시성진성시)에서 크게 이겼으나, 너무 일찍 낙양을 공격하다가 항복하는 척하는 진나라 장군 환연에게 속아 패배했다. 몇 달 후, 왕미와 함께 다시 낙양을 공격했으나, 도시를 포위했을 때 진나라 섭정 사마월 동해왕이 도시 안에서 기습 공격을 가해 유총은 여러 차례 공격을 받았다. 유연은 유총을 수도 평양(오늘날 산시성린펀시)으로 소환했다.310년 여름, 유연은 병에 걸려 유총의 형 유하(호연 황후 소생)를 태자로 세우고, 다른 아들들을 왕으로 봉하며 유총에게 막대한 병력을 배치하여 유하를 보좌하게 했다. 흉노와 한족 관료들에게 유하를 도울 책임을 부여했으나, 유하의 삼촌 호연유, 유총과 앙심을 품고 있던 유승, 서창왕 유예는 제외되었다. 이들은 불만을 품고 유하에게 형제들이 수도 안팎에 대군을 유지하면 위험하다고 설득했다. 유연이 죽은 지 3일 후, 유하의 명령으로 이들은 유하의 네 형제에게 기습 공격을 가했다. 유예는 유총을, 호연유는 유유를, 유승은 유룡을, 전밀과 유계는 유애를 공격했으나, 전밀과 유계는 유애를 호위하여 유총에게 알렸고, 유총은 대비했다. 유예는 군대를 철수했고, 유유와 유룡은 패배하여 살해되었다. 이틀 후, 유총은 궁궐을 포위하고 유하, 유승, 유예, 호연유를 죽였다. 유총은 처음에 유애에게 왕위를 제안했으나,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8]
같은 해 10월, 유연은 서진으로부터 자립하여 한(漢) 왕조를 수립하고, 유총을 무군장군에 임명했다.
308년 1월, 유연의 명으로 유총은 다른 장군 10명과 함께 각지의 대항 세력을 토벌하라는 명을 받아 남쪽으로 향하여 태행산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5월, 하동에서 서진의 장군 북궁순 등과 싸웠으나 패했다. 10월, 유연이 황제위에 오르자 11월에 유총은 거기대장군에 임명되고, 12월에는 초왕에 봉해졌다.
309년 4월경, 정의대장군 왕미·전봉도독 석륵과 함께 호관으로 침공했다. 서진의 병주자사 유곤은 장군 황숙·한술에게 구원을 명했으나, 유총은 서간에서 한술군을 격파하고 수급을 올렸다. 석륵 또한 봉전에서 황숙을 쳐서 죽였다. 동해왕 사마월은 회남내사 왕광·장군 시융·조초를 파견하여 유총을 막게 했다. 유총은 태행산을 넘은 곳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장평 일대에서 교전하여 대승하고 시융·조초를 전사시켰다. 유총은 둔류·장자를 공략하고, 쳐서 죽이거나 붙잡은 수가 1만 9천 명을 넘었다. 상당군태수 방순은 전의를 상실하고 호관까지 한군에 항복했다.
같은 시기, 유곤이 신흥군에 할거하고 있는 흉노 철불부의 유호 토벌을 향하자, 유총은 그 틈을 타서 군사를 내어 유곤의 본거지 진양을 습격했지만, 공략하지 못했다.
8월, 왕미와 함께 서진의 수도 낙양 공략을 향했다. 사마월은 평북장군 조무·송추·팽묵 등에게 요격하게 했지만, 유총 등은 모두 물리쳤다. 의양까지 진군하자, 평창공 사마모는 장군 순우정·여의 등을 장안에서 유총 토벌을 위해 보냈지만, 유총은 이 또한 격퇴했다. 그러나 연승으로 인해 유총은 교만해져 방비를 소홀히 했다. 9월, 홍농군 태수 원연이 거짓으로 투항을 권하자, 유총은 이를 믿고 진영으로 맞이했다. 그러나 원연은 밤을 기다려 기습을 가했고, 유총은 대패하여 군대를 철수시켰다. 유연은 흰 옷(상복)을 입고 유총을 맞이했다고 한다.
10월, 왕미·시안왕 유요·여음왕 유경 등과 함께 정예 기병 5만 명을 이끌고 다시 낙양 공략을 향했고, 대사공 호연익이 후군이 되었다. 유총 등이 의양까지 진출하자, 진 조정은 한군을 두 달 전에 격퇴했기에 다시 쳐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크게 놀랐다. 하남에서 진군을 격파하고 큰 저항도 받지 않고 낙양성 아래까지 진군하여 서명문 앞에 둔영했다. 그날 밤, 량주의 장군 북궁순은 용사 1000여 명을 이끌고 호군 가윤과 함께 야습을 걸었다. 대하문에서 양군은 교전했으나, 부하 장군 호연호가 쳐 죽임을 당하면서 군대가 무너졌고, 유총은 남쪽의 낙수로 군을 물러났다. 호연익 또한 부하의 반역으로 살해당하면서 군대는 총체적으로 붕괴되었고, 유총은 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유연은 패전을 듣고 칙서를 내려 유총에게 퇴각을 명했다. 그러나 유총은 진군의 취약함을 주장하며, 호연호·호연익이 전사한 정도로는 퇴각할 이유가 없다고 호소하며 공격 속행을 요청했고, 유연은 이를 허락했다. 사마월은 농성하며 수비를 굳혔다.
유총은 선양문에 진주했고, 유요는 상동문에, 왕미는 광양문에, 유경은 대하문에 각각 주둔했다. 유총은 숭산에 올라가 신에게 승리를 기원하고, 평진장군 유려·관군장군 호연랑에게 군대를 통솔하게 하여 유수를 맡겼다.
사마월의 참군 손순은 적의 본진에 유총이 부재중임을 알고, 사마월에게 한군을 기습할 것을 권했다. 사마월은 이에 동의하고, 참군 손순·장군 구광·루포에게 용사 3000명을 주어 공격을 명했다. 손순 등은 선양문에서 출격하여 한군을 격파하고 호연랑의 수급을 올렸다. 유총은 이 보고를 듣고 급히 돌아왔지만, 유려는 유총에게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입수자살했다.
왕미는 유총에게 "지금은 이미 군대에 이로운 점이 없습니다. 낙양의 수비도 견고하고, 치중 부대는 섬에 있어 식량은 며칠 가지 못합니다. 전하는 용양(용양장군 유요)과 함께 평양으로 귀환해야 합니다. 양식을 준비하여 군사를 기르고, 후에 다시 거병합시다. 소관(왕미) 또한 군대를 거두어 식량을 비축하고, 연·예 지역에서 명을 기다리겠습니다. 이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진언했다. 유총은 이전에 명령을 거부하고서라도 낙양 공격을 지속했던 터라 결정을 내릴 수 없었지만, 유연이 황문랑 부순 등을 파견하여 다시 귀환을 촉구하자, 귀환을 결심했다. 11월, 유요와 함께 평양으로 귀환했다.
12월, 대사도에 임명되었다.
310년 7월, 용양대장군 유요·진군장군 석륵·안북대장군 조고·평북대장군 왕상과 함께 하내로 침공하여, 하내군 태수 배정의 지키는 회성을 포위했다. 서진의 정로장군 송추·관군장군 양거가 구원하러 왔으나, 석륵·왕상 등이 장릉에서 물리치고, 하내의 백성들은 배정을 붙잡아 항복했다.
같은 달, 유연은 병석에 눕게 되자, 유총은 대사마·대선우·녹상서사에 임명되어 후사를 부탁받았다. 평양의 서쪽에는 선우대 (호인의 통치를 관할하는 관서)가 설치되었고, 대선우인 유총이 그 장관이 되었다.
8월, 유연이 세상을 떠나자, 맏형인 유화가 제위를 계승했다. 유화는 의심이 많은 인물이었는데, 서창왕 유예·종정(宗正) 호연유·시중 유승의 꼬임에 넘어간 탓에, 막강한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유총과 북해왕 유애·노왕 유륭·제왕 유유 등 형제들의 모반을 의심하게 되었다(유총은 대선우로서 10만 명의 호인을 통솔하는 입장에 있었고, 유애·유륭·유유는 궁중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호연유 등과 결탁하여 그들을 제거하려 계획했다.
유화는 기회를 엿보다가 거병하여, 유예·마경에게 선우대에 있는 유총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다른 여러 장수들에게도 각각 유애·유륭·유유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는데, 유애 공격을 명령받은 상서 전밀과 무위장군 유선은 배반하여 유애에게 귀순했다. 유애는 그들과 함께 관소의 수비병을 죽이고 유총에게 달려가, 사전에 계획을 모두 누설했다. 유총은 방비를 갖추고 유예의 대군을 기다렸다. 유예는 유총의 진영에 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군대를 돌려 호연유·유승 등과 합류하여 유유·유륭의 공격에 참여했다. 그들은 이틀 안에 유유와 유륭을 격파하고, 그들의 수급을 베었다.
다음 날, 유총은 공세로 전환하여 서명문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놀란 유예 등은 남궁으로 도망쳤으나, 유총의 선봉 부대가 그들을 뒤쫓았다. 다음 날, 유총군은 광극서실에 있는 유화를 사로잡아, 처자식과 함께 처형했다. 유승·유예·호연유 등도 체포하여, 시가에서 참수했다.
2. 3. 유총의 즉위와 영가의 난
유연의 아들 유총은 310년 유연이 죽은 뒤, 형 유화를 죽이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유총은 석륵, 왕미를 파견하여 화북 일대를 초토화시켜 낙양을 고립시키는 한편, 유요, 호연안에게 낙양을 직접 압박하게 하였다.[8]311년 4월, 유총은 서진의 수도 낙양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서진 회제를 사로잡았다. 이 사건을 영가의 난이라 부른다. 312년에는 포로로 끌고 온 서진 회제에게 갖은 모욕을 주다가 살해하였으며, 316년에 장안이 함락되고 서진 민제가 포로로 끌려오자 다시 민제를 모욕하다가 317년에 살해하였다. 그 뒤 그는 318년에 병사하였다.[8]
유총은 즉위 후, 동생 유애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유애에게 양위할 것을 약속했다. 유총은 유요, 유찬, 석륵, 왕미를 시켜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도시를 점령했으나, 영구적인 점령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311년 봄, 석륵은 중앙 중국 지역에 남은 진나라 군대를 궤멸시키고, 사마열의 시신을 불태웠다. 낙양은 방어력이 약해졌고, 그해 여름, 왕미, 석륵, 유요, 호연안이 낙양을 점령하고 진 회제를 평양으로 끌고 갔다. 이 사건이 영가 사변이다.
312년 봄, 유총은 전 진나라 황제를 회계공으로 책봉하고 연회에 초대했다. 유총은 전 황제가 예장왕이었을 때의 만남을 언급하며 아첨을 유도했고, 다음 날 자신의 후궁을 회계공에게 선물로 주었다.
312년 여름, 유총은 강 문제 담당 왕자와 건설 담당 공작을 사소한 문제로 처형했다. 왕자는 궁정에 충분한 생선과 게를 공급하지 못했고, 공작은 두 개의 궁전을 제시간에 완공하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313년 봄, 유총은 전 진나라 황제인 회계공을 처형했다. 새해 축하 행사에서 유총은 회계공에게 고위 관료들에게 술을 따르게 했고, 이에 전 진나라 관리 유민과 왕준이 울자, 유총은 이들을 포함한 여러 전 진나라 관리들이 평양을 배반하려 한다고 거짓 비난하며 처형하고 전 황제에게 독을 먹였다.
313년 여름, 진 회제의 조카 사마예가 장안에서 황제를 칭했지만(진 민제), 군대가 약해 한나라에게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유연이 사망하고 맏형인 유화가 제위를 계승했으나, 유화는 유총을 비롯한 형제들의 모반을 의심했다. 유화는 유총을 공격하려 했으나, 유애에게 귀순한 전밀과 유선 때문에 실패했다. 유총은 방비를 갖추고 유예의 대군을 기다렸다. 다음 날, 유총은 서명문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광극서실에 있는 유화를 사로잡아 처형했다.
여러 신하들이 유총에게 황제 즉위를 권했으나, 유총은 동생 유애에게 양위하려 했다. 그러나 유애와 공경들의 간청으로 즉위를 받아들였다. 9월, 유연을 영광릉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광문황제, 묘호를 고조로 했다.
2. 4. 장안 점령과 서진 멸망
310년 유연이 죽고 장남 유화(劉和)가 제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유화는 강력한 군권을 가진 유총 등의 동생들을 시기하여 제거하려 하였기에, 유총은 모반을 일으켜 유화를 죽이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유총은 석륵(石勒), 왕미(王彌)를 파견하여 화북 일대를 초토화시켜 낙양(洛陽)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취하는 한편, 유요(劉曜), 호연안(呼延晏) 등에게 낙양을 직접 압박하게 하였다.311년 4월, 유총은 서진(西晉)의 수도 낙양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서진 회제를 사로잡았다. 이 사건을 영가의 난(永嘉之亂)이라 부른다. 같은 해, 병사한 동해왕 사마월의 관을 호위하며 산동으로 향하던 왕연이 이끄는 10만여 명의 진군을 석륵이 전멸시켰다. 5월, 석륵의 승리를 기회로 여긴 유총은 위위 호연안에게 금병 2만 7천 명을 주어 낙수로 진입하게 했다. 더 나아가, 왕미, 유요, 석륵에게 군사를 이끌고 호연안과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호연안은 하남을 침공하여 진군에게 연승하며 3만 명을 참살했다. 낙양 공격에 들어가 평창문을 함락시키고, 동양문, 의양문과 여러 관청에 불을 질렀다. 회제는 강을 건너 동쪽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호연안이 막았다.
6월, 왕미와 유요가 도착하자 다시 호연안과 함께 낙양을 포위했다. 이때, 낙양 성 아래에서는 심각한 식량 부족이 발생하여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을 정도였다. 백관들은 뿔뿔이 흩어져 아무도 지키려는 의지가 없었다. 왕미와 호연안은 의양문을 함락시키고, 남궁에 들어가 태극전전에 올랐다. 병사들을 풀어 대대적인 약탈을 감행하여 궁인과 진귀한 보물을 모두 거두었다. 유요는 여러 왕공 및 백관 이하 3만여 명을 학살하고, 낙수 북쪽에 시체를 쌓아 경관을 쌓았다. 또한, 회제와 혜제의 황후 양씨를 포로로 잡고 평양으로 압송했다. 전국의 육새도 평양으로 보냈다. 이 사건을 영가의 난이라고 부른다.[8]
낙양 함락 이후 유총은 유요에게 장안(長安)에 세워진 서진 민제(愍帝)의 임시정부를 공격하게 하였으며, 석륵, 왕미 등은 화북 일대를 정복하였다. 316년에 장안이 함락되고 민제가 포로로 끌려왔다.[8] 유총은 대사면을 내리고 가평으로 개원했다. 회제를 정중하게 대우하여 특진, 좌광록대부에 임명하고 평아공에 봉했다.
2. 5. 유총 통치 후반기의 폭정과 전조의 쇠퇴
312년 여름, 유총 통치에 대한 최초의 진짜 문제의 징후가 나타났는데, 그는 강 문제 담당 왕자와 건설 담당 공작을 사소한 문제로 처형했다. 왕자는 궁정에 충분한 생선과 게를 공급하지 못했고, 공작은 두 개의 궁전을 제시간에 완공하지 못했다는 이유였다.[8] 왕창(王彰) 장군이 그의 행동을 통제하도록 설득하려 하자 그는 격분하여 왕창을 죽이려 했지만, 그의 딸이자 유총의 후궁인 왕창의 간청으로 왕창을 투옥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왕창을 석방하고 승진시켰지만, 이 사건은 유총 통치의 나머지 기간 동안 괴롭힐 충동적인 행동 패턴을 시작했고, 종종 잔인함이 동반되었다.[8]313년 봄, 한 사건으로 유총은 전 서진 황제인 회계공을 처형하게 된다. 황제의 새해 축하 행사에서 유총은 그에게 고위 관료들에게 술을 따르라고 명령했고, 전 서진 관리 유민(庾珉)과 왕준(王雋)은 그의 굴욕을 보고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큰 소리로 울었다. 이로 인해 유총은 화가 났고, 유민과 왕준을 비롯한 여러 전 서진 관리들이 평양을 배반하고 유곤에게 바칠 준비가 되었다고 거짓으로 비난했다. 그는 그 후 전 서진 관리들을 처형하고 전 황제에게 독을 먹였다. 그는 공작에게 수여되었던 회계공 부인을 다시 후궁으로 삼았다.[8]
같은 해 봄, 유총의 어머니 장 태황태후가 사망했다. 그녀의 조카딸인 장 황후는 태황태후의 죽음 이후 너무 우울하고 슬퍼하여 그녀 또한 사망했다. 유총은 유은의 딸 유아를 그녀를 대신하여 황후로 책봉하고, 그녀를 위한 궁전을 짓도록 명령했다. 그의 신하 진원달은 그것이 지나치게 낭비라고 설득하려 했고, 유총은 분노하여 진원달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새 황후가 간청하여 진원달은 목숨을 건지고 추가로 승진했다. 그 다음 해 동안 유아 황후와 진원달의 조언에 따라 유총은 어느 정도 자신의 행동을 바로잡았다고 한다.[8]
314년 봄, 유아 황후가 사망했고, 그 시점부터 유총의 궁궐은 완전히 혼란스러운 상태가 되었고, 유총 자신의 개인적인 행동은 그녀의 조언 없이 그 이후 쇠퇴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8] 같은 해, 유총은 아들 유찬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다. 이는 형이자 황태자인 유애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고, 그의 측근들은 315년에 유총을 전복하기 위한 쿠데타를 시작할 것을 제안했다. 유애는 이 음모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소문이 새어나갔다. 유총은 유애를 가택 연금했다.[8]
이후 315년, 유총은 장군 진준의 딸 진월광(靳月光)과 진월화(靳月華)를 궁으로 데려와 세 명의 황후를 세웠다. 진월광을 상황후, 진월화를 우황후, 그리고 유빈(유인의 손녀일 가능성이 있음)을 좌황후로 임명했는데, 이는 황제가 한 번에 한 명의 황후만을 둘 수 있다는 관례에 어긋나는 행위였다. 그해 말, 진원달은 그에게 상황후가 간통을 저질렀다고 폭로했고, 유총은 그녀를 폐위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그녀는 수치심에 자살했고, 유총은 그녀의 미모를 그리워하며 그녀의 간통을 폭로한 진원달을 매우 원망했다.[8] 315년 가을, 유총은 석륵의 점점 더 커지는 권력을 달래기 위해 동부 제국에 대한 황제의 권한을 석륵에게 위임했다(어쨌든 석륵이 통치하고 있었다).[8]
이 무렵, 그는 또한 환관 왕침(王沈), 선회(宣懷)와 하인 곽의(郭猗)를 극도로 신뢰하게 되어 모든 정부 업무를 그들에게 맡기고 관리들과의 정기적인 회의를 취소하고, 왕, 선, 곽이 그와 관리들 사이의 의사 전달자 역할을 하도록 했다. 이로 인해 왕, 선, 곽은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게 되었고 진준과 협력하여 매우 부패하게 되었다. 이들을 비판하는 몇몇 관리들은 처형되었다. 곽과 진준은 모두 이전에 황태자 유애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고, 유찬에게 황태자 유애가 유총을 폐위하고 그를 죽이려 할 것이라고 믿게 했으며, 그러한 음모에 대한 거짓 증거를 유찬에게 제시했다. 따라서 유찬은 삼촌을 제거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8]
317년 봄, 유찬은 마침내 삼촌인 황태자 유애를 제거할 계획을 실행했다. 그는 황태자 유애에게 평양이 공격을 받고 있고 그의 부하들이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무장해야 한다고 거짓 정보를 제공했다. 그런 다음 유찬은 아버지에게 황태자 유애가 공격할 준비가 되었다고 알렸다. 그러자 유총의 사신들이 황태자의 측근들이 무장한 것을 보고 유찬의 주장을 믿고 유총에게 보고했다. 유찬은 고문으로 황태자 유애의 부하 적과 강의 수장들을 심문했고(황태자 유애는 부차적인 칭호인 대선우에 근거하여 그들을 지휘했다), 적과 강 수장들은 거짓 자백을 강요받았다. 황태자 유애의 측근과 군대는 모두 학살되었는데, 그 수가 15,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황태자 유애는 폐위된 후 진준에 의해 암살되었다. 적과 강 부족들이 수장들에 대한 대우로 반란을 일으키자, 유총은 진준에게 그들을 진압하도록 보냈고, 진준은 성공했다. 317년 가을, 유총은 유찬을 황태자로 삼았다.[8]
318년 초, 연회에서 유총은 전 서진 황제인 회안후를 집사로 삼았고, 많은 전 서진 관리들은 전 황제의 굴욕에 대해 스스로를 억제하지 못하고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또한, 이 무렵, 한나라에 대한 여러 봉기가 있었는데, 각기 유찬을 사로잡아 전 서진 황제와 교환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유찬은 사마예를 처형할 것을 권했고, 유총은 동의하여 유찬의 보고를 받은 후 그를 처형했다.[8]
같은 해 여름, 평양의 황궁 회의장이 큰 화재로 파괴되었고, 유총의 아들인 회계왕 유강(劉康)을 포함하여 21명이 사망했다. 유총은 아들을 매우 애도했다고 전해지며, 이는 그의 건강에 끔찍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유요와 석륵을 수도로 불러 섭정 역할을 하도록 했지만, 유요와 석륵 모두 거절했다. 그는 곧 사망했고 유찬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 말, 유찬은 진준에 의해 살해되었고, 진준은 황족을 학살했다. 유요와 석륵은 진준을 격파했고 유요가 황제가 되었지만, 유요와 석륵은 이후 불화하여 석륵이 독립을 선언하고 후조를 건국하게 되었다. 유총이 건설한 제국은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8]
2. 6. 유총의 죽음과 전조의 분열
劉聰중국어이 죽자, 황태자 유찬(劉粲)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유찬은 재위 1개월 만에 근준(靳準)에게 살해당했고, 한나라는 혼란에 빠졌다.[8] 유요와 석륵(石勒)이 근준을 쳐서 혼란을 수습했지만, 결국 화북은 유요의 전조(前趙)와 석륵의 후조(後趙)로 나뉘어 다투게 되었다.[8]318년 여름, 평양(平陽)의 황궁 회의장이 큰 화재로 파괴되어 아들 유충을 포함한 21명이 사망했다. 아들의 죽음을 매우 슬퍼한 유총은 건강이 악화되었고, 유요와 석륵을 수도로 불러 섭정 역할을 맡기려 했으나, 두 사람 모두 거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총은 사망했고, 소무황제(昭武皇帝)로 추시되었으며, 묘호는 열종(烈宗)으로 정해졌다.[8]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유연 | 고조 광문황제(高祖 光文皇帝) |
어머니 | 호연씨 | 무원황후(武元皇后) |
형 | 유화 | |
형 | 유공(劉恭) | |
아우 | 유유(劉裕) | |
아우 | 유륭(劉隆) | |
아우 | 유애 | |
아우 | 유요 | 유연의 양자 |
정실 | 호연씨 | |
정실 | 장휘광 | 무효 황후(武孝 皇后) |
정실 | 유아 | 무선 황후(武宣 皇后) |
정실 | 유씨 | 좌황후 |
정실 | 근월광 | 상황후 |
정실 | 근월화 | 우황후 |
정실 | 번씨 | 상황후, 홍도 황후 |
정실 | 왕씨 | 좌황후, 홍효 황후 |
정실 | 선씨 | 우황후 |
정실 | 임씨 | 황후 |
정실 | 주씨 | 황후 |
정실 | 마씨 | 황후 |
정실 | 무씨 | 홍덕 황후 |
측실 | 유영 | (추봉) 무덕 황후 |
측실 | 장려광 | 귀인, 무효 황후의 여동생 |
측실 | 유씨 | 귀인 |
측실 | 유씨 | 귀인 |
측실 | 유씨 | 귀인, 후에 사마치에게 하사 |
차남 | 유찬 | |
아들 | 유이 | 하간왕 |
아들 | 유익 | 팽성왕 |
아들 | 유괴 | 고평왕 |
아들 | 유부 | 발해왕 |
아들 | 유기 | 하남왕 |
아들 | 유란 | 연왕 |
아들 | 유홍 | 초왕 |
아들 | 유맥 | 제왕 |
아들 | 유권 | 진왕 |
아들 | 유조 | 위왕 |
아들 | 유지 | 조왕 |
아들 | 유령 | 오왕 |
아들 | 유랑 | 영천왕 |
아들 | 유고 | 영릉왕 |
아들 | 유욱 | 단양왕 |
아들 | 유경 | 촉왕 |
아들 | 유탄 | 구강왕 |
아들 | 유황 | 임천왕 |
아들 | 유충 | 회계왕 |
아들 | 유약 | 동평왕 |
4. 유총의 통치에 대한 평가
유총의 통치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공존하는 복합적인 양상을 보인다.
'''긍정적인 면'''에서는, 유총은 신하들의 간언을 경청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진원달의 간언에 분노하여 처형하려 했으나, 유아의 서신을 받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또한, 유성이 떨어지는 이변이 발생하자 신하들에게 의견을 구하고, 진원달과 박사 장사의 간언을 듣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은 유총이 비록 충동적인 면모도 있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군주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은 유총의 통치에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낸다. 유총은 과도한 사치와 낭비를 일삼았다. 잦은 궁궐 건설과 후궁 확장에 재정을 낭비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진원달은 "지금 광극전으로 충분한데, 소덕·온명 이후 육궁까지 이르렀습니다.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 밖으로는 두 경(낙양·장안)을 공격하면서도 안으로는 궁궐 40여 곳을 건설하고 있습니다"라고 간언했지만, 유총은 이를 무시했다.
또한, 유총은 충동적이고 잔혹한 행동으로 신하들의 불만을 샀다. 자신의 행동을 비판하는 신하들을 처형하거나 위협하는 일이 잦았다. 특히, 왕침 등 환관들을 총애하여 이들이 정치에 개입하고 권력을 남용하게 했다. 왕침 등은 뇌물을 받고 관직을 파는 등 부정을 저질렀으며, 충신들을 모함하여 숙청하는 등 국정을 문란하게 만들었다.
더불어, 황태자 문제를 둘러싼 갈등도 유총 통치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유총은 동생 유애를 황태자로 책봉했지만, 유찬과 후궁들의 참소로 유애를 의심하고 폐위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유애에게 모반을 권유한 인물들을 살해하고, 유애의 조정 출입을 금지하는 등 혼란을 야기했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유총의 통치 기반을 약화시키고, 한나라의 쇠퇴를 가속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4. 1. 긍정적 평가
진원달은 "하늘이 백성에게 군주를 세우는 것은 부모가 되어 형벌과 상을 내리기 위함이지, 억조의 백성을 한 사람에게 봉사하게 하기 위함이 결코 아닙니다"라고 간언했다. 또 "지금 광극전으로 충분한데, 소덕·온명 이후 육궁까지 이르렀습니다.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 밖으로는 두 경(낙양·장안)을 공격하면서도 안으로는 궁궐 40여 곳을 건설하고 있습니다"라고 간언했다.유총은 격노했으나, 유아는 후당에서 이를 듣고 몰래 중상시를 보내 형 집행을 중지시키고 유총에게 서신을 보내 간언했다. 유총은 마침내 잘못을 깨닫고 아연실색했다.
이후 유총은 아들 유이 등에게 "짐은 최근 마음이 병들어 희로애락이 지나쳐 자제가 안 되었구나. 여러 공들은 잘 간언해 주었다. 그대들이야말로 보필의 신이라고 할 수 있다. 짐은 내 마음에 부끄럽다. 평생 잊지 않겠다"라고 사죄했다. 진원달을 불러 사죄하고 유아의 수기를 건네주며 "밖으로는 그대와 같은 자가 받쳐주고, 안으로는 후가 돕는다. 짐에게는 아무 근심도 없겠구나"라고 말했다. 소요원을 납현원으로, 이중당을 쾌현당으로 이름을 고쳤다.
314년 1월, 유성이 견우에서 나와 자미로 들어가 평양 북쪽 10리에 떨어졌다. 유총은 이를 마음에 두고 여러 신하들에게 "짐의 부덕함으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 거리낌 없이 의견을 말하라"고 묻자, 진원달과 박사 장사는 "별의 변괴는 화가 일어날 조짐입니다. 신은 후궁에 삼후를 세운 것이 원인이 아닌가 두렵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 이를 삼가시기를 바랍니다"라고 간언했다. 유총은 "유성은 음양의 이치이다. 인사에 아무런 관계도 없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며칠 후 유아가 죽었고, 이후 유총의 여색 탐닉은 더욱 심해졌으며 후궁의 질서가 무너졌다.
4. 2. 부정적 평가
유총의 통치 시기에 나타난 여러 문제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사치와 낭비: 유총은 잦은 궁궐 건설과 후궁을 늘리는 데 과도한 재정을 소모했다. 진원달은 이를 비판하며 백성들의 어려움을 간언했지만, 유총은 오히려 진원달을 처형하려 했다.[1] 이러한 사치는 국가 재정을 악화시키고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 충동적이고 잔혹한 행동: 유총은 사소한 문제로 왕자와 공작을 처형하고, 자신의 행동을 비판한 장군 왕창을 죽이려 하는 등 충동적이고 잔혹한 모습을 보였다.[2] 이러한 행동은 신하들의 불만을 야기하고 통치 기반을 약화시켰다.
- 환관의 발호와 정치 문란: 유총은 왕침, 선회, 유용 등 환관들을 총애하여 이들이 정치에 개입하고 권력을 남용하게 했다.[3] 이들은 뇌물을 받고 관직을 파는 등 부정을 저질렀으며, 충신들을 모함하여 숙청했다.[4] 이러한 정치 문란은 국가 기강을 해치고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 황태자 문제: 유총은 동생 유애를 황태자로 책봉했지만, 후연 황후와 유찬의 참소로 유애를 의심하고 폐위하려 했다.[5] 이 과정에서 유애에게 모반을 권유한 노지, 최위, 허하를 살해하고, 유애의 조정 출입을 금지하는 등 혼란을 야기했다.[6]
이러한 문제점들은 유총의 통치 기반을 약화시키고, 한나라의 쇠퇴를 가속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5. 유총과 관련된 주요 사건
유총은 유연의 아들로, 유연 아래에서 주로 낙양 공략전을 담당하였다. 310년 유연이 죽고 장남 유화가 제위를 물려받았으나, 유총은 유화를 제거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유총은 즉위 후 동생 유애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부인 후연 공주를 황후로 책봉했다. 310년, 황태자 애의 어머니 단 황후가 사망했는데, 아들 유애에게 유총과의 간통 사실이 발각된 후 수치심을 느껴 죽었다고 한다.
유총은 진나라와 그 수도 낙양에 대한 압박을 계속 가했다. 그의 장군 유요, 유찬, 석륵, 왕미는 만나는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도시를 점령했다. 311년 봄, 석륵은 중앙 중국 지역에서 남은 주요 진나라 군대를 궤멸시켰다. 낙양은 방어력이 약해졌고, 유총의 명령에 따라 그해 여름, 왕미, 석륵, 유요, 후연언이 낙양에 집결하여 점령하고 진 회제를 포획하여 한나라 수도 평양으로 끌고 갔다.
312년 봄, 후연 황후가 사망했다. 유총은 고위 관리들의 딸과 손녀들을 후궁으로 대거 들였다. 이 시점부터 유총은 정부 업무를 처리하는 데 시간을 거의 쓰지 않았다고 한다. 같은 해 여름, 유총은 강 문제 담당 왕자와 건설 담당 공작을 사소한 문제로 처형했다. 왕창 장군이 그의 행동을 통제하도록 설득하려 하자 그는 격분하여 왕창을 죽이려 했지만, 딸의 간청으로 왕창을 투옥했다가 나중에 석방하고 승진시켰다.
312년 가을, 한나라 군대는 유찬과 유요의 지휘 하에 유곤 진나라 병주 총독에게 심각한 타격을 가해 유곤의 본거지인 진양을 점령하고 유곤의 부모를 살해했다.
313년 봄, 유총은 전 진나라 황제인 회계공을 처형했다. 황제의 새해 축하 행사에서 유총은 그에게 고위 관료들에게 술을 따르라고 명령했고, 전 진나라 관리 유민과 왕준(王雋)은 그의 굴욕을 보고 큰 소리로 울었다. 유총은 이들을 포함한 여러 전 진나라 관리들이 평양을 배반하려 했다고 거짓으로 비난하며 처형하고, 전 황제에게 독을 먹였다. 같은 해 봄, 유총의 어머니 장 태황태후가 사망했다.
314년, 유아 황후가 사망했고, 유총의 궁궐은 완전히 혼란스러운 상태가 되었다. 유총은 아들 유찬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다. 이는 형이자 황태자인 유애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315년, 유총은 장군 진준의 딸들을 궁으로 데려와 세 명의 황후를 세웠다. 그해 말, 진원달은 상황후가 간통을 저질렀다고 폭로했고, 유총은 그녀를 폐위했다. 그녀는 수치심에 자살했고, 유총은 진원달을 원망했다.
315년 가을, 유총은 석륵의 커지는 권력을 달래기 위해 동부 제국에 대한 황제의 권한을 석륵에게 위임했다. 이 무렵, 유총은 환관들을 극도로 신뢰하여 모든 정부 업무를 그들에게 맡기고 관리들과의 정기적인 회의를 취소했다.
317년 봄, 유찬은 황태자 유애를 제거할 계획을 실행했다. 유찬은 황태자 유애에게 거짓 정보를 제공했고, 유총은 유애를 가택 연금했다. 고문으로 황태자 유애의 부하들을 심문하여 거짓 자백을 강요받았다. 황태자 유애의 측근과 군대는 모두 학살되었고, 유애는 폐위된 후 암살되었다. 같은 해 가을, 유총은 유찬을 황태자로 삼았다.
318년 초, 연회에서 유총은 전 진나라 황제인 회안후를 집사로 삼았고, 많은 전 진나라 관리들은 전 황제의 굴욕에 대해 울부짖었다. 유찬은 사마예를 처형할 것을 권했고, 유총은 동의하여 그를 처형했다. 같은 해 여름, 평양의 황궁 회의장이 큰 화재로 파괴되었고, 유총의 아들을 포함하여 21명이 사망했다. 유총은 아들을 애도하며 건강이 악화되었다. 유요와 석륵을 수도로 불러 섭정 역할을 하도록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유총은 곧 사망했고 유찬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 말, 유찬은 진준에 의해 살해되었고, 진준은 황족을 학살했다. 유요와 석륵은 진준을 격파했고 유요가 황제가 되었지만, 유요와 석륵은 이후 불화하여 석륵이 독립을 선언하고 후조를 건국했다. 유총이 건설한 제국은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7월, 북지군에서의 기근이 악화되어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평양에서도 기근이 악화되어, 10명 중 5~6명이 유망하거나 아사했다. 석륵은 석월에게 기병 2만 명을 주어 병주에 주둔하게 하여 유민을 수습하게 했다. 유총은 이를 책망했지만, 석륵은 무시하고 몰래 조억과 결탁했다.
유총이 장씨의 시녀인 번씨를 상황으로 세웠다. 이때, 황후는 이미 4명이나 있었고, 황후의 새서(璽綬)를 받은 자도 7명이나 있었다. 조정 안팎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각지에서 뇌물이 횡행했으며, 군대가 밖으로 나가 활동하고 국내는 기근과 역병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궁에 대한 상은 1천 만에 달했다.
하동에서도 황충 피해가 대발생하고, 근준이 부하들을 이끌고 이에 대처했다. 황충을 잡아 땅에 묻었지만, 그 울음소리가 십 리가 넘는 먼 곳까지 들렸고, 황충은 다시 흙 속에서 뛰쳐나와 콩을 갉아먹었다. 이로 인해 평양의 기근은 더욱 악화되었다.
9월, 유총은 여러 신하들을 불러 광극전에서 연회를 열고, 유애를 알현하게 했지만, 유애가 몹시 초췌해져 울면서 사죄하는 모습을 보고 유총도 눈물을 흘렸다.
317년 1월, 한(漢) 군이 장안에서 동쪽으로 군사를 보내 홍농군을 공격했다. 2월, 유총은 사촌 동생 유창에게 진(晉)의 형양군 태수 이거를 공격하게 했다. 이거는 거짓으로 유창에게 항복하여 기뻐한 유창은 연회를 열었다. 여러 장수들이 취해 쓰러졌을 때, 이거가 야습을 가해 한 군은 대패했다.
3월, 유찬은 왕평을 통해 유예에게 도성에 이변이 일어나려 하니 무기를 모아 대비하라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유예는 이를 믿고 궁전에 무기를 모으게 했다. 유찬은 이를 유총에게 알렸고, 유총은 유찬에게 동궁을 포위하게 했다. 유찬은 왕침, 근준에게 명하여 저족, 강족 추장 10여 명을 잡아 육형을 가하고, 유예와 함께 반역을 꾀했다고 거짓 자백을 시켰다. 유예와 친하게 지내던 대신 및 관속 수십 명이 주살되었다. 4월, 유예는 폐위되어 북부왕으로 강등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찬의 명령으로 살해되었다.
이 사건으로 동궁 사위의 병사 1만 5000여 명을 생매장하여 죽였고, 이 때문에 평양의 거리는 텅 비게 되었다. 또한, 저족, 강족의 10만 부족이 반란을 일으켜, 근준을 행거기대장군으로 삼아 이를 토벌하게 했다. 유총의 영내에서 황충이 대발생하여, 평양과 기주, 옹주에서 가장 심했다. 근준이 이를 처리했지만, 그 와중에 두 아들이 갑자기 사망했다.
7월, 사형 이하에게 대사령을 시행하고, 유찬을 황태자로 세우고, 상국, 대선우에 임명하여, 이전과 같이 조정을 통치하게 했다. 8월, 조고(趙固)가 진(晉)의 위장군 화회를 임영(臨潁)에서 격파하고 살해했다. 하지만 장사(長史)인 주진과 대립하여 기병 1,000명을 이끌고 진(晉)에 항복하여, 이구(李矩)의 명령에 따라 낙양을 지켰다.
10월, 상림(上林)에서 사냥을 하였고, 민제(愍帝)를 차기장군(車騎將軍)으로 임명하여 구경거리로 만들었다. 유찬은 유총에게 민제를 제거하여 백성들의 희망을 끊어야 한다고 진언했다. 12월, 광극전(光極殿)에 군신을 모아 연회를 열고, 민제(愍帝)에게 술 시중을 들게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진(晉)의 구신(舊臣)들이 통곡했으며, 신빈이 민제(愍帝)를 껴안자 유총(劉聡)은 분노하여 신빈을 처형했다.
조고(趙固)와 곽묵(郭黙)이 하동군을 공격하자, 백성들이 도주했다. 유찬(劉粲)과 유아(劉雅) 등은 보병과 기병 10만 명을 이끌고 소평진(小平津)으로 가자, 조고(趙固)는 "유찬(劉粲)을 사로잡아 천자를 되찾겠다"라고 선언했고, 유총(劉聡)은 이를 알고 불쾌하게 여겼다. 유찬(劉粲)이 유총(劉聡)에게 상소를 올려 사마업(司馬鄴)을 처형할 것을 건의했고 유총은 이를 받아들였다. 유찬(劉粲) 등은 조고(趙固)가 지키는 낙양을 공격했고, 조고(趙固)는 양성산(陽城山)으로 물러났다.
5. 1. 영가의 난 (311년)
310년 유연이 죽고 장남 유화가 제위를 물려받았으나, 유총이 반란을 일으켜 유화를 죽이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유총은 석륵, 왕미를 파견하여 화북 일대를 초토화시켜 낙양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취하는 한편 유요, 호연안(呼延晏) 등에게 낙양을 직접 압박하게 하였다.[8]311년 4월, 유총은 서진의 수도 낙양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서진 회제를 사로잡았다. 이 사건을 영가의 난이라 부른다. 낙양 함락 이후 유총은 유요에게 장안에 세워진 서진 민제의 임시정부를 공격하게 하였으며, 석륵, 왕미 등은 화북 일대를 정복하였다.[8]
5. 2. 장안 함락 (316년)
311년 낙양을 함락시킨 유총은 유요에게 장안에 세워진 민제의 임시정부를 공격하게 하였다.[8] 316년 8월, 안정군 태수 초숭 등은 장안 구원에 나섰고, 산기상시 화집은 경조를 비롯한 4개 군의 병력을 감독하여 파상에 주둔했지만, 한군을 두려워하여 전진을 멈췄다. 상국 사마보는 호숭에게 병사를 주어 장안으로 향하게 하여, 령대에서 유요를 격파했다. 그러나 호숭은 국윤 및 색침과 대립하고 있었고, 그들의 세력이 다시 강성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공격을 멈추고 괴리로 돌아갔다. 유요는 장안 외성을 함락시키고, 국윤과 색침은 소성으로 철수했다. 장안성은 안팎이 차단되고 식량이 떨어져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8]북지군의 기근이 악화되어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유요가 북지군 태수 국창을 포위하자, 흉추 군수(羌酋軍須)는 군량을 국창에게 공급했지만, 유아가 이를 격파했다. 국윤은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이끌고 북지로 향했지만, 유요에게 격파당했다. 유요가 추격하자, 반석곡에서 다시 격파당했고, 국윤은 영무로 철수했으며, 유요는 북지를 점령했다. 북지를 점령한 유요는 경양으로 진격했고, 위북의 여러 성들이 궤멸되었다. 유요는 건위장군 노충, 산기상시 양위, 소부 황보양을 포로로 잡았다.[8]
316년 11월, 민제는 시중 송창을 보내 유요에게 항복 의사를 전달했다. 민제는 양차를 타고 항복의 예를 갖춰 출항했다. 민제가 평양으로 오자, 유총은 광록대부로 임명하고 회안후에 봉했다. 유요에게는 황월을 하사하고 대도독·섬서제군사·태재로 임명했으며 진왕에 봉했다.[8]
참조
[1]
웹사이트
中央研究院
http://www.sinica.ed[...]
[2]
서적
Zizhi Tongjian
[3]
웹사이트
中央研究院
http://www.sinica.ed[...]
[4]
서적
Zizhi Tongjian
[5]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https://archive.org/[...]
Rutgers University Press
[6]
서적
晋書
[7]
문서
[8]
위키문헌
진서 102권
晉書/卷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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